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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3 ('12.12' 30주년, 그날을 되돌아 본다)

두바퀴인생 2009. 12. 15. 06:28

 

 

우면산의 겨울 13 ('12.12' 30주년, 그날을 되돌아 본다)

 

 

강남 서초동 의 아침

 

'12.12'는 우리날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믿고 있던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인 중정부장 김재규의 총에 사살되고 정치.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 사건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쿠테타의 성공으로 정치전면에 등장하면서 정권을 잡은 이래 18년 동안 강력한 군사정권을 유지해오던 제3공화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4.19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권이 들어섰으나, 장면 정권은 준비되지 못한 정권으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혁명의 주체이며 실세인 학생들이 정치 권력을 농단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이를 바라보던 군에서 정권을 뒤엎은 쿠테타가 바로 5.16 군사혁명이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죄여오는 친일논란과 자유당 정권의 숙군 정책을 통해 군내 김창룡 특무대장의 무소불위 숙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있던 상황에서 무언가 돌파구를 찿아야 할 즈음에 일으킨 군사혁명이었다. 혁명정부는 조국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사회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는데, 새마을 운동, 공업단지 조성, 국가기간사업 추진 등 그동안 정치권력 싸움만 일쌈던 과거 정부에 비해'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조국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 당시 우리들의 삶은 처참했으며 아마 지금 젊은이들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50~60년대 한국전쟁 후 초토화 된 이 땅의 백성들은 미군원 물자로 겨우 삶을 연명하고 있었는데, 성당이나 교회에서 계몽영화를 보여 주면서 우유가루,옥수수 가루 등을 보급해 주었다. 학교에서는 옥수수 가루로 떡을 만들어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면 어린 학생들에게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손으로 잡은 부분이 시커멓게 때가 뭍어 있어도 버릴 수가 없어 쓱쓱 바지에 닦고 먹었다. 굶주림에 이골이 나 있던 대부분의 농촌 국민들은 가진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셋방살이나 더부살이는 다행이나 머슴살이,소작농이 대부분이었고, 움막,다리밑,판자집에 사는 가족들도 많았다. 당시 끼니때마다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가정이면 다행이었으며 마을 마다 끼니 때마다 매번 찿아오는 거지들로 붐볐고 넘쳐나는 거지들이 다리밑 등 가는 곳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을 때였다. 지금 배부르게 비만이 되어 다이어트를 고민하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당장 먹을 거리가 없어 고통받던 시절이었다. 그들이 우리들의 할아버지였고 아버지들이었다.

 

군사 혁명 정부는 이러한 국민들의 가난 퇴치에 주력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착실히 추진한 결과 우리는 결국 가난에서 다소나마 벗어나게 되었고 군에서는 육사 11기인 전두환을 포함한 정규 육사 출신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라고 있던 중 이었다. 제3공화국은 18년 집권을 통해 경제적으로 국력을 신장시키는 한편 집권연장을 위해 유신헌법을 무리하게 개정하는 등 국민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주변 인물들을 중용하면서도 서로 경쟁적으로 견제시키면서 대통령 경호실과 중앙정보부는 권력 알력으로 심화되어 가던 중, 혁명 당시 공수부대 대위 출신인 경호실장 차지철의 무차별적인 횡포에 평소 극도의 불쾌감을 갖고 있던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궁정동에서 사살된 비극이 10.26 사건이다.

 

김재규는 아무런 준비없이 오로지 차지철과 대통령의 시해에만 목적을 둔 범행이었으며 그로인해 발생될 정국의 혼란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질러진 사건이었다. 이러한 혼란 와중에 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이 마비되자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를 체포하는데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관이 바로 보안사령부였으며 그 정점에 전두환 사령관이 있었다.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는 가운데 전두환은 유능한 참모들에 의해 참모총장 등 김재규 일파를 제거하고 자연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은 반대파에 대한 하극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전두환의 최종 승리로 국가 비상사태에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치군인들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급부상하게 되면서 군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소수의 엘리트들만 주요 부서를 모두 장악하고 정치집단화되어 후진국 군대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선택을 잘 했던 사람들도, 선택을 잘못하였던 사람들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역사에는 영원한 진리나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승자에 의해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당시 총장이나 지휘관의 지시를 받고 병력을 출동했던 소위 잘 나가던 군인들은 모두 한직으로 물러나고 군복을 벗었다. 상관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사람들, 비참하게 죽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 역사의 수레바퀴에 모두 무임승차했거나 깔려 죽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후 승자가 되어 잘 나가던 많은 사람들도 5.6공 청문회와 과거사 정리속에 다시 단죄를 받았으며 군대는 하나회 사건이 터지면서 그들의 추종자들도 모두 한직으로 물러나 군복을 벗었다. 그들의 인생도 새옹지마라 할까?

