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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5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2 )

두바퀴인생 2009. 12. 18. 07:04

 

 

우면산의 겨울 15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2 ) 

 

                                                                                                    새벽 하늘

 

요즘 채널 'CHING'에서 지난번 '대청풍운'에 이어 방영하고 있는 '한무제'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다. '한무제'는 중국 한나라 시대 최대 전성기를 누리며 우리의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여 오랫동안 지배하였던 나라이다. 현재 그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증명되지 못하고 식민사관에 따라 한반도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실제는 중국 북경 동북쪽 요동 지역 일대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이러한 한나라는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통일 중국을 통치한 나라이며  최대 강성기를 누렸던 '한무제' 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피상적으로만 읽고 듣던 한나라 역사와 한무제의 업적에 대해서 다시한번 돌아봄으로써 역사의 주도권을 잡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한 군주가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 갔으며 역사적인 평가는 어떠하였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 봄으로써 현재의 우리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먼저,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과 역대 황제들에 대하여 알아본다.

 

한 고조 (유방)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진나라의 장수이며 기원전 206년 한나라를 건국하였다. 기원전 202년 항우를 격파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일반적으로 고조(高祖)라고 부른다.

 

한 고조 유방은 지금의 장쑤성 패현에서 한 이름 없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방의 성장기는 한심하기 그지 없었는데, 그는 밖으로 나도는 데만 정신이 팔려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되면서부터 아예 집을 나와 건달패와 어울려 살았다.

 

그렇다고 양질의 건달도 아니었고 그를 따르는 패거리 중에 번쾌라는 그는 개를 잡아 파는 백정이었다. 그는 후에 무양후에 봉해지지만 유방의 패거리 중에 유일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유방의 부모는 건달로 세월을 보내는 아들을 보는 심정이 답답하여 유방의 두 형은 그와 정반대의 성격으로 묵묵하게 농사일에 매진하던 착실한 청년이었으므로 부모는 유방에게 "너 형 반만 닮아라!"고 유방에게 입버릇처럼 이야기 했다고 한다.

 

유방이 이러한 건달에서 현대 중국의 원형을 이루는 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아무리 중국이 역성혁명의 나라라고 하지만 이렇게 낮은 신분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중국 역사상 단 두 명이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빈농 출신의 탁발승에서 시작해 명 왕조를 세운 주원장뿐이다.

 

유방은 건달로서는 상당한 지위까지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30세 나이에 사수지방의 하급관리 '정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맡은 정장이란 직책은 지금의 방범대장과 비슷한 직책이었다. 치안상태가 불안하던 시대에는 유협, 협객, 깡패, 조폭, 사무라이들이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나선 경우와 비슷하다.

 

유방은 장정이란 하찮은 지위를 이용하여 천하를 도모할 토대를 쌓는다. 다른 사람은 지위를 이용하여 재물 탐닉에 몰두하였으나 유방은 부지런히 덕을 쌓으며 사람을 낚았는데, 훗날 창업 공신이 되어 한 왕조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치는 '소하', '조참'을 이시기에 같은 현의 관리로 사귀었으며 당시 그 지역의 유력자였던 여씨 딸 '여치' 또한 아내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유방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위기가 찿아왔다.

 

당시 진나라 진시황제가 죽고 2대 황제가 즉위한 해, 유방은 죄인들을 이끌고 여산릉 조영 공사를 하라는 현령의 명령을 받고 죄인들을 인솔하여 가던 중 도망자가 속출하자 유방은 현령에게 받게 될 책임추궁을 두려워한 나머지 죄인들을 모두 풀어준 다음 그 자신도 도피 길에 오르면서 이제껏 쌓아왔던 것을 다 포기하고 관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에게 위기였으나 천하에 다시없는 기회가 되어 돌아온다.

