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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9 (초.한 전쟁/주요인물) 본문
중국의 역사 9 (초.한 전쟁 / 주요 인물들)
초.한전쟁
초한전쟁(楚漢戰爭)은 진나라의 멸망 후 서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과의 싸움을 뜻한다.
진(秦)나라의 급격한 통일 정책이나 일반 농민의 과중한 요역(徭役)은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각지에 반란을 유발시켜 드디어 기원전 206년 옛 6국 중의 초나라 귀족인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타도했다. 이후 항우와 그의 협력자였던 유방(劉邦)과 사이에 패권을 놓고 5년간에 걸친 사투(死鬪)가 벌어졌다.
항우는 진에 의해서 비롯된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중국 전토에 여러 장수들을 봉건(封建)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구질서를 부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즉 회왕(懷王)을 받들어 의제(義帝)라 일컫고 침(郴)에 옮긴 후에 이를 죽인 후, 자신은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일컫고, 팽성(彭珹, 쉬저우 시)에 도읍을 장하여 강소(江蘇), 안휘(安徽) 등 9군(郡)을 지배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에 대해서는 군공(軍功)과 협력의 정도에 의거하여 각지에 분봉(分封)했다. 유방에게는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을 떼어 주어 한왕(漢王)이라 하고, 기원전 206년 4월에는 군대를 해산하여 각각 봉국(封國)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항우가 실시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많은 불만을 남겼다. 특히 회왕(懷王)의 약속에 위반하여 벽지(僻地)의 한왕에 봉해진 유방은 가장 불만이 큰 사람이었다.
그해 8월, 유방은 관중(關中)을 공격하러 나섰다. 순식간에 관중 일대를 정복하여 역양(櫟陽)에 도읍을 정한 유방은 이듬해 3월에는 의제(義弟)의 복수를 주장하고 반초(反楚) 세력을 결집하여 항우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후 약 2년여에 걸쳐 항우와 유방은 형양(滎陽, 싱양 시) 부근을 끼고서 동서에 대치하여 격투를 계속했다.
그동안, 유방은 팽성전투 등 싸움이라는 싸움에서는 모두 다 항우에게 패했으나, 진평(陳平) 등의 반간계략(反間計略)을 써서 교묘하게 항우의 여러 장수들을 이반시키는 한편, 한신(韓信)을 제왕(帝王)에 봉하여 배후에서 항우를 겨누게 했다. 또한 팽월(彭越)에게 명하여 초나라의 양도(糧道)를 끊게 하는 등, 서서히 항우를 괴롭혔다.
기원전 203년 8월에 일단 화의(和議)가 성립됐으나, 유방은 이를 어기고 항우를 추격하여, 그해 12월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자살하고, 초·한의 싸움은 한나라의 승리로 돌아갔다.
팽성 전투(彭城之戰) 또는 팽성 대회전
기원전 203년 당시 유방과 항우가 초나라 팽성에서 벌인 전투로 항우가 유방의 60만 명의 군사를 거의 전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당시 한왕 유방은 60만에 이르는 군사와 은왕 사마왕, 하남왕 신양, 상산왕 장이, 서위왕 위표 등 각 지역의 왕들이 귀순해 오자 점차 자만심을 품기 시작하여 곧바로 초나라의 팽성을 공격하라고 대신들에게 명한다. 이때 파초대원수 한신은 "우리는 56만의 병사들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 항복해온 자들이라 기강이 서지 않고, 군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며, 우리들의 실질적 군대는 15만이니 항우의 군대를 우습게 볼 수 없어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도 유방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갔고 한신은 관중을 지키기로 했다.
제1차 전투(팽성 함락)
유방이 군사를 일으킬 무렵 초왕 항우는 한왕 유방과 연합했던 연나라와 제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유방은 그 사이에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 팽성을 기습 공격한다. 팽성을 지키던 장수는 팽월로 항우의 장수였으나 평소 유방을 흠모했기 때문에 유방에게 항복하고 팽성을 바침으로써 팽성은 쉽게 유방에게 함락된다. 이런 상황에서 항우의 부인 우희와 처남 우자기가 팽성을 가까스로 탈출해 항우에게로 갔다. 제나라를 공격하던 항우는 우희와 우자기를 보자 격분하여 부하 용저와 종리매에게 제나라를 맡기고 군사 3만 5000명을 이끌고 팽성으로 간다. 그후 팽성을 공격, 전투중에 은왕 사마앙등을 죽이고 유방의 군세를 처참히 처부셨으며 유방은 팽성에 숨을려 하였지만 항우의 부하였다가 유방에게 투항한 사마흔과 동예 등이 또다시 유방을 배신하여 하후영과 팽성에서 나온 몇몇 군세를 이끌고 후퇴를 하였다.
