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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 (전한시대 : 한무제 3) 본문
중국의 역사 13 (전한시대 : 한무제 3)
장건의 서역 파견과 한무제의 반격
한무제의 대흉노작전은 적의 중심부를 타격하여 섬멸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의 기병전술은 흉노족을 따를 수가 없었다. 이에 무제는 위청으로 하여금 흉노 기병 이상의 기동력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한나라 기병을 육성토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하루에 달릴수 있는 말의 이동 가능거리는 통상 500킬로미터 이상은 달릴 수가 없다. 그리고 전략.전술에서도 마상에서 벌이는 기병대의 싸움은 흉노에 당할 수가 없는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 '2차 포에니 전쟁'시 '한니발 장군'이 '로마 제국'을 정벌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군과 벌인 여러 전투 중 특히 유명한 '칸내전투'시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민족의 기병과 알프스 일대의 갈리아 족 기병을 중용하여 보병의 좌우측에 배치하여 우세한 기병으로 상대군의 좌.우측을 공략하여 적 기병을 무력화시키고 적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쉽게 로마군을 섬멸하였던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생활화 해온 유목민족의 기병전력을 농경민족의 기병부대가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한무제는 위청,곽거병이라는 명장을 등용하여 흉노 군대을 이길 수 있는 기병을 육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흉노도 놀랄 정도로 기동력이 우수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기병을 육성했다.
장거리를 행군하는 말을 기병 한 사람 당 2필 이상씩 준비하여 교대로 타고 달렸으며 식량도 며칠분만 휴대하도록 하였다. 마상에서 활쏘기와 칼, 창을 다루는 기술, 공격 대형, 정찰, 조우전, 기만, 철수 등 기동전술을 익히고 숙달하였다. 흉노군의 기병전술을 역이용하는 방법과 적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정찰하고 공격시기도 놓치지 않았다. 위청과 곽거병이라는 명장이 천거된 것도 무제의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에서 발굴된 것이며 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승리하지 않으면 다시 노예로 인생이 역전된다는 절대절명의 운명이라는 사실도 그들의 승리 욕구를 불타오르게 하였고 자만하지 않고 적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는 철저한 전술로 적을 격파하였다.
또한 무제는 대월지국과 군사동맹에는 실패하였지만 장건을 통해 수집된 정보에 의해 새로운 대흉노전략을 수립할 수가 있었다. 장건이 10년 간 흉노에 잡혀 억류생활을 통해서 흉노에 대한 지리와 지형 등 여러가지 정보와 서역에 대한 상세한 정보, 그리고 흉노인들의 행동양식과 습성까지도 면밀히 파악하여 예상되는 적의 기도를 사전에 예측하고 대비하였기에 승리가 가능했다.
장건의 서역파견
중국의 두 탐험가 및 외교관으로 장건(張騫 ?-기원전 114년), 정화(鄭和 1371-1433), 이 두 명은 모두 왕조가 번영을 구가할 때의 인물로, 황제의 명을 받고 머나먼 땅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의 개척 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이룩해낸 업적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중 장건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실크로드, 즉 비단길을 최초로 개척한 이래 천 년 이상 동서 문물과 사신들이 왕래하였던 교두보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한무제는 대흉노전쟁을 벌이면서 흉노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대월지(大月支)라는 나라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월지는 원래 하서 지역(지금 중국의 감숙성 내 황하 서쪽 일대)에 위치하여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무렵에는 흉노족을 위협할 정도로 국력이 신장되었으나, 이후 세력이 팽창한 흉노의 침입으로 대월지 왕이 살해되자 서쪽 중앙 아시아로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한무제는 대월지국이 흉노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대월지국과 연합하여 흉노를 협공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으며 그의 전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대월지국에 파견할 사신을 물색하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이 장건이었다.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의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 성 성고현(城固縣)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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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9년 한나라 건원 4년, 당시 한나라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대월지에 대한 동맹을 맺으려 사자를 모집하였다. 장건이 지원을 해서 지원자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으로 향하였다.
이전에 대월지는 월지라고 불리웠는데, 흉노의 모돈 선우(冒頓單于)와 그 아들 노상 선우에게 패한 후, 서쪽으로 옮겨 이름을 대월지로 바꾸었다.
특히 노상 선우는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으므로, 월지는 흉노를 원망하고 있었고, 한나라는 흉노 서방의 대월지와의 협공을 위해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한다.
