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가을 19 (청나라, 그들은 누구인가?) 본문
우면산의 가을 19 (청나라, 그들은 누구인가?)
청나라는 한반도 북부,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조선 정부의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때로는 무력으로 정벌하고 때로는 회유책을 써서 이들을 조공,귀화를 권장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노략질을 하는 동기의 하나가 생필품의 결핍에 있음을 알고 함경도 경성,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서로 교역하게 하였다. 또 여진 추장들에게는 중추원지사를 비롯한 호군,사직,만호,천호 등의 명예 군직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일으킨 건진여진은 1467년(세조 13년) 남이 등이 이끄는 조선군에 의해 정벌되어, 추장 이만주 등 부자가 살해되자 그 세력이 크게 약회되었다. 그러다가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과 명의 힘이 만주 지역에 제대로 미치지 못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의 선조가 의주로 피난시, 여진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의를 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그 속셈을 알 수가 없다하여 거절하였다.
그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명나라와 영원성 전투에서 명군의 홍의포에 부상을 당해 죽게되자 8남인 홍타이지(청태종)이 황제로 등극하였다.
조선 최대의 무능한 임금으로 어떤 저자는 선조와 인조를 꼽는다. 조선시대는 근본적으로 무능하고 병약한 나라였는데, 세종,정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임금들은 유교라는 허무맹랑한 사상과 사대주의에 물들어 가식과 부패가 극에 달하였던 왕조였기에 선조와 인조만 무능한 임금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어느 임금이나 그러한 상황이었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휘둘리면서 마음대로 정치적 포부를 달성할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가차하면 신하들이 무력으로 갈아치우기를 반복했다. 맏아들이 왕권을 이어야 한다는 장자상속의 원칙은 가장 어리석은 제도였다. 또 왕족은 정치에 관계하지 못하게 법으로 제한하였다. 그래서 반정/반란도 많이 일어난 왕조였고 성공한 반정은 인조반정과 중종반정뿐이며 반란은 대부분 실패하였다. 또 왕위를 잇지 못한 승려로 출가한 사람 외에 대부분의 왕자들은 반정에 이용되거나 관련되어 참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정 수의 권신들로 하여금 가장 유능한 왕자를 선택하는 제도도 없이 몇몇 권신들이 권력 욕심으로 세자를 정하거나 대비와 밀약하여 무능한 왕족 중에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 데 파당싸움으로 일관하는 행태는 오늘날의 우리 국회와 똑 같았다. 청나라는 국가 대사를 결정시에는 8명의 왕족들로 구성된 제후회의에서 대부분 만장일치제로 결정하는 것에 비해 조선은 왕권이 약할뿐만 아니라 유교 교리에 빠져 형식과 명분만을 중시하며 파벌 조성으로 갈등만 부추기는 매우 불합리한 제도였다. 그리고 인재 등용에 있어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 악날한 신분제도로 서출과 천민은 출세할 길이 없는 나라였다.
그래서 재임간 전쟁이 일어났던 선조와 인조는 가장 부패하고 공리공론으로 일관하던 조정이 전쟁이 발발하자 그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난 경우이며 이들만 무능한 왕이 아니라 조선의 대부분의 왕들이 다 이 모양이었다는 결론이며 그래서 결국 조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망국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조선은 조일전쟁을 당하고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라였다. 1,2차 호란을 당하고 수많은 조선의 처녀,부녀자들이 청에 끌려가 능욕을 당하면서 살다가 죽지 않고 돌아온 여자들이 '화양년'이라는 치욕스런 손가락질을 당하는 나라에 무슨 살 맛이 나겠는가! 그들은 대부분 집에서 쫒겨나 미쳐 죽거나 천민처럼 살거나 목을 메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무능한 왕조가 백성들에게 안겨준 결과이며 눈물겨운 역사다. 너무나 한심하고 억울하여 다시한번 1,2차 호란에 대하여 다시한번 기술한다. 인조와 조선 조정이 어떠했는가 한번 보시라!