군대 편성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팽성을 진격해오자 유방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군대는 60만 대군이고 항우의 군대는 고작 20/1 밖에 되지 않는 3만 5000명이기 때문이었다. 파초대원수 한신이 관중으로 돌아가자 유방은 서위왕 위표를 새 대원수로 삼아 군대를 편성하게 한다. 위표는 초패왕 항우에 맞서 부대를 5개로 나누었다. 1대 부대는 선발대로 하여 은왕 사마앙에게, 2대 부대는 하남왕 신양에게, 3대 부대는 하후영과 왕릉에게, 4대 부대는 한왕 유방이, 5대 부대는 자신이 맡기로 하였다.
제2차 전투
팽성에서 유방의 60만 대군과 대치한 항우는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고 뒤이어 그의 군사 3만 5000명이 뒤따랐다. 항우는 단 1합만에 선발대 대장 은왕 사마왕을 참살하고 다시 2합만에 2대 부대 대장 하남왕 신양마저 죽였다. 사마앙과 신양이 죽자 선발대와 2대 부대가 무너졌고 선발대와 2대가 전멸하자 3대와 4대마저 항우에게 뚫리고 말았다. 5대 부대를 이끌던 서위왕 위표마저 당황하다가 항우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고 말았다. 유방은 전투에서 패하자 도망쳤으나 항우는 이내 유방을 발견하고 뒤쫓았다. 유방의 장수이자 천하장사로 알려진 번쾌가 나섰으나 이내 항우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패퇴하고, 유방은 그대로 항우에게 죽을 뻔했다가 다행히 돌풍이 불어 겨우 도망친다.
결과
전투는 유방의 대패로 끝났다. 60만 대군 중 6/4인 40만 명이 전사하고 6/1인 10만 명의 군사들이 수수강을 건너려다 익사했다. 따라서 팽성 전투에서 한군은 자그마치 6/5인 50만 명에 달하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유방과 10만 명의 군사들만 살아서 돌아왔다. 이날의 전투는 다른 나라에도 전해져 제나라 제왕 전광은 항우와의 전쟁을 중단했고 제나라를 비롯해 위나라 위왕 조구와 조나라 조왕 조헐이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와 연합하면서 유방은 불리한 상황을 맞게 된다. 후에 대원수 자리에 다시 오른 한신은 이 제, 위, 조 3국을 공격하여 다시 평정하게 된다.
해하(垓下)전투
진(秦)나라를 무너뜨린 초패왕(楚王) 항우(項羽)와 한왕(漢王) 유방(劉邦)은 홍구[鴻溝:하남성(河南省)의 가로하(賈魯河)]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 강화하고 5년간에 걸친 패권(覇權) 다툼을 멈췄다(B.C. 203). 힘과 기(氣)에만 의존하다가 범증(范增) 같은 유일한 모신(謀臣)까지 잃고 밀리기 시작한 항우의 휴전 제의를 유방이 받아들인 것이다.
항우는 곧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서주(徐州)]을 향해 철군(撤軍)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한중[漢中:섬서성(陝西省)의 한강(漢江) 북안의 땅]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참모 장량(張良), 진평(陳平)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해하[垓下:안휘성(安徽省) 내]에서 한신(韓信)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 겹겹이 포위된 초나라 진영(陣營)은 군사가 격감 한데다가 군량마저 떨어져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밤중에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四面楚歌]' 소리가 들려오니 말이다. 초나라 군사들은 그리운 고향 노랫소리에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쳤다.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고향 노래를 부르게 한 장량의 심리 작전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항우는 깜짝 놀랐다.
