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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2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전투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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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2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전투 1)

두바퀴인생 2010. 3. 5. 06:09

 

 

 

중국의 역사 22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전투 1)

 

 

 

형주 전투 192년 손견이 형주의 유표를 공격하면서 일어난 전투다. 손견은 초기에 유표를 무찌르고 승기를 잡았으나 적들의 기습 공격으로 전사하면서 퇴각했다.

 

발해 태수 원소는 넓은 기주를 차지하고 세력을 넓힌다. 이에 원소의 동생 원술이 말 1000필을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하고 유표에게 양식 20만 섬을 달라고 했으나 역시 거절당한다.

 

결국 원술은 장사 태수 손견에게 편지를 보내 유표를 함께 치자고 제안하고 손견은 유표를 공격해 강동의 떨어진 위신을 되찾자고 군사를 일으킨다. 주위에서 손견의 동생 손정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말리지만 손견은 군사를 일으키고 아들 손책과 함께 간다.

 

전투 과정

손견이 쳐들어오자 형주 자사 유표는 부하 장수 황조를 보내 장강을 건너는 손견의 수군을 화살로 공격한다. 이렇게 3일 동안 계속 화살 공격을 하자 황조군의 화살이 떨어지자 손견은 받은 화살을 다시 공격하여 쉽게 장강에 상륙한다.

 

이에 황조 등성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손견에 맞서고 황조의 부하 장수 장호 진생이 맞서지만 장호는 손견의 부하 장수 한당에게 목이 베이고 진생은 손견의 아들 손책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결국 황조는 크게 패해 후퇴하고 유표는 부하 채모를 보내 맞서게 했으나 채모 역시 군사의 반을 잃고 양양성으로 후퇴한다. 하지만 승리가 눈 앞에 보이는 사이에 손견 진영의 대장기가 꺾이자 부하 장수들이 불길한 기운으로 군사를 물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손견을 이를 거절하고 계속 공격하기를 결정한다. 한편 유표의 모사 괴량은 천문을 보아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수명을 다 할 것을 알고 부하 장수 여공을 보내 원소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간다. 결국 손견은 여공의 군사들을 쫓아가다가 여공의 기습 공격으로 전사한다.

 

결과 및 영향

다음 날 손견의 진영에서는 손견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이에 손견의 아들 손책은 손견의 시신과 사로잡은 적장 황조를 교환하고, 군사를 물려 강동으로 돌아가 원술에게 의탁했다. 유표는 형북 일대를 보전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장사태수 장선과의 싸움에서 이겨 형남까지 진출, '군대가 십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후에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해 세력이 고스란히 흡수되고 만다.

 

한편 손책은 곡아 전투에서 승리해 강동을 제압하였다. 그 뒤 손책이 요절하자 동생 손권이 뒤를 이어 주유, 여몽 등의 보좌를 받아 형주를 손에 넣었던 조조를 적벽에서 격파하고 연이어 강릉에 주둔하며 북진을 도모하던 유비의 장수 관우를 참해 누대의 숙원이었던 형주 평정을 성공시킨다. 그러나 조조의 위나라와 뒤를 이은 사마염의 서진 정권은 삼국이 통일되기 전까지 양양 등 형주의 일부 군현을 계속 점거했다.

 

 

반하 전투 192년 기주에서 원소 공손찬이 싸운 전투다. 여기서 대승리를 거둔 원소는 이후 거듭 공손찬을 격파하여 중국의 최대 강자로 부상한다.

