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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4 (전한시대 : 한무제 4)

두바퀴인생 2010. 2. 26. 05:08

 

 

 

중국의 역사 14 (한무제 4)

 

기원전 121년, 무제는 위청, 곽거병, 소첩, 이광, 조신(흉노인)등 장수들과 참모로 장건을 포함하여 정양에서 출발하여 서역 지역의 흉노를 공격토록 하여 출격시켰다. 흉노 선우는 한나라 군대의 침공을 알고 한나라로 귀화하여 장수가 된 조신(흉노이름 '아호아')의 옛 애인인 자신의 여동생을 보내 조신을 만나 설득하여 흉노로 돌아오도록 임무를 준다. 조신은 흉노 병사로 구성된 기병 800기를 이끌고 흉노 정찰병을 나포하기 위해서 정찰 중 초원에 말을 타고 한 여인이 나타나자 정신이 혼미해져 그녀를 가까이 가서 본 결과 옛 애인임을 알고 설득을 당하고 있던 중 한나라 장수가 상황을 잘 모른체 쏜 화살에 흉노 여인이 죽게 된다. 이에 조신은 그 장수를 죽이고 자신의 병사 800기를 데리고 한나라를 반역하고 흉노로 돌아가게 된다. 위청군은 장수 조신 반역, 흉노군의 매복에 일부 부대가 전멸하는 등 피해를 보았으나 곽거병만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무제는 위청이 몸만 사리고 옛날 같지 않다며 실패에 대해 분노하였다.

 

     

       

 

흉노군                                                                               흉노인으로 귀화한 한 장수 조신    

 

 

 

      

 

흉노군 선두에 한 여인이 달려나옴                                              한군 장수 조신이 달려 나옴

 

 

서역정벌에 나선 표기장군 곽거병의 활약은 눈부셨다. 곽거병은 '오르도스'를 정벌한 대장군 위청의 조카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라는 직책으로 황제의 신변 업무를 볼 정도로 총명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121년 봄,  표기장군에 임명된 곽거병은 1만기를 이끌고 하서 지구를 급습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그 전과는 대단하여  적 수급과 포로가 3만이 넘고,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금인을 탈취하고 기련산의 추도왕을 비롯한 5명의 왕과 왕자들 59명, 선우의 연지를 포로로 잡고 적 병력의 3/10을 섬멸하였다고 한다. 보고를 받은 무제는 곽거병의 전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는데 위청의 시대가 가고 곽거병의 시대가 온 것이다. 

    

      

 

조신의 반역과 패배에 침울한 한진영                                   한나라 기병

 

    

      

 

장수 조신이 여인을 만나는 동안 바라보는 한나라 기병          접전

 

 

이 때 '박망후' 장건은 대장군 위청의 참모로 흉노와 서역,지리 등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곽거병의 승리로 패전의 책임을 두려워 한 혼야왕은 이치사 선우의 충신인 휴도왕을 살해하고 수하와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무제는 투항한 혼야왕에게 1만호의 봉읍과 탑음후라는 직위를 하사하고 그 일족 또한 후대하였으며, 정벌한 휴도왕의 땅에는 '무위군', 혼야왕의 땅에는 '장액군'을 세우고  서역을 경영하였다. 

 

 

 

        

