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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1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인물) 본문
중국의 역사 21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인물)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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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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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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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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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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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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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董卓, ? ~ 192년 4월 23일)은 후한 말의 정치가이다. 자는 중영(仲穎)이다. 후한 황실을 배경으로 삼아 폭정을 휘두르다가 여포(呂布)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동탁은 완력이 뛰어나 두 개의 궁대(弓袋)를 몸에 차고 말을 몰면서 어느 손으로도 활을 맘대로 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생애
농서군 임조현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의협적인 무리와 함께 강족(티베트족) 지역을 방랑하여 유력자와 친분을 맺었다. 그후 향리에 돌아와 농사에 전념하였는데,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마침 밭을 갈고 있던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강족은 그 의기에 감격하였다. 또한 병주 정벌에서 전공을 세우자 포상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민족 토벌
동탁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수많은 전과를 올려 승진을 거듭하여 중랑장이 된다. 그후 황건적 토벌에서 패배하여 면직되지만 한수 등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복직되어 진압을 맡았다. 이 전투에서 수만 명의 강족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지만 동탁은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소환하여 소부로 삼고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동탁은 계속 칙명을 거역했다. 이때문에 일찍이 손견(孫堅)은 군율을 무시하는 동탁을 살려두면 절대 안된다고 장온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무시하였고, 훗날 동탁은 자객을 보내어 장온을 죽였다. 연의에서는 동탁이 베푸는 연회 중에 여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장온을 밖으로 끌고가서 죽여버린다고 묘사되어 있다.
소제 폐위
그 무렵 하진(何進)이 환관 제거를 모의하기 위해 전국의 제후들을 소집하였는데, 동탁도 이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이 주살되고, 환관들에게 연행된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 : 헌제)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낙양으로 들어왔다. 이때 동탁의 병사는 3천여 명밖에 없었으나,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서 밖으로 군사를 보내 다음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시켜 대군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으로 하진·하묘(何苗) 형제의 군사를 병합하는 데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포를 부추겨 집금오 정원(丁原)을 제거하도록 하고 그 군대를 흡수했다. 그리고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을 면직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마자 태위로 승진한다. 소제를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킨 뒤, 모후인 하태후와 함께 시해하고 진류왕(헌제)을 옹립시켰다.
동탁의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중에 주민들이 춘절을 즐기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목을 베고, 여자는 탈취하여 병사들에게 첩으로 주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함부로 폭행을 가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만행을 참을 수 없어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지만 실패하여 살해되고 만다. 조조(曹操)도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하지만 실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반동탁 연합군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동탁은 장안(長安) 천도를 강행해 능묘를 파서 보물을 도굴하고, 자신이 사는 곳에 성을 쌓아 30년 분의 식량을 비축했다. 주연회를 열 때마다 죄인을 끌고와 혀와 팔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큰 솥에 삶기도 했다.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고 사람들이 서로 무고하였기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또한 오수전을 녹여 조그만 동전으로 주조하지만, 그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고 모양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장은 다름 아닌 예전에 장온에게 동탁을 죽여야만 한다고 진언했던 그 손견이였다. 이에 동탁은 여포가 나서려 했지만 동탁의 부하로서 도위의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화웅(華雄)이 '닭 잡는 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게 아니다'라면서 나서게 된다. 처음에는 원술이 병량을 보내주지 않아 화웅이 우세했지만 원술이 병량을 제대로 조달하기 시작하자 손견은 승승장구하고, 결국 양인이라는 곳에서 손견은 일기토로 화웅을 척살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견이 아니라 당시 마궁수였던 관우가 유섭과 반봉이 화웅과 싸우다가 화웅에게 죽자 조조에게 허락을 받고 필마단기로 나가서 화웅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여포가 직접 나섰지만 손견의 활약으로 별 소득이 없었다. 동탁은 이각을 사신으로 보내어 손견에게 화친을 시도하였으며 이 때 손견의 아들 중 당시 10살을 넘긴 손책과 손권형제에게 자사의 직위를 천거하겠다는 약조를 붙였으나 충의로운 천성을 지닌 손견이였기에 화친은 결렬되었다. 결국 동탁은 이유(李儒)의 조언에 따라 낙양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장안으로 도망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낙양에 불을 지르는데 이때 이유는 홀로 남아있다가 궁녀 한 명을 살해하고 그 궁녀의 시체의 목에 옥새를 매달아서 우물에 던져버린다. 반동탁연합군에 속한 제후들이 옥새를 놓고 서로 싸우게 만들려는 이유의 계략이였던 것이다. 이 계획이 적중되어 낙양의 화재를 진압하던 손견에 의해 옥새가 발견되고, 옥새를 요구하는 원소와 거절하는 손견의 불화로 인해 반동탁 연합군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에 원소는 유표(劉表)를 개입시켜, 결국 손견을 죽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말년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연스레 해체되었지만 동탁의 전횡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92년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동탁이 이 결혼에 대해 여포에게 화극을 던져가면서까지 반대하였으므로 여포는 동탁에 대해 극에 달하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해 4월 이를 이용한 왕윤(王允)은 동탁의 심복 여포를 꾀어내어 동탁 살해를 모의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양녀 초선(貂蟬)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쓰여있다. 이리하여 동탁은 선양과 관련된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그 때 호위병에게 제지당하고, 조칙을 받은 여포에게 살해당한다. 동탁의 머리와 사체는 저잣거리에 내걸렸는데, 뚱뚱한 몸의 배꼽에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
여포(呂布, ? ~ 198년 12월)는 후한 말기의 장수이다. 자는 봉선(奉先)이며, 오원(五原)군 구원(九原)현 출신이다. “사람 중에 여포요, 말 중에 적토가 있다(人中呂布 馬中赤兎)”라고 했을 정도로 무용이 알려졌다. 하지만 자기를 거둔 정원(丁原)과 동탁(董卓)을 죽이는 등 거듭된 배신행위로 신망이 없었으며, 결국 부하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는다.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羅貫中) 은 여포를 악역으로 설정했으면서도 비중있게 묘사하여 인기가 많다. 연의 내에서 제일의 맹장으로 전해진다.
생애
병주 오원군 출신으로 힘이 세고 궁마술에 능숙하여 전한 무제 때의 명장인 이광에 비유되며 비장(飛將)이라 일컬어졌다. 병주자사 정원이 특별히 중용해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이숙의 꾐에 넘어가 정원을 죽이고 동탁을 섬겼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원은 여포의 의부(義父)였으며, 동탁이 선물한 적토마의 유혹에 넘어가 정원을 죽였다고 묘사한다.
