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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1 (전한시대 : 한무제) 본문
중국의 역사 11 (전한시대 : 한무제 1)
한무제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년)은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이다. 아명은 체(彘)이며 자는 통(通)이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이다. 경제의 열번째 아들이며 효경황후 왕지(孝景皇后 王娡)의 소생이다.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 또는 한군현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사군의 위치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한반도라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산해관 갈석산과 요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중국 역사상 진 시황제·강희제 등과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생애
16세에 부황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라 유학자 동중서의 의견을 수렴하여 유학을 국가의 학문으로 삼아 그 이념대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였다.
한편 이복 형제와 귀족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왕위 계승의 라이벌로 지목되던 중산정왕 유승을 계속 의심하였는데, 유승은 경제의 서자이자 무제의 이복형이었다. 유승은 이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다.
그의 즉위 후 최대 사업으로 치세에 장건(張騫)이 서역과 통하는 실크로드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후 치세기간 중 실크로드 건설 개척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소탕케 하였다.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서역 출신 노예와 흉노 출신 노예 중에서도 인재를 등용하였다. 흉노를 소탕하면서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 출신 노예 김일제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
정벌 사업
또한 기원전 112년부터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국(辰國)과의 직접교역을 반대하고 한나라에 조공바치기를 거부하는 고조선의 정벌을 단행한다. 육로와 해로로 군사를 파견, 모두 패하였으나 고조선은 내부의 내분으로 한군에 투항자가 발생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자리에 낙랑·임둔·진번·대방의 한사군(또는 한군현)을 설치하였다.
내정
또한 소금과 철과 황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경제적 재력 확충을 시도하였으나 훗날 이 정책은 전한의 재정적 부족과 몰락을 재촉하였다. 토지분배 정책에서는 둔전제를 강력히 시행·추진하였고, 둔전제의 일부를 개정하여 정복한 북방지역에 주민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왕권 강화와 후계 인선
기원전 91년 후비에 의해 발탁된 간신 강충(江充)이 무속인과 음모하여 당시 태자였던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여태자가 강충의 조작된 무고로 의심을 받자 강충을 살해한다. 이에 무제는 분노하여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관군과 대항하였으나 패하여 자결하였고, 여태자의 비인 사량제 역시 자결하였다. 뒤에 관군을 이끌던 손자 유진 내외 역시 자살하고 반군은 진압되었다.
무제는 여태자의 생모인 위황후를 폐출하고 사형에 처하였다. 무제는 여태자의 장인과 장모, 처족, 위황후 일족에게 연좌율을 적용하여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자는 여태자의 처조모의 친정으로 빼돌려졌다.
여태후의 친정 일가들의 폐단을 보았던 한무제는 여태자 일가를 역모로 처단한 뒤, 창읍애왕마저 기원전 88년 죽자, 젊은 구익부인 조씨 소생 전한 소제을 후계자로 결정한다.
총애하는 후궁이었던 구익부인이 14개월 또는 24개월 만에 아들을 낳자 요임금의 어머니가 14개월 만에 출산한 것을 예로 들어가며 총애를 더하였지만 아들 불릉을 황태자로 세운 뒤 어린 아들 뒤에 젊은 어미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구익부인을 역모로 몰아 살해하였다. 그뒤 임종이 가까워 오자 곽광과 김일제를 불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하고 사망하였다.
