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16 (전한시대 : 한무제 6) 본문
중국의 역사 16 (한무제 6)
한무제의 말년
'봉선대전(封禪大典)'
어느듯 세월은 지나 18년이 흘렀다.
무제는 황태자 거의 사상이 자신과 닮지 않았다 하여 항상 불만에 차 있었다. 황태자는 무제와 대화시 군주는 무력보다 덕을 숭상해야 한다는 말에 마음속으로 분노하며 강한 군주상이 아닌 태자의 언행에 매우 못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막북전투> 이후 흉노와 한의 싸움이 소강상태인 상황에서 무제는 남월과 서남이의 각 부족을 평정하고, BC 110년 원봉 원년 10월에는 '태산'에서 '봉선대전'이라는 행사를 벌이면서 백성들에 대한 황제의 신격화 노력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공자보다 1세기 전 사람인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 관중이 지었다고 하는 「관자」(管子)라는 책에는 관중 이전에 이미 중국 역대 황제 72명이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했다는 말이 기록돼 있지만 이는 허구라는 것이 압도적인 견해다.
무엇보다 「관자」라는 책이 관중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이후에 나왔음이 확실한데다 「논어」나 「맹자」를 비롯한 그 이전 문헌 어디에도 봉선에 관한 언급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천하통일을 이룩한 직후 진 시황이 여러 방사(方士)들의 꼬드김에 이끌리어 막상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하려 했으나, 어느 누구도 봉선제에 대한 방식을 몰랐으며, 이에 화가 난 시황이 방사들을 쫓아내 버렸다는 기록이 「사기」에 전한다.
이에 시황은 천하통일 전인 본국 진(秦)나라의 옹현이란 산에서 지내던 천신제(天神祭) 의식을 따라 태산에 올라 천신에 대한 제사인 봉(封) 제사를 지낸 다음 그 남쪽 양보산(梁父山)이란 곳에서 지신(地神)에 대한 제사인 선제(禪祭)를 지냈다.
이처럼 봉선제는 천자가 천하를 통치하는 운명과 명령을 천신과 지신 모두에게서 아울러 받았음을 선포하는 '최대의 제사의례'였다.
한데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이 막상 태산에서 봉선제를 행한 다음 하산하는 길에 억수같은 비를 만나 나무 아래서 피신해야만 했으며, 이 광경을 지켜본 많은 사람이 시황과 그가 지낸 봉선제를 비웃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봉선제를 가장 즐긴 중국 황제로는 시황 이외에 그보다 약 100년 뒤에 나타난 한 무제를 들 수 있다. 그 또한 '봉선 중독자'라 일컬을 만큼 태산을 숭상했다.
한데 무제는 시황의 전철을 피하기 위한 교묘한 주술행위를 개발했다. 천자가 올리는 봉선대전에 대해 하늘과 땅 또한 어떤 식으로건 그 황제에게 지상의 통치권을 독점적으로 수여한다는 '표징'을 보여주어야 의식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렇다고 하늘이 말을 할 리는 만무한 법. 봉선대전 즈음에 하늘에서 천둥이나 벼락이 치지 않거나 비가 퍼붓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라 할 것이다. 이를 우려했음인지 무제는 봉선대전에 맞춰 이국 땅에서 가져온 기이한 새와 짐승을 태산에다가 풀어놓고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게끔 했다.
"기린이 나타났다. 봉황이 출현했다".
이러한 고도의 쇼는 봉선대전을 올리는 천자에 대해 하늘이 땅이 감응을 해서 무제에게 지상에 대한 독점적 지배력을 공인하는 뜻을 담았던 것이다.
주변국 정벌로 영토확장
BC109 년, 무제는 고조선을 복속시켜 한사군을 설치하고 남쪽과 동쪽으로 세력 범위를 확대했다.
BC104 년에는 태초력을 채용하고 관제를 개혁했다.
