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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 (전한시대 - 한무제 2)

두바퀴인생 2010. 2. 23. 05:12

 

 

 

중국의 역사 12 (전한시대 - 한무제 2)

 

 

한무제는 이러한 흉노정벌전을 계속하면서 근본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서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흉노와 군소 나라들을 격리시키고 동맹 지원군을 얻기 위해 장건이라는 유능한 외교관을 서역으로 파견한다. 장건은 서역으로 가던 중 흉노에 잡혀 포로로 10여 년간 억류되어 흉노 부인까지 얻어 포로 생활을 하다가 다시 탈출하여 서역의 대월지국을 찿아간다. 대월지국은 이미 30년 전의 흉노의 침공으로 왕이 죽자 서역으로 쫒겨온 나라였다. 그러나 대월지국은 비옥한 땅에서 부유한 소국을 거느리고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다. 대월지국은 장건의 동맹 제의에 조정 회의를 열개된다. 조정회의 결과 이제와서 흉노와 전쟁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동맹을 원하는 한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하여 장건의 외교는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장건은 그곳에서 1여 년을 머물면서 서역의 지리,군사,정치,문화,경제,사회 등 여러 정보를 수집하여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장건 일행은 흉노를 피해 천산남로를 따라 돌아오던 중 흉노와 동맹 관계에 있던 강거족에 나포되어 다시 흉노에 끌려 간다. 그러나 장건은 흉노 내부에서 선우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 혼란한 틈을 타서  다시 탈출하여 한나라로 13년만에 가족과 수행원 한 명만 대리고 귀국하게 된다. 한무제는 거지꼴로 돌아온 그를 눈물로 반기며 그가 가져온 서역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발판으로 대 흉노 정벌전에 대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무제는 장건의 서역에 대한 여러 정보를 활용하여 위청, 곽거병 등과 함께 흉노 정벌전에 투입하여 많은 전과를 달성하게 된다. 특히 무제는 장건의 정보 중에 서역 대원국의 '한혈마'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헌혈마를 얻기 위해 장건을 다시 서역으로 파견하게 된다.

 

 

한무제의 반격과 장건의 서역파견

파일:ZhangQianTravels.jpg


제 6차 토벌전 

이 때, 월지와 군사동맹에는 실패했으나  장건이 가져온 서역의 36국에 관한 정보와 한혈마에 관한 장건의 보고는 무제에게 단비와 같은  매우 귀중한 것이였다.

 

흉노의 입장에선 하서지구는 서부지구의 관문이며 친분관계인 강거족과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로, 서역으로 통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강거족과 흉노를 차단하려는 한나라 모두 사활이 걸린 싸움 이였다.(기원전 124~기원전121년)

 

 

한무제 (채널 '칭'에서 방영)

 

기원전 121년, 무제는 장건의 보고를 토대로 약관 20세인 곽거병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해 군사 1만 기를 이끌고 농서 방면으로 출격하도록 했다. 실로 무제다운 과감한 발탁 인사였는데, 곽거병은 무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무제는 전군을 서역의 요충지인 하서지역으로 진군시켰다.

 

서역정벌에 나선 표기장군 곽거병의 활약은 실로 눈부셨다. 곽거병은 오르도스를 정벌한 대장군 위청의 조카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라는 직책으로 황제의 신변 업무를 볼 정도로 총명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121년 봄  표기장군에 임명된 곽거병은 1만기를 이끌고 하서지구를 깊숙이 흉노 지역을 급습하여 절란왕, 노호왕을 베고 혼사왕의 아들을 붙잡았으며 , 그 밖에 적병 1만 8천여 명의 목을 베는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흉노족 기동

 

그는 숨돌릴 틈도 없이 같은 해 여름에는 이광 장군 등과 호응해 두 차례 출격했으며, 그의 군대는 치렌 산 부근에서 흉노의 대군을 포착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적수급 및 포로가 3만이 넘고,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금인을 탈취하고 기련산의 추도왕을 비롯한 5명의 왕과 왕자들 59명, 선우의 연지를 포로로 잡고 적 병력의 3/10을 섬멸하였다고 한다.

 

이 승리로 흉노의 서북방 방어선에 뼈 아픈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에 예상치 않은 성과를 주었다.