황후, 후궁, 자녀
- 황후 진씨
- 무사황후 위씨
- 딸 3명
- 아들 : 여태자 유거
- 며느리 : 사양제
- 손자 : 사황손 진, 전한 선제의 아버지
- 부인 왕씨
- 한 제회왕(漢 齊懷王) 유민(劉閎)
- 궁인 이씨 이희(李姬)
- 개장공주(盖長公主)
- 연책왕(燕刺王) 유단(劉旦)
- 광릉만왕(廣陵厲王) 유서(劉胥)
- 부인 이씨,
- 서자 : 창읍애왕
- 손자 : 폐제
- 서자 : 창읍애왕
- 부인 윤씨 윤첩여
- 부인 형씨 형경아(邢娙娥)
- 구익부인 조씨 조첩여
-
- 전한 소제
한무제에 대해서 한서에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한은 사람을 얻으니 나라가 융성했다. 학자로는 공손홍, 동중서, 아관, 성실한 자로 석건, 석경, 정직한 자로 급암,복식, 현명한 자로 한안국 ,정당시, 영을 정한 자로 조우, 장탕, 문장가로 사마천, 사마상여, 익살꾼으로 동박삭, 매고, 응대 잘 한 자로 엄조, 주매신, 천문에는 당도, 낙하굉, 음악에는 이연년, 정책에는 상홍양, 외교에는 장건, 소무, 장군으로 위청, 곽거병, 후사를 부탁한 인물은 곽광, 김일제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당대의 인재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들을 통해 공업을 세웠으며, 이들이 만든 제도와 남긴 글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이 시대에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이유는 무제가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고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 났기 때문이었다. 정치, 경제, 군사 등 다방면에서 무제의 치세를 지탱한 큰 기둥이 된 사람들은 승상 공손홍은 돼지치기, 부승상 복식은 양치기, 재무 대신 상홍양은 상인, 대장군 위청은 노예 출신이었다. 비천한 신분인 그들의 잠재력을 발견해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 바로 무제의 능력이었다.
한나라는 중국 민족인 한민족의 원류로 국가의 이름이 민족의 이름으로, 오늘날 중국을 있게 한 위대한 군주로 중국인들이 추앙하는 인물이며 중국인들의 자존심이다. 국가의 기틀을 완성하고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관제를 정비하여 수천년 중국 관제의 기준이 되었으며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며 의심도 많고 교활하기까지 한 한무제는 집념의 사나이였다. 그의 열린 사고, 강력한 추진력, 단호한 결심, 끈질긴 집념으로 노시초사 대 흉노 전쟁으로 일생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상벌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상에는 운수가 없으며 벌에는 핏줄이 없다."며 법을 어긴 자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처단하는 단호함도 보였다. 말년에는 황태자가 무고에 의해 어쩔수 없이 난을 일으키자 철저히 진압하여 처단하였고 그의 어머니 위황후도 내쫓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새로운 어린 황태자가 대를 이을 수 밖에 없게 되자 어린 황제를 끼고 여인이 조정에 힘을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린 황태자의 모친까지 자신이 죽기 전에 처단할 정도로 철저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갈등과 혼란속에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한 정치인들이 새겨 읽어야 할 것이다.
'한당의 성(漢唐之盛)'
한무제는 고조 유방부터 시작해 일곱 번째 황제다. 여기에서 일곱 번째라는 말은 여후 전제 시대에 명목상 황제 자리에 앉았던 두 소제를 계산한 것이다. 무제의 치세는 장장 54년이었는데, 이는 각 왕조의 역대 황제 가운데서도 청나라 강희제 61년과 건륭제에 이은 기록이다.
그의 위대함은 긴 치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헤택받은 환경과 '웅재대략'을 발휘해 후세 사람들이 '한당의 성'이라 부르며 당대의 성세라고 거론할 정도로 화려하고 태평한 시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제는 '진황한무'라는 말이 있듯이 진시황제와 함께 거론 될 정도로 "이 두 사람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웠고, 시황제는 정치를 확립했으며, 무제는 국경을 결정지었다"라고 평가하는 역사가도 있다.
공자는 후세에 큰 영향을 준 유교의 창시자이고, 시황제는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통일 국가에 걸맞는 각종 제도를 만든 황제이다. 그리고 한 무제는 그의 치세동안 중국의 국경을 거의 확정지었다. 위의 말은 이 세 사람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임을 말해 준다.
시황제와 무제는 분명 통이 큰 걸물이며 정치적 업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나 두 사람에게는 두드러진 차이가 잇다.
시황제는 통일 국가 진을 건국했지만 재위 기간이 10년으로 짧았기 때문에 그 업적을 만족스럽게 쌓지 못햇다. 이에 비해 무제는 창업 후 70년이 지나 이미 기반이 안정된 상황에서 한 왕조를 계승하여 59년 동안 나라를 발전시켰으며 군사, 정치, 외교, 경제, 문화 등 모든 명에서 그야말로 현란한 시대를 만들었다.
진시황과 한 무제는 인재 등용 측면에서도 많은 차이점을 보이는데 짧은 기간의 시황제는 재상 '이사', 장군 '왕전' 정도이나 무제 시대는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탁한 점으로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다.
