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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4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1 ) 본문
우면산의 겨울 14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1 )
우면산 첯눈
요즘 채널 'CHING'에서 지난번 '대청풍운'에 이어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한 무제'를 즐겨 보고 있다. '한 무제'는 중국 진나라를 멸망시킨 유방에 의해 한 나라가 창업한 이래 제7대 황제이다. 한 나라는 한 무제 시대에 이르러 최대 전성기를 누리면서 흉노족과 지속적인 투쟁이 계속되었던 시대였다. 한 무제는 영토를 확장함에 심혈을 기울였던 황제로 우리의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현)을 설치하여 오랫동안 지배하였던 나라이다. 현재 그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증명되지 못하고 식민사관에 따라 한반도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실제는 중국 북경 동북쪽 요동 지역 일대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드라마 '한 무제'는 한 나라가 진 나라를 무너뜨리고 통일 중국을 통치하면서 최대 강성기를 누렸던 시대인 '한 무제'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한 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나뉘는데, 전한과 후한 사이에 왕망에 의해 전한이 멸망하고 15년간 신나라로 대치되었다가 다시 신나라가 망하고 유방의 후손 유수(광무제)에 의해 후한의 역사가 이어졌다. 한 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를 실시하여 최대 영토를 확장하였고 북방의 흉노 정벌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장장 54년간 재위하면서 법령과 사회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인재 등용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능력 위주로 등용하여 유능한 신하와 장수들을 많이 배출하였던 황제였다.
피상적으로만 읽고 들었던 한 나라 역사와 한 무제의 업적에 대해서 다시한번 돌아봄으로써 역사의 주도권을 잡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한 군주가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 갔으며 후대의 역사적인 평가는 어떠하였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 봄으로써 현재의 우리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한(漢)나라
기원전 206년 ~ 220년)은 진 이후의 중국의 통일 왕조이다. 한 왕조는 고조 유방(劉邦)에 의해서 건국되었으며 약 400년을 지속하였고,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고, 오늘날에 중국인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한족 역시 이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시대에 중국은 유교를 공식 국교로 승인하고, 이 사상 아래 국가의 기본 틀을 잡아 나갔다. 당시 인구는 5천 5백만에 달했으며 농업, 수공업, 상업 등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이러한 문화적 발전은 주위의 한반도, 베트남, 몽골, 일본, 중앙아시아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원전 111년에는 베트남의 남비엣(베트남어: Nam Việt)을 정복하였다. 한 왕조는 그 시기에 따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누어지는데, 전한과 후한 사이에는 왕망이 전한에 반란을 일으켜 세운 신나라가 존재한다.
새벽 우면산에서 바라본 사당역 방향
전한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 ~ 8년)은 고조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대륙쟁탈 뒤에 세운 황조로서 진(秦)에 이어 중국을 두번째로 통일한 황조이다.
건국고조 유방은 원래 정장(亭長)의 신분으로 의병을 일으켜 패공(沛公)의 자리에 올라 초(楚)의 의제(義帝)를 섬기다가 그 세력이 커져 또다른 거대세력인 항우와 경쟁하였다. 처음에는 패배를 거듭하였으나, 장량(張良), 한신(韓信), 소하(蕭何) 등 수하의 인재들이 많아 그들의 도움으로 기원전 202년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최종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고 한(漢)제국을 건국했다. 수도를 장안으로 삼았다.
