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20 (후한 시대) 본문
중국의 역사 20 (후한 시대)
한왕조는 애초에 유방이 건설한 한나라와 왕망에 의해 망했다가 다시 유수가 세운 한나라로 구분된다. 전자를 전한 또는 서한이라고 하고 후자를 후한 또는 동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전한이 왕조체제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시험한 시기였다면 후한은 전한대에 이룩한 것을 답습한 시기라고 본다. 따라서 후한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환관과 외척에 의한 권력다툼 속에 왕조의 붕괴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광무제 유수는 유씨의 한나라를 중흥하여 후한 제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유수가 비록 황족 출신이기는 해도 이 시기에는 사회적 신분이 중하급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왕조를 중흥시키기 어려웠다. 오히려 당시 반란이 일반화된 사회상황 속에서 유수는 놀라운 군사적 운용능력을 발휘하여 중흥주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유수는 인구의 격감과 전통의 파괴라는 현실 앞에서 중앙집권을 포기하고 화폐경제를 강화하여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등의 대개혁을 단행하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도 광무제의 후한은 전 시대와 구별되기 어려운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면 전 후한에 걸쳐서 400년을 이어온 한왕조가 멸망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환관과 투후 및 외척과 붕당이 가장 큰 원인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진행 과정을 살펴볼 때. 이러한 문제들은 망하기 전에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보는 경향도 있다. 따라서 환관 등의 문제와 정책적인 결함으로 변화에 슨응하지 못한 것이 왕조 패망의 이유로 볼 수 있다. 간소했을 때에는 통제가 가능했던 부분들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정책과 집행의 유기적 통제 불능의 상태가 야기되었고, 그 결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 문제를 풀어갈 새로운 해법을 구하는데 실패했다. 한 마디로 한왕조는 정치적인 권력투쟁이 계속되었고 후반부에는 어린 황제를 내세워 환관세력과 태후들과 외척들의 권력투쟁이 가속화 되었고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에 부응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왕조의 멸망은 집권층의 문제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정책적인 결함이 가미되어 복합적인 요인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한 세조 (漢世祖) |
광무황제 (光武皇帝) |
유수(劉秀) | 건무(建武) 25년 ~ 56년 건무중원(建武中元) 56년 ~ 57년 |
25년 ~ 57년 |
제2대 | 한 현종 (漢顯宗) |
효명황제 (孝明皇帝) |
유장(劉莊) | 영평(永平) 58년 ~ 75년 | 57년 ~ 75년 |
제3대 | 한 숙종 (漢肅宗) |
효장황제 (孝章皇帝) |
유달(劉炟) | 건초(建初) 76년 ~ 84년 원화(元和) 84년 ~ 87년 장화(章和) 87년 ~ 88년 |
75년 ~ 88년 |
제4대 | 한 목종 (漢穆宗) |
효화황제 (孝和皇帝) |
유조(劉肇) | 영원(永元) 89년 ~ 105년 원흥(元興) 105년 |
88년 ~ 105년 |
제5대 | - | 효상황제 (孝殤皇帝) |
유융(劉隆) | 연평(延平) 106년 | 105년 ~ 106년 |
- | - | 효덕황제 (孝德皇帝) (후한 안제 추숭) |
유경(劉慶) | - | - |
제6대 | 한 공종 (漢恭宗) |
효안황제 (孝安皇帝) |
유호(劉祜) | 영초(永初) 107년 ~ 113년 원초(元初) 114년 ~ 119년 영녕(永寧) 120년 ~ 121년 건광(建光) 121년 ~ 122년 연광(延光) 122년 ~ 125년 |
106년 ~ 125년 |
제7대 | - | 소황제 (少皇帝) (북향후<北鄕侯>) |
유의(劉懿) | - | 125년 |
제8대 | 한 경종 (漢敬宗) |
효순황제 (孝順皇帝) |
유보(劉保) | 영건(永建) 126년 ~ 132년 양가(陽嘉) 132년 ~ 135년 영화(永和) 136년 ~ 141년 한안(漢安) 141년 ~ 144년 건강(建康) 144년 |
125년 ~ 144년 |
제9대 | - | 효충황제 (孝沖皇帝) |
유병(劉炳) | 영희(永憙) 145년 | 144년 ~ 145년 |
제10대 | - | 효질황제 (孝質皇帝) |
유찬(劉纘) | 본초(本初) 146년 | 145년 ~ 146년 |
- | - | 효목황제 (孝穆皇帝) (후한 환제 추숭) |
유개(劉開) | - | - |
- | - | 효숭황제 (孝崇皇帝) (후한 환제 추숭) |
유익(劉翼) | - | - |
제11대 | 한 위종 (漢威宗) |
효환황제 (孝桓皇帝) |
유지(劉志) | 건화(建和) 147년 ~ 149년 화평(和平) 150년 원가(元嘉) 151년 ~ 152년 영흥(永興) 153년 ~ 154년 영수(永壽) 155년 ~ 158년 연희(延熹) 159년 ~ 167년 영강(永康) 167년 |
146년 ~ 167년 |
- | - | 효원황제 (孝元皇帝) (후한 영제 추숭) |
유숙(劉淑) | - | - |
- | - | 효인황제 (孝仁皇帝) (후한 영제 추숭) |
유장(劉萇) | - | - |
제12대 | - | 효영황제 (孝靈皇帝) |
유굉(劉宏) | 건녕(建寧) 168년 ~ 172년 희평(熹平) 172년 ~ 178년 광화(光和) 178년 ~ 184년 중평(中平) 184년 ~ 189년 |
168년 ~ 189년 |
제13대 | - | 소황제 (少皇帝) (홍농회왕<洪農懷王>) |
유변(劉辯) | 광희(光熹) 189년 소녕(昭寧) 189년 |
189년 |
제14대 | - | 효헌황제 (孝獻皇帝) (효민황제<孝愍皇帝>, 산양공<山陽公>) |
유협(劉協) | 영한(永漢) 189년 중평(中平) 189년 초평(初平) 190년 ~ 193년 흥평(興平) 194년 ~ 195년 건안(建安) 196년 ~ 220년 연강(延康) 220년 |
189년 ~ 220년 |
유흠
남돈군(南頓君) 유흠(劉欽)은 중국 전한의 황족으로 전한의 제6대 황제 경제(景帝)의 서자 장사정왕(長沙定王) 유발(劉發)의 4대손이었다. 광무제와 유인 형제의 아버지였다.
