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15 (전한시대 : 한무제 5) 본문
중국의 역사 15 (전한시대 : 한무제 5)
상홍양의 신경제정책
매년 계속된 흉노 원정으로 한의 재정은 바닥까지 치닫게 된다.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을 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이런 재정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좌지우지 되는 사레가 얼마던지 있다. 그런데 무제는 일련의 새로운 경제정책을 도입해 훌륭히 국가 재정을 다시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상홍양이라는 비범한 경제 관료가 큰 역활을 하는데, 신경제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전기는 <사기>에도 <한서>에도 없다. 그 밖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뤄양에서 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암산의 재능을 인정받고 13세 때 시중이 되었다.
무제가 새로운 정책을 필요로 하게 되자 재무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내 대농승(재무차관)에서 대사농(재무장관)으로 승진하면서 신경제 추진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소금과 철의 전매
소금과 철은 당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이익이 엄청낫지만 무제의 시대까지는 민간에서 운용했다. 그 결과 쇠를 제련하고 소금을 파는 자는 재물 또는 만금을 모았다. 그러나 나라의 어려움을 돕지 않아 서민들은 괴로움에 빠졌다."고 <사기. 평준서>에 적고 있는데 그들이 국고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무제는 고심끝에 각 제후국과 상인들로 하요금 기부금을 내도록 권장하였는데 무제가 생각하는 만큼 재정에 도움이 도지 못하자 고심 끝에 소금과 철의 전매권을 국가가 관리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이때가 기원전 119년으로 위청과 곽거병이 흉노 토벌을 위해 동시 출격한 해이다. 이후 국고의 수입이 증대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익이 엄청났음이 분명하다.
" 이때 사방의 난리를 정벌하니 수레와 무기의 비용과 승리에 대한 상금으로 억만을 계획하니 모두 대사농을 우러렀다. 이는 모두 소금과 철의 복이었다."<염철론>
균수법과 평준법
기원전 115년에 실시한 균수법이란, 정부의 상품 유통 관리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에는 각 군국이 그 지역의 산물을 중앙 정부에 조세로 바칠 때 수송비도 부담했다. 따라서 수도에서 먼 군국과 가까운 군국의 부담액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났다.
'균수(均輸)' 란 수송비를 균등하게 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중앙에서 각 군국에 균수관을 파견하여 조세로 바치는 그 지역의 산물(곡물,직물)을 관리하고 필요에 다라 이를 적절한 가격으로 사들이는 권한을 주었다.
한편, 평준법은 수도에 평준관을 두어 싸게 사들인 물자를 저장하고 물가가 오르면 이 물자를 방출하여 가격을 안정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기격 안정을 위해 정부미 방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결국 이 두 제도는 상업을 국가가 관리하는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대상인의 이익 독점을 제한하고 그 이익의 대부분을 국고로 환수한다는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산민전과 고민령
산민전(算緡錢)이란 상공업자에게 부과하는 특별 재산세로, 상인은 재산 평가액 2,000전에 1산(120전), 수공업자는 4,000전에 1산을 과세했다. 일반인에게는 1만전에 1산을 과세했다니 상공업자에 대한 특별 과세는 2.5배에서 5배나 높았다.
세금 부담을 줄이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이가 없ㄴ느데, 무제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부호들은 앞을 다투어 재산을 숨겼다.'<한서, 식화지>고 한다. 따라서 원만한 징세를 위해서는 고민령과 같은 엄한 벌칙이 절실했다.
고민령은 위반자에 대해 재산을 몰수하고 1년 동안 변방을 수비하며 고발 장려 제도로 고발자에 대해서는 금액의 절반을 준다고 되어 있다. 그러자 무질서한 고발이 폭풍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 결과 중산층 이상의 재산가는 거의 모두 고발을 당했고, 국고에 몰수된 재산이 수억에 이르렀으며, 대상인들은 줄을 이어 파산했다고 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상홍양이 실시한 재정책은 당시 커다란 경제력을 보유했던 대상인을 목표로 삼았으며, 농민에 대한 세금 증가는 최대한 피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명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상인들은 크게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지만 경제력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국가가 그들의 불만을 해결하려면 힘으로 누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혹리(酷吏)' 라고 부르는 검찰 관료였다.