 

당시 그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약 당신이 그 당시 그 사람의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했을 것인가도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총성으로 사건은 시작됐다. 지난 1979년 12월 12일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합수부) 수사관들이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은 다음날 아침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 숨가쁜 상황의 시작이었다. 경복궁 수경사 30단에 모여 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노태우 9사단장 등과 참모총장 연행에 항의하는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격돌은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 같았다.

 

결국 사태는 나중에 신군부로 불린 전두환 사령관 측의 승리로 마감됐다. 이 당시 승자의 편에서 쓰여진 12.12 사건의 진상은 1995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 뒤집힌다. 승자와 패자가 서로 자리를 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옮겨 앉는다.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일까.

 

12.12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 의미를 두고 ‘신군부의 정권 찬탈 기도’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쿠데타가 아닌 정당한 수사권 행사였다”는 평가도 있다. 문민정부 이후 12.12사건은 대부분 ‘신군부의 반란’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같은 평가 역시 ‘승자의 시선에서 본 기록일 뿐’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뉴데일리는 30년 전 12.12사건의 주역이었던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과 신윤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감사를 만났다. 이들은 이야기한다. “쿠데타가 아니었다”고. 뉴데일리는 이들에게 들은 그대로를 3회로 나눠 연재한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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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 뉴데일리

12.12의 발단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숨진 ‘10.26’이다. 지금은 공원이 된 궁정동 안가에서 박대통령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가수 심수봉, 당시 대학생이던 신재순과 만찬 중 저격당한다. 문제는 이 안가의 바로 옆 동에 김재규의 초대를 받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0.26 발발 후 직제에 따라 정승화 육참총장은 계엄사령관이 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수부장이 된다.

“발화점은 대통령 시해 현장이 있던 사람이 계엄사령관이었다는 것입니다.”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은 시해 동조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을 막강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5층 건물 1층에서 살인사건이 나면 그 건물 모두를 조사하지 않습니까? 정 총장은 불과 현장에서 수십 m 거리에서 범인의 초청으로 와 있었습니다. 게다가 권총이며 M16 등 총성도 아주 가까이 들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범의 혐의를 벗기가 쉽지 않죠.”

 

합수부의 조사는 막강한 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정승화 사령관은 거짓말을 되풀이 했다"

우선 신분 격차가 너무 심하니 조사에 제약이 많았다는 것이 허 이사장의 회고다. “정 총장은 수시로 수사기록을 보여 달라고 하고 마음대로 고치거나 빼거나 써넣곤 했습니다. 이걸 제대로 된 수사라고 할 수 없지요.” 허 이사장은 정 총장이 연행되기 전이나 1995년 12.12 주역들을 고발할 때의 얘기나 자서전에서 쓴 얘기가 모두 각각 다르다고 주장했다. “정 총장은 일관되게, 또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허 이사장은 한 예를 들었다. “정 총장은 합수부 수사관이 ‘김재규가 어디서 박 대통령과 식사를 했느냐’고 묻자 청와대 본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총소리 역시 자하문에서 나는 소리인줄 알았다고 주장했어요. 김재규가 대통령을 저격한 뒤 험한 몰골로 정 총장에게 왔습니다. 총소리가 나고 얼마 안 지나서인데 청와대 본관 식당에서는 경호 때문에 시해 자체가 불가능하고, 시해를 했더라도 청와대에 가득한 경호원들이 김재규를 그냥 궁정동으로 가도록 두었겠습니까.” 허 이사장은 “6.25를 겪은 4성 장군이 20여m 떨어진 곳에서 난 총소리를 먼 거리의 자하문에서 난 곳으로 알았다면 차라리 코미디”라고 웃었다.

 

12·12를 승리로 이끈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5명의 보안사 핵심참모들. 왼쪽부터 이학봉수사국장, 허화평비서실장, 장도영보안처장, 전사령관, 권정달정보처장, 허삼수인사처장. ⓒ 자료사진

정승화는 김재규가 추천해 총장된 사람

정 총장은 합수부의 수사에서 계속 “김재규와 잘 모르는 사이다. 도움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정 총장은 김재규가 추천해 참모총장이 된 사람입니다.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은 자신의 동기인 육사 3기 박희동 장군을 밀었어요. 박 대통령에게 ‘인사 적체 해소’를 내세워 육사 5기인 정 총장을 추천한 사람이 김재규입니다.”