 

후한말, 한복 동탁에게서 기주목으로 임명되어 그와 대립하던 발해태수 원소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원소가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보자 원소의 거병을 승인해 반동탁연합군을 창설하게 한다. 하지만 자신의 보신에만 관심이 있던 한복은 동탁과 원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득실을 따졌고 심지어는 원소의 군량 수송을 차단하여 원소를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191년 연합군이 해체되자 한복을 증오하고 있던 원소는 공손찬을 부추겨 기주를 공격하도록 한다. 공손찬이 기주에 들어와 한복을 격파하자 지휘력을 잃은 한복은 영내의 반란과 인접세력의 침공에 시달리는데, 이때 원소가 이들을 격파,병합하여 민심을 얻고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목의 지위를 양도받는다. 한편 공손찬은 군대를 광종에 주둔시키는 한편 사촌동생 공손월을 원소와 적대하고 있던 원술에게 보내 그를 지원하게 하나 공손월은 원소군과의 교전에서 패하고 화살에 맞아 죽는다. 이에 공손찬은 군사를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는데, 그 강력한 위세는 하북에 진동하였고 이 소문을 들은 기주의 성들 중에는 호응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 역시 군사를 일으켜 반하의 상류에서 공손찬과 몸소 교전한다.

 

전투 과정

공손찬은 3만의 군사로 방진을 치고 기병 1만을 좌우에 배치하여 주력으로 삼았다. 한편 원소 역시 진형을 갖추고 국의와 정병 8백명을 선봉으로 삼았으며 1천의 노병을 그 뒤에 대기시켰는데. 원소의 군세가 적은 것을 본 공손찬은 이를 깔보고 기병을 풀어 공격했으나 기병대의 전술에 능숙했던 국의가 군사들을 방패 아래 엎드려 있게 하다가 공손찬의 기병대가 사정거리에 도달하자 일제히 궁노를 발사하게 해 공손찬의 기병대가 크게 무너졌고 공손찬이 임명한 기주자사 엄강이 전사했다. 기병대가 패퇴하자 공손찬은 군세를 철수시켰으나 원소가 이를 뒤쫓자 계교에서 다시 군사를 거두어 싸웠다. 하지만 여기서 공손찬은 대패하였고 공손찬이 주둔하고 있던 본영이 점령되자 남은 무리들도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한편 후방에 있던 공손찬이 완전히 격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방심하여 안장에서 내려 말을 쉬게 하며 단지 수십명 남짓한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달아나던 공손찬의 2천 기병대에게 포위당한다. 별가 전풍은 원소를 끼고 도망쳐 원소를 담장 틈속에 숨기려 했으나, 원소는 분개해 쓰고 있던 모자를 집어던지며 "장부는 마땅히 앞에서 싸우다 죽어야 하거늘 어찌 담장 사이로 도망가겠는가!" 라며 기골에 찬 대사를 토해내며 앞장서 싸우자 모두가 분발하여 싸웠다. 지휘하는 자가 원소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적들은 그 기세에 눌려 차츰 밀려나다가 마침 국의가 와서 원소를 돕자 마침내 궤멸당했다.

 

연주 전투 191년에서 192년까지 조조 연주에서 황건적 흑산적, 흉노, 원술 등과 싸운 전투로 모두 승리해 연주를 차지해 기초를 다졌다.

 

완성 전투 196년 조조 장수가 싸운 전투로 조조는 장수에 맞서 완성 남양성에서 대공격을 감행했으나 끝내 장수를 무찌르지 못하고 최초로 패배했다.

 

완성 전투
날짜 196년
장소 한나라 형주 완성
결과 조조의 최초 패배, 호위대장 전위 전사
교전국
조조 장수
지휘관
조조
전위
우금
조앙
조안민
장수
가후
호거아
병력
15만 명 불명
피해 상황
전위, 조앙, 조안민 전사 불명

 

