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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가을 18 (대청풍운) 본문
우면산의 가을 18 (대청풍운)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로 중국인(한족)들이 가장 무시하던 오랑케가 중원을 점령하여 민족이 세운 나라였다. 오늘날의 중국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였으며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왕조였으나, 지금은 왕조도, 나라도, 민족 자체도 사라지고 말았다.
최근 'CHING' 채널에서 '대청풍운'이라는 중국 사극이 방영되고 있어 즐겨 보고 있는데,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여 명나라 영원성 전투에서 사망하자 아들 중 여덟번째인 홍타이지(청태종)가 등극하여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두 차례 침공하여 신하국으로 제압하여 후방의 안정을 꾀한 뒤에 명나라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청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 순치제 시대를 전후한 역사 드라마이다.
주요 인물로는 청태종(홍타이지), 그의 동생인 도르곤, 효장황태후, 청태종의 아들인 복림(순치제)이 등장한다. 청태종은 조선을 침공한 인물로 정묘,병자호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과정과 인조의 무능,백성들의 비참한 상황을 살펴보자.
1차 정묘호란은 1627년1월 13일 새벽,'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왕자 아민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유해를 선봉장으로 삼아 약 3만 5,000의 병력으로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국경을 넘는 동안 의주 부윤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는 술에 취한체 제대로 방비도 못한 채 의주는 함락되고 이완은 살해되었다. 후금군이 안주를 점령하고 평양에 무혈 입성한 후 황주로 진격하자 도체찰사 이원익은 세자와 함께 전주로, 인조는 영의정 윤방과 함께 강화도로 도망쳤다.
후금군이 공격하자 조선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으며 들판의 곡식과 창고에 쌓아 놓았던 곡식 그리고 많은 군수품이 후금군 손에 들어갔다.
다행히 후금군은 당시 같이 동행했던 조선 장수 강홍립의 간청으로 평상에서 진군을 멈추고 강홍립을 강화도로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화의 내용은 '후금이 형의 나라가 되고 압록강 국경 일대에 시장을 열어 달라는 것'으로 조선은 별 볼일 없는 요구였으므로 화의를 수락하여 강화가 성립되자 후금군은 철수했다.
인조는 후금군에게 당하자 겉으로는 후금의 동생 지위를 받아들이면서 실상은 명에만 신속했다.
이후 후금과 사사건건 갈등이 증폭되면서 인조는 관서지방군의 군량을 4개월 분을 마련하고 청천강 이북의 산성에 5-6개월 분의 군량미를 비축토록 했다. 또 군사조직을 정비하여 김시양을 도원수로, 정충신을 부원수로, 임경업을 북면방어사로 삼고, 남한산성을 최후의 방어성으로 지정해 정비토록 했다. 인조는 도원수와 부원수가 인조의 강경방침에 반대 의견을 내자 둘 다 해임하고, 무능한 김자점을 도원수로, 윤숙을 부원수로 삼아 준비에 들어 갔다. 조선 조정은 매일 척화파와 주화파가 싸움을 벌이면서 소모적인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며 인조는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도 못했다.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자 무능한 도원수 김자점은 의주, 안주, 평양,황주,평산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아 산성을 수축하고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임경업은 병력 3,000명과 백마산성으로, 평안 감사 홍명구와 병사 유림은 평야 주둔군 3,000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으로, 황주 주둔군은 정방산성, 평산 주둔군은 장수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조선군은 대부분 길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으로 웅거하게 되어 적이 침공시 침공로를 직접적으로 방어 할 수가 없었다.
1636년 후금군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명의 중원을 공격하기 전에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재침공을 준비했다. 청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명에 대한 사대롤 청에게, 주전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그리고 왕자들을 볼모로 보내고 더 많은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이 청의 요구에 대해 불응하면서 후금과 국교를 끊는다는 내용의 조서를 팔도에 내리게 되자, 그해 12월 8일 청태종은 용골대를 대장, 마부대를 선봉장으로 삼아 최대 동원 가용병력인 여진족 5만, 한족군 2만, 몽고족 3만 등 총 12만 8,000명의 혼성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임경업이 지키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텅텅 비어 있는 큰 길로 청군은 파죽지세로 내려와 3일만에 평양을 통과하고 보름이 채 안 되어 개경을 점령했다.