욱림군(郁林郡)의 태수를 지낸 유외(劉外)의 손자이며 거록도위(鉅鹿都慰) 유회(劉回)의 아들로 태수(太守)와 남돈령(南頓令)을 역임하였다. 뒤에 기원후 23년 셋째 아들 유수가 후한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군으로 추봉되었다.
한나라 부흥군의 황제였던 경시제 유현은 그의 7촌 조카였다.
제1대 광무제
한광무제 유수(漢光武帝 劉秀, 기원전 6년 ~ 서기 57년)는 중국 후한의 초대 황제이다. 한 고조 유방의 9세손이며, 남양의 채양현 출신이다. 남둔 현령으로 남둔군에 추증된 유흠의 아들이다. 자는 문숙(文叔)이다. 전한 경제의 후궁 정희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조는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외척들의 등장으로 황족들이 권력 주변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여 왕-후-현령으로 지위가 떨어진 가문이다. 기원후 3년 유수의 부친과 일가는 고향 남양으로 돌아가 평민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서한(전한) 정권의 부패와 무능, 경제적인 궁핍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기원후 9년에는 외척인 왕망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한 왕조를 멸하고 신나라를 세웠다. 왕망은 세금을 올리고 법령은 가혹하게 집행하였으며 법령도 조석으로 바뀌곤 하였다. 7년 동안 4번이나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산가들은 파산하고 사회적 혼란, 갈등, 불만이 증폭되고 있었다.
기원후 17년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발생되었는데, 그 중에서 세력이 강하였던 3개 지역은 호북서북부 왕광.왕봉의 녹림군(녹림산 근거 거병), 산동 동부/강소 북부의 번승의 적미군(눈쎂을 붉게 물들임), 하북성 일대 동미군 등 10여 개 반란군이 준동하였는데 천하가 군웅할거 시대로 전락하였다.
유수는 키가 크고 수염과 눈쎂이 반듯하며 입이 크고 코가 높으며 이마가 넓은 미장부였다고 한다. 일찌기 부친과 농사를 지어면서 형 유연과는 성격이 달랐다고 한다. 형 유연은 성격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으로 각지의 인사들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유연은 자신을 전한 고조 유방에 비유하면서 뜻을 세우려 하였는데, 유수도 그런 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22년 대기근이 찿아오자 농민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기 시작하였고, 28살의 유수와 유연 형제도 종중세력을 규합하여 거병하였고 녹림군과 합류하였다.
서한(전한)-동한(후한) 사이 여러 영웅호걸들이 출현하였는데, 왕망, 왕랑, 우현, 유분자, 장보, 우영, 이헌, 팽총, 노방, 공손술 등이다. 유수는 녹림군에 합류한 이후 여러해 동안 수많은 전투를 통해 기량이 향상되었고 여러번 죽을 고비도 넘겼다. 유수는 전투시기를 자신이 정한 시간에 적과 접전을 벌였으며 병력의 집중과 분산, 각개격파, 정면공격과 기습의 병용, 강적은 회피하고 약한적을 골라 섬멸하는 전법, 연속공격으로 적이 쉴 틈을 주지 않았으며 부하들의 인화를 중시하고 군기를 엄정히하면서 능력과 재능이 있다면 누구던지 발탁하는 인재등용으로 부하 장수들로 하여금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토록 하는 능력이 있었다.
