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10 (한나라 : 전한시대) 본문
한(漢)나라
한(漢)(기원전 206년 ~ 220년)은 진 이후의 중국의 통일 왕조이다. 한 왕조는 고조 유방(劉邦)에 의해서 건국되었으며 약 400년을 지속하였고,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고, 오늘날에 중국인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한족 역시 이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중국인들이 자랑스럽게 그들의 역사적인 근간을 이루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시대에 중국은 유교를 공식 국교로 승인하고, 이 사항 아래 국가의 기본 틀을 잡아 나갔다. 인구는 5천 5백만에 달했으며 농업, 수공업, 상업 등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이러한 문화적 발전은 주위의 한반도, 베트남, 몽골, 일본, 중앙아시아 등의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원전 111년에는 베트남의 남비엣(Nam Việt)을 정복하였다.
한 왕조는 그 시기에 따라 전한(前漢,서한)과 후한(後漢,동한)으로 나누어지는데, 전한과 후한 사이에는 왕망이 전한에 반란을 일으켜 세운 신이 존재한다.
전한(서한)전한(前漢, 기원전 206년 ~ 8년)은 고조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대륙쟁탈 뒤에 세운 황조로서 진(秦)에 이어 중국을 두번째로 통일한 황조이다.
한 고조 (유방)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太祖高皇帝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진나라의 장수이며 기원전 206년 한나라를 건국하였다. 기원전 202년 항우를 격파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일반적으로 고조(高祖)라고 부른다.
한 고조 유방은 지금의 장쑤성 패현에서 한 이름 없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방의 성장기는 한심하기 그지 없었는데, 그는 밖으로 나도는 데만 정신이 팔려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되면서부터 아예 집을 나와 건달패와 어울려 살았다.
그렇다고 양질의 건달도 아니었고 그를 따르는 패거리 중에 번쾌라는 그는 개를 잡아 파는 백정이었다. 그는 후에 무양후에 봉해지지만 유방의 패거리 중에 유일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유방의 부모는 건달로 세월을 보내는 아들을 보는 심정이 답답하여 유방의 두 형은 그와 정반대의 성격으로 묵묵하게 농사일에 매진하던 착실한 청년이었으므로 부모는 유방에게 "너 형 반만 닮아라!"고 유방에게 입버릇처럼 이야기 했다고 한다.
유방이 이러한 건달에서 현대 중국의 원형을 이루는 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아무리 중국이 역성혁명의 나라라고 하지만 이렇게 낮은 신분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중국 역사상 단 두 명이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빈농 출신의 탁발승에서 시작해 명 왕조를 세운 주원장뿐이다.
유방은 건달로서는 상당한 지위까지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30세 나이에 사수지방의 하급관리 '정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맡은 정장이란 직책은 지금의 방범대장과 비슷한 직책이었다. 치안상태가 불안하던 시대에는 유협,협객,깡패,조폭,사무라이들이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나선 경우와 비슷하다.
유방은 장정이란 하찮은 지위를 이용하여 천하를 도모할 토대를 쌓는다. 다른 사람은 지위를 이용하여 재물 탐닉에 몰두하였으나 유방은 부지런히 덕을 쌓으며 사람을 낚았는데, 훗날 창업 공신이 되어 한 왕조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치는 '소하', '조참'을 이시기에 같은 현의 관리로 사귀었으며 당시 그 지역의 유력자였던 여씨 딸 '여치' 또한 아내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유방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위기가 찿아왔다.
당시 진나라 진시황제가 죽고 2대 황제가 즉위한 해, 유방은 죄인들을 이끌고 여산릉 조영 공사를 하라는 현령의 명령을 받고 죄인들을 인솔하여 가던 중 도망자가 속출하자 유방은 현령에게 받게 될 책임추궁을 두려워한 나머지 죄인들을 모두 풀어준 다음 그 자신도 도피 길에 오르면서 이제껏 쌓아왔던 것을 다 포기하고 관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에게 위기였으나 천하에 다시없는 기회가 되어 돌아온다.
얼마 후 '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며 반란을 일으켰고, 패현 현령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유방을 다시 부른 것이었다. 산속에 들어가 숨어지내던 유방은 현령의 연락을 받고 그동안 모집하였던 수백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산을 내려와 패현으로 갔으나 패현 현령이 유방의 위세를 보고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여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현령이 성안의 부로와 지도자들이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맞아들여 현령으로 추대했다. 이때부터 유방에게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병력 규모가 무려 3천이 넘었다.
