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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7 (전한시대 : 한무제 7)

두바퀴인생 2010. 2. 28. 06:10

 

 

 

중국의 역사 17 (전한시대 : 한무제 7)

 

 

'무고(巫蠱)의 난'

 

무고란 무축(巫祝)의 주법(呪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무고의 난은 무제 말년 무제가 병환이 깊어지자 구익부인의 계략으로 서역의 주술사를 불러 굿을 벌린 결과 황제의 병은 무고 때문이라는 말을 믿고 강충에게 명하여 많은 사람들을 옥사를 일으켜 죽였다. 구익부인은 강충과 짜고 황태자를 제거하기 위해 무고 혐의를 씌여 황태자가 위기에 처해지자 두려움을 느끼고 군사를 동원하여 반대파 간신들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결하였다.  2년 동안 반란에 가담했던 장안 백성 2만여 명이 희생 당하는 무제 시대 최대의 권력 투쟁 사건이다.

 

 

구체적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BC91 년, 구익부인이 추천한 강충이란 자가 흉노 사신으로 갔다가 조공을 약속받고 돌아와 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 구익부인이 무제에게 강충이 황제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조른다. 무제는 그를 조정 감찰로 임명한다. 조정 감찰에 임명된 강충은 무제와 구익부인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한편 망령기에 접어든 무제는 환청에 빠져 수시로 자객 소동을 벌이는 등 악몽에 시달리는 병환이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이때 경성의 대협 '주안세'란 사람이 실명으로 '공손하'의 아들이자 직책이 태복인 '공손경성'이 '양석공주(위황후의 딸)'과 사통하고, 사람을 시켜 무술로 한무제를 저주하기 위해 무제가 자주 다니는 감천궁 땅 속에 허수아비를 묻어 놓고 무고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무제의 귀가 번쩍 뛰었다. 무제의 지시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 지고 강충은 공손하 부자 집안은 물론 위황후의 딸인 양석공주, 제읍공주 집안 등 관련자들 주거지를 뒤져 목각인형을 찿아냈다. 또 태자와 알력 관계에 있던 강충은 구익부인과 짜고  이번 기회에 태자까지 제거할 목적으로 목각 인형을 위황후궁과 태자궁에 미리 묻어 두고 뒤져 찿아내는 방법으로 혐의를 씌우기로 하고 무제에게 구익부인이 서역의 주술사를 초빙하여 요기가 서린 기운을 쫒아 내도록 권유한다. 이때 구익부인과 강충은 주술사와 짜고 황후궁, 태자궁 두 궁을 가르키며 요기가 서려 있다며 땅을 파면 목각인형이 나올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에 무제는 강충에게 지시를 내려 궁을 뒤져 목각 인형을 찿아내도록 지시한다. 황후궁과 태자궁을 뒤진 결과 목각 인형이 대량으로 나오자 위황후와 황태자가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를 참지 못한 황태자가 군사를 동원하여 강충을 살해한다. 일이 커지자 황태자는 간신들과 환관을 잡아들이고 궁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병력 동원을 지시한다. 그러나 장안에 가까운 곳의 실질적인 주병력을 동원하는 데는 황제의 어명이 있어야 하기에 황태자가 찿아 갔으나 병력 동원은 실패하게 된다. 무제는 궁 밖에 머물면서 황태자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부 병력을 동원하도록 조치하고 승상 유굴리는 관군을 이끌고 황태자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황태자는 병력동원이 실패하고 장안성내 민간인으로 반란군을 조직하여 관군과 대치하여 5일간 장안 성내에서 전투를 벌이지만 역부족으로 결국 관군에 진압을 당하게 된다. 위황후는 황태자의 반란이 실패하자 황태자를 평민복으로 변복하여 밖으로 도망을 내보내고 황제 사자가 황후 옥새를 가지려 오자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황태자도 도망을 가다가 자결하고 무제는 황태자의 시신을 바라보며 분노와 애통함으로 눈물을 보이면서 후회를 하게 된다.

 

무제는 황태자 주변 인물들 중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모두를 참하고 단순 가담자들은 모두 유배를 보낸다. 공손하 부자는 물론 위황후의 두 딸 양석공주와 제읍공주, 태자비, 아들과 며느리까지 처형하고 강보에 싸인 태자 손자 유병기(후에 선제)는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 관리인 정위감 병길이 죽은 태자의 부하로 어린 유병기를 돌보며 여자 죄수의 젖을 먹이며 돌보게 된다.

 

무제는 분노와 좌절감에 빠져 더욱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간다. 무제는 병이 점점 더 깊어지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선을 찿아다닌다. 한 신선이 장안성 감옥에 천자 기운이 있다고 하자, 장안성 감옥에 있는 모든 죄인을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처형하도록 지시하여 대부분은 처형시켰으나 유병기는 장하의 보살핌으로 처형은 면했다.