'아니, 한나라는 벌써 초나라를 다 차지했단 말인가? 어찌 저토록 초나라 사람이 많은고?'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한 항우는 결별의 주연을 베풀었다. 항우의 진중에는 우미인(虞美人)이라 불리는 애인 우희(虞姬)와 추라는 준마가 있었다. 항우는 우희가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시를 읊고 또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지만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때는 불리하고 추는 가지 않누나 [時不利兮 不逝(시불리혜추불서)]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고 [ 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우야 우야 그대를 어찌할 거나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희도 이별의 슬픔에 목메어 화답했다. 역발산을 자처하는 천하장사 항우의 뺨에는 어느덧 몇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좌우에 배석한 장수들이 오열(嗚咽)하는 가운데 우희는 마침내 항우의 보검을 뽑아 젖가슴에 꽂고 자결하고 말았다.
그날 밤, 불과 800여 기(騎)를 이끌고 중포위망을 탈출한 항우는 이튿날, 혼자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 수백 명을 벤 뒤 강만 건너편 당초 군사를 일으켰던 땅, 강동(江東)으로 갈 수 있는 오강(烏江:안휘성 내)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항우는 800여 강동 자제(子弟)들을 다 잃고 혼자 돌아가는 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을 쳐 자결하고 말았다(B.C. 202). 그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주요인물
초·한전 당시 주요 인물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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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초 패왕 항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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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한 고조 유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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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제후들 | 옹왕 장한 · 새왕 사마흔 · 적왕 동예 · 구강왕 영포 · 서위왕 위표 · 하남왕 신양 · 은왕 사마앙 · 제왕 전광 | ||||
여타 반진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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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항우(項羽,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02년)는 초나라의 왕으로, 패왕(霸王)이라고도 불린다. 본명은 적(籍)이며, 우(羽)는 그의 자이다. 초나라의 명문의 후손이다. 초나라의 의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였다. 뒷날 초한의 끝없는 싸움을 싸우다 31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일찍 부모를 잃고 숙부 항량의 손에 자랐다. 뒤에 숙부 항량과 함께 진나라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거병하였다. 그 뒤 의제를 받들었으나 기원전 206년 초나라의 의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였다. 이는 뒷날 김종직의 조의제문의 모델이 되었고, 한편 유방으로 하여금 찬탈자를 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유방과 맞섰는데 초반에는 참모 범증의 활약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이를 간파한 유방이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아 결국 패하였다. 그 후 항우가 이끄는 초군은 유방이 이끄는 한군의 포위망에 갇혀있게 되었는데 한군은 초군 병사들이 항복하게 하기 위해 초나라 진영을 향해 초나라 민요를 연주하게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은 이를 빗대어 위기에 몰린 사람에게 사면초가라는 고사를 만들어 불렀다. 항우는 마지막에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자결하였다. 항우가 죽자마자 유방의 부장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항우의 시신을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여 항우의 시신은 결국 산산조각이 났다. 항우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무예를 자랑하는 장수로 정평이 나 있다.
항우는 평소 학문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의 명언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남자의 학문이라는 것은 자신의 이름만 쓸 줄 알 면 된다."
이러한 항우의 성격은 그에게 대단한 무예는 안겨줬을지언정 판단력은 흐리게 하여 결국 유방의 이간책으로 인하여 자신의 참모 범증을 잃게 했다.
종리매(鍾離昧, ? ~ 기원전 201년 )는 고대 중국 초나라의 군인이다.
종리매는 항우와 항량이 회계에서 반진 거병을 한 이래, 계포와 함께 최고참 장수로서 초한전 막바지까지 항우를 보좌하였다.
항우 멸망 후에는 옛 지인이던 초왕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나, 유방이 종리매를 숨겨준 일로 인해 한신을 의심하자 한신이 종리매에게 이를 상의했다. 그러자 종리매는 “유방이 초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자네 밑에 내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자네가 나를 죽여 유방에게 바친다면 다음엔 자네 차례라는 걸 명심하게. 자네의 생각이 그 정도라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네. 좋아, 그럼 내가 죽어주지”라고 한신을 비난한 뒤 목을 찔러 자살했다.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유방을 배알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회음후로 강등되고 결국 종리매의 예언대로 나중에 고황후 여씨에 의해 숙청당했다.
용저(龍且, 기원전 ? ~ ?)는 중국 서초(西楚) 패왕 항우의 맹장이다.
