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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8 (한무제 시대의 주요 인물들)

두바퀴인생 2010. 3. 2. 00:09

 

 

 

중국의 역사 18 (한무제 시대의 주요 인물들)

 

 

 

 

 

 

한무제 시대의 주요 인물들

 

 

위청(衛靑)

전한의 한무제의 장군으로 장평후(長平侯)가 되었다.

 

그는 하동 평양(산서성 임분 山西省 臨汾) 출신이였다. 모친은 노비였던 위온이며 누나는 한무제의 황후 무사황후이다. 한무제는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소탕케 하였다.

 

전한시대 동안 한무제가 위청을 보내 허타오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다. (기원전 127년)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동안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고 동부지역은 선비족이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에게 굴복한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분묘(墳墓)는 곽거병의 묘 인근인 무제의 분묘인 무릉(茂陵)의 근처에 남아있다.

 

이광( 李廣,  Li Kuang - 기원 전 119년)

중국 전한시대의 장군. 문제, 경제, 무제를 삼 대에 걸쳐 수행하였다. 무용이 뛰어나 평생을 흉노와 싸워왔지만 번번이 전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분사했다. 진의 명장 이신의 자손이다. 사촌동생으로 승상이 된 이채가 있다.

 

본적지는 농서군 성기현(현 감숙성 텐수이시 진안현)이다. 기원 전 166년, 흉노 정벌에 공을 세워, 낭이 되어 문제의 옆에서 장군으로 수행했다. 맹수를 사냥을 할 때 근접전에서 죽이는 무용을 보이자 문제는 「고조부 때 태어났으면 만호후(萬户侯)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게 했다. 경제 때는 효기도위에 임명되었고, 주아부 아래에서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는 공적을 세웠다. 다만 양왕 무의 장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한나라에서는 공적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후에 상곡 태수, 상군 태수가 되었다. 그 때에 10배가 넘는 흉노군에 포위되었지만, 일부러 복병이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후퇴하자, 흉노군은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 후, 농서, 북지, 안문, 운중 태수(모두 한의 북변에서 흉노에게 가깝다)를 역임한다. 당시 흉노들에게 비장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후로도 무용이 뛰어난 무장을 이광을 모방해 비장군으로 불리는 일이 많았는데, 후한 말기의 무장 여포도 비장군으로 불렸다.

 

한 무제 때는 그를 천거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위위에 승진했다. 무제가 마읍에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하려고 했을 때에는, 효기장군으로 종군했지만 공적은 세우지 못했다. 기원 전 129년 흉노와의 싸움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 그 후 탈출하여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죄를 추궁 당해 평민으로 강등당했다. 이후 우북평 태수로 복귀하여, 낭중령으로 옮겼다. 흉노와 자주 전투를 벌였지만 좋은 전과를 얻지 못하고, 기원 전 119년 흉노 침공 때에는 고령을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광은 격렬하게 항의해 간신히 참전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무제의 밀명을 받은 대장군 위청에 의해서 후방인 익수의 군으로 돌려졌다. 이광은 불복하여 다른 방면에서 진군 했지만, 우연히 길 안내가 없었기 때문에, 길을 잃어 흉노와의 싸움에 늦어 버렸다. 위청이 그것에 대해서의 보고서를 보내려고 이광의 부하를 힐문하자, 이광은 담담히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치렀다. 이번에도 위청대장군을 따라서 선우의 군사와 싸울 수 있을 기회를 가졌지만, 대장군 위청이 나를 후방 부대로 돌렸기 때문에 길을 잃고 우회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외치고, 그대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광의 부하 장교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남녀노소 없이 울었다고 한다.

 

이광의 막내 아들 이감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위청을 원망하면서, 주연 자리에서 위청을 구타했다. 위청은 불문에 붙였지만, 이것을 안 위청의 조카 곽거병은 원한을 품고 수렵장에서 이감을 사살했다.

