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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 (선진시기 : 춘추시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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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 (선진시기 : 춘추시대)

두바퀴인생 2010. 2. 15. 06:31

 

 

중국의 역사 5 (선진시기 : 춘추시대)           

 

 

춘추시대( 春秋時代 Chūnqiū Shídài)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 사이의 시기를 말하며, 주나라의 동천 이후 진나라의 중국 통일까지의 시기를 부르는 춘추 전국시대의 전반기에 해당된다.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에서 이 이름이 유래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와의 경계는 춘추시대에 열국의 강국 진(晋)이 조·위·한의 3국으로 분열되어 동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받은 기원전 403년까지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진의 집정하에 있던 지백(知伯)을 멸망시키고 사실상 3국의 분립이 성공한 기원전 453년으로 올려 잡는 설도 있다.

 

중국의 고대 춘추시대 제후 간 회맹(會盟)의 맹주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齊) 환공, (晉) 문공, (楚) 장왕, (吳) 합려, (越) 구천이 있다.

 

한편 진 목공, 송 양공, 오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개요

주나라가 낙읍(洛邑)에 동천(東遷)하고 나서 진(秦)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제후가 대립 항쟁한 시대로, 그 전반기를 춘추시대라 한다. 이 시기에 주나라가 본가인 봉건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의 동천 후 강국은 근처의 소국을 병합하여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해 갔다. 서주(西周)말에 800 가까이 되던 국가는 춘추시대 중기에는 수십 국으로 감소되었다. 춘추시대 초기에 진이나 초(楚)는 근처의 도시국가를 정복하면 부하에게 그 토지를 영지로 주지 않고 현이라 이름붙여 국왕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질서가 파탄된 가운데서 희미하게 주의 종주권으로서의 명목만을 지킨 것은 패자(覇者)의 힘이다. 패자는 회맹(會盟)을 주최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주 왕실을 존중하고 숭배하여 소위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목으로 중원을 통제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회(기원전 651년),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천토(踐土)의 회(기원전 632년)가 그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초는 중원에 진출하여 진을 격파하고(기원전 597년) 패업을 이룩했지만, 패자의 성격도 달라져서 주나라 왕실은 아주 무시되었다. 초의 장(莊)왕은 주왕실의 왕위의 상징인 ‘큰솥의 무게를 묻는다’(이는 장왕이 주나라 천자 자리를 노리려는 의도의 표시였다고 한다)라고 한 말은 그 한 예이다.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춘추시대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의 과도기였다. 또 춘추 중기에는 철제농구가 출현하여 심경제초(深耕除草)가 용이하게 되고 생산력은 증대해 갔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전국시대에 내려와야 되지만 씨족적인 질서를 분해하고 계급 분화를 촉진했다. 토지 소유는 공동체적 집단 경작으로부터 개별적 경영으로 이행하고, 세제도 영주 직영지라는 노동 지대(地代)의 형태로부터 자작농의 현물지대 수납으로 변화해 갔다. 이와 같은 변화는 춘추시대, 전국시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관된 역사적 시점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춘추시대 말기의 정세

춘추시대의 말기가 되자 북의 진, 남의 초가 그 권세를 잃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중의 하나로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남쪽에 오(吳)월(越)의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발흥하게 된다. 이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으나, 춘추시대의 후반이 되면 우선 오가 역사에 등장한다. 북의 진(晋)은 초(楚)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서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다.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고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하게 했다. 그 결과, 오와 월 사이에서는 사투가 되풀이되었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고 있는 유명한 고사(故事)가 된다. 그 결과, 오왕 부차(夫差)는 패하여 자살하고, 오는 멸망한다.

 

승리를 한 월왕 구천(句踐)은 세력을 북방으로 진출시켜 산둥(山東)이나 허난성(河南省) 남동부의 여러 나라를 그 산하(傘下)에 거두어들이고, 한때 도읍을 낭야(琅邪)에 옮기기도 했다. 또한 오 역시 왕 부차가 노(魯)와 제(齊)를 무찌르고, 기원전 482년에는 황지(黃池)에 제후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진(晋)과 회맹(會盟)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 두 나라의 땅은 일찍이 기원전 4000년경에 수도경작(水稻耕作)의 신석기(新石器)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은(殷)으로부터 서주시대에 걸쳐서는 거의 이렇다 할 문화도 없이 잊혀져버린 지역이었다. 춘추(春秋)의 후반이 되어 갑작스럽게 이 두 나라가 출현하여, 한때는 진이나 초를 능가하는 형세를 나타내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오의 영역을 병합한 월도 역시 얼마 안 가서 쇠망해버렸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북의 진의 내부에는 나라가 분열될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범(范), 중행(中行), 지(知), 조(趙), 위(魏), 한(韓) 등, 6귀족의 발호(跋扈) 때문이다. 진의 공족(公族)이 아닌 범, 중행 등의 귀족은 멀리 떨어진 곳의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자유로이 주위의 토지를 손에 넣어 자기의 세력을 증대시켜 오히려 진의 공족 출신 귀족을 누르고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다. 더구나 진나라에는 행정 조직 등도 거의 없어서, 이들 6대 귀족에 의하여 정치가 행해지게 된다. 진후(晋侯)의 지위는 오히려 실제적인 힘이 없어, 직접 지배하는 지역은 6귀족 중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문공(文公) 이래 북부 제후(諸侯)의 중심이면서도 국내적으로는 분열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6귀족은 진후를 정치로부터 배제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세력을 다투어,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 등 2가(家)가 다른 4가에 의해 멸망하고, 그 영지는 분할되었다.

 

또한 기원전 453년에는 한, 위, 조 등 3씨가 가장 강대해진 지씨(知氏)를 공략하여 사실상 진을 3등분하여 독립하였다. 이와 같이 귀족이 제후를 억누르고 그 나라의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현상은 노(魯)나 제(齊)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춘추시대 후반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국제적인 외교도 기원전 546년의 송(宋)의 화평회의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모두 귀족들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다. 한·위·조 등 3씨는 기원전 403년에 주왕(周王)에 의해 제후로서 인정받게 되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53년 이래 독립국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춘추시대를 통하여 유력한 대국으로서 제후를 통제해 온 진이 사실상 멸망한 이 해를 고비로 하여 그 전을 춘추시대, 그 후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주석

  1.  춘추의 기록 기간은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를 의미하고 있으나, 역사적 의미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별하는 것으로 하극상(下剋上)의 경향을 들 수 있는데,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하극상의 경향이 많아 예의 질서가 붕괴되고 여러 나라의 상쟁(相爭)이 격화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유교적 견지에서 얘기한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주대 봉건제로부터 진의 중국 통일에 이르는 과도기로서, 양자를 통일적으로 고찰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  會盟 제후 혹은 그 사신이 유력자를 중심으로 서로 만나서 맹약하는 것. 회(會)라 함은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하여 모이는 회합이며, 맹(盟)이라 함은 소의 왼쪽 귀를 잘라서 그 피로 조약서를 쓰고 회합한 제후가 피를 마시는 의식을 말한다. 이 회맹의 맹주를 패자(覇者)라고 한다. 회맹의 성격은 초기에는 패자가 주 왕실에 위임이 되어, 국제 친선·가족 도덕 등 중원 사회의 질서 유지에 목적이 있었지만, 차차 강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수(攻守)동맹으로 변화해 갔다.