또 유수는 인간적인 매력과 강인한 의지, 전략전술의 다양성, 전장터에서 누구보다도 앞서 나가는 용맹성 등이 결합된 인물로 역대 제왕들에게 찿아 볼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로서 천하의 군웅들을 끌여들여 결국 천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일개 평민에서 역사에 빛나는 명군으로 거듭난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 건흥제 왕망(王莽)에 맞서 전국적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유수도 형 유인과 함께 봉기하여 녹림군에 가담하였는데 세력이 늘어나 10만 가까이 되었다. 한왕실의 후손인 유현을 황제로 세우고 경시라 하였고, 23년에 녹림군이 완성을 포위하고, 왕봉, 왕상, 유부 등에게 2만 병력을 주어 북상하여 곤양, 정릉, 언현을 함락하여 물자를 확보 하였다. 녹림군이 곤양을 점령하자 왕망의 도성 장안을 위협하였다. 이에 놀란 왕망은 급히 각지의 정예군사를 동원하여 왕읍, 왕심으로 하여금 신나라 군대 42만여 명을 이끌고 곤양을 포위하였다. 이 때, 곤양에는 8~9천의 녹림군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장수들이 병력이 열세하니 철수를 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유수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더 기다려 보자며 장수들을 설득하여 달래는 한편, 자신은 병력 13기를 이끌고 야간에 은밀히 적의 포위망을 뚫고 원군을 요청하러 갔다. 왕망군의 왕읍, 왕심은 군세를 믿고 부하 장수들의 건의를 무시한 채 곤양성을 공격하였으나 녹림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수차례 공격에도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망군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유수는 원군 1만여 명을 이끌고 돌아와 선두 1천여 명의 병력이 왕심군과 대치하였다. 왕심이 수천의 병력으로 먼저 공격을 해왔다. 유수는 1천여 기를 이끌고 적진을 향해 맨 앞에서 칼을 휘두르며 돌격, 접전을 벌인 결과, 적병 1천여 명을 죽이고 승리했다. 또한 심리전을 전개하여 왕망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유수는 3000여 기를 이끌고 비밀리에 곤수를 건너 적의 측후방을 공격함과 동시에 왕읍, 왕심의 본대를 습격하였다. 왕망군은 적의 위계에 대비하여 다른 병력의 움직임을 통제한 채 1만 여기로 대응해 왔다. 이에 성안에 있던 녹림군도 호응하여 성문을 열고 왕망군을 양쪽에서 공격하자 적이 와해되면서 적장 왕심이 전사하고 왕읍은 퇴각하는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다가 때마침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병사들이 익사하는 등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수천명의 병력만 대리고 왕망이 잇는 장안으로 도망갔다. 신나라 주력군은 어이없게도 섬멸되고 말았다. 2만의 병력으로 42만의 적을 물리치자 유수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때 당시, 녹림군의 황제를 자칭하던 한 왕족 후손인 경시제 유현은 같은 황족 후예라는 점과 유연의 호방한 성격 등에 질시와 불안감을 느끼고 유연과 유수를 죽이려 했다. 이를 알아챈 유수는 유현에게 달려가 충성을 다하는 척 사죄하였으며, 심지어 형 유인이 트집이 잡혀 죽었는데도 형을 위하여 상복을 입지 않았다. 또 그동안 결혼을 미루어 오던 처녀 음려화와 거창한 결혼식도 올리고 즐거운 척 하면서 낮에는 웃고 밤에는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 살신지화를 벗어났다. 이러한 인내로 화를 면한 유수는 유현의 신임을 받아 유수에게 대사마 직책을 주어 화북을 통치토록 하면서 그를 위로했다. 유현의 순간의 가장 큰 실수는 영원히 돌이킬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왕망 정권이 무너진 후 천하는 군웅세력들로 더욱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유수는 곧 유현에게서 떠나 하북에 정착했다. 당시 화북은 형세가 매우 복잡하였는데, 여러 무장세력들이 준동하고 있었다. 유수는 풍어가 건의한 "원한은 풀어주고 혜택을 배풀며", 등우가 건의 한 "영웅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얻는다"는 정책을 지속하면서 민심을 얻고 세력기반을 조성하였다. 이후 유수는 왕망과 적미군을 연달아 격파하면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무능한 경시제를 폐위하고, 점점 세력을 넓혀 나라를 세우니 이가 후한(後漢)이다. 이때가 25년 6월 때의 일이다. 도읍은 낙양에 정하고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다.
유수는 건무 원년 25년 6월 남하하여 낙양을 포위하고 주유의 투항을 받고 30만 병력을 확보한 다음 적미군을 격파하기 위해 등우.풍이를 파견하여 유문자의 항복을 받아내고 100만 병력을 추가로 확보하였다. 그후 13년 동안 유영을 토벌하고 외류를 섬멸하였으며 공손술도 평정하고 건무 13년, 기원후 36년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약속한 대로 세금을 감면하고 노비를 해방시켰으며,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유수는 유방과 달리 공신들을 죽이지는 않고 권력을 탐내지 못하도록 풍족한 대우로 후덕하게 살도록 하였다. 공신들의 권력장악을 방지하기 위해 문신들을 등용하여 정책과 통치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정무와 새벽 조회, 밤 늦도록 신하, 장수들로 하여금 같이 경전을 논하게 하였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봉건통치 보호에 힘쓰며 국가통일 유지에 노력했다. 백성들의 편안한 삶에 치중하고 사회경제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만년에는 도참설을 신봉하여 천하에 선포하고 전체적으로 정무에 성실하였던 황제였다.
57년 2월에 유수는 낙양의 남궁에서 붕어하였으니 그 때 나이가 63세였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광무황제(光武皇帝)이다.
후한 광무제 | |
---|---|
![]() | |
후한의 초대 황제 | |
재위 | 25년 ~ 57년 |
황후 | 폐황후 곽씨 광렬황후 |
다음 황제 | 명제 |
가족
- 아버지 : 남돈군 유흠
- 어머니 : 계씨, 계중(樊重)의 딸
- 형 : 유인(縯)
- 형 : 유중(仲)
- 황후 : 폐황후 곽씨(廢皇后 郭氏)
- 동해공왕 유강
- 패헌왕(沛献王)
- 예남안왕(济南安王) 유강(劉康)
- 부릉왕(阜陵王) 유연(劉延)
- 중산간왕(中山簡王) 유언(劉焉)
- 황후 : 허씨
- 초왕(楚王) 유영(劉英)
- 황후 : 광렬황후(光烈皇后)
-
- 제2대 명제 유장
제2대 명제 : 생략
제3대 장제
한장제 유달(漢章帝 劉炟, 58년 ~ 88년, 재위 78년 ~ 88년)는 후한의 제3대 황제이다. 아버지는 명제(明帝). 묘호는 숙종(肅宗)이며, 정식 시호는 효장황제(孝章皇帝)이다.