 

허 이사장은 수사관으로서 도저히 정 총장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전두환 사령관이 자신을 동경사(동해안경비사령부)로 전출을 보내려 하자 반발했다고 하는데 사실과 다릅니다.” 그는 “전 사령관의 동경사 전출을 정 총장이 노 장관에게 건의했지만 노 장관은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일하게 하라”고 말했고 전 사령관도 12.12 이후에 그 얘기를 노 장관에게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10.26의 밤, 육본 벙커에서의 정 총장 행동도 석연치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이 유고일 땐 당연히 전방 등의 상황을 점검하고 해당 조치를 해야 합니다. 당연히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주한미군사령관에게도 보고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날 정 총장은 김재규와 상의해 병력을 보고도 없이 움직였습니다. 당연히 공범 혹은 동조 의심을 받을만한 것이죠.”

 

나중에 문제가 된 최규하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의 재가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허 이사장의 말이다. “합수본부장은 장성을 조사하거나 연행할 때 관례적으로 국방장관과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만 재가를 얻지는 않습니다. 12.12의 밤에 최 대통령에게 간 것은 재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복궁 30단에 모여 있던 장군들은 군에 어두운 최 대통령의 이해와 설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허 이사장은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 같은 군 사정으로 오해가 많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재규-김계원-정승화의 사태장악, 얼마든지 궁정쿠데타할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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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 전 보안사령관비서실장이 12.12 및 5.18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기 위해 1995년 12월 10일 서울지검으로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허 이사장은 10.26의 세 주역의 지위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정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차지철이 없는 청와대를, 정 총장은 군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세 사람의 묵계 여부와 관계없이 이들 셋이면 얼마든지 궁정 쿠데타가 가능한 상황 아닙니까?”

 

그는 “물증이 없고 정황 근거만 있는 속에서 수사진은 정 총장의 끝없는 모호한 태도에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12.12의 계기였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1995년 문민정부의 12.12 재심의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좌파가 엄청난 승리를 한 것이 당시의 재심의”라고 평가했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의 공권력을 단죄하게 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반공의 큰 축을 여지없이 뽑아 버린 일이었다는 것이다.

주객을 전도 시킨 문민정부 재판

조영환 올인코리아 대표는 “12.12사건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재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12.12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 쿠데타를 일으킨 김재규와 그 일당을 제대로 수사한 전두환의 합수부가 쿠데타 세력으로 후에 김영삼 정권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규정된 것은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로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은 법적 하자를 재검토를 받아야 한다는 것.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12.12사건 관련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급조한 특별법이 헌법 제 13조의 형벌불소급, 일사부재리, 소급입법제한 등을 위반한 점이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로, 1980년 광주 사태 주역과 2008년 광우병 사태 주축세력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12.12사건을 쿠데타로 몰아간 민주화세력의 진짜 정체를 환갑이 지난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허 이사장은 “좀 더 기다릴 것이다. 때가 되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겠다”고 별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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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희 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 뉴데일리

오후 7시 영내에 있는 아파트로 퇴근을 했다. 샤워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것이 7시 반쯤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수경사 상황장교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부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우경윤 대령하고 권정달 대령이 진급에 불만을 품고 참모총장을 납치했습니다. 헌병단 5분대기조를 한남동으로 출동하라고 합니다.”

뒤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사령부 상황실은 허삼수 대령을 권정달 대령으로 잘못 전달했다. 헌병단에 출동준비를 지시하고 신윤희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은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부대에 도착하니 모든 출동준비가 완료돼 있었다. “단장님께 출동 사실을 보고하게.”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은 그날 진급예정자로 발표돼 장태완 사령관과 외부에서 저녁만찬을 하고 있었다.