 

전국의 지방 자사들이 상주문을 올리고 그 중 '전천주'란 자만 황태자의 무고를 탄원하는 상주문을 올린다. 무제는 나중에야 태자의 모함을 알고 '사자궁'을 세우고 '귀래망사지대'를 지어 추모하며 태자를 복권시킨다. 무제는 '죄기조(罪己詔)'(황제 스스로 죄 있음을 밝히는 조서)란 조서를 전국에 내려 속죄한다. 따라서 유병기도 결국 사면되어 병길의 외할머니 집에서 자라게 된다.

 

흉노가 서역의 2개 군을 습격하여 역탈을 감행하자 무제는 15번 째 출병을 결심하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무제의 출병 제안에 대한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재정이 부족하여 병력과 군마의 차출이 어려움을 들어 출병의 어려움을 상소한다. 이광리 장군이 나서서 병력 10만 정도가 필요하나 3만 병력도 차출이 어려우며 군마도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지시라면 당장이라도 출병하겠다고 상주한다. 무제는 결국 무리하지만 최대한 국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준비토록 지시한다. 

 

 

 

 

정화 3년(BC90 년), '오원'에서 7만 병력이 출병하고 서하에서 2만 병력, 도합 9만여 병력을 이광리 장군이 이끌고 출병하였다. 출병 전 이광리와 승상 유굴리는 무제의 노환과 망령이 점점 심해지는 상태에 갑작스런 유고 사태에 대비하여 창업왕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할 것을 모의하게 된다. 이광리는 협조 가능한 측근들의 명단을 유굴리에게 전하면서 모든 것을 위임하고 서역 전장터로 떠난다.

 

당시 한나라는 관리들의 폭정으로 태산 지역 백성들이 반발하고 죽은 황태자의 억울함을 상주하는 상소문이 계속 올라온다. 무제는 곽광으로 하여금 승상 유굴리를 감시토록 하고 태자 반란시 이광리 장군은 어디서 무얼하였는지 묻는다. "이광리는 반란시 시골 집에서 휴양을 보내고 있었다."고 곽광이 보고한다. 무제는 유굴리와 이광리가 사전 모의를 한 것으로 의심하고 이부인의 왕자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출병한 이광리는 '준계산' 근방에서 흉노군 일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한편 곽광은 승상 유굴리 부부를 감시한 결과 모반 도모가 의심되는 정황이 확인되었고 이광리가 준 명단까지 입수한다. 곽광으로부터 전반적인 모반 혐의를 보고를 받은 무제는 분노하며 승상 유굴리와 이광리의 가족들 모두를 체포하여 멸족시키도록 지시한다. 한편 무제는 태자를 추모하는 사자궁을 건설하고 전천후를 승상 자리에 앉혔다.

 

전선에서 가족이 멸족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광리는 무제에 대해 분노하면서 고민에 빠진다. 귀국하면 자신도 참수 당 할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렇다고 흉노에 항복도 불가하다고 판단, 귀환을 포기하고 자신이 이끌던 7만 대군을 황제의 지시도 없이 다시 북상하여 흉노 지역 깊숙한 '질리수' 근방까지 진격한다.  7만 군사라면 적은 군사도 아니며 당시 무제는 가용한 병력을 모두 흉노 전선에 투입한 상태였다. 아마 이광리는 7만 병력을 이끌고 장안으로 진격하여 무제를 척살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역이며 이씨부인의 왕자까지 참살 당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역사에 반란을 주도한 괴수라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광리는 흉노 지역으로 진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흉노 지역을 정벌하면 그 지역에 새로운  제국을 세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광리가 선택한 길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7만 군사와 같이 스스로 자멸하는 길을 선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제는 자신의 지시도 없이 이광리가 군대를 이끌고 흉노 지역으로 들어가자 "가족 목숨을 대신하여 이광리는 7만 한군과 같이 스스로 괴멸 당하려 하는구나!"라며, 그의 의도를 알고 "수많은 한나라 선배 장수, 병사들이 흘린 선혈이 모두가 헛되도다!" 라며 심하게 분노하며 통탄한다.

 

이광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연연산'까지 진격하여 완전고립 지역인 그곳에서 흉노군 8만과 전투를 벌이다 결국 퇴로가 차단되어 한나라 7만 군사는 모두 괴멸되고 이광리는 포로로 잡혀 투항을 거부하다 흉노 선우 모친 제사에 제물로 살해 당하게 된다.

 

말년의 무제는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찬 망령된 노인에 불과했으며 광기에 가득찬 거의 살인마에 가까운 정신병자로 변질되어 주변 혈족이나 신하, 장수들에 대해 닥치는대로 처형을 시키거나 멸족을 시켰다. 그 예로 전선에 나가있는 무장 이광리 가족을 멸족시킨 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행위이며 무리한 처사였다.