제4대 화제
한화제 유조(漢和帝 劉肇, 79년 ~ 105년, 재위 88년 ~ 105년)는 후한의 제4대 황제이다. 아버지는 장제(章帝). 묘호는 목종(穆宗)이며, 정식 시호는 효화황제(孝和皇帝)이다.
장제(章帝)의 서자로 넷째아들로 태어났으며 귀인 양씨(貴人梁氏) 소생이다. 생모인 양귀인(梁貴人)은 궁정내의 다툼속에서 장제의 황후 두씨(竇氏)에게 살해당했다. 폐위된 이복형 후한 덕제를 대신하여 태자가 되고 88년 9살로 즉위하여 화제 이후 어린 황제가 계속 즉위해 후한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당연히 9살 아이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기에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여 황태후의 오빠인 두헌(竇憲)이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두헌은 흉노토벌에서도 전공을 세우게 되어 대장군이 되었다.
화제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이에 반감을 품게 되었고, 실권을 자신에게 되돌리길 바랐다. 이 감정은 두헌측에게도 알려져, 두헌은 화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화제도 그 움직음을 알아채고, 두씨토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화제가 모신으로 선택한 이가 환관 정중(鄭衆)이었다. 정중을 선택한 이유는 한가지 환관이기에 비밀리에 모의를 할 수 있고, 정중 자신이 뛰어난 인물이며 눈썰미도 있었고, 두뇌가 명석해 행동력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92년 두헌을 궁정내에 불러들여 대장군의 인수(印綬)을 되찾고 실권을 빼앗은뒤, 영지에 보내 자살을 명했다. 이로 인해 두씨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실권을 되돌리게 되었다. 정중은 공적이 커서 단향후(鄲郷侯)에 봉해지고, 대장추(大長秋)의 직책을 받았다. 그후에도 정중을 신임해 화제의 정치는 측근정치의 색을 띠었고 이것이 후한에서 환관의 횡포의 효시가 되었다. 정중은 확실히 정권에 가세하게 되어, 이 이후 어린황제가 계속해서 등장하면서 외척세력과 환관세력간의 격렬한 다툼이 계속되게 되었다. 이렇듯 많은 상황으로 인해 [후한은 화제의 시대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라고 평했다.
또 한편 외정면에서는 후한의 시대에서 가장 활발한 시대여서 서역의 50여개국이 후한에게 복종했다. 이러한 성공은 반초(班超)의 역량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커서, 반초의 사후 서역에서 후한의 영향력은 일거에 약해졌다. 문화적으로는 직접 화제가 무엇을 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이 시대 후한의 문화에 대해서 특필한 것은 2가지이다. 한가지는 반고(班固), 반소(班昭)에 의한 『한서』(漢書)의 성립(92년)이고, 또 한가지는 채륜에 의한 제지법의 개량(105년)이었다.
가족
- 부황 : 제3대 장제 유달(? ~ 88년)
- 모후 : 장덕황후(章德皇后竇氏, ? ~ 97년), 두황후의 양자가 되었다.
- 생모 : 귀인 양씨, 추존하여 공회황후(恭懷皇后)
- 이모 : 귀인 양씨, 부황 장제의 후궁이자 생모 양귀인의 친언니.
- 이복형 : 천승정왕(千乘貞王) 유항(劉伉), 제10대 질제의 조부
- 이복형 : 덕제(덕제로 추존)
- 황후 : 폐후 음씨(廢后 陰氏)
- 계후 : 화희황후 등씨(和熹皇后 鄧氏)
-
- 장남 : 평원회왕 유승(平原懷王劉勝 ?~?)
- 차남 : 제5대 상제 유융(殤帝 劉隆)
- 아들 : 10명 요절
제5대 상제
한 상제 유융(漢殤帝 劉隆, 105년 ~ 106년, 재위 106년)은 후한의 제5대 황제이다. 화제(和帝) 유조(劉肇)의 차남이며 정식 시호는 효상황제(孝殤皇帝)이다.
화제는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했고, 외척 등의 모살을 의심했던 화제는 아들들을 민간에 위탁하여 양육하기에 이른다. 화제의 사후, 태후 등씨는 맏아들 유승이 지병이 있음을 이유로 삼아 당시 백일이 갓 지난 상제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유아인 상제가 정치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실권은 등태후를 비롯한 외척에게 쥐어져 있었다. 즉위한 이듬해에 병으로 죽어 요절했다는 의미의 殤이 시호로 부여되었다.
가계
- 부황 : 제4대 화제 유조
- 모후 : 화희황후(和熹皇后)
- 생모 : 미상
- 형 : 평원회왕 유승(平原懷王劉勝 ?~?)
- 사촌 : 제6대 안제 유호(劉祜)
제6대 안제 : 생략
제7대 소제
한 소제 유의(漢少帝 劉懿, ? ~ 125년)는 후한의 제7대 황제(재위:125년)이다. 아버지는 제북혜왕 유수(濟北惠王 劉寿). 제3대 황제 장제의 손자이다.