청태종은 명을 공략하기 전 미리 조선을 제압하여 후방의 안전을 도모할 요량으로 1627년(인조 2년)에 침략하게 되는데, 바로 정묘호란이다.
1차 정묘호란은 1627년1월 13일 새벽,'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후금의 왕자 아민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유해를 선봉장으로 삼아 약 3만 5,000의 병력으로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국경을 넘는 동안 최전방 방어 거점의 의주 부윤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 장군의 얼굴에 똥칠한 눔)은 기생과 놀다가 술에 취한체, 후금군의 침공에 제대로 방비도 못한 채 의주는 함락되고 이완은 살해되었다. 이어 후금군이 안주를 점령하고 평양에 무혈 입성한 후 황주로 진격하자 도체찰사 이원익은 세자와 함께 전주로, 인조는 영의정 윤방과 함께 강화도로 도망쳤다.
후금군이 공격하자 조선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으며 들판의 곡식과 창고에 쌓아 놓았던 곡식 그리고 많은 군수품이 후금군 손에 들어갔다.
다행히 후금군은 당시 같이 동행했던 조선 장수 강홍립의 간청으로 평상에서 진군을 멈추고 강홍립을 강화도로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화의 내용은 '후금이 형의 나라가 되고 압록강 국경 일대에 시장을 열어 달라는 것'으로 조선은 별 볼일 없는 요구였으므로 화의를 수락하여 강화가 성립되자 후금군은 철수했다. 당시 강홍립의 노력이 아니였더라면 조선은 다시한번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명령으로 명군을 돕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후금군에 항복하여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조선을 위해 여러 정보를 전하는 등 나라를 위해 무던히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장수였으나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와 처형당하는 비운의 장수였다. 조선은 이런 개같은 나라였다.
인조는 후금군에게 당하자 겉으로는 후금의 동생 지위를 받아들이면서 실상은 명에만 신속했다.
이후 후금과 사사건건 갈등이 증폭되면서 인조는 전쟁에 대비하여 관서지방군의 군량을 4개월 분을 마련하고 청천강 이북의 산성에 5-6개월 분의 군량미를 비축토록 했다. 또 군사조직을 정비하여 김시양을 도원수로, 정충신을 부원수로, 임경업을 북면방어사로 삼고, 남한산성을 최후의 방어성으로 지정해 정비토록 했다. 인조는 도원수와 부원수가 인조의 강경방침에 반대 의견을 내자 둘 다 해임하고, 무능한 김자점을 도원수로, 윤숙을 부원수로 삼아 전쟁 준비에 들어 갔다. 한편 조선 조정은 매일 척화파와 주화파가 싸움을 벌이면서 소모적인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며 인조는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도 못했다.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자 무능한 도원수 김자점은 의주, 안주, 평양,황주,평산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아 산성을 수축하고 병력을 집중 배치했는데 대부분 길에서 떨어진 산성으로 들여 보냈다. 임경업은 병력 3,000명과 백마산성으로, 평안 감사 홍명구와 병사 유림은 평야 주둔군 3,000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으로, 황주 주둔군은 정방산성, 평산 주둔군은 장수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조선군은 대부분 길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으로 웅거하게 되어 적이 침공시 침공로를 직접적으로 방어 할 수가 없었다.
1636년 후금군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명의 중원을 공격하기 전에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재침공을 준비했다. 청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명에 대한 사대롤 청에게, 주전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그리고 왕자들을 볼모로 보내고 더 많은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이 청의 요구에 대해 불응하면서 후금과 국교를 끊는다는 내용의 조서를 팔도에 내리게 되자, 그해 12월 8일 청태종은 용골대를 대장, 마부대를 선봉장으로 삼아 최대 동원 가용병력인 여진족 5만, 한족군 2만, 몽고족 3만 등 총 12만 8,000명의 혼성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임경업이 지키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텅텅 비어 있는 큰 길로 청군은 파죽지세로 내려와 3일만에 평양을 통과하고 보름이 채 안 되어 개경을 점령했다. 이 속도는 조일전쟁시 왜군의 진격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평양이 점령되자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먼저 왕자들과 비빈들을 강화도로 보냈다. 뒤따르던 인조는 청군 마부대가 1차전에서 왕을 놓친 경험을 알고 한양을 우회하여 강화가는 길을 끓었다는 보고를 받자 강화가던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급거 회군하여 도망쳤다. 남한산성에는 군사 1만 5,000명과 관원 300명, 그리고 약 50일치의 군량이 전부였다.