본래 환초의 수하 였으나 환초와 함께 항우에게 투항 하였다. 한나라의 한신에게 공격을 받고있던 제나라에 20십만 대군을 이끌고 지원하려 가다가 한신의 수공에 걸려 지원군 대부분이 수장당하고 한나라 맹장 조참에게 전사했다. 그는 항우와 필적할만한 무를 갖고 있었다고 칭해진다.
장한(章邯, ? ~ 기원전 205년 )은 중국 처음엔 진나라의 장수였으나, 후에 항우의 무장이 된다. 진시황 사후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병권을 부여받고 진승의 부장 주문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진승, 위왕 위구, 제왕 전담 등을 차례로 진압하고 초나라 군과의 전쟁에서 항량을 죽이는 전과를 올린다. 진나라 환관 조고에게 재상 이사가 숙청되고, 자신의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거록에서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에게 패하여 항우에게 항복해 진나라 출신 부하 장수 사마흔, 동예와 함께 삼진왕에 봉해져 관54중 중서부 수비를 담당하게 된다. 한신의 공격 당시 사마흔과 동예가 항복하여 고립당하자 자살했다.
사마흔(司馬欣, ? ~ 기원전 205년)은 초한전 당시 항우의 부하로 옥리 출신 장수이다. 투항한 진나라 장수이자 항우의 부하 장한과 함께 종군하다가 장한, 동예와 함께 새왕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고향 출신이자 초나라 대사마 조구(초나라)와 함께 유방과 싸우다가 사수 전투에서 조구가 패해 자살하자 조구를 뒤따라 자살했다.
동예(董翳, ?~기원전 205년)은 초한전 당시 항우의 장수로 처음에는 장한, 사마흔과 함께 진나라의 장수였으나 후에 항우에게 투항했다. 익주 지방에서 옹왕 장한, 새왕 사마흔 등과 함께 적왕(翟王)으로 임명되었다. 후에 사수 전투에서 패해 초나라 대사마 조구와 사마흔이 자결하자 도망가다가 자신도 자결했다.
범증(范增,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04년)은 고대 중국의 책사·정치가이다. 항우와 초나라를 위해 유방을 줄곧 죽이려고 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유방의 모사 진평의 반간계에 빠진 항우에 의해 쫒겨난다. 항우에게 퇴출당하고 천하를 떠돌다가 악성 등창으로 인해 객사한다.
진평(陳平, ? ~ 기원전 178년)은 한나라의 정치가이다.
위나라의 신하였으나 위왕이 장한에게 죽자 항우에게 귀순하여 항우의 책사가 되었다. 그 후 전한 고조 유방(劉邦)이 삼진(三秦)을 공격할때, 위무기의 설득으로 유방에게 귀의, 호군중위의 직책을 맡게된다. 반간계를 써 항우의 참모였던 범증을 내친다. 훗날 그 공을 인정받아 호유후(戶牖侯)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 곡역후(曲逆侯)로 승진하였다. 상국 조참서거후,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다.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가 유방서거후 여씨친족과 모반을 꾀하자, 우승상(右丞相) 왕릉과 장군 주발(周勃)과 함깨 여씨의 난을 평정한 뒤 문제 유항(劉恒)을 옹립하였다.
한나라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진나라의 장수이며 기원전 206년 한나라를 건국하였다. 기원전 202년 항우를 격파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일반적으로 고조(高祖)라고 부른다.
전한 고조 유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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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의 초대 황제 | |
재위 | 기원전 206년 ~ 기원전 195년 |
황후 | 고황후 |
다음 황제 | 혜제 |
생애
사면초가의 유래
농민 출신 장수로 서초 패왕 항우와 라이벌 관계였으며 처음에는 패배를 거듭하였으나 기원전 206년 한왕이 되고 항우가 초 의제를 몰아내고 즉위하자 항우를 반역자로 보고 기원전 202년 해하의 결전에서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때 항우와 우미인이 피신한 해하(垓下)의 성벽에 군사를 보내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초나라의 백성들이 유방에게 항복한 것으로 생각한 항우는 절망하여 자살하였고 이로부터 사면초가라는 속담이 유래하게 되었다.
통일 이후
봉건제와 군현제를 조화시킨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방의 지혜와 항우의 무자비한 모습이 백성들의 지지를 끝내 상실함으로써 출신성분이 비천한 유방이 항우를 이긴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정작 권력을 갖게 되자, 반란 가능성을 의식하여 자신을 도와주었던 한신, 영포, 팽월 등을 숙청했다. 영포, 팽월 등이 숙청되자 공포감을 느낀 한신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하며 물러났다고 한다.