 

춘추 오패(春秋五覇)

 

중국의 고대 춘추시대 제후 간 회맹의 맹주를 가리키며 춘추시대의 5대 강국을 일컫기도 한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5의 수는 5행 사상(나무·불·흙·쇠·물의 다섯 원소의 운행에 의해 만물이 성립한다고 하는 사상)에 의한 것으로, 특별히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춘추오패는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을 가리키며, 기록에 따라서 진나라 목공, 송나라의 양공 또는 오나라 부차 등을 꼽는 경우가 있다.

 

제나라

(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시대 춘추오패이자, 전국시대 전국칠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현재의 산둥 지방이다. (周)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태공망(太公望)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다. 이후 제환공(齊桓公)시대에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제경공 때는 안영을 등용하였다. 기원전 386년 전화(田和)가 제강공을 폐하면서 제후의 성씨가 (姜)씨가 (田)씨로 바뀌게 된다. 후에 위왕(威王)이 행정개혁을 행하여 국력을 증대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진(秦)과 중국을 양분하는 세력을 이루었다. 그 후도 계속해서 명석한 두뇌의 군주가 이어져 그 보호하에 수도 임치(臨淄)에서 직하(稷下)의 학(學)이 일어나 이 시기의 학문의 중심을 이루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제나라는 최후까지 버틴 전국칠웅(진 제외)의 나라였다.).

 

 

역대 군주

 

강씨 왕조

  1. 태공망(太公望) (姜尚, 대략 기원전1000년 이전)
  2. 정공(丁公) (姜伋)
  3. 을공(乙公) (姜得)
  4. 계공(癸公) (姜慈母)
  5. 애공(哀公) (姜不辰, ? - 기원전863년)
  6. 호공(胡公) (姜靜, 기원전862년 - 기원전860년)
  7. 헌공(獻公) (姜山, 기원전859년 - 기원전851년)
  8. 무공(武公) (姜壽, 기원전850년 - 기원전825년)
  9. 여공(厲公) (姜無忌, 기원전824년 - 기원전816년)
  10. 문공(文公) (姜赤, 기원전815년 - 기원전804년)
  11. 성공(成公) (姜脫, 기원전803년 - 기원전795년)
  12. 장공(莊公) (姜購, 기원전794년 - 기원전731년)
  13. 희공(僖公) (姜祿, 기원전730년 - 기원전698년)
  14. 양공(襄公) (姜諸兒, 기원전697년 - 기원전686년)
  15. 공손무지(公孫無知) (기원전686년)

  16.  환공(桓公, 姜小白, 기원전685년 - 기원전643년)이름은 소백(小白). 제는 전설로는 주를 도와 은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태공망 여상(呂尙) 태공망의 후손으로, 산둥성 임치(臨淄)에 영지를 받아, 기원전 7세기에 환공이 왕이 되자 부강하게 되었다. 환공은 이복형 규(糾)와 권력쟁탈로 싸워 즉위하고 재상으로 관중(管仲)을 등용했다. 관중의 헌책에 의해 어업·제염업·양잠업 등의 경제 정책을 장려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기원전 679년 제후(諸侯)들과 견(甄)에서 회맹하여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기원전 651년 규구(葵丘)의 회에서 패업을 자랑했지만, 관중 사후에 3총(三寵)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사후 내란에 의해 두 달 동안이나 시체를 매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관중(관이오,管荑吾, ?~기원전 645년)는 제 환공을 섬긴 뛰어난 재상으로 환공을 패자로 만들었다, 중(仲)이 자(字)이기에 흔히 관중으로 불린다. 관자(管子)라고도 불리며, 이는 또한 그가 지은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뒤에 관이오의 업적을 중심으로 후대 사람이 《관자》에 내용을 추가하였다.

 

제갈량과 함께 중국의 2대 재상으로 불리며, 흔히 관제(管諸)라고 일컬어진다. 관이오는 포숙아와 매우 절친하였기 때문에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생겼다.

  

 

  17.  제후 무궤(齊侯 無詭, ? ~ 기원전 642년, 재위 기원전 643년 ~ 기원전 642년)는 성이 강(姜)이며, 이름은 《사기》〈제태공 세가〉에서는 무궤, 《춘추좌씨전》에서는 무휴(無虧)라 한다. 무궤는 아버지는 제 환공의 서장자로, 어머니는 위 의공의 누이 장위희다. 제 환공과 관중이 공자 강소를 세자로 세웠다. 그러자 장위희는 권신 옹무(역아)와 수조를 세력으로 끌여 무궤를 제 환공의 후계로 만들기 위해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제 환공이 나중에 병들자 역아와 수조가 제 환공을 감금하여 죽도록 방치하였고, 환공이 죽은 후 역아와 수조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었으며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무수히 죽였다. 왕자 소가 송나라로 도주하여 송 양공의 지원을 얻어 제나라로 쳐들어오자, 역아와 수조를 미워한 제나라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대부 국의중, 고호가 이에 호응하여 수조를 죽이고 마침내 무궤도 교살에 처했다. 무궤는 고작 석 달간 왕위에 있었다.

 

 

  18.  효공 (姜昭, 孝公, ?~기원전 633년, 재위 기원전 642년-기원전 633년)은 성은 강(姜)이며 휘는 소(昭)다. 제 환공과 정희의 아들이다.

 

관중이 살아 있을 때, 제 환공과 관중이 세자로 세우고, 송 양공에게 후원을 촉탁했다. 관중 사후 제 환공이 자신의 후계를 명확히 하지 않고, 서장자 무궤가 총신 옹무, 수초와 결탁하여 제 환공 사후 군신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송나라로 도주하여 송 양공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송 양공은 조(曹), 위(衛), 주(邾)와 연합하여 원조를 승낙하고 제나라로 쳐들어갔다. 이에 제나라 사람이 무궤를 죽이고 소를 군위에 모시려 했으나, 소는 본국에 남은 제 환공의 네 공자 곧 공자 원-후일의 제 혜공, 공자 상인-후일의 제 의공, 공자 반-후일의 제 소공, 공자 옹(公子 雍)의 공격을 받아 송나라로 도망쳐 돌아왔다. 송 양공은 다시 원병을 내어, 네 공자들의 군사를 언(甗, 현재의 산둥 성 지난 부근)에서 무찔렀다. 소는 제나라 서울 임치로 들어가 제나라 군위에 올랐다. 이 후계 쟁탈전으로 인해 제나라의 힘은 쇠퇴하여, 패권국의 지위를 잃었다.