혁명의 첯테이프를 끓은 전승과 오광의 반란군이 진나라 관군과 내부 분열로 쉽게 무너진 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의 중심이 된 것은 당대 최고의 영웅 '항우'와 그의 숙부 '항량'이었다. 그들은 유방과 거의 같은 시기에 군사 8천 명을 이끌고 강동에서 봉기했는데, 양쯔 강을 건너 북으로 올라가 설현에 이르렀을 때는 각지의 반란군이 규합해 10만에 이르는 대군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편 패현에서 봉기한 유방의 반란군은 그 후 반 년 동안 진의 관군과 밀고 당기는 싸움을 계속하다가 기원전 208년 4월, 설현의 항량을 찿아가 수하부대로 합류한다. 이 일로 유방군은 크게 성장하고 유방의 천하평정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되는 장량이라는 최고의 군사를 얻게 된다. 안에서 살림을 맡은 이상적인 보좌관이 소하라면 전쟁터에서 최고의 참모는 장량이었다.
항량은 유방이 합류한 지 2개월 후, 멸망한 초왕의 혈통인 심이라는 목동을 찿아내서 초회황으로 추대하고 그를 명목상 맹주로 삼아 반란군 통합을 꾀했다. 그리하여 진의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관군에게 대패하고 항량도 전사한다.
기선을 빼았긴 초군은 할 수 없이 전선을 축소하고 진의 관군을 맞아 거록까지 밀리면서 버티고 있었는데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반란군은 전황을 역전시킬 승부카드를 던지게 된다.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북상하는 관군을 맞아 싸우고, 다른 한 부대는 진의 수도인 센양으로 공격하기로 계획했다. 초회왕은 누구던지 먼저 센양을 함락시키는 자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항우는 황하를 건너 치열한 전투 끝에 진군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이 승리로 그는 반군들 사이에서 일인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항우는 제후 연합군 40만을 이끌고서쪽으로 진의 관군을 물리치며 센양으로 진군하였다. 황우가 함곡관에 도착하였을 때 유방은 이미 센양에 입성한 뒤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대발노발했다고 한다.
유방의 군대는 항우와 달리 강한 군대는 정면 공격을 피하고 우회하면서 가급적 투항을 권유하고 대결을 피하면서 진의 최후 방어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관을 돌파해 센양을 코앞에 둔 패상으로 진출했다.진왕 자영은 유방의 투항 권고에 따라 옥새를 바치고 항복해버린 것이다. 유방은 진왕 자영을 죽이자는 부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감시만 붙여둔 채 그대로 살려주고 부물과 궁녀가 넘치는 궁궐에 지내려고 했으나 이를 안 번쾌가 다른 패장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패상으로 철수하여 야영을 하도록 충언하자 패상으로 철수하여 각 현의 장로와 유력자들을 불러 그 유명한 '법은 삼장뿐'이라는 포고를 내린다. 이는 살인,사상,절도에 대해서만 법을집행하고 다른 모든 진의 법은 페지한다는 내용의 포고였다. 각지에 이를 알리자 진의 학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크게 기쁘하며 유방에 대한 민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한달 후 항우가 센양에 도착하자 항복한 적인 자영 등 진의 왕자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3개월 동안이나 탔고 센양은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만행에 진나라 사람들은 항우를 비난하면서 욕하면서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진이 멸망한 후 연합군 총사령관 항우는 전쟁의 뒷처리와 새로운 제도 만들기에 착수하여 이름뿐인 맹주 초회왕에게 '의제'라는 칭호를 주고 작은 현 하나만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팽성을 도읍으로 현 아홉 개를 갖고 서초 패왕이라고 했으며, 장군 18명과 구왕족 등을 각자의 공적에 따라 왕으로 봉했다. 이때 유방은 한왕이 되어 한중과 파,촉 등 세 군을 다스리게 되었다. 항우의 속셈은 유방을 외진 곳에 가둔 꼴이 되었다.
또 항우는 중요한 관중 땅을 셋으로 갈라 항복해온 진나라 장수 세 명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의 울타리로 삼았다. 이에 유방은 그런 처우에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항우와 대결하려 했지만, 소화를 비롯한 측근들이 지금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없다면서 힘을 길러 후일을 기약하자는 권유에 할 수 없이 한중으로 떠났다.