문화 부흥과 혹리 등장
유교가 다른 제자백가의 학문을 누르고 국가를 통치하는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무제 시대 때부터이다. 시황제의 분서갱유로 유교의 학문적 가치가 땅에 떨어졌지만 무제에 이르러 다시 부흥하여 교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무제는 문물제도를 정비해 나가면서, 문화를 장려하였고, 문학에서도 서사시가 유행하였다. 또 궁중에 악부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민요를 모아 기록하고 연주하게 하여 에술분야도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역사서 <사기>가 만들어진 것도 무제 때 였다. 이는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아들에게 부탁하였다. 사마천은 20세경 낭중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면서 크게 견문을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저술에 착수하여 무려 130권에 달하는 체게적인 역사서를 완성하게 되었다.
저술에 몰두하던 중 흉노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게 되지만,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고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까지 오른다.
대외적으로는 흉노 정벌을 우선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경제와 문화를 부흥시켰다. 무제의 치세에는 훌륭한 관료들의 정책과 실행이 잘 조화되었다.
한편, 백성을 사랑과 온정으로 통치하던 관료를 지칭하는 순리(循吏)에 대응하는 혹리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혹리는 무제의 경제정책을 비방하거나 방해하는 자를 처단하는데 앞장 선 관리들이었다. 무제의 강력한 전제정치의 실시와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의 확립은 추상적인 이론만을 주장하는 유가 출신의 관료보다 법령에 충실하고 실무에 밝은 법가 출신 관료가 더 적합하였던 것이다.
혹리는 전제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혹하게 법을 집행하는 관료들에게 사마천이 붙여 준 명칭이다.
<사기>의 혹리열전에는 모두 열한 명의 전기가 실려 있는데, 그 중 아홉 명은 무제 시대에 활약한 사람들이었다.
사마천은 매우 부정적인 어조로 이들의 전기를 써내려갔지만, 현실적으로 무제의 전제 정치를 지탱한 것은 쓸데없이 요순시절을 찬미하는 유가 관료가 아니라 이들 혹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활발한 대외 정벌을 계속했던 무제의 치세도 한 꺼풀 벗겨 보면 이런 혹리의 활약으로 지탱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의 여인들
당나라 시인 '백락천'은 "후궁에 미녀 삼천, 삼천의 총애 일신에 있었네"라고 노래했는데, 무제 또한 여인들과의 후일담을 많이 남겼다.삼천명은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후궁만도 수백 명에 달했으며, 황제의 총애를 둘러싸고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졌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일은 그 여성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과 나아가서는 이런저런 연고자들의 장래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자연히 주위 사람들의 암투 역시 뜨겁게 달아 오를 수밖에 없었다.
무제가 황태자로 올립되기까지 그 수완이 만만치 않은 여인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무제는 '비'인 '아교(진 황후)'를 그리 오래 사랑하지 못했다.
진 황후는 황제의 혈통답게 자존심만 강했고 게다가 후사를 이을 아이도 낳지 못했다. 혹자는 근친혼 때문에 아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어쨌던 무제는 금으로 만든 집에 첯사랑을 모셔 놓긴 했지만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이 사이를 파고든 사람이 무제의 친누나인 '평양공주'였다.
평양공주는 자기 집에 양갓집 규수 십여 명을 모아 궁중 예절법과 화장법 등을 가르치고 어느 날 무제를 불러 그녀들을 소개했다.
평양공주는 자신의 영향권 안에 있는 여성을 황제 곁에 두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예쁘게 차려 입은 양갓집 딸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평양공주의 시녀 위자부라는 하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위자부는 평양공주를 모시는 노예 '위온'의 딸로, 공주의 사설 합창단 단원이었다.
무제는 옷을 갈아 입을때 시중을 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위자부와 사랑을 나눴고, 기분 좋게 공주의 집을 떠났다고 한다. 공주는 재빨리 위자부를 후궁으로 보냈다.