청군은 남한산성 외곽에 나무 울타리를 치고 쇠방울을 달아 포위망을 형성하고 느긋하게 술이나 마시면서 인조가 항복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청군은 경기 일원에 노략질을 하면서 부녀자를 강간,겁탈하고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자행하자 어린 아기들이 길바닥에 동사 하는 등 처참한 광경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후방의 4만 근왕병이 몰려 왔으나 청군에게 포위,격멸되었고, 다른 근왕병들이 수차례 접근하였으나 청군의 위세에 눌려 겁을 먹고 쫒겨갔다. 산성내에서는 군량은 점점 바닥이 나고 있는 중에도 척화파와 주화파간에는 연일 싸움질만 하고 있는 지경에 인조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1월 23일 강화도가 청에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들을 비롯한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남한산성 앞에 서자 보고를 받은 인조는 농성 47일만인 1월 30일, 주화파 최명길이 인조의 명을 받아 항서를 청태종에게 전하고 삼전도에 나가 항복하게 된다. 청태종에게 항복의 제2등 절목인 세번 절하면서 머리를땅바닥에 아홉번 찍는 의레였다. 인조는 수항단 단상 저 높이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들릴 정도로 머리를 아홉번 땅에 '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찍는 삼배구고두의 황제 알현 예를 행하고 옥새를 바치면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이때부터 1895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약 250년간 청을 상전으로 모시게 된다. 김훈씨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책을 한번 보시라! 얼마나 치욕적이고 한심한 항복인가!
이런저런 항복 절차를 마친 인조는 가 보란 소리가 없자 밭 가운데 죽치고 앉아 있다가 해질 무렵에야 겨우 도성으로 들어 갔는데, 도성 길은 유령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길바닥에는 수많은 백성들의 시체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청군 100여 명이 시체를 치우면서 갈 수 있었다. 인조가 창덕궁 양화당에 들어서자 용골대가 청태종이 만든 '고려왕'이라고 쓴 인장(옥쇄)을 전달했다. 조선은 청의 요구 대로 신하의 예를 행하고 조공을 약속하였으며 명과 단절하고 청의 원병 요청시 파병하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조선은 군사를 늘릴 수 없으며, 군사훈련을 해도 안 되고, 성을 쌓거나 수리할 때는 꼭 사전에 청에 보고해야 했다.
26세의 소현세자, 17세의 봉림대군, 삼학사를 비롯한 수많은 대신들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 갔으며, 볼모로 끌려간 삼학사는 청으로 끌려간 후 처형당했다. 무능한 임금과 조정의 조선은 백성들만 곤죽이 되고 피고름을 짜내는 개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나라였다.