기원전 139년, 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은 '감보(당읍부)'를 비롯한 100 여 명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수도 장안을 출발하여 천산산맥 북쪽 '이리' 지방에 있는 '대월지'국을 찿아 서부로 향했다. 전혀 생소한 지역으로 출발하는 장건의 수행원 중에는 흉노인으로 한나라에 귀화한 감보(당읍부:堂邑父)도 끼어 있었는데 통역을 담당하고 길을 안내하는 역활을 담당하였다. 어느 지역으로 가나 흉노가 지배하는 지역을 통과해야만 했다. 일행은 '하서' 지역을 지나가던 중 흉노 기병에 사로 잡혀 군신 선우에게 끌려 가게 된다.
당시 서역 지방은 흉노의 세력권이었으므로, 장건이 한의 세력권인 감숙성으로 나가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만다. 흉노의 군신 선우는 장건이 대월지로 가는 사자임을 알아채고, “월씨는 우리들의 북쪽에 있다. 어떻게 한이 그곳에 사자를 보낼 수 있는가? 만약 내가 한의 남쪽 월나라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은 그것을 허용할까?”라고 말하며, 사신의 목적을 알게 된 선우는 장건을 억류하였는데, 10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면서 흉노인 부인까지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 그러나 장건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남은 인원과 가족을 데리고 탈출에 성공한다.
서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통과하는 등 수 십 일을 행군한 끝에 '아랄' 해로 흐르는 '시르' 강 상류의 '페르가나' 지방, 즉 '대완(大宛)'국에 도착하게 된다. 대완국 왕은 장건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비단 교역을 희망하면서 자신들의 특산품인 포도와 한혈마를 소개해 주었다. 장건은 한혈마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대완국에서 노독을 풀면서 쉰 다음 대월지로 가는 길을 대완국에서 병사를 동행하여 국경까지 안내해 주었다. 장건은 강거(康居)를 지나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대월지국이 있는 '소그디아나' 지역에 도착하게 된다. 장건은 대월지국 땅 앞에서 장안의 무제를 향해 절을 올리면서 출발한지 12년 만에 드디어 목적지인 대월지국에 도착하였음을 눈물을 흘리면서 고하였다.
총령부 규수 서쪽의 소그디아나(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일대)지역에 정착한 대월지국에 도착한 장건은 대월지국 여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30년 전 대월지국이 흉노족에게 당한 원한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강조하면서 한나라와 군사동맹을 요청하였다. 여왕은 과거 흉노족에 잡혀 죽은 월지국 왕의 미망인으로 한나라와의 동맹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노라면서 한 달 후 조정 회의가 소집되면 대신들과 같이 의논해 보겠다고 하였다. 한 달 후 여왕과 중신들은 열띤 토의 후 결론은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미 대월지국은 30년전 흉노의 침공으로 왕이 죽고 흉노에 쫓겨나 주민 70만 명이 이곳까지 왔으나 이곳 땅이 비옥하여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복수심에 불타기는 커녕 흉노와 지난 일로 지금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1만 여리나 떨어진 한과의 동맹으로 가까이에 있는 흉노를 자극할 위험도 있어 동맹을 거절하였다. 또 대하(大夏, 박트리아 ; 알렉산드 대왕의 정복 후 그리스인들이 세운 나라)국이라는 상업이 발달한 부유한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장건은 군사동맹의 불가함을 판단하고 거의 1년 동안 그곳에 기거하면서 주변국에 대한 지리,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전반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장건은 여왕에게서 월지국의 보검제련비법인 철강 제련기술을 전해 받는다. 장건 일행은 흉노를 피해 곤륜산 남쪽 기슭을 따라 이른바 서역 남로 설산을 통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카슈가르·야르칸트·우전·누란에서 차이담 분지를 지나 농서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누란에서 돈황으로 빠지는 길이 정상이었으나 돈황은 흉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을 피한 것이었다. 차이담 분지의 '야강'족은 장건이 월지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자립국이었으나 막상 들어가 보니 이미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장건은 이곳에서 야강 족에 의해 흉노에 끌려가 다시 억류당하고 말았다.
실크로드
그러나 이번에도 장건은 운이 따랐다. 때마침 군신 선우가 죽고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발생하여 어수선한 혼란한 틈을 타 아내, 감보와 함께 극적으로 흉노를 탈출, 사신으로 파견 된지 13년 만에 귀국(BC126)하여 무제에게 보고하였다. ( 군신의 동생 이치사가, 어리고 연약한 태자를 제압하고 선우에 자리에 올랐다. 태자 어단은 한나라에 투항 하여 척안후라는 지위에 봉해졌으나 수개월 만에 죽었다. 군신 선우까지 장자상속이였으나 이 사건으로 훗날 흉노가 분열하는 선례를 제공하였다.)