항우의 이러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자는 유방뿐만이 아니었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동쪽의 제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뒤이어 조나라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항우는 패왕의 체면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여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이무렵 항우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의제를 살해하자 유방은 이것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관중을 점령하고 기원전 205년 의제의 장사를 치르고 항우와 전면전을 선언하게 되면서 4년에 걸친 초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항우가 제를 평정하는 사이 항우의 거점인 팽성을 점령하였고 이 당시 유방의 병력 규모는 50~60만 정도의 대군이엇으나 대부분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제에서 돌아온 항우의 정예군 3만과 대결에서 유방군이 대패하고 유방은 겨우 목숨만 살려 도망쳤다. 그후에도 유방군은 항우군과의 싸움에서 계속 밀리면서 패전만 거듭하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유방군이 전략적 우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유능한 후방참모 소하의 부단하고 지속적인 병력과 물자 공급에 있었다. 또 두 번째는 한신과 팽월이라는 유능한 장수들이었다. 걸달패 바지가랑이 사이로 지나갔던 고사로도 유명한 한신은 원래 성장하여 항우의 수하였으나 외모가 못생겨 항우에게 발탁되지 못하고 말단 소장으로 세월만 보내다가 항우군을 떠나 한나라로 와서 소하의 추천으로 한의 대장군이 되었다. 한신은 뛰어난 용병술로 별동대장이 되어 항우를 괴롭혔으며 팽월은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 주변에서 활발한 게릴라 활동으로 항우의 배후에서 움직임을 견제했다. 이에 항우는 계속되는 싸움에 지쳐 기원전 203년 8월 유방과 화의가 이루어져 홍구를 경계로 서쪽은 한이, 동쪽은 촉이 지배하기로 화의하고 항우는 군사를 돌렸다.
이때 유방의 참모 진평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며 항우의 뒤를 추격하자고 진언했다. 물론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유방은 이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항우를 추격하였다. 그리고 한신,팽월,영포도 이에 합류해 항우의 군대를 따라 잡았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만 들리는 두터운 포위망 속에 갇힌 항우는 그날 밤 우미인을 옆에 앉히고 자신의 마지막을 탄식하였다고 한다.
항우는 마지막 힘을 짜내 포위망을 뚫고 앙쯔 강가에 있는 오구까지 도망을 갔는데 그를 따르는 병사는 20여 기뿐이었다. 오구에서 양쯔 강을 건너면 바로 그의 고향인 강동 지방이었다. 부하가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를 권유했지만 항우는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4년에 걸친 사투 끝에 숙적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기원전 202년 2월에 신하들의 추대를 받으며 황제로 등극했다. 유방은 국호를 한으로 정했는데, 이는 자신이 전에 한왕이었던 데서 유연한 것이다.
그후 유방은 기원전 19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7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대부분 싸움터에서 보냈다. 개국 공신들인 한신과 영포,팽월 등 성이 다른 왕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킨 탓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유방은 한나라 황제에 등극하자 봉건제와 군현제를 조화시킨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방의 지혜와 항우의 무자비한 모습이 백성들의 지지를 끝내 상실함으로써 출신성분이 비천한 유방이 항우를 이긴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정작 권력을 갖게 되자, 반란 가능성을 의식하여 자신을 도와주었던 한신, 영포, 팽월 등을 숙청했다. 영포, 팽월 등이 숙청되자 공포감을 느낀 한신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하며 물러났다고 한다.
만년에 여씨 일족을 신임하였다가 그의 사후 여태후의 일족이 후임 황제를 몇차례나 임의로 교체시키기도 한다. 일설에는 여태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한나라를 창업한 한고조 유방에 이어 황제에 등극한 사람은 유방의 차남이자 적장자로 고황후 여씨 몸에서 태어난 혜제(유영)이다. 장자인 유비가 있었으나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다 하여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한고조는 유영을 총애하지 않고 4남인 척부인 소생의 유여의를 총애하였다. 여황후는 유영을 다음 황제로 만들기 위하여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결국에는 유영을 황제 자리에 앉혔다.