 

얼마 후 '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며 반란을 일으켰고, 패현 현령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유방을 다시 부른 것이었다. 산속에 들어가 숨어지내던 유방은 현령의 연락을 받고 그동안 모집하였던 수백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산을 내려와 패현으로 갔으나 패현 현령이 유방의 위세를 보고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여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성안의 부로와 지도자들이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맞아들여 현령으로 추대했다. 이때부터 유방에게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병력 규모가 무려 3천이 넘었다.

 

혁명의 첯테이프를 끓은 전승과 오광의 반란군이 진나라 관군과 내부 분열로 쉽게 무너진 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의 중심이 된 것은 당대 최고의 영웅 '항우'와 그의 숙부 '항량'이었다. 그들은 유방과 거의 같은 시기에 군사 8천 명을 이끌고 강동에서 봉기했는데, 양쯔 강을 건너 북으로 올라가 설현에 이르렀을 때는 각지의 반란군이 규합해 10만에 이르는 대군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편 패현에서 봉기한 유방의 반란군은 그 후 반 년 동안 진의 관군과 밀고 당기는 싸움을 계속하다가 기원전 208년 4월, 설현의 항량을 찿아가 수하부대로 합류한다. 이 일로 유방군은 크게 성장하고 유방의 천하평정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되는 장량이라는 최고의 군사를 얻게 된다. 안에서 살림을 맡은 이상적인 보좌관이 소하라면 전쟁터에서 최고의 참모는 장량이었다.

 

항량은 유방이 합류한 지 2개월 후, 멸망한 초왕의 혈통인 심이라는 목동을 찿아내서 초회황으로 추대하고 그를 명목상 맹주로 삼아 반란군 통합을 꾀했다. 그리하여 진의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관군에게 대패하고 항량도 전사한다.

 

기선을 빼았긴 초군은 할 수 없이 전선을 축소하고 진의 관군을 맞아 거록까지 밀리면서 버티고 있었는데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반란군은 전황을 역전시킬 승부카드를 던지게 된다.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북상하는 관군을 맞아 싸우고, 다른 한 부대는 진의 수도인 센양으로 공격하기로 계획했다. 초회왕은 누구던지 먼저 센양을 함락시키는 자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항우는 황하를 건너 치열한 전투 끝에 진군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이 승리로 그는 반군들 사이에서 일인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항우는 제후 연합군 40만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의 관군을 물리치며 센양으로 진군하였다. 황우가 함곡관에 도착하였을 때 유방은 이미 센양에 입성한 뒤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대발노발했다고 한다.

 

유방의 군대는 항우와 달리 강한 군대는 정면 공격을 피하고 우회하면서 가급적 투항을 권유하고 대결을 피하면서 진의 최후 방어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관을 돌파해 센양을 코앞에 둔 패상으로 진출했다. 진왕 자영은 유방의 투항 권고에 따라 옥새를 바치고 항복해버린 것이다. 유방은 진왕 자영을 죽이자는 부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감시만 붙여둔 채 그대로 살려주고 보물과 궁녀가 넘치는 궁궐에 지내려고 했으나 이를 안 번쾌가 다른 패장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패상으로 철수하여 야영을 하도록 충언하자 패상으로 철수하여 각 현의 장로와 유력자들을 불러 그 유명한 '법은 삼장뿐'이라는 포고를 내린다. 이는 살인,사상,절도에 대해서만 법을 집행하고 다른 모든 진의 법은 폐지한다는 내용의 포고였다. 각지에 이를 알리자 진의 학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크게 기쁘하며 유방에 대한 민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한달 후 항우가 센양에 도착하자 항복한 적인 자영 등 진의 왕자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3개월 동안이나 탔고 센양은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만행에 진나라 사람들은 항우를 비난하면서 욕하면서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진이 멸망한 후 연합군 총사령관 항우는 전쟁의 뒷처리와 새로운 제도 만들기에 착수하여 이름뿐인 맹주 초회왕에게 '의제'라는 칭호를 주고 작은 현 하나만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팽성을 도읍으로 현 아홉개를 갖고 서초 패왕이라고 했으며, 장군 18명과 구왕족 등을 각자의 공적에 따라 왕으로 봉했다. 이때 유방은 한왕이 되어 한중과 파, 촉 등 세 군을 다스리게 되었다. 항우의 속셈은 유방을 외진 곳에 가둔 꼴이 되었다.