이런 치욕을 당한 인조는 반성하기는 커녕, 권력에 눈이 멀어 나중에 볼모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연계하여 자신을 몰아낼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세자를 독살하고 세자빈과 두 세손까지 죽이는 지독한 친족 살인범이었다. 차라리 이런 치욕을 참지 못하고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노년을 보내던가 스스로 자결이라도 하였더라면 무능한 임금으로 욕은 먹지 않았을 것이며 조선은 달라졌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볼모 기간 중 청군에게 망해가는 명나라를 직접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신부 아담 샬과 같은 서양인을 만나 많은 대화를 하면서 서양 문물의 새로움을 익히고 많은 서적과 문물을 가지고 돌아온 선구자였다. 또 세자비는 볼모 기간 중 심양에서 무역을 장려하여 엄청난 부를 일구어 마련한 자금으로 청군에 잡혀 있던 조선 포로를 석방하고 청나라 권신들을 포섭하는 비용으로 사용하는 등 애국자면서 무역상이었던 대단한 예비 국모였다. 아마 소현이 왕위를 계승하였더라면 조선은 일찍 개항하고 부국강병을 이루었을지도 모르며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망하는 불행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 같은 남북분단은 물론 친일인명사전 갈등도 없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조선은 약 250년간 해마다 정기,부정기 적으로 사절과 조공품을 보내어 사대의 예를 다했다. 이후 조선은 청의 내정 간섭은 받지 않고 대체로 독립성을 유지하는 바람에 조선은 더욱 병약해지고 있었는데,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이 왕권을 농단하면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였고 핏줄이 끊어져 강화 도령을 임금으로, 망나니 흥선군 아들을 임금으로 않히는 등 외척 세력은 무능한 임금만 골라 앉혔다. 권력에 한이 맺힌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아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외척들을 포함한 반대 세력에게 극심한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고 외세를 물리치는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고인물처럼 부패와 부정이 난무하는 등 내부적으로 더욱 깊이 썩어가고 있었는데 또 골라서 선택한 며느리 민비와 권력 투쟁으로 일관하다가 외세를 끌여 들이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급기야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 청일전쟁을 유발하면서 나라는 일제에 빼앗기는 망국의 길을 걸었다.
1842년 청은 난징조약으로 개국한 후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의 문을 열자, 1882년(고종 19년) 조선과 미국,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돕는다는 이유로 마건충, 정여창이 군함과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또 같은 해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군함 3척에 4,500명의 병력을 끌고 와서 흥선군을 납치하였고, 북양대신 이홍장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마건충을 조선 정부의 정치, 외교, 세관의 고문으로 위촉시켜 청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양국이 충돌하여 톈진조약을 맺어 위안스카이(원세제)를 주조선 총리로 임명하여 정치, 경제 등 제반 분야에 걸쳐 간섭하면서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청은 1894년 동학농민반란이 발발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등 협력하는 가운데, 일본군과 충돌하여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어 결국 패전하게 되자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조선은 1896년 250년간 사용하던 청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이라는 자체 연호를 최초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고종은 독립국이며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청나라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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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 ||||
공용어 | 만주어, 중국어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 ||||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 ||||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
9,984,670 km² 2.8% | ||||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
383,100,000명 명/km² | ||||
통화 | 위안 (1889년부터) |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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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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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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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청나라(淸)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은 일반적으로 중국이 만주족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원래 청나라는 1616년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동북 지역에 건국한 이민족의 나라를 말하는데, 초기에는 금(흔히 “후금”이라 부름)이었다가 후에 세력을 강화하여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는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몽골 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이민족으로써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1912년 선통제 푸이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간 이어졌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
중국에게 있어 이 시기는 만주족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족에 의한 학살로 인구가 급감하기도 했었고, 피지배계층 한족들은 만주족의 풍습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다 학살과 탄압을 당했으며, 이로인해 말기에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반대하는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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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청나라의 건국
1616년 만주족인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예전에 만주족의 다른 이름인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우며 시작되었다. 그 후계자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順治帝) 때 청의 팔기군이 명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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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정예기병 '팔기군'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에는 군대가 되는 조직
150여 가구가 화살(矢)이라 부르는 중대로 조직되었고 50개의 중대가 다섯 개의 연대 즉, 7500 가구 규모의 한 개의 기(旗)를 이루었다.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군대가 되는 조직은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을 통합한 병민일체(兵民一體) 조직이었다. 공포의 8기군의 전신 4기군이다.
누르하치는 항복하거나 정복한 부족들을 시기(矢旗) 군사계급으로 흡수 편입시켜 황(黃), 적(赤), 백(白), 남(藍) 기를 내리고 아들들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다. 이들이 훗날 청태종으로 등극한 8자 홍타이지, 2자 예친왕(禮親王) 다이산, 12자 영친왕 아지거, 14자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이다.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현(縣)과 향(鄕)으로 편성되어 있으나 내몽고 자치구는 아직도 현을 깃발이라고 부르고 향을 화살이라고 부른다.