 

5분대기조를 이끌고 한남동 총장공관으로 향했다. 공관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현장엔 10.26 이후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에 배속된 33헌병대가 먼저 나와 있었다. ‘진급에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총장을 납치했다는데 왜 합수부 배속 헌병들이 먼저 나와 있을까?’ 마침 33헌병대장 최석립 중령이 보였다. 다가가 물었다. “선배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33단장인 김진영 대령이 나와 있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단장님, 우경윤 대령하고 권정달 대령이 진급에 불만을 품고 총장을 납치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김 대령은 “납치가 아니고 합수부에서 김재규와 연관이 되어 있는 참모총장을 수사하기 위해서 연행한 것 같다. 나도 그것 밖에는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감이 잡혔다. ‘아아, 이게 납치된 것이 아니라 합수부에서 수사 차 연행한 것이구나.’

 

"안에 있는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체포 및 사살해라.”

조금 뒤 수경사령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신윤희 부단장은 간단한 병력 배치 등 현황보고를 했다. 사령관은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신 중령. 지금 즉시 저 안쪽으로 공격해. 안에 있는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체포 및 사살해라.” 신 중령은 짧은 순간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어쨌든 우군끼리의 살상은 막아야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서로 맞부딪치면 쌍방이 피해가 큽니다. 여긴 맡겨두시고 사령관님은 부대에 들어가셔서 부대를 지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령관을 동행하고 있던 육군 본부사령 황관영 장군이 거들었다. “신 중령 말이 옳습니다. 부대지휘가 중요하니까 복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태완 사령관은 사령부로 돌아갔다.

 

신윤희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의 기나긴 12.12의 밤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 단장은 몇 시간 후 자신의 상관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는 악역을 맡게 된다. 그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 역시 당시로는 꿈도 못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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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당시 합동 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자료사진

‘왜 상관인 수경사령관을 연행했느냐’는 질문에 신윤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감사(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은 “당시 상황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사령관의 기세가 정말 경복궁에 포사격을 할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장태완 사령관이 장교들을 집합시키더니 흥분한 말투로 ‘지금부터 내가 강력하게 지시한다. 지금 30단(경복궁 수경사 30단을 말함)에 전두환 노태우 김진영 장세동 이 놈들이 모여서 작당 및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 이 놈들은 적이다. 반란자다. 지금부터 내 명령에 따라서 자기 지휘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살해라’고 말했어요. 경복궁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과도 지근거리에 있는 중요한 곳입니다. 게다가 포사격이라니요? 장 사령관은 당시 탱크중대에도 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 감사에 따르면 장 사령관은 계속 흥분된 상태로 합동수사본부 요원과 보안사 요원, 30단 병력은 모두 적이니 야포와 전차를 동원해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사령부에 있는 참모들의 갈등도 많았어요. 그런데 밤 11시 반쯤 돼서 30단에 있던 헌병단장으로부터 민간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신 중령, 지금 내가 아주 중요한 명령을 내리겠다. 내가 지금 여기 와서 보니까 합수부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김재규 사건과 관련이 되어있는 정 총장을 연행하는데 장태완 장군이 정당한 수사행위를 병력을 동원해서 방해하고 있다. 양쪽의 병력이 부딪치면 쌍방간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니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 감사가 망설이고 있는데 느닷없이 사령부 인사참모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이미 단장으로부터 사령관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자신을 체포하거나 위해행위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을 졸이며 만난 인사참모는 흥분된 어조로 ‘신 중령. 이거 큰일났다. 지금 사령관이 이성을 잃고 경복궁에 포사격을 하고 전차사격을 하라고 하는데 대통령이 있는 경복궁에 어떻게 사격을 할 수 있겠나. 쌍방 간에 불상사가 일어나면 큰일이다. 헌병단에서 어떻게 손을 써달라. 충돌하면 국가가 망한다. 사령관은 무조건 저쪽에 공격하라고 명령을 하는데 헌병단에서 어떻게 손을 써 달라’고 되레 부탁을 했다.

 

 "김재규와 연관 있는 정 총장을 연행 조사는 당연"

“그때는 참 그 인사참모가 미웠습니다.” 신 감사는 인사참모에게 ‘당신들, 참모들이 뭐 하는 거냐? 사령관을 설득해야 될 것 아니냐.’ 하고 공박을 했다. 인사참모는 ‘지금 그럴 상황이 못 된다. 사령관이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다. 저 양반 지금 이성을 잃고 있다’며 신 감사에게 하소연을 했다.

