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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 (선진시대: 하나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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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 (선진시대: 하나라)

두바퀴인생 2010. 2. 11. 09:11

 

 

중국의 역사 2 (선진시대 : 하나라)

 

(夏)나라

중국에서 처음으로 상(商)나라 이전 수백 년 간 존재했다고 기록된 나라이다. 그 연대는 중국의 역사연구사업인 '하상주단대공정에 의해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까지로 추정되었다.

 

고고학적으로 그 존재가 입증되지는 않아 그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으나,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꾸준히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이리두 유적의 발굴 작업과 사료 검토를 통해 중국 사학계에서는 하나라의 존재가 인정되고 있다. 하나라는 우임금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상나라 탕왕에게 멸망했다.

 

 

역대 군주

  • (禹) : 하나라의 개국 군주로, 요순임금의 하나인 순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였다.
  • 계(啓)
  • 태강(太康) : 고분죽서기본에 의하면, 짐심으로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우왕의 손자이지만, 우왕과는 달리 사치에만 힘을 써 백성의 신망을 잃었다. 태강이 부하들과 사냥을 나간 사이, 하나라의 제후였던 유궁(有窮)의 후예라는 자가 반역하여 도성을 점령하였다. 태강은 몸을 피하여 주변의 제후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고 쫓기는 인생을 살다가 죽는다.
  • 상(相) : 태강의 아들로 태강이 죽은 후, 제구(帝邱)에서 하나라의 유신들에게 왕으로 옹립된다. 그러나 후예의 토벌로 성이 포위되었을 때 자살한다.
  • 중강(中康) : 태강의 동생으로, 후예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후예와의 권력다툼 끝에 왕위에서 쫓겨난다.
  • 후예(后羿) : 원래는 하나라의 제후로 궁술의 명인이었다. 태강이 민심을 잃자, 그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 도성을 점령하고 태강의 동생 중강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중강은 후예의 부하인 희화를 쫓아내고, 백봉(伯封)이라는 제후를 이용해 후예를 견제하려 했다. 이렇게 중강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 자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후예는 중강을 쫓아내고 직접 왕위에 올랐으며, 백봉 등 중강을 지지했던 제후들을 탄압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백봉의 어머니이자 천하의 미인인 현처(玄妻)를 왕비로 삼았다. 현처는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야심가인 한착을 끌여들였다. 현처는 한착과 정을 통해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세상이라고 넋을 놓고 있던 후예를 죽이고 한착을 왕으로 세웠다.
  • 한착(寒浞) : 원래는 후예의 부하이나, 후예가 왕이 된 후 정사를 돌보지 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현처와 공모하여 후예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20여 년을 다스렸으나, 상의 아들인 소강에게 살해당한다.
  • 소강(小康) : 상이 죽었을 때 임신한 상태였던 상의 왕비는 자신의 친정인 유잉(有仍)으로 피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소강이다. 소강은 아직도 남아 있던 하나라의 유신들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며, 성인이 되고나서 군사를 일으켜 한착을 죽이고 하나라의 왕실을 복구한다.
  • 저(杼)
  • 괴(槐)
  • 망(芒)
  • 설(泄)
  • 불강(不降)
  • 경(扃)
  • 근(厪)
  • 공갑(孔甲)
  • 고(皐)
  • 발(發)
  • (桀) :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포악하고 사치스러웠다. 충신이었던 이윤의 간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상나라의 시조인 탕왕에게 토벌되어 죽는다.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중화인민공화국의 고대사(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연구 작업이다. 이는 제9차 5개년계획의 공정 중 하나로, 구체적인 연대가 판명되지 않은 중국 고대의 삼대(하·상·주)에 대하여 구체적인 연대를 확정하였다. '공정'은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진행

공정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중국 고대사의 연도는 문헌자료로 알려져 있는 주나라의 공화원년(기원전 841년)부터로 여겨졌다.

 

공정은 1995년 가을부터 준비가 시작되어, 1995년 5월 16일에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 공정에는 약 200명의 전문가가 참여하였다. 1999년 9월에는 '하상주단대공정단계성과학술보고회'가 열렸다. 2000년 9월 15일의 '하상주단대공정항목검수회'에서 그 내용이 정부에 의해 점검되어, 2000년 11월 10일에 공정의 수석과학자 4인을 중심으로 하여 발표되었다.