 

무제는 구익부인과 어린 왕자를 데리고 장안에서 3백리 거리에 있는 전쟁 유공자 촌락인 '공적지' 향민을 위문차 방문한다. 수많은 향민들이 팔과 다리가 짤린 체 거지같이 살면서 황제가 그들 촌락을 방문한 점에 감격해 하며 "황제가 오셨다! 황제가 오셨다!" 라고 소리치며 읍소하여 무제를 반긴다. 그들은 위청과 곽거병, 이광 장군들과 같이 대 흉노전에 참가하여 불멸의 전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무제는 그들을 둘러보면서 마을에 세워져 있는 비문 앞에 서서 그들의 공적을 써 놓은 글을 읽으면서 " 더 이상 흉노를 칠 수는 없다" 면서 상념에 잠긴다. 마을 주민은 총 800 명 정도로 그 중 710명이 대 흉노 전투에 참가하였고 135명이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전쟁터를 누비면서 한조 역사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지만 그 결과 반신 불구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나라의 보훈은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거지처럼 살고 있었다.

 

 

 

 

무제는 병환이 점점 깊어지자  궁내 주술사,도사들을 모두 쫓아낸다. 어느날 환관에게 피습을 당하는 위기 순간에 근신이던 김일제가 환관을 제압하고 무제의 목숨을 구한다. 이에 무제는 "과거의 적인 너가 나의 목숨을 구하고 과거에 아군이 나의 목숨을 노리는구나!" 하면서 김일제에 대한 신임이 깊어진다. 무제는 김일제가 흉노로 시집간 한나라 공주의 아들이라는 점에 그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진정으로 그를 믿게 된다.

 

무제의 지시로 광록대부 곽광은 사마천을 방문하여 태자의 죽음과 이광리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황제의 명으로 재등용을 권유한다. 사마천은 조카에게 작성된 <사기> 두 부 중 한 부는 궁에 보내고 한 부는 고향 산속에 숨기도록 지시하고 궁으로 가서 무제를 알현한다.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기 작성은 다 되었느냐?" 고 물으면서 

"작성된 사기를 보고 싶다, 가져오라!"고 한다.

무제는 사마천에게

"내가 작성된 책 내용을 보고 화를 내며 불 태우라고 한다면 어쩔 것이냐?"고 미리 협박성 질문을 묻는다.

사마천은

"누구나 운명을 타고 나듯이 책도 그 운명을 타고 나는 것으로 폐하께서 불태우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않사옵니까!"고 하였다.

무제는 "짐은 대 한조가 오랑캐를 굴복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과연 천하의 후세인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라도 이능이 돌아오면 짐은 용서해 주고 싶다"고 하였다. 무제는 사마천을 의식하여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짐은 어떤 황제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사마천은  

"폐하께서는 성군이 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무제를 성군이 아닌 폭군으로 사기에 기록하였다.

 

 

무제는 백성들에게 "윤태죄이"의 조서를 내리면서,

"짐은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어려움에 처해 있는 줄 몰랐다. 짐은 과거를 반성하는데, 수십 년 간 전쟁을 하면서 한의 영토는 만리나 확장하였으나 호구는 반으로 줄었다. 군주는 백성들이 토탄에 빠지는데 자신만 옳타고만 하는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 이제는 전쟁을 종식하고 백성들의 삶에 진력하겠다...."고 백성들에게 고지하였다. 이또한 무제는 역사에 자신의 평가를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과오를 늬우치는척 하지만 사마천은 <사기>에 무제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만 쓰지 않았다.

 

무제는 사후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 무척 예민하게 생각하면서 전화위복을 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무척 궁금하여 사마천의 사기를 빨리 보고 싶다고 하였던 것이다.

 

무제는 피를 토하면서 쓰러진다. 대사마 곽광을 비롯한 상홍양, 김일제 등 중신들을 불러 어린 황태자의 후사를 부탁한다.

" 짐은 과거 지은 죄가 과다하다. 한조 강산과 미성년 태자 불능을 부탁한다. 탁고지신들이 태자를 보좌하여 만사 신중, 성실로 보좌하여 한조 역사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 오랑캐와 난신적자들을 반드시 물리쳐라."고 당부한다.

 

중신들이 물러가고 구익부인이 옆에 있을 때 무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구익부인에게 

"오늘 짐이 죽는다면 그대는 짐과 같이 죽겠느냐?"고 하자,

구익부인은

"황태자가 아직 어린데, 제가 어찌 죽어야 합니까?" 하고 답변하자,

무제는 버럭 화를 내며 군사를 불러

"당장 강충과 무고 사건에 대해서 황후를 철저히 조사 후 참수하라!"고 지시하면서 분노한다. 무제는 위황후와 황태자 억울한 죽음에 많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구익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보복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에게는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구익부인이 휘두르게 될 조정의 혼란을 걱정해서 참수했다고 이야기 하게 된다.  무제는 쓰러져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 자신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게 없다는 사실에 깊은 시름에 잠긴다.  

 

무제는 병상에서도 <사기>를 다 읽고 난 뒤 중서령 사마천을 불렀다. 사마천이 달려와 읍소하며,

'소신, 사마천 폐하께 대령하였사옵니다~~"

무제는 사마천을 바라보면서,

"너가 쓴 책 읽고 짐이 홧병 났다. 넌 책을 통해 나에게 보복하는구나. 내 수명이 1년은 단축된 것 같다."