물론 무제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즉 '궁병독무'로 무력을 남용했다는 비판이다. 무력은 가혹한 사역으로 이어졌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수 양제와 한 무제라는 것이다. 두 황제는 대규모 전쟁을 벌였는데, 병력을 해마다 남북으로 움직여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보냈으며 많은 사람들이 혹사당하거나 죽었다. 특히 수 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나라가 망하였고, 한 나라는 북방의 흉노와 사투를 벌인 결과 국가적으로 심각한 재정적인 위기를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제의 이러한 무력행사가 침략이 아닌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고 변호하는 목소리도 강하다. 흉노쪽을 생각하면 그러하나 고조선을 멸망시킨 경우는 침략이다. 무제가 적극적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흉노 정벌을 하지 않았다면 한 나라는 흉노의 말발굽에 유린당했을 것이라는 자기 편리의 주장이다. 그것이 최후의 승자인 중국인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평가할 때 시황제는 공과 죄가 반반이고, 수양제는 공이 2에 죄가 8이라면 무제는 공이 8에 죄가 2라고나할까? 한 무제는 수명에서 행운이 타고난 황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여인들의 암투속에 황제로 등극
5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치세를 자랑하는 무제는 4세에 교동왕이 되었고, 9세에 여인들의 암투를 통해 운좋게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황위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암투를 치러야 하는데, 반드시 이러한 암투를 조종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후임 황제를 둘러싼 여인들의 치열한 다툼이 대부분인 것처럼 무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본래 무제의 모친 왕씨(후에 효경황후)는 유방의 공신 숙청으로 몰락한 왕씨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였던 '장아'는 '왕중'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으나 곧 왕중이 죽는 바람에 유교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 시기로 여자들의 재혼이 자유로웠던 시절이라 전씨와 재혼을 하게 된다. 장아는 맏 딸인 왕씨를 '김왕손'이라는 자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어느날 길거리 점쟁이가 "당신 딸은 후에 귀하게 될 몸이니 반드시 개가시켜야 하오"라는 한마디에 사위 김왕손에게 자신의 딸과 이혼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김왕손이 어처구니가 없어 거절하자 장아는 강제로 그녀의 딸을 납치하여 황태자(경제)의 시녀로 들여보내 황태자의 첩으로 그녀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장아란 여자의 권력욕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경제가 황제에 오른 이후 황후였던 박씨가 아기가 없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뒤이어 경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던 '율희'의 아들 '유영'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때 경제의 친누나였던 '장공주'는 비어있는 황태자비 자리에 자신의 딸을 앉히고자 했다. 그러나 자존심과 질투심이 강했던 율희는 장공주의 속마음을 알고 무척 경계했다. 이때 이미 미인으로 책봉된 장아의 딸 왕씨가 자신의 야심을 위해 자신의 아들인 교동왕 유철을 장공주에게 소개시켜 준다.
궁주 연회가 열리던 어느날, 경제의 누나이자 무제의 고모인 장공주가 유철에게 좌우에 늘어선 궁녀들을 가르키며 마음에 드는 궁녀를 선택하라 했다. 그러나 유철은 모두 싫다고 했다. 이에 장공주는 자신의 딸 '아교'를 가르키며 어떠냐고 하자, 유철이 좋아하면서 자신의 아내가 된다면 금을 된 집에다 모셔 놓겠다고 했다. 이에 장공주는 크게 기쁘하며 경제에게 이들의 혼인을 허락받는다. 즉 '금옥장교'란 말로 '훌륭한 집안에 미인을 숨겨 둔다'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이리하여 교동왕 유철과 아교는 결혼에 성공했고, 이제 장공주와 왕씨에게 유철을 황태자로 옹립시키는 일이었다.
장공주는 하루가 멀다 하고 황궁을 드나들며 경제에게 율희와 황태자 유영에 대한 고자질과 모함을 일삼았다. 이미 사랑이 식어가고 있었고 기가 센 율희의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긴 경제는 어느날 율희에게 "만약 짐이 죽으면 다른 자식도 황태자처럼 사랑해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자, 그녀는 매몰차게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 아이에게 무슨 사랑을 하란 말씀이 십니까?" 라며 대꾸하자 경제는 율희에게 크게 실망하여 황태자 유영을 폐위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율희는 자괴감과 울울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바로 죽음을 맞게 된다.