만년에 여씨 일족을 신임하였다가 그의 사후 여태후의 일족이 후임 황제를 몇차례고 임의로 교체시키기도 한다. 일설에는 여태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여태우에 의해 초기 부흥의 기회를 놓치고 한무제 때에는 최대의 영토를 확장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나 무제 사후 어린 황제들의 옹립되는 등 외척들의 준동, 환관의 발호 등으로 인해 권력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작품에 나온 유방
- 서초 패왕(영화)
- 《초한지》(정비석, 고려원, 1984)
- <고우영 초한지> (고우영, 1980년 단행본출간,2003년 복원후 재출간 자음과 모음)
가계
- 황후 : 고황후 여씨(呂氏, 일명 여태후)
- 후궁 : 조씨(曹氏)
- 첫째 아들(서자) : 제왕 유비(劉肥)
- 후궁 : 척부인(戚夫人, 척희, 戚姬)
- 셋째 서자 : 조왕 유여의(劉如意)
- 후궁 : 귀인 박씨(薄氏, 박희, 薄姬)
- 넷째 서자 : 전한 태종 유항(劉恒)
- 다섯째 서자 : 양왕 유회(劉恢)-모친 불명
- 후궁 : 제씨(諸氏, 제희, 諸姬)
- 여섯째 서자 : 회양왕 유우(劉友)
- 일곱째 서자 : 연왕 유건(劉建)-모친 불명
- 후궁 : 조씨(趙氏, 조희, 趙姬)
- 여덞째 서자(막내) : 회남왕 유장(劉長)
- 후궁 : 만부인(萬夫人)
- 후궁 : 관부인(管夫人)
- 후궁 : 조자아(赵子儿)
한신(韓信, ? ~ 기원전 196년)은 중국 한나라의 장수이다. 유방의 부하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장량, 소하와 함께 유방 부하의 삼걸 중의 한명이기도 하며, 세계 군사 사상의 명장으로도 알려진다.
젊은시절, 건달들에게 얻어맞고는 건달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사타구니 무사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은적도있지만, 이는 그것은 쓸데없이 부딪쳐 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이후 항량의 휘하에 들어간 뒤, 항량이 죽고 항우의 밑에서 집극랑(경호원)을 하지만, 항우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푸대접에 실망하여, 이를 빌미로 장량의 권유를 듣자 항우밑에서 도주, 유방에게 임관을 청해,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유방과 당시 승상 소하의 신뢰를 얻고 대원수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내려준다. 이에 훌륭한 지략으로 사마흔, 동예를 항복시키고 옹왕 장한을 자살하게 한 뒤 서위왕 위표, 하남왕 신양, 은왕 사마앙을 항복시킨다. 또한 마지막까지 해하전투에서 항우를 제압하는데 크나큰 공적을 세우며, 그 공적을 인정받아 제왕(齊王)에 이어 초왕(楚王)이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의 권력이 확립되자 유씨 외의 다른 제왕과 함께 차차 밀려나, 기원전 201년 공신서열 21번째에 불과한 회음후로 격하되고, 유방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유방의 정부인인 여태후의 농간에 의해 진희의 난에 통모(通謀)하였다 하여 누명을 쓰고 요참형에 처해졌다. 여기서 유명한 고사성어인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이 사건을 빌미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한신이 죽기 전에 아래와 같이 말한 것에서 비롯하여 생겨났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도 잡혀 삶아지며, 높이 나는 새도 다 잡히고 나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이 타파되면 모신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팽당함이로다[果若人言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
번쾌(樊噲, ? ~ 기원전 189년)은, 중국의 전한 초기의 무장. 유방과 같은 패현의 사람. 작위는 무양후(舞陽侯). 시호는 무후(武侯)이다. 개고기를 파는 미천한 신분이며 유방과 친형제처럼 절친한 관계이다. 여문의 둘째 딸과 결혼해 서로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와 비교 될 만큼 괴력의 소유자로 유방의 거병 이후 유방을 따라 무장이 되고, 선봉에 서서 수많은 공을 세운다. 유방이 즉위한 뒤 좌승상, 상국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다. 공신서열 5번째, 무양후에 봉해지고 식읍 5000호를 하사받았다.