 

송나라가 녹상에서 회맹을 개최하자 초나라와 함께 참여했으며, 송 양공이 죽은 해 봄에 송나라를 쳐 민 땅을 포위했다(송 양공은 그 해 여름에 죽었다).

 

노 희공 26년(기원전 634년) 봄, 노나라 서비를 쳤으며, 여름에 노나라에 흉년이 든 것을 기화로 노나라 북비를 쳤다. 노나라 대부 전희가 제나라 국경까지 나아가 제나라 군사를 공궤하여, 효공과 담판을 지었다. 효공은 제나라로 돌아갔다. 이 해 겨울, 초나라로 망명한 공자 옹과 그를 섬기는 역아를 앞세운 초· 노나라의 공격을 받아 양곡 땅을 빼앗겼다.

 

  19.  소공(姜潘, 昭公, ? ~ 기원전 613년, 재위: 기원전 632년 ~ 기원전 612년)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임금으로, 성은 강(姜), 휘는 반(潘)이며, 제 환공과 갈영의 아들이다.

 

제 효공 사후, 제 환공 생전부터 자신을 세우려 한 공자 개방이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제후로 세웠다.

진 문공과 함께 성복에서 초나라와 싸웠으며, 승전 후 진 문공은 제, 송, 노, 채, 정, 위, 거 8국과 천토에서 회합하고 동맹을 맺었다.

 

노 희공 33년(기원전 627년) 여름, 노 문공 4년(기원전 623년) 여름, 노 문공 9년(기원전 618년) 여름, 노 문공 11년(기원전 616년), 적(狄)의 침략을 받았다.

 

  20.  제군(齊君) 사(舍)(? ~ 기원전 613년, 재위: 기원전 613년)는 춘추시대 나라의 임금으로, 성은 강(姜), 사는 이름이며, 제 소공과 숙희의 아들이다.

 

기원전 613년, 소공이 죽고 군위에 올랐으나, 어머니 숙희는 제 소공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사에게는 위엄이 없었다. 이 해 10월, 숙부 공자 상인(제 의공)에게 암살당했다.

 

  21.  의공(姜商人,  懿公, ?-기원전 609년, 재위 기원전 612년-기원전 609년)은 성은 강(姜)이며 휘는 상인(商人)이다. 제 환공과 밀희의 아들이다.

 

제 환공 말년 군위를 다툰 다섯 공자 중 한 명으로, 제후 무궤 사후 배다른 형 세자 소(제 효공)가 송의 도움을 받아 제후 위에 오르려 하는 것을 다른 공자들과 함께 저지하고 일단은 소를 송나라로 쫓아 보냈으나, 송 양공과 싸워 져 결국 세자 소가 즉위하여 제 효공이 되었다. 군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음으로 현명한 선비와 사귀고 백성들을 달랬다. 제 효공의 뒤를 이은 다른 배다른 형 제 소공이 기원전 612년에 죽고 그 아들 제군 사가 군위에 올랐으나, 세력이 외롭고 약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묘상에서 제군 사를 죽였다. 《사기》〈제태공 세가〉에서는 '상인이 자립하여 의공이 되었다'고 한다. 《춘추좌씨전》〈문공 14년〉에서는 일단 또 다른 배다른 형 공자 원(제 혜공)에게 군위를 양보하나, 공자 원이 “나는 너를 섬길 수 있어도, 너는 나를 섬길 수 없다”라며 거부하고 공자 상인이 군위에 오르는 것으로 나온다. 이리하여 공자 상인은 제후로 즉위했다.

 

공자 상인이 즉위한 후, 제군 사의 외가인 노나라에서는 양중을 주 왕에게 사자로 보내 제나라에 있는 제군 사의 어머니 소희(昭姬, 다른 이름으로 자숙희, 숙희라고도 한다)를 불러들이기를 청했다. 주 왕은 선백을 사자로 제나라에 보내 숙희를 청했는데, 제나라는 선백과 자숙희를 잡아들였다. 또 다음해 가을에는 노나라 서비를 쳤다. 겨울 11월, 진(晉), 송(宋), 위(衛), 채(蔡), 정(鄭), 허(許), 조(曹) 여섯 나라가 호(扈)에서 회맹하고 제나라 토벌을 모의했다. 제나라는 진나라에 뇌물을 주고 제나라 토벌을 없던 일로 만들게 해, 위기를 넘겼다. 다음해 봄, 노나라가 곡양에서 제와 만나고자 했으나, 제후는 가지 않았다. 여름, 노나라가 양중을 제나라에 보내 뇌물을 바친 후에야, 두 나라는 처(郪)에서 회맹했다. 다음해, 곧 노 문공 17년, 여름에 또 노나라 서비를 쳐, 노나라 양중이 제나라에 회맹을 청했다. 

 

《사기》〈제태공 세가〉에서 말하는 의공의 죽음은 다음과 같다. 의공이 공자였을 때, 병융(丙戎)의 아버지와 사냥을 하여 이기지 못했으므로, 즉위한 후 그 아버지의 발을 끊었고, 병융을 자기 종으로 삼았다. 또 용직(庸職)의 아내를 좋아하여, 자기 궁에 두고, 용직을 참승으로 부렸다. 노 문공 18년(기원전 609년) 5월, 의공이 신지라는 못으로 놀러갔는데, 이 두 사람이 서로 농을 주고받았다. 용직 왈,“발 끊긴 아들!”, 병융 왈,“아내 빼앗긴 놈!”둘은 함께 의공을 원망했고, 모의하여 의공을 수레 위에서 죽여 대나무 숲 가운데에 버렸다. 《춘추좌씨전》〈문공 18년〉의 이야기도 위와 비슷하나, 병융이 병촉(邴歜)으로 나오고, 용직이 염직(閻職)으로 나오며, 의공이 병촉의 아버지와 밭을 가지고 다투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의공은 교만하여 백성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의공의 아들을 폐하고 공자 원을 위나라에서 맞아들여 세우니 제 혜공이다.

 

  22.  혜공(姜元, 惠公, ?-기원전 599년, 재위 기원전 608년-기원전 599년)은 춘추시대 제나라 임금으로, 성은 강(姜), 휘는 원(元)이다. 제 환공과 소위희의 아들이다.