제6대 황제 안제의 사후, 황후의 염씨(閻氏)에 의해서 옹립 된다. 그러나 즉위 후 200일 쯤에 병에 걸려, 곧 사망한다. 그 후, 환관 손정에 의해 염씨 일족은 살해당하여 유의는 황제의 지위가 박탈되어 왕의 예를 가지고 매장했다.
제12대 영제
한영제 유굉(漢靈帝 劉宏, 156년 ~ 189년, 재위 168년 ~ 189년)은 중국 후한의 제12대 황제이다. 후한 장제의 고손자이다. 할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숙(劉淑), 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이며 어머니는 동태후. 후한 환제의 5촌 조카가 된다. 영제의 재위 기간의 잇따른 재해와 소규모 반란, 그리고 황건적의 난 등으로 영제의 재위 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게 되고, 삼국 시대로 이어진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당숙 환제 유지에게 후계자로 지목되어 1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영제가 즉위했을 때, 구렁이가 궁전 안에 나타나고 암탉이 수탉이 되는 등에 흉흉한 일이 계속 발생하자 의랑 채옹 등이 이 일에 나라를 망치는 십상시 때문이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 당시 궁궐 안의 권력을 쥐고 있던 환관 십상시들은 그들을 파직시켰다.
설상가상 십상시들이 영제의 귀와 눈을 막고 국정을 임의로 처리하여 곳곳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였고, 결국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여 점점 쇠퇴해 가던 후한에 결정타를 날렸다. 얼마 안 가 이 반란은 진정되었으나, 곧 영제는 중병에 걸렸다. 워낙 주색에 빠져 몸도 허약하기도 했다. 후계자 문제, 그리고 어머니 동태후와 부인 하황후, 그 오빠 대장군 하진 간의 암투에 휘말리기도 했다. 189년에 3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가계
- 부친 :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
- 모친 : 효인황후(孝仁皇后), 삼국지의 동태후
- 황후 : 황후 송씨(廢皇后 宋氏)
- 계후 : 영사황후, 삼국지의 하태후
- 장남 후한 소제
- 계후 : 영회황후, 삼국지의 왕미인
-
- 차남 후한 헌제
십상시(十常侍)
중국 후한 말 영제(靈帝) 때에 정권을 잡아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중상시, 즉 환관들을 말한다. 역사서 《후한서》(後漢書)에는 십상시들이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그들의 부모형제는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그 위세가 가히 대단하였다고 씌어져 있다. 특히 그들의 곁에서 훈육된 영제는 십상시의 수장인 장량을 아버지, 부수장인 조충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후한서》에는 이들이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영제의 붕어 이후, 대장군 하진을 죽인 후에 하진의 부하들에게 도륙당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이름과 수 모두 차이가 난다. 《후한서》에서는 12명, 《삼국지연의》에서는 10명이다.
황건의 난(黃巾之亂) 또는 황건적의 난(黃巾賊之亂)
중국 후한 말기 호족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배경
외척이나 환관의 전횡으로 인하여 부패한 정치 밑에서 한층 더 곤궁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미신적인 민간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세구제(現世救濟)의 종교가 유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태평도 창시
후한 영제 때에 거록(鋸鹿)의 장각(張角)은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호를 짓고 황천(黃天)의 신(神)의 사자(使者)라고 일컬으면서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장각은 스스로 아홉 마디(九節)가 나 있는 지팡이를 짚고 설교하고 다녔는데, 170년대 초 무렵부터는 제자를 사방에 파견하여 포교(布敎)에 힘썼다.이같은 교리는 빈곤 속에서 질병에의 공포와 불안을 품고 있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10여 년 사이에 화북(華北)의 동반부로부터 양쯔강(揚子江)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일대 교단(敎團)으로 성장했는데, 이 교단의 이름이 태평도(太平道)이다. 태평도는 주술(呪術)에 의한 요병(療病)을 중심으로 하고, 한대(漢代)에 유행한 참위설(讖緯說)·음양오행설 등과 잡다한 민간 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도가(道家)의 설로 윤색한 것이다.
장각은 이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빈민의 반(反)권력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군사적인 조직이 되기도 했다. 즉,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호를 지어 최고위에 앉고, 2명의 제자 중에서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일컬었으며, 1만 명 전후의 신도로 이루어지는 방(方)의 책임자로는 장각의 제자가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로부터는 사(師:스승)라 불림과 동시에 방은 그대로 장군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태평도는 후한 정부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정부는 탄압책을 강구하여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이것은 도리어 신도의 단결과 교단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반(反)권력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봉기
장각은 한제국(漢帝國)의 창천(蒼天) 대신 황천(黃天)의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60년 주기(周期)가 새로이 시작되는 갑자년(甲子年)인 184년의 음력 3월 5일을 기해서 봉기하려고 했다. 장각은 부하를 보내 뇌물을 주어 환관 봉서를 꾀어낸다. 그러나 궐기할 날짜를 눈앞에 두고 봉서에게 편지를 전하던 장각의 부하가 계획이 누설되어 장각의 심복과 환관 봉서가 처형되고 관련자 1000명이 옥에 갇힌다. 정부의 탐색의 손길이 뻗쳤기 때문에 장각은 갑자기 예정을 변경하여 음력 2월에 일제히 봉기하여 순식간에 전국 각지에서 대반란이 일어났다.
진압군 편성
황건적의 난은 후한 전국 13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후한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 하진과 대책을 의논한다. 이리하여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유주성 전투
의병을 일으킨 유비는 유주성으로 가 유주 태수 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 대치한다.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에 의해 베어진다. 이에 정원지는 직접 나서지만 오히려 유비의 의형제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인다. 대장 정원지가 쓰러지자 황건적들은 우왕좌왕하고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들을 무찌른다.