칼날을 숨기고 명나라에 공손한 태도를 취한 누르하치는 도독첨사라는 관리로 임명되었다. 명나라 조정에 충성하던 아버지가 명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복수심에 불타던 누르하치는 절치부심 칼을 갈았다. 기회를 엿보던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 야인을 통합하여 4기군을 8기군으로 재편성하여 만주족이라 이름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1616년, 후금 칸의 지위에 오른 누르하치는 1619년 무순과 요동을 점령하고 심양으로 천도했다. 명나라에 정면대결을 선언한 것이다. 동조세력이 필요한 누르하치는 다른 종족에 비해 몽고족에 우호적이었다. 명나라 정복에 몽고족을 종속적인 동업자로 참여시키려는 정책이었다.
여기에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누르하치의 성(性) 애신각라(愛新覺羅아이신줴뤄)다.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생각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에 반론을 제기하는 또 다른 가설은 애신은 김나라의 김(金)을 뜻하는 말이며 김씨(金氏)는 황금(金)을 좋아하던 훈족이 사용하던 성씨였다는 것이다. 훈족의 후손인 모용씨가 한반도로 넘어와 석씨집단을 몰아내고 김씨 왕조 신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여진족이 우리 민족의 한 갈래?
고려에 패망한 신라 왕족의 후예들이 만주로 이동하여 터를 잡아 후김(金)나라를 세웠고 그 후손이 누르하치라는 설이다. 여진족(女眞族)이라는 명칭 또한 중국이 우리를 동이족이라 부르듯이 고구려의 려(麗)자와 발해 최초의 이름 진(振)을 폄하해 부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진은 두음법칙으로 만족의 선세(滿族的先世)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주신(朱先, 諸申, 珠申)이라고 만족대사전(滿族大辭典)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열거한다. 따라서 여진족은 천산주신족이며 중국이 동이족을 주신(珠申)족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한민족의 한 갈래이며 백두산을 염두에 둔 천산주신족도 예사로운 명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설일 뿐 아직 검증된 바 없다.
누르하치에 이어 황제로 등극한 홍타이지는 목표를 명나라로 설정했다. 요하를 건너 서진하려면 북방에 있는 몽고와 바닷길로 맞닿아 있는 조선이 걸림돌이 되었다. 몽고는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조선에게는 육전에 익숙한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인 수군(水軍)이 있었다. 더욱이 조선 수군은 불과 40년 전 한반도를 유린한 일본군을 바다에서 격퇴한 경험이 있으며 전설적인 장수 이순신을 배출한 수군이 아닌가.
"군신관계를 거절한 조선을 정벌하라"
홍타이지는 1635년에 몽골 찰합이부(察哈爾部)를 정복하고 전국옥새(傳國玉璽)를 손아귀에 넣었다. 항복한 몽고 부족장들이 심양에 모여 홍타이지에게 몽고가한(蒙古可汗)의 칭호를 올렸다. 대 제국 원나라의 정통성을 획득한 것이다. 1636년 국호를 청나라로 개칭한 홍타이지는 몽고족과 요동 한족(漢族)을 각각 별도의 8기군으로 편성했다.
명나라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청나라는 심양을 방문한 사신 박노에게 제고지문(制告之文)이라는 옥새를 종이에 찍어 보내며 정묘호란으로 맺어진 '형제맹약'을 파기하고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을 손아귀에 넣어 한반도에 묶어두기 위한 전략이다. 조선이 이에 불응하자 11월 25일까지 왕자를 보내라고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홍타이지의 요구를 조선은 외면했다.
12월 1일. 다이산, 아지거, 도르곤, 도도 등 형제 4기군왕과 경중명 공유덕 등 이민족 출신 왕과 장수들을 심양에 소집한 홍타이지는 아우 도르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여진족 7만, 몽고족 3만, 한족 2만 도합 12만 명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정벌하라 명령했다.