 

제 환공의 뒤를 잇고 후계 다툼을 벌인 다섯 공자 중 한 사람으로, 제후 무궤 사후 제나라 사람들이 세자 소를 임금으로 맞이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세자 소를 송나라로 쫓아냈으나, 송 양공과 싸워 져 세자 소가 즉위하여 제 효공이 되었다. 제 의공이 조카 제군 사를 죽이고는, 군위를 양보받으나, “나는 너를 섬길 수 있어도, 너는 나를 섬길 수 없다.”라고 하며 군위를 거부했다. 제 의공이 즉위한 후에도, 의공을 제나라 임금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난을 피하여 어머니 소위희의 친정 위(衛)로 망명했다가, 인심을 잃은 제 의공이 살해당한 후 의공의 아들을 폐한 제나라 사람에게 추대받아 군위에 올랐다. 기원전 608년, 노 문공의 서장자 노 선공이 적장자인 악을 죽이고 즉위하여 제나라에 뇌물로 제서(濟西)의 밭을 바쳤고, 제 혜공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607년, 북적(北狄)의 일종인 장적(長翟)-《사기》주공세가에서는 당시 북적 수만(鄋瞞)나라 임금 교여의 아우의 아우 영여(榮如)라 한다-이 쳐들어왔는데, 왕자 성보가 쳐죽이고 북문에 묻었다. 기원전 602년, 노나라와 함께 내(萊)를 쳤다. 기원전 599년, 노나라에 제서 땅을 돌려보냈다.

 

  23.  경공(頃公) (姜無野, 기원전598년 - 기원전582년

  24.  영공(靈公) (姜環, 기원전581년 - 기원전554년)

  25.  장공(莊公) (姜光, 기원전553년 - 기원전548년)

  26.  경공(景公) (姜杵臼, 기원전547년 - 기원전490년)

  27.  안유자 도(晏孺子 荼) (기원전489년)

  28.  도공(悼公) (姜陽生, 기원전488년 - 기원전485년)

  29.  간공(簡公) (姜壬, 기원전484년 - 기원전481년)

  30.  평공(平公) (姜驁, 기원전480년 - 기원전456년)

  31.  선공(宣公) (姜積, 기원전455년 - 기원전405년)

  32.  강공(康公) (姜貸, 기원전404년 - 기원전379년)

 

전씨 왕조

  1. 태공 [太公, 전화(田和)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4년]
  2. 폐공 [廢公, 전염(田剡) 기원전 383년 ~ 기원전 375년]
  3. 환공 [桓公, 전오(田午)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7년]
  4. 위왕 [威王, 전인(田因)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0년]
  5. 선왕 [宣王, 전벽강(田辟彊) 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
  6. 민왕 [湣王, 전지(田地) 기원전 300년 ~ 기원전 284년]
  7. 양왕 [襄王, 전법장(田法章) 기원전 283년 ~ 기원전 265년]
  8. 폐왕 [廢王, 전건(田建)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21년]
     

진나라

(晉, 기원전 1100년 대 ~ 기원전 349년)은 주나라 무왕의 둘째 아들 당숙 우가 세운 나라이다. 문공(文公)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 대부 지백(智伯)이 실권을 장악했으나, 한, 위, 조 3가문의 협공으로 암살된다. 이후 이 3가문이 독립국의 기초를 닦았다.

 

진(晋)나라에는 진나라 공실(公室)을 보좌하는 여섯 명의 귀족이 있었다. 여섯 명의 귀족은 지씨(智氏),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범씨(范氏), 중항씨(中行氏)들이었고, 그들의 세력은 공실을 위협할 정도였다. BC 458년 여섯 명의 귀족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고 그 와중에 범씨와 중항씨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나머지 4명의 당주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영토 밖으로 밀쳐냈다.

 

BC 497년이 되자 지씨의 당주인 지백요(智伯瑤)의 주도로 한(韓), 위(魏), 조(趙)의 당주들과 함께 범씨와 중항씨의 영토를 분할해 차지해 버린다. 그리고 지씨는 35대 군주 출공(晉出公)이 삼환과 전씨에게 지백요, 한호, 위구, 조앙을 죽여달라는 문서를 보냈다가 오히려 삼환과 전씨가 진출공이 그런 문서를 보내왔다는 문서를 보내는 바람에 진출공은 살해당한다.

 

이후에 지(智)의 당주 지백요(智伯瑤)가 한(韓), 위(魏), 조(趙)의 당주에게 영토를 나누어 달라는 제의를 하게 된다. 그 중 조의 당주 조양자(趙襄子)만이 영토를 주기를 거부한다. BC 455년 지(智)의 당주 지백요(智伯瑤)는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 조(趙)의 당주 조양자(趙襄子)를 치기위해 한의 당주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에게 연합을 요청한다. 조양자는 자신의 옛 성인 진양성(晋陽城)으로 들어가 백성들과 힘을 합쳐서 지백요와 그의 연합군에 대항했으나 사태가 매우 위급한 지경에 놓였다.

 

이때 조양자의 가신인 장맹담(張孟談)은 한강자와 위환자에게 찾아가 면담하면서 지백요를 배반하기를 설득한다. 결국 조양자는 두 당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지백요의 진영을 치게 되었고 지백요는 사로잡혀 죽게 된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기원전 403년에 , , 의 세 나라로 분할되었다. 이 분할로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때도 진나라는 살아 있었다. 그때의 군주는 37대 유공(晉幽公)이었고 몇년뒤 열공(晉烈公) 대에는 위, 한, 조가 정식 국가가 된다. 그렇게 두 마을만 다스리던 진나라 왕실은 정공(晉靜公) 대에 평민으로 강등당해 멸망한다.

 

군주에 대해 진나라는 당숙우에게 봉한 나라로 섭을 거쳐 몇대 후 진정후대부터 조작이 아님을 믿을 수 있다. 활동, 재위 기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진정후 17년은 공화 원년으로 진 정후, 진 이후, 진 헌후를 거쳐 구, 성사에 도읍을 모두 내려준 진 목후가 즉위한다 그후 진후 상숙을 거쳐 진 문후, 진 소후, 진 효후, 진 악후, 진 애후, 소 자후, 진 민후대까지 성사의 후손과 내분이 일어나는데 성사의 손자 칭이 진 민후를 죽이고 군위를 탈취하니 그가 진 무공이다.

 

무공, 헌공, 혜공, 회공을 거쳐 진 문공이 패자로 오른 후 양공, 영공, 성공, 경공, 여공, 도공, 평공, 소공 경공대부터 약해진다. 그후 정공, 출공, 애공 유공부터 신강, 곡옥 두 마을 만 다스린다. 어느 날 진 유공이 부녀자를 간음하며 밤에 도성 밖을 돌아다니다가 강도를 만나 살해당하고 만다. 그후 위문후가 아들 지를 군위에 올리니 그가 열공이다 진 열공 후, 효공을 거쳐 정공 대에 멸망한다.

