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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3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전투 2) 본문
중국의 역사 23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전투 2)
삼국지의 주요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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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 · 동탁 토벌전 · 형주 전투 · 반하 전투 · 연주 전투 · 오군 공방전 · 완성 전투 · 수춘 전투 · 하비 전투 · 관도 대전 · 장판 전투 · 적벽 대전 · 남군 전투 · 형주 평정전 · 동관 전투 · 합비 전투 · 서촉 공방전 · 한중 공방전 · 번성 전투 · 이릉 대전 · 제갈량의 남정 · 제갈량의 북벌 · 가정 전투 · 석정 전투 · 강유의 북벌 · 위의 촉 정벌 · 진의 오 정벌 |
장판 전투(長坂戰鬪)는 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초기, 건안(建安) 13년(208년) 조조가 신야(新野)의 유비를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한 것을 말한다. 양군의 전투가 벌어져 일련의 이야기의 무대가 된 곳이 형주(荊州) 남군(南郡) 당양현(当陽県)의 장판(長坂; 혹은 장판파(長坂坡))였기에 장판파 전투, 혹은 당양 전투라고 부른다.
배경
건안 12년(207년) 후한의 승상인 조조는 화북을 평정하고, 형주지역으로 그 눈을 돌렸다. 당시 형주는 일대 세력을 구축한 형주자사 유표(劉表)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형주의 패권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조조는 형주지역에 자신의 일족이자 중신인 조홍을 대장으로 삼아 별동대를 파견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갑자기 유표가 병으로 쓰러졌다. 생전에 후계자 문제에 화근을 남긴 유표였기에 그의 사후 가문의 분열이 초래되었고, 조조에게 쉽게 형주가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유표 사망후 형주의 유력호족이었던 채씨가문의 수장인 채모(蔡瑁)를 필두로 형주 유력호족은 책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채모의 누이이며, 유표의 측실이었던 채씨부인과 공모하여 채부인의 아들이자 유표의 차남인 유종(劉琮)을 옹립하고 대신 유표의 유언으로 본래 가문을 상속받아야 했던 장남 유기(劉琦)를 버리고, 유종을 정식 후계자로 삼아 가문을 계승시켰다. 이때 형주의 내분을 지켜본 조조는 약 10~1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한다.
장판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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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조군 | 유비군 | ||
지휘관 | |||
조조 조순 |
유비 장비 조운 | ||
병력 | |||
10~15만 추격전에는 정예기병 5천 |
3000~5000 피난하는 백성 10여만 | ||
피해 상황 | |||
알 수 없음. | 알 수 없음. |
정사의 장판 전투
가문을 계승하여 조조에 대해 대항의사가 있었던 유종은 부선(傅巽)의 진언에 따라 조조가 신야에 도달하자 항복했다. 번성(樊城)에 주둔하던 유비는 양양(襄陽)으로 향했다. 제갈량(諸葛亮)은 유종을 공격하여 형주를 지배하자고 진언했으나, 유비는 유표의 은혜를 생각해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유비는 유종을 불렀으나 유종은 두려워하며 나가지 않았다. 유종의 측근 및 다수의 형주사람들은 유비에게 귀순했다. 10여만의 사람들이 유비를 따라 움직였기에 유비는 하루 10여리밖에는 전진하지 못했다. 여기서 유비는 관우(関羽)에게 수백척의 배에 그들의 일부를 탑승시켜 강릉(江陵)으로 보내었다.
조조는 유비가 군수물자가 풍부한 강릉을 점거하는걸 두려워해 수송부대를 후방에 배치하고 신속하게 양양을 점거했다. 조조는 조순(曹純), 문빙(文聘)에게 기병 5천을 주어 급히 유비를 추격하게 하였고, 이들은 당양현 장판에서 유비일행을 급습하게 된다.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과 함께 수십기의 병력만을 데리고 도주했다. 조운(趙雲)은 몸에 아두(阿斗;후에 유선(劉禅))을 안고, 감부인을 보호해 유비를 쫓았다.