완성 전투

조조 유비와 함께 여포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형주 완성에서 장제의 조카 장수가 형주 자사 유표와 결탁하여 궁궐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자 군사를 돌려 15만 대군을 이끌고 장수를 치기 위해 출병한다. 장수는 모사 가후의 의견으로 전투 한번 없이 항복하고 장수는 조조를 위해 매일같이 완성에서 잔치를 열어 대접한다. 그러나 조조가 장수의 숙부 장제의 아내 추씨를 데려가자 장수는 분노하여 조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장수는 가후와 함께 계책을 세우고 부하 호거아를 시켜 조조의 호위대장 전위의 무기인 쌍철극을 빼앗는다. 그리고 밤에 대공격을 감행해 조조의 영채를 기습 공격한다. 이에 전위가 조조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조조는 그사이에 조카 조안민 등과 함께 도망친다. 전위는 조조를 끝까지 지키다가 전사하고 조조는 탈출 과정에서 조카 조안민과 장남 조앙까지 잃고 만다. 도망친 조조는 부하 하후돈 등과 함께 합류하고 장수는 추격대를 보내 조조를 뒤쫓는다. 조조는 후방을 지키던 우금이 배반하여 청주 군사들을 죽였다는 보고를 받지만 오히려 우금의 활약으로 조조는 장수의 추격대를 무찌르고 위기에서 벗어나 장수는 다시 유표에게로 도망친다. 다음날 조조는 부하 전위의 죽음을 기리고 군사들에게 공과 잘못에 따라 상과 벌을 분명히 한후, 허도로 돌아간다.

 

남양성 전투
날짜 198년
장소 한나라 형주 남양성
결과 조조의 패배
교전국
조조 장수
지휘관
조조
곽가
우금
허저
장수
가후
유표
병력
10만 명 1만 명
피해 상황
5만 명 전사 불명

 

남양성 전투

장수는 완성 전투의 승리 후에도 유표의 보호를 받으며 남양성을 점령한다. 장수는 조조 수춘 전투에서 원술과 싸우고 있을 때 형주 자사 유표와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조조 형주를 침입해 장수의 남양성을 포위한다. 장수는 첫 전투에서 패배해 성 안으로 들어가고 조조는 성의 허점을 찾다가 성의 서북쪽에 짚단을 쌓아 공격하며 장수의 군사들을 서북쪽으로 유인한 뒤 성벽이 낮은 동남쪽을 몰래 공격하려는 계책을 세운다. 그러나 조조의 계획은 장수의 모사 가후에 의해 발각되고 그날 밤 조조군은 장수의 군사들이 매복해 있는 동남쪽 성벽을 넘다가 장수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5만 명의 전사자를 낸다. 장수는 형주 자사 유표와 합류해 조조를 추격하고 조조는 강동 손책을 끌어들려 유표를 견제하려하지만 유표의 모사 괴월에 의해 무산되고 유표는 장수와 함께 조조군을 앞뒤로 포위한다. 그러나 조조군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장수와 유표는 패해 다시 후퇴한다. 승기를 잡은 조조는 장수와 유표의 뿌리를 뽑으려 하지만 하북 원소가 군사를 일으켜 허도로 향하고 있다는 순욱의 전갈로 허도로 돌아가기 위해 후퇴한다. 장수는 이틈을 노려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공격하지만 크게 패한다. 가후는 계책을 써서 다시 조조를 추격해 큰 승리를 거둔다.

 

결과

조조는 완성 전투와 남양성 전투에서 크게 패해 장수를 무찌르기는 못했으나 200년 조조에게 가후와 함께 항복하여 조조의 사람이 되었다.

 

수춘 전투 198년 군벌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고 조조, 유비, 손책, 여포 등 4군벌 연합군과 싸워 크게 패한 전투이다.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형주 남양 태수 원술 여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한다. 원술은 옥새가 있음을 이용해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원술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부족한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진류로 향한다. 원술과 대치한 여포는 부하 진등을 시켜 원술의 부하 한섬 양봉을 꾀어 내분이 일어나게 하고 안과 밖으로 공격을 받은 원술군은 크게 패한다. 그리고 후퇴하던 중 유비군의 공격을 받아 사기가 떨어진다. 그 사이에 조조, 여포, 손책, 유비가 수춘성을 공격해 협공하고 조조군은 첫 싸움에서 원술군을 크게 무찌른다. 조조, 여포, 유비가 각각 북문, 동문, 남문을 공격하고 손책이 강기슭을 통해 서문을 공격한다. 원술은 부하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내주고 다른 곳으로 피한다. 원술군은 한 달 동안 꼼짝 않고 있으면서 조조군에 내분을 일으켜 무찌를 계획을 세웠으나 조조군은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원술군을 무찌르고 수춘성을 함락시킨다.