역대 군주

  1. 당숙우(唐叔虞)
  2. 진후 섭(晋侯燮)
  3. 무후(武侯)
  4. 성후(成侯)
  5. 여후(厲侯)
  6. 정후(靖侯)
  7. 이후(釐侯)
  8. 헌후(獻侯)
  9. 목후(穆侯)
  10. 문후(文侯)
  11. 소후(昭侯)
  12. 효후(孝侯)
  13. 악후(鄂侯)
  14. 애후(哀侯)
  15. 진후 민(晋侯緡, 곡옥의 무공에 살해당한다)

곡옥(曲沃)

  1. 환숙(桓叔)
  2. 장백(莊伯)
  3. 무공(武公, 진후민을 죽이고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4. 헌공 (獻公)
  5. 혜공(惠公)
  6. 회공(懐公)

   7. 문공(晉文公,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28년, 재위 :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

진나라의 제24대 군주이다. 성은 희(姫), 휘는 중이(重耳), 시호는 문공(文公). 진 헌공의 아들이다.문공은 아버지 헌공(獻公) 에게 추방당하여 19년 동안 열국을 유랑하다가 의형(義兄)인 진(秦) 나라 목공(穆公)에 의하여 62세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진나라의 공이 되자 많은 현신(賢臣)을 얻어 먼저 주(周) 나라의 양왕(襄王)을 도와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도록 하였고 잇달아 송의 청으로 인하여 초나라의 군세를 격파시켰다(기원전 632년). 

 

제(齊) 나라의 환공(桓公)과 아울러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패자에 오른 지 3년만에 죽었다. 은원 관계가 철저하여 유랑 시절에 자신을 박대했던 정(鄭), 위(衛), 조(曺) 에게 복수하기도 한다. 기원전 636년 자리에 올라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으며, 각종 개혁정책과 군사활동으로 인해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8. 양공(襄公)

  9. 영공(靈公)

10. 성공(成公)

11. 경공(景公)

12. 여공(厲公)

13. 도공(悼公)

14. 평공(平公)

15. 소공(昭公)

16. 경공(頃公)

17. 정공(定公)

18. 출공(出公)

19. 애공(哀公)

20. 유공(幽公)

21. 열공(烈公)

22. 효공(孝公)

23. 정공(静公)

 

 

 

 

 

초나라

( Chu)는 현재의 후베이성( 湖北省 Húběi Shěng)인 장강( 長江Cháng Jiāng)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 전국칠웅의 하나이다.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대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된다.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린다. 주나라 초기의 작위(爵位)는 자작(子爵) 이었으나, 기원전 704년 무왕(武王)때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하였다. 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223년 (秦)에 의해 멸망 했다.

 

사마천 사기 초세가(楚世家)에 따르면,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顓頊 高陽)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顓頊)은 황제 헌원(黃帝 軒轅)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전욱의 후손 중에 육종(陸終)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축융(祝融)의 동생이며 제곡 고신(帝喾 高辛)때에 화정(火正 ;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吳回)의 아들이다. 육종(陸終)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막내인 계련(季連)이 있는데 성(姓)은 미(羋)로 초나라 왕실의 선조이다. 주문왕(周文王)때에 계련(季連)의 후손중에 육웅(鬻熊)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초나라 웅씨(熊氏)들의 시조이다.

 

죽웅(鬻熊)의 증손자 웅역(熊繹)에 이르러 주 성왕(周成王)은 주나라 건국시 문왕(文王)과 무왕(懋王)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熊繹)의 증조부(曾祖父)인 육웅(鬻熊)이 세운 공로로 웅역(熊繹)을 형만(荊蠻)의 땅에 자작(子爵)의 작위에 봉했으나 그 봉지는 남작(男爵)에 준해서 하사하고 미(羋)라는 성을 내렸다. 웅역은 봉지의 도읍을 단양(丹陽:후베이성 자귀현 동남쪽 고을)에 두었다.

 

주 이왕(周 夷王)때에 이르러 주왕실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웅거(熊渠)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 후베이성 죽산현 서남쪽 고을)과 양오(楊奧, 후베이성 강릉현 일대)에서 악(鄂, 후베이성 악성현 부근)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웅거는 이후 잠시 왕이라 참칭(僭稱)하다가 포악한 여왕(厲王)이 즉위하자 정벌당하는 것이 두려워 왕이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741년에 웅통(熊通)이 초 자작위에 올랐는데 그가 무왕(武王)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濮, 후베이성 한수 부근)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文王)은 도성을 단양(丹陽)에서 영도(郢都)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 송양공(宋襄公)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 하남성 수현 서북)에 소집을하자 성왕(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양공을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 호북성 자귀현 부근의 군소제후국)가 조상인 축융(祝融)과 육웅(鬻熊)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다. 그해 여름 성복(城濮)에서 당진(唐晉)과의 싸움인 성복대전(城濮大戰, 기원전 636년)으로 중원제후국을 대표하는 당진과 남쪽의 새로이 일어난 세력을 대표하는 초 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남 임복향(臨濮鄕)에 있었던 성복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싸움의 결과 진문공(晉文公)의 당진군이 초군을 대파하여 초 나라의 중원진출에 쐐기를 박고 향후 중원의 패권은 당진이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목왕(穆王)이다.

 

기원전 614년 려(侶)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장왕(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때에 이르러 진나라(秦)에 의하여 멸망 하였다.

역대 군주

  1. 웅역(熊繹)
  2. 웅애(熊艾)
  3. 웅담(熊黵)
  4. 웅승(熊勝)
  5. 웅양(熊楊)
  6. 웅거(熊渠)
  7. 웅무강(熊毋康)
  8. 웅지홍(熊摯紅)
  9. 웅연(熊延, 재위 : ? ~ 기원전 848년)
  10. 웅용(熊勇, 재위 :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11. 웅엄(熊厳, 재위 :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12. 웅상(熊霜, 재위 :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13. 웅순(熊徇, 재위 :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14. 웅악(熊咢, 재위 :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15. 약오(若敖, 熊儀, 재위 :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16. 소오(霄敖, 熊坎, 재위 :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17. 분모(蚡冒, 熊眴, 재위 :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18. 무왕(武王, 熊通, 재위 :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19. 문왕(文王, 熊貲, 재위 :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20. 장오(莊敖, 熊囏, 재위 :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21. 성왕(成王, 熊惲, 재위 :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22. 목왕(穆王, 熊商臣, 재위 :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23. 장왕(莊王, 熊侶, 재위 :  기원전 614년기원전 591년)은 초나라의 제 23대 왕이며, 춘추시대의 5패(五覇)의 한 사람이다. 성(姓)은 (羋). 씨(氏)는 (熊). 휘(諱)는 (侶)이다. 초 목왕의 아들로서 진(晋)나라 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역대 초나라 왕 중에 명분을 중시했던 첫 군주였으며 한때 진(陳)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명신 신숙시의 간언을 듣고 독립시켜주었다.