 

이광의 장남 이당호는 무인은 아니었만, 무제의 측근인 한언이라고 하는 신하가 불손한 태도로 대하자, 이당호는 그를 폭행했다. 그 과감함을 본 무제는 그를 유능하다고 평가했지만, 이당호도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이 이능이다.

 

또 이감은 이초(李椒)라고 하는 둘째 형이 있었지만 그도 맏형과 같이 요절했다. 이감은 두 명의 아이를 두었고, 아들은 이우이며, 인색하고 금전 집착이 강했다. 딸은 이우의 누나로 황태자 류거의 측실이 되어 려태자(류거)에게 신뢰를 받아 그의 시종이 되었다. 하지만 사촌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하면서, 그도 이릉의 뒤를 쫓아 흉노로 도망치려 한다는 비방을 받아 사형당했고, 이릉의 처자와 어머니도 처형되었다. 이릉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기》의 저자 사마천도 이릉을 옹호하다 궁형을 당하였다. 이릉이 항복하고 가족이 처형된 다음 농서에서는 이씨를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오호십육국 시대에 서량을 건국한 이는 이광의 자손을 칭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시인 이백이 이호(李暠)의 9대 손이다.

 

이광은 청렴한 인물이며, 샘을 발견하면 부하를 먼저 먹였고 식사도 하사관과 함께 하여, 전원이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 자신의 몫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의 인품에 대해 “복숭아나 자두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자연과 사람이 모이고 길이 생긴다”고 평가했다.

 

이광은 활의 명수이며, 어느 날 사냥하러 나갔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겨냥해 쏘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으며, 이광의 화살은 그 돌에 박혀 있었다. 그 후 이광은 여러번 바위에 화살을 발사했지만 한번도 박히는 것이 없었다. 이것을 양자운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했는데, 자운은 「지성이면 금석도 열린다」(성심성의로 사물을 행하면 바위도 관통할 수 있다)이라고 말했다. ( 「서경잡기」) 소설 수호전의 등장인물로 활의 명수인 화영은 이 일화를 모방해 「소이광」이라고 불린다.

 

 

곽거병( 霍去病, 기원전 140년 - 기원전 117년)

전한의 무제 시대의 무장이다. 아버지는 곽중유, 배다른 형제로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 무제 후의 정치를 관리한 곽광이 있다.

 

위청의 누이인 위소아의 아들이다. 위청의 또 다른 누이이자, 곽거병의 숙모인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아 려태자를 낳아 황후에 올랐기 때문에, 친족이자 총명한 곽거병도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한나라 개국 공신인 진평의 고손자 진장은 곽거병의 어머니와 밀통해 의붓아버지가 되었다.

 

말에서도 활을 잘 쏘아 18세에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을 나섰다. 그 후 몇 번이나 흉노 정벌에서 공적을 올려, 기원 전 121년에 표기장군에 임명되고,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의 본거지를 격파해, 위청과 함께 대사마로 임명되었다. 큰 공로와 무제의 총애, 그리고 젊은 나이의 권세를 가졌던 곽거병이었지만, 기원 전 117년 불과 2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곽거병과 위청은 동시대에 활약했으며, 혈연이기도 하여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위청은 소년 기에 노예로 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겸손하게 대하였고, 항상 아랫 사람을 챙겼다. 반면 곽거병이 철이 들었을 때에 이미 일족은 외척이었으며, 숙부가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숙부와는 대조적으로 오만하고, 병사가 굶고 있을 때에도 자신은 호화로운 막사에서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의외로 궁정의 병사 사이에서도 곽거병 쪽이 더 인기있는 인물이었다. 위청은 겸손이 도를 지나쳤고 아부를 떨었다. 그러나 곽거병의 오만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이것이 그를 믿음직한 용장으로 여기게 했다. 한 무제도 성격이 적극적이고 과감한 곽거병을 더 기꺼이 여기고 있었다.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 성 성고현(城固縣)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기원전 139년 한나라 건원 4년, 당시 한나라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대월지에 대한 동맹을 맺으려 사자를 모집하였다. 장건이 지원을 해서 지원자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으로 향하였다.

