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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 (선진시기 : 주나라(서주,동주))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중국의 역사 4 (선진시기 : 주나라(서주,동주))

두바퀴인생 2010. 2. 13. 00:11

 

 

중국의 역사 4 (선진시기 : 주나라(서주,동주))

 

 

주(周)나라

 

기원전 1046년 경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을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로, 이 시기에 철기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견융(흉노계통민족)이 침략하여 기원전 771년 유왕이 살해되고 제후에 의해 옹립된 평왕이 호경(鎬京, 시안)에서 낙읍(洛邑, 뤄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 이후를 동주라고 구분한다.

 

주나라는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국 초부터 무왕은 자신의 친족들과 태공망 등 개국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눠주며 다스리게 되었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 독립적인 국가를 유지하는 봉건체제가 되었다.

 

춘추 시대의 봉건 국가들은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하며 그 안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다퉜으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은 유명무실화 되었고, 급기야 주나라 왕실이 폐지되고 전국 칠웅의 국가들이 형식상으로도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임을 내세우게 된다.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역대 군주

  • 시조 문왕(文王) 창(昌)
  • 무왕(武王) 발(發)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1043년
  • 성왕(成王) 송(誦) 기원전 1042년 ~ 기원전 1021년
  • 강왕(康王) 쇠(釗) 기원전 1020년 ~ 기원전 996년
  • 소왕(昭王) 하(瑕) 기원전 995년 ~ 기원전 977년
  • 목왕(穆王) 만(滿) 기원전 976년 ~ 기원전 922년
  • 공왕(共王) 예호(繄扈) 기원전 922년 ~ 기원전 900년
  • 의왕(懿王) 간(艱) 기원전 899년 ~ 기원전 892년
  • 효왕(孝王) 벽방(辟方) 기원전 892년 ~ 기원전 886년
  • 이왕(夷王) 자섭(子燮) 기원전 885년 ~ 기원전 878년
  • 려왕(厲王) 호(胡) 기원전 877년 ~ 기원전 841년
  • 공화(共和)[1] 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
  • 선왕(宣王) 정(靜) 기원전 827년 ~ 기원전 782년
  • 유왕(幽王) 궁생(宮湦) 기원전 781년 ~ 기원전 771년

주석

  1. 주려왕(周厲王)이 국인들의 난을 피해 체(彘) 땅으로 도망치자 주공과 소공이 왕 대신에 주나라를 다스렸다. 려왕이 체로 도망간지 14년만에 그곳에서 죽자 주공과 소공이 태자 정 즉 선왕을 왕으로 세웠다. 즉 려왕이 도망간 해인 기원전 841년에서 828년까지의 14년 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공화 원년부터 사기의 연표가 시작되고 또한 중국의 역사 연대가 분명해 지기 시작했다. '공화주의'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나왔다.

 

서주(西周, 기원전 11세기~기원전 771년)

 

수도를 시안에서 뤄양으로 옮기기 전의 주나라를 말한다. 주나라의 판도는 상나라보다 대폭 확대되어 황하 일대에 세력을 미쳤다. 또한 서쪽과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비한족들과의 접촉이 활발하였다.

 

서주는 기원전 771년 내부 반란과 이에 합세한 견융의 침략으로 멸망하였으며, 이 일을 계기로 주나라 왕실은 유명무실해지고, 산하의 제후들이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행세하게 된다.

 

문왕, 무왕과 개국

문왕(文王, ? ~ 기원전 11세기경)은 기원전 12세기 중국 주나라(周)의 창건자인 무왕(武王)의 아버지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 서백(西伯)은 그의 직위이다.

 

유리(羑里)라고 불리는 감옥에서 유교의 고전인 주역(周易)의 괘사(卦辭)를 지었으며, 복희 선천 팔괘를 연역(演易)하여 문왕 후천 팔괘를 지었다. 연역이란 팔괘를 그 이치대로 풀어내는 일을 일컬으며, 주역은 연역에서 비롯하였다.

 

자녀

  • 백읍고(伯邑考)
  • 주 무왕
  • 주공(周公) 단(旦)
  • 소공 석(昭公奭)
  • 화공 고(華公高)
  • 조숙 진탁(曹叔振鐸)
  • 성숙 무(成叔武)
  • 곽숙 처(槨叔處)

주 무왕(周武王, ?~기원전 1043년?)은 주나라의 첫 군주로서, 성(姓)은 희(姫), 이름은 발(發)인데, 둘째였으므로 중발(仲發)이라고 불렀다.