 

 24. 공왕(共王, 熊審, 재위 :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25. 강왕(康王, 熊招, 재위 :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26. 겹오(郟敖, 熊員, 재위 :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27. 영왕(霊王, 熊比囲, 재위 :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28. 평왕(平王, 熊弃疾, 재위 :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29. 소왕(昭王, 熊珍, 재위 :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30. 혜왕(惠王, 熊章, 재위 :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31. 간왕(簡王, 熊中, 재위 :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32. 성왕(声王, 熊当, 재위 :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33. 도왕(悼王, 熊疑, 재위 :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34. 숙왕(粛王, 熊臧, 재위 :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35. 선왕(宣王, 熊良夫, 재위 :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36. 위왕(威王, 熊商, 재위 :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37. 회왕(懐王, 熊槐, 재위 :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38. 경양왕(頃襄王, 熊横, 재위 :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39. 고렬왕(考烈王, 熊元, 재위 :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40. 유왕(幽王, 熊悍, 재위 :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41. 애왕(哀王, 熊猶, 재위 :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8년)

 42. 부추(負芻, 재위 :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오나라

(吳)나라는 주나라 왕실의 일족이 양쯔 강 하류, 지금의 쑤저우에 세운 나라이다. 천자와 동성이라 자부하였으나, 다른 제후국들은 오랑캐 나라라고 부를 정도로 낮추어 여겼다. 춘추오패 중 하나인 합려왕을 배출했으며, 그의 아들인 부차(夫蹉)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이웃 월나라에게 멸망하였다.

 

 

6대 왕 합려의 시대에 가장 강성하였다. 명신, 손무 오자서를 데리고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초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몰고 갔다. 신흥의 월나라를 침범하여 합려는 중상을 입고 아들인 부차에게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후치우에 묻혀 최후를 마친다.

 

다시 힘을 키운 부차 오자서의 보좌를 받아,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는다. 월왕 구천은 패전의 멍에를 지고, 속국으로 예를 다하여, 당시 최고의 미인인 서시 등의 예물을 받치며 사죄를 한다.

 

오자서는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지만, 경계심이 풀어진 부차는 그를 외면하고 오히려 오자서를 자살하도록 만든다.

 

결국 범려의 계략에 말려든 오나라는 기원전 473년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오왕 부차는 자살을 하게 된다.

 

역대 군주

  1. 수몽(壽夢, 재위 :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61년)
  2. 제번(諸樊, 재위 : 기원전 560년 ~ 기원전 548년)
  3. 여제(余祭, 재위 : 기원전 547년 ~ 기원전 544년)
  4. 여매(余昧, 재위 :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27년)
  5. (僚, 재위 : 기원전 526년 ~ 기원전 515년)
  6. 합려(闔閭, 기원전 514년~496년)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제6대 군주이자, 춘추 오패의 1인이다. 이름는 광(光). 신하인 손무, 오자서 등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키고 패권주의를 주창했지만, 월왕 구천에게 패배하여, 부차에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죽는다. 그를 묻은 언덕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후치우(虎丘)라고 불렀다.오자서, 손무 등을 데리고, 초강대국 초나라와 몇 번이나 싸워서 기원 전 506년에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전과를 두었다. 그러나 본국이 월나라에 침략 당하고, 동생 부개가 왕을 칭하고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가까스로 도망친 초왕을 추격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본국에 돌아와 난을 평정했다.기원전 496년, 10년 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월나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월나라의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막혀 패배하고, 다리에 상처를 입고, 사망하게 된다.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부친을 죽였던 것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고,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7. 부차(夫差, 재위 : 기원전 495년 ~ 기원전 473년)

부차의 아버지 합려(闔廬)는 초의 망명 신하 오자서(伍子胥)를 기용하여 기원전 506년 초의 서울 영(?)을 함락시켰는데, 월의 윤상(允常)의 침입에 의해 이후 오·월 다툼이 시작됐다. 합려는 윤상의 사후 월을 공격했지만, 월왕 구천에 의해 참패당하고 그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서약시켰다. 부차는 구천을 기원전 494년 회계(會稽)에서 격파하고 남방을 정복했다. 계속해서 북상하여 기원전 482년 진(晉)을 맹주로 하는 중원 여러 나라를 무력으로 누르고 패자가 되었다. 강남 세력의 중원 진출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지만, 그 사이 월왕 구천은 오의 수도 쑤저우(蘇州)를 공격하여, 기원전 473년에 부차는 구천에게 대패하여 자살하고 오나라는 월에 병합되었다.

 

 

손무(孫武, 기원전 544년경~기원전 496년경)는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이다. 손자(孫子)는 경칭이며, 한국에서는 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손자병법을 지었다.

 

 

손무는 제나라 사람으로 오나라 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합려가 손무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궁녀 180명을 내 주며 훈련시킬 것을 권하자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세워 훈련을 시켰으나 훈련에 따르는 궁녀가 없었다. 그러자 손무는 오왕 합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대장으로 삼은 궁녀를 처형하고 다시 궁녀 중에 대장을 뽑아 훈련하였다. 이에 모든 궁녀가 군대처럼 명령을 따랐다.

 

손무의 저서인 손자병법은 오랫동안 동양의 중요한 병서로 취급되었다. 1910년 대영 박물관의 동양 고서 분야 책임자인 라이오넬 길레가 The Art of War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 출간하였으며, 후에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의해 온라인화되었다.

 

1972년 손자병법의 죽간본이 발굴되어 초기 판본과 후한 이후 추가된 내용을 구분할 수 있는 지표가 마련되었다.

 

손무의 손자인 손빈 역시 《손빈병법》이라는 병서를 제작하였다. 손빈과 손무는 둘 다 손자로 존칭되어 후일 오랫동안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삼국지의 무장이자 오나라의 시조인 손견의 조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손자병법( Sūn Zǐ Bīng Fǎ)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兵法書)로 춘추 시대 오나라왕 합려를 섬기던 손무(孫武)가 쓴 것으로 그동안 널리 알려졌으며, 한편 손무의 손자로서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전략가 빈(孫臏)이 저자라는 설도 있었다. 1974년 4월, 은작산 한나라 무덤에서 엄청난 양의 죽간이 발견되어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 이후의 연구결과, 손무의 기록이 손자병법의 원본이고, 손빈의 것은 제나라의 손빈 병법이라는 것이 현재까지 주류 학계의 추정이다. 한편 손무(孫武)가 지었으나 그의 후손인 손빈(孫殯)에 이르러 완성했다는 설도 있다.