청주성 전투
유주성 전투 후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태수 유언은 교위 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려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
영천 전투
한편 형주 장사의 산골 영천에서는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과 주준이 장각의 동생 장량과 장보를 화공으로 공격해 무찌른다. 장량과 장보는 형 장각이 있는 광종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조조를 만나 1만 명의 전사자를 낸다. 유비는 뒤늦게 전투 후에 도착해 황보숭과 주준의 명으로 다시 노식이 있는 광종으로 돌아간다.
광종 전투
그러나 유비는 광종으로 가던 도중 노식이 뇌물을 거절해 모함을 받아 중랑장 자리를 빼앗기고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유비는 탁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노식에게서 받은 1000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탁군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탁군으로 가던 도중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에게 쫓기던 노식에게서 중랑장 자리를 빼앗은 중랑장이자 서량 자사 동탁을 도와준다. 그러나 동탁은 유비가 벼슬이 없는 것을 알고 무시하고 결국 주준에게로 갔다.
곡양 전투
유비와 주준이 양성에서 장보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병으로 사망해 황건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다. 장각의 뒤를 이어 동생 장량이 황건적을 이끌지만 관군 대장 황보숭은 황건적의 본거지 곡양을 기습 공격하고 기도위 조조를 앞세워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승리한다. 결국 장량은 곡양에서 전투 중 전사하여 목이 베이고 만다.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황보숭과 조조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황보숭의 상소로 노식을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한다.
양성 전투
양성에서 대치한 유비와 주준의 관군과 장보의 황건적은 치열하게 싸우고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황건적들의 부장 고승을 베면서 황건적들은 양성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에 유비는 기다리는 장기전으로 돌입해 황건적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유비의 작전은 그대로 성공해 황건적들은 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완성 전투
장각 삼형제가 죽은 뒤에도 황건적의 잔당 손중, 조홍, 한충 등이 군사를 모아 형주의 완성에서 저항하자 유비와 주준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다. 전투 중 손견의 1500명의 군사와 합류하여 다시 재정비를 하여 유비는 북문, 손견은 남문, 주준은 서문을 공격한다. 손견과 유비는 성벽을 넘어 황건적들을 무찌른다. 손견이 조홍을 사살하고 손중 역시 동문으로 도망가다가 유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그리고 한충도 주준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황건적의 난은 진압되고 남양군 10개의 고을이 평정된다.
황건적의 재봉기
그러나 황건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다.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 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성(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 그 후에는 192년 동탁이 죽고 이각과 곽사가 서량군을 무찌른 틈을 타서 청주에서 다시 수십 만 명에 이르는 황건적이 들고 일어난다. 이에 이각은 주준의 추천으로 종군태수 조조를 시켜 제북상 포신과 함께 청주의 황건적들을 토벌하고 제북까지 공격해 100일만에 황건적 30만 명을 항복시키고 청주병으로 흡수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황건적들의 활동을 계속되어 194년 황건적 잔당의 대장 관해가 군대를 이끌고 청주의 북해성을 습격하기도 했다. 북해의 황건적들은 유비와 태사자에 의해 토벌되고 그 뒤에도 동쪽에서 계속 약탈을 자행하던 황건적 대장 하의의 황건적 잔당은 조조에 의해 다시 토벌되었다.
하진(何進, ? ~ 189년 8월 25일)
후한 말기의 실권자이며, 후한 영제의 두번째 황후인 하황후의 오빠이다. 십상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도리어 십상시에게 암살당했다. 자는 수고(遂高)이다.
정권의 장악
하진은 원래 백정이었으나 누이동생이 영제(靈帝)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자 낭중에 임명되었다.(173년 무렵?) 이후 점차 승진하여 영천태수까지 이르렀는데, 180년에 누이동생이 마침내 황후에 임명되자 중앙으로 불려와 시중(侍中)이 되었다가 다시 승진해 하남윤에 임명되었다. 이후, 184년 장각(張角)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대장군에 임명되어 반란 진압의 총지휘를 일임받았다. 이때 하진은 장각의 제자 마원의(馬元義)가 낙양에서 봉기하려는 계획을 간파하였으므로 후에 봉해졌다.
그 해 12월, 왕윤(王允)이 십상시 중 하나인 장양(張讓)이 황건적과 밀통한 것을 알아차리자, 장양은 도리어 왕윤을 모함하여 처형당하게 되었다. 하진은 영제에게 상소를 올려 왕윤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뒤, 188년 하진은 영제에게 진언하여 서원삼군(西園三軍)을 만들고 영제에게 대장군의 상급 작위로 군의 최고 작위인 무상장군(無上將軍)을 제수받았다.
189년 영제가 죽자 십상시 중 하나인 건석(蹇碩)은 하진을 죽이고 유협(劉協: 훗날의 헌제)를 등극시키려 하였으나, 하진이 이를 알아차려 실패로 돌아갔다. 하진은 건석을 죽이고 그의 병사들을 차지하였다.
또한 궁중에서는 동(董)태후와 태후가 된 하진의 누이동생이 충돌하게 되었다. 동태후가 하태후에게 자신의 조카인 표기장군(驃騎將軍) 동중(董重)으로 하여금 하진의 목을 베게 할 수 있다고 하자, 하태후는 이를 하진에게 알렸다. 하진은 그 해 5월에 동태후와 동중을 내쫓았고, 두려움과 근심에 휩싸인 두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하고 죽었다. 이로 인해 하진은 민심을 잃었다.