 

이전에 대월지 월지라고 불리웠는데, 흉노 모돈 선우(冒頓單于)와 그 아들 노상 선우에게 패한 후, 서쪽으로 옮겨 이름을 대월지로 바꾸었다.

 

특히 노상 선우는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으므로, 월지는 흉노를 원망하고 있었고, 한나라는 흉노 서방의 대월지와의 협공을 위해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한다.

 

 

둔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의 장건출사서역도, 당나라초기(618~714년

 

당시 서역 지방은 흉노의 세력권이었으므로, 장건이 한의 세력권인 감숙성으로 나가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만다. 흉노의 군신 선우는 장건이 대월지로 가는 사자임을 알아채고, “월씨는 우리들의 북쪽에 있다. 어떻게 한이 그곳에 사자를 보낼 수 있는가? 만약 내가 한의 남쪽 월나라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은 그것을 허용할까?”라고 말하며, 장건을 십여 년동안 구류하였다. 흉노에서 장건은 처도 얻고 그 사이에 아이도 낳았지만, 한나라의 사자로서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대완국

그 후 장건은 흉노 땅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흉노 서쪽에 있는 대완에 이르렀다. 대완은 익히 한나라의 강성함을 알고 있었기에 장건을 환대하고 대월지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다.

 

대월지 흉노에게 패배한 연후에, 오손에 쫓겨서 더욱 서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장건은 강거를 들린 후에 드디어 대월지에 도착하였다.

 

 

 

대월지

장건은 흉노와의 원수지간인 월지의 왕에게 한과의 동맹을 설명하였지만, 월지 왕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월지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풍부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흉노와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흉노에 대한 복수심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

 

실의에 빠진 장건은 귀향 노선을 곤륜산맥을 타서, 강 일족의 지배지를 통과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또 다시 흉노에게 붙잡힌다. 일년 남짓 지나 군신 선우가 사망한 틈을 타서 탈출, 기원전 126년에 마침 한나라로 귀환했다. 출발할 때에 100명 남짓 있던 수행원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장건이 가지고 돌아온 서역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었고, 그때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서역의 사정을 듣고, 한은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공로에 의해 장건은 태중대부가 된다.

 

기원 전 123년, 무제는 대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흉노 정벌 원정군을 출발시킨다. 여기서 장건은 경험과 지리 지식을 활용하여 크게 공헌하였고, 위위(衛尉) 박망후(博望侯)로 제수받게 된다. 그러나 기원전 121년의 원정에서 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을 문책받아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장건이 서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촉(사천) 명산의 대나무와 옷감을 현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손에 넣었는 지 묻자, 인도의 상인으로부터 샀다고 했다. 이것에 의해 촉으로부터 윈난 미얀마를 통하는 인도로 연결된 루트가 있는 것을 알고서, 장건은 무제에게 윈난을 한에 복속시키라는 건의를 몇 번이나 한다. 이 루트를 통하여 서역으로 연결된 루트를 개척한다. 한나라는 흉노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오손(烏孫)과의 동맹을 생각하고 기원 전 119년에 장건을 오손의 사자로 보낸다.

 

기원 전 114년, 사망. 사후에 장건이 제시했던 계략이 서서히 열매를 맺고 시작하고, 서역 여러 나라는 한과 교역을 하게 되었고, 한은 흉노에 대해 유리한 입장을 가지고 된다.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년?~기원전 104년)