 

다양한 문헌이 그의 죽음을 인용하는데 나이는 다르게 나오며 93세, 54세 또는 43세 때였다고 기록된다. 그는 정의롭고 유능한 지도자로 고려되었다. 주공 단은 그의 형제였다.

 

생애

무왕은 주 문왕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아버지의 유언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상나라의 격파였는데 무왕은 현명한 관료를 등용하였고, 특히 재상으로 강자아(강태공)를 기용하였다. 그는 군사(軍師)였다. 결과적으로 주나라는 강대화되었다.

 

기원전 1048년 무왕은 맹진에서 제후들의 회합을 요청하고 800명 이상의 제후가 참석하였다. 기원전 1046년에는 상나라 정부가 파탄상태가 되고 무왕은 많은 인접 제후와 함께 공격을 시작하였다. 무예의 전투에서 상나라 군대는 파괴돠었고 상나라의 주왕(紂王, 제신)은 궁을 불태우고 분사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무왕은 중국을 통일했으며 그의 형제와 장군들의 많은 제후국을 세웠다. 그는 즉위 3년 후 기원전 1043년에 사망하였다.

 

가족 관계

  • 아버지 : 서주 문왕
  • 어머니 : 태사(太姒)
  • 아내 : 읍강(邑姜) - 여상(강태공)의 딸.
  • 아들 : 희송(姬誦)
  • 아우 : 주공 단

 

 

원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부 제후국으로, 황하가 굽어 올라가는 상류 지역인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의 남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부는 구릉지대, 서부.중부는 고원지대,남부의 사막과 황화 남쪽 기슭의 평원 지역으로 구성된 지역)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나라의 주왕 시절, 주나라의 문왕은 상의 서쪽 제후들에 대한 총 책임권을 가지고 있던 서백의 지위에 있었다. (그의 이름인 희창(姬昌)을 붙여 '서백 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주왕의 폭정으로 상나라의 인심은 흉흉하였고, 서백 창은 주왕의 측근으로 주왕에게 반역하는 다른 제후들을 여러차례 평정하는 등 공을 세웠다. 부하들은 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고, 백성들도 그를 따랐으나 서백 창은 끝까지 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다가 고령으로 죽게 된다.

 

그러나 서백 창의 태자인 희발(무왕)은 아우인 희단(주공 단)과 현자인 강태공 등과 더불어 상(은)나라 주왕에 반역할 뜻을 세우고 비밀리에 군사를 모았다. 즉위 9년, 드디어 반역의 준비가 끝난 희발은 반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아버지인 희창의 위패를 모시고 황하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널 수 있는 나루터인 맹진까지 원정하였다. 강태공은 총사령관이 되어 제후를 소집하였고, 수많은 제후들이 모여 상(은)나라 주왕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때 무왕의 진지에는 두 가지의 길조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로 맹진을 도하하는 무왕의 배에 상나라를 상징하는 흰 물고기가 날아들어 무왕은 그것을 잡아 제사지냈다. 둘째로 강 상류에서 불길이 일더니 그것이 무왕의 앞에서 빨간 까마귀로 변했다. 빨간색은 주나라의 상징색으로, 이 또한 앞서와 마찬가지로 큰 길조였다. 이러한 길조에도 불구하고, 무왕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제후들을 해산시켰다. 점을 통해 길흉을 따지는 상나라의 전통과 달리 무왕은 길조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 군대를 물린 것이다.

 

2년 후, 무왕은 다시 문왕의 위패와 함께 주왕에 대한 2차 반란을 일으켰다. 무왕의 군대는 은허의 남쪽인 목야에 도착했고, 상나라 주왕도 마지막 여력을 짜내어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이때 주나라 무왕의 진영에 있던 점쟁이가 갑골로 점을 쳤는데, 이번에는 저번과 반대로 큰 흉조가 나타났다. 이때 강태공은 이를 무시하고 길흉의 점과 상관없이 전투에서 이기면 된다고 주장해, 무왕의 원정은 계속되었다.