 

연구 방법

공정에는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천문학은 갑골문이나 문헌자료의 일식, 월식, 행성의 위치 등의 기록을 조사하여 계산된 천문학적인 현상과 비교, 실제로 일어난 시기를 산정하였으며, 고고학은 발굴된 유적, 특히 왕후의 분묘 등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하였다. 문헌학은 문헌자료의 역법의 차이를 조사하여, 상호 모순을 발견, 신빙성을 판단하였다.

 

공정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 기원전 2070년경, 하나라가 건국되었다.
  • 기원전 1600년경, 하나라가 상나라로 교체되었다.
  • 기원전 1300년경, 반경(盤庚)이 은허에 천도하였다.
  • 기원전 1046년, 상나라를 대신하여 주나라가 건국되었다.
  • 상나라 왕 반경으로부터 제신(帝辛)까지의 대체적인 연대를 확정하였다.
  • 주나라 왕의 재위연대를 구체적으로 확정하였다.

국가적 규모의 연구로서 시작한 하상주연표이나,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의 고양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동북부 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련하여 2002년 초부터 2004년 초까지 변강사지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실시된 연구 작업을 뜻한다. 정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다. 동북공정은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에 의한 국책 사업이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다.

 

논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국사를 왜곡한다는 논란이 제기되며 특히 고구려사에 관해서는 민감히 다뤄지는데, 1950년에서 1980년 사이에는 중국학계가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중국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워, 중국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국가들, 가령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활동이 더욱더 노골적이고 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인 중국은 중국을 이루는 모든 민족과 영토의 역사를 모두 중국사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말한다. 중국은 최근 만리장성이 동쪽까지 뻗어 있다고 발표했지만, 이것은 만주까지 중국영토였다는 동북공정의 그럴듯한 논리가 숨어 있다.

 

동북공정 과제별 분포

동북아역사재단 《스트래티지21》(2006년 겨울호)에서 밝힌‘중국의 동북공정과 한국의 대응’논문의 과제별 분포

한국고대사 한중관계 동북지방사 중-러 관계 한반도 문제 기타 합계(단위: 개)
33(30%) 18(17%) 27(25%) 18(17%) 5(5%) 6(6%) 107(100%)

 
 
'동북아 역사재단' 동북공정 관련 내용

1. 동북공정’이란?

동북공정은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에 소속된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2002년 2월부터 2007년 1월말까지 5년간 실시한 연구사업이다. 원래는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라는 긴 이름인데,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의 역사, 지리, 민족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국가적인 사업이다. 여기서 동북 3성은 중국 영토의 동북 지역에 해당하는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의 3성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역사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려고 실시한 사업이 동북공정이다.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홈페이지(http://chinaborderland.cass.cn)에 게재된 ‘동북공정 소개(東北工程簡介)’를 보면, 동북공정의 과제는 ‘연구류’, ‘번역류’, ‘공문서자료류’의 3대 시리즈로 나누어진다.

연구류는 다시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로 세분된다. 기초 연구는 학문적 이론 연구를 의미하고, 응용 연구는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ㆍ발해 등 특정 역사와 강역의 귀속 문제, 그에 따라 제기될 수 있는 국경ㆍ영토 분쟁, 외교 관계, 문화 관광 전략 등 현실적으로 파생되는 문제들을 말한다. 번역류는 남북한, 러시아, 일본, 서양의 관련 연구성과의 번역, 러시아 학자의 극동지역 역사지리 연구논저 요약, 남북한 학자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 고고지리 연구논저 요약, 남북학자의 한중관계사 논점의 번역과 평론을 포함한다. 그리고 공문서 정리 작업으로 동북변강 관련 공문서 사료 정리, 동북변강, 한ㆍ중, 중ㆍ러, 중ㆍ몽관계 공문서 목록정리, 동북변강 역사지도 수집정리 및 연구, 동북변강 관련 사진의 수집 정리 및 연구가 있다.

동북공정 과제 수행을 위한 지침을 살펴보면, 고대 중국의 강역에 대한 이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사 연구, 한중 관계사 연구, 중국 동북변강과 러시아 극동지역의 정치·경제 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 안정에 대한 전략적 연구, 한반도 형세 변화가 중국 동북변경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등 우리의 고대사에서부터 현재와 미래에 관계된 모든 문제들이 총 망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동북공정의 선정과제는 110개였다. 중국에서 관련 자료를 전혀 발표하지 않아, 2005년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004년까지의 선정 과제 가운데 고조선사 2개, 고구려사 9개, 발해사 8개, 간도와 한중 국경문제 4개, 한반도 문제 1개와 번역과제 10과제 등이었고, 그 외에도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 반 이상이 한국사와 관련된 항목이었다.