고황후 여씨(高皇后 呂氏, ? ~ 기원전 180년)는 전한 고조의 황후이며 전한 혜제의 어머니이다. 이름은 치(雉). 자는 아후(娥姁). 남편인 고조 사후, 황태후・태황태후가 되어, 여후(呂后), 여태후(呂太后) 등으로 불린다. '중국 3대 악녀'로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나란히 이름을 같이 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정식 황후이며, 또한 중국 최초의 황태후, 태황태후이기도 하다. 황후가 될 때까지단부(현재의 산둥 성)의 유력자인 여공의 딸로 태어났다. 성인이 된 후에 당시 패현 사수의 정장이던 유방에게 시집을 가고, 여동생인 여수(呂須)는 번쾌(樊噲)에게 시집을 갔다. 1남1녀(혜제・노원공주)를 얻었다. 진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일어난 초한전쟁이 일어난 직후에는 패현에서 시아버지인 유태공이나 아이들과 같이 남편이 없는 집을 지키고, 시아버지와 농사를 도와 아이들을 키웠다.
하지만, 초한전쟁이 격화되어 팽성의 전투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붙잡혀서, 여치는 시아버지인 유태공과 같이 초나라 진영에 잡혀 인질이 되어버렸다(하지만 혜제와 노원공주는 어떻게든 유방과 합류하여 관중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이 때에 유방의 아이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이후의 초한전쟁은 유방의 지배하에 있던 한신 등에 의한 초나라 진영에 모인 각국에 대한 와해 공작과 평정, 태공과 여치의 신병을 해방하는 것이 초점이 되었고, 항우 측이 유리하면서도 교착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기원전 203년에 들어서서는 한신 등에 의한 와해 공작이 성공하여, 형세는 역전되었다. 궁지에 빠진 항우는 유방과 강화하였고, 여치는 태공과 함께 유방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용서되었다.
다음 해인 기원전 202년, 유방은 항우를 멸망시키고, 전한 왕조를 열고 황제(고조)가 되어, 여치는 황후가 된다(여후). 하지만 아직 정치 상황은 유방이 스스로 반란의 토벌을 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정하였고, 궁중에서는 후계자를 놓고 암투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후는 황후로서 남편의 부재중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 한신을 처형하는 한편, 자신의 친정(여씨) 및 장량등 중신들의 도움을 빌려, 황태자가 된 유영의 지위의 안정에 힘을 다했다. 여황후의 전횡고조가 죽고 유영(혜제)가 즉위하면서, 여황후는 황태후로 그 후견을 맡았다. 하지만, 고조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은 뿌리 깊어서, 혜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여태후는 초왕 유여의를 독살하고, 유여의의 모비인 척부인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도려내었으며 약으로 귀·목소리를 없애고, 변소에 두어 '인간 돼지'(人猪·人彘)라고 부르게 했다고 사서에 적혀 있다.
이 일에 충격를 받은 혜제는 정무를 방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여태후는 그 아들인 공(소제)을 황제로 세우고, 태황태후가 되었다. 친정인 여씨 일족과 진평, 주발 등 한나라 건국 공신들의 협력으로, 정치의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각지에서 제후왕으로 봉해져 있던 유방의 서자들을 차례차례로 살해하여 그 뒤에 자신의 조카 등 여씨 일족을 봉했고, 자신에게 반항적인 소제 공을 살해하고 상산왕 홍(소제)을 세우는 등의 행동을 취해, 공신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또 공신들도 스스로 처형되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태황태후 자신도 이 일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카인 여산 등에게 공신들의 동향에 신경쓰러도록 실컷 타일러 더욱 더 여씨 일족이 중앙의 병권을 잡는 중직에 기용하여 만전을 기한 후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고황후(高皇后)이다. 사후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평, 주발 등의 공신들은 황족인 제왕의 유아들과 남은 유씨 왕들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여씨 일족을 모두 주살하였고, 유방의 5남인 대왕 유항(문제)을 새로운 황제로 책립하였다. 그리고, 소제 홍도 혜제의 친자가 아니고 여태황태후가 어딘가에서 데리고 온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문제의 책립 전후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여동생이자 전한의 개국 공신 번쾌의 아내인 여수도 채찍형으로 살해되었고, 여수의 아들인 번항도 살해당했다. 결국 이 숙청으로 여씨의 피를 이은 사람들 중에서 살해되지 않은 것은 딸인 노원공주와 장이의 아들 장오와의 사이에 태어난 장언 뿐이었다. 평가여황후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황족이나 공신들이 살해당하는 등, 정계에서는 피를 부르는 사건이 계속 되었던 시대였지만, 시정은 매우 평화롭고 안정된 시대였다. 이것은 여황후가 대외 원정등의 대사업을 극력 줄여, 국민의 생활의 안정에 진력했기 때문이다(특히 한신의 반란을 미리 막은 일은, 동시에 천하가 다시 분열되어 전쟁을 하게 되는 일을 막게 되어, 그 공적은 크다). 후의 문제와 경제에 의한 문경의 치 및 무제시대의 대원정을 필두로 하는 대사업의 정치·경제적 기초는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덧붙여 새롭게 후한에 걸친 동란때, 적미의 군대는 전한 황제들의 능묘를 도굴하여, 안치되고 있던 여황후의 사체를 더럽혔다. 광무제는 여치에게서 황후의 지위와 고황후의 칭호를 박탈하고, 문제의 생모인 박씨를 유방의 정실 부인으로 하여, 고황후의 시호를 추증했다.