동탁의 수하시절
동탁은 여포를 자신의 수하로 넣자 암살을 두려워해 여포로 자신을 곁에서 호위하게 했다. 하지만 동탁의 포악스러운 성격은 결국 여포와의 갈등을 불렀다. 동탁은 자신의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화극을 여포에게 던지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여포의 마음 속에는 동탁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싹텄다. 또한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동탁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하였다. 당시 사도 왕윤(王允)은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고 있던 동탁을 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동탁과 여포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기회로 여포를 동탁 주살 계획에 끌어들인다. 천자가 미앙궁으로 신하를 소집했을 때 동탁을 불려들여,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했다. 이때가 192년(초평 3년) 4월이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을 섬기게 된 여포는 동탁과 부자의 서약을 맺었으나 왕윤의 이간책에 의해 동탁과 여포 사이가 벌어졌는데 그 원인을 왕윤의 양녀인 초선(貂蟬)을 둘러싼 다툼으로 묘사한다.
동탁 사후
동탁을 죽인 후 여포는 분무장군에 임명되고 온후(溫侯)에 봉해졌고 조정의 정사를 담당했으나 불과 한달도 지나지 않아 동탁의 무리였던 이각(李傕)·곽사(郭汜) 등에게 패하여 장안성을 빼앗겼다. 여포는 원술(袁術)에게 몸을 맡겼다. 원술은 처음에는 그를 무척 후대했으나 여포는 자신이 동탁을 죽였으므로 원씨의 복수를 한 공이 있다고 믿어 마음대로 군사들을 풀어 노략질을 일삼으니 원술은 여포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여포는 이를 두려워하여 달아나 하내의 [장양(張楊)을 따랐는데, 이각 등이 여포에게 현상금을 걸어 여포를 찾자 장양 휘하의 제장들은 모두 여포를 도모하려고 했다. 여포는 장양에게 자신을 죽이기보다는 산 채로 넘기는 것이 더 공이 크게 않겠냐며 시간을 끌다가 곧 달아나 원소(袁紹)에게 항복한다.
원소는 상산에서 장연(張燕)을 공격할때 여포를 부장으로 종군시켰는데 이때 여포는 명마인 적토마를 타고 전장을 질주하며 맹활약했다.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는 적토를 타고 능히 적의 해자를 뛰어넘으며, 성렴(成廉), 위월(魏越) 등 수십 기(騎)와 함께 말을 달려 장연의 진(陣)에 부딪치며 하루에 때로 3-4번에 이르기까지 맹렬히 싸워 적들을 모두 참수하고 빠져나왔다다고 한다. 이때의 활약상으로 사람들이 여포를 일클어 “사람 중에 여포요, 말 중에 적토가 있다(人中呂布馬中赤兎)”라고 했을 정도였으나, 여포는 이 공을 믿고 다시 교만하며 영내에서 마음대로 군사를 늘린 데다가 원소의 수하들은 대개 원소가 임의로 관직을 임명한 반면 여포는 천자에게서 직접 관직을 임명받았다 하여 여포는 항상 원소의 제장들을 업신여겼다. 또한 원소의 영토에서 노략질을 일삼았으므로, 원소 역시 여포를 골칫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여포는 이를 두려워하여 낙양으로 가겠다고 말하며 스스로 떠나기를 청했다. 원소는 이를 승낙해 임의로 자신이 칭하고 있던 사례교위의 관직을 여포에게 주며 장사들을 보내 여포를 전송하게 하는 한편, 그들에게 여포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나 이를 눈치챈 여포는 다른 사람을 시켜 군막 안에서 쟁(箏)을 켜게 하며 자신은 몰래 달아났다. 암살이 실패한 것을 안 원소는 군사를 보내 여포를 뒤쫓았으나 추격병들 중 여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여포는 다시 장양에게 의탁했지만 장양은 원소의 미움을 살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여포는 장양 밑에서도 오래 있지 못해 장막(張邈)에게 의탁했다. 장막은 조조(曹操)가 서주의 도겸(陶謙)을 치러 본거지를 비웠을 때, 여포 등과 합세하여 복양을 점거하고 조조를 위기로 몰아넣었지만, 결국엔 조조에게 패배해 장막은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가던 도중 살해당했고, 여포는 장막의 부하들을 이끌고 유비(劉備)에게 몸을 의탁한다.
유비가 원술과 싸우는 틈을 타 여포는 배신하여 하비(下邳)를 점거하고 서주를 취하고 서주자사라고 칭하였다. 원술은 이를 기뻐하며 여포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유비는 원술에게 패하고 갈 곳이 없게 되자 여포에게 귀의했는데, 원술이 기령(紀靈)을 보내 유비를 토벌하려 하자, 여포는 화극에 화살을 맞추는 무용을 선보이며 기령을 돌려보냈다. 원술은 이후 한윤(韓胤)을 사자로 보내 황제를 참칭할 생각을 여포에게 알리고 사돈을 맺으며 결속을 굳건히 할 것을 권했는데, 여포는 이 혼담을 승낙하고 딸을 원술에게 보냈지만, 진규(陳珪)의 설득에 넘어가 군사를 보내 이를 뒤쫓으며 혼담을 파기했다. 또한 한윤을 붙잡아 형틀에 묶은 채로 조조에게 보냈다. 한윤은 허도(許都)의 저자거리에서 참수되어 목이 내걸렸고, 조조는 여포를 좌장군에 제수했다.