2. 지금까지 출판된 동북공정 결과물

동북공정의 110개 입항 과제 가운데 지금까지 22개 과제의 결과물이 출판되어 나왔다. 연구과제가 16개, 자료정리 6개가 과제이다. 이 가운데 일부는 연구총서로 발간되었고, 일부는 홍콩아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중국사회과학원 직영 출판사인 중국사회과학출판사에서 ‘동북변강연구총서’ 시리즈로 『고대 중국고구려사 속론』을 비롯한 9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길림인민출판사에서 『간명고구려사』를 비롯한 6종 8책이 발간되었다. 이외에 홍콩아주출판사에서 『당대발해국오경연구』, 흑룡강인민출판사에서 『이십세기중국동북변강문화연구』등이 출간되었다. 이로 보아 향후에도 각 지역 출판사에서 개인 학자들의 연구결과물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3. ‘동북공정’의 경과

동북 3성 지역을 무대로 전개되었던 역사에는 고구려사, 고조선사, 부여사, 발해사가 있고,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의 역사가 있다. 이 땅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일에 대해 연구를 하는 것이니 이 왕조들의 역사가 모두 동북공정의 연구대상이다. 또 이 역사들로부터 연결되어 일어난 현대사나 앞으로 일어날 미래사도 다루었다. 한반도의 정세가 동북 3성지역에 사는 조선족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북한과 남한이 통일을 할 경우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들도 연구한다. 이 지역은 북한, 러시아와 국경이 닿아 있기 때문에 국경과 관련된 일도 연구대상이 된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과 중국 사이에 국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게 무슨 문제는 없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 하는 점들과 통일한국이 성립할 경우 간도 땅을 둘러싼 문제는 어떻게 되는지 하는 것들도 연구대상이다. 즉 동북 3성지역의 고대사부터 시작해서 현대사, 그리고 미래사까지 모두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이 동북공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동북공정이란 이름보다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공작’, 또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동북공정 사업 초창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이 고구려사였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만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유독 고구려사왜곡이 가장 인상깊게 다가왔던 것은 우리 민족이 고구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주적이고 당당했으며,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던 강한 나라였다. 그래서 고구려는 우리 민족에게 언제나 꿈과 환상을 가지게 해준다. 우리민족에게 자부심을 가지게 해주는 고구려사를 중국에서 난데없이 자기들 역사라고 하니 우리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온 국민이 중국측의 주장에 강력하게 항의를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문제는 전국을 뒤흔들었고, 급기야 정부에서 직접 나서서 중국측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다. 중국 정부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모르는 척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마침내 2004년 8월에 두 나라의 외교부 대표가 만나, 이 문제를 학문적인 차원에 한정하고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포함한 구두양해 각서를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한중 양국 구두양해 5개항



1.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간 중대 현안문제로 대두된 데 대해 중국측이 유념하고 있다.

2. 양측은 향후 역사문제로 인해 한중간 우호협력 관계가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1992년 8월의 한중수교 공동성명 및 1993년 7월 양국 정상간 공동성명에 따라 전면적인 협력-동반자 관계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3. 양측은 한중 협력관계라는 커다란 틀 아래서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서 고구려사 문제가 정치화하는 것을 방지하는 노력을 한다는데 공동인식을 같이한다.

4. 중국측은 중앙 및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고구려사 관련기술에 대한 한국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감으로써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5. 양측은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위해 노력하면 학술교류와 양국국민의 이해증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한다.


이로 인해 동북공정은 최초의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수합된 결과물을 출판하는 일도 주춤하게 되었고, 한반도의 정세변화와 관련된 문제도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도 동북공정식 인식을 담은 연구논문들은 계속 나왔고, 동북공정식 논리는 퍼져 갔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항의를 하면 중국측에서는 지방의 학자들이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라 막기가 곤란하다고 답변하곤 했다.