장공주와 왕미인의 계획대로 교동왕 유철은 황태자로 옹립되고 아교는 황태자 비가 되었다. 더불어 왕태자의 어머니 왕미인도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두 여인의 계략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기원전 141년, 마침내 경제가 죽고 황태자 유철이 즉위하여 무제가 되었다. 이렇듯 두 여인의 계략에 의해 만들어진 무제는 즉위 기간 내내 수많은 여인들과의 이야기를 남기면서 자신 역시 후궁들의 암투극에 시달려야 했다. 나중에는 황태자가 반란을 일으키는 비운도 겪어야 했다.
흉노정벌전쟁
무제 54년에 걸친 치세의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흉노절벌전쟁이었다. 이 싸움에서 한나라는 두 영웅과 수많은 비극의 주인공을 만들어 냈다.
당시 북방 초원지대의 흉노족은 기원전 5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목민족이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몽골 고원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중화인민공화국의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 성(甘肅省),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흉노는 중국의 한족(漢族)과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이나 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보였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으로 적대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편견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흉노 민족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 흉노와 훈족(Hun族)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있다. 또한, 흉노의 '匈'(흉)은 '훈(Hun)'을 중국어 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흉노와 훈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이다.
현재 흉노의 후계 민족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헝가리와 터키, 몽골은 이들을 자기 민족의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흉노족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 전한이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흉노 영토는 동쪽으로 동호와 예맥(濊貊), 북쪽으로 예니세이 강 상류, 서쪽으로 동 투르케스탄,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 지방과 칭하이 성(靑海省)의 북부에 이르렀다.
북방의 흉노족은 유목민족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농경을 주로하는 한족을 수시로 침공하여 재물 약탈을 일삼고 많은 한족을 끌고가 노예로 부리는 등 북쪽 변경의 한족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야만적이고 호전적인 북방 민족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았던 한족은 진시황 시절부터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그들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흉노를 통일한 '모돈선우'가 나타나면서 힘이 더욱 강성해져 한나라를 제압하였다. 힘에 밀리던 한나라는 서로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조공을 바치는 등 흉노의 속국이나 다름 없었으나 중국인들은 소위 회유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무제는 기원전 141년, 젊은 나이로 즉위한 이래 흉노를 토벌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보수파들의 강한 반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회유책으로 일관하다가 기원전 135년에는 훙노와 전쟁을 천명하고 2년 후 기원전 133년 조정 회의에서 정식으로 흉노정벌이 결정되었다.
'마읍계책' 불발
한 무제는 흉노족 군대를 일거에 섬멸할 계책을 마련하였는데, 북쪽 변경의 마을인 '마읍'으로 적을 유인해 섬멸하기로 하였다.
한 무제는 마읍의 유력자인 한 노인을 흉노 땅에 들여보냈는데, 그는 밀수를 하면서 흉노와 친교를 맺고 교묘히 선우(흉노왕)에게 접근하여 마읍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을 믿은 선우는 마읍의 풍부한 물자를 손에 넣고자 병력 10만 기를 이끌고 침입했다. 한나라 군대는 마읍 근처에 30여 만의 대군을 미리 매복시키고 선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를 알 턱이 없는 선우는 마읍을 향해 단숨에 진군해 왔다. 마읍까지 백여리를 남겨놓았을 때였다. 평원 일대에 가죽이 떼지어 있는데, 망보는 사람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수상히 여긴 선우는 방향을 돌려 근처의 경비 초소를 급습했다. 때마침 변경의 요새에서는 보초병 하나가 선우의 부대 움직임을 정찰하고 있다가 흉노군에 잡히고 말았다. 문초끝에 병사는 한나라 군대의 잠복 사실을 모조리 폭로하고 말았다.
