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3 (선진시대 : 상(은)나라)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중국의 역사 3 (선진시대 : 상(은)나라)

두바퀴인생 2010. 2. 12. 06:36

 

 

중국의 역사 3 (선진시대 : 상(은)나라)

 

상(商)나라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국민을 잔혹하게 다룬 31대 상나라 주왕(紂王)이며, 주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인정되었다.

 

 

역대 군주

 

상나라 왕의 선조

상나라 왕의 선조
묘호 칭호 성명
설(契) 자설(子契)
소명(昭明)
상토(相土) 자상토(子相土)
창약(昌若)
조(曹)
명(冥) 자명(子冥)
고조(高祖) 왕해(王亥) 자해(子亥)
왕항(王恒) 자항(子恒)
상갑미(上甲微) 자미(子微)
보을(報乙)
보병(報丙)
보정(報丁)
시임(示壬)
기종(夔宗) 시계(示癸)

상나라 역대 왕(천자)

 

상나라 역대 임금(천자)
차수 묘호 시호 성명 사기명' 갑골문자 재위기간
1대 태조
(太祖)
태무왕
(太武王)
자리
(子履)
(湯) 당, 대을
(唐, 大乙)
기원전1600년~기원전1589년
2대 애왕
(哀王)
자승
(子勝)
복병
(卜丙)
외병
(外丙)
기원전1588년~기원전1587년
3대 의왕
(懿王)
자용
(子庸)
중임
(仲壬)
기원전1586년~기원전1583년
4대 태종
(太宗)
문왕
(文王)
자지
(子至)
태갑
(太甲)
대갑
(大甲)
기원전1582년~기원전1571년
5대 소왕
(昭王)
자순
(子絢)
옥정
(沃丁)
기원전1570년~기원전1542년
6대 선왕)
(宣王)
자변
(子辯)
태경
(太庚)
대경
(大庚)
기원전1541년~기원전1517년
7대 경왕
(敬王)
자고
(子高)
소갑
(小甲)
기원전1516년~기원전1500년
8대 원왕
(元王)
자밀
(子密)
옹기
(雍己)
기원전1499년~기원전1487년
9대 중종
(中宗)
경왕
(景王)
자주
(子伷)
태무
(太戊)
대무
(大戊)
기원전1486년~기원전1422년
10대 효성왕
(孝成王)
자장
(子莊)
중정
(中丁)
중정
(中丁)
기원전1421년~기원전1401년
11대 사왕
(思王)
자발
(子發)
외임
(外壬)
복임
(卜壬)
기원전1400년~기원전1386년
12대 전평왕
(前平王)
자정
(子整)
자정
(子整)
전갑
(戔甲)
기원전1385년~기원전1377년
13대 목왕
(穆王)
자등
(子滕)
조을
(祖乙)
차을
(且乙)
기원전1376년~기원전1358년
14대 환왕
(桓王)
자단
(子旦)
조신
(祖辛)
차신
(且辛)
기원전1357년~기원전1342년
15대 희왕
(僖王)
자유
(子踰)
옥갑
(沃甲)
강갑
(羌甲)
기원전1341년~기원전1337년
16대 장왕
(莊王)
자신
(子新)
조정
(祖丁)
차정
(且丁)
기원전1336년~기원전1328년
17대 경왕
(頃王)
자경
(子更)
남경
(南庚)
기원전1327년~기원전1322년
18대 도왕
(悼王)
자화
(子和)
양갑
(陽甲)
상갑
(象甲)
기원전1321년~기원전1315년
19대 세조
(世祖)
문성왕
(文成王)
자순
(子旬)
반경
(盤庚)
반경
(般庚)
기원전1314—기원전1287년
20대 장왕
(章王)
자송
(子頌)
소신
(小辛)
기원전1286년~기원전1252년
21대 혜왕
(惠王)
자렴
(子斂)
소을
(小乙)
기원전1251년
22대 고종
(高宗)
양왕
(襄王)
자소
(子昭)
무정
(武丁)
기원전1250년~기원전1192년
23대 후평왕
(後平王)
자약
(子躍)
조경
(祖庚)
차경
(且庚)
기원전1191년~기원전1148년
24대 세종
(世宗)
정왕
(定王)
자재
(子載)
조갑
(祖甲)
차갑
(且甲)
기원전1148년
25대 갑종
(甲宗)
공왕
(共王)
자선
(子先)
늠신
(廪辛)
기원전1148년
26대 강조
(康祖)
안왕
(安王)
자효
(子囂)
경정
(庚丁)
강정
(康丁)
기원전1148년
27대 무조
(武祖)
열왕
(烈王)
자구
(子瞿)
무을
(武乙)
기원전1147년~기원전1113년
28대 광왕
(匡王)
자탁
(子托)
태정
(太丁)
문정
(文丁)
기원전1112년~기원전1102年
29대 덕왕
(德王)
자선
(子羡)
제을
(帝乙)
기원전1101년~기원전1076년
30대 주왕
(紂王)
자수
(子受)
제신
(帝辛)
기원전1075년~기원전1046년
*주:
  1. 모든 연대는 기원전 1046년까지 근사치이다.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상나라의 지도