"소신, 사죄하려 왔사옵니다"

"넌 짐을 폭군으로 만들었고, 넌 충신으로 만들었구나! 너는 끝까지 나에게 정신적으로 굴복하지 않은 유일한 신하로구나. 그럼에도 널 살려 주겠다"

"소신, <폐하본기>를 다시 쓰겠습니다"

"필요 없다. 책은 불사르지 않겠다. 한 사관의 사견으로 생각하겠다. 구익부인을 처형시킨 것은 어떠냐? 아이가 어리고 어미가 강하면 천하가 혼란스럽게 된다. 선황 경제의 망설임이 여러 난이 발생한 이유이다. 인간은 최고 권력자가 되면 누구나 교만하고 사치하여 타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은 누구도 제지 못한다. 인력으로 불가한 것을 실행하는 역사 정복의 숙명을 피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제는 자신의 치적부분에 대한 <사기>의 비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억누른 불쾌감을 참지 못하고,

"여봐라!" 하고 환관을 불러 사기를 가리키며

"저것을 당장 가져가 불 태우라"고 지시했다. 환관들이 들고 나가려고 하자,

무제는 사마천을 바라보고는 다시

"아니, 그만 두라!"고 하면서 사마천을 향해 

"당장 나가!"라고 분노에 찬 얼굴로 고함친다. 사마천은 무제가 불에 태우라고 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사기> 두 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고향 산 속에 숨겨 두라고 조카에게 말했던 것이나, 무제는 <사기>를 태우지 않고 사마천을 죽이지 않는 대신 자신에 대해서 재평가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BC87 년 2월 정묘일, 한나라 7번 째 황제인 위대한 군주 무제는 54년의 위대한 치세를 끝으로 구익부인의 궁인 요조궁에서 사망한다.

 

 

무제 사망 이후 전한은 외척들의  발흥으로 권력이 농단되고 황제가 외척들에 의해 마음대로 부침되는 시대였다. 무제 이후 전한시대 황제들과 외척들의 흥망성쇄를 살펴 본다.

 

 

제8대 소제(유불릉)

무제의 유언으로 곽광,상홍양,김일제 등의 보좌로 구익부인 소생 한소제 유불릉(漢昭帝 劉弗陵, 기원전 95년생, 재위 기원전 86년 ~ 기원전 74년)은 전한의 제8대 황제로 즉위했다.

 

기원전 86년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즉위전 여태자가 역모로 죽임당하고 장성한 아들 창읍애 왕마저 병으로 죽자 한무제는 구익부인 조씨 소생의 어린 아들 불릉을 태자로 내정하였던 것이다. 한무제는 어린 아들에게 젊은 모(태후)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구익부인 조씨를 자결하게 하고 그의 인척들을 축출하였다. 그 뒤 죽기전에 곽광(곽거병 대장군 조카), 김일제(흉노 왕자 출신)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하였다.

 

BC80 년, 연왕 단(소제 이복형) 모반, 상홍양,상관걸 살해, 곽광이 정권 잡음.

전한 시대의 대표적 두 외척이라고 할 수 있는 곽광과 왕망이 있었던 시대는 전한의 후반기로 무제가 그토록 한나라의 영구부흥을 기대하였지만, 이후 100년이 채 못 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중앙정부는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이에 소제 유불능․선제 유순․원제 유석․성제 유오․애제 유흔․평제 유간 등 무려 여섯 명의 황제가 등장했었다.

 

이 때의 한나라는 중앙과 지방정부의 권한을 구분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도는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나 섭정하는 사람에 의해 수시로 시행되었다. 진리는 위에서 아래로 전달됐고, 정치는 도덕을 명분으로 시행됐다. 법을 집행할 때는 다만 지극히 선한 것과 지극히 악한 것만 존재했고, 이렇게 모호한 법에 따라 마음대로 살리고, 죽이며, 주고, 빼앗았다. 이는 조정 관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공교롭게도 한 나라는 소제․성제․애제․평제 모두 후사가 없어 황실의 친족 가운데서 그 계승자를 찾아내야 했다. 매번 20~30명의 후보자를 뽑았는데, 많으면 40~50명까지도 되었다. 이들 가운데 출생 순서에 따라 최고 연장자를 추대하는 것이 순리일 터이지만, 통상적으로 조종하기 쉬운 어린 아이를 뽑았다. 이렇게 되자 안주인, 즉 황후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나라 왕조의 황후는 평시에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마음이 변하면 버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가 죽으면 상황이 달라졌다. 황후는 황태후 자리에 올라 인새(印璽)와 인수를 넘겨받고, 후계자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배경을 업고 외척이 득세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그런 와중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바로 곽광이다.