무제는 장건으로부터 대원의 한혈마에 대한 보고를 듣고 흉노의 말보다 뛰어난 대원국의 한혈마를 얻기 위해 '장사'와 '차령'이라는 직급의 두 특사를 많은 황금과 특산품을 주어 보냈다. <사기> '대원열전'에는 "한의 서쪽 1만리 가량 떨어져 있고, 70여 개의 성에 인구가 10만이며 활과 창으로 무장한 기병군대가 있다. 생활은 벼와 보리, 포도 농사를 짖고 있으며 특히 피와 같은 땀을 흘리는 명마(천마의 자손)가 있는데 대원국 수도인 '이사성'에 모아 기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의 사신을 맞이한 대원왕은 한나라가 원거리로 군대 파견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한의 사신을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격노한 무제는 BC104년 이광리 장군에게 병력을 주어 대원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사막 지역에 서투른 한의 군대는 태반이 굶주리거나 병이 들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돈황'으로 후퇴했다.
무제는 크게 노하여 '돈황' 서북쪽 98Km 거리에 위치한 만리장성 서쪽 끝단에 위치한 서역 관문인 '옥문관'을 봉쇄하고 이광리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무제는 변경의 기병과 죄수 등 6만 명과 소 10만 마리, 말 3만 마리를 증원군으로 보내 이광리에게 재차 원정을 명하였데, 주천과 장액군에 후위군 18만을 대기시켰다. 엄청난 대규모 병력이었다.
BC101 년, 두 번째 원정에서 이광리는 대원국의 수도인 '이사성'을 포위 공격하면서 물줄기를 차단하는 작전으로 성안의 수원을 고갈시켰다. 대원국은 한나라가 필요한 명마를 모두 죽이겠다며 버텼으나, 견디다 못한 신하들이 왕과 왕후를 살해하고 투항하여 결국 대원국을 항복시켰다. 이광리는 대원에 '매체'라는 왕을 세우고 수십 필의 선마를 비롯한 3천 필의 말을 이끌고 한나라로 귀국하였다. 이후 이광리는 이 전공으로 '이사장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때 무제는 '천마'가 온다는 소식에 기쁨이 넘쳐 "천마가 오도다, 서쪽 끝에서 만리를 넘어 유덕하게 돌아오도다..."라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광리의 원정은 명마를 손에 쥔 것 못지않게 서역 여러 나라에 힘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었고, 안식,강거,대식국까지 한에 조공하게 되었으며 중앙아시아와 서방까지 한나라의 영향권 안에 두게 되었다.
대완 정벌을 마친 이광리는 이후 흉노와의 전쟁에 동원되어 몇 차례 공적을 세웠지만, 기원전 90년 '호록고' 선우의 군대에 패하여 포로가 되어 선우 모친 제사에 재물로 받쳐저 사망하였다.
무제는 주변국을 정벌함에 먼저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힘으로 평정하였는데, 흉노를 상대할 때보다 훨씬 적은 군사력으로도 충분했다.
흉노와 한은 기원전 119년에 위청과 곽거병이 흉노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힌 <막북대전> 이후 약 15년 동안 대규모 무력 충돌을 하지 않고 서로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은 흉노에게 신하로 복종할 것을 끓임없이 요구하였고 흉노는 무제 이전의 화친 정책으로 복귀할 것을 원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따라서 두 나라의 교섭은 항상 결렬상태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비극의 주인공 '소무', '이능'
그런 상황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탄생하였는데, 기원전 100년에 흉노에 사신으로 간 중랑장 '소무'이다.
한의 사신으로 간 소무를 맞이한 선우의 태도는 매우 오만무례했다. 같이 사신으로 간 부사가 소무와 협의도 없이 흉노로 반역한 한나라 장수였던 조신을 암살하여다 실패한다. 이에 선우는 한의 소무 등 사신을 억류하고 선우의 부하가 되라고 요구했다. 이에 소무는 받아 들일 수 없다며 선우의 투항 권고를 거절하자 화가 난 선우는 그를 멀리 떨어진 황야에 보내 숫양 한 마리만 주고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돌아오라"고 말했다. 즉 죽어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무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에 대한 충정을 지키며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했다.