 

 

황제(黃帝)는 중국 전국 시대 이후로 문헌에 등장하는 오제(五帝) 중 첫번째 제왕(帝王)으로, 삼황(三皇)에 이어 세상(중국)을 다스렸다고 설명된다.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라고도 부른다. ‘황제(黃帝)’의 명칭은, 제위시 황룡이 나타나 토덕(土德)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도교의 시조로도 추앙받고 있으며,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황제헌원씨의 왕후는 서릉씨(西陵氏)이다.

 

한대의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인 《사기》에 의하면, 소전(少典)의 아들로 이름을 헌원이라 하며, 치우를 물리치고 신농에 이어 제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4명의 제왕(전욱, 제곡, 요, 순)이 황제의 자손으로 설명되었고, 또한 ···의 시조와 이후의 많은 제후들이 그 자손이 되어 중국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청대 말기에 혁명파가 황제가 즉위한 해를 기원으로 하는 '황제기원(黄帝紀元)'을 사용하여 청나라 왕조에 대항하는 의식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황제는 중국 의학의 시조로도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랜 의학서인 《황제내경소문(黄帝内經素問)》, 《황제내경령추(黄帝内經靈樞)》도 황제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瓉次郎), 이이지마 타다오(飯島忠夫)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자녀

  • 현효(소호금천씨) - 제곡의 조부
  • 창의 - 제전욱(전욱고양씨)의 부

 

문헌상의 기록

 

사기

황제가 중국의 역사로서 등장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오제본기>가 최초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염제 신농과 그 제후들, 치우를 물리치고 천자(天子)가 되었다.
  • 산을 개간하고 길을 통하게 하였다.
  • 탁록 아래의 평원에 도읍을 정했다.
  • 보정(寶鼎)과 신책(神策)을 얻었다.
  • 오곡을 심어 백성을 돌보았다.
  • 제사 의식을 연구하였다.

그밖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각 사료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박자

포박자(抱朴子)》에 따르면, 청구(靑邱)에서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한다.

 

시조로서의 황제

오늘날에도 공손씨, 희씨, 헌원씨 등은 황제를 직접 시조로 받들고 있다. 한국의 변(邊)씨 또한 헌원을 시조로 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초기에는 왕이 군사 훈련시 황제 헌원에 마제를 지냈다.

 

저서

여러 책의 저자로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저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도가

《황제사경(黃帝四經)》 4편, 《황제명(黄帝銘)》 6편, 《황제군신(黄帝君臣)》 10편, 《잡황제(雑黄帝)》 58편

  • 신선

《황제잡자보인(黄帝雑子歩引)》 18권, 《황제기백안마(黄帝岐伯按摩)》 10권, 《황제잡자지균(黄帝雑子芝菌)》 18권, 《황제잡자십구가방(黄帝雑子十九家方)》 21권

  • 천문

《황제잡자기(黄帝雑子気)》 33편

  • 오행

《황제음양(黄帝陰陽)》 25권, 《황제제자론음양(黄帝諸子論陰陽)》 25권

  • 잡점

《황제장류점몽(黄帝長柳占夢)》 11권

  • 의경

《황제내경(黄帝内經)》 18권, 《황제외경(黄帝外経)》 37권

  • 경방

《신농황제식금(神農黄帝食禁)》 7권

  • 방중

《황제삼왕양방(黄帝三王陽方)》 20권

 

 

걸왕(桀王)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포악하고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걸왕은 원래 주변을 정복하는 스타일의 군주였다. 한번은 현재의 산둥성 쪽에 있는 유시(有施)를 공격했는데, 때문에 유시는 약탈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유시의 사람들은 걸왕의 공격을 돌리기 위해 매희(妹喜)라는 아름다운 여자를 진상했다. 그 이후 걸왕은 정사를 뒤로하고 매희와의 사치에만 빠졌다.