중국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현재의 허베이 성에 속하는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출신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 독립의 터전을 굳혔다. 무제(武帝)를 섬겨 총애를 받아 유교를 채용하고 교육 행정으로 공헌하였다. 이로써 뒷날 중국의 정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우고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賢良)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서 시무를 논하였는데 동중서도 현량의 자격으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는 그때 성인(聖人)은 천명(天命)을 받아서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敎化)에 의하여 백성의 본성(本性)을 갖게 하고, 제도에 의하여 백성의 정욕을 절제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에 있어서는 유학만을 정통적 학문으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의 정부는 법가 종횡가의 말을 물리쳐 채택하지 않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의 정신이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 그는 무제에 대한 상주 후에 강도왕(江都王)의 상(相) 대신으로 전출되었는데 《춘추(春秋)》의 재이(災異)의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동의 고조묘(高祖廟)의 화재 등에 대한 말 때문에 일단 사형까지 선고받았으나, 조칙에 의하여 용서되고 이후는 재이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은 같이 《춘추》를 익히고 있었으나 학력이 동중서에 미치지 못함을 시기하여 다시 그를 교만하기로 이름나 있는 교서왕(膠西王)의 국상(國相)으로 전출시켰다. 그는 얼마 후에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후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면, 정위(廷尉:사법장관)인 장탕(張湯)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잔혹한 법률의 집행으로 유명한 장탕과 순수한 유학자인 동중서와의 결부는 일견 기묘하지만, 한대의 정치는 그와 같이 유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행해졌던 것이다.

 

《춘추번로》

《춘추번로(春秋繁露)》는 동중서의 저작이다. 춘추시대의 노국의 연대기 《춘추》의 기술 속에 공자가 은연중 불어 넣은 역사 비판의 정신을 밝히려 하는 것이 공양학(公羊學)인데, 《춘추공양전》이 그 근거가 된다. 《춘추번로》는 《공양전》에 기준하였고,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 동중서가 그 당시 한 왕조의 정치체제에 철학적 근거를 확립하려 했던 책이다. 번로(繁露)라는 명칭은 《한서》〈동중서전(董仲舒傳)〉에 그 저서의 1편의 이름으로서만 게재되어 있다. 또 같은 책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로서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공양동중서치옥십륙편(公羊董仲舒治獄十六篇)》, 《춘추결옥이백삼십사(春秋決獄二百三十事)》만이 게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춘추번로》 17권 82편(그 중 3편은 없음)은 전부가 동중서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설도 있다.

《춘추번로》에 보이는 동중서의 특징적인 이론은 다음과 같다.

  1. 현(賢)과 불초(不肖), 덕(德)과 형(刑), 경(經)과 권(權) 등의 가치의 상하를 절대화하는데, 양(陽)은 귀하고 음(陰)은 천하다고 하는 음양설(陰陽說)을 강조한다.
  2. 왕의 독존성을 논술할 경우에 천(天)·지(地)·인(人)의 3(三)을 '一', 즉 도(道)로 관통한 것이라고 하는 것 따위의 억지 문자학을 사용하였다. 또 왕은 황(皇)·방(方)·광(匡)·황(黃)·왕(往)과 통하여 천하가 귀왕(歸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후한의 문자학자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채용되어 있다.
  3. 《춘추》의 권위를 숭상하여 춘추는 바로 공자가 한 왕조를 위하여 미리 법을 제정해 준 ‘대의미언(大義微言)’이라 주장한다. 이 점이 후한의 공양학자(公羊學者) 하휴(何休)에 의하여 삼세이사설·이내외설(異內外說) 등으로 정비되면서 공양학은 더욱 발전되어 간다.
  4. 백·적·흑의 삼통순환설(三統循環說)에 의하여 왕조의 혁명과, 그것에 수반하는 역법(曆法)과 복색(服色)의 개정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일면 5행설(五行說)에 기본하여 ‘토(土)’를 5행의 중추로 삼고 한 왕조를 그것에 해당시키고 있다.
  5.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3공(三公)·9경(九卿)·27대부(二十七大夫)·81사(八十一士)를 ‘천지수(天之數)’에 합치한다고 하는 천인상응설(天人相應說)과, 천(天)의 견책(譴責)은 우선 ‘재(災)’로 나타나고, 이어 하늘의 ‘이(異)’가 내린다고 하는 재이설(災異說) 등으로 천위(天威)를 강조한다. 동중서, 하휴 등이 전개한 한대의 공양학은 그후 크게 떨치지 못하였으나, 19세기 청조 후기의 중국의 위기에 즈음하여 부활되었고, 《춘추번로》의 주석도 수종류 나왔다. 그 중에서 소여(蘇輿)의 《춘추번로의증(春秋繁露義證)》은 공양가(公羊家)에 편벽되지 않은 입장에서 쓰였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이다. 성은 사마(司馬)이고, 이름은 (遷)이다. 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물려받아 태사령으로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사건에 연루되어, 이릉을 변호하다 당시 황제 한 무제(漢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을 받게 된다.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힌다.