장비(張飛)가 후군을 맡아 20여기를 이끌고 강을 방패삼아 다리를 끊어버리고 나는 장익덕이다.라고 외쳐 조조군은 누구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장비의 활약으로 유비는 도주에 성공했다.
유비는 한진(漢津)에서 관우가 이끌던 선단을 만났고, 또한 유표의 장남으로 강릉태수인 유기와 만나 함께 하구(夏口)에 도달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오나라에 파견해 손권(孫権)과 동맹을 맺었다. 손권은 수만명의 군대를 파견해 유비와 함께 적벽(赤壁)에서 조조군을 격퇴한다.
삼국지연의 속의 장판 전투
당시 선대 유표의 비호하에 있으면서 객장(客将)으로서 신야를 수비하던 유비는 유종의 항복으로 인해 최전선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이것을 호기로 본 조조군의 공격 앞에 앞뒤가 포위된 신야는 풍전등화가 같았다. 맹렬한 기세로 남하한 조조군의 선봉은 맹장 조인(曹仁)과 조홍(曹洪)이 맡아, 유비가 도망쳐 수비병도 산산히 흩어져 문자 그대로 텅빈 성이 된 신야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비휘하의 참모 제갈량의 계략이었다. 사전에 계책을 내어, 교묘하게 빈성으로 위장한 신야성으로 유인된 조조군은 성안의 복병과 만나 혼란에 빠져 보기좋게 격퇴되고, 기세가 둔화된 조조군은 일시 후퇴했다. 유비는 조조군을 일시에 후퇴시켰지만, 계속해 제2파, 제3파에 대해 신야의 수비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조조군의 재침입하기 전에 신야를 버리고 함께 유종령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가문을 계승한뒤 조조에게 대항할 의사가 있던 유종도 도망친 형 및 선대로부터 형주의 양도를 권고받았던 객장 유비의 동향을 생각하고, 조조에게 귀순할것을 주장한 공신 괴월 및 한숭, 채모에게 설득되었다. 결국 조조진영이 전선의 신야를 함락시키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형주의 패권은 조조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비는 먼저 신야 배후의 번성에 들어간 후, 유종의 거성이자 형주통치의 거점인 양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성 부근에 도달할 때쯤 성의 장수 장윤이 쏜 화살로 인해 유종이 입성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유종휘하의 장수이며 친유비파 무장인 위연이 문을 열려고 했기에 성안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다. 한편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한 것을 알게 된 유비는 진퇴양난에 빠져 제갈량과 막료들과 함께 대응을 모색해 제갈량의 진언에 의해 일단 강릉을 목표로 나가자고 결정하는 동시에 의동생 관우, 제갈량을 사자로 세워 먼저 강릉으로 파견해 유기의 협조를 구하게 된다.
한편 남하하는 유비일행은 신야에서부터 쫓아온 백성들과 합류했기에 진행이 매우 늦었다. 당양현 장판에 도착할 때쯤 쫓아오던 조조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조군의 선봉 문빙의 공격과 계속된 조조군의 공격을 유비의 의동생 장비가 후군이 되어 방어했으나, 조조군의 파상공격 앞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유비는 데려온 백성과 처자들을 버리고, 먼저 후퇴해 세력을 정비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흩어진 휘하장수는 몇 명인지 알 수 없고, 참모 미축 및 간옹도 행방이 묘연했다. 여기서 혼란 중에 유비의 아내 미부인과 감부인 및 유비의 아들 아두는 위나라 병사에게 생포되었으나, 이것을 본 유비휘하의 장수 조운이 말머리를 돌려 단기로 뛰어들어 부인들을 구출했다.