12월 5일. 압록강변 구련성에 도착한 도르곤은 전열을 정비하며 이틀 동안 냄새를 피웠다. 군사동원을 눈치 챈 조선이 알아서 복종하기를 기대했다. 이 때 청군 지휘부에서는 조선인 세작을 풀어 조선군의 군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허나, 조선의 응답은 없었다. 대적할 군사도 없는 조선이 아무런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무적의 팔기군 기병대를 앞세운 청나라는 압록강을 건넜다.
이 무렵, '구련성의 청군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수비대의 봉화가 2자루 올랐다. 그러나 도원수 김자점이 "소식이 도성에 알려지면 민심이 놀란다"며 정방산성에서 차단했다. 압록강을 건넌 도르곤은 선봉장 타닥에게 몽고족 출신 군병 3만을 주어 한성을 향하여 진군하라 명했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수적인 열세를 통감했다. 임경업 장군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갔다. 청나라 본진이 지나간 다음 꼬리를 자르고 배후를 협공하거나 심양을 역습하기 위한 전술적 복안이었다. 그러나 도찰사에게 요청한 증원군은 오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전술을 예견한 홍타이지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심양에 있었다.
선봉장 타닥은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린 임경업군을 후속부대에 넘기고 남하했다. 청나라 선봉대가 신천과 안주를 지나는 동안 조선군의 저항은 없었다. 평양을 무혈입성한 청나라 군사가 송도를 지났다는 개성유수의 장계가 대궐에 날아들었다. 이 때 이미 청군은 양철평을 지나고 있었다. 녹번 고개 넘어 양철평은 도성과 지척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인조는 예방(禮房) 승지 한흥일에게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강화도로 떠나라 명하는 한편, 김경징을 검찰사로 임명하여 빈궁 행차를 배행하게 했다. 청나라 장수 타닥은 정묘호란 때 왕을 놓쳐버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선수를 쳤다. 양화진이 봉쇄되고 김포가 적 수중에 떨어졌다.
임금이 허둥지둥 대궐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길이 막혔다. 인조는 숭례문 누각에 올라 탄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소현세자의 가슴은 미어졌다. 발길을 돌린 인조는 도성으로 다시 들어가 수군문을 빠져 나갔다.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넌 지 7일 만이다. 얼어붙은 삼전도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에게는 군사 1만 3천명과 50일분의 식량이 있었다.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학살당한 인원수는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됬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이 완전히 맞다고 할 수는 없어도,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정복 초기에만 학살이 있었을 뿐, 이후에 체제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 하면서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다.
청나라의 성장과 강건성세
만주족이 세운 청은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중용하였으며 그들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에 힘썼다. 순치제에 이어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초기까지 오삼계(吳三桂) 등 청나라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1683년 모두 진압되고 대만도 청나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1661 ~ 1722)는 순치제가 사망하자 8세로 즉위한다. 15세때부터 친정을 시작하여 오배의 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복속함으로써 진정한 중국 통일을 이루게 된다.
또한 러시아가 강점한 네르친스크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스타노보이 산맥과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한다.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지 않던 외몽골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다.
문화적으로는 한자 5만여자를 부수별, 획수별로 분류한 강희자전을 편찬케하였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을 총애하였다.
강희제 치세에 이르러 광동 성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무역이 크게 발달한다. 그러나 자식들이 황태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여 말년에는 그리 평온하지 못하였다. 그는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이 있었다.
강희제가 사망하자 넷째 아들 옹정제 (1722 ~ 1735)가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형제의 난에서 승리하여 부황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청나라의 통치체제를 완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옹정제는 세금을 단일화 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때 시작한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것을 억누르는 문자의 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루 4시간밖에 자지않고 정무에 몰두하다가 과로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옹정제의 최후에는 아직도 의혹이 많이 남아있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1735 ~ 1795)는 몽골 제국을 제외한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완성하였다. 이 당시의 영토는 몽골, 신강, 티베트를 모두 포함한 것 이었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등을 침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3억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명나라의 인구가 6천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사고전서를 편찬, 경전과 역사서, 철학서, 문집을 모두 모아 10만권을 만들었다. 청조는 이 편찬 사업을 한족 지식인을 감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고, 청조통치에 문제가 있는 내용들은 폐기하였다. 또한 이러한 편찬사업은 금석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해외정벌과 계속되는 황실의 사치로 인한 천문학적인 경비가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게되어 국운이 기울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건륭제의 총신(寵臣)이었던 화신(和神)의 전횡과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건륭제 말기에는 청나라 각지에서 백련교의 난(白蓮敎─亂)을 비롯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쇠퇴와 멸망
강희제 이후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더러는 직접 지배하고 더러는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로 불렸다. 그러나 백련(白蓮, 1796년-1804년),·천리(天理, 1813년)의 난을 계기로 청나라는 점차 쇠퇴로 기울었다.