십상시와의 대립과 죽음
당시 중군교위 원소는 평소부터 십상시를 주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하진이 정권을 잡자 그에게 접근해 십상시를 죽일 계책을 바쳤다. 하진은 이를 듣고 십상시들을 모두 제거하고자 했으나, 하진과 사이가 나빴던 동생 하묘(何苗)는 하태후에게 십상시를 죽이지 못하도록 말해 두었기 때문에 태후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원소가 외부의 군사를 불러들여 십상시를 처단할 것을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여 계획을 꾸몄다.
원소는 이 계획의 지휘를 맡아 외부의 몇몇 장군들을 낙양으로 불러들여 태후와 환관및 탁류 관료들을 압박하는 형세를 취했는데 이에 모두 겁에 질려 환관들을 주살하자고 말하였으나 유독 태후만이 듣지 않았다.
본디 원소는 십상시를 모조리 주살하고 궁정에 환관을 두는 제도를 완전히 폐지해 국정을 개혁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웠던 반면, 하진은 정권의 안정적인 유지에 관심이 있었으며, 환관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환관들을 은근히 경외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진은 원소가 계책을 내놓았을 때마다 항상 우유부단하게 대처해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며 이 무렵에도 역시 주저하기를 거듭하는 등 기민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원소는 하진이 또다시 계획을 바꿀 것이 두려웠으므로 "계획은 이미 완성되었고, 형세는 모두 드러났는데 더 이상 지체한다면 반드시 변고가 생길 것" 이라며 하진을 위협했다. 이에 하진은 왕윤을 하남윤으로, 원소를 사례교위로 삼고 가절을 내리는 등 원소를 필두로 한 청류 사대부에게 강력한 권한을 내렸다. 원소는 이에 더욱 강수를 두어 외부의 장군들을 도성 근처로 더욱 가까이 주둔하게 했고, 자파의 무인들을 금군으로 배치해 환관들을 철저히 감시하게 했다. 공포에 질린 태후는 마침내 굴복하여 십상시 이하를 모두 파면시키고 낙향하게 했는데, 원소는 이 틈에 이들을 모두 처단할 것을 하진에게 세 번이나 거듭하여 권했으나 또 다시 결단을 주저한 하진은 끝끝내 원소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원소는 하진의 명령을 위조하여 모든 주군에 중관의 친속들을 잡아들여 심문하도록 하는 등 하진의 결단을 몰아세웠으나, 하진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십상시의 수장 장양은 선수를 쳐 다시 태후의 환심을 샀고 그 결과 십상시들은 모두 복직되었다. 이를 본 하진은 마침내 하태후를 찾아가서 십상시를 죽일 것을 청했으나 오히려 십상시들은 그들의 수하 수십 명을 숨겨 두었다가 하진이 궁궐을 나오자 하태후의 명령을 사칭하며 부하들이 매복한 장소로 불러들였고, 여기에 이끌린 하진을 살해했다. 189년 8월 25일의 일이며, 하진을 죽인 사람은 상방감(尙方監) 거목(渠穆)이었다.
하진의 사망 이후, 십 수일간 계속된 혼란의 과정에서 원소는 장양이 구성한 내각의 관료들을 살해한 뒤, 협박과 질책을 통해 수습시킨 군사들을 데리고 궁궐에 난입하여 내시와 탁류 관료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을 절멸시키는 데 성공하나, 양주에서 온 장군 동탁(董卓)에게 밀려나 정권을 잡지 못하고 중앙권력에서 실각했다. 정권을 잡은 동탁은 하태후와 황제 유변을 폐위시킨 뒤 살해했으며 하진의 어머니 무양군(舞陽君)을 비롯한 하씨 일족 역시 동탁에게 몰살당했다. 한편 원소는 동탁의 포학한 통치에 반발한 여론을 결집해 반동탁 연합군을 창설하여 동탁과 헌제(獻帝)를 괴뢰 정권으로 규정했는데 이로서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된다.
제13대 소제
한소제 유변(漢少帝 劉辯, 176년~190년)은 후한(後漢)의 제13대 황제이다. 부황 사후 제위에 올랐으나 동탁(童卓)에 의해 폐위되어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당하고 이듬해 살해되었다. 시호는 회(懷)로 홍농왕, 홍농회왕(洪農懷王) 등으로도 불린다.
영제(靈帝)의 장남으로 하태후(何太后)의 소생이다. 189년에 영제가 급서하자 외숙부 하진(何進)의 힘을 등에 업고 황제에 오른다. 십상시가 하진을 죽이고 소제와 진류왕(헌제)을 납치하고 도주하던 중 실패하고, 소제와 진류왕은 동탁과 함께 낙양(落陽)으로 환궁한다. 그러나 곧 동탁이 소제를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시키고 진류왕을 황제로 옹립했다. 헌제 옹립 직후 동탁이 소제와 하태후를 죽였다.
가계
- 부황 : 후한 영제 유굉
- 모후 : 영사황후 하씨(靈思皇后 何氏)
- 황후 : 폐황후 당씨(唐氏)
- 이복동생 : 후한 헌제
제14대 헌제
한헌제 유협(漢獻帝 劉協, 181년 ~ 234년)은 후한(後漢)의 마지막이자 제14대 황제이다. 자는 백화(伯和)이다.