 

잠시 뒤엔 정보참모가 그를 찾았다. 같은 얘기였다. ‘신 중령. 이거 큰일 났다.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령관이 전차로 밀어 붙일 것 같은데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지 않겠나’였다. “조금 있으니까 이번에는 전차대대장이 찾아왔어요. 전차대대장은 육사 21기로 저와 동기였는데 다급하니까 하소연도 하고 싶고 또 저와 상의를 하고 싶어 올라왔던 것 같습니다. 그가 심각한 어조로 ‘신 중령.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해요. 그래서 ‘일단 사령관의 명령이니까 알겠다고 하고 시간을 끌어서 냉각기를 갖는 수밖에 없다.’ 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겪으며 직속상관인 헌병단장의 명령에 따라 사령관을 체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신 감사는 그 어려운 결심의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사령관이 계속 병력과 야포 또는 전차를 앞세워 경복궁과 합수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는데 만약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 군끼리 내전까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국가가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 

 

둘째, 합수부에서 김재규와 연관이 있는 정 총장을 연행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수사행위인데 사령관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된다는 것. 셋째, 10.26 이후에 전후방 각 부대에서 찾아온 장교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정 총장은 조사를 받아야 된다 하는 것이 군 전체의 여론이었다는 것이었다.

 

신 감사는 “장 사령관이 ‘12.12와 나’라는 책에서 밝혔듯이 사령부 전 장교 450여 명 중 60명만 사령관을 지지했을 뿐 390여 명 다른 장교들은 사령관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은 사령관의 행동과 지시가 부당하고 무모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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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12월12일 밤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의 긴박했던 순간을 지켜 본 보안사 정문의 차량통제기록부 일부분. ⓒ 자료사진

어려운 결심을 한 신 감사는 실행에 옮긴다. 자정을 넘긴 12월 13일 새벽 2시 50분 신 감사는 중대장 3명과 기동대장 1명 그리고 정보과장 등 장교 5명과 병력 60명을 인솔해 사령관실로 올라갔다. 사령부 현관에 도착하니까 본부대 병력 수십 명이 배치돼 있었다.

 

‘여기 본부대장 없어?’라고 소리치니 본부대장이 현관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본부대장, 여기 주변에 대한 경비를 우리가 인수받으라고 사령부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너 연락받은 거 없냐?”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부대장은 ‘아, 저 연락받았습니다. 저희 병력을 철수하겠습니다’라며 자기 병력을 철수했다. 충돌의 위기를 넘긴 순간이었다.

 

사령관실 입구에 가니까 육군본부에서 온 장군들의 부관과 보좌관 10여 명의 장교들이 전부 권총을 차고 복도에서 서성대거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리를 피하라’고 눈으로 신호를 하니 모두들 한쪽으로 비켜섰다. 중대장 2명과 정보과장 등 3명이 사령관실에 들어갔다.

 

“수행인원을 통제하고 뒤따라 사령관실에 들어가는데 ‘탕’ 하고 총소리가 나요. 보니까 하소곤 장군이 옆구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정보과장한테 지시해서 후송시키고 나니 장태완 사령관이 신 감사를 바라보았다.

 

“야 신 중령.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죄송합니다. 국가의 위기를 맞아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사령관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장 사령관은 ‘그래. 가자’ 하고 아무 소리 안하고 따라 나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날 새벽부터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물을 몇 주전자나 들이켰는지 모릅니다.”신 감사는 “군인은 여하튼 직속 상관의 명령을 따라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만약에 잘못되어 처형을 당하거나 법을 어겨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더라도 직속상관하고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신 감사 생애의 가장 길고 긴 밤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신윤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감사(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의 장태완 수경사령관 체포로 1979년 12.12사건은 종결된다. 물론 9사단 일부 병력과 제1, 제3공수여단이 출동하기도 했지만 사건의 대미를 장식한 주인공은 신 감사였다.

“12.12사건은 쿠데타가 아닙니다.”
신 감사는 몇 번이나 이 말을 강조했다.


“쿠데타의 사전적 의미는 프랑스어 coup d'ètat 로 정부를 뒤집는다는 뜻입니다. 소수의 세력이 무력을 기반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을 말하지요.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소수에 의하여 정권을 탈취하여 입법, 사법, 행정권을 모두 장악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 감사는 “12.12사건은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 각부 장관과 군을 책임지고 있는 국방장관 등 어느 부서도 제거된 부서가 없었고, 오직 범인 김재규와 관련이 있는 총장 한 사람만 연행해 조사한 것”이라며 “이것을 어떻게 쿠데타라고 말할 수 있냐”고 되물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와 사건에 관련이 있는 정승화 총장을 조사하기 위하여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 내부 충돌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은 그만큼 절박했다는 것이 신 감사의 설명이다.