전성기문제(文帝), 경제(景帝)부터 시작된 전한의 선정은 무제(武帝)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무제는 장건(張騫), 위청(衞青), 곽거병(霍去病) 등을 등용하여 변방의 흉노(匈奴)를 물리치고, 동월(東越)과 남월(南越 - 베트남), 고조선을 정복하여 한의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로인해 재정이 크게 악화되어 무제 이후 전한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멸망무제 이후 여러 황제들을 거치면서 황후의 아비들인 외척들이 힘을 얻게 되었고 그들은 결국 권력을 위해 쟁탈전까지 벌였다. 그 중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독살시키고 섭정을 하는 등 그 위세가 극에 달했고 결국 전한은 왕망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왕망은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건국된 지 15년 만에 유방의 후손 유수(劉秀)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
역대 황제
전한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태상황제
(太上皇帝)
(한 고조 추숭)유단
(劉煓)- - 제1대 한 태조
(漢太祖)
(한 고조<漢高祖>)고황제
(高皇帝)유방
(劉邦)-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제2대 - 효혜황제
(孝惠皇帝)유영
(劉盈)-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제3대 - 소황제
(少皇帝)유공
(劉恭)-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84년제4대 - 소황제
(少皇帝)유홍
(劉弘)- 기원전 184년
~ 기원전 180년제5대 한 태종
(漢太宗)효문황제
(孝文皇帝)유항
(劉恆)전원(前元) 기원전 179년
~ 기원전 163년
후원(後元)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57년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 제6대 - 효경황제
(孝景皇帝)유계
(劉啓)전원(前元) 기원전 156년
~ 기원전 150년
중원(中元) 기원전 149년
~ 기원전 144년
후원(後元) 기원전 143년
~ 기원전 141년기원전 157년 ~ 기원전 141년 제7대 한 세종
(漢世宗)효무황제
(孝武皇帝)유철
(劉徹)건원
(建元) 기원전 140년
~ 기원전 135년
원광
(元光) 기원전 134년
~ 기원전 129년
원삭
(元朔) 기원전 128년
~ 기원전 123년
원수
(元狩) 기원전 122년
~ 기원전 117년
원정
(元鼎) 기원전 116년
~ 기원전 111년
원봉
(元封) 기원전 110년
~ 기원전 105년
태초
(太初) 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1년
천한
(天漢) 기원전 100년
~ 기원전 97년
태시
(太始) 기원전 96년
~ 기원전 93년
정화
(征和) 기원전 92년
~ 기원전 89년
후원
(後元) 기원전 88년
~ 기원전 87년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제8대 - 효소황제
(孝昭皇帝)유불릉
(劉弗陵)시원
(始元) 기원전 86년
~ 기원전 80년
원봉
(元鳳) 기원전 80년
~ 기원전 75년
원평
(元平) 기원전 74년기원전 87년
~ 기원전 74년제9대 - 폐황제
(廢皇帝)
(창읍왕<昌邑王>,
해혼후<海昏侯>)유하
(劉賀)- 기원전 74년 - - 효도황제
(孝悼皇帝)
(한 선제 추숭)유진
(劉進)- - 제10대 한 중종
(漢中宗)효선황제
(孝宣皇帝)유순
(劉詢)본시
(本始) 기원전 73년
~ 기원전 70년
지절
(地節) 기원전 69년
~ 기원전 66년
원강
(元康) 기원전 65년
~ 기원전 61년
신작
(神爵) 기원전 60년
~ 기원전 58년
오봉
(五鳳) 기원전 57년
~ 기원전 54년
감로
(甘露) 기원전 53년
~ 기원전 50년
황룡
(黃龍) 기원전 49년기원전 74년
~ 기원전 49년제11대 한 고종
(漢高宗)효원황제
(孝元皇帝)유석
(劉奭)초원
(初元) 기원전 48년
~ 기원전 44년
영광
(永光) 기원전 43년
~ 기원전 38년
건소
(建昭) 기원전 37년
~ 기원전 34년
경녕
(竟寧) 기원전 33년기원전 49년
~ 기원전 33년제12대 한 통종
(漢統宗)효성황제
(孝成皇帝)유오
(劉驁)건시
(建始) 기원전 32년
~ 기원전 29년
하평
(河平) 기원전 28년
~ 기원전 25년
양삭
(陽朔) 기원전 24년
~ 기원전 21년
홍가
(鴻嘉) 기원전 20년
~ 기원전 17년
영시(
永始) 기원전 16년
~ 기원전 13년
원연
(元延) 기원전 12년
~ 기원전 9년
수화
(綬和) 기원전 8년
~ 기원전 7년기원전 33년
~ 기원전 7년- - 효공황제
(孝恭皇帝)
(한 애제 추숭)유강
(劉康)- - 제13대 - 효애황제
(孝哀皇帝)유흔
(劉欣)건평
(建平) 기원전 6년
~ 기원전 3년
원수
(元壽) 기원전 2년
~ 기원전 1년기원전 7년
~ 기원전 1년제14대 한 원종
(漢元宗)효평황제
(孝平皇帝)유간
(劉衎)원시
(元始) 서기 1년
~ 5년기원전 1년