그후 위나라 장수 순우도에게 붙잡힌 미축과 감부인을 구출해 장비에게 보내고, 미부인과 아두를 찾기 위해 다시 조조군 진영에 또 뛰어들었다. 도중에 앞을 가로막는 수명의 조조군의 장수를 죽이면서 돌아다니다가 민가부근에 쓰러진 미부인을 발견했다. 미부인은 중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어 조운에게 아두를 맡기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조운은 우물을 메우고, 아두를 품에 안고, 다시 조조진영을 돌파해 유비 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유비는 이것을 보고 매우 감격했다. 그후 장판교에서 위세를 떨친 장비의 기백과 제갈량의 계략에 농락당한 조조군은 추격이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후에 장판파가 불탄것을 보고 유비군의 병력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도 이것으로 조조군을 일시적으로 묶어두는 데 성공한 유비일행은 먼저 보냈던 관우, 제갈량의 수군과 합류해 장강연안으로 남하했다. 겨우 호랑이입에서 탈출한 유비는 조조에게서 어렵게 도망쳐 하구에 도달한다. 여기서 유기와 만나고 강남의 영주 손권의 명령으로 형주의 내부사정을 탐색하러 온 노숙(魯粛)과 만나, 이후 사태는 유명한 적벽대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앞서 장판파에서 활약한 조운은 아문장군(牙門将軍)으로 승진해 이후에도 촉나라의 충신으로 활약하게 된다.
적벽 대전(赤壁大戰)은 중국의 삼국 시대,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에게 ,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대항하여 양자강 적벽에서 벌어진 큰 전투이다.
정사 《삼국지》에서의 적벽대전
정사 《삼국지》에서는 〈위서〉 무제기에서 적벽대전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매우 간략하게 적혀 있다.
- 원문 : 公至赤壁, 與備戰, 不利. 於是大疫, 吏士多死者, 乃引軍還. 備遂有荊州, 江南諸郡.
- 번역 :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상대편 쪽에는 좀 더 자세히 적혀 있다.
제갈량전 손권은 즉시 주유, 정보, 노숙등 수군 3만을 파견하여 제갈량을 따라 유비가 있는곳으로 가서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조조는 적벽에서 패하여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되돌아갔다.
선주전(유비전)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손을 잡았다. 손권은 주유, 정보등 수군 수만을 보내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움을 하여 크게 격파시키고 그의 군선을 불태웠다. 유비와 오의 군대는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나아가 추격했다. 그당시 역병이 발생하여 북쪽의 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았으므로 조조는 후퇴하였다.
오주전(손권전) 주유와 정보는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을 인솔하여 유비와 진격해 적벽에서 조조 군대를 크게 격파시켰다. 조조는 남아 있는 배에 불을 지르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사졸들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여 죽은자가 대부분이었다.
주유전 조조의 군대는 관리와 병사들이 모두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바람이 사나와 해안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저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 군사를 돌렸다.
적벽 대전 | |||
![]() 츠비 시 근교에 있는, ‘적벽(赤壁)’이란 글자가 새겨진 적벽의 한 바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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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조군 | 손권, 유비 동맹군 | ||
지휘관 | |||
조조 | 손권 주유 정보 유비 | ||
병력 | |||
150,000-250,000여명 추정 | 50,000-70,000여명 추정 | ||
피해 상황 | |||
기록 없음, 수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음 | 기록 없음 |
배경
207년 조조는 원소를 멸망시키면서 원씨 일가의 세력권이던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손에 넣고 오환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 하남, 하북의 패권을 확립했다. 승상에 오른 그는 통일의 의지를 표명했으며 다음 해 여름 본격적으로 남진을 개시했다. 갓 병사한 유표의 뒤를 이어 형주목으로 옹립된 유종은 조조에게 그대로 항복하고, 한수 북부를 포기한 유비는 강릉으로 향했으나 같이 따르던 피난민들의 속도가 느려 조조군의 기병에게 당양에서 따라잡혀 위기에 빠진 후 결국 한진에서 수로를 따라 하구에 주둔하는 유기에게로 피신했다. 여기에 유기와 손권은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손권은 주유, 노숙, 정보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 유기 등과 연합해 조조에게 맞서기로 결정내렸다. 손권의 선친인 손견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력이 있는 유표 경승의 가문에 대해 손권의 이러한 조치는 엄청나게 파격적이었다.