원술은 대노하여 그의 대장 장훈(張勳), 교유(橋蕤)에게 수만명을 지휘하게 하고, 한섬(韓暹), 양봉(楊奉)과 세력을 연결하며 일곱 갈래 길로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는 이에 크게 두려워하며 진등을 힐책했으나 진등은 한섬과 양봉은 원술과 막 합세했으므로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진언했으므로 마침내 편지를 보내 원술군을 격파하면 그 노략한 군수물자를 모두 그들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한섬과 양봉은 이에 계획을 바꿔 여포를 따르기로 결심했고, 여포가 진군하여 원술군의 둔영과 불과 1백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때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이 동시에 이들을 공격하자, 원술의 장군 10명이 죽었고 전사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뒤 여포는 또 한섬, 양봉의 2군과 함께 수춘으로 향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했다. 종리(鍾離) 이르러 크게 노획하고 되돌아갔는데, 회수를 건너 그 북쪽에 도달한 뒤 원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귀하는 군(軍)이 강성한 것을 믿고 늘 호언하기를, 휘하의 맹장과 난폭한 무사들이 서로 죽이고자 하여 늘 이를 억제한다고 하셨소. 내가 비록 용맹하지 못하지만 회수 남쪽에서 한 때의 시간동안 범처럼 거닐었는데, 족하는 수춘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고 고개를 내미는 자 조차 없으니 맹장, 무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이오? 족하는 큰소리 쳐서 천하를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천하인들을 모두 속일 수 있겠소? 옛날 군사들이 교전할 때에도 그 사이에 사신은 오갔고, 책략을 꾸미는 것도 나 여포가 먼저 주창한 일이 아니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 소식 전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원술이 대노하여 친히 보기 5천을 이끌고 회수 가에 이르렀으나, 여포군은 이미 모두 회수를 건넌 뒤였다. 여포와 그의 기병들은 모두 회수 북쪽에서 크게 비웃은 뒤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원술은 세력을 만회하고자 진(陳)국을 점령하고 진왕 유총(劉寵)을 죽였으나, 이 직후 조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198년 여포는 다시 원술과 연합하여 조조에게 맞섰다. 조조가 친정에 나서 여포를 포위하자 여포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진궁 등은 그 계책을 저지했다. 한편 원술은 기병 1천기를 이끌고 직접 여포를 구원했으나, 조조의 반격에 패퇴하여 도망쳤으며 간신히 성을 지킬 뿐 다시는 여포를 구원할 수 없었다. 진궁은 여포를 설득하여 자신은 성을 지키고 여포가 병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조조의 군량을 끊으며 서로 협공한다면 조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진언했으나, 여포의 처가 이를 말리자 여포는 결국 진궁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국지에 의하면 여포는 꾀가 없고 시기심이 많아 무리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제장들은 뜻이 달라 서로 의심했으므로 번번히 패했다고 한다. 조조가 여포를 포위하고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여포의 부장 후성(侯成)은 사소한 일로 여포에게 크게 책망을 받았는데 이 일로 인해 송헌(宋憲)·위속(魏續)과 함께 진궁을 사로잡은 뒤 군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남은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白門樓)에 올라가 저항했지만, 점차 조조군에 둘러싸여 위급해지자 마침내 내려와서 항복했다.
최후
여포는 조조를 만나자 “묶은 것이 너무 조이니 조금 느슨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으나 조조는 “범을 묶는데 꽉 조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며 거절했다. 또 조조에게 말하길, “내가 제장들을 후대했으나 제장들은 위급해지자 모두 나를 배반했소.” 라고 했으나 조조는 이를 비웃으며“경은 처를 저버리고 제장들의 부인을 사랑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 하시오?”라고 반문했고 여포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여포는 “명공께서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에게는 기병을 거느리게 하면 천하의 평정이 실로 쉬울 것입니다.”라고 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조조가 이에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띄자 유비가 조조에게 진언하길“공께서는 여포가 정건양(丁建陽=정원)과 동태사(董太師=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라 하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여포는 유비를 손가락질하며 “저 귀 큰 아이가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 라고 외쳤다.
조조는 곧바로 여포의 목을 매어 죽였고, 머리는 잘라서 허도로 보내 효수했다.
평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여포를 평하길, “호랑이와 같이 용맹스러웠으나 모략이 없고 천박교활하며 오직 이익만을 바라보며 일을 도모한다”라고 했고, 당대 인물들들도 대부분 '사람됨이 천박하고 가벼우며 말을 수시로 번복해 믿을 수 없는 자' 로 평가했으며 실제 행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은 여포를 악역으로 설정했으면서도 한편으론 영웅같이 묘사했고,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여러 매체에서는 이 점이 더욱 극대화되어 완전히 실제 인물상과는 매우 다르게 미화되는 경우가 많다.
원소(袁紹, ? ~ 202년 5월)는 후한 말의 정치가 · 군벌. 자는 본초(本初)이며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후한의 명문가 출신으로 젊어서는 청류 사상가로 명성을 떨쳤다. 후한 말의 정치적 부패를 타파하고자 십상시(十常侍)를 일소하였으나 동탁(董卓)의 개입으로 정권을 잡는 데 실패하고 수도에서 쫓겨났다. 원래는 중앙에서 태어난 관료 출신이었지만 사상가, 정치가로서의 명망과 경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군벌화했고 한복(韓馥) · 공손찬(公孫瓚) · 장연(張燕) · 전해(田楷) · 공융(孔融) 등의 군벌들을 격파, 병합함으로써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관도 대전에서 조조(曹操)와 싸워 크게 패한 뒤 분사(憤死)하였다. 원소의 후계자 원상(袁尙)은 사촌형 원담(袁譚)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난 사이에 조조에게 토벌되었다.
생애
청류 지식인으로서의 전반기
원소는 고조부 원안(袁安) 이후 4대 연속 삼공(三公 : 태위, 사공, 사도)의 지위에 있었던 명문 가문 출신으로 용모가 수려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어려운 일을 잘 도와주어 젊어서부터 지도자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세삼공의 적장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로 그려지나, 태어날 때 부친인 원성(袁成)이 죽어 유복자로 자랐으며 어머니는 노비였다. 원소는 천출로서 비록 효렴(孝廉) 등의 천거를 받지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당시 삼공의 눈에 들어 삼공부로부터 직접 벽소되는 상당히 파격적인 절차로 20세의 나이에 복양현장(濮陽縣長)으로 부임하였다. 임지에서는 깨끗한 정치로 명성을 얻었으나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적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으며 복상이 끝나자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을 추감하며 또 다시 3년의 상을 치렀고 이후에도 병을 핑계대며 벼슬하지 않았다. 당시 후한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는 관습이 거의 없어졌던 점과 어려서 고아가 된 일을 추감하여 원소만이 다시 복상을 거친 것은 당시에는 원소만이 유일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청렴하고 올바른 정치를 추구했던 원소는 후한말의 부패한 정치 현실에 대해 적잖이 실망하여 벼슬길을 피한 것으로 생각된다.
6년의 상을 치르고 벼슬에 나서지 않는 동안에 원소는 많은 선비들과 더불어 사귀었고 당시 후한의 정치적 부패의 요인이었던 환관들의 전횡을 비판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으므로 이에 환관들이 모두 원소를 미워하게 되었다. 십상시의 한 사람이자 영제(靈帝)에게 '아버지'라고 불린 장양과 더불어 '어머니'라고 불렸던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은 원소에 대해 "저 아이가 끝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원씨 가문은 환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원소의 삼촌 원외(袁隗)는 원소에게 "가문을 멸망시킬 작정이더냐"라고 크게 꾸짖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에 원소가 천거에 응하여 벼슬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고, 끝내 원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어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184년 무렵에는 대장군 하진(何進)의 속관으로서 다시 벼슬을 시작하였다. 황건난을 계기로 더이상 조정의 혼란을 묵과할 수 없다는 청년다운 정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원소는 학행이 우수하여 시어사(侍御史)로 승진하였으나 그와 사이가 나빴던 사촌동생 원술(袁術)이 상서대에 있었으므로 사직하고 무관직으로 전임해 호분중랑장이 되었다. 중평(中平) 3년(186년)에는 개훈(蓋勳) · 유우(劉虞)와 같이 쿠데타를 일으켜 십상시를 주살할 계획도 세웠으나 개훈이 경조윤으로 전출되는 바람에 불발에 그친다.