관영(灌嬰, ~BC 176년)은 중국 진나라, 전한 시대 유방의 무장으로 원래 휴양의 비단 상인이었다.
항량이 장한에게 패배한 이후, 유방이 돌아오자 유방을 따랐다. 진과의 싸움으로 공적을 올려 유방을 따라 무관으로 진을 토벌해 창문군이라는 호가 주어졌다. 유방이 한왕이 되면서 낭중(郎中)이 되었고, 이어 중알자(中謁者)가 되어, 3진(장감, 마사흔, 동예)을 평정하고 은왕 공격 등에 동원되었다.
유방이 팽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형양으로 초나라 기병을 요격하기 위해 사령관을 선택할 때, 유방은 기사인 진나라 사람 이필, 낙갑을 장군으로 봉하고 출동시키려 했지만, 측근들이 기마술에 뛰어난 관영을 추천하여 이필, 낙갑을 교위로 삼아 그를 따르게 했다. 이에 관영은 중대부(中大夫)가 되어 낭중 기병을 이끌고 초나라 기병을 격퇴하였다. 그 후도 기병을 인솔해 별동대를 이끌고 활약해,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한신을 따라, 제나라를 정벌하고 항우의 장수 용차(龍且)를 물리쳤다. 이후 초령을 공격해 피주와 팽성을 함락시켰다.
조참(曹參,? - 기원전 190년)은 전한의 명장이자 개국 공신이다. 패군 출신으로, 자는 경백(敬伯). 원래 진나라의 옥리였으나, 고조 유방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한신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진나라와 항우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 2번째, 평양후(平陽侯)로 책봉되고 식읍 10600호를 하사받았다. 구강왕 경포(영포)의 반란을 평정하기도 하였다. 고조가 죽은 뒤에는 소하의 추천으로 상국이 되었다.
조참이 죽은 후, 조줄이 이었으나 여태후 사후에 계급을 내려서 평양후가 되었다. 조줄의 아들, 조기는 오초칠국의 난에 난포와 같이 교서, 치천, 교동군을 격파하였다. 조기의 아들, 조시가 평양후를 계승하여 무제의 딸이였던 평양공주를 얻었으나, 전염병에 감염되어 인연이 떨어진 평양공주는 위청에 재가한다. 조시의 아들, 조양은 평양후를 계승 무제의 누이 위장공주를 취하였다. 조양의 아들, 조송이 평양후를 계승하였으나 무제 태자의 반란에 강충(무고의 옥)에 연좌되어 작위를 바치게 되었다. 선제의 대가 되어, 조참의 공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조시의 손자 조희를 보고 다시 평양후를 계승시켰다.
후한 말에 등장하였던 조조가 있어, 그의 실제 가문은 조참을 선조로 하고 있다.그런데, 조조의 조부・조등은 환관이였는데, 조등은 가문의 존속을 위해 조참의 동료였던 하후영의 자손 조숭을 양자로 입양하여, 조의 성을 계승시켰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이 조조이기 때문에, 조조는 혈통적으로는 조참의 자손이 아니고, 하후영의 자손이다.
영포(英布, ? ~ 기원전 195년)는 한나라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흔히 경포(黥布)라고도 한다.
초한전 때 항우를 도와 구강왕(九江王)에 봉해졌으나, 유방의 반간계에 넘어가 한나라에 투항하고, 회남왕에 봉해졌다. 유방이 개국공신인 한신과 팽월을 죽이는 것을 보고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싸움에 져 죽임을 당했다.
하후영(夏侯嬰, ? ~ 기원전 172년)은 유방의 부하로서 유방이 정장으로 있을 때 유방을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유방의 가신이 되었다. 하후영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하후돈, 하후연 등의 직계 조상으로서 기마술에 능하여 유방은 그를 마부로 삼았는데 하후영은 유방이 위기에 몰릴때마다 유방의 최측근에서 보호하였다. 삼국지에서 유비에게 조운이 있다면 초한지에서 유방에게는 하후영이 있다고 하기까지 했다. 유방이 항우를 제압한 이후 하후영은 제후가 되고 유방사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유방의 몇 안되는 신하들 중에 한명이 되었다.