곽광(? ~ BC 68)의 자는 자맹(子孟)으로 하동 평양(河東平陽: 山西省臨汾縣)에서 출생된 곽광은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去病)의 이복 동생으로 무제가 죽자 8세로 즉위한 소제(昭帝)를 보필하여 정사(政事)를 집행하였다. 하지만 곽광은 한 제국의 절대적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권력투쟁을 피할 수 없었다. 사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소제가 황제로 있던 기원전 80년, 상관걸과 상관안, 어사대부인 상홍양이 소제를 폐위시키고 연왕인 유단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고 고발됐다. 세 사람은 모두 모반죄로 사형에 처해지고, 연왕은 자살했다.

 

BC74 년 4월, 소제 사망, 제10대 선제 즉위. 곽광 섭정

 곽광은 소제가 죽은 후에는 그를 계승한 제9대 황제로 즉위한 창읍왕(昌邑王)의 제위를 한 달도 안되서 박탈하고, 앞서 무고(巫蠱)의 난 때 죽은 여태자(戾太子)의 손자를 옹립하여 제10대 선제(宣帝)로 즉위하게 하였으며, 그 공으로 증봉(增封)되었다. 또한 선재의 황후 허씨(許氏)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듦으로써 일족의 권세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선제는 곽광이 죽은 후 그의 일족을 반역죄로 몰아 모두 죽여 버렸다.

 

선제는 조부 여태자가 '무고의 난' 때 죽자 민가에 입양되어 자랐다. BC 74년 창읍왕 소제가 곽광에 의해 폐위되자 18세로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6년간 곽광이 섭정하다 BC 68년에 병으로 죽자 곽씨 일족을 멸족시키고 친히 정사를 돌보면서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상평창을 설치하여 빈민 구제를 도모하였으며 오손과 손잡고 흉노를 격파하였으며 정길을 서역도호로 임명하여 서역 36국을 복속시켰다. BC 51년 남흉노를 한조에 복속시키고 치세기간 한제국의 최고의 위세를 펼친 황제로 현자로 인정받고 있다.

 

곽광은 무제의 부인인 위황후의 동생 위청의 조카였다. 그에게는 자녀도 많아서 부인과의 사이에 모두 1남 7녀를 두었다. 무제가 어린 아들을 부탁한 사람은 곽광 이외에도 김일제와 상관걸이 있었다. 곽광은 자신의 두 딸을 김일제의 아들인 김상과 상관걸의 아들인 상관안에게 시집보냈다.

 

김일제는 오래지 않아 병들어 죽었기 때문에 이후의 분쟁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런데 상관안과 곽광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겨우 여섯 살 때 소제의 황후로 봉해졌다. 그녀는 이어 16세 때 황태후가 되었다. 이후로 곽광은 황제를 폐하고 즉위시킬 때, 자신의 외손녀인 상관황태후를 앞세워 주관하게 했다. 곽광은 황후와 상의하여 다른 황자를 옹립했으나 이 황제가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불과 27일 만에 폐위시키고 또 다른 황자를 옹립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새 황제는 곽광과 같은 마차를 타고 가면서 얼굴에 극도의 불안감을 보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조정의 유일한 최고 실력자가 된 곽광의 위엄은 가히 대단했다. <한서>에서는 “소제가 이미 관례를 치렀지만, 결국 곽광에게 위임하여 13년 동안에 백성들은 충실하고 사방의 오랑캐들은 빈복(賓服)하였다”고 적고 있다.


상관씨 집안의 모반이 일어나기 1년 전인 기원전 81년, 각지에서 선발된 현량과 문학, 곧 유학자들과 정부 관원이 조정에 모여서 소금과 철의 전매 및 최근 반포한 술의 전매를 계속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변론을 벌였다. 이에 관한 기록이 바로 저 유명한 <염철론>이다. 단순히 이 기록만 가지고 본다면, 당시 곽광의 독재적 지위가 아직 공고해지지 않은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곽광이 이렇게 처리한 데는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시행한 정책을 가지고, 자신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 서생들을 불러모아서 굳이 공론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당시 현량과 문학들은 정부의 전매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지만, 실제 변론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쳐놓고 일종의 ‘교화’라고 불리는 정치철학을 동경하는 발언을 했다. 정부 쪽에서는 상홍양 이외에 승상 전천추가 자리했는데, 이들은 실정을 들어가며 서생들의 주장을 누누이 반박했다.

 

그 결과 술의 전매는 중지되고, 염과 철은 계속 전매하기로 했다. <한서>[식화지]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상홍양은 스스로 나라의 이익이 되는 큰 공로를 세워서, 이석으로 자제들의 관직을 얻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대장군인 곽광을 원망하였고, 결국 상관걸 등과 모반을 했다가 목이 베이어 죽었다.”

 

상홍양이 실제로 모반했는지에 대한 실제 증거는 없지만, 그 배경이 소제시대였던 만큼 곽광의 권세가 아직까지는 모든 일을 뜻대로 처리할 정도가 아니었음은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하여 상홍양으로 하여금 “여러 유학자들과 설전을 벌이게 하고”, 염철의 전매제도를 유지하도록 했지만 그렇다고 상홍양과 권력을 나눠 갖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이러할 때 이 사건이 상관씨 집안에까지 연루되었다. 곽광의 목적은 계속해서 자신의 독단적인 정치적 역량을 공고히 하려는 데 있었고, 상홍양의 일은 그 실마리였다.