 

목야에서 무왕은 상나라 병사들을 향한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는데, 후처인 달기의 말만 듣고 정사를 멀리하는 상나라 주왕을 탓하고, 하늘이 뜻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혔다. 이에 상나라 군대의 많은 수가 흔들렸으며, 결국 목야의 싸움은 주나라 무왕의 대승으로 끝난다.

 

전투에서 패한 상의 주왕은 자살했으며, 은허에 입성한 주의 무왕은 주왕의 시체에 활을 세 번 쏘고 검으로 벤 후 효수하여 하얀 깃발 위에 높이 내걸었다. 이어 후궁으로 들어가 달기를 비롯한 주왕의 후비들을 벤 후, 이 역시 상나라를 상징하는 하얀 깃발 위에 걸었다. 장엄한 입성식이 끝난 후, 무왕은 주나라의 개국을 선언하였으며, 강태공, 주공 단 등의 공신들을 포상하여 강태공은 제나라, 주공 단은 노나라에 봉했다. 주왕의 태자인 녹부에게도 온정을 베풀어 작은 땅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삼황오제 하나라의 후손들도 작은 영지에 봉하였다.

 

초기 혼란기

주나라를 개국했던 무왕은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개국공신이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 희단이 무왕의 아들인 성왕을 보좌하여 국정을 이끌어간다. 왕조 초기에 어린 왕이 등장함으로써 상나라의 유신들이 반역할 염려도 있고, 춘추 좌씨전에 나온 것처럼 무왕의 일가친척으로 영주에 봉해진 자가 40명에 이르는 등 불안한 상황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나라 주왕의 태자였던 녹부가 자신의 감시역이자 무왕의 형제였던 희선, 희탁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 단은 연나라의 시조이자 일가였던 소공 희석과 연합하여 녹부를 토벌하는 토벌군을 파견했다. 개국 공신인 강태공이 이를 이끌었으며, 반란을 일으킨 지 3년이 되어 드디어 녹부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녹부와 희선은 주살되었으며, 기타 녹부에 협력했던 자들은 모두 쫓겨났다.

 

하지만 주공 단은 상나라의 제사는 유지되길 원하여 녹부의 동생인 미자개를 송나라에 봉했으며, 상나라의 유신들을 송나라에 모여 살게 하였다.

 

주공 단이 성왕을 대리하여 통치한 지 7년, 성왕이 성인이 되자 희단은 성왕이 직접 통치하도록 하고 물러났다.

 

팽창기

초기의 혼란을 지나 안정기에 접어든 주나라는 본격적인 팽창을 시작하게 된다. 성왕의 손자인 4대 소왕 시대에는 허난 성 지방에 있는 묘족(마오족, 동남아시아 민족)이 공물을 진상하였다. 소왕의 아들인 목왕 때에는 원래 주나라의 기원이었던 서방 지역에 대한 팽창에 집중했다. 목왕은 전설의 서방 군주인 서왕모(중국 신회에 나오는 여신, 곤륜산에 산다고 함)를 만나고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왕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서북쪽의 이민족인 견융을 공격하여 그들의 흰 꿩, 흰 여우, 흰 사슴 등을 잡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런 외정의 소득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지출 때문에 점점 주나라의 재정은 열약해져갔다. 목왕의 손자인 7대 의왕에 대해 사기는 "왕실 드디어 쇠락하여 시인, 풍자하는 시를 짓다."라고 적고 있다. 의왕의 뒤를 이은 자는 숙부인 효왕이었는데, 효왕의 다음은 다시 의왕의 아들인 이왕이 이어 정치적인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

 

여왕과 공화기

이왕의 아들인 10대 여왕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주나라의 재건에 힘쓰려 했다. 강력한 중앙 통제를 시행하여 재정의 건실화를 추구했으며, 형법을 제정하여 불안한 치안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이에 대해 백성들의 불만이 일게 되자, 여왕은 옛 상나라 출신의 무당을 불러들여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사기는 이런 상황을 보고 "백성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며, 도로에서 눈으로 대화한다."고 표현했다. 여왕의 재건정책이 빛을 보기 전에 백성들이 불만이 폭발하여 결국 여왕은 쫓겨나고,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은 '공화기'로 남게 된다. 여왕이 반란군 때문에 도읍을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여왕이 궁을 도망간 후, 정치는 주공 단과 소공 석의 후손이었던 두 재상이 맡아 다스렸으며, 여왕이 망명지에서 죽은 후, 여왕의 아들이 선왕으로 등극한다. 이 14년간을 '공화'라는 명칭으로 부른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죽서기년에 따르면, 공나라의 화라는 자가 14년간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공화'라고 불렀다 한다. 하지만 여씨춘추 등에 따르면, 여왕의 정치가 가혹했기에, 공화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높았다고 한다. 이후 이 표현은 왕정에 반대되는 체제를 뜻하는 공화주의라는 표현에 쓰이게 된다.