 

수춘 전투
날짜 198년
장소 한나라 형주 수춘
결과 조조 연합군의 승리, 원술의 사망
이유 천하의 흐름을 거역하며 황제 자리에 오른 원술을 처단하기 위해서
교전국
조조 연합군 원술
지휘관
조조
유비
손책
여포
원술
병력
20만 명 40만 명
피해 상황
원술

원술의 죽음

수춘성에서 다른 곳으로 피신했던 원술은 화남 지방에 황제 행세를 하면서 그곳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며 궁궐을 짓고 화남 지방은 기근까지 겹쳐 황폐해지고 있었다. 199년 원술은 온갖 금은보화를 가지고 형 원소에게 가기로 한다. 이때 유비가 서주에서 원술을 막아 유인해 무찌르고 원술군은 원술의 부하 기령 장비에게 단칼에 베인다. 크게 패한 원술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가다가 옛날 도망쳐 산적이 된 부하 뇌박 진란의 기습을 받아 또다시 도망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대부분 노약자 뿐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목숨을 건진 원술은 한 민가에서 결국 병사하고 만다.


 

하비 전투 198년 서주 하비를 두고 조조 유비 여포와 싸운 전투로 조조 유비가 이 전투에서 승리해 다시 서주를 되찾고 여포는 처형된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묘사

당시 유비 조조에게 의탁하여 예주 자사(목사)가 되어 예주 소패에서 여포를 물리치기 위한 군사를 기르고 있었다. 조조는 유비에게 여포를 치라는 명령을 내리고 조조에게 답신을 보낸다. 그러나 조조에게 보내는 유비의 답신은 여포의 모사 진궁에 의해 발각되고 여포는 분노해 군사를 일으킨다.

 

소패성 전투

여포는 먼저 태산의 도적 떼를 끌어들여 산동 연주의 여러 군을 빼앗고 여포는 부하 송헌 위속을 시켜 여남 영천을 치고 장료 고순을 시켜 유비는 있는 소패성을 포위한다. 이에 관우는 의리를 지키는 장수 장료를 설득해 물러나게 한다. 조조 유비의 급한 요청을 받고 부하 하후돈, 하후연, 여건, 이전에게 5만 군사를 주어. 소패성으로 가게 한다. 하후돈은 여포의 부하 고순과 싸우다가 여포의 부하 조성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애꾸눈이 된다. 그러나 하후돈은 용맹을 발휘해 화살을 씹어 먹고 조성을 베어버리지만 하후돈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여포에게 패하고 소패성은 함락된다.

 

하비 전투
날짜 198년
장소 한나라 서주, 소패, 소관, 하비 일대
결과 조조 유비의 승리, 여포가 처형됨
교전국
조조
유비
여포
지휘관
조조
하후돈
하후연
여건
이전
유비
관우
장비
진등
진규
미축
여포
고순
진궁
장료
조성
송헌
위속
후성
병력
조조, 유비 연합군 20만 명 수만 명

 

소패, 소관, 서주 함락

여포 조인 소패성을 공격하자 소관 진등에게, 서주 진규에게, 소패 장료 고순에게 맡긴다. 하지만 여포가 없는 동안 조조와 내통을 하던 진등 미축이 꾀를 내어 소관성을 지키던 태산 도적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거짓 보고를 한다. 여포는 바로 소관성을 공격해 태산 도적들을 죽이고 소관성은 진등에게 함락된다. 여포는 진규가 지키던 서주성으로 가지만 진규는 이미 미축에게 죽임을 당하고 미축은 여포에게 활을 쏜다. 소패를 지키던 장료 고순까지 여포가 포위되었다는 진등의 거짓 보고를 받고 여포에게로 가고 소패성까지 진등에게 함락된다. 결국 여포는 진궁과 길을 뚫고 하비성으로 후퇴한다.