한편, 무제는 사신을 억류하는 등 흉노의 무례하고 강경한 태도를 알고 대 흉노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의한다. 세력을 회복한 흉노가 때때로 국경 근처에 출몰해 기껏 개척한 서역 교역을 위협하기 시작한 일도 무제의 결의를 다그친 원인이었다. 그러나 다시 시작된 대 흉노 전쟁은 예전 같은 대규모 전이 아니었다.
군사력 면에서 여전히 한나라가 그 규모나 전략 면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개별 전투에서는 종종 패했기 때문에 국지전에서는 오히려 흉노가 한을 제압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위청, 곽거병의 <막북대전> 이후 대막 이남의 흉노 위협은 사라졌고 세월은 18년이나 흘렀다. 위청은 병들어 누워 있고 군사 업무는 이광리 장군과 곽광이 대신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장성하여 어른이 되어 있었으나 여전히 나이든 무제의 마음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지방 순행 중 만난 젊은 구익부인을 후궁으로 맞은 무제는 구익부인 등 여색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구익부인이 아들을 낳게 되자 자신을 닮았다며 기뻐한다. 그래서 구익부인의 위세가 날로 높아만 가고 있었으며 그녀의 측근들이 조정의 주요부서에 등용되기 시작한다. 흉노가 사신을 억류하고 화친 제의에 조정은 이광리,곽광 등 무장들의 강경파와 태자를 포함한 중신들의 온건파로 편이 갈리어 논쟁을 벌이는 한편 무제는 죽은 이부인의 오빠 이광리를 서역원정에서 돌아오자 이사장군으로 임명하고 흉노 토벌을 계획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무와 같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탄생했다.
소무가 억류된 이듬해인 기원전 99년, 무제는 이사장군 이광리에게 출격을 명했다.
이광리는 3만 기병을 이끌고 '주취안'에서 공격해 들어갔지만 흉노의 대군에 포위되어 병력의 70~80%를 잃었다. 이때 이광리의 부대와 호응하여 북방의 '거연'에서 무제의 특병을 맏고 출격한 소부대가 있었는데, 죽은 이광 장군의 손자(이감의 아들)인 기도위 '이능'이 이끄는 약 5,000명 정도의 보병 부대였다. 이능은 진격하다가 흉노군 3만 기병과 마주했다. 병역 규모면에서 승산이 없는 전투였으나 이능은 열 흘 넘게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그 곳에 새로이 흉노군 8만 기병이 나타났고 이능은 5,000 명 병력으로 도합 11만의 흉노군을 상대로 마지막 힘을 다해 혈로를 열려고 했으나 화살도 떨어지고 칼도 뿌러져 흉노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능의 항복 소식을 들은 무제는 가장 신뢰하던 장수가 항복한 점에 크게 분노하여 이능의 어머니와 처자를 죽이려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때 대부분의 신하들이 이능을 비난하며 처단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으나 유일하게 이능의 충성과 용전분투를 변호한 사관이 있었는데 바로 '사마천'이었다. 사마천과 이능, 소무는 서로 막연한 사이였다. 사마천은 사전 군보를 본 내용을 토대로 변호하였다. 무제는 사관들이 역사의 어떤 인물을 치겨 세우기도 하고 폄하기도 하는 등 사가들의 입맛대로 역사를 농단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런 세세한 내용의 군보를 사관이 황제보다 먼저 보았다는 점과 황제에게 이능을 변호하는 것은 이광리 장군을 폄하는 것이고 이는 죽은 이부인을 폄하는 것이며 결국은 바로 황제인 자신을 폄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릉의 변호에 화를 참지 못하고 사관인 사마천을 천문과 지리에 박식한 점과 사기를 편찬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궁형에 처했다.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을 참고 남은 기간을 살며 불후의 명저 <사기>를 완성하였다.