중평 6년(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하진이 집권하여 환관들과 대립하자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하여 환관을 주살할 계획을 세워 하진에게 바쳤다. 하진은 처음엔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나 하진은 누이동생 하태후의 반대에 부딪힌데다가 환관과 결탁하여 출세한 배경도 있었으므로 쉽게 포기하고 만다. 원소는 포기하지 않고 하진을 다시 설득하여 하진에게서 수도 일대의 군사권을 통괄하는 사례교위와 명령의 자율권을 보장받는 가절의 직위를 받아내며 환관세력의 축출에 앞장선다. 하지만 하진은 환관의 대대적인 주살과 국정의 개혁보다는 자신의 안정적인 집권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강경한 원소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선수를 친 환관세력의 수장 장양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를 전해들은 원소는 황급히 가병 1백명만을 이끌고 수도를 장악하기 위해 장양 내각에서 임명한 친 환관파 관료들을 공격해 살해했으며 하진의 사망으로 인한 병사와 관료들의 혼란을 강경하게 수습했다. 또한 수습한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황궁을 점령했으며 붙잡은 환관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때 죽은 환관은 2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원소는 정권을 잡는 데에는 실패한다. 혼란을 틈타 동탁이 낙양에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와서 황제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였던 소제(少帝)는 하태후라는 후견인이 존재하였으며 이미 나이가 많아 동탁이 권력을 휘두르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동탁은 황제의 폐위를 획책하였는데 이로 인해 원소는 동탁과 심하게 반목하였다. 후한서에 의하면 이때 원소는 폐제를 획책하는 동탁을 준엄하게 꾸짖었으나 동탁은 칼을 어루만지며 "내가 하고자 하는데 안되는게 무엇이냐. 감히 애송이 녀석이 내가 하는 일을 막고자 하는가!"라고 말하며 원소를 협박했다. 이에 원소가 "천하에 힘있는 자가 어찌 동공뿐이겠습니까."라고 분연히 말하며 칼을 뽑아든 채로 인사하고 나가버려 좌중을 모두 경악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원소는 인수를 낙양의 성문에 걸어놓고는 그대로 낙양을 떠나 기주(冀州) 발해(渤海)군으로 갔다. 동탁은 처음엔 원소에게 현상금을 걸고 그를 추격하여 죽이려 했지만 조정에 원소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자 마침내 회유책을 써서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했는데, 사실은 발해군의 호족들이 원소의 명분에 호응하여 그를 추대하였고 동탁은 그런 원소의 발해 지배를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초평(初平) 원년(190년), 원소는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해 맹주로 추대되었다. 그 해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했으며 유폐되어 있던 홍농왕(소제)과 하태후를 살해하자 원소는 헌제와 황실을 동탁이 세운 괴뢰로 규정하였으며 이에 대항하는 형태로 당시 크게 명망을 떨치던 황족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이는 유우의 완강한 거절로 결국 무산되었고 결국 구심점을 잃은 연합군은 동탁과 자웅을 가리지 못한 채 붕괴되고 만다.
하지만 원소는 동탁 정권은 물론 당시 황제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였고 또한 연합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동탁 정권에서 파견한 칙사를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이런 원소의 강경한 주장과 행동은 원소가 오래 전부터 조정의 부패의 원인이었던 환관들에 대한 비판과 현실개혁을 주장한 청렴한 선비, 환관을 토벌한 가장 큰 주역이며 황제를 폐위하려던 동탁에게 정면으로 맞서서 대항한 올곧은 선비의 표본과도 같은 행보를 걸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여론의 큰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동탁의 갖은 폭정과, 전 황제의 시해, 황실의 무능함으로 인해 더욱 대비되어 원소는 대대의명분의 화신과도 같은 지지를 받았으며, 후한 황실의 정통성은 뿌리채 뽑혀 나뒹굴었다. 그 결과 각지의 제후들은 모두 황제의 칙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군웅할거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군벌로서의 활약
초평 2년(191년), 공손찬이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韓馥)이 지배하는 기주를 침공해 한복을 격파했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이었던 한복에게 부득이하게 종속되어 견제,감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나 배후에서 공손찬의 기주 공격을 조장한 흑막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복이 패배하여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내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흑산적 장연을 비롯해 어부라(於夫羅) · 장양(張楊) 등의 군벌이 기주를 넘보았는데 원소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패퇴한 장양 · 어부라는 원소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기주 내에서 위세를 얻은 원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복을 설득하며 또한 협박했다. 겁에 질린 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한다.
원소가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빼앗는 데 이용당한 셈이 된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사촌동생 공손월(公孫越)을 파견하여 원술과 우호관계를 맺었다.원술은 손견(孫堅)과 공손월을 파견해 원소의 간접적인 세력권 내에 있던 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공손월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에 공손찬은 더욱 대노하여 원소를 칠 것을 다짐하고 반하(磐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시 공손찬은 하북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군벌이었으므로 원소는 직접 대결을 피하고 발해태수의 직위를 공손찬의 종제 공손범(公孫範)에게 양도하면서 공손찬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공손찬은 청주(靑州) · 서주(徐州)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더욱 강성해졌고, 마침내 기주를 공격했다(192년 1월). 이때 공손찬의 무시무시한 위세에 하북 전체가 흔들렸으며 기주의 수많은 성읍들이 공손찬에게 투항하였다고 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는 마침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공손찬과 일전을 벌인다. 당시 막 출범한 신생세력에 지나지 않았던 원소는 공손찬에 비해 군대의 수와 장비,훈련도 등 여러 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하였으나 반하,계교에서 거듭 벌어진 회전에서 공손찬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 공손찬의 진형이 무너지자 승리를 확신한 원소가 방심하여 보병 수십명만 이끌고 공손찬이 패퇴하는것을 건너편에서 지켜보다가 퇴각하던 공손찬 휘하의 기병대 수천 명에게 포위되고 말았는데, 군사 전풍(田豊)이 원소를 구해 담 사이에 피난시키려고 하자 모자를 벗어 집어던지며「대장부는 적에게 돌진하여 전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하며 나아가 싸워 이에 모든 병사들이 분발했고 병력이 워낙 적어 지휘관이 원소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적들은 의외로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기가 눌려 퇴각하여 궁지에서 벗어낫다는 일화가 있다.