 

또 항우는 중요한 관중 땅을 셋으로 갈라 항복해온 진나라 장수 세 명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의 울타리로 삼았다. 이에 유방은 그런 처우에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항우와 대결하려 했지만, 소화를 비롯한 측근들이 지금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없다면서 힘을 길러 후일을 기약하자는 권유에 할 수 없이 한중으로 떠났다.

 

항우의 이러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자는 유방뿐만이 아니었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동쪽의 제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뒤이어 조나라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항우는 패왕의 체면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여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이무렵 항우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의제를 살해하자 유방은 이것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관중을 점령하고 기원전 205년 의제의 장사를 치르고 항우와 전면전을 선언하게 되면서 4년에 걸친 초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항우가 제를 평정하는 사이 항우의 거점인 팽성을 점령하였고 이 당시 유방의 병력 규모는 50~60만 정도의 대군이었으나 대부분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제에서 돌아온 항우의 정예군 3만과 대결에서 유방군이 대패하고 유방은 겨우 목숨만 살려 도망쳤다. 그후에도 유방군은 항우군과의 싸움에서 계속 밀리면서 패전만 거듭하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유방군이 전략적 우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유능한 후방참모 소하의 부단하고 지속적인 병력과 물자 공급이 있었다. 또 두 번째는 한신과 팽월이었다. 한신은 원래 항우의 수하였으나 외모가 못생겨 항우에게 발탁되지 못하고 소장으로 세월만 보내다가 한나라로 와서 소하의 추천으로 한의 대장군이 되었다. 한신은 뛰어난 용병술로 별동대장이 되어 항우를 괴롭혔으며 팽월은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 주변에서 활발한 게릴라 활동으로 항우의 배후에서 움직임을 견제했다. 이에 항우는 게속되는 싸움에 지쳐 기원전 203년 8월 유방과 화의가 이루어져 홍구를 경계로 서쪽은 한이, 동쪽은 촉이 지배하기로 하고 항우는 군사를 돌렸다.

 

이때 유방의 참모 진평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며 항우의 뒤를 추격하자고 진언했다. 물론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유방은 이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항우를 추격하였다. 그리고 한신, 팽월, 영포도 이에 합류해 항우의 군대를 따라 잡았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만 들리는 두터운 포위망 속에 갇힌 항우는 그날 밤 우미인을 옆에 앉히고 탄식하였다.

 

항우는 마지막 힘을 짜내 포위망을 뚫고 앙쯔 강가에 있는 오구까지 도망을 갔는데 그를 따르는 병사는 20여 기였다. 오구에서 양쯔 강을 건너면 그의 고향인 강동 지방이었다. 부하가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를 권유했지만 항우는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4년에 걸친 사투 끝에 숙적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기원전 202년 2월에 신하들의 추대를 받으며 황제로 등극했다. 유방은 국호를 한으로 정했는데, 이는 자신이 전에 한왕이었던 데서 유연한 것이다.

 

그후 유방은 기원전 19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7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대부분 싸움터에서 보냈다. 개국 공신들인 한신과 영포, 팽월 등 성이 다른 왕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킨 탓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유방은 한나라 황제에 등극하자 봉건제와 군현제를 조화시킨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방의 지혜와 항우의 무자비한 모습이 백성들의 지지를 끝내 상실함으로써 출신성분이 비천한 유방이 항우를 이긴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정작 권력을 갖게 되자, 반란 가능성을 의식하여 자신을 도와주었던 한신, 영포, 팽월 등을 숙청했다. 영포, 팽월 등이 숙청되자 공포감을 느낀 한신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하며 물러났다고 한다.

 

만년에 여씨 일족을 신임하였다가 그의 사후 여태후의 일족이 후임 황제를 몇차례나 임의로 교체시키기도 한다. 일설에는 여태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