 

하비성 전투

조조와 유비는 하비성으로 후퇴한 여포를 쫓기 위해 하비성 앞에 진채를 세운다. 진궁이 여포에게 보병을 이끌고 주둔해 조조군이 허도로 가는 것을 막으려는 계책을 내놓으나 여포의 아내 엄씨의 반대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진궁은 허사 왕해의 의견으로 회남의 원술에게 도움을 청한다. 원술은 여포의 딸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학맹을 사신을 보내지만 학맹 장비에게 잡히고 일은 발각된다. 여포는 직접 포위망을 뚫고 원술에게로 가려고 하지만 조조의 대공격으로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간다. 조조는 순욱 곽가의 의견으로 기수와 사수의 물길을 터서 돌려놓아 하비성을 물바다로 만든다. 여포는 금주령을 내리지만 부하 후성이 술을 마시자 곤장을 때리고 불만을 품은 후성은 송헌, 위속과 음모를 꾸민다. 후성은 새벽에 적토마를 훔쳐 조조에게로 투항하고 하비성의 전투가 새벽부터 한낮까지 계속된다. 결국 송헌 위속은 여포가 자는 사이에 여포를 잡아 조조에게 바치고 곧 여포의 부하 진궁, 고순, 장료 등이 잡혀온다. 조조는 먼저 고순을 처형하고 진궁을 살려두려 하지만 진궁은 스스로 죽음을 택해 처형된다. 그리고 여포 역시 사형이 내려져 교수형으로 처형되고 이 중 유일하게 장료가 살아남아 조조의 부하가 된다.

 

 

 

관도 대전(官渡大戰)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초기 관도(官渡 : 현재의 하남성 중모현 근처)에서 조조(曹操)와 원소(袁紹)가 벌인 큰 전투이다. 적벽 대전 이릉 대전과 함께 삼국시대의 흐름을 결정지었던 중요한 전투이다.

 

 

관도대전
(후한 말 삼국시대 초기의 일부)
Shao cao 195-200.png
붉은색이 원소의 세력권, 푸른색이 조조의 세력권이다.
날짜 후한 헌제 5년 200년
장소 화북의 관도, 백마(현재 하남성 중모)
결과 조조의 승리
교전국
조조 원소
지휘관
조조
서황
순욱
순유
악진
우금
장료
원소
고람
곽도
문추
순우경
심배
안량
여위황
왕마
장합
저수
조예
하무
한거자
한맹
허유
휴원진
병력
10,000(?) 100,000
피해 상황
불명 70,000

 

좁은 의미로는 관도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볼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원소와 조조의 일련의 항쟁을 합친 큰 전투였다. 백마 전투를 전초전으로 시작하여 원소의 곁에 있던 유비는 여남(汝南)에서 교란작전을 일으키는 등 중원 일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당시 후한 황제는 명목상의 존재였고, 중원 각지는 군웅이 할거하는 전란의 시대였다. 서서히 군웅 중에서도 승자만이 살아남게 되었으니, 그중 가장 강력한 자들이 조조 원소였다. 이 두사람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이기도 했다.

 

조조는 환관 가문 출신이지만, 부친 조숭(曹嵩)이 삼공(三公)중 하나인 태위(太尉)까지 올랐었고, 조조 자신도 군웅할거 중기에 두각을 나타내 헌제(献帝)를 손안에 넣어 도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포(呂布), 원술(袁術), 장수 등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하남(河南)에서 강소성(江蘇省) 장강(長江)이북에 걸친 지역을 지배했다.

 

한편 원소는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불리는 명문 출생으로 비록 노비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 청류파의 사상,정치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군벌화하여 한복(韓馥), 공손찬(公孫瓚), 장연(張燕), 공융(孔融) 등의 군벌들을 격파,병합해 청(靑), 기(冀), 유(幽), 병(幷)의 4주(州 : 현재의 하북, 산서, 산동)를 지배했으며가장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서 최고의 위세를 떨쳤다.