귀순한 조신을 만나는 흉노 선우                                               흉노 선우, 곽거병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여세를 몰아 기원전 119년에는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각각 5만기를 주어 흉노의 본거지를 정벌하였는데, 이 전투중에 흉노 선우가 실종되고 여려왕을 비롯한 7만의 포로를 잡았다고 한다무제는 이때 장건을 다시 서역으로 파견하였다. 이번 목적지는 서북쪽에 있는 '오손국'으로 파견하여 이들과 손을 잡고 흉노 협공 태세를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이 무렵, 흉노는 이미 고비사막 북쪽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장건 일행 300여 명은 도중에 흉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천산산맥 북쪽 '이리' 강 유역 '이시크쿨' 호수(키르키스탄 지역 천산산맥 분지의 호수)에 살고 있는 오손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장건이 함께 협력하여 흉노를 치자고 끈질기게 설득하여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오손국 역시 한보다는 흉노를 더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손'국 주민들을 옛 혼야왕의 땅에 이주시켜 흉노를 방어하려는 장건의 계획은, 오손왕이 늙고 친 흉노파의 반대도 있어 군사동맹과 이주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오손은 한나라의 위세에 눌려 친한파로 돌아서게 되었고 오손으로 부터  수 십 필의 명마(서극)를 답례로 받아 오손국의 사절단을 대리고 귀국하였다. 귀국하면서  장건은 동행한 부사들을  대원과 강거(지금의 카자흐스탄지역),대월지, 대하, 안식(이란), 신독(인도) 등으로 사신을 파견해 장래를 위한 포석을 깔았다. 이후 이들은 그 나라의 사신을 데리고 차례차례 중국을 방문해 서역 각국의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을 통해 한의 강대함을 서역 각국에 알리게 되었다. 또한 이들 각나라와 비단을 포함한 종이, 붓, 도자기 등 많은 교류가 이루어 지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서역물품인 포도와 석류, 검은 깨, 참깨, 호두, 완두콩, 오이, 당근, 유리, 목숙, 비파, 한혈마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물건이 오고가는 교류가 시작되었다.

 

장건이 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기 위하여 떠난 여정이 결과적으로 동서간의 교역과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장건은 기원전 115년 중국으로 돌아와 그 이듬해 기원전 114년 귀국 1년 후 죽었다.

 

 

또 BC117년 곽거병이 흉노 정벌 도중 오염된 물을 먹고 역병이 걸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2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무제는 건설중인 자신의 무덤옆에 곽거병의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위청과 곽거병의 활약으로 하서 지구를 획득한 한나라는 이른바 하서 4군(장액,주천,돈황,무위)을 설치하여 서역으로 가는 길을 확보, 흉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BC115년~BC73) 흉노는 한의 대공세 중 호전적인 이치사 선우가 사망(BC114)하여 그 세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곽거병의 활약으로 고비사막 이남에서 흉노를 찾아 볼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상황을 흉노인은  "우리가 기련산을 잃어 가축을 먹일 땅이 없고 연지산을 잃어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도 없다." 고 탄식했다고 전하고 있다.

 

  

 

박망후 장건

 

이후 흉노와 한의 싸움이 소강상태인 상황에서 무제는 남월과 서남이의 각 부족을 평정하고 고조선을 복속시켜 남쪽과 동쪽으로 세력 범위를 확대했다.

 

먼저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힘으로 평정하였는데, 흉노를 상대할 때보다 훨씬 적은 군사력으로도 충분했다.

 

흉노와 한은 기원전 119년에 위청과 곽거병이 흉노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힌 후 약 15년 동안 대규모 무력 충돌을 하지 않고 서로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은 흉노에게 신하로 복종할 것을 끓임없이 요구하였고 흉노는 무제 이전의 화친 정책으로 복귀할 것을 원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따라서 두 나라의 교섭은 항상 결렬상태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탄생하였는데, 기원전 100년에 흉노에 사신으로 간 '소무'이다.

 

한의 사신으로 간 소무를 맞이한 선우의 태도는 매우 오만무례했다. 선우는 한의 부하가 되라는 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다며 소무를 억류해 투항을 강요했다. 선우의 투항 권고를 거절하자 화가 난선우는 그를 멀리 떨어진 황야에 보내 숫양 한 마리만 주고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돌아오라"고 말했다. 즉 죽어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무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에 대한 충정을 지키며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했다.

 

한편, 무제는 흉노의 무례하고 강경한 태도를 알고 대흉노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의한다. 세력을 회복한 흉노가 때때로 국경 근처에 출몰해 기껏 개척한 서역 교역을 위협하기 시작한 일도 무제의 결의를 다그친 원인이었다. 그러나 다시 시작된 대 흉노 전쟁은 예전 같은 대규모전이 아니었다.