공손찬은 비록 계교전투에서 대패하였으나 이후에도 거듭 군사를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였다. 전투는 여러 곳에서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원소와 공손찬은 평원군 일대에서 다시 만나 회전을 벌였고, 여기서 공손찬은 또다시 원소에게 대패하였다. 다급해진 공손찬은 초평 4년(193년) 초에 원소와 화친을 맺었지만 이 직후 원소가 위기에 몰리자 곧 이를 파기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공손찬은 이 무렵부터 평소의 과격하고 잔인한 성품이 더욱 두드러져 크게 신망을 잃고 내부 문제에 시달렸으므로 더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초평 4년(193년), 흑산적(黑山賊)의 총수 장연(張燕)은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는 틈을 타 원소의 근거지인 업(鄴)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원소군의 수뇌부는 공손찬을 격파하고 화친을 맺어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있었는데 업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였고 혼란에 빠졌으나 원소는 평소의 모습을 전혀 잃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행동하였다고 한다. 혼란을 수습한 원소는 업으로 진격하였고 창암곡에서 흑산적 두목 우독(于毒)과 장안에서 임명한 기주목 호수(壺壽)를 격파하고 1만명을 참하였으며, 녹장산에서 좌자장팔(左髭丈八)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또한 다시 청우각(靑牛角) · 이대목(李大目) · 황룡(黃龍) · 좌교(左校) · 유석(劉石) · 우저근(于氐根) 등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수만의 수급을 얻는다. 업은 3개월 만에 수복되었으며 이후 흑산적과 교전을 거듭하여 이듬해에는 상산(常山)에서 장연까지 격파하기에 이른다.
장연은 상산전투 이후에도 원소의 집요한 군사,외교적인 공격을 받아 점차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에, 공손찬은 명망 높은 황족 유우(劉虞)를 죽인 일로 인해 신망을 완전히 잃었으며 점점 잔인성이 두드러졌다. 장연과의 싸움을 끝낸 원소는 유우의 아들 유화를 앞세워 공손찬에게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공손찬의 악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열광적으로 이를 맞이하였다. 또한 원소는 오환(烏丸) · 선비(鮮卑) · 흉노(匈奴)를 비롯한 북방의 기마민족들에게 우호적인 자세로 유화책을 펼쳤는데, 평소 공손찬의 강경책에 시달려 오던 이들도 원소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공손찬을 공격했다. 195년. 포구에서 원소군과 전투를 벌인 공손찬은 참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으며,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그 위세가 극도로 약해져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후 공손찬은 거대요새 역경루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며 수비에 급급할 뿐이었다.
조조와의 대립
초평 3년(192년), 동탁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된 이후, 동탁의 잔당 이각(李傕) 등이 장안에 내습하여 조정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초평 5년(195년), 마침내 헌제는 이각 · 곽사(郭汜)에게서 벗어나고자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한다. 이때 참모 곽도(郭圖)는 황제를 영입하여 우리들의 세력권 내에 있는 마을로 천도를 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원소는 동탁이 임명한 헌제(獻帝)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데다, 황실은 이미 쇠락하여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여겼으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 헌제는 조조에게 보호받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때까지 평범한 군벌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조조는 황실의 권위와 명망을 되살려내는데 성공하며 명분을 얻었고, 그때까지 원소가 누려 왔던 명분적 우위를 뒤집어 버렸다.
본디 군웅할거 초반의 조조는 식견과 안목에 있어서도 별다른 능력을 보이지 못했으며, 원소의 도움을 받고서야 군벌로서 어느정도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조조가 황제를 옹립함으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조조를 다소 얕보고 있었던 원소는 그제서야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원소는 헌제에게 상소문을 써 바침으로 일단 황제의 권위에 물러서는 입장을 보였으나, 이에 고무된 조조가 스스로 대장군에 오르고 원소를 그 아래 반열인 태위에 임명하자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또한 조조에 대해 "수차례나 죽을 지경에 놓인 것을 그때마다 번번이 구해주었더니 이제는 황제를 끼고서 나에게 호령하는구나."라고 말하며 분노했다고 한다. 비록 명분적 우위를 차지했으나 당시 세력면에서 원소의 상대가 되지 않던 조조는 이에 크게 두려워하며 대장군의 지위를 포기하고 원소에게 양보했다.
이렇듯 대장군 취임을 놓고 벌어진 원소와 조조의 알력싸움은 원소의 승리라는 형태로 끝이 났고, 헌제라는 새로운 명분 아래의 1인자도 원소가 차지하는 듯 보였지만 양자의 충돌은 이미 시간 문제가 되어 있었다.
후계자 선정과 저수와의 대립
원소의 장남 원담은 사치스럽고 교만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원소는 이 무렵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도 고심하고 있었다. 원소는 막내아들 원상의 용모와 재능을 아꼈으나 원상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로 삼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총애를 받던 후처 유부인은 미소년이었던 원상을 심하게 편애하여 그를 강하게 지지했으며 원소 또한 원상을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원상이 장성하면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하고 원담을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호적에서 폐출시켰으며 청주의 도독으로 삼아 내보냈다. 저수(沮授)는 이에 대해 간언하지만 원소는 오히려 "다른 자식들도 각 주로 내보내 그 역량을 살펴보겠다"라고 말하며 무시했다.