이 때 서역을 갔다 온 박망후 '장건'은 대장군 위청의 참모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곽거병의 승리로 패전의 책임을 두려워한 혼야왕은 이치사 선우의 충신인 휴도왕을 살해하고 수하와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렇게 해서 곽거병은 흉노의 투항자 4만 명을 데리고 수도 장안으로 개선했으며, 장안은 백성들의 환영 인파로 물결쳤다. 무제는 투항한 혼야왕에게 1만호의 봉읍과 '탑음후'라는 직위를 하사하고 그 일족 또한 후대하였으며, 정벌한 휴도왕의 땅에는 '무위군', 혼야왕의 땅에는 '장액군'을 세우고  서역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선우가 이끄는 흉노의 본대는 여전히 건재했으며 중국 영토에 대한 침입은 멈추지 않았다.

 

 

제7차 토벌전

여세를 몰아 무제는 흉노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기원전 119년에는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각각 5만기를 주어 동시에 출격하도록 명령하고 흉노의 본거지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양쪽 군대에 수십만이나 되는 보급부대가 뒤따랐다고 하니 무제의 대단한 결의를 엿볼 수 있다.

 

 대장군 위청과  젊은 곽거병

 

두 영웅이 함께 출격한 이 싸움에서 주역은 위청이 아니라 곽거병이었다. 하지만 선우가 이끄는 흉노의 본대와 마주친 장군은 얄궂게도 위청이었다. 경험이 풍부한 위청은 교묘하게 상대를 유인한 뒤 포위하여 싸운 결과 흉노 선우가 실종되고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주었다. 한편 선우의 본대를 찿아 흉노 땅 안으로 2천여 리나 들어간 곽거병은 선우를 만나지 못했지만 여려왕을 비롯한 7만의 포로를 잡았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무제의 목적은 거의 달성되었다.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맛 본 흉노는 막북(고비사막 북쪽) 땅으로 본영을 옮길 수 밖에 없었고, 그 후 얼마 동안은 장성 근처에서 흉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도 이 싸움에서 수만 명이 전사했고 군마 40만 마리 가운데 3만 마리도 돌아오지 못하는 피해를 입었다.

 

또 매년 계속된 원정으로 국가 재정에 위기가 닥쳤기 때문에 더 이상 대 흉노 토벌작전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런 이유로 대 흉노 작전은 무제의 치세 후반기에 다시 시작된다.

 

따라서 위청과 곽거병도 이 싸움이 마지막 출격이 되었고 장안으로 개선한 곽거병은 기원전 117년에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쟁 중 강물을 마신 후 걸린 역병으로 병사하였고 위청도 기원전 106년에 세상을 떠났다.(BC117년 곽거병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무제는 건설중인 자신의 무덤옆에 곽거병의 묘를 만듬.)

 

위청과 곽거병의 활약으로 하서지구를 획득한 한나라는 이른바 하서 4군(장액,주천,돈황,무위)을 설치하여 서역으로 가는 길을 확보, 흉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BC115년~BC73) 흉노는 한의 대 공세 중 호전적인 이치사 선우가 사망(BC114)하여 그 세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곽거병의 활약으로 고비사막 이남에서 흉노를 찾아 볼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상황을 흉노인은  "우리가 기련산을 잃어 가축을 먹일 땅이 없고 연지산을 잃어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도 없다." 고 탄식했다고 전하고 있다.

 

 

흉노족 포로

 

한의 서역진출과 '이광리'의 대원 원정

하서 지역을 차지하여 서역으로 가는 출구를 확보한 무제는 기원전 119년 장건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손'으로 장건을 재차 파견하였다. 오손국과 손을 잡고 천산산맥 북쪽 '이리' 강 유역 '이시크쿨' 호수(키르키스탄지역 천산산맥 분지의 호수)에 살고 있는 오손국 주민을 옛 혼야왕의 땅에 이주시켜 흉노 협공 태세를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장건 일행 300여 명은 도중에 흉노의 방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오손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오손국 역시 한보다는 흉노를 더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손왕이 늙고 친 흉노파의 반대도 있어 이주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결국 오손국을 설득할 유일한 방법은 한의 강대함을 인식하게 만들어 흉노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일이었다. 이렇게 판단한 장건은 일단 오손국의 사절단을 데리고 귀국(기원전 115년)국으로 부터  수십 필의 명마(서극)를 답례로 받아왔다.