 

처음에 조조는 원소의 지원으로 인해 세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줄곧 조조는 원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헌제 옹립을 계기로 완전히 원소와 결별했고 대립이 깊어져갔으며,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한 뒤 정병 10만을 선발하여 조조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참모 전풍(田豊)과 원소군의 2인자 격에 위치에 있던 저수(沮授) 등은 아군이 공손찬과 싸우느라 국력이 피폐해져 있고, 천자를 끼고 잇는 군대를 치는 것은 의로움에 위배된다고 하여 원소의 출정을 만류했으나 당시 원소에게 크게 중용되고 있던 곽도(郭圖)등은 객관적으로 조조의 국력을 하북의 강역을 차지하고 있는 아군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며, 황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칼날이 역신 조조만을 향하는 것이므로 지지를 받을지언정 의로움에 위배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박했고 오히려 저수의 위세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탄핵했다. 원소는 이를 받아들여서 강대했던 저수의 권한을 삼분하고 저수와 곽도, 순우경(淳于瓊)이 각각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199년 유비가 서주(徐州)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소와 손을 잡았다. 이에 조조는 직접 출진해 유비를 격파하고 패배한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으며, 관우는 조조의 포로가 되어 조조의 객장으로 지내게 되었다. 삼국지 원소전에 의하면 이때 원소의 참모 전풍은 조조가 유비에게 신경이 쏠린 틈을 타 배후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원소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지 무제기와 곽가전에 의하면 원소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의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다만 우금전에 의하면 원소는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는 틈을 타 연주를 공격했다. 당시 우금은 조조를 대신해 주요 거점이던 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 사이에 원소군이 남하해 연진을 공격하자 굳게 수비해 이를 막아냈으며 악진 등과 함께 황하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오히려 반격을 가해 급(汲) · 획가(獲嘉) 2개 현에 주둔하던 원소군의 수비초소 30여 개를 불태우며 하무(何茂) · 왕마(王摩) 등을 항복시켰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한결같이 원소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우금전에서도 이에 대한 원소의 적극적인 응전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봤을때 당시 원소의 움직임은 견제 수준에서 그쳤던 것 같다.

 

백마 전투

원소는 격문을 돌려 조조의 부정을 성토했으며 10만의 대군을 편성해 조조와의 결전을 감행한다. 이때 전풍은 “조조는 유비를 격파해 허(許, 허창(許昌)을 말함. 조조의 본거지로서 헌제의 거주지)는 비워있지 않습니다. 지구전으로 끌고가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본거지를 지키면서 조조의 후방을 교란한다면 3년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원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풍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며 억지로 원소를 막으려고 하다가 대노한 원소에게 투옥되었다.

 

다음해 2월. 원소는 곽도와 순우경, 안량(顔良)을 파견해 백마(白馬 : 현재 황하 남쪽 강변)에 포진한 조조군의 유연(劉延)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원소군의 참모 저수(沮授)는 안량을 기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간언했으나, 원소는 이를 듣지 않았다.

 

조조 측은 순유(荀攸)의 진언에 따라 연진(延津)에 주둔하며 미끼 및 견제로서 원소군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후,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안량을 공격해 격파했으며, 관우는 적 진영에 파고들어가 단칼에 안량을 베고 수급을 얻었다. 이에 곽도와 순우경 등은 백마의 포위를 풀었고 이 사이에 조조는 백마의 군대와 백성들을 모아 철수한다.

 

하지만 원소는 결과적으로 백마,연진에 이르는 주요 도하 거점을 확보했고, 조조는 더욱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원소는 문추(文醜)를 보내 이를 추격하게 했으나, 조조는 다시 순유의 진언에 따라 수송대를 미끼로 사용해 문추군의 대열을 어지럽히게 한 뒤에 서황 등이 습격해 문추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죽인 것으로 나온다.