이에 노무현대통령이 중국측에 다시 이 문제를 지적하게 되었다. 2006년 9월 10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한 노무현대통령이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가진 회담석상에서 노대통령이 “(동북공정문제는) 양국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필요한 조치를 조속히 취해달라.”고 촉구했고, 원자바오총리도 “양국간 (2004년 8월) 합의사항을 존중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 13일(금)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추진 중인 동북공정에 대해 우회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즉 노무현대통령은 “이 문제가 한-중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도록 사려깊은 조처를 취해 달라”고 후진타오 주석에게 요구했고, 후진타오는 “2004년 8월의 구두양해사항이 반드시 이행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동북공정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중간 중간 동북공정 관련 책이 출간되었다거나, 고구려유적지인 용담산성의 표지판, 집안 박물관의 머릿돌, 오녀산성사적박물관의 페널, 호산산성 박물관의 지도, 성산산성의 표지석, 일부 대학교재 등에 동북공정식 내용이 담겨있다고 하는 언론보도가 나와 우리들을 긴장시키곤 했다. 그리고 2007년 들어와 동북공정은 종료되었다.
 
4. 왜 지금도 동북공정을 이야기하는가?
 
동북공정은 연구비를 나눠주고 연구를 진행하게 한 다음 그 결과물을 수합해 출간하는 사업이다. 따라서 사업기간이 종료되었다는 것은 연구비를 지급하는 일이 끝났다는 것이지, 그와 관련된 제반 일들이 모두 완료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관련 연구사업은 종료가 없다. 진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도 불구하고 유교 관련 서적을 완전히 없앨 수도, 유학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번 세상에 나온 역사서는 없앨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연구물들은 전공자들로부터 비판을 받든, 지지를 받든 관계없이 어쨌든 선행연구로서 계속 읽혀지게 된다. 역사연구에서는 선행연구 자체가 자료가 되고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일단 출간이 되고 나면 검토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결과물들은 신진연구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순수하게 학문적인 차원에서만 진행되었든, 아니면 현재와 미래의 한반도 상황에 대비한 전략적 포석이었든 관계없이 동북공정은 이미 학문적 차원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제는 주최측의 원래 의도와 관계없이 동북공정 자체가 스스로 진화되면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동북공정으로 인한 문제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55개 소수민족과 한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통일적다민족국가로서의 중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동북공정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도 동북공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5. ‘동북공정’, 그 이후

연구기간이 종료된 지금 동북공정과 관련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중심기관이 이동되었다. 변강사지연구중심 대신 동북지방에 여러 개의 관련 연구기관이 새로 생겨나거나 기존 연구기관을 확대 개편하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3성 가운데 고구려와 발해 유적이 가장 많은 길림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통화사범학원이 고구려 관련 연구를 집중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통화사범학원에는 길림성사회과학원에서 2003년 7월에 설립한 ‘고구려연구기지(高句麗硏究基地)’가 있고, 2006년 1월 기존의 고구려연구소를 확대 개편한 ‘고구려연구원(高句麗硏究院)’이 있다. 또 2006년 10월에 고구려, 발해사와 동북민족강역사를 집중연구하기 위한 ‘고구려?동북민족연구중심(高句麗?東北民族硏究中心)’도 설립되었는데, 이 기관은 길림성의 대학 인문학연구기지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 연구기관들에는 이 대학 교수진 12명이 속해 있다. 고구려 유적 현장 가까이 있는 만큼 오랫동안 고구려 관련 연구를 진행해왔으므로 동북사범학원은 고구려사 연구, 동북사연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동북공정식 주장을 확산하는데 현재 가장 핵심센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학술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이다. 이 잡지사는 2004년 8월에 길림성이 신설한 ‘길림성 고구려연구중심(吉林省高句麗硏究中心)’에서 운영하고 있다. ‘길림성 고구려연구중심’에서는 고구려 등 변강사지 연구의 중요문제 기획 및 중점과제 확정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밖에 요녕성사회과학원에서 2002년 11월 대련대학에 설립한 ‘중국동북사연구중심’에서도 동북지역의 고고 발굴 및 문화재, 고구려사, 발해사, 동북민족사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동북 3성 지역에는 동북역사 및 민족관련 연구기관들이 다수 있는데, 이 기관들에서도 동북공정 실시이래 고구려사 연구를 많이 진행하고 있다. 요컨대 변강사지 연구중심에서는 동북공정 사업을 종료했지만 동북공정식 인식을 담은 연구는 지방정부 기관이나 대학으로 옮겨져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길림성위원회가 건의하여 통과된 ‘길림성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제11차 5개년 계획 요강’에는 ‘중화명산 장백산’, ‘세계문화유산 집안 고구려 유적’ 등 길림성의 풍부한 자원을 활용하여 관광산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 담겨 있다. 관련 유적지의 관광지 개발작업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표지판 등을 통해 동북공정식 인식이 일반 중국인들에게 더 많이,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다.