이때 원소는 원상이 장성하여 후계자로서의 경력과 권위를 인정받기 이전에 자신이 죽음으로서 후계문제에 혼선이 생길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던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원소가 병으로 급사함에 따라 나이가 어렸던 원상은 그 지지기반이 극히 취약한 상태에서 집권하게 되었으며, 이는 원씨 일족이 내분에 빠져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이 무렵부터 원소는 정권의 2인자였던 저수와 별가(別駕) 전풍(田豊)을 대표로 한 기주의 호족 · 명사 계층과의 대립이 심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사적에 건안(建安) 원년(196년) 경을 시작으로 원소가 저수와 전풍의 간언을 거듭 무시하는 부분에서 나타나는데, 사료의 부족으로 자세한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확실한 것은 이 무렵부터 원소 정권 내부에서 저수 · 전풍으로 대표되던 기주계 인사들이 소외되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2인자였던 저수가 급기야는 탄핵까지 받고 점차 실각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곽도 · 순우경(淳于瓊)을 위시한 중원 출신의 관료계 인사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관도전투 무렵 원소군의 주요 간부들은 심배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전부가 하남출신의 인물들이며 이를 봤을때 원소와 저수의 대립은 지역적,정치적인 고려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정황을 감안하였을 때, 원소 진영의 파벌 싸움은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다시피 간부들의 거듭된 다툼 속에서 우유부단한 원소가 방관자적 위치를 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소가 파벌 싸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자신의 반대파를 배제한 것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저수와 전풍(특히 전풍)은 조조의 라이벌이었던 원소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의도적으로 신격화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관도전투와 그 이후
건안 4년(199년), 공손찬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병합하였다. 이로서 그의 세력은 기주 · 유주 · 병주 · 청주 등 4주에 미치게 된다. 원소는 원담을 청주자사, 원희(袁熙)를 유주자사 , 조카 고간(高幹)은 병주목(幷州牧)으로 삼아 각각 통치하게 했다. 이들은 원소 생전에는 복종하였으나 원소 사후 어리고 지지기반이 약한 원상이 집권하여 중앙의 감시가 소홀해지자 제각기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 비록 진수의 삼국지는 원담, 원희, 고간의 자사 임명을 199년으로 서술했지만 원담은 이미 193년부터 청주에 부임한데다(자치통감), 196년에 정식으로 자사(후한서)가 된 것으로 보이기에 엄밀히 말해 삼국지의 기록은 틀린 것이다. 고간과 원희의 경우도 임지에 부임한 해가 199년인지 알 수 없으며, 이는 아마 199년까지의 일을 축약해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200년. 유비(劉備)가 조조를 배반하고 서주를 점거해 원소와 동맹을 맺은 일은 모처럼 만나기 힘든 호기였으나 원소는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고 있을 때, 참모 전풍이 조조의 배후를 찌르도록 진언했지만 자식의 병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아 기회를 놓치고 만다. 결국 유비는 패배하여 원소에게로 도망쳐 왔다.
- 이때 원소가 아들의 병을 이유로 출병을 거절한 사건은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이었을 뿐더러, 일가가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을 때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던 이전 원소의 행동과도 반대되는 태도였기 때문에 단지 핑계였을 뿐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1]
곧 본격적인 원소의 남진이 시작되었다. 원소군은 국지전에서 안량(顔良)과 문추(文醜)와 같은 유력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손실을 입었지만, 사실 전황 자체는 순조로운 원소군의 우위로 진행되었으며 철수를 거듭하던 조조는 군세를 모아 관도에서 원소를 요격했으나, 대패하여 굳게 진영을 지킨다. 원소는 관도를 포위공격했으나 조조군 역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므로 3개월 가까이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조조가 관도에서 고립되고 전황이 조조에게 점점 불리하게 되자, 원소의 선동공작이 효과를 거두어 조조의 세력권 내 여러 곳에서 원소에 호응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특히 예주의 경우는 단지 양안(陽安)군만을 제외한 모든 군현이 원소에게 호응해 반기를 들 정도였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조조는 패배직전의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원소의 참모 허유(許攸)는 자신의 비리가 드러난 것이 두려워 원소를 배신하며 조조에게 원소군 군량고의 위치 등의 기밀 정보들을 가르쳐 줬는데. 그 결과 오소(烏巢)의 보급기지는 조조에게 함락당했으며 그 책임 소재를 두고 간부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끝에 장합(張郃)과 고람(高覽)이 원소를 떠나 조조의 밑으로 갔다. 이때 둘은 원소를 공격하고 진영을 불태워버린 뒤 조조에게 투항했는데, 이로 인해 원소군은 대혼란에 빠졌으며 총대장 원소의 생사조차 불분명해졌으므로 사실상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어 어이없이 괴멸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원소의 영지 내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 뒤, 관도의 패잔병들을 수습해 귀환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현들을 모두 공격해 평정한다.(201년 4월)
비록 관도에서 패하긴 했지만 원소의 세력은 여전히 조조를 웃돌고 있었다. 하지만 원소는 패배한 이후 병을 얻어 조조에게 설욕하지도 못한 채 건안 7년(202년) 여름에 피를 토하며 죽었다. 원소는 사람됨이 관아하였으며 올곧고 바른 정치를 펼쳐 존경을 받았고, 그에게 불만을 내는 목소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원소가 죽자 지체높은 사대부로부터 시골의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하북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 죽음을 비통해하여 온 거리와 저자에 통곡이 끊이지 않았으며, 간혹 원소의 죽음을 두고 부모가 죽은 것처럼 상을 치르는 백성들도 있었다.
비록 원소가 생전 원상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나 원상은 장성하지 못했던 데다가, 원소 역시 유조를 남기지도 못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때문에 어린 원상의 기반은 극히 취약했다. 원담은 노골적으로 원상을 거역하며 대립했으며, 결국 실패하게 되자 조조에게 항복하여 조조와 같이 원상을 공격했다. 또한 고간 역시 표면적으로는 원상을 따랐으나 한편으론 은밀히 자립을 획책하여 원상이 조조와 원담에게 협공당하는 위기에 빠지자 원상을 배신했으며 군사를 이끌고 업을 습격해 전복시킬 계획을 세운다. 결국 건안 9년(204년)에 조조에 의해 업이 함락되면서 원소의 세력은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원담은 업이 함락된 이후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죽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홍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205년 1월)
원상은 각지를 망명하며 재기를 도모하지만 최후엔 요동에서 공손강에게 살해당하여 그 수급이 조조에게 보내진다. (207년 9월,혹은 10월)
원소에 대한 평가
사가의 평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원소를 유표와 묶어 평가했다.
"원소와 유표는 모두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넓은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 유표는 한강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략을 좋아하였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므로,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초나라 항우는 범증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항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다."
진수는 원소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며, 원소의 능력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곧 무자비하게 원소를 깎아 내렸다. 또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원소가 전풍을 죽인 일은 항우의 실책보다도 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후에 쓰여진 후한서 등의 다른 기록을 보았을 때 원소는 그의 실책보다는 위진을 정통으로 하는 시각의 영향으로 인해 크게 폄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각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던 후한서의 저자 범엽은 원소를 이렇게 평가했다.