하후영의 적자 하후조(이후)、손자 하후사(공후)가 세습하였다。하후사의 상속자 하후파가 부친을 이어、평양공주(경제의 누이)를 취하였으나、하후파는 음란하여 망부의 측실과 밀통이 과도하여、기원전 115년에 자결을 하명받아 죽고、나라는 바쳐졌다。선제의 대가 되어、하후영의 현손인 하후신이 하후가문의 부흥을 허락받았다。그런데、하후파의 처 평양공주가「손공주」로 불리는 것에서、하후파의 자손은「손씨」를 이은 것이 된다.
후한말기、위 초를 바꾸었던 조조와 같이 거병했던 하후돈・하후연등은 하후영의 후예라 한다. 조조의 부친 조숭은 하후돈의 숙부에 당해서 하후씨로、 조참 후예의 환관 조등의 양자로 되어 조의 성을 이은 것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장량(張良, ? ~ 기원전 189년)은 중국 한나라의 정치가이자, 건국 공신이다. 자는 자방(子房).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소하·한신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3걸로 불린다. 유방으로부터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밖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장자방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전국시대 한나라 재상 희평의 아들로 한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하자 복수를 하기 위해 진 시황제를 박랑사에서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하비에서 숨어서 황석공으로 부터 태공병법을 배웠다. 그 후 유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1백여 명의 종을 데리고 따랐다가, 항량에 의해 한성이 한왕(韓王)에 옹립되자 한나라 사도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성이 항우에게 죽자 다시 유방에게 귀순하고 이때부터 유방의 중요 참모가 되어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한신을 천거하는 등, 그는 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나라 건국 후에는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지 후계자 문제로 여후에게 자문을 해줬다고 한다. 그 후에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그의 사후, 아들 장불의가 유후(留侯)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장불의는 기원전 175년에 불경죄로 제후를 면직되어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후, 한서 고혜고후문공신표에 의하면, 장량의 현손의 아들인 장천추가, 선제시대에 부역 면제의 특권을 받았다. 또 후한서 문원전에 의하면 장량의 후예에 문인 장초가 나왔다. 그 외에, 익주 인으로, 후한의 사도 장호, 그의 아들 광릉태수 장강, 그의 증손인 촉나라의 차기장군 장익등이 장량의 자손을 칭하고 있다.(『후한서』장호전, 『삼국지』장익전).
소하(蕭何, ?~기원전 193년)는 한(漢)의 참모이며 초대 상국을 지냈다. 한신,장량과 함께 한삼걸이라고 칭해진다.
장쑤성[江蘇省] 패군 풍현(沛郡 豊縣) 출생. 한신(韓信) ·장량(張良) ·조참(曹參)과 함께 고조의 개국공신이다. 진(秦)나라의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일찍이 한 고조 유방이 무위무관(無位無官)일 때부터 접촉을 가졌다. 유방이 진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종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객원으로서 따르며 모신(謀臣)으로 활약하였다. 진 수도 함양(咸陽)에 입성하자 진 승상부(丞相府)의 도적문서(圖籍文書)를 입수하여 한(漢) 왕조 경영의 기초를 다졌다.
한 유방과 초(楚) 항우(項羽)의 싸움에서는 관중(關中)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므로, 고조(유방)가 즉위할 때에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으뜸가는 공신이라 하여 찬후(酇侯)로 봉해지고 식읍(食邑) 7,000호를 하사받았으며, 그 일족 수십 명도 각각 식읍을 받았다. 뒤에 한신 등의 반란을 평정하고 최고의 상국(相國)에 제수되었다. 재상 시절 진의 법률을 취사(取捨)하여 《구장률(九章律)》을 편찬하였다.