 

소제가 자식이 없이 죽자 곽광은 창읍왕을 황제로 추대했다가 폐위하고, 다시 선제를 세웠다. 이때 황후를 책봉하는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여러 신하들은 곽광의 어린 딸인 곽성군을 염두에 두었지만, 선제는 이미 허평군과의 사이에서 아들 유석(원제)까지 낳은 상황이었다. 선제의 뜻에 따라 허씨가 황후로 책봉되나, 다음해 회임을 하여 부인병이 걸리자 여자 궁중의원인 '순우연'이 입궁하여 치료를 하고 있었다. 순우연은 곽부인과 잘 아는 사이로 남편이 액정 호위 였는데, 매일 야근하자 남편의 승진을 곽부인에게 부탁하였다. 이 자리에서 곽부인은 남편 곽광도 모르게 순우연의 남편 승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허황후를 독살하도록 교사하여 허황후를 독살한다. 황후의 사망에 의문을 품고 상소가 잇따르자 선제는 태의 순우연을 체포하여 조사를 벌였다. 곽부인은 곽광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자 대노하면서 고민하다가 순우연을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곽광의 딸은 비로소 황후가 되었다.

 

BC68 년, 곽광 사망, 선제 친정, 곽광 멸족

이로부터 4년 뒤, 곽광이 죽은 지 2년이 지난 기원전 66년, 곽씨 집안에서 허황후를 독살했다는 사실이 폭로 되면서 곽씨 집안 사람들에 대한 황제의 태도가 달라졌고, 그때까지 군사권을 쥐고 있던 곽씨 집안 사위들도 하나씩 다른 곳으로 쫓겨났다. 곽광의 아들인 곽우는 조카.손자인 곽산,곽운과 같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곽우를 황제로 옹립하는 반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도 전에 이 음모가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이에 선제는 곽씨 집안을 일망타진하게 되는데, 곽우는 참형, 곽산,곽운은 자결, 곽황후는 폐위되고, 곽광의 부인 이하 딸, 그 사위들 및 곽광의 배다른 형인 곽거병의 후손들까지 모두 자살을 하거나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곽광이 실권을 휘두른 20년 간 대단한 위세를 누렸던 곽씨 집안은 멸족되고, 그들과 연관된 여러 집안들도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전한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태상황제
(太上皇帝)
(한 고조 추숭)
유단(劉煓) - -
제1대 한 태조
(漢太祖)
(한 고조<漢高祖>)
고황제
(高皇帝)
유방(劉邦) -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제2대 - 효혜황제
(孝惠皇帝)
유영(劉盈) -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
제3대 - 소황제
(少皇帝)
유공(劉恭) -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84년
제4대 - 소황제
(少皇帝)
유홍(劉弘) - 기원전 184년 ~ 기원전 180년
제5대 한 태종
(漢太宗)
효문황제
(孝文皇帝)
유항(劉恆) 전원(前元) 기원전 179년 ~ 기원전 164년
후원(後元)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57년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
제6대 - 효경황제
(孝景皇帝)
유계(劉啓) 전원(前元) 기원전 156년 ~ 기원전 150년
중원(中元) 기원전 149년 ~ 기원전 144년
후원(後元) 기원전 143년 ~ 기원전 141년
기원전 157년 ~ 기원전 141년
제7대 한 세종
(漢世宗)
효무황제
(孝武皇帝)
유철(劉徹) 건원(建元) 기원전 140년 ~ 기원전 135년
원광(元光) 기원전 134년 ~ 기원전 129년
원삭(元朔) 기원전 128년 ~ 기원전 123년
원수(元狩) 기원전 122년 ~ 기원전 117년
원정(元鼎) 기원전 116년 ~ 기원전 111년
원봉(元封) 기원전 110년 ~ 기원전 105년
태초(太初) 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1년
천한(天漢) 기원전 100년 ~ 기원전 97년
태시(太始) 기원전 96년 ~ 기원전 93년
정화(征和) 기원전 92년 ~ 기원전 89년
후원(後元) 기원전 88년 ~ 기원전 87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
제8대 - 효소황제
(孝昭皇帝)
유불릉(劉弗陵) 시원(始元) 기원전 86년 ~ 기원전 80년
원봉(元鳳) 기원전 80년 ~ 기원전 75년
원평(元平) 기원전 74년
기원전 87년 ~ 기원전 74년
제9대 - 폐황제
(廢皇帝)
(창읍왕<昌邑王>,
해혼후<海昏侯>)
유하(劉賀) - 기원전 74년
- - 효도황제
(孝悼皇帝)
(한 선제 추숭)
유진(劉進) - -
제10대 한 중종
(漢中宗)
효선황제
(孝宣皇帝)
유순(劉詢) 본시(本始) 기원전 73년 ~ 기원전 70년
지절(地節) 기원전 69년 ~ 기원전 66년
원강(元康) 기원전 65년 ~ 기원전 61년
신작(神爵) 기원전 60년 ~ 기원전 58년
오봉(五鳳) 기원전 57년 ~ 기원전 54년
감로(甘露) 기원전 53년 ~ 기원전 50년
황룡(黃龍) 기원전 49년
기원전 74년 ~ 기원전 49년
제11대 한 고종
(漢高宗)
효원황제
(孝元皇帝)
유석(劉奭) 초원(初元) 기원전 48년 ~ 기원전 44년
영광(永光) 기원전 43년 ~ 기원전 38년
건소(建昭) 기원전 37년 ~ 기원전 34년
경녕(竟寧) 기원전 33년
기원전 49년 ~ 기원전 33년
제12대 한 통종
(漢統宗)
효성황제
(孝成皇帝)
유오(劉驁) 건시(建始) 기원전 32년 ~ 기원전 29년
하평(河平) 기원전 28년 ~ 기원전 25년
양삭(陽朔) 기원전 24년 ~ 기원전 21년
홍가(鴻嘉) 기원전 20년 ~ 기원전 17년
영시(永始) 기원전 16년 ~ 기원전 13년
원연(元延) 기원전 12년 ~ 기원전 9년
수화(綬和) 기원전 8년 ~ 기원전 7년
기원전 33년 ~ 기원전 7년
- - 효공황제
(孝恭皇帝)
(한 애제 추숭)
유강(劉康) - -
제13대 - 효애황제
(孝哀皇帝)
유흔(劉欣) 건평(建平) 기원전 6년 ~ 기원전 3년
원수(元壽) 기원전 2년 ~ 기원전 1년
기원전 7년 ~ 기원전 1년
제14대 한 원종
(漢元宗)
효평황제
(孝平皇帝)
유간(劉衎) 원시(元始) 서기 1년 ~ 5년 기원전 1년 ~ 5년
제15대 - 유자
(孺子)
(정안공<定安公>)
유영(劉嬰) 거섭(居攝) 6년 ~ 8년
초시(初始) 8년
6년 ~ 8년