한편 영국은 1792년 매카트니를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아편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려고 했으나, 청조는 이를 반대하여 아편 무역을 금하였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1840년-1842년)을 시작하여 승리하였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넘어갔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이 쇄도해옴으로써 중국은 역사상 유례없이 휘청거렸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내면에서는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이 일어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과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앞세운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天京:태평천국이 난징을 고쳐 부른 이름)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洋務)은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의 주도하에 일어났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켜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정부의 감독을 받았기 때문에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하여 무술개혁(戊戌)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西太后)·이홍장 등 기존세력의 반격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과 그 수습을 위한 베이징 의정서(1901년)를 체결하며 청조는 쇠퇴해갔다. 또한 1904년-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물리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서태후는 유학생을 일본 등에 보내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에 대해 알아보게 했으며, 국내적으로도 낡은 과거 제도 대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최신식 군대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은 신해혁명(1911년)으로 인해 1912년 멸망하였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취임하면서 그 영토를 계승하였다. 그 이후, 1949년에 중국 본토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되고, 타이완 섬은 분리되어 중화민국이 된다.
청나라의 문화
비(非)한족 지배자인 청조는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코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熙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청적(反淸的)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考證學)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유림외사(儒林外史)』『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출물들이 건설되었다.
경교와 천주교
중국에서는 일찌기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대진사라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때부터 마테오 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교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중 하나는 조상제사문제였다. 조상제사문제는 1704년 조상제사에 반대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조상제사를 중국인의 전통으로 존중하는 예수회간의 신학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교황청에서 조상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금지함에 따라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4]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럽에 중국 문화가 소개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중국연구열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 똑같은 옷을 입는 등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였다.
개신교
개신교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에서 태동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국의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는데,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 China Inland Mission,CIM)를 결성하여 1898년 중국 후난성을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여 1951년에 철수할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64년 OMF( Overseas Missonary Fellowship)으로 선교회의 이름을 바꾸었다.
역대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
-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
원황제 (原皇帝) |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
1405년 ~ 1433년 |
- |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
1433년 ~ 1467년 |
- |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
1467년 ~ 1481년 |
- |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
1481년 ~ 1522년 |
-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
직황제 (直皇帝) |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
1522년 ~ 1542년 |
-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
익황제 (翼皇帝) |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
1542년 ~ 1571년 |
-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
1571년 ~ 1583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1583년 ~ 1616년 |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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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천명(天命) | 1616년 ~ 1626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천총(天聰) | 1626년 ~ 1636년 |
청(淸, 1636년 ~ 1912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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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숭덕(崇德) | 1636년 ~ 1643년 |
-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
순치(順治) | 1643년 ~ 1661년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
강희(康熙) | 1661년 ~ 1722년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
옹정(雍正) | 1722년 ~ 1735년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
건륭(乾隆) | 1735년 ~ 1795년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
가경(嘉慶) | 1795년 ~ 1820년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
도광(道光) | 1820년 ~ 1850년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
함풍(咸豊) | 1850년 ~ 1861년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
동치(同治) | 1861년 ~ 1875년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
광서(光緖) | 1875년 ~ 1908년 |
비정통 | -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
보경(保慶) | 1899년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예인입효양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襄皇帝) |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
선통(宣統) | 1908년 ~ 1912년 |
- 서초동 쓰고,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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