 

미녀 포사와 천도

여왕의 아들인 선왕이 등극한 후 주나라는 서방 민족과의 대결에 들어간다. 선왕 39년, 티베트 계통의 강족과의 전쟁에서 주나라 군대는 크게 패했다. 선왕은 백성의 호구 조사를 실시하여 전쟁의 패배를 극복하고 국가 재건을 노력했으나, 빛을 보지 못하고 재위 46년 만에 죽었다.

 

그런데 선왕의 뒤를 이은 유왕은 포사라는 미녀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유왕에게는 원래 정부인 신씨에게서 낳은 태자가 있었지만, 포사가 온 뒤로는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삼고, 원래 태자를 폐하였다. 포사는 무척 미인이었지만 웃는 일이 없어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고민했다. 하루는 왕궁에서 실수로 봉화를 올린 일이 있었다. 이민족의 습격을 받은 지 오래 지나지 않은지라 각지의 제후는 서둘러 전쟁 준비를 갖추고 왕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실수로 봉화가 올려졌다는 것을 깨달은 제후들은 허탈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 때 포사가 이를 보고 크게 웃었고, 유왕은 그 뒤로도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봉화를 몇 번 올리게 된다. 이 때문에 주나라에 대한 제후들의 신뢰가 크게 떨어진다.

 

한편 유왕이 포사만 감싸고 정치를 소홀히하자, 유왕의 정부인 신씨의 친정은 하나라의 후손인 증, 이민족인 서이, 견융과 더불어 왕궁을 습격했다. 유왕은 다급하여 봉화를 올렸으나 봉화를 보고 달려온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기원전 771년, 유왕은 여산(驪山) 근처에서 반란군에게 죽게 되고, 포사의 아들이자 태자였던 백복도 살해당했다.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신, 증 등의 제후들은 신씨의 아들이자 원래 태자였던 의구를 옹립했고(평왕), 낙양으로 천도하니 이로써 서주 시대가 끝나고 동주 시대, 즉 춘추 시대가 시작되었다.

 

시경은 서주의 마지막 군주인 유왕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백성들, 토지를 가지면 그대 그것을 빼앗고,
백성들 노예를 가지면 그대 그것을 빼앗는다.
죄가 없음에도 그대는 죄 있다 하고,
죄 있을 때 그대는 이를 용서한다.
현명한 남자는 나라를 일으키고
현명한 여자는 나라를 기울게 한다.
아아 그 여자 올빼미가 되고 접동새가 된다.
여자가 말 잘하는 것은 재앙의 사다리
재난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다.
여자로부터 생긴다.

이는 유왕의 부덕한 정치를 탓하는 동시에, 유왕의 후처였던 포사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포사는 올빼 접동새처럼 목소리가 나쁜 새로 비유되었다.

 

 

주공(周公, 주공 단)은 주나라의 정치가로,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이며, 노(魯)나라의 공(公)으로 봉해졌다. 주로 주공단이라고 불린다.

 