제2대 혜제(유영)
한혜제 유영(漢惠帝劉盈, 기원전 210년 ~ 기원전 188년)은 전한의 제2대 황제(재위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로 전한 고조 유방의 차남이자 적장자로, 어머니는 고황후 여씨이다.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진 불운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 아버지 유방이 언제나 라이벌이었던 항우에게 패하였을 때, 유영은 어머니와 같이 고향인 패현(沛縣)에 있고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205년 여씨와 유영 모자, 그리고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 유달 등이 항우에게 인질로 잡혀 2년 동안 잡혀 있다가 유방과 항우가 평화 조약을 맺자 그들은 모두 풀려나 유방이 있던 한중(漢中)으로 갔다.
기원전 202년, 유방은 항우를 해하에서 패퇴시키고 장안에서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황제에 오르니, 고조이다. 곧 유영은 황태자에 올랐는데, 처음에 유영이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으나, 장자 유비(劉肥)의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고 유영이 유일한 적자인 점을 미뤄 결국 유영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고조는 유영을 총애하지 않고 4남인 척부인 소생의 유여의(劉如意)를 가장 총애하였으나 유영은 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유여의를 잘 대해 주었으나 모후인 여황후는 유영을 다음 황제로 만들기 위해 온갖 일을 마다치 않았다.
기원전 195년, 고조 유방이 죽고 황태자 유영이 황제에 오르니 혜제이다. 혜제는 여전히 유여의를 귀여워하고 같이 사냥에도 나갔다. 그러나 태후가 된 모후 여태후는 고조 생전 당시 가장 많은 총애를 받은 척부인을 매우 질투하였고 심지어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 유여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여태후는 혜제가 잠시 혼자 사냥을 다녀온 사이, 사람을 시켜 유여의를 죽이고, 그의 모친 척부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돼지우리에 넣어버리고 '인간돼지'라 부르라 명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혜제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듬해인 기원전 194년, 혜제의 이복형 제왕 유비가 장안으로 왔을 때, 혜제는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여태후는 유비가 여전히 혜제의 가장 큰 정적이라 생각하고 유비의 앞에 독주를 준비하여 그를 죽일 생각이었으나, 이를 알아챈 혜제는 유비에게 다가가 그 잔을 마시려 했고 놀란 여태후는 혜제의 손을 세게 쳐 다행히 혜제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두 사건은 혜제가 매우 선량하고 우애가 깊은 군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두 사건 때문에 혜제는 정치에 뜻을 잃고, 여태후는 슬슬 자신의 문중 인사들을 조정에 발탁, 조정을 장악하였다. 야심이 큰 어머니 때문에 평생을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고 산 혜제는 결국 기원전 188년, 23세의 나이로 갑자기 붕어하였다. 시호는 효혜황제(孝惠皇帝)이다.
제3,4대 여태후에 의해 등용된 소황제들로 생략
제5대 문제 (유황)
한문제 유항(漢文帝 劉恆,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57년 6월)은 전한의 제5대 황제(재위기간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이다.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효문황제(孝文皇帝)이다. 전한 고조 유방의 넷째 아들이며,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박희(薄姬)이다.
즉위 전 대(代)나라 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인 경제와 함께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켜 문경지치를 이룩하였다.