 

또한 장건은 동행한 부사들을  대원과 강거(지금의 카자흐스탄지역), 대월지, 대하, 안식(이란), 신독(인도) 등 여러 나라로 파견하여 한과의 교류를 하게 하였다. 이 때 많은 서역물품(포도와 목숙,비파 등) 들이 한나라에 들어왔다. 이후 장건은 귀국 후 1년이 지나 사망하게 된다.(기원전 114년)

 

한편, 장건으로부터 대원의 한혈마에 대한 보고를 들은 무제는 흉노의 말보다 뛰어난 대원 말을 얻기 위해 '장사'와 '차령'이라는 직급의 특사를 많은 황금과 특산품을 주어 서역의 대원국으로 보냈다.

 

<사기> 대원열전에 대원국은“한의 서쪽 1만리 가량 떨어져 있고,70여개의 성에 인구는 10만이며 활과 창으로 무장한 기병군대가 있다. 생활은 벼와 보리 포도농사를 짓고 있으며 특히 피와 같은 땀을 흘리는 명마(천마의 자손)가 있는데 이사성에 모아 기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흉노와 한나라의 망명자들(선우와 혼야왕과 일축왕, 이릉과 이광리)

흉노와 수세기에 걸친 전쟁 중 많은 흉노와 중국은 사람들의 망명이 있었다.

 

곽거병의 대대적인 서역정벌로 혼야왕은 패전책임이 두려워 휴도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기원전 121년)하여 흉노의 서부지역의 지배권을 한나라에 빼앗겼다. 또한 서역 지배의 중요한 일축왕이 선우 다툼에서 밀려나 수하 수 만기를 이끌고 한에 투항하여(기원전 97년) 한나라는 이 땅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후로도  분열한 동흉노의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입조(기원전 51년, 왕소군의 남편)하였으며, 훗날 춘추 전국시대에 남흉노의 호주천 선우(195~216)가 위나라의 조조군에 투항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흉노로 망명한 사람들도 다수인데, 한고조 때 고조의 흉노정벌 명을 어기고 흉노에 투항한 한왕 신을 비롯한 대표적인 인물로 한나라의 '이릉'과 '소무', 흉노를 정벌한 이사장군 '이광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릉은 이사장군이 거느린 3만군의 수하 장수로 흉노로 원정을 떠났는데, 궁병 5000명을 거느리고 흉노를 유인하는 임무 중 거연(내몽골자치주 염호)에서 흉노의 주력군 8만 명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릉은 용감하게 싸워 적병 1만 명을 사살하고 분전하였으나, 내부의 질시로 오기로 한 지원군이 오지 않고 화살마저 떨어져 흉노에게 항복 하였다.(기원전 99년)

 

그런데 조정의 '이서'라는 자가 "이릉이 배반하여 흉노에 투항하여 선우의 참모가 되었다"고 모함을 하였다. 화가 난 무제가 이릉의 노모와 처자를 비롯한 일족을 멸족시키자, 억울함과 돌아갈 곳 없는 신세가 된  이릉은 흉노에 투항하였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이릉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변호하다 '궁형'이라는 치욕스런 형벌을 받았다.

 

중량장 소무는 이릉이 투항하기 1년 전에 한나라의 사신으로 흉노에 파견되었는데, 차제후 선우의 투항권고에도 19년간 전향하지 않은 강직한 인물 이였다.

 

흉노와 한나라 간 화친이 성립된 소제 때, 한나라로 귀환하는 절친한 친구 소무를 보내는 이릉의 심정을 한서 소무전에 “이방인, 한번 헤어지면 영원한 이별”이라 돌아 갈 수 없는 처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대원과 흉노정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광리는, 누이가 낳은 창읍왕을 황태자에 오르게 하려 한 혐의로 일족이 멸족당하고 자신마저 위태롭게 되자 흉노에 망명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광리는 선우모친의 병 쾌유를 비는 제사에 흉노신 제물로 희생되고 말았다.(호록고,호연제,차제후선우 등 수대의 선우 측근으로 있던 한나라 망명자 위율의 모사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