 

매희는 유시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걸왕의 사치를 부추겼다. 하루는 걸왕이 전국에서 잡아들인 소녀들과 춤판을 벌인 후 술을 한 잔씩 하사했다. 각지에서 잡아온 여자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술을 따르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 이에 매희는 일일이 술을 따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므로, 술로 연못을 만들고, 연못 둘레에 고기의 숲을 만들어 즐기자고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주지육림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공사가 끝난 후 걸왕은 매희와 함께 술로 만든 연못에 배를 띄운 후, 나무에 고기가 매달려있는 모습을 보며 무희들의 춤을 구경하엿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매희는 3천 명의 궁녀를 모으고, 각각의 궁녀들에게 오색 자수의 옷을 입히자는 제안을 해, 각처에서 여자와 옷감, 기술자가 징발되었다.

 

충신이었던 관용봉(關龍逢)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용기를 내어 간언했으나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 또 다른 충신이었던 이윤(伊尹) 역시 걸왕에게 간언하려다가 겨우 죽임을 모면하였다. 하나라의 제후이자 제후의 우두머리 격인 방백(方伯)이었던 은(殷)의 탕(湯) 역시 백성들을 위해 걸왕에게 여러 차례 올바른 정치를 진언했지만, 오히려 다른 이들처럼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가 진상품을 바쳐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일이 있은 후 걸왕의 옛 부하인 이윤과 탕을 따르는 제후들이 걸왕을 쫓아낼 것을 건의하였고, 탕 역시 이를 받아들여 전국에 걸왕 토벌의 포고를 내걸었다. 걸왕은 이를 막을 수 없어 도망가는 도중에 살해당했으며, 탕은 왕위에 올라 상나라의 시조인 탕왕이 되었다.

 

 

 

탕왕(湯王)은 전설상의 신인 황제(黃帝)의 후손으로 상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하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충신이었던 이윤(伊尹) 역시 걸왕에게 간언하려다가 겨우 죽임을 모면하였다. 하나라의 제후이자 제후의 우두머리 격인 방백(方伯)이었던 은(殷)의 탕(湯) 역시 백성들을 위해 걸왕에게 여러 차례 올바른 정치를 진언했지만, 오히려 다른 이들처럼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가 진상품을 바쳐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일이 있은 후 걸왕의 옛 부하인 이윤과 탕을 따르는 제후들이 걸왕을 쫓아낼 것을 건의하였고, 탕 역시 이를 받아들여 전국에 걸왕 토벌의 포고를 내걸었다. 걸왕은 이를 막을 수 없어 도망가는 도중에 살해당했으며, 탕은 왕위에 올라 상나라의 시조인 탕왕이 되었다.

 

 

달기(妲己, ?~?)는 성은 소씨로 소달기라고 한다. 기주 출신의 황후로 기주가 은나라에 의해 토벌될 당시에 기주후의 딸로 입궁하여 주왕의 총애를 얻었다. 주무왕의 형을 몰래 살해하고, 강황후와 황숙 비간을 죽게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기주후 소호(蘇護)의 딸로 얼굴이 아름다운 덕분에 주왕의 2번째 황후가 된다. 전설에 의하면, 달기가 얼굴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우에게 영혼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포락형, 채분형(사굴)등의 공포정치와 국민들을 나체로 뜨거운 철판에 뛰도록 하는 등 매우 비인간적인 정치를 하였다. 훗날 주나라가 침략하자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고 한다.(혹은 무왕의 부하에게 직접 살해당했다.)

 

주 무왕(周武王, ?~기원전 1043년?)

주나라의 첫 군주로서, 성(姓)은 희(姫), 이름은 발(發)인데, 둘째였으므로 중발(仲發)이라고 불렀다.

 

다양한 문헌이 그의 죽음을 인용하는데 나이는 다르게 나오며 93세, 54세 또는 43세 때였다고 기록된다. 그는 정의롭고 유능한 지도자로 고려되었다. 주공 단은 그의 형제였다.

 

생애

무왕은 주 문왕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아버지의 유언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상나라의 격파였는데 무왕은 현명한 관료를 등용하였고, 특히 재상으로 강자아를 기용하였다. 그는 군사(軍師)였다. 결과적으로 주나라는 강대화되었다.

 

기원전 1048년 무왕은 맹진에서 제후들의 회합을 요청하고 800명 이상의 제후가 참석하였다. 기원전 1046년에는 상나라 정부가 파탄상태가 되고 무왕은 많은 인접 제후와 함께 공격을 시작하였다. 무예의 전투에서 상나라 군대는 파괴돠었고 상나라의 주왕(紂王, 제신)은 궁을 불태우고 분사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무왕은 중국을 통일했으며 그의 형제와 장군들의 많은 제후국을 세웠다. 그는 즉위 3년 후 기원전 1043년에 사망하였다.

 

가족 관계

 

아버지 : 서주 문왕

  • 어머니 : 태사(太姒)
  • 아내 : 읍강(邑姜) - 여상(강태공)의 딸.
  • 아들 : 희송(姬誦)
  • 아우 : 주공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