문제는 45년간 재위하다가 기원전 157년 6월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에서 사망했다. 문제는 도덕적인 군주로 평가되고 있으며 어머니 박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한다.
제6대 경제(유계)
한경제 유계(漢景帝 劉啓,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41년)는 전한의 제6대 황제이며, 전한 문제와 효문황후 두씨의 장남이다. 전한 무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179년 아버지가 황제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유학을 배웠으나 어머니 두황후는 도교 역시 유계에게 가르쳤다. 황태자 시절 먼 친척인 오나라 세자와 바둑을 두다 자신이 지게 되었는데 한 수를 물려달라 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거절하고 이에 화가 난 황태자 유계는 우발적인 실수로 바둑판을 던져 오나라 세자를 죽게한 일이 있다. 기원전 156년 선정을 펼친 문제가 사망하자 황제에 즉위, 어머니 두황후는 황태후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전한 고조의 측실이자 문제의 어머니인 박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에게는 박황후가 낳은 적자가 없었다. 이에 두태후는 경제에게 경제의 아우인 양왕 유무에게 다음 황제로 만들 것을 부탁하였으나, 경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기원전 151년, 조모인 박태황태후가 죽자, 경제는 황후인 박황후를 황실을 번성치 못한 죄로 폐하고, 다음 황후로 가장 총애받던 후궁인 율씨(栗氏)가 유력하였으나 경제는 오히려 다른 후궁인 왕씨를 황후로 점찍고, 그녀의 소생인 유철를 황태자로 삼았다.
아버지 문제에 이어 선정을 펼치고 세금을 줄여 명군이라는 칭송을 들었고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와 경제의 치세를 '문경의 치'(文景之治)라 불렀다.
경제는 재위 15년 째인 기원전 141년에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흉노(匈奴)족
흉노족은 기원전 5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목민족이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몽골 고원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중화인민공화국의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 성(甘肅省),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흉노는 중국의 한족(漢族)과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이나 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보였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으로 적대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편견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흉노 민족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 흉노와 훈족(Hun族)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있다. 또한, 흉노의 '匈'(흉)은 '훈(Hun)'을 중국어 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흉노와 훈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이다.
현재 흉노의 후계 민족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헝가리와 터키, 몽골은 이들을 자기 민족의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역사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의 전국시대의 기록이다. 이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기원전 215년에 몽염(蒙恬)을 보내 융적(戎狄)을 물리치고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았다. 이때 물리친 융적을 흉노로 보고 있다. 진-한 교체의 혼란기에 흉노는 두만(頭曼, Tumen, Teoman)을 중심으로 여러 유목 부족 집단들을 통합하였다.
모돈 선우의 등장
모돈(冒頓)은 아버지 두만 선우를 살해하고 선우에 즉위하였다. 모돈은 정권을 강화시키고 서쪽의 천산산맥과 감숙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공격하여 붕괴시키고 뒤이어 동쪽의 만주 서부지역에 위치한 동호(東胡)를 멸망시켜 중국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이 시기 흉노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동서 무역을 통제함으로써 강성할 수 있었다. 북방을 장악한 모돈은 중국을 약탈하였다. 이에 중국을 통일한 전한(前漢)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였다. 산시 성(山西省)의 평성에서 흉노와 전한의 군대가 교전하여 전한군이 크게 패하였으며, 전한 고조(高祖)는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패배한 전한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결과 전한와 흉노는 형제 관계를 맺었으며, 고조는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 전한이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영토는 동쪽으로 동호와 예맥(濊貊), 북쪽으로 예니세이 강 상류, 서쪽으로 동 투르케스탄,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 지방과 칭하이 성(靑海省)의 북부에 이르렀다.
흉노의 분열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전한 무제(武帝)는 흉노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와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 흉노를 공격하고 서역(西域 : 간쑤성 및 신장 자치구 일대)을 정벌하였다. 한군이 서역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다. 한과 흉노의 전쟁으로 전한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흉노의 피해는 더 커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기원전 60년경 흉노에서는 선우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으며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는 기원전 51년 중국에 입조하여 지원을 얻었다. 이후 호한야에 의해 흉노는 재통일되었으며 전한과 화친을 맺었다. 이때 질지(郅支) 선우는 서흉노를 이끌었는데, 후에 동흉노에 패하여 다시 흡수되었지만, 일부 집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 흉노의 내분과 약화의 원인으로는 당시 몽골 고원이 한랭화되었던 것을 꼽기도 한다.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한 후 흉노와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어 흉노는 다시 중국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한이 건국된 이후 흉노는 다시 분열되어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되어 오르도스 및 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거주했으며,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 89년에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은 북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북흉노의 일파는 서방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서방으로 향한 북흉노를 훈족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몽골 고원에는 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다른 유목 부족이 성립되었다.