 

관도 대전

이 시점에서 양군은 일시적으로 태세를 정비한다. 조조군은 관도로 물러났고, 원소 진영에서는 저수가 “북쪽(원소 진영)은 숫자가 많으나, 용맹함에는 남쪽(조조 진영)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군량에 대해선 남쪽은 적고, 북쪽은 풍족합니다. 남쪽은 속전속결을 바라니 북쪽은 지구전이 유리합니다.”라고 말하며 또다시 지구전을 간언했으나 원소는 이를 듣지 않았다. 원소는 직접 군을 움직여 양무(陽武)까지 진군했다.(여기서 곽도,순우경 등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저수는 본대를 움직이지 조조를 치지 말고 연진에 본영을 두면서 별군을 보내 관도를 칠 것을 진언했다고 하나 원소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원소는 조조군을 공격해 동서 수십리에 걸쳐 진을 구축하고 서서히 전진하는 전술로 조조의 진영을 압박했다. 조조도 똑같이 수십리에 걸쳐 진영을 구축하며 전진해 이에 대응했다. 마침내 양군이 회전을 벌였는데, 조조군이 패주하여 요새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원소는 더욱 진군하여 관도까지 조조군을 몰아붙였고, 토산을 쌓거나 지하도를 파서 성벽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조조도 내부에 똑같은 것을 만들어 대응했다. 원소는 망루를 만들어 토산에서 조조 진영 안으로 화살을 쏘았다. 조조군은 이 공격에 크게 고전하였으나, 우금이 토산의 지휘를 맡아 분전하여 조조군의 전의를 불태웠다. 또한 조조는 발석차를 만들어 망루에 대응했다.

 

전황은 지구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조조군은 크게 고전하고 있었고, 조조 진영의 식량 역시 나날이 줄어들어갔다. 걱정이 된 조조는 본거지를 지키던 순욱(荀彧)에게 편지를 보내 철수에 대한 상담을 했으나, 순욱은 철수에 대한 상담 대신 예상 밖의 일을 예측하고 기회를 노리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다고 조조를 격려했다.

 

한편 남쪽 여남에서 조조의 형세가 나빠진 것을 본 유벽(劉辟)이 원소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고, 원소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 유비를 파견했다. 조조는 조인(曹仁)을 파견해 이들을 격파했다. 패배한 유비는 유표곁으로 도망쳤다. 또한 조조는 순유의 진언에 따라 서황(徐晃)과 사환(史渙)에게 명령해 원소군의 수송대를 공격해 수천대의 곡물수송차를 불태웠다.

 

하지만 원소는 관도에 조조를 묶어둔 채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호응하는 반란을 유도했고, 조조군의 전황은 점차 절망적으로 악화되었다. 이 무렵 원소 진영의 허유(許攸)는 비리가 탄로나 가족들이 투옥당한 일이 있어다. 허유는 좁아진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원소에게 군사를 나눠 허도를 습격하자는 적극적인 헌책을 했으나 원소는 관도에서 조조를 포위해 사로잡는 것으로 완전히 결착이 날 것으로 여겼으므로 보아 거절하였다. 자신의 계책이 거절당한 데에 분노한 허유는 더이상 원소 밑에서 출세하기가 어렵다고 보아 조조 진영에 투항해 왔다. 허유는 순우경(淳于瓊)이 원소군의 병량을 운송하는 것과 순우경이 오소(烏巣)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곳을 기습할 것을 진언했다. 조조의 측근의 대부분은 이 허유의 발언을 의심했으나, 순유와 가후(賈詡)만이 이 의견을 지지했다. 이에 조조는 즉시 행동을 개시해 직접 보병과 경기병 5천을 이끌고 기습해 순우경의 군량 경비군을 섬멸하고 순우경을 참수했다.

한편, 오소에 있는 순우경이 습격당한 것을 알게 된 원소는 순우경이 지키는 오소가 쉽게 함락 당할 리 없다고 여겼으므로, 오히려 조조의 주력이 빠져나가 수비가 약해진 본진을 더욱 몰아붙여야 한다고 판단, 장합(張郃)과 고람(高覧)에게 주력군을 내어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게 했으며 순우경에게는 기병을 보내 지원했다. 하지만 결국 오소의 군대는 전멸당했고, 순우경군이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 진영은 책임 소재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다. 이에 장합이 배신하여 원소를 공격했으며 진영을 불태우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합의 공격을 받은 원소는 단지 800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갑옷도 입지 못한 채로 급히 도망쳤는데, 예상치 못한 아군의 습격에 더해 총사령관의 행방과 생사마저 알 수 없었던 나머지 군사들은 대혼란에 빠져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다.