 

BC49 년 12월, 선제 사망, 제 11대 원제 즉위

한 고종 원제 유석(漢高宗 元帝 劉奭, 기원전 76년~기원전 33년)은 제11대 황제(재위 기원전 48년~기원전 33년)로 선제의 장남이며 허평군(許平君) 소생이다.

 

현실주의자였던 아버지 선제와 달리, 유교를 중시한 정책을 실시했다. 선제는 황태자가 죽은 애첩 인 사마씨(司馬氏)를 그리워해 한탄하고, 슬퍼하고, 이상주의적인 유교에 심취하는 등 너무나 서정적인 성격이어서, 장래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가져 한때는 황태자의 폐위도 검토했다. 그러나, 조강지처인 허황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선제의 생각이나, 생모의 사촌동생인 중상시 허가(許嘉)와 계모 왕씨(왕황후=왕정군)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성제)가 있었지만 폐립까지 도달하지 않고 즉위했다.

 

원제는 즉위 후 황태자 시대의 학사인 소망지(蕭望之)등 유생을 등용했지만, 선제 시대부터 측근으로서 중용 되고 있던 환관인 홍공(弘恭), 석현(石顯)과 대립해 권력을 실각했다. 이후 원제의 치세는 환관에 의해 마음대로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원제는  세금을 경감하고  어려운 형법을 개정하는 등의 정책을 채용하여, 민중의 생활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 외 원제는 대규모 연회를 금지하고 수렵용의 별장이나 황실 소유지의 경비를 억제하여 종묘 등 제사에 걸리는 경비를 삭감하고 재정의 건전화를 도모했지만, 재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한편으로 유교에 심취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에 근거하는 정책도 실시되어 전매제를 폐지해 재정을 악화시키는 등 국정을 혼란시켰다. 선제에 의해 중흥 된 국세는 다시 쇠약해져 원제의 황후 왕씨 일족으로부터 나온 왕망이 권력을 찬탈하는 요인을 만들어 냈다. 후한의 역사가 반표(班彪)는 그 치세를 「우유부단으로 하여 선제의 업적 쇠약해졌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BC33 년 5월, 원제 사망, 제12대 성제 즉위, 대사마 왕봉 외척 정권 장악

성제(成帝 재위 BC32 년~BC7 년)는 원제의 아들로 어머니는 왕황후이다. 원제 시대부터 한해와 수재가 계속되어 나라가 어려워지자 외척과 환관들의 횡포가 극심하였다. 학문을 좋아하던 성제는 말년에 주색에 빠져 자주 궁궐을 벗어나 민가에서 놀기도 하였다. BC 14년 농민과 죄수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황제 지배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궐내 왕, 허, 조씨 외척들이 권력을 독식하고 특히 왕씨 외척들은 고관직을 독점하여 왕망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BC7년 성제 사망, 제13대 애제 즉위.