남조의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蕭道成)은 소하의 자손이라고 자칭하였다。
육가(陸賈, 기원전 240년 ~ 기원전 170년 )는 한나라 초기의 정치가이며, 문학가이며, 사상가로서 초기 유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육가는 웅변에 능한 외교가로서도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남월왕 위타를 한나라에 종속시킨 것도 그의 뛰어난 웅변의 힘이였다. 유방에게도 문과 무가 조화를 이루어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음을 설득하였고, 《신어(新語)》 12편을 저술하여 국가 존망의 갖가지 모습을 약술하여 유방의 통치를 도왔다. 한고조 유방의 사후에는 여태후의 전횡에 칭병하여 은퇴를 하고 태위 강위와 승상 진평이 힘을 합하도록 주선하여 여태후 사후에 여씨로부터 유씨 황실을 지켜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 고조가 진(秦)이 멸망한 원인과 한(漢)이 흥한 원인에 대하여 논해 보라는 하명에 응하여 육가가 1편을 바칠 때마다 상찬을 받았다고 하는 책이다. 지금 전해 오는 책의 12편의 수는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육가전(陸賈傳)〉에서 볼 수 있는 《신어》 12편과 합치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이 때의 상주(上奏)로서는 적합치 않은 자구도 있다. 어쩌면 《한서》〈예문지(藝文志)〉에 〈육가 23편〉이라고 한 것의 잔권이 오늘날의 책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신어》에는 〈무위편(無爲篇)〉의 “그 도(道)는 무위(無爲) 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행(行)은 근경(謹敬)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는 어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무위를 정치의 이상으로 하는 사상이 흐르고 있다. 무위에 의하여 천하가 잘 다스려진 것이 요순(堯舜)의 시대요, 그 반대로 애매하고 까다로운 법령과 엄중한 형벌에 의하여 다스린 진 시황제는 실패하였다. 백성에게 선을 권장하는 데는 상위자(上位者)가 중화(中和)의 덕으로써 자연스럽게 교화하여 가는 것이 좋다고 설파하였다. 이와 같이 육가는 ‘무위’를 말하는 점에서 도가적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이 행한 것과 같은 법(法)·형(刑)의 만능주의를 배격함을 주안으로 한 것이지 결코 노자류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을 궁극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어》의 기본적 입장은 유가라고 해도 좋다.
역이기(酈食其, ? ~ 기원전 204년 )는 초한전 당시 전한 고조의 휘하에 있던 모사이다. 평소 독서를 즐겼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마을의 성문을 관리하는 감문리로 있었다. 술을 즐기고 능력을 드러내지 않아 사람들은 미치광이 선생이라고 불렸지만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때를 기다렸던 역이기는 유방을 만나고는 드디어 그 뜻을 펼치기 시작한다. 주로 외교 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진류 현령을 속여 진류성을 유방에게 바치고 제왕 전광(齊王 田廣)을 설득하여 항복토록 하였다. 그러나 역이기의 공을 시기한 한신이 제나라를 공격하고, 속았다고 생각한 제왕 전광에 의해 팽살된다. 역이기의 아들 역개는 그 부친의 공이 크다하여 아무런 전공없이 고량후(高粱侯)에 봉해졌다.
진평(陳平, ? ~ 기원전 178년)은 한나라의 정치가이다.
위나라의 신하였으나 위왕이 장한에게 죽자 항우에게 귀순하여 항우의 책사가 되었다. 그 후 전한 고조 유방(劉邦)이 삼진(三秦)을 공격할때, 위무기의 설득으로 유방에게 귀의, 호군중위의 직책을 맡게된다. 반간계를 써 항우의 참모였던 범증을 내친다. 훗날 그 공을 인정받아 호유후(戶牖侯)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 곡역후(曲逆侯)로 승진하였다. 상국 조참서거후,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다.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가 유방서거후 여씨친족과 모반을 꾀하자, 우승상(右丞相) 왕릉과 장군 주발(周勃)과 함깨 여씨의 난을 평정한 뒤 문제 유항(劉恒)을 옹립하였다.
괴철(蒯徹, ? ~ ?)은 한나라 초기 모략가. 한나라 대원수 한신의 세객이다. 그 이름이 무제의 휘와 같다하여 사마천이 사기에서 이름을 바꿔 쓴 뒤로는 괴통(蒯通)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2세 황제 원년, 무신이 진승의 명을 받아 조나라를 공격할 때, 스스로 무신의 사자가 되어 범양현을 비롯한 다른 군현의 수령을 설득해 무신에게 항복도록 하였다. 그러나 무신이 이량에게 죽자 이를 피해 숨어 살다가, 한때 항우에게 몸을 담기도 하였지만 초한전쟁 말미에 한신의 수하가 되었다. 이후 한신에게 천하 3분론을 주장하며 한신에 독립할 것을 권하지만 묵살되고 다시 자취를 감췄다가 조참에게 투항한 뒤, 조참을 보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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