~ 5년제15대 - 유자
(孺子)
(정안공<定安公>)유영
(劉嬰)거섭
(居攝) 6년
~ 8년
초시
(初始) 8년6년
~ 8년참고 사항
초·한전 당시 주요 인물들 초나라
초 패왕 항우
장수 환초
· 영포
· 우영
· 우자기
· 종리매
· 계포
· 용저
· 주란
· 장한
· 사마흔
· 동예
· 옹치참모 아부 범증
· 항백
· 진평한나라
한 고조 유방
장수 한신
· 번쾌
· 주발
· 관영
· 조참
· 기신
· 왕릉
· 팽월
· 영포
· 하후영참모 장량
· 소하
· 육가
· 역이기
· 진평
· 괴철
· 이좌차
· 수하타 제후들 옹왕 장한
· 새왕 사마흔
· 적왕 동예
· 구강왕 영포
· 서위왕 위표
· 하남왕 신양
· 은왕 사마앙
· 제왕 전광여타 반진 세력 진승
· 오광
· 항량
신나라
신(新, 8년~23년)은 전한(前漢)의 외척 왕망(王莽)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그러나 흥한의 기치를 내세운 후한에게 멸망한다.
왕망은 전한 황실의 외척 왕씨의 일족이었다.
전한 원제(元帝)의 황후인 왕정군(王政君, 또는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숙부인 왕망이 계속되는 어린 황제들의 즉위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BC 8년 대사마가 되었고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다. 그러나 평왕을 죽인 다음 2세(歲)의 영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황제에 즉위한다.
왕망은 복고주의(復古主義)를 내세워 《주례(周禮)》 등 유교 경전을 근거로 하는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고전에 입각하여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정전법(井田法)을 모범으로 하는 한전(限田)정책과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으며, 국가 권력에 의해서 물가의 균형책과 전매제도(專賣制度)를 강화하여 상업을 통제하였고 또한 화폐를 개주(改鑄)하기도 하였다.
왕망은 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 등의 정책을 폈으나, 이와 같은 개혁 정책은 실정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흉노(匈奴)를 비롯한 대외 정책도 실패했기 때문에 안팎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다.
잦은 재해(재위 2, 5, 11년의 황하 범람과 호족 세력이 반발하여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그 결과 적미(赤眉) ·녹림(綠林) 등의 농민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또 지방의 여러 호족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여 왕조 개창 15년 만에 적미군(赤眉軍)의 침공으로 왕망은 죽임을 당하고 신 왕조는 멸망하였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집권하였다.
후한
후한(後漢, 25년~220년)은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역사
신나라
말기, 한조 부흥 운동 과정에서 제위에 오른
경시제
의 휘하에 있었던 유수는
곤양 전투
에서 대활약을 펼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유수는 왕망과
적미군을 연달아 격파하면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무능한 경시제를 폐위하고, 후한 왕조를 창업하였다. 광무제는 선정을 베풀어 후한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후한 시대에는 채륜이 세계 최초의 종이인 채후지를 만들고, 장형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반초가
서역의 여러 나라와의 교역길을 열어
실크로드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외척과 환관들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는 점점 타락해 갔으며 사회 전반의 침체가 뒤따랐다.
당고의 화가 두 차례나 일어나면서 유능한 선비들이 정가에서 축출·제거되어 조정의 자정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고, 매관매직과 수탈이 빈번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갔다.
정국이 점차 어지러워지는 틈을 타거록 사람 장각이 황건의 난을 일으켰다. 결국 이 난은 정부군과 조정을 지지하는 군벌에 의하여 제압되기는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각지의 군벌들이 힘은 강화된 반면, 후한 조정의 권위는 더욱 약해졌다. 결국 군벌들의 힘이 후한 왕조를 능가하게 되면서 천하를 둘러싼 영웅들의 대결이 펼쳐지고 삼국 시대가 사실상 개막되었다.