공자 논어 술이편(述而篇)에 따르면 “나도 많이 늙었구나, 이토록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다니!”(子曰甚矣吾衰也久矣吾不復夢見周公)라고 말할 정도로 주공을 숭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주공은 팔괘의 효(爻)를 창안하여 역경을 완성했으며 《주례(周禮)》를 썼다고 하나, 현대의 학자들은 주례를 익명의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역경은 유학의 사경 중 하나로 세계의 변화와 원리를 기술한 책으로 주역이라도 한다. 그 내용은 태극.음양.사상.팡괘로 나누는데, 태극은 삼라만상을 움직이게 하는 끝없는 우주의 순환원리이다. 이를 인격화하면 신이다. 음양은 태극을 다시 음과 양으로 나누는데, 양이란 하늘.남자.밝음.태양.위.강함.정신.불.선이며, 음이란 땅.여지.어둠.달.아래.부드러움.육체.물.악으로 구분한다. 사상은 태양.태음.소양.소음으로 나누는데 태양은 양에서 양으로, 태음은 음에서 음으로, 소양은 음에서 양으로, 소음은 양에서 음으로 변화와 흐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제마가 체질의학론을 발전시킨 사상의학이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중국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기년(紀年), 급총기년(汲塚紀年)이라고도 한다. 황제(黃帝)의 시대로부터 위(魏)나라 양왕(襄王)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저술되어 있으며, 저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죽서기년》은 《좌전》, 《사기》와 더불어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주요 사서 중 하나이다.

 

《죽서기년》은 한대(漢代)에는 대체로 흩어져 있었으나 서진(西晋) 시대인 279년 현재의 하남성(허난성)에서 위나라 양왕의 무덤이 도굴되었는데 이로부터 문자가 기록된 많은 양의 죽간(대나무 책)이 나와 나라에서 이를 옮겨 정리하였다. 대나무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죽서기년'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죽서기년》에는 《사기》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들이 있어서 이를 근거로 《사기》의 연표의 오류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죽서기년》은 북송대에 다시 흩어졌고, 중화민국의 시기에 인용된 문헌으로부터 《죽서기년》의 복원이 시도되었다. 이를 '고본(古本) 죽서기년'이라 부른다.

 

명대에 별도로 《죽서기년》이 출현하였으나 원본과 달라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를 '금본(今本) 죽서기년'이라 부른다.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고대 중국의 거상이자 (秦)의 재상인 여불위가 전국의 논객들과 식객들을 모아 짓게 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총 26권 160편으로, 연감에 해당하는 기(紀) 12권, 보고서에 해당하는 람(覽) 8권, 논문에 해당하는 론(論)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불위는 이 책을 의 수도 함양 저잣거리에 전시해 놓고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다면 천금을 주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 때문에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강족은 챵족이라고도 하며 약 2만년 전부터 현재의 칭하이 성 일대에서 거주하던 종족이다. 기원전 61년 이전에는 흉노족의 지배를 받았으나 한무제 시대 평정되어 7개 현을 설치되어 한족에 유입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중원이 혼란한 틈을 타서 요장이 강족을 이끌고 중국을 침공하여 후진(384-417년)을 세워 한족을 무참하게 살륙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지난번 대지진이 발생하였던 쓰촨 성 서부 지방에 약 20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포사(褒姒, 보우시, 사기에는 襃姒라고 전해진다.)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770년)경에 주나라 유왕의 황후로 활약하였다. 절세의 미녀로 언급되며 후에 주나라의 멸망의 원흉이 되었다. 생일과 사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하나라 말년에, 두 마리의 이 왕궁에 나타나 스스로를 "포나라의 두 임금이다"라고 하면서, 타액(침)을 뱉어놓고는 사라졌다. 사람들이 점을 쳐 본 결과 보관해두면 길할 것이다(藏之吉)라는 점괘가 나와 사람들은 그것을 나무 상자에 고이 보관하였다. 주나라 려왕(厲王) 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그 상자를 열고는 그 안을 관찰하였다. 조심하지 않아 용의 침을 조정 밖으로 흐르게 하였더니, 용의 침이 갑자기 검은 도마뱀으로 변하여 왕부 안을 돌아다녔다.  한 소녀가 이 검은 도마뱀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 소녀가 40년 만에 여자 아이를 하나 낳았다. 소녀는 이 아기를 갖다버렸다. 포나라(褒國) 사람이 이 아기를 거두어 집에서 길렀다. 포나라 사람은 이 여인을 주나라 유왕(幽王)에게 바쳤는데, 그녀가 바로 포사였다.

 

주나라 유왕은 포사에 빠졌다. 포사는 유왕의 총희가 되었으며, 아들 백복(伯服)을 낳았다. 하지만 포사는 웃음이 없었다. 주나라 유왕은 포사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했다.