이에 선우는 즉각 군사를 요새 밖으로 퇴진시켰다. 한나라 군대는 선우가 마읍에 들어서면 각 군이 일제히 습격할 예정이었으나 선우가 철수했으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배신감을 느낀 흉노는 한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끊고 그때 부터 닥치는 대로 한나라 변경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만은 계속되었다. 흉노는 여전히 한나라의 물자를 탐냈으며 한나라 또한 교역을 통해서 흉노를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마읍 계책'이라고 불리는 이 전초전은 이렇게 불발로 끝나고, 이를 계기로 양국은 완전히 적이 되어 이후 15년 동안 수차례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능 펼치게 된다.
제1차 토벌전
기원전 129년, 기마장군 공손오, 경차장군 공손하, 효기장군 이광, 차기장군 위청이 각각 기병 1만을 이끌고 네 방향에서 출병했다. 그러나 결과는 한의 패배로 끝낫다. 공손하는 전과를 올리지 못했으며, 공손오는 7,000기를 잃었으며, 흉노족이 가장 두려워 하던 이광은 포로로 잡혔다가 운좋게 목숨만 겨우 도망쳐 왔다. 이렇게 이름있는 세 장군들이 실패한 가운데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위청만이 적의 수급 700을 배어 간신히 체면을 지켰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위청은 일곱 차레에 걸쳐 흉노로 출격해 대 흉노 작전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무제는 이광과 공손오를 평민을 강등하여 칩거토록 지시한다.
제2차 토벌전
이듬해인 기원전 128년, 흉노가 어양, 상곡 방향으로 공격하여 태수를 죽이고 주민 수천 명을 살해하고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무제는 이광을 다시 불러 우북평 지역을 방어토로 지시하고 적의 주력을 그곳으로 유인하여 고착 견제하는 동안 위청이 하서 지역의 흉노군 10만을 격멸하려는 작전이었다. 흉노의 밀정이 한나라 공주를 통해 한나라의 작전이 은밀히 흉노측에 새어나가고 있었다. 무제는 위청으로 하여금 기밀이 누설될 여지가 있으니 장안에 머물지 말고 곧 바로 하서 지역으로 떠나도록 하였고 그의 작전을 위청에게 숙지 시켰다. 흉노측은 위청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무제는 위청, 이식으로 하여금 기병 3만을 이끌고 옌멘에서 출격해 황허 강 하류 서쪽의 넓은 평야지대인 하서(하삭) 방향을 우회 공격하여 하서 지역의 흉노군 주력을 섬멸토록 하였다. 그래서 위청, 이삭의 3만 기병은 기만 전술로 어양의 이광군을 지원하는 척 어양 방향인 동쪽으로 기만기동을 하다가 급히 서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하서 지역 북쪽 방향 항허 강 북단으로 진격하였다. 흉노는 위청군이 갑자기 사라지자 위청군을 탐지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위청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위청은 황허 강을 건너 하서 평원 북단에 도착하자 황허 강의 다리를 불살라 버리도록 지시했다. 흉노의 지원군이 건너오지 못하게 함이었다. 남쪽으로부터 별도 소수의 기병대를 이동시켜 흉노군의 주의를 분산시킨 다음 위청군 본대는 은밀히 흉노군 후방에 나타나 3만 기병대로 10만의 흉노군을 협공하여 포로 3만 17명, 각종 가축 100만 두를 확보하고 32,000 여 명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흉노 우현왕, 누번왕, 백양왕 등은 막대한 피해를 보고 황허 강을 건너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삭방 지역은 완전히 한나라 군대가 평정하여 서역지역과 흉노족의 허리를 자르는 전략적 성과를 얻었다.
무제는 삭방 지역에 강력한 축성을 구축하도록 지시하고 인구 10만 명을 이주시켜 축성에 투입하고 삭방 지역을 영구화하는 조치를 내린다.
무제는 예산 담당 신하에게 황금 20만 냥을 준비토록 지시하고 다음 원정을 준비한다. 군 장수의 권위를 최대한 세워주는 조치를 취하고 이광의 패능위 처형 사건도 무마시킨다. 그러다가 그동안 한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던 중신 한안국이 죽자 무제는 유능한 신하를 잃게 되어 슬픔에 잠기기도 하면서 그가 잘못도 있었지만 후하게 장사를 치러주도록 지시한다.