준비 과정
유종의 항복과 유비의 피신 이후 거의 형주 전역을 장악한 조조는 강릉에 주둔하며 수군이 채비를 갖추길 기다렸다. 조조는 이끌고 온 보병을 나누어 수병으로 재편성하였다. 조조 원정군의 대다수가 물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항복받은 후 새로 편입한 형주 수군과 함께 수전 훈련을 시키는 한편 적선보다 중량이 큰 함선을 대량으로 건조하도록 하였으며, 배멀미를 막기 위해 배들을 튼튼한 쇠고리로 종횡으로 연결해 흔들림을 낮추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에서 배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서 해결했다. 다만 이 점은 나중에 화공을 받았을 때 선단 전체가 불타버리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조조군은 익숙하지 못한 기후와 강릉에서 주둔지로 여겨지는 오림까지의 늪지대 등으로 인해 역병이 도는 등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는 데다, 접전한 결과, 손권의 수군이 강 위에서는 우세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우위를 확보할 때까지는 장강 북안에 포진한 채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않기로 했다.
유비는 유기에게 몸을 의탁한 이후 하구에서 좀 더 하류에 위치한 번구에 자리 잡았는데 전부터 유기가 매우 신뢰했으므로 매우 병약한 그에게서 군무를 사실상 위임 받았다. 이후 유비군은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손권과 동맹하고, 주유와 같이 적벽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손권은 주유를 도독, 정보를 부도독으로 임명해 군의 지휘를 일임하고, 자신은 시상에 주둔했다. 주유는 함대를 이끌고 하구를 지나 조조의 수군을 마주보는 형태로 장강 남안에 포진했다.조조의 수군은 소극적으로 일관했고 주유도 조조의 대함대를 단번에 격파할 만한 기회를 노리고 있어서 당분간 대규모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208년은 말에 접어들었다.
전투 경과
장강 남안에 주둔하던 주유는 거센 동남풍이 불자 화공을 실행에 옮겼다. 오서 주유전에 따르면,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牙旗 ; 장군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황개가 조조에게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또 빠른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전진했다. 조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영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 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조조도 동남풍을 감지하고 선단을 재배치하려고 했으나 배들이 집단적으로 묶여 있는 상황에선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작업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손권, 유비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조는 접근하는 적 선단을 향해 화살을 쏘도록 지시했으나 화살은 역풍으로 인해 제대로 날아가지 않았고 불붙은 손권군 배들은 순풍을 타고 난입하여 목적한 바 대로 조조군 선단에 불을 옮겨 붙였다. 서로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불타는 배들과 무사한 배들을 떼어놓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배에 있던 병사들은 수영할 줄 아는 자도 많지 않아 다들 작은 배에 옮겨 타 대피하려고 애썼다. 바람을 받는 쪽에 정박해 있던 조조군 함대는 빠르게 번져 오는 불과 손권군 함대의 공격으로 괴멸되었다. 손권, 유비 연합군은 완전히 흐트러진 조조군을 수륙 양면으로 협공했고 전의를 상실한 조조군 병사들은 패주하다가 거의 전멸했다.
정사에 따르면 황개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저 황개는 손씨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며, 언제나 장수를 맡았고, 받은 예우는 얇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천하가 이루어질 때에는 큰 형세가 있어야 하고, 강동의 육군과 산월 사람들로 중국의 백만 병력을 감당한다는 것이 중과부적임은 천하가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오)의 부장들도 어리석든 어질든 간에 모두 불가능한 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유와 노숙만이 편협되고 생각이 얕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귀순하여 의탁하려는 것은 사실을 헤아린 것입니다. 주유가 이끄는 것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제가 선봉이 된다면 정세를 보고 변화하며 목숨을 바쳐 가까이 있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특별히 만나 자세히 묻고 “너희들이 속일까 두렵다. 황개가 만일 신실하다면 당연히 앞뒤를 뛰어넘는 작위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직접 말했다.