황제 즉위까지
영제(靈帝)의 차남으로 진류왕(陳留王)에 봉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영민하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았었다. 십상시(十常侍)의 난에 형 소제(少帝)와 같이 궁을 떠나 몸을 잠시 피했었다. 서량의 군벌 동탁(董卓)이 낙양에 입성하여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임금으로 세우니 그때 헌제의 나이가 불과 9세였다. 연호를 초평(初平)이라 하였다. 동탁이 정치, 군사적 실권을 이미 장악한 상황이었기에 쉽게 제어할 수 있고 뚜렷한 기반이 없는 헌제를 허수아비로 세운 것이었다. 이에 각지의 제후들이 모여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했는데, 동탁은 도읍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동탁이 장안 주변에 자신을 위한 화려한 궁을 짓고 부귀영화를 누릴 때, 헌제는 그저 상국 동탁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연합군은 맹주 원소를 필두로 하여 헌제를 괴뢰 군주로 규정하고 유주목 유우를 추대하고자 했다. 비록 이는 유우의 완강한 거절로 무산되었으나, 이미 원소 등에 의해 황실의 무능함이 낱낱이 성토되었으므로 헌제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이에 각지의 제후들은 황제를 무시하고 제각기 실력 행사를 통해 영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본격적인 군웅할거의 시작이다.
조조의 헌제 옹립
동탁은 여포와 왕윤에 의해 암살되나 동탁의 잔당 이각·곽사가 여포와 마등의 무리를 격파하고 장안을 다시 장악해 헌제는 새장 속에 갇힌 존재가 된다. 이각과 곽사가 권력을 두고 다툼하는 틈을 노려 장안을 탈출했다.(195년 8월) 이로부터 약 1년동안 헌제는 극도의 궁핍과 기아 속에서 생활했다. 이에 몇몇 군벌들이 헌제를 맞이하여 권력을 잡고자 하였으나 연주를 장악하고 있던 조조에게 밀려나 헌제는 조조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된다. 한편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한 군벌로 성장한 원소는 황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헌제를 맞이하지 않았으나 헌제가 조조에게 보호받는 처지가 되자 헌제를 맞이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조에게도 헌제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이내 도읍을 낙양에서 자신의 근거지와 가까운 허(許)로 옮기어 궁을 짓고 허도(許都)로 이름을 고쳤다. 헌제는 조조와 그 무리들에게 둘려쌓여 황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고 조조의 요청이 있으면 재가만 해주는 신세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여포에게 패해 조조에게 의지하러 허도에 왔을 때 그가 한실의 핏줄임을 알고 유황숙(劉皇叔)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조조의 권세가 날로 강해지자 헌제는 동승에게 조조를 죽이라는 조서를 내리지만 조조에게 발각되어 동승을 비롯한 무리를 죽고 헌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한편 원소는 하북을 통일한 뒤 조조를 치기 위해 남진하지만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를 격파했다. 이후 조조는 원소가 병으로 죽고 후계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 하북을 장악하고 승상의 지위에까지 오르지만, 적벽대전에서 패해 천하통일의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게된다.
이후에도 헌제는 조조의 감시 속에서 지내게 되고 복완의 무리가 조조의 제거를 위하여 계획을 꾸미나 이마저 조조에게 들통나 복완 뿐만 아니라 복황후와 아들마저 조조의 손에 죽게 된다.
탁월한 전략가이자 정치가인 조조는 헌제를 보위하는 데 성공하고, 숙적 원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화북과 화중의 일부를 차지한다. 이후 조조의 아들인 위의 문제 조비에게 헌제가 제위를 넘겨주며 후한은 멸망하게 된다.
헌제의 선양과 죽음
위왕 조조가 살았을 때는 제위를 유지하였지만,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대에 이르러 조비의 신하들이 헌제에게 제위의 선양(선위)을 강요한다. 강요를 감당할 수 없는 헌제는 조비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하는데, 조비는 고사를 본받아 짐짓 선양을 거부하다가 이내 수락한다. 결국 수선대에서 선양식이 거행되고 결국 4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 한 황조는 이로서 완전히 멸망한다. 유비가 있는 촉에 헌제가 선양 후 조비에게 죽었다는 풍문이 퍼져 유비는 상복을 입고 헌제에게 효민황제(孝愍皇帝)의 시호를 올린다. 이후 유비는 황제에 올라 한 황조의 후계임을 자처한다.
제위에서 물러난 헌제는 산양공(山陽公)의 지위를 받아 조용히 평생을 보내다가, 234년 제갈량이 죽던 해에 향년 54세로 사망한다. 다시 논하자면 헌제 유협은 제갈량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은 셈이다.
시호는 효헌황제(孝獻皇帝).
가족
- 부황 : 제12대 영제 유굉
- 이복형 : 제13대 소제 유변
- 모후: 영회황후 왕씨(靈懷皇后王氏)
- 황후 : 복황후(廢皇后伏氏)
- 계후 : 헌목황후 조씨(獻穆皇后 曹氏), 조조의 딸
- 아들 : 남양왕(南陽王) 유빙(劉馮), 요절함
- 아들 : 산양왕(山陽王) 유의(劉懿)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역사 22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전투 1) (0) | 2010.03.05 |
---|---|
중국의 역사 21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인물) (0) | 2010.03.04 |
중국의 역사 19 (신나라, 후한) (0) | 2010.03.03 |
중국의 역사 18 (한무제 시대의 주요 인물들) (0) | 2010.03.02 |
중국의 역사 17 (전한시대 : 한무제 7) (0) | 2010.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