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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6 (선진시기 : 전국시대) 본문
중국의 역사 6 (선진시기 : 전국시대)
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년부터 진(秦)이 중국 통일을 달성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며, 그 시기의 이야기가 주로 《전국책(戰國策)》에서 보여지므로 전국시대라 불린다.
개요
전국시대는 진(晉)나라의 대부 조(趙), 위(魏), 한(韓) 3가문이 주(周)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시작되었다. 한·위·조가 후(侯)라고 칭했다는 것은 단순히 하극상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고, 주왕이 이를 인정하고 스스로 종법제(宗法制)를 무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중요하다. 이윽고 강력한 제후는 왕을 칭하게 되어 이 때에 명실공이 주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봉건제도가 붕괴해 버린 것이다. 얼마 후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향해 제각기 왕을 칭하였다.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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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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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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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춘추시대 초에 140여 개국이었던 도시국가의 거의 모두가 이 때에는 7개 강대국의 어느 한 영토에 편입되어 버렸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였으며 문후(文侯)·혜왕(惠王)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음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서 비로소 진·초·연·제·한·위·조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어졌다. 그 중 진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소위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4군(君)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전국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전국시대가 되자, 사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인다. 그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이 때까지는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將軍)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에 의해서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서주(西周)로부터 춘추시대에 걸쳐서는 정치·군사 양면에 있어서 대부가 세습적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전국시대가 되자 정치·군사가 분리되고 저마다의 책임자가 필요에 따라서 군주에 의해서 임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주권(君主權)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官僚軍)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진에서는 다른 나라의 출신자까지도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했다. 내정개혁을 단행한 상앙,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시황제의 승상이 된 여불위(呂不韋) 등이 모두 다 그러했다. 춘추 말기에 나온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그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하나하나의 나라를 초월하여 공통된 문화·사상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자기의 영지(領地)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던 대부 계층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또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이 변동기의 자극을 받아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 국경을 초월한 대상인의 활발한 교류로 국경을 넘어 몇몇 나라에 판로를 가진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판매하여 큰돈을 벌었다.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상업 수공업자들의 재산은 때로는 왕후(王侯)와도 필적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일이 통관세(通關稅)를 필요로 하는 국경(國境)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국경이 없는 중국의 통일을 이면에서 촉진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대상인들이 전국을 유세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분립한 강국이 대립·항쟁하는 반면에 있어서는 문화, 경제의 면에서 이미 중국을 하나의 세계로서 성립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춘추시대의 후반 이래, 청동기의 명문(銘文) 같은 장식성(裝飾性)이 강한 문자(文字)에는 지방색(地方色)이 엿보이지만, 평소에 죽간(竹簡) 등에 씌어진 문자에는 상당히 통일성이 엿보이는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기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달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사회의 일대 변혁 및 눈부신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이 시기에 있어서의 생산력의 현저한 발달이었다. 이 생산력의 발달 요인은 춘추시대에 시작된 우경(牛耕)의 보급과 전국시대에 보급된 철제농구의 사용이었다. 철제농구 이전의 농구는 거의가 석제나 목제였으며, 그것은 토질이 부드러운 황토지대에서의 경작에는 그런대로 쓸 수가 있지만 수목을 베어내고 새로 경지(耕地)를 일굴 때는 극히 비능률적인 농구였다. 이 곤란을 타개하며 개간을 용이하게 하고 심경(深耕)에 의한 토지의 생산력을 증대시켜 준 것이 철제농구이며, 그 사용을 계기로 농업은 놀랍게 진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시대의 전반(기원전 6, 7세기경)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이때 제나라 동종(銅鐘)의 명문(銘文)에 ‘제철 노예 4천명’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영 제철사업은 꽤 대규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괭이, 삽, 가래 같은 농구의 주조는 전국시대에 들어와서 발달된 것 같다. 우경과 철기가 보급되어 생산이 부국강병의 근본으로 장려되자 이제까지 돌보지 않던 황무지까지 개척되며, 그로 인하여 관개용 수로나 제방을 쌓는 토목공사가 일어났는데, 이것도 또한 철기에 의지하게 되어 농업생산은 한층 더 발달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전국 칠웅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제사를 끊으면 나라의 조상으로부터 저주받는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하게 멸해 버리는 일은 그만큼 많지 않고, 또 멸망해도 부흥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용서가 없어져, 한번 전쟁에 지는 일은 나라의 멸망에 직접 연결되었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점차 7개의 대국들이 강자로 부상되어 갔다. 그 7개의 나라 진, 조, 위, 한,제, 연, 초를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부른다.
진나라(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는 중국의 왕조이다. 주나라,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기원전 206년에 멸망 했다. 왕실의 성은 영(嬴), 통일 시의 수도는 함양이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제31대 왕인 영정이 모든 나라를 멸망하고 통일하여 황제(皇帝)의 위에 오르면서 중국 최초로 제국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조나라(趙-,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는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서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위나라, 한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북쪽엔 연나라와 붙어있고 남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있다. 호복(胡腹, 통소매와 바지)을 채용하였고, 중국에 처음 기마전술을 도입한 나라이기도 한다. 갑병 수십만과, 전차 천승, 말(馬) 만필을 낼 수 있었다. 기원전 222년 진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한다. 도읍인 한단(邯鄲)은 상공업의 대중심지였다.
위나라(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는 전국 시대의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토지가 사방 일천 리에 달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나라이다. 갑병 20만과 창두(蒼頭) 20만, 말 오천 필을 낼 수 있었다.
한나라(韓,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은 전국시대의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晉)에서 분리된 나라이며, 위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영토는 북쪽으로는 지금 중국의 허난 성, 서쪽으로는 지금의 후베이 성에 이르렀고 일천 리에 달했다고 한다. 갑병 수십만을 낼 수 있고, 무기가 뛰어났다.
제나라(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시대의 춘추오패이자,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현재의 산둥 지방이다. 주(周)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태공망(太公望)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다. 이후 제환공(齊桓公)시대에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제경공 때는 안영을 등용하였다. 기원전 386년 전화(田和)가 제강공을 폐하면서 제후의 성씨가 강(姜)씨가 전(田)씨로 바뀌게 된다. 후에 위왕(威王)이 행정개혁을 행하여 국력을 증대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진(秦)과 중국을 양분하는 세력을 이루었다. 그 후도 계속해서 명석한 두뇌의 군주가 이어져 그 보호하에 수도 임치(臨淄)에서 직하(稷下)의 학(學)이 일어나 이 시기의 학문의 중심을 이루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제나라는 최후까지 버틴 전국칠웅(진 제외)의 나라였다.).
연나라(燕)은 중국 춘추 시대의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강역은 동쪽으로 조선에 이르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영토가 이천여 리에 달했다. 군사력은 갑병 수십만과 전차 칠백 승, 말(馬) 육천 필을 낼 수 있었다. 기원전 222년 진에게 멸망하였다.
초나라(楚)는 현재의 후베이성 장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 전국칠웅의 하나이다.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대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된다.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린다. 주나라 초기의 작위(爵位)는 자작(子爵) 이었으나, 기원전 704년 무왕(武王)때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하였다. 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223년 진(秦)에 의해 멸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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