전후
적벽의 대패로 원정을 계속하는 것이 곤란하게 된 조조는 형주를 떠나 허창으로 귀환하였다. 209년 주유와 유비는 조조령 형주를 공격해 조인이 지휘하는 형주 주둔군을 이기고 주유는 강릉에서 양양에 이르는 지역을, 유비는 장강 남부의 형주를 점령했다. 주유는 그 후 익주 원정을 추진했으나 210년 사망하여 계획이 백지화되고 유비가 다음 해인 211년 익주목 유장의 초청으로 익주로 진입하게 되었다. 손권은 주유에게 형주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대군으로 합비를 공격했으나 장료에게 패배하여 회남으로의 진출이 저지되었다. 조조는 쉽게 항복받은 옛 유표령 형주의 남반부를 잃고, 강하군 북부와 양양 이북만을 유지했다. 나머지 땅은 손권과 유비의 손에 넘어갔다. 《선주전》에서는 유비가 형주 남부의 장사·무릉·영릉·계양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자리에 인용된 《강표전》에서는 유비가 주유에게서 장강 남쪽의 땅을 빌렸으나 그 땅이 작아 손권에게서 형주의 몇 군을 빌렸다고 한다. 오의 시각을 대변하는 《강표전》의 기록에서와 같이, 손오의 사람들은 “형주는 원래 손권의 소유로 되었으며 유비에게는 임대한 것”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 오가 유비에게 빌려준 땅은 남군 강릉이며 형남 4군은 유비가 자력으로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손권은 형주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유비는 형주를 주려 하지 않아 둘 사이의 관계를 결국 파국으로 몰아가게 만든다. 유비는 장사, 계양, 영릉을 주어 형주의 영유권 분쟁을 일단락시키지만, 결국 손권은 육손과 여몽의 계략으로 강릉과 무릉마저 유비에게서 찾아내어, 삼국을 정립시키는 이릉 대전을 야기시켰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의 적벽대전
삼국지연의에서 보면 유표사후 채모가 유종을 유표의 후계자로 앉힌 후에 형주 전지역을 조조에게 주고 항복한다. 그러나 그때쯤에 조조는 신야에 머물고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신야,번성,양양성을 되찾고 유비를 저멀리 장판까지 쫒아낸다. 하지만 장비가 조조군을 막고 있을 무렵 유비는 백성을 데리고 도망가고 있었는데 조조가 물러가자 제갈량은 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시킨다. 손권이 결심하고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고 정보를 부도독에 삼고 노숙을 군사에삼고 조조와 전쟁을 일으킬 것을 결심한다.
적벽전초전으로 유.손 동맹군의 약 5만 군사와 조조군의 80만 대군이 맞붙었다. 물량적으로는 훨씬 조조군이 유리했으나 유.손 동맹군의 지략으로 조조군을 물리쳤다. 조조군이 군사를 이끌고 적벽 반대편에 대수채를 세우고 대치한 후 조조는 주유와 친했던 장간을 오에 보내서 주유를 설득 시키려고 하나 주유는 그것을 간파하고 일부러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태사자에게 전쟁이야기를 꺼내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자 장간은 항복이란 말도 못 꺼낸다.
허나 장간은 주유가 자고 있을 때 채모와 장윤이 주유와 내통하고 있는 가짜 편지를 발견 하고 그 편지를 가지고 도망간다. 그걸 본 조조가 노하자 채모와 장윤을 베고 장간을 다시 보낸다 하지만 주유는 편지를 가져갔다는 명목으로 산속 처가에 가둔다. 하지만 장간은 그곳에서 탈출해 방통을 만나는데 이를 본 장간은 방통을 데리고 조조를 찾아간다.
방통은 조조군사들이 배멀미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조군의 배를 서로 연결하도록 한다. 서서가 이를 간파하고 방통에게 자신이 살 길을 묻자, 서서에게 마초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거짓명목으로 허창으로 돌아가라고 하여 서서는 목숨을 건졌다.
한편 조조는 장간의 내통 편지가 주유의 계략인걸 알아차리고 채모의 동생인 채중과 채화를 를 주유에게 잠입시킨다. 하지만 주유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황개의 교육계를 활용, 황개를 처벌하였다. 이때 감녕도 황개가 맞으려고 할 때 너무 늙었다고 항의하자 감녕도 처벌된다. 채중과 채화는 이것들을 날날이 조조에게 보고하고 황개와 감택 감녕이 청룡기를 달고 군량을 실은 배를 타고 항복한다고 하였다. 채중과 채화로부터 황개와 감녕의 처벌 소식을 듣을 조조는 둘의 투항을 기정사실화 하지만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게 한 후 황개가 항복하는 척 접근해서 군량을 실은 배에 불을 붙이고 조조군 수채에 불이 붙자 연환계에 의해 배가 다 타버고 조조 군대는 몰살한다. 그리하여 조조는 번성으로 도망간다.