 

원소의 패배를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은 부패한 관료 허유의 배신이었지만,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군의 수장 원소와, 근위세력인 곽도 등의 지나친 독선과 오만함이었으며 이로 인해 간부들의 배신이 속출한 것이다.

 

관도대전 후

원소의 패배를 본 기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패군을 수습해 귀환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군현을 공격해 모두 평정했다.(201년 4월.) 또한 원소는 전풍을 처형했는데, 이는 원소가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원소와 합류하지 못한 군사들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사로잡혔는데, 조조는 사로잡은 병사들도 모두 생매장해 죽였다고 한다. 이때 죽은 원소의 군사들은 7만, 혹은 8만이라고도 하는데, 조조군의 병력이 1만이었다고 기록된 것과 더불어 조조의 승리를 미화하기 위해 과장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조조 역시 원소의 침입으로 영내에 큰 피해를 입어 내부 정리로 시간을 써야 했으므로 관도전 이후 원소와 조조는 황하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켜 약 1년간을 대치했다.

 

202년 5월. 관도의 패전 이후 건강이 악화된 원소는 병이 들어 피를 토하며 죽었다. 원소의 아들 원상이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원소의 조카 원담은 원상에게 공공연히 불복하며 자신이 원소의 후계를 이어받을 것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원소의 세력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조조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기주를 공격했으나 원상에게 격파당하여 철수한다.(203년 4월)

하지만 원담이 원상을 공격함으로서 내전이 발발했고, 이 틈을 타 조조는 원담과 연합하고 다시 원상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로서 원소가 세운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조조는 뒤이어 원담과 싸워 그를 죽이고 기주를 평정했다.(205년 1월) 이로서 조조는 당대의 최대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의문점

관도의 병력에 대해선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寿)가 쓴 본문부분에는 원소군 10여만, 조조군 1만에 불과하다고 적었으나, 이것에 대해 배송지(裴松之)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로써는

  1. 조조가 세력을 일으켰을 때 5천의 병사를 갖고 있었고, 그후 황건적의 잔당 30만을 항복시키고, 기타 수많은 세력을 병합하였다. 그런데도 겨우 1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적다고 생각된다.
  2. 원소는 수십 리에 걸쳐 둔영을 연결하며 군대를 진군시켰는데, 조조가 원소군의 1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전력으로 이에 똑같이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3. 원소군이 조조군의 10배였다면 이치상 포위하고 출입을 단절해야 하나, 조조가 별군을 나눠 원소군을 공격할때도 이것이 저지된 일이 없었던 것은 원소의 군사수가 조조를 완전히 압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4. 원소군이 붕괴한 후 원소군의 병사 8만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고작 1만에 불과한 병사로 8만 명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진수가 왜 책에 그렇게 기술했냐는 것에 대해선 조조의 군략을 돋보이기 위해 과장해서 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지] 위서 국연(国淵)전에서는 도적의 무리를 격파한 상황에서 이것을 보고할 때 상주문에는 1을 10으로 과장해서 기재하는 것이 그 시대 통례라고 일지에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연의에서는 조조군 8만, 원소군 80만이라고 기술한것도 있다. 덧붙여서 이 전투 후에도 세력적으로는 여전히 원소가 우세했다. 원씨 가문의 멸망을 결정짓게 만든것은 그후 일어난 원소의 급사와 어린 후계자 원상의 집권으로 인한 내부분열 때문이었다.

기타

  •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도 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은 듯이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만 서술의 관점이 관도 대전이 아니라 유비가 원소에게서 벗어나는 일이나, 관우의 오관참장(五關斬將, 또는 오관육참(五關六斬)이나 단기주천리(單騎走千里))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읽고도 모르는 때가 많다.
  • 중국 삼국시대에서 중요한 전투이나 《삼국지연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서 적벽대전에 비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