장안에 도착한 사람은 거지꼴이 다 된 장건과 당읍부(감보) 두 사람 뿐이었다. 장안의 백성들은 영웅이 살아 돌아온다면서 장건이 돌아오는 길옆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환영하엿다. 장안을 떠난 지 13년만에 상거지꼴이 다 되어 돌아 온 장건을 보자 무제는 장건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 하였다. 장건을 통해 서역 지역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된 무제는 대 흉노 전쟁에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게 되면서 작전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서역의 지리, 각국의 군사 규모, 문화, 특산물, 문화 등에 대한 다양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무제는 많은 호기심이 발동되었는데, 특히 한혈마(汗血馬 : 하루 천리를 달리는 말, 땀 대신 피를 흘린다고 함, 일명 천리마)라는 명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무제는 이를 얻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런 명마를 구할 수가 있다면 대흉노전쟁에서 적보다 능가하는 기병전술로 적을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건은 '태중대부'로 임명되고 무제의 대 흉노 전쟁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게 된다. 장건은 대하 지역 시장에서 촉나라 지방의 특산품이 거래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신독(身毒 : 인도)'을 거쳐 들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독으로 가는 길을 찿고자 하였지만 실패하게 된다.
기원전 129년, 장건이 서역에서 귀국하기 3년 전, 한무제는 위청을 비롯한 4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흉노가 차지하고 있던 오르도스 지방을 정벌하여 삭방군(BC127)을 두었으나 흉노와의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팽팽한 소모전을 치루고 있었다.
이 때, 대월지국과 군사동맹에는 실패했으나 장건이 가져온 서역의 36국에 관한 정보와 한혈마에 관한 장건의 보고는 무제에게 단비와 같은 매우 귀중한 것이였다. 무제는 장건의 보고를 토대로 전군을 서역의 요충지인 하서 지역으로 진군시켰다. 흉노의 입장에선 서부 지구의 관문이며 친분 관계인 강거족과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로, 서역으로 통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강거족과 흉노를 차단하려는 한나라 모두 사활이 걸린 싸움 이였다.(기원전 124~기원전121년)
한무제 45회 중에서..
무제는 장건이 가져온 보검제련기술을 위청에게 전하면서 무기를 생산하도록 지시하고 건포도 맛에 심취하여 신하들에게도 먹어 보라 하였다. 장건이 파견한 부사들이 돌아오면서 여러 나라 사신들을 대동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한나라와 통상을 맺기를 희망하고 교역 통로를 개척하고 무역을 확대하였다. 세제도 개혁하여 소금. 철 등을 나라에서 전매하는 세수입을 정하여 국가 재정도 확립하였다.
무제가 흉노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지방의 제후들은 여러가지로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무제는 위청이 흉노 정벌시 흉노 우현왕 막사에서 획득한 기밀문서 중 한나라 제후가 흉노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다는 정보도 알고 있었다. 무제는 승상 주부언으로 하여금 각 제후들의 문제를 황제를 대신하여 강력하게 처리하도록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에 주부언은 이미 추진중인 제후국을 소왕국으로 분할하는 문제와 제후들의 근위병 등 사병을 중앙군으로 편입시키는 문제, 그리고 각 제후들의 비리문제를 파헤치는 등,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불만이 제기 되었다. 제후들이 과도한 압력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연(회남왕)왕이 흉노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한 점과 제나라 왕이 자결하는 등 왕족 제후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그러한 사실에 왕실의 황태후가 분노하고 공주가 제공한 주부언의 뇌물 목록이 조왕을 통해 무제에게 고변하게 된다.
이에 무제는 주부언을 조사하라고 지시하고 정치적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판단되자 주부언의 조사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조사 결과는 주부언의 엄청난 뇌물 비리가 밣혀졌다. 무제는 주부언이 종실을 이간시키고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주부언이 그동안 몰래 뇌물을 받은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유능한 신하지만 뇌물 비리는 용서할 수 없다는 무제의 결심에 결국 주부언은 9족이 멸문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주부언이 사형이 집행되는 날 하인 적복이 술과 안주를 가져와 주인인 주부언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한 잔 따른다. 주부언이 이렇게 말한다. " 내가 생전에 1천 명이 넘는 식객들이 집안에 들락거렸지만, 오늘 사형장에는 하인 한 명만 있구나!" 고 비탄하면서 그의 목이 떨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무제의 치밀하고 비상한 정국 주도를 엿 볼 수 있다. 자신의 정책 구상을 전권을 위임받은 한 신하를 통해서 추진하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필요한 권력구조를 정리하는 등 그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이 된 후에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피해 당사자들이 가해자를 고발하는 방법으로 문제가 드러날 경우에는 가차없이 처벌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자신은 욕을 먹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개혁을 시도하고 행동대장으로 한 사람의 희생자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그의 희생으로 의도한 목적은 달성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냉혈한이기도 한 무제는 고집도 세고 의심도 많으며 개혁도 여러 난관에 봉착하였지만 강력하게 추진했다. 제위 기간 내내 대 흉노전쟁이라는 큰 목표를 세우고 국력을 결집하였으며 집념도 강하고 끈질긴 면도 있었다. 그래서 인재등용은 지위고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유능하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특출한 안목도 있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야하고 그런 결과를 내지 못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내 몰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상은 운수가 아니며, 벌은 핏줄을 가리지 않는다." , "죽고 사는 것은 정이며, 가난과 부귀는 그 사람의 모습이다."