 

주나라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한 이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은 무제가 태산(泰山)에서 거행된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다.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太初曆)을 기원전 104년 무제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99년에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李陵)이 패전을 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를 열었다. 신하들은 모두들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들을 모두 능지 처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감함을 찬양하고 두둔했기 때문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宮刑)을 받는 것 둘 뿐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그후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 ~ 기원전 86년)

한나라의 관료로 흉노족 출신이다. (字)는 옹숙(翁叔)으로, 본래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으나 부왕이 한 무제(漢武帝)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국으로 끌려왔다. 그뒤 한 무제로부터 김씨(金氏) 성을 하사 받았다. 중국 김씨들의 시조이며 신라 문무왕의 비석과 당나라 때 재당 신라인의 묘지명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김일제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흉노족의 번왕인 휴도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곽거병(霍去病)의 흉노 정벌 때, 곤야왕(昆邪王)의 배신으로 휴도왕은 살해되고 14세의 김일제와 어머니 연지(閼氏) 등은 포로가 되었다.말 기르는 노예가 된 김일제는 우연히 전한 무제의 눈에 띄어 노예에서 해방되고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侍中), 부마도위(附馬都衛),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다. 키가 8척 2촌, 용모는 위엄이 있었다. 무제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음에도 신중하여 과실이 없었고, 망하라(莽何羅) 등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이어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천주(天主)에 제사지냈던 일에서 비롯하여 김씨(金氏)를 성으로 하사받았다. 무제가 죽으면서 김일제와 곽광 등을 함께 어린 아들 유불릉의 후견인으로 지목하여 소제를 보필하기도 했다. 사후 한 무제의 묘 옆에 곽거병과 함께 배장되었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전한 시기 동안 번영하였으나 왕망과 인척 관계가 있었고, 왕망의 찬탈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후한(後漢) 시기에는 쇠락하였다고 한다.

 

중국 산둥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은 김일제가 봉지로 받은 투 현으로 현재 입구에 이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투후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사당인 투후사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한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며 삼국지에도 김일제 후손 금선 금위이 등장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릉비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5행),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을 통해 시조인 성한을 칭송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투후는 김일제를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는 "투후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선대 7대의 행적을 투후의 고사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 김씨 왕실의 선조를 김일제라고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일부에서는 투후 관련 구절을 그대로 해석하여 투후의 7대손이 성한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신라 김씨를 흉노계로 보고 4세기 무렵에 등장한 적석목곽분 및 금관 문화를 흉노 계열의 문화로 해석하기도 한다.

 

2009년 7월 18일에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유라시아 지역의 흉노족 유골과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골의 유전적 상호관계를 실험한 결과 스키타이와 흉노, 신라의 유전적 유사성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토대로 김일제나 흉노족과 신라 왕실이 관계가 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김일제 후손설은 신라 왕실을 비롯한 고대인들은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조작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김일제를 조상이라 언급한 문무왕에 대하여 사대모화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언론인 조갑제는 이의를 제기하여 문무왕이 모화사상에 젖어서 족보를 조작하려고 했다면 왜 하필 한족이 싫어하는, 더구나 전한에 반역했다가 처형된 흉노족 출신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했겠느냐며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에 언급된 소호금천씨 시조설과 연관지어 소호금천씨에서 김일제, 성한왕으로 이어지는 시조 의식을 설정하기도 한다. 특히 최근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김일제와 소호금천씨를 연결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주목된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