 

손무의 기록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조조가 주해한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손자병법은 다음과 같이 총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시계편(始計篇)
  2. 작전편(作戰篇)
  3. 모공편(謀攻篇)
  4. 군형편(軍形篇)
  5. 병세편(兵勢篇)
  6. 허실편(虛實篇)
  7. 군쟁편(軍爭篇)
  8. 구변편(九變篇)
  9. 행군편(行軍篇)
  10. 지형편(地形篇)
  11. 구지편(九地篇)
  12. 화공편(火攻篇)
  13. 용간편(用間篇)

고사성어 “지피지기 백전불태”를 “지피지기 백전백승” 혹은 “지피지기 백전불패”로 잘못 알고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의미는 비슷하지만, 엄밀히 말해 잘못된 연상에 의하면 서로 다르다.('불태(不殆)'란 위태롭지 않다 라는 뜻이다.)

또 '36計'를 손자병법의 내용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제 1계인 '만천과해(瞞天過海)'를 시작으로 마지막 36번째 계략인 '주위상(走爲上)'으로 끝나는 '36계'는 손자병법의 내용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손자병법을 에독한 사람으로는 소설 삼국지의 등장인물 조조가 있다. (* 특히 조조는 손자병법의 화공계략의 요점만을 엮어 맹덕신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일본 센고쿠 시대의 명장 다케다 신겐와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역시 손자병법을 애독했다.

 

동양 병법서

  1. 손빈병법 손빈(孫臏)이 쓴것으로, 손빈은 손자의 후손이다. 손자병법의 저자가 손빈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1972년 산둥성 임기현에서 '손자병법'과 '손빈병법' 이 두가지의 죽간이 함께 출토됨으로서 각 저자가 다르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2. 오자병법 (오기 저,'무능한 지휘자는 적보다 무섭다'는 말로 유명) 영어명:Wu Qi's Wu-tzu
  3. 육도 (태공망(여상)이 쓴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명:Jiang Ziya (Taigong)'s Six Secret Strategic Teachings
  4. 심서 (제갈량이 쓴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삼략 (황석공 또는 그의 제자 장량 저)
  6. 사마법 (제나라의 장군인 전양자( 사마양) 저)
  7. 위료자 (진시황의 병법가 위료가 지음) 영어명: Wei Liao-tzu
  8. 이위공문대 (이세민(당태종)과 그의 장군 이정(李靖)의 병법 대화기록) 영어명: Questions and Replies between T'ang T'ai-tsung and Li Wei-kung
  9. 황석공소서 (황석공이 그의 제자 장량에게 전한 글이라는 설이 있다.) 영어명:Three Strategies of Huang Shih-kung
  10. 기문둔갑장신술 (헌원황제 이전 시대부터 유래, 당나라 건국때 금서로 정해졌다가 후세에 여러가지 기록을 편집함)
  11. 승폐통변 (사마천 태사공자서에 나오는 병법부분이다.) 영어명:The Methods of the Ssu-ma
  12. 오륜서 (미야모토 무사시, 저 영어명:The Book of Five Rings)

서양 병법서

  1. 전쟁론 ( 클라우제비츠저)
  2. 군주론 (마키아벨리 저)
  3. 전쟁의 예술 (마키아벨리저)
  4. 전쟁의기술 (로버트 그린 저,영어명:The 33 Strategies of War)
  5. Philosophy of war

 

 

오자서(伍子胥, ? ~ 기원전 485년)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자서(子胥)는 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오나라를 섬기고, 오의 약진에 큰 공헌했지만, 점점 오왕과 사이가 벌어져 자결을 명받는다.

 

오자서의 부친 오사는 초나라 평왕의 태자 스승으로, 평왕과 태자의 사이가 나빠지고, 태자가 폐위되면서, 오사와 장남 오상은 평왕에 살해됐다. 홀로 남은 오자서는 복수를 맹세하고, 태자와 함께 정나라로 탈출한다. 정나라로 간 태자는 진나라의 부추김으로 반역을 하려고 했지만, 역으로 살해된다.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과 함께 이번에는 오나라로 도망했다. 오나라로 간 오자서는 오나라의 차남 태자 광(光)을 섬기고, 광의 쿠데타 때에도 협력하여, 광은 즉위를 해서 오왕 합려가 된다.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여 강대국으로 만든 뒤, 기원전 506년에 초나라에 병사를 일으켜, 그 수도를 함락시켰다.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오자서는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원한을 풀었다. 사기 오자서열전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예전의 친구였던, 신포서는 너무 가혹하다고 비난했지만, 오자서는 “나의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리를 역행할 수밖에 없다.(吾日莫途遠,吾故倒行而逆施之。)”고 하였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후, 강대해진 오나라는 패권 야욕으로 , 월나라를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월왕 구천의 참모 범려와 지혜 대결에서 패하고, 오군은 월나라에 대패하게 된다. 이 때의 상처로 합려는 사망하게 된다.

 

합려의 아들 부차가 후사를 잇고, 부왕의 복수를 맹세하면서 오자서도 그를 보좌하였다. BC 494년 월나라와 싸워 대승하게 된다. 이때 오자서는 구천을 죽일 것을 강력하게 주창하지만, 부차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신 백비의 말을 따라 월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것으로 끝을 내었다. 월나라에 대한 지속적인 경계를 강력 주창한 오자서와 중원 진출을 통해 패자를 바라는 부차와의 골을 메꿔지지 않았다. 한편 월나라의 범려는 간자인 서시와 오나라 간신 백비를 사용하여, 부차의 귀에 오자서를 중상모략하게 된다.

 

그 후도 부차는 북으로 계속 출진을 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국력을 급속하게 소모하고 있었다. 오자서는 제나라가 피부병이라면, 월나라는 속병이니, 패권주의를 접고, 내실을 다지도록 진언하지만 부차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재상 백비는 성실하고 정직한 오자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다양한 수단으로 부차의 흥이 깨지도록 부차와 오자서를 이간질한다.

 

이 상태로는 언젠가 월나라에 화를 입을 수 있다고 판단한 오자서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다. 그러나 스스로는 오를 버리지 않겠다고 돌아오고, 이 일이 본국에 돌아온 후에 알려져 문제가 되고, 오자서는 부차로부터 검을 건네받고 자살하도록 명령받는다.