그즈음 위청이 공주와 결혼하게 되고 얼마 후 황태후가 울화병으로 사망한다. 태후 국상 기간 대외 전쟁을 삼가하는 한나라가 가장 취약한 시간에 흉노는 한나라 세 지역을 공격하여 주군을 살해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에 무제는 국상이 끝나자 다시 흉노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제후들의 조사를 담당한 장탕이 각 제후국들의 문제를 보고하게 된다.12명의 제후 왕자들의 문제와 능공주의 흉노 첩자 문제, 회남왕의 간첩 행위 및 흉노 연계 반정 계획등이 노출된다. 한편 흉노는 대규모 기습을 준비한다.
무제는 지방 순시를 계획하는데, 신하들의 안전을 우려하는 조언을 무시하고 감천궁, 장강 등 지방 제후 땅을 순시하면서 산수를 구경하며 제후국의 동향을 살핀다. 호위 장수로는 이광을 불러 1만 근위대로 하여금 황제 순행을 호위토록 했다. 한편 회남왕은 무제의 순시에 대비 왕자의 권유로 무제 암살계획을 구상한다. 그러나 호위 장수 이광의 마음을 떠보기로 하는데, 이광은 1차 흉노 전쟁에서 패한 후 평민으로 지낼시 회남왕이 미래를 위해 뇌물을 건내 준 적이 있기 때문에 이광 장군을 포섭하기로 하면 더 쉽게 무제를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편 무제는 회남왕의 땅에 도착하여 궁궐로 가지 않고 장 강변에서 야영을 하게 된다.아마 궁궐내로 들어가면 회남왕이 어떤 모의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후국의 군사들은 움직일 수 없으며 일체 통제되고 있었고 무제의 야영장 주변에는 길목마다 근위대 군사가 물샐틈 없이 차단하고 있었다. 문제의 야영장에 회남왕이 방문한다. 무제는 회남왕의 의중을 떠 보면서 그의 모반에 대한 속내를 살핀다. 회남왕은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을 이야기하자 무제는 제후국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비난한다. 당시 '매관 매죄'가 성행하였는데, 이는 무제가 데 흉노 전쟁의 군자금을 모으기 위한 방법으로 돈을 내면 관직을 주고 죄도 방면해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고 각 제후,신하,상인 등에게도 기부를 강조하고 있었다. 야영장에 '뇌파'라는 회남국 협객이 무제를 찿아오는데 그는 중앙 상비군에 지원하려는 그를 회남왕의 왕자가 그를 회남국에 남도록 강요하는 등 협박을 받고 있던 중이라는 등 이러한 사실을 포함 회남왕의 반정 음모를 낱낱이 고변하게 된다. 무제는 예측한 모든 사실을 듣고 신중하게 대처하도록 신하들에게 당부한다. 한편 회남왕은 이광을 초대하여 의중을 떠 보지만 이광은 화를 내며 돌아오고 이광의 마음은 과거 뇌물을 받은 적이 있던 점에 고민하게 된다. 한편 회남왕은 모든 사실이 들통난 것으로 판단하고 반정을 준비하고 있던 차, 무제는 곽거병을 회남왕에게 사절로 보내 '회남왕이 협객 뇌파를 중앙군에 지원을 못하게 한 왕자와 회남왕에게 가벼운 경고 정도의 경고문'을 보내 회남왕이 방심하게 만든다. 한편 무제는 회남왕이 방심한 틈을 타서 일정을 빨리하여 급히 경도로 돌아 온다. 결국 회남왕의 반정 계획은 무제가 예상보다 빨리 떠나자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해 흉노는 극심한 한파로 식량이 바닥나고 가축이 떼로 동사 하는 등 재난이 겹치자 한나라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무제는 국상도 끝난터라 흉노 정벌을 준비시킨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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