남흉노는 중국의 번병(番兵) 역할을 하며 오르도스 일대에서 북방을 방어하였다. 후한은 남흉노의 군대를 용병으로 활용하여 선비, 오환, 강(羌) 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선우에 대해서 흉노의 여러 유력자들은 많은 불만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선우와 흉노의 유력자들 간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존재하였다. 또한 중국 측에서도 간섭하여 선우의 직위는 크게 실추되고 위태로워졌다. 삼국 시대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의 선우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는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와 소멸
서진(西晉) 말기, 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劉淵)은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산서 일대에서 한(漢)을 건국하였다. 이는 흉노가 과거 한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을 근거로 한 것으로, 유연은 형인 한나라를 대신하여 한나라를 계승할 것을 천명하였다. 흉노의 한나라는 서진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이후 흉노의 일파인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를 건국하자 국호를 조(趙 : 후조와의 구분을 위해 보통 前趙라고 부른다.)로 고치고 화북을 양분하여 대립하였다. 329년에 후조에 의해 전조는 멸망하였으며, 후조 역시 351년에 멸망하였다.
407년에는 흉노 철불부(鐵弗部)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산시 성(陝西省) 일대에서 하(夏)를 건국하여 선우를 자칭하였으나 431년에 멸망하였다. 이후 흉노는 중국 역사에서 소멸되었다.
정치 제도
흉노의 군주는 선우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후 오르도스와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목 왕조들의 군주들은 선우라는 명칭은 거의 쓰지 않았고, 한이나 가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또한 선우를 보좌하는 좌현왕, 우현왕이라는 직책도 있었다. 흉노 선우의 시각은 중원 왕들과 반대였기에, 좌현왕은 동부, 우현왕은 서부를 관장했다. 당시 중국 왕조인 한나라 식으로 하면, 선우는 황제, 좌우현왕은 황제가 봉해주는 왕에 해당한다. 또한 좌우현왕과 비슷한 두 왕(좌곡려왕, 우곡려왕)이 더 있어 선우와 함께 유목민족 특유의 5부 체제를 이끌었다. 또한 흉노가 강성하여 서역 지방을 다스렸을 때 서역 지방 제후를 일축왕에 봉했다. 골도후라는 직책도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골도후에도 좌, 우의 개념이 있어 각각 선우의 보좌직이라는 설이 있다. 좌우현왕 밑에는 각각 지방관 등으로 여겨지는 각종 직위들이 있었으며, 여기서 흉노의 지역 체제가 군사 체제와 일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흉노의 선우는 흉노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모돈 선우 이래 부자세습제를 통해 자리를 이어갔다.
흉노의 신앙 체계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單于)는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언어
흉노인들이 사용한 문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울라 16호 고분을 비롯한 흉노 유적지에서 발굴된 출토품에 흉노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중국과의 관계
흉노는 유목민족으로써, 경제의 유지를 위해 농경을 영위하는 정주민에게 필요한 물자를 획득해야 했다. 이를 위해 흉노는 때로는 중국을 침략·약탈하고 때로는 조공이나 세폐를 통해 평화적으로 물자를 확보하였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은 국력을 기울여 장성을 쌓고 막대한 세폐를 바치기도 하였다.
중국측 역사 교과서에 의하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던 중국이 전한 무제 때 대대적으로 흉노를 토벌하여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흉노 부족의 일부가 한나라에 화친을 청하며 신하라고 자칭했었다고 한다. 무제는 궁녀 왕소군을 공주로 만들어 흉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비교적 장기간 국경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결혼 동맹을 통해서 양국과 우호관계를 담보하기 위한 행위였다.
전한 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시작한 이후 경제적인 중심지였던 서역을 상실한 흉노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이후 흉노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더욱 약화되어 일부는 중국에 복속되어 번병이 되기도 하였다.
훈족,한민족과의 관계
서흉노 또는 북흉노가 훈족의 원류라는 주장과 한민족인 신라인들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명확한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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