“10.26사건 당일.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궁정동 안가에서 시해할 때 5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정승화 총장이 계획된 김재규의 저녁초청을 받고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렸는데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슨 총소리인지 알아보라고 말한 뒤 그대로 식사를 계속했습니다. 6.25를 치르고 30여년 이상 군 생활을 한 참모총장이 50m 옆 건물에서 나는 총소리를 ‘멀리서 난 총소리인 줄 알았다’든가, ‘권총소리인지, M16 소리인지를 구별 못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의 만찬 장소에서 발생한 총소리가 아닙니까?”

 

12.12사건이 마무리된 다음날 서울에 배치된 신군부 병력들. ⓒ 자료사진

신 감사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신발도 신지 않고 허둥대는 모습으로 김재규가 나타나 “총장 큰일 났다”며 오른손 엄지를 아래로 내려 박 대통령이 시해 되었다는 표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은 현장 확인도 없이 김재규의 요구대로 김재규 차에 동승하여 육본으로 귀대했다”며 “이는 참모총장의 기본 책무인 국가 안보와 대통령 유고 시에 대해야 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피격 경위와 범인 색출에 나서야 함에도 정 총장은 차 안에서 김재규에게 ‘내부 소행이냐? 외부의 짓이냐?’고 단 한번 물어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더 이상 확인도 안하고 계속 범인 김재규의 지시대로 움직였어요.”


신 감사는 “범인 김재규와 사건현장 옆 동에 식사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범인과 함께 행동하면서 범인 지시대로 따랐다는 자체만으로도 정 총장은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측이지만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하기 전에 정 총장을 옆 건물에 부른 뜻은 사건에 단계별 혁명계획을 알려 동조를 얻었든지, 그렇지 않더라도 박대통령 시해 뒤 자신의 계획에 절대적으로 지원하고 옹호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 감사는 “정 총장의 참모총장 보임엔 김재규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고 얘기했다.

“사고 당일 육본 벙커에 모인 국무위원들이 정 총장이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과 여러 의심스러운 정황을 잘 모르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총장을 임명한 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정승화 총장의 계엄사령관 임명은 합동수사본부의 정 총장 조사에 엄청난 부담과 어려움을 준다.

“좀 더 확실한 사실을 알려고 내사하고 있는데 ‘왜 정승화를 조사하지 않느냐?’는 열화 같은 여론이 합수부로 밀려왔습니다. 당시 군심과 민심은 급기야 ‘합동수사본부장이 정 총장과 결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과 불만까지 터져 나왔습니다.”

신 감사는 “이 같은 군심과 민심에 밀려 정 총장을 연행 조사하기로 결정한 것이 12.12의 동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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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수경사 30단 ⓒ 뉴데일리
“일을 크게 만든 것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입니다.”
신 감사는 장 사령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연행했다’는 통보를 받고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도경비사령관은 대통령 경호경비의 책임이 있으므로 반드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 사령관은 총장 연행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적인 총장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병력, 장비, 전차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신 감사는 “이 같은 수경사령관의 이성을 잃은 행동이 예하부대 장병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12.12사건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었다는데도 무조건 반발한 수경사령관의 행동은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 감사는 “수경사령관은 의심스럽다면 언제든 대통령에게 확인 및 보고할 수 있는 라인이 구축되어 있었다”며 “어느 쪽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냐”고 물었다.

 

“김영삼 정부는 최초에는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명명하면서 역사에 맡긴다고 하더니, 검찰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검찰이 장기간 조사 끝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사건을 재조사시킨 것입니다.”

신 감사는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12.12사건 조사가 위헌이라는 법조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두 전직 대통령과 12.12사건 관련자 전원을 재판에 회부해 처벌한 것은 진실 공방의 심판이 아니라, 5. 6공 정부에 대한 정치 보복 재판이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민주화 열풍과 군사정부에 대한 폄하가 한창이던 상황을 생각하면 1차 검찰조사는 양측에 적당한 명분을 주어 마무리 하고자 한 검찰의 고민으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을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범법자로 몰아간 김영삼 정부에 불법은 반드시 재심판돼야 합니다.”


신 감사는 “12.12사건은 이미 한 세대가 지난 잊혀져 가는 사건이 될 수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12.12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며 “30년이 지난 12.12사건은 이제 재조명 되어야 하고 그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 할거이다"라고 말했다.

                                                                            -서초동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