중국의 일반인들은 고구려나 발해 관련 유적지의 안내문이나 박물관의 설명문, 유적지 안내원들의 설명, 인터넷에 올라오는 관련 기사 등을 통해 동북공정식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한중간의 역사 갈등의 단편적인 내용만 알게 된다. 이에 따라 동북공정식 주장의 역사적 근거의 취약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조건적으로 자민족중심주의 경향을 드러내며 이를 혐한류의 방향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다. 이는 향후 한중간 역사갈등을 더욱 비화시킬 우려가 있다.

역사전문가들의 손을 떠나 일반인들에게 확산된 동북공정은 비학문적, 비상식적인 방향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학문분야에서의 내용전개에 관계없이 자기분열을 일으키며 중국인들에게 잘못된 한국사관, 동아시아역사관, 세계사관을 고착시킬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전문가들끼리의 논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동북공정식 역사관은 논리적 근거와 관계없이 이미 중국인들에게 확산되어 그들의 역사인식을 왜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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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문화] 중국이 고구려사에 이어 발해사까지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외교적 대응과 학술적 대응을 병행하겠다고 6일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선언과 달리 외교·학술 어느 분야에서도 구체적이고 신속한 대응책이 보이지 않아 너무 미온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규형 외교통상부 제2차관은 이날 정례브리핑을 통해 “정부는 중국과의 역사문제에 대해 외교적으로 대응할 부분은 분명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며 “동북아역사재단 등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한 학술적 성과를 축적해나가는 노력도 병행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차관은 또 “정부는 우리 역사를 왜곡하거나 영토주권을 침해하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여타 사안과 연계시키지 않고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대처해 왔으며 중국과의 역사문제도 예외가 아니다”면서 ““동북아역사재단이 (문제가 된) 중국측 자료를 입수해 분석중인데 그 내용이 나오는대로 우리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지 검토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 차관은 그러나 실제 어떤 외교적 대응 조치를 준비하고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학술적 대응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 외교부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학술 성과가 나오면 후속 조치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동북아역사재단은 아직 조직 구성이 이뤄지지 않아 출범조차 못한 상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5일 김용덕(62) 서울대 사학과 교수를 이사장으로 선임했을 뿐 이사진을 구성하지 못했고,주요 직책도 대부분 공석으로 남아 있다. 또 재단 등기조차 마치지 못해 법적으로 재단이 출범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 재단 출범을 주도하는 대통령 직속 바른역사기획단과 이 재단에 흡수되는 고구려연구재단 직원들은 5일에야 상견례를 가졌다. 동북공정 연구를 담당할 제2연구실의 경우 연구실장도 정해지지 않았고 제1·3연구실은 연구원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다.

동북아역사재단 한 관계자는 “이사장만 임명되고 아직 재단 구성을 마치지 못했다”며 “어제 상견례를 가진 조직에 대응방안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동북공정에 대한 구체적인 대처방안을 묻는 질문에 “고구려연구재단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학술적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며 “하지만 외교부 등 정부 쪽에서 먼저 대응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 19일 국회 통과된 ‘동북아역사재단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발족한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과의 고구려사 갈등과 일본과의 역사교과서 및 독도 갈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자는 목적을 띠고 있다. 3개의 연구실을 비롯해 모두 6개실 12개 팀으로 구성되는 이 재단은 정부로부터 매년 200억원 가량을 보조금 형식으로 지원받을 예정이다. 국민일보 김남중·남혁상 기자
 
 
늘어난 만리장성, 동북공정 의도
 입력 : 2009.05.02 03:13 / 수정 : 2009.05.02 16:17 조선, 유재석 기자
 
산해관 以東은 역사적 근거 희박 동쪽끝 고구려성 자리에 가짜유적
중국 국가문물국과 국가측량국은 지난달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길이가 종전(6300㎞)보다 더 길어진 8851.8㎞라고 발표했다. 얼핏 '장성이 더 길어졌구나' 정도로 넘길 수 있는 발표지만 여기엔 한국 고대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가 숨어 있다. 무슨 얘길까?

중국 정부 발표를 보면 장성은 동쪽으로 랴오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 북쪽 호산(虎山)부터 간쑤성(甘肅省) 가욕관(嘉�l關)까지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10개 성 156개 현을 지난다. 이 중 인공(人工) 장성은 6259.6㎞이고 나머지는 자연(自然) 장성이다.