한편 한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능은 선우의 뜻에 따라 흉노의 공주를 아내로 삼고 우교왕이 되어 선우를 섬기게 되었다. 이렇게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능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끈질기게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 소무를 찿아갔다. 이능은 소무가 투항하기를 권고하기 위해 찿아 갔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을 가슴 속에 숨기고 서로 말없이 술잔을 주고 받기만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다시 수 년의 세월이 흘러, 한의 무제가 죽고 소제의 시대가 열리면서 기원전 81년 흉노와의 화의가 성립되어, 소무는 19년 만에 조국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능은 결국 흉노 땅에서 기원전 74년에 생을 마쳤다. 이처럼 무제의 치세 후반기에 있었던 흉노 원정에서 때때로 패배를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비운의 인물들도 탄생했다.
절개를 지켜 귀국한 소무는 후에 선제의 옹립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관내후가 되었고, 몽골고원에서 병사한 이능의 분전과 항복의 비극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시와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무제의 말년
무제는 말년이 다가오면서 몸이 쇠약해지고 병환에 시달리면서 환청에 사로잡혀 잠을 자다가 헛소리를 하고 변덕이 심하여 조정 대신들이 변덕스런 무제의 한마디 말에 멸족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주변 간신들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상황으로 변질되어 간다. 그러다가 아들을 낳은 젊은 구익부인을 총애하며 그녀가 추천하는 '강충' 등의 인사를 등용하여 권력을 휘두르게 만드니 조정의 원성은 높아지고 있었다. 신하들은 무제의 사후 위황후 소생의 황태자, 이씨부인 소생의 왕자 창업왕, 구익부인 소생의 어린 왕자 '불릉'을 놓고 차후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서로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다.
무제는 날로 황태자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고 구익부인 소생의 어린 왕자에 대해서 더 한층 총애를 하고 있었다. 이에 위황후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는데, 위황후는 병환중인 대장군 위청을 문병 차 찿아가 황제가 구익부인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려 한다면서 황태자의 앞 날에 대해서 걱정한다. 병환중이라 죽음이 가까워진 위청이 이 말을 듣고 '5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한 황제로 한 번도 자신이 황제에게 어떤 청을 한 적이 없는 관계로 마지막으로 황제를 만나 이야기 하겠다'며 아픈 몸을 이끌고 무제를 알현하게 된다.
위청 장군이 알현하려 온다는 보고를 받은 무제는 의관을 정좌하고 현관으로 나가 대장군 위청을 맞이한다. 들것에 실려오는 대장군 위청을 보고 성안의 병사들이 뛰어나오며 "대장군이시다! 대장군이시다!"며 환호한다. 이를 본 위황후와 위청의 부인 평양공주가 감격에 눈물을 흘린다. 궁에 도착하여 계단을 기어 오르는 위청을 본 무제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안스러운 표정으로 흉노전쟁의 영웅 대장군 위청을 맞이한다. 위대한 황제와 위대한 전쟁 영웅이 만나는 역사적이며 감격스런 장면이었다. 위대한 한제국을 건설한 황제 무제의 영광에는 노예 출신의 대장군 위청을 발굴하여 빛나는 위업을 달성하도록 만든 황제와 그 위업을 실행한 대장군 위청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위대한 역사를 두 사람이 이끌어 왔기 때문이며 이 드라마의 압권이다.
대장군 위청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무제 앞에 부복하여 노예인 자신을 중용하여 황제를 위해 멸사봉공의 위업을 달성하게 한 것은 황제의 은혜임을 충심으로 감사드린다며 마음 속의 이야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꺼낸다. 대장군 위청은 간하기를 이제는 내외정책을 변경할 것을 건의한다. 먼저 황태자 문제를 거론하면서 황태자는 아직 어리고 황제의 위대한 꿈을 당장은 따르지 못하더라도 황태자를 버리지 말 것과 이제 한나라도 덕을 숭상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덕치를 베풀 것을 건의 한다. 그러나 무제는 비록 욕을 먹더라도 우리 시대에 할 일을 다해야 한다, 두번 다시 자신과 같은 황제가 나타나지 않도록 함이라면서 위청의 마지막 말을 자른다. 무제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후 위청은 며칠 후 사망한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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