서량 의 군벌이었던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추대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웅 할거 시대가 개막되었다. 탁월한 전략가이자 정치가인 조조는 헌제를 보위하는 데 성공하고, 숙적 원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화북과 화중의 일부를 차지한다. 이후 조조의 아들인
위의 문제조비에게 헌제가 제위를 넘겨주며 후한 왕조는 멸망하였다.
사상
왕망이 전한의 정권을 약탈하는 데 이용한 부명(符命)의 예언설이나, 광무제가 한실(漢室)을 부흥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활용한 도참(圖讖 = 예언이나 주문에 사용되던 신비적인 언어)은 각기 준거할 곳을 유가 경전에서 구하여 권위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미 전한말에는 음양5행설(陰陽五行說)을 원리로 삼는 갖가지 천인감응 사상에 의하여 유가의 경서를 해석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시류의 유자(儒者=금문학자)는 한층 권력에 영합키 위해
공자의 저작으로 가탁한 위서(緯書=비서)를 만들어 경학을 신비주의로 감쌌다.
기원후 56년
광무제가 도참을 천하에 공포하고, 장제(章帝)가
79년에 학자를 백호관(白虎觀)으로 모아놓고 5경(五經)의 국정 해석(國定解釋)을 토의시켜 전한 이래의 금문(今文)학의 우위를 보증하였다. 그러나 왕망의 신(新) 정권에 활용되었던 고문(古文) 경학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에 접근하고 있었다. 금·고문의 차이는 금문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근거로 한왕조의 정책 운용에 적응한 이론을 제공하여 학관(學官=오경박사
)을 독점해 오고 있었는데 반하여 고문은 복고주의를 주창하면서 고대 성현의 이상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5경을 종합하는 텍스트의 언어해석을 기초로 한 해석학을 확립시켰다.
유흠
(劉歆), 가규(賈逵),
반고(班固)와 같은 학자들은 고문의 경전이 도참의 불비를 보강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모시(毛詩)》 등을 국가에 공인시키려고 한 운동을 격렬하게 일으켰으나 대개 이 학문의 본령은 민간 사학에서 발휘되었다.
후한 때에는 일반적으로 ‘녹리(祿吏)의 도(道=사관 등용)’가 개방되었으므로 유생들이 다투어 경학을 배워 금고문에 능통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분질서를 중하게 보는 계급사상과 그 실천인 예를 존귀하게 여기는 명절(名節)의 기풍이 넘치게 되었다. 대략 명(明)·장(章)·화(和)의 3제(三帝, 58~105) 시절에 예교 국가(禮敎國家)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당시의 지식인의 언행은 점차로 관료 후보의 예비공작적인 것으로 변해 갔다. 금고문 두 학파의 논쟁이 체제교학(體制敎學)의 강화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에 학술의 기운이 사법(師法)을 준수한 전한의 일경 전문(一經專門)으로부터 5경 겸학(兼學)으로 진보하고, 다시 금문·고문 양 경학을 겸습하여 절충하고 총합하려고 하는 학자가 나타났다. 가규와
허신
등이 그들이다. 후한말이 되어 하휴(何休, 129~182)는 훈고의 형식에 의하여 춘추학을 완성시켰고,
정현(鄭玄)은 참위설도 살려가며 금고문의 예학을 통합함으로써 위진(魏晋) 이후의 경학의 일대 종주가 되었다.
국교인 유학이 신비화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 중에 지배권력의 의사를 거슬려서 천인감응의 참위설을 부인하는가 하면 음양오행설을 신봉하는 모든 학설에 대하여 비판의 화살을 돌려댄 지식인들이 출현하였다. 환담(桓譚)에서 시작하는 무신론자의 계열이 그것이다. 그들은 경험주의와 예리한 이성으로 그런 것들에 공격을 가하였다. 왕충을 필두로 왕부(王符), 중장통(仲長統)이 계속 나왔다. 왕부는 그의 〈잠부론(潛夫論)〉에서 빈부를 사회적 근원부터 추구하여 유법(儒法) 양면에서 사회비판을 행하였고, 중장통은 〈창언(昌言)〉에서 신권적인 왕조 순환사관(王朝循環史觀)을 비판하며 지배자의 철학에 각각 준열한 타격을 주었다.