공주는 마차에 타는 위자부의 등을 두드리며 "자, 가거라. 부디 몸조심하고, 출세해도 날 잊으면 안 된다"라고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제는 위자부와의 사랑을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궁에 들어온 그녀를 1년 이상 찿지 않았다. 그래서 자부는 황궁에서 후궁들을 정리하는 날, 황제를 직접 알현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궁에서 내보내 줄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수많은 여성들이 희망과 기대를 품고 후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야말로 궁은 황제에게 목을 메는 여인들로 가득했다.
자부는 희망도 없으면서 후궁으로 있다가 그대로 죽기는 싫다고 말하였고, 그 마음을 딱하게 여긴 무제는 다시 자부를 총애했다. 이렇게 해서 자부는 차례로 세 딸을 낳았고 마침내 바라던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훗날 비극의 죽음을 맞이한다.
위자부가 아들을 낳자, 무제는 아이가 없는 진 황후를 폐하고 그 대신 자부를 황후로 올렸다. 곧 자부가 낳은 거가 태자가 되었고, 그녀의 추천으로 동생인 위청과 조카인 곽거병이 등장함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이렇게 황후가 바뀌자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던 장공주는 평양공주를 찿아가 말했다.
" 황제는 내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소. 그런데 일찌감치 내가 정해 줬던 배필을 버렸소. 도데체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도리를 저버릴 수가 있단 말이오?"
무제를 옹립하는 데 공적을 세웠는데 자신의 딸을 저버리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행동이 아니냐고 책망했던 것이다. 그러자 평양공주는 차갑게 "아기씨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폐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동안 물론 진 황후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사방팔방으로 손을 뻗쳐 임신을 하게 해 준다는 약을 구해 먹었지만 손자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하녀였던 천한 신분의 자부는 일약 중국의 황후가 되었으며 이후 38년 동안 후궁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색기가 다하면 애정도 식는다'는 말이 <사기>에도 있듯이, 무제가 총애하는 여자들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무제가 쉰 고개를 넘었을 때, 그는 나라를 기울어지게 할 만큼의 미인이라는 이부인을 만나게 된다.
무제는 궁중에 악사인 이연년이 데리고 있는 가무단 중 자신의 여동생이 있는데 미색이 뛰어났다고 한다. 자신의 여동생을 빗대어 한 번 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보면 나라가 기운다는 여인이라고 노래했다. 그 노래를 들은 무제가 "어디 그런 여자가 어디있냐?" 고 하자 옆에 있던 평양공주가 '이연년'의 여동생이라고 말하자 마침 궁에 애정을 쏟을만한 여인이 없던터라, 무제는 당장 '이부인'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무제는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와 춤 쏨씨에 매료되어 늘 곁에 두고 총애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부인이 아들을 낳게 되었고 병이 들어 임종을 앞두고 무제를 찿았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흉한 얼굴을 보여줄 수 없다며 자신의 아들과 형제들을 잘 돌보아 주라고 간곡하게 부탁한 뒤 숨을 거뒀다.
이부인과 이토록 애틋한 사별을 했던 무제는 그것으로 그의 여인들과의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만년에 그가 마지막으로 총애했던 여인인 '구익부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낳은 아들 '불릉(후일 소제)'이 자신과 닮았다고 하여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불릉은 이미 황태자로 옹립된 위자부의 아들 거와 이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을 제치고 결국 8세의 나이로 태자에 올랐고, 무제가 죽은 후 제8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구익부인은 불릉이 황제가 되기 전에 살해된다. 어린 아들이 황제가 되었을 때 젊은 생모인 그녀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것이며 국정을 농단할 것을 염려한 무제거 그가 죽은 뒤를 염려하여 구익부인을 죽였다고 한다.
제국의 황제라 해도 경국지색에 당할 자는 없는 법.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었던 황제의 말년은 행복했기 보다는 오히려 불행과 쓸쓸함이 느껴지는 마지막 삶을 살았다.
-서초동-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역사 17 (전한시대 : 한무제 7) (0) | 2010.02.28 |
---|---|
중국의 역사 16 (전한시대 : 한무제 6) (0) | 2010.02.28 |
중국의 역사 14 (전한시대 : 한무제 4) (0) | 2010.02.26 |
중국의 역사 13 (전한시대 : 한무제 3) (0) | 2010.02.25 |
우면산의 2월 (봄비같은 승리 소식...) (0) | 2010.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