실제와 허구 논란
적벽 대전에 대해서 김운회 교수가 "삼국지 바로 읽기 2" 책에서 허구설을 주장한 바가 있다. 그는 그 책에서 적벽대전과 관도전투를 비교하면서 위서엔 세줄에 불과하고 촉서나 오서를 합해도 70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사에 양이 매우 짧아서 적벽대전의 허구성을 주장햇다. 하지만 이는 김운회 교수의 잘못된 생각으로서, 정사 오나라쪽 기록에 보면 풍부한 기록을 보유한 전쟁으로, 허구성은 잘못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부 장수의 경우는 적벽대전에서 사망하거나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의 영향으로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태사자가 그 대표적인 예로,태사자가 적벽대전에 참전했다는 것은 완전히 허구이며 태사자는 206년 풍토병으로 병사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미 사망한 태사자를 적벽대전에 참가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정사 오서 태사자전을 보면 태사자의 최후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으므로 태사자의 적벽대전 참전은 완전히 허구이다.
태사자는 신장이 7척 7촌(177.1cm)이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팔은 원숭이처럼 길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였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적을 토벌하러 갔었는데, 그 중 어떤 적이 군영 안의 망루 위에서 욕을 했다. 그 도적은 손으로 누각의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 태사자가 활을 끌고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화살은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자,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묘기(훌륭한 활솜씨)는 이와 같았다. 조공(조조)은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편지를 써서 상자속에 편지를 봉했는데, 그가(태사자가) 열어보니 말하는 바가 없고 단지 당귀(當歸)가 쌓여있을 뿐이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한 후, 태사자에게 유반을 제압할 힘이 있었으므로 남방의 일을 맡겼다. 태사자는 41세, 건안 11년(206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태사향은 관직이 월기교위까지 올랐다.
참전 장수들
조조 진영
손권 진영
유비 진영
형주 평정 전투는 209년에 유비가 적벽 대전 후 형주의 여러 조조 세력권들을 평정하기 위해 시작한 전투로 4차례의 전투를 벌여 승리해 영릉, 계양, 무릉, 장사 등을 평정했다.
영릉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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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유비 | [[[유탁]] | ||
지휘관 | |||
유비 제갈량 |
유탁 유현 형도영† | ||
피해 상황 | |||
형도영 전사 |
목차[숨기기] |
영릉 전투
유비가 쳐들어오자 영릉 태수 유탁의 아들 유현이 영릉의 맹장 형도영과 함께 유비에 맞선다. 그러나 형도영은 제갈량의 계략으로 전사하고 영릉 태수는 항복한다.
계양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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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유비 | 조범 | ||
지휘관 | |||
조운 | 조범 진응† 포륭† | ||
병력 | |||
1000명 | 수천 명 | ||
피해 상황 | |||
진응 전사 포륭 전사 |
계양 전투
영릉이 평정되자 유비의 부하 조운이 계양을 공격한다. 조운의 실력을 알아본 계양 태수 조범은 항복한다. 조범은 조운과 의형제를 맺고 자신의 형수를 맺어주려 하지만 조운은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라 하며 화가 나 돌아가버린다. 이에 진응과 포륭이 조범을 부추겨 거짓 항복으로 조운을 공격하려 하지만 일은 발각되어 진응과 포륭은 조운에게 잡혀 처형되고 계양성으로 진군해 조범을 다시 붙잡는다.
무릉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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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유비 | 금선 | ||
지휘관 | |||
장비 | 금선† | ||
병력 | |||
1000명 | 수천 명 | ||
피해 상황 | |||
금선 전사 |
무릉 전투
조운이 계양을 평정하자 이에 장비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무릉을 공격한다. 무릉 태수 금선은 정예 병사로 장비에 맞서 보지만 장비에게 살해당하고 무릉은 평정된다.