 

주나라 유왕은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려산(驪山)(산시 림동, 陝西臨潼) 앞에 소집하였다. 제후들은 황망히 려산 앞에 달려왔으나, 봉화가 적의 침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포사는 이 광경을 보고 단순호치(丹脣皓齒)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이후, 주 유왕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는 백복(伯服)을 태자로 세웠다. 신후(申后)는 그 아들과 함께 외가 신국(申國)(허난 남양북, 河南南陽北)으로 급히 떠났다.

 

기원전 771년, 신후(申后)의 아버지 신후(申侯)가 려(呂) 등의 나라와 연합하여 견융족(犬戎)과 함께 호경(鎬京)으로 대거 진공해왔다. 주 유왕은 다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이 봉화가 또 거짓인 줄 알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견융족의 병사가 주나라 유왕을 살해하였다.

 

포사는 그들의 포로로 잡혔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자결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여상,태공망,강태공(呂尙, ?~?)

중국의 인물로 기원전 11세기 무렵 위수 곁에서 살았다. 이름이 상(尙)이며, 그의 선조가 여나라에 봉해져 여(呂)씨를 성으로 삼았다고 하여 여상이라고 부르며, 자(字)는 자아(子牙)다. 주 문왕의 선왕인 태공이 바라던 사람이기 때문에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姜太公)이라고도 불린다.

 

주 무왕의 봉건 영주로서 살았고, 주 문왕이 매우 야심이 많았고 그리하여 그를 발탁하였다. 주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오늘날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흔히 강태공이라고 부른다.

 

생애

강상, 곧 태공망 여상은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동해상(東海上) 사람으로 동이(東夷)의 선비[士]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 동해상은 당시에는 제나라, 오늘날에는 산둥 반도 지역이다.

 

강상은 위수(渭水)가에서 낚시를 하며 지냈으며, 미늘 있는 낚싯바늘 대신, 미끼를 쓰지 않고 미늘도 없는 바늘을 사용하였고, 그렇게 70세에 주 문왕이 그를 발탁할 때까지 소일하며 지냈다.

 

주 문왕은 주나라의 기업을 반석에 올려놓을 인물을 찾고 있었다. 어느날 사냥을 가려고 거북점을 쳤는데 희한한 점괘가 나왔다. 잡히는 것이 용도 범도 아니고 그렇다고 곰도 아닌, 패왕(覇王)을 도울 인물이라는 점괘였다. 이러한 점괘를 얻은 뒤 사냥을 나간 주 문왕은 위수 강변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나눠 보니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주 문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렇게 말했다.

 

“선왕인 태공(太公) 때부터 ‘성인이 나타나 도울 터이니 주나라는 그 사람 때문에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그대야말로 바로 그 성인이십니다.”

 

그러고는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다.

 

주나라의 정치를 맡은 강상은 주 문왕과 그의 아들 주 무왕을 도와 역성혁명에 성공하였고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제(齊)나라의 후(侯)로 봉해졌다. 그의 병법서 《육도삼략》은 고대 중국의 7가지 병법서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그의 7대손(증손의 현손) 여적(呂赤)은 증손 혜(傒)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산동의 노(盧)나라가 주어졌다. 그가 노(盧)씨의 시조가 되었다.

 

 

가족 관계

  • 아들 : 강급(姜伋, 제 정공(齊丁公))
  • 딸 : 읍강(邑姜)
  • 사위 : 주 무왕

봉신연의

중국 소설 《봉신연의》에서는 본명은 강자아이며, 곤륜산의 도사가 되어 신선들의 살겁을 깨기 위한 봉신을 주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선계전 봉신연의》에서는 본래 중원의 소수민족으로서 은나라의 침입으로 가족들과 형제들을 잃고 길거리를 배회하게 되나, 원시천존에 의해 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주 문왕에게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비법들을 가르친다. 그 후에 그는 주나라의 훌륭한 관리가 된다.

 

 

 

 

동주(東周)

 

기원전 771년서주의 유왕이 견융(흉노)의 침공으로 호경이 함락되고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제후들이 평왕을 옹립하였고 평왕이 수도를 호경(시안)에서 낙읍(뤄양)으로 옮긴 이후의 주나라를 말한다. 동주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힘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을 명목상으로만 남겨둔 채, 독립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 때가 춘추 전국 시대이다.