애제(哀帝, BC 7년~ BC 1년)는 원제의 손자로 정도공왕의 아들이다. 성제의 태자가 되었다가 성제가 급서하자 20세에 즉위, 당시 빈부차가 극심하고 제왕후 이하 토지 소유와 노비 소유를 제한하기 위해 한전법(限田法)을 발표하였으나 환관, 제후 등 반대자가 많아 시행하지 못했다. 그만큼 황제의 권력이 무너진 시대로 사회혼란이 증대되었고 한 왕조가 쇠퇴하고 있었다.

 

BC8 년, 대사마 왕망 정권 장악/실각

왕망은 자 거군(巨君). 산둥[山東] 출생.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왕(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되어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BC 33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BC 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되었다. 그뒤 왕씨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BC 8년 38세로 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다음의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다.
 
BC1 년 6월, 애제 사망, 평제 즉위, 왕망 복권
애제가 1년 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사마에 복귀하였다. 
9세의 제14대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자기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자기에게는 안한공(安漢公)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를 붙여 평제의 보정자(輔政者)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AD5 년 12월 평제 독살, 왕망 '가황제' 호칭 정권 장악
AD 5년에는 평제를 독살한 뒤 2세인 제15대 황제 유영(劉:宣帝의 현손)을 세워,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다.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벌였다. 이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하여 인간에게 표시되는 천명(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AD8 년 12월 왕망 황제 즉위 , 국호 '신'나라, 15년 후 후한 광무제에 멸망
AD 8년 유영을 몰아내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이라 하여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하였다.

황제 왕망은 복고적 색채를 띤 여러 가지 번잡한 정책을 폈다. 주(周)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은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하여 주는 사대제도(貸制度)를 두기도 하였다. 이것도 사상적으로는 유교교전인 《주례(周禮)》에서 볼수 있는 고전적인 것이나,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하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이해(利害)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사회혼란을 증대시켰다.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 나라가 그를 이반(離反)하였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이와 같이 내외정세가 악화된 속에서 18년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22년에는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남양[南陽]의 호족 유수(劉秀:後漢의 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河南省 葉縣)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후한이 그 뒤를 이었다.
                                                                                                  

 

한무제에 대한  재평가

 

한무제, 그는 과연 위대한 군주인가?

중국인들은 그들 역사 속에서 한무제를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한무제는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제 이후 오늘날 중국 영토의 초석을 다진 강력한 전제군주였으며  그 시대 세계사에서 로마와 쌍벽을 이루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제국 이름이 중국 민족의 이름이 되었고 중국 민족의 영원한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는 반세기에 가까운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북방의 흉노족 토벌에 소비하였으며 영토는 만리를 확장하였으나 호구는 반으로 줄 정도로 한민족의 땀과 피를 흘렸다. 그는 내부적으로 경제,문화의 부흥을 이루었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신료들과 백성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어떠한 고난과 실패도 굴하지 않는 집념의 군주였다.

 

그는 54년 재위 동안 수많은 인재들을 등용하였는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노예였던 위청,과거병을 포함하여 이광,소무,장건 같은 많은 충신 열사를 배출하였다. 그는 한나라를 영원한 강대국으로 존립시키기 위해 국가 발전에 저해되는 요소는 과감하게 제거하였고 자신의 혈족은 물론 공이 많고 유능하나 자신이 지향하는 정책에 비우호적이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처단하는 매정함도 보였다. 물론 사실에 대한 검증도 없이 혹형을 가하여 죽음에 이른 경우도 많았으나 누구에게나 멸사봉공의 정신만을 원하였던 단호한 인물이었다.

 

반대파를 제거하는 방법도 반드시 대타를 기용하여 문제를 밝혀내고 법에 따라 처리토록 한 다음 나중에는 그도 문제가 될 경우에는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규정과 법도를 어긴 경우에는 절대로 용서치 않았으며 장수는 항복보다는 자결을, 승리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도록 강조했다.

 

무제는 자신과 같이 무를 숭상하고 기백이 넘치는  유능한 후계자가 한조를 다스리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유약한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외척의 발호도 우려하여 자신이 죽기전, 구익부인도 처형하여 버렸다.  대장군 위청과 마지막 대화에서 "우리 둘은 한 시대를 책임진 사람들이다. 당대에 욕을 먹드라도 대 흉노 전쟁은 반드시 마무리지어 북방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제는 그의 치적 평가에 매우 과민한 반응을 보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궁금해 하였다. 당시대 직접 무제를 가까이서 보며 기록을 남긴 사마천의 눈에는 그는 폭군에 불과했다.

 

물론, 오늘날의 국가 지도자가 무제와 같은 인물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사고로 무제를 함부로 농단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국강병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 어떠한 어려움도 굴하지 않고 대 흉노 전쟁을 끝까지 수행한 집념,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고 강력하고 철저한 정책을 집행하였다는 점이다.

 

자신의 사후 강한 나라를 유지시키기 위한 고민, 외척세력의 준동을 미리 차단하는 그의 단호함, 상과 벌을 집행함에 철저한 결과 위주를 적용하였고 혈육도 가리지 않는 단호한 처벌 등 오늘날 지도자들이 본 받아야 할 점이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