장사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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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유비 | 한현 | ||
지휘관 | |||
관우 | 한현† 황충 위연 양령† | ||
병력 | |||
500명 | 수천 명 | ||
피해 상황 | |||
한현 전사 양령 전사 |
장사 전투
유비의 부하 관우는 장사성을 평정하기 위해 가고 장사의 명장 황충과 격돌한다. 관우는 한현의 부하 양령을 단숨해 베어버리고 황충과의 첫 싸움이 무승부로 끝나자 관우와 황충은 다음 날 다시 맞서고 이때 황충의 말 앞다리가 부러져 황충이 굴러떨어지지만 관우는 의리를 지키며 자기 진영으로 물러난다. 관우의 모습에 감탄한 황충은 활을 관우에게 쏘지만 일부러 빛 맞춰 쏜 뒤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장사 태수 한현은 이 모습을 구실로 황충이 관우와 내통한 것이라 알고 황충을 잡지만 한현의 부하 위연이 이 일에 분노해 한현을 죽이고 황충을 구해줘 유비에게 투항한다.
동관 전투(潼關之戰)는 후한 말기 211년 조조와 서량의 마초가 싸워 조조가 승리한 싸움으로 조조가 이 싸움에서 승리해 양주 일대를 평정하고 중원 지역을 손에 넣었다.
배경
당시 조조는 적벽 대전의 패배 이후에도 유주, 기주, 청주, 병주, 연주, 서주, 예주, 사예주 등 후한 8주를 점령하고 있는 강대한 세력이었다. 조조는 손권을 치기 위해 준비를 했는데 그 전에 양주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서량 태수 마등을 없애야 했다. 조조는 마등을 없애기 위해 벼슬을 내린다고 하며, 도성 안으로 진입하게 했다. 마등이 황규와 함께 조조의 암살을 꾀했다는 구실을 삼아 마등과 마초의 동생 마휴, 마철, 마운록 등 마초와 마대를 제외한 마등과 전 혈족들을 처형했다. 마등을 없앤 조조는 손권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뒤에서 서량 태수 마등의 아들 마초가 아버지와 형제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동관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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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조 | 마초 | ||
지휘관 | |||
조조 | 마초 한수 | ||
병력 | |||
30만 명 | 20만 명 |
전투 과정
마초는 의형제인 서량 태수 한수와 함께 장안 태수 종요를 무찌르고 사예주의 장안성을 함락시킨다. 결국 조조는 군사를 물려 부하 조홍과 서황에게 동관을 지키게 하지만 마초의 군사들이 조홍을 욕하게 하여 조홍을 성 밖으로 끌어낸 뒤 협공을 가하여 10일도 채 되지 않아 동관을 함락시킨다. 이에 조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마초와 대치하여 부하 장수들을 보내 싸우게 하지만 마초는 우금과 장합 등을 연이어 무찌르고 마초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던 조조의 부하 이통까지 단칼에 베어버린다. 죽을 위기에 몰렸던 조조는 조홍과 하후연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조조는 이후에 마초와 몇 차례 접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위하에 궁지에 몰렸다가 위남 현령 정비가 소와 말을 풀어 마초의 군사들을 쫓게 하여 조조를 구한다. 조조는 다시 추위를 대비해 토성을 쌓으나 마초의 기병대의 공격으로 무너져 버리고 조조는 종남산의 한 노인 누자백의 도움으로 토성을 쌓는다. 그 후로 조조는 지구전이 유리하다고 판단, 서량의 군사 2만 명이 합류하자 조조는 이를 반기고 서량군이 동관에 집중되면 후방의 방비는 허술해져 그 틈을 노려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조조가 황하를 건너는 과정에서 조조의 계획을 눈치챈 마초가 급습을 하고 조조는 겨우 허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다음날 마초와 허저가 싸우지만 무승부로 끝나고 혼란스런 싸움으로 인해 조조군을 다시 서량군에게 패한다. 이때 마초를 도와주던 서량 태수 한수가 화친을 주장하고 조조는 이를 이용해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시켜 서량군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결국 마초와 한수의 갈등으로 서량군의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조조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 공격을 가한다. 조조의 기습을 받은 마초는 부하 30기만 이끌고 후퇴하고 한중 태수 장로에게 몸의 의탁하는 신세가 된다. 이로 인해 조조는 양주 등 서량군 일대를 평정하고 중원을 차지한다.