"본디 원소는 호협한 기백으로서 따르는 무리를 얻었으며, 마침내는 웅패의 뜻을 마음에 품었다. 천하의 승병(이기는 군사)들을 이끌며 이로서 위명을 떨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시험에 직면함에 이르러서는 과감히 결단하여 맞섰으므로 이에 날랜 장정들은 목숨을 다투어 그를 따랐으며, 깊은 꾀를 가지고 또한 의론에 뛰어나 지혜 있는 선비들도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성재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원소가 실패한 이유 역시 진수와는 다르게 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긍심이 강해 오만하며 스스로의 기량을 지나치게 과신했으므로 (다른 사람의 간언을 받아들이며)선을 행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관도에서 패하기에 이른 것이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원소
원소는 진수의 위진을 정통으로 보는 시각에 의해 상당히 폄하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소설 삼국지연의 의 저자 나관중은 연의에서 원소를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인물의 전형으로 묘사했다. 독선적이고 과감한 면모를 보이던 원소는 삼국지연의의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우유부단함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인물상이 왜곡되었고 이 시각은 수백년간 지속되어 현대에도 원소는 우유부단한 인물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소는 연의에서든 정사에서든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의 평가
또한 20세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조조 재평가 운동도 원소를 더욱 폄하하는 데 기여했다. 조조 재평가의 시류는 조조를 시대를 선도한 진보적인 개혁자,영웅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지나친 나머지 조조의 가장 큰 적이었던 원소는 오랜 권위에 기댄 부패한 기득권층,사치스러운 귀족의 상징으로서 묘사되어 낡은 질서의 수호자라는 이미지까지 덧씌워졌으나 사실, 이 또한 극도로 편향적인 시각의 산물로 그들이 인용한다는 사서를 살펴보아도 대부분이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소가 사치스럽고 우유부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기록에 의하면 오히려 원소가 청렴함으로 이름을 떨쳤고 우유부단하기는 커녕 지나치게 과감하고 독선적인 면모를 보인 점을 알지 못한다.
또한, 조조는 환관의 가문 출신이고 원소는 사대삼공의 가문이라 태생부터 원소는 기득권층인 청류고 조조는 소외 계층인 탁류라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당시 환관 계급의 위세와, 원씨가 환관과 결탁하여 영달을 누린 가문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또한, 사대삼공 자체가 기득권의 상징이고 원소는 이를 자연히 그대로 물려받아 주변의 떠받듦을 받으며 자라 왔고, 가문의 힘으로 순조롭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람들은 원소의 어머니가 노비였고 원소가 젊은 시절의 조조 - 방탕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순조롭게 출세할 수 있었던 - 와 달리 어려서부터 얼마나 인맥과 경력의 구축에 신경을 썼는지 역시 간과한다.
원소는 삼국지 연의의 시대에서부터 우유부단의 상징과도 같은 무능한 귀족으로 왜곡되었고 이 왜곡된 허구는 그 자체로 본질적인 실체인 것처럼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조조 재평가의 시류에 맞춰 새로이 생성된 부패한 수구세력이라는 왜곡된 이미지 역시 이의 연장선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는 삼국지를 소재로 한 현대의 많은 작품에서 그려졌고 조조복권론이 힘을 잃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끈질기게 남아 있을 것이다.
원술(袁術, ? ~ 199년)은 중국 후한의 군웅으로 자는 공로(公路)이다.
생애
사세삼공(四世三公, 4대가 모두 삼공에 임명된 집안)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소는 원술의 배다른 형이었다는 설이 있다. 조조(曺操)와 마찬가지로 어려서는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난폭하여 협객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나 이후 태도를 고쳤다. 효렴으로 천거된 뒤 지방과 중앙의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대장군 하진의 시대에는 호분중랑장으로 있었다. 하진이 십상시에게 참살당한 직후, 원술은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며 불을 질렀다. 동탁(童卓)이 낙양(落陽)에 입성하여 정권을 잡았을 때 원술을 후장군(後將軍)에 임명했지만 원술은 이를 피해 달아났으며, 강남의 유력한 무인인 손견(孫堅)을 부하로 삼으며 완 땅을 근거하여 세력을 일으켰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이에 참여했는데, 맹주인 원소는 동탁을 황제를 시해한 역적이라 규탄하고 당시 황실 역시 동탁에 의해 세워진 괴뢰 정부로 규정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높은 호응을 받아 각지의 호족과 지방관들은 원소의 선동에 이끌려 황실을 괴뢰로 간주하여 무시하고 거병하여 원소를 따랐다. 또한 원소는 새로운 황제로 높은 명망이 있던 황족인 유우(劉虞)를 추대하려고 했다. 이는 유우를 구심점으로 하여 원소의 선동에 호응한 각지의 세력들을 결집하고자 함이었으나, 원술은 장차 신하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고 또한 현명한 유우가 옹립되면 자신의 야망에 방해가 될 것으로 여겼으므로 겉으로는 공의를 핑계되어 유우의 옹립에 반대하고, 당시 황실의 정통성을 옹호하며 장안까지 역적 동탁에게서 구출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원소를 역심을 품고 있다고 규탄하며 원소와 대립했다. 또한 정실 출생이었던 원술은 노비에게서 태어난 원소가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내던 것을 시기하며 항상 경멸하여 공공연하게 원소를 '가노(家奴)'라고 일컬었는데, 원술은 원소가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크게 주목을 받는 데에 분노하여 심지어 원소가 원씨의 자식이 아닌 사생아라는 말까지 퍼뜨리고 다녔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유우 본인이 이를 굳게 거절했으므로 원소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밖으로는 유우의 추대에 실패하고, 안으로는 원술을 중심으로 뭉친 반대파의 비난을 받았으므로 결국 연합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또한 원소가 유우의 옹립으로 결집하고자 했던 추종세력들 역시 구심점을 잃고 흩어져 각지에서 할거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이것이 군웅할거의 시작이다.
한편 원술은 손견 등을 선봉으로 삼아 동탁군을 격파하고 낙양까지 진군하며 잠시간 승승장구했으나 원소는 평소 원술과 사이가 나쁘던 주씨 형제를 이용해 원술을 견제했다. 주앙(周昻)을 예주자사로 삼아 파견하며 예주와 사예 사이의 중간지점이며 원술군의 전진기지인 양성(陽城)을 점령했는데, 이로 인해 원술과 손견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고 이후 예주와 회남 일대에서 주씨 형제와 수 년간의 접전을 벌인다. 또한 원소는 형주의 유표(劉表)와 연합하며 원술이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견제했다. 원술 역시 북방의 공손찬(公孫瓚), 도겸(陶謙), 어부라(於夫羅) 등을 움직여 원소를 견제하며 형주로 진군하고 유표를 몰아붙였지만 손견이 전사한 뒤 전세가 불리해져 결국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또한 원술은 사치스럽고 음란하며 영내에서 세금을 마음대로 걷었으므로 신망을 잃어갔다.