중국 발표는 '명대(明代)의 만리장성'에 대한 조사였다. 우리는 장성을 기원전 3세기 말 진시황(秦始皇)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장성은 명(1368~1644) 때 축조된 것이다.

중국이 2004년 압록강과 인접한 단둥시 북쪽 호산에 새로 만들어 놓은‘호산장성3. 고구려 박작성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된 곳이지만 중국은 한국어 간판까지 걸어 놓으며 마치 이곳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 서길수 교수 제공
이번 발표는 기존의 상식과 다르다. 서쪽 끝은 가욕관으로 같지만 동쪽 끝이 압록강변까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동쪽 끝을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시(秦皇島市)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으로 보았다.

'위략(魏略)'에는 진시황이 장군 몽염(蒙恬)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닿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장성이 압록강까지 이르렀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이후 명나라 때 여진족을 막기 위해 산해관 동쪽으로 요동변장(遼東邊牆·요동 변경에 세운 담)이라 불린 방어막을 쌓았다.

하지만 만리장성처럼 석성(石城)으로 쌓은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명나라 이후 최근까지 그것을 장성의 일부라고 여긴 사람도 없었다. 중국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1982년의 탄지샹(譚其��) 책임편집 '중국역사지도집' 7권을 찾아보니 산해관 동쪽의 요동변장은 장성(長城)이 아니라 호원(壕垣·도랑과 담)으로 표시돼 있었다. 거기에 성이 없었다는 것을 중국 스스로 시인했던 것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의 영역을 표시하는 상징적 의미가 강했다. 1990년대 이전까지 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산해관은 '관내(關內)'와 '관외(關外)'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한(漢)문화의 영향이 미쳤던 '원래 중국 땅'이 산해관 서쪽 '관내'였으며 '관외', 즉 만주는 중국 땅이 아니었던 곳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압록강에 맞닿은 단둥 호산에는 베이징의 팔달령을 방불케 하는 웅장한 규모의 장성이 세워져 있다. 최근 중국이 장성 동쪽 기점이 이곳임을 알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곳은 정말 '만리장성의 동단(東端)'이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박작성(泊灼城)' 항목에서 '현재 단둥시 동북쪽의 호산산성에 비정(比定)된다'고 해 놓았다. '비정'이란 '옛 지명과 현재의 지명을 1대1로 연결해 추정한다'는 뜻이다. 고구려 산성인 박작성은 서기 648년 당태종(唐太宗)의 침략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성이었다.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1998년 이곳에 와 보니 깊이가 11m가 넘는 대형 우물이 있었는데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었다"며 "지금까지 압록강 하구 일대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산성이 바로 이곳"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원래 이곳에는 명나라 때의 봉화대가 있었지만 장성은 없었고 요동변장의 끝도 훨씬 북쪽인 봉성(鳳城·옛 고구려 오골성) 일대였다"고 했다. 중국측이 만리장성을 압록강까지 닿게 하기 위해 '가짜 유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2004년 이곳에 '호산장성'을 증축하고 '호산장성 역사박물관'을 새로 만들면서 고구려 박작성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을 훼손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물관 안에는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는 설명을 붙였을 뿐 아니라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이어 그린 지도도 전시했다.

왜 중국은 그런 일을 한 것일까? 노기식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1990년대 중국에서 국경 문제를 연구하는 변강학(邊疆學)이 대두하면서 동북쪽 변강학자들이 요동변장을 만리장성에 포함시켰다"며 "이제는 중국에서 요동변장과 만리장성이 별개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했다.

동북쪽 변강학자들은 동북공정의 주체였다. 호산장성 역사박물관이 문을 연 2004년 5월은 중국 당국이 지안(集安) 고구려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역사 왜곡에 힘쓰던 시기였다.

노 위원은 "요동변장의 만리장성 편입은 요동은 물론 만주까지 원래 중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명나라가 변장 너머 만주에 있던 여진족까지도 확고하게 통치를 했다는 것을 넘어서서, 조선 초기 북진 정책을 통해 확보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까지도 '원래 명나라 땅이었다'는 논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이번 발표에 대해 "오래전에 논리개발이 끝난 '만리장성 동단 연장론'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요동과 만주가 역사적으로 유구한 중국의 영토라는 강변은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통째로 가져가려는 동북공정의 논리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