 

 

정나라와의 전쟁

정나라는 서주 선왕의 동생인 정 환공으로부터 시작된 제후국으로, 이제 개국한 동주 왕실과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환공은 유왕의 재상이었으며, 평왕은 환공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당숙인 정 무공을 재상으로 삼았다. 정나라는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이제 왕실과 혈연관계가 약해진 다른 제후국과 달리 가까운 혈연관계로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으며, 왕실 근처에 자리잡고 있어 왕실을 대신해 태산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 무공은 50년에 다다른 평왕의 치세를 보좌해 동주의 초기의 기반을 다졌다.

 

평왕의 뒤는 손자인 희임이 이어 환왕이 되었다. 정 무공도 평왕을 20여년간 보필한 후 죽고, 그의 아들 장공이 대를 이어 평왕을 보좌하다가 이제 환왕을 보좌하게 되었다. 하지만 혈기 왕성한 환왕은 이미 오랜 기간 동안 동주 왕실의 핵심 세력이 된 정나라 세력을 탐탁치 않게 여겨 다른 친척 제후국인 괵나라 세력을 중용했다.

 

이러한 왕실 내의 세력변화는 정 장공에게 좋지 않았으며, 장공은 노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주 왕실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노나라 내에 있는 태산 근처의 땅을 노나라에게 양도하는 대신 정나라 내에 있는 노나라 영토를 병합했다. 이것은 정나라가 주 왕실의 재상 자격으로 태산에 제사지내러 가는 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으며, 이는 환왕의 분노를 샀다.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환왕은 자신이 중용한 괵나라를 비롯, 진(陳), 채(蔡), (衛)의 군사를 소집해 정나라를 토벌하기로 했다. 정 장공은 제중(祭仲), 고거미(高渠彌)를 파견해 이를 맞아 싸워 대승을 거뒀다. 이 때 장공의 부하 중 축첨(祝瞻)이 쏜 화살이 환왕의 팔에 맞았다. 정 장공은 공격을 중지시키며 "윗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꺼려지는 일인데 하물며 천자를 능멸할 수는 없는 일이다."며 사신을 보내 환왕의 부상을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동주 왕실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역대군주

  • 평왕(平王) 의구 (宜臼) 기원전 770년 ~ 기원전 720년
  • 환왕(桓王) 림(林) 기원전 719년 ~ 기원전 697년
  • 장왕(庄王) 타(佗)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2년
  • 리왕(釐王) 호제(胡齊) 기원전 681년 ~ 기원전 677년
  • 혜왕(惠王) 랑(閬) 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2년
  • 양왕(襄王) 정(鄭) 기원전 651년 ~ 기원전 619년
  • 경왕(頃王) 임신(任臣) 기원전 618년 ~ 기원전 613년
  • 광왕(匡王) 반(班) 기원전 612년 ~ 기원전 607년
  • 정왕(定王) 유(瑜) 기원전 606년 ~ 기원전 586년
  • 간왕(簡王) 이(夷)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72년
  • 영왕(靈王) 설심(泄心) 기원전 571년 ~ 기원전 545년
  • 경왕(景王) 귀(貴)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21년
  • 도왕(悼王) 맹(猛) 기원전 520년
  • 경왕(敬王) 개(丐) 기원전 519년 ~ 기원전 478년
  • 원왕(元王) 인(仁) 기원전 477년 ~ 기원전 469년
  • 애왕(哀王) 거질(去疾) 기원전 441년
  • 사왕(思王) 숙(叔) 기원전 441년
  • 고왕(考王) 외(嵬) 기원전 442년 ~ 기원전 426년
  • 위열왕(威烈王) 오(午)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02년
  • 안왕(安王) 교(驕)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76년
  • 열왕(烈王) 희(喜) 기원전 375년 ~ 기원전 369년
  • 현왕(顯王) 편(扁) 기원전 368년 ~ 기원전 321년
  • 신정왕(愼靚王) 정(定) 기원전 320년 ~ 기원전 315년
  • 난왕(赧王) 연(延) 기원전 314년 ~ 기원전 256년

 

멸망

전국시대가 되면서 주 왕실은 유명무실해졌으며, 등의 국가는 왕호를 칭하게 되었고, 진 혜문왕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주 왕실의 권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기원전 249년 진나라의 장양왕(진시황의 아버지)의 군대가 동주를 침공하여 주나라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