 

군사력 면에서 여전히 한나라가 그 규모나 전략 면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개별 전투에서는 종종 패했기 때문에 국지전에서는 오히려 흉노가 한을 진압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무와 같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탄생했다. 소무가 억류된 이듬해에 무제는 이사장군 이광리에게 출격을 명했다.

 

이광리는 3만 기병을 이끌고 주취안에서 공격해 들어갔지만 흉노의 대군에 포위되어 고전하였는데, 이때 이광리의 부대와 호응하여 북방의 거연에서 출격한 소부대가 있었는데, 기도위 이릉이 이끄는 약 5,000명 정도의 보병 부대였다. 이릉은 진격하다가 흉노군 3만과 마주했다. 병역 규모면에서 승산이 없는 전투였으나 이릉은 열 흘 넘게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그곳에 새로이 흉노군 8만이 나타났고 이릉은 마지막 힘을 다해 혈로를 열려고 했으나 흉노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크게 분노하여 이릉의 어머니와 처자를 죽이려 했다. 이때 유일하게 이릉의 충성과 용전분투를 변호한 사관이 있었는데, 무제는 이릉의 변호에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사관까지 궁형에 처했다. 그 사관이 바로 궁형의 치욕을 참고 살며 불후의 명저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이었다.

 

한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릉은 선우의 뜻에 따라 흉노의 공주를 아내로 삼고 선우를 섬기게 되었다. 이렇게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릉은 어느날 바닷가에서 끈질기게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 소무를 찿아갔다.

 

이릉은 소무가 투항하기를 권고하기 위해 찿아 갔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을 가슴 속에 숨기고 서로 말없이 술잔을 주고 받기만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다시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의 무제가 죽고 소제의 시대가 열리면서 기원전 81년 흉노와의 화의가 성립되어 소무는 19년 만에 조국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릉은 결국 흉노 땅에서 기원전 74년에 생을 마쳤다. 이처럼 무제의 치세 후반기에 있었던 흉노 원정에서 때때로 패배를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비운의 인물들도 탄생했다.

 

절개를 지켜 귀국한 소무는 후에 선제의 옹립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관내후가 되었고, 몽골고원에서 병사한 이릉의 분전과 항복의 비극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시와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한혈마(汗血馬)

하루에 천리(약 400km)를 달린다고 전해지는 한나라 시대 서역 대완국에서 산출되던 명마의 한 종류이다.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달리는 말」이라는 의미로 「한혈마」라고 불린다. 이 천리마는 한혈보마, 대완마 등으로 불렸고, 한 무제는 천마(天馬)라고 불렀다.

 

 

한혈마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한 무제의 명으로 서역으로 파견되었다가 흉노에 포로로 잡혀 탈출한 장건의 보고에 의해, 대완(페르가나)에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무제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대완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사신의 오만한 태도에 격분한 대완은 제의를 거절하고 귀향 도중 습격하여 사신을 참살하고, 대완마를 사기 위해 보낸 보물을 탈취한다.

 

기원 전 104년 이에 격분한 한나라는 원정군을 보내, 대완을 정벌하고 결국 한혈마를 얻었다. 무제는 한혈마를 얻은 후 감탄하여 「서극천마의 노래」를 만들게 하였고 「천마」라고 한혈마를 칭찬하였다. 감숙성 무위시의 뇌조묘 뇌대한묘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말의 동상·「마답비연」은 이 말을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3세기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여포의 죽음으로 관우의 애마가 되는 명마 적토마도 이 한혈마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나오는 곽정의 소홍마가 바로 이 한혈마이다.

 

 

 

월지(月氏, 月支)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

고대 중앙 아시아의 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 1세기 경, 북아시아, 중앙 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 민족과 그 국가를 이른다. 월지라는 명칭은 한자로만 전해 내려오며, 그들의 종족적 기원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월지는 원래 중국의 감숙 성의 서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모돈 선우 시기에 서방으로 쫓겨 가고 명칭을 대월지로 변경한다. 이후 박트리아에 자리잡은 대월지의 일부는 인도로 들어가 쿠샨 제국을 건설한다.