 

그 때, 오자서는 자신의 목을 베어 월나라의 방향의 성문에 걸어두고, 월나라가 오나라를 없애는 것을 보겠다는 저주를 남기고 자결하게 된다.

 

그 말에 격노한 부차는 오자서를 가죽 자루에 넣어 강물에 버린다.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근처에 사당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오자서가 죽은 후, 월나라를 경계한 자가 없어지고, 오는 파멸의 길로 나가게 된다. 오자서의 예언대로 와신상담 구천의 월나라는 오를 쳐서 없앤다. 부차는 국경으로 쫒겨가서 오자서를 믿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자결하게 된다. 사후 1000년 뒤인 당나라 때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다.

 

 

월나라

(越)은 춘추 전국 시대에 있던 나라이다. 무여(無余)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책봉 받았으며, 구천(句踐)왕 때 전성기를 누렸다.

 

월나라의 위치는 오늘날 저장성 사오싱(소흥)이며,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그후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범려 구천을 보좌할 때 가장 세력이 강력했으며, 후에 점점 쇠락의 길을 걸었다.

기원 전 334년 구천의 6대손인 오강왕 때 초나라에 멸망했다.

 

오자서가 지키고 있는 오나라를 반간계와 이간계 등의 책략으로 멸망시킨 월나라는 안정기에 접어들지만, 당시 월나라를 지탱한 두 공신인 범려 문종의 실각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걷는다. 구천의 시기심을 잘 알고 있는 범려는 그를 피해 제나라로 잠적했다. 그러나 문종은 구천의 질투심으로 숙청당하고 만다. 이후, 나라는 조금씩 쇠락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465년 구천이 사망하면서 월나라는 그저그런 나라로 전락한다.

 

기원 전 334년, 구천의 6대손인 무강의 시대에 초나라 위왕의 원정으로 초나라에 패했다. 무강은 초나라의 추격을 받다가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역대 군주

  • 월후 무여(越侯無餘)
  • 월후 무임(越侯無壬)
  • 월후 무역(越侯無譯)
  • 월후 부담(越侯夫譚)
  • 월왕 윤상(越王允常, 재위 : ? - 기원전 497년)
  • 월왕 구천(越王勾践, 재위 : 기원전 496년 - 기원전 464년)

월왕 구천(越王勾踐, ? ~ 기원전 465년, 재위: 기원전 496년 ~ 기원전 465년)춘추시대 최후의 패자. 오왕 합려는 월에 침입했지만 구천은 그를 격파했다. 오왕 부차는 와신(臥薪)하여 2년 후 회계산에서 그를 항복시켰다. 구천은 명신 범려와 상담(嘗膽)하고 기원전 477년 부차를 고소(姑蘇)에서 포위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구천은 북상하여 산둥의 서주에 제후를 모이게 하여 패자가 되었다. 오·월의 싸움은 이 고사를 말한다.

 

  • 월왕 록영(越王鹿郢, 재위 : 기원전 465년 - 기원전 458년)
  • 월왕 불수(越王不壽, 재위 : 기원전 457년 - 기원전 448년)
  • 월왕 옹(越王翁(朱勾), 재위 : 기원전 449년 - 기원전 411년)
  • 월왕 예(越王翳, 재위 : 기원전 412년 - 기원전 375년)
  • 월왕 착지(越王錯枝, 재위 :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73년)
  • 월왕 무여(越王無余(之侯), 재위 :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1년)
  • 월왕 무전(越王無顓, 재위 : 기원전 360년 - 기원전 343년)
  • 월왕 무강(越王無彊, 재위 :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06년)

 

범려(范蠡, ? ~ ?)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정치가, 군인, 자는 소백(少伯). 전하는 말에 의하면 초나라 평왕 20년(BC 517년) 출생이라고도 한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완지(지금의 허난 남양(南阳) 사람으로, 초나라 초기의 가장 유명한 정치가, 군사가, 경제학자였다. 월왕 구천을 섬기고, 구천을 춘추오패에 설 수 있게까지 기여한 공로가 가장 크다.

 

범려가 어디에서 출생하고, 어떻게 월나라에서 벼슬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웃의 오나라의 왕 합려 오자서, 손무의 도움을 받아 국력을 신장하자 패권 경쟁에서 밀리면 곧 멸망하던 시기의 월나라도 국력 신장에 최선을 다한다. 결국 오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침범해 왔지만, 기발한 계책으로 월나라를 패퇴시킨다. 범려는 자살특공대를 조직하여, 적의 눈 앞에서 스스로 목을 베게 한다. 놀라는 오나라 군대를 급습하여 합려를 상처 입히고 오나라 군대를 초토화시킨다. 이 상처로 합려는 결국 죽고 만다. 합려의 사후 뒤를 잇게된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복수의 칼날을 간다. 오나라의 복수를 두려워한 구천은 미리 오나라를 침략하려 한다. 범려의 만류에도 월왕 구천은 출병하여 대패하고 만다. 월왕 구천은 부차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서 신하를 자처하고, 문종은 부차의 측근인 재상 백비(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구천을 살리도록 설득했다. 이 때 오자서는 구천을 죽일 것을 적극 간하지만, 서시와 같은 빼어난 미인까지 받친 월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선에서 끝내고 만다.

 

거짓된 충성심을 보여주고,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범려와 문종의 보좌를 받아, 복수할 저력을 키우면서 밖으로는 부차에 순종적인 모습만 보여줘 방심을 유도 한다. 더욱이 범려는 뇌물을 계속 보낸 백비에게는 부차와 오자서 사이를 이간하도록 유도한다. 결국 부차는 오자서를 죽이게 되고, 월나라 군대는 부차가 출병한 틈을 타 오나라를 급습하여, 황자를 죽이고 4년 후 부차를 궁지에 몰아넣어 자살하게 한다.

 

대업이 달성되어 득의양양 한 구천을 보고 범려는 월나라를 탈출한다. 범려는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새사냥이 끝나면 활이 필요없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게 된다.”(토사구팽)고 이야기를 하며, 월왕은 고난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영광을 같이 누릴 수 없는 상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병을 칭하고 은퇴를 하라고 권유한다. 범려의 편지를 받은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결국 구천에게 반역을 의심받아 자결하였다.

 

월나라를 탈출한 범려는 이름을 바꾸고 장사를 해서, 막대한 부를 얻었다. 범려의 이름을 들은 제나라는 범려에게 재상 자리를 권유하지만, 범려는 고명한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다시 한번 도망을 간다. 제나라를 도망나온 범려는 조나라로 와서 지금의 산동성 도현으로 거처를 옮기고 도주공이라고 칭했다. 여기서도 장사에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얻게 되는데, 늙어서 은퇴하고 유유자적한 노후를 보냈다고 한다. 사기(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전설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