제3차 토벌전
기원전 127년, 운중에서 농서 방면으로 진격하여 적군 수천 명을 죽이고 소와 양 수십만 마리를 포획하였으며, 흉노의 백양왕, 누번왕을 오르도스 땅에서 몰아냈다. 실로 진의 몽염 장군 이래 이룬 대승리였다. 무제는 그곳에 재빨리 방어 진지를 설치해 서역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위청을 장평후에 봉해 공을 치하했다.
그러나 흉노는 이정도 타격으로 물러설 나라가 아니엇다. 흉노는 여전히 중국 영토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기원전 126년에서 125년까지 2년 동안 중국에 침입한 흉노의 군대는 20만 기에 이르렀으며, 민과 관을 합쳐 1만 명이상을 죽였다고 한다.
위청은 개선 후 어명으로 궁중에서도 말을 타고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노예 출신 위청 장군의 최대 전성기였다.
제4차 토벌전
기원전 124년, 무제는 위청에게 네 번째 출격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흉노의 선우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우현왕을 격파하기 위해서 였다.
흉노는 위청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자 발악적인 보복으로 한 국경을 여러 곳 침입하여 태수를 죽이고 백성들을 납치하고 약탈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흉노 선우는 하삭을 공격하여 일거에 한나라 수도 장안으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공격하기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우현왕이 출격준비에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여 그들의 곤륜신에게 기원제를 올리고 출병 전 전 병력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명령했다. 흉노는 한나라 장안을 점령하게 되면 수많은 보물과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에 젖어 사기가 충전되어 들 떠 있었다.
무제는 이제 완전히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적진 깊숙히 침입하여 흉노의 우현왕을 격파하여 동서흉노를 분리시키는 전략을 구상했다. 이동거리는 대략 천리길 거리였으며 은밀기동과 기습을 강조했다. 위청은 천리 기동을 위해서 귀화한 흉노인 중 조신이라는 장수를 기용하여 대책을 수립했다. 위청은 기병 일인 당 두 필씩의 말을 준비하여 교대로 타고 달리도록 하였고 사전에 말 먹이를 영양이 많은 조,옥수수 등의 사료를 준비하여 먹이게 하고 말을 사람 대하듯이 잘 대하도록 군령으로 하달했다. 이러한 지시를 어기는 경우에는 엄한 벌로 다스렸다. 말을 잘 먹이고 기력을 보강하였던 말을 교대로 타면서 기동하였는데 하루 500리를 달렸다고 한다. 이는 흉노족도 예상하지 못하는 속도로 이동하였던 것이었다. 정예 기병 800기를 조신에게 주어 선봉대로 길을 안내하며 우현왕이 위치한 곳으로 기습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위청은 10만기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흉노 땅 깊숙이 진출해 장안 공격 전 술과 고기로 전야제를 벌이면서 흥청거리고 있던 우현왕 본거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갑작스런 한 기병의 공격으로 우현왕의 본거지는 아수라장이 되고 허를 찔리고 말았다. 위청군은 흉노 왕족을 포함해 1만 5,000명과 가축 수백만 마리를 포획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우현왕은 간신히 애첩 한 명을 데리고 겨우 군사 수백 기의 보호를 받으며 북방으로 도망쳤다. 이 공으로 위청은 장군으로 최고 직위인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수하 장군들도 모두 승진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에 흉노는 700리 북쪽으로 축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 5차 토벌전
잇따른 승리에 힘을 얻은 무제는 기원전 123년, 단숨에 승부를 결정 짓고자 다시 대장군 위청에게 다시 출병을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위청은 곽거병 등 장군 여섯 명과 10만 기를 이끌고 두 차레에 걸쳐 출동하여 적 1만명이 넘는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한도 흉노의 주력과 마주친 두 장군이 3천여 기를 잃는 패배를 맛보았으며, 그 가운데 한 명은 책임추궁이 두려워 그대로 흉노로 도망쳤다. 결국 결과는 장군 멍군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한 명의 새로운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의 이름은 곽거병이었다. 그는 불과 18세의 청년에 불과했지만. 경기병 8백을 이끌고 적 진영 깊숙이 침투해 적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무제는 이 청년 장교의 활약이 기뻣는지, 귀환 후 그를 관군후라는 열후에 봉하고 1,600호를 내려 공을 치하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대 흉노전의 주역은 위청에서 곽거병으로 넘어가게 된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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