합비 전투는 209년과 215년 두 차례에 걸쳐 위나라 합비(현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조조와 손권이 치열히 싸운 전투로 1차 전투는 손권의 패배로 끝났고 2차 전투는 조조와 손권의 승부가 나지 않은 무승부로 끝났다.
배경
당시 강동 지역의 손권은 208년 적벽 대전의 승리를 여세로 몰아 주유를 남군성으로 보내 조조의 장수 조인과 남군 전투를 치르게 했으나 오히려 주유는 함정에 빠져 부상을 입고 기습 공격으로 조인을 무찔렀으나 유비의 장수 조운에 의해 남군성을 빼앗긴다. 곧이어 형주성은 장비가, 양양성은 관우가 차례로 점령해 형주 지역을 빼앗기고 주유가 패배하자 손권은 방향을 바꿔 전 군대를 모아 허도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인 합비를 대공격한다.
제1차 합비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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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조 | 손권 | ||
지휘관 | |||
장료 악진 이전 |
손권 송겸 가화 | ||
피해 상황 | |||
불명 | 태사자전사 병력은 대부분 전사 |
제1차 전투
209년 주유가 남군 전투에서 대패하자 손권은 강동의 전 군대를 이끌고 합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도중 원군을 이끌고 온 노숙과 함께 의논을 하던 도중 조조의 장수 장료의 편지를 받고 분노해 합비를 공격한다. 합비성 앞에서 장료와 대치한 손권은 태사자를 내보내 장료와 맞서게 하고 이때 조조의 장수 악진이 손권을 노리고 공격하나 송겸과 가화의 도움으로 손권은 목숨을 건진다. 결국 손권은 군사를 거두어 남서로 돌아간다.이 전투 의태사자는 독화살 4개가박혀 전사한다
제2차 합비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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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조 | 손권 | ||
지휘관 | |||
조조 장료 악진 이전 서황 |
손권 감녕 여몽 능통 주태 진무† 동습† 육손 | ||
병력 | |||
합비수비병 1만 명 조조군 본대 40만 명 총병력 41만 명 |
손권군 10만 명 후반에 육손의 지원군 10만 명 총병력 20만 명 | ||
피해 상황 | |||
장료 | 진무, 동습 등의 장수와 군사들 전사 |
제2차 전투
215년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여 익주의 유비가 위험해지자 제갈량은 계책을 내어 형주 동쪽 3군을 손권에게 내주고 손권과 조조를 싸우게 하는 계책을 편다. 손권은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감녕을 선봉으로 세워 합비로 가는 보급로인 환성을 함락시킨다. 이 소식은 합비를 수비하고 있던 장료에게로 전해져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작전을 세운다. 악진이 군사들을 이끌고 오군의 선봉인 여몽과 감녕을 막고 있는 동안 장료와 이전이 손권의 중군을 기습 공격해 승리를 거둔다. 곧이어 장료는 더 많은 군사를 필요로 하여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고 조조는 유엽의 의견으로 한중을 하후연과 장합에게 맡기고 본대 40만 명을 이끌고 합비로 간다. 이에 감녕은 기병 100기를 이끌고 조조의 영채를 기습 공격하고 다음 날 능통은 악진과 맞선다. 전투가 지긋지긋하게 끌자 조조는 모든 군대를 이끌고 대공세를 펼쳐 5길로 나누어 유수를 공격한다. 유수를 공격당하자 손권은 서황의 협공을 받고 손권은 겨우 탈출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태가 부상을 당하고 장수 진무와 동습이 전사한다. 결국 손권은 장소와 고옹의 의견으로 군사를 철수하고 조조 역시 손권 못지않은 피해를 입고 철수해 사실상 무승부로 끝난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합비전투
연의에서는 송겸과 태사자가 합비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송겸은 합비전투 이후까지 살아남았으며 태사자는 206년에 사망했으며 태사자가 죽은 이후 적벽대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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