 

기원 전 3세기경 타림분지에 거주지를 두고 동서무역을 독점하여 당시에는 흉노를 압박할 만큼 강세를 유지했다.

이후 사기에 따르면, 모돈 선우(재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176년) 말기에 월지는 흉노에 패배하여 서쪽으로 쫓겨난다. 아울러 월지 지배하에 있던 서역의 나라들도 흉노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 이 때 일부가 남아서 서쪽으로 간 세력을 대월지(大月氏)라고 하고, 남아 있던 부족을 소월지(小月氏)라 불렀다.

 

기원 전 162년 모돈(冒頓)의 아들, 노상 선우의 공격을 받고 왕이 살해되었다. 이 때 노상 선우는 패배한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한다. 패배한 월지는 더욱 서쪽의 아무르강(阿母河) 주변 소그디아나로 벗어나고, 이 땅에서 대월지는 대하(박트리아)를 정복하고, 대월지국을 세워, 중계 무역으로 자리를 잡는다.

 

기원 전 130년경 전한의 장건이 반흉노 동맹을 제안하러 가지만, 이미 안주할 땅을 손에 넣은 대월지는 단호히 동맹을 거절한다.

 

기원 전 1세기경, 토하라의 쿠샨 왕조가 강대해져, 이 땅을 쿠샨 제국(귀상)이 지배하고, 동서교역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은 이 쿠샨 왕조도 대월지라고 불렀다.

 

 

대완국 또는 페르가나(러시아어: Фергана́, 우즈베크어: Фарғона)

중앙아시아동부, 아랄 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다리야 강 상류와 카라테긴 산지에 위치한 페르가나 분지를 중심으로 한 도시이다. 인종적으로는우즈베크계와 타지크계로 나누어진다.

 

오래 전에는 대완국(大宛國) 등 아리아계 국가가 성립되었다. 페르가나 분지는 명마의 산지이고, 한혈마(汗血馬)라고 불리는 명마의 산지였다. 전한 무제가 대완을 침략한 배경에는 이 한혈마의 산지라는 이유가 있었다. 한나라 때에는 한자로 대완이라고 불렸고, 서진 이후는 페르가나의 파낙나가 사용되게 되었다. 풍요의 땅으로서 알려졌으며, 7세기부터는 돌궐 등 터키계 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8세기에 아랍에 정복되었고 압바스 왕조의 지배하에서 이슬람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손 또는 우선(烏孫)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유목 민족이었다. 오손족은 중국문헌에 따르면 중국의 북동부의 예지 근처에 살았다. 그러나 기원전 176년 경 일리 강 이시쿨 호수의 영역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숑누에 패한 후 그곳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형성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5세기동안 머물렀다. 오손에 대한 중국의 가장 최근의 문헌은 서기 436년에 중국의 사절단이 방문한 것이다.

 

그들의 다음 운명은 투르크 왕국과 중앙아시아 특히 제티수 지역에 닥친 운의 돌연 역전과 관련있다. 그들의 이동의 상당한 흔적과 충격이 6세기에서 오늘날 까지 페르시아, 무슬림, 투르크와 러시아 문헌에 남아있다. 현재 그들의 후손은 약 250,000 명이며 서기 1세기의 인구의 절반정도이다. 우이신스는 두 종족이 있는데 둘라트와 사리 우이신(황오손)이 그들이다.

 

 

강거 (康居)

현재 우즈베키스탄 인근 지역에 세워진 고대 국가이다. 강거의 여름 수도가 지금의 타슈켄트이다. 위치는 소그디아나의 북쪽이며 다유안(페르가나)의 북서쪽 1000km 떨어져 있다. 기원전 128년 장건이 방문한 후 기록에 남겼다.

 

강거는 수당왕조시대에 강국(康國)으로 개명하였지만 그 당시에 영역은 곡투르트 칸의 돌궐인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