형주 진출에 실패한 원술은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공손찬 등과 함께 원소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이들은 모두 원소에게 격파되었으며, 원술 역시 원소의 지원을 받은 조조에 의해 완에서 쫓겨났다. 원술은 회남으로 도망쳤는데 그 곳에서 양주자사 진온(陳溫)과 진우(陳瑀)등을 격파해 죽이고, 일대 중소 군벌들을 병합해 수춘을 근거지로 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해 재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무렵 원술은 마침내 숙적이었던 주씨 형제들을 모두 격파하여 내쫓는데 성공한다.
또한 원술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주로 세력 확장을 시도했는데, 이는 연합관계에 있던 도겸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병이 들어 위독해진 도겸과 서주의 호족들은 유비(劉備)를 서주목으로 추대하며 조조와 원술에게 맞서게 했고 서주에서는 유비와 원술의 전투가 벌어진다. 조조는 이 무렵 장막(張邈), 여포(呂布)의 침입을 받아 더 이상 서주를 공격할 수 없었다.
한편 손견의 장남 손책 역시 원술을 따르고 있었는데, 자립할 야심이 품고 있던 손책은 도망간 양주자사 유요(劉繇)를 공격하게 해달라며 병사를 요청했다. 손책의 재능을 견제하고 있던 원술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아직 어린 손책에게 유요를 격파한 뒤 세력을 형성해 독립할만한 역량은 없다고 판단해 마침내 손책의 출정을 허용한다. 손책은 유요를 격파한 뒤 양주 남부를 장악했지만 아직 원술이 강성했으므로 여전히 원술에게 순종했다.
이때 이각(李傕)은 원술과 손을 잡으려는 생각에서 좌장군에 임명하고 양적후(陽翟侯)로 봉하며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를 칙사로 보내 배수하려고 했지만, 원술은 마일제의 부절을 빼앗고 그를 억류한 채, (태부의 권한을 이용해)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도록 협박한다. 원술에게 억류된 채 이용당하던 마일제는 수치심과 노여움으로 인해 죽고 만다.
또한 이 무렵 장막은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했다. 장막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원술에게로 향하던 도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여포는 장막의 남은 막료들과 함께 유비를 의지하고 있었는데, 유비가 원술과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점거한다. 원술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여포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원술은 여포를 이용해 유비를 죽이고 조조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여포의 사람됨이 워낙 단순하고 변덕이 극심했던 데다가 서주의 유력한 호족인 진규(陳珪) 역시 원술의 야망을 경계해 여포를 부추기며 원술과의 연합을 제지했으므로 결국 원술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유비를 죽이기 위해 수하 장수인 기령을 보냈으나 여포가 유비와 기령을 강제로 화해시키는 바람에 이 역시 무산되었다.
195년. 헌제는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하나 조양(曹陽)에서 이각,곽사(郭汜)등은 에게 크게 패하고 갖은 고초를 겪는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원술은 한 황실은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 마침내 충신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참칭할 마음을 품지만, 막료 염상(閻象)이 반대하자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또한 이 무렵 원술은 황제를 맞이하려는 조조를 저지하나 결국 조조의 천자 봉대를 막지 못한다.
197년 봄. 마침내 민간에 떠도는 참언을 이용하여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성(成), 연호를 중씨(仲氏)라고 했으나 이 참칭으로 인해 원술은 민심을 잃었고 손책은 원술에게서 독립했다. 이때 원술은 자신의 아들과 여포의 딸을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 혼담은 거의 확정되어 있었으나 진규의 방해로 인해 끝내 결렬되었고, 이에 원술은 장훈을 대장으로 삼아 일곱 갈래로 대군을 보내 여포를 공격하지만 이 또한 진규의 활약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그해 가을 9월, 원술은 진(陳)국을 쳐서 진왕 유총(劉寵)등을 죽이며 세력을 만회하려고 했지만, 이 직후 조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모든 낙관적 가능성을 상실한 원술은 이후 사치와 포악함이 더욱 심해졌다. 당시 원술은 첩 수백명을 모두 비단으로 치장시키고 창고엔 쌀과 고기가 썩을 정도로 남아돌았으나,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영내의 백성들은 기아에 시달리다 못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편 여포는 뒤늦게야 원술과 연합하여 조조에게 저항했다. 여포가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당하자 원술은 직접 기병 1천기를 이끌고 여포를 구원했지만 오히려 조조의 반격을 받아 패주하고 만다. 원술은 겨우 성을 지켜내며, 이후 다시는 여포를 구하기 위해 출전하지 못했으니 원술이 얼마나 몰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여포는 조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고, 원술은 산적이 되어있는 옛부하 뇌박, 진란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그들에게 거절당했다.삼국지연의에서는 뇌박과 진란이 도적이 되었기 때문에 아예 뇌박과 진란이 원술을 습격해서 금품을 갈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갈 곳이 없게 된 원술은 원소에게 편지를 보내 제호를 바치며 말했다.
“한나라가 천하를 잃은지 오래되어, 천자는 손에 끌려 다니며, 정사(政事)는 권신들의 집안에 있고, 호걸 영웅들은 각축하며 강토를 나눠 찢으니, 이것은 주나라 말기에 전국 칠웅(戰國七雄)이 세력을 나눴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끝내는 강한 자가 겸병하게 될 뿐입니다. 더하여 원씨는 천명에 의해 왕이 된다는 상서로운 조짐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군(=원소)께서는 (하북)4주를 옹유하며 백성들의 호구는 백만이요, 강한 것으로는 이보다 더 큰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으며, 덕을 논하자면 이보다 더 높은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습니다. 조조는 쇠퇴하고 미약한 한실을 붙잡고 돕고 있다지만, 어찌 끊어진 천명을 잇고 이미 멸망한 것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원소는 여기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지만 은밀히 원술의 말을 옳다고 여겼다고 한다. 원술은 청주자사로 있던 조카 원담(袁譚)을 의지하려고 청주로 향했으나 조조가 파견한 유비에 의해 저지당했다. 원술은 수춘에서 80리 떨어진 강정(江亭)에 이르러 꿀물을 찾았지만 그조차도 구할 수가 없었다. 원술은 책상에 걸터앉아 말하길, “나 원술이 이렇게 되기까지 이르렀구나”라고 하며 몇 번이나 크게 탄식하다가 마침내 피를 한말 가량 토하고 죽었다.
원술 사후, 원술의 일족은 손책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원술의 딸은 손권의 측실이 되었으며, 원술의 아들 원요(袁燿)는 손책에게서 낭중에 임명되었다. 또한 원소의 딸은 손권의 오남인 손분(孫奮)의 부인이 된다.
기타인원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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