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한 세조 (漢世祖) |
광무황제 (光武皇帝) |
유수(劉秀) | 건무(建武)25년~56년 건무중원(建武中元)56년~57년 |
25년~57년 |
제2대 | 한 현종 (漢顯宗) |
효명황제 (孝明皇帝) |
유장(劉莊) | 영평(永平)58년~75년 | 57년~75년 |
제3대 | 한 숙종 (漢肅宗) |
효장황제 (孝章皇帝) |
유달(劉炟) | 건초(建初)76년~84년 원화(元和)84년~87년 장화(章和)87년~88년 |
75년~88년 |
제4대 | 한 목종 (漢穆宗) |
효화황제 (孝和皇帝) |
유조(劉肇) | 영원(永元)89년~105년 원흥(元興)105년 |
88년~105년 |
제5대 | - | 효상황제 (孝殤皇帝) |
유융(劉隆) | 연평(延平)106년 | 105년~106년 |
- | - | 효덕황제 (孝德皇帝) (후한 안제 추숭) |
유경(劉慶) | - | - |
제6대 | 한 공종 (漢恭宗) |
효안황제 (孝安皇帝) |
유호(劉祜) | 영초(永初)107년~113년 원초(元初)114년~119년 영녕(永寧)120년~121년 건광(建光)121년~122년 연광(延光)122년~125년 |
106년~125년 |
제7대 | - | 소황제 (少皇帝) (북향후<北鄕侯>) |
유의(劉懿) | - | 125년 |
제8대 | 한 경종 (漢敬宗) |
효순황제 (孝順皇帝) |
유보(劉保) | 영건(永建)126년~132년 양가(陽嘉)132년~135년 영화(永和)136년~141년 한안(漢安)141년~144년 건강(建康)144년 |
125년~144년 |
제9대 | - | 효충황제 (孝沖皇帝) |
유병(劉炳) | 영희(永憙)145년 | 144년~145년 |
제10대 | - | 효질황제 (孝質皇帝) |
유찬(劉纘) | 본초(本初)146년 | 145년~146년 |
- | - | 효목황제 (孝穆皇帝) (후한 환제 추숭) |
유개(劉開) | - | - |
- | - | 효숭황제 (孝崇皇帝) (후한 환제 추숭) |
유익(劉翼) | - | - |
제11대 | 한 위종 (漢威宗) |
효환황제 (孝桓皇帝) |
유지(劉志) | 건화(建和)147년~149년 화평(和平)150년 원가(元嘉)151년~152년 영흥(永興)153년~154년 영수(永壽)155년~158년 연희(延熹)159년~167년 영강(永康)167년 |
146년~167년 |
- | - | 효원황제 (孝元皇帝) (후한 영제 추숭) |
유숙(劉淑) | - | - |
- | - | 효인황제 (孝仁皇帝) (후한 영제 추숭) |
유장(劉萇) | - | - |
제12대 | - | 효영황제 (孝靈皇帝) |
유굉(劉宏) | 건녕(建寧)168년~172년 희평(熹平)172년~178년 광화(光和)178년~184년 중평(中平)184년~189년 |
168년~189년 |
제13대 | - | 소황제 (少皇帝) (홍농회왕<洪農懷王>) |
유변(劉辯) | 광희(光熹)189년 소녕(昭寧)189년 |
189년 |
제14대 | - | 효헌황제 (孝獻皇帝) (효민황제<孝愍皇帝>, 산양공<山陽公>) |
유협(劉協) | 영한(永漢)189년 중평(中平)189년 초평(初平)190년~193년 흥평(興平)194년~195년 건안(建安)196년~220년 연강(延康)220년 |
189년~220년 |
시기에 따른 수도
고조 유방은 전한을 처음 건국했을때 수도를 장안으로 삼았고,
왕망
(王莽)이 전한에 반란을 일으켜 세워진
신나라가 멸망한 뒤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건국하고 수도를 낙양에 두었다.
전한
,
후한
및
촉한
황제의 가계도(위나라 정통론의 경우 촉한은 제외되는 것을 주의.)
①은후한, ⑴은촉한황제 계승 순서임.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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