평양이 점령되자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먼저 왕자들과 비빈들을 강화도로 보냈다. 뒤따르던 인조는 청군 마부대가 강화가는 길을 끊었다는 보고를 받자 강화가던 길을 돌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거 도망쳤다. 남한산성에는 군사 1만 5,000명과 관원 300명, 그리고 약 50일치의 군량이 전부였다. 청군은 남한산성 외곽에 나무 울타리를 치고 쇠방울을 달아 포위망을 형성하고 느긋하게 술이나 마시면서 인조가 항복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청군은 경기 일원에 노략질을 하면서 부녀자를 강간,겁탈하고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자행하자 어린 아기들이 길바닥에 동사 하는 등 처참한 광경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후방의 4만 근왕병이 몰려 왔으나 청군에게 포위,격멸되었고, 다른 근왕병들이 수차례의 노력에도 청군에게 겁을 먹고 쫒겨갔다. 산성내에서는 군량은 점점 바닥이 나고 있는 중에도 척화파와 주화파간에는 연일 싸움질만 하고 있는 지경에 인조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결국 1월 23일 강화도가 청에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들을 비롯한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남한산성 앞에 서자 농성 47일만인 1월 30일, 주화파 최명길이 인조의 명을 받아 항서를 청태종에게 전하고 삼전도에 나가 항복하게 된다. 청태종에게 항복의 제2등 절목인 세번 절하면서 수항단 단상 저 높이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들릴 정도로 머리를 아홉번 땅에 '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찍는 삼배구고두의 황제 알현 예를 행하고 옥새를 바치면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이때부터 1895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약 250년간 청을 상전으로 모시게 된다.
이런저런 항복 절차를 마친 인조는 가 보란 소리가 없자 밭 가운데 죽치고 앉아 있다가 해질 무렵에야 겨우 도성으로 들어 갔는데, 도성 길은 유령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길바닥에는 수많은 시체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청군 100여 명이 시체를 치우면서 갈 수 있었다. 인조가 창덕궁 양화당에 들어서자 용골대가 청태종이 만든 '고려왕'이라고 쓴 인장을 전달했다. 조선은 청의 요구 대로 신하의 예를 행하고 조공을 약속하였으며 명과 단절하고 청의 원병 요청시 파병하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조선은 군사를 늘릴 수 없으며, 군사훈련을 해도 안 되고, 성을 쌓거나 수리할 때는 꼭 사전에 청에 보고해야 했다.
26세의 소현세자, 17세의 봉림대군, 삼학사를 비롯한 수많은 대신들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 갔으며, 볼모로 끌려간 삼학사는 청으로 끌려간 후 처형당했다.
* * * *
도르곤은 청태종과 같이 조선 침략은 물론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로 명의 멸망과 청의 영토 학장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어린 순치제의 섭정까지 담당한 인물이다.
효장황태후는 몽고인으로 청은 풍습과 생활이 비슷한 몽고인들과 정치적인 결혼을 서로 장려하여 왕족들이 대부분 몽고 여인을 후비나 첩으로 맞아들였는데, 효장왕태후는 도르곤이 몽고 정벌시 만나 서로 사랑을 하게 된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르곤의 형인 청태종의 비가 되었고 나중에는 왕자 복림(순치제)을 낳는다. 사랑하는 여자를 형인 황제에게 빼았긴 도르곤은 오직 묵묵하게 전쟁에만 임하며 임무를 수행하여 명나라 멸망에 선봉에 서서 명을 멸망시키는데 가장 큰 공훈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도르곤은 청조정에서 절대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그러나 도르곤은 황후인 그녀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청태종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게 되자 청 조정은 왕족인 삼촌들끼리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빗게 된다. 청나라는 전통적으로 주요 국사를 결정할 경우에는 8명의 주요 왕족 제후들로 구성된 제후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되는데, 도르곤 등 삼촌들이 후계자 싸움에서 서로 갈등을 유발하게 되자 결국 효장황태후의 기지로 제후회의에서 효장황태후의 아들인 복림을 황제로 옹립하되 공동 섭정왕으로 도르곤,정친왕,효장왕태후를 지정하게 된다. 어린 복림(순치제)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효장황후와 도르곤 및 그의 형제들이 서로 주도권 경쟁과 권력 투쟁의 암투가 리얼하게 벌어지게 된다. 이런 가운데 효장황태후는 어린 순치제가 친정을 하는 날까지 노심초사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여러 기라성같은 왕족들이 버티고 있어 언제 황위가 찬탈될지 모르는 불안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황후는 자신의 아들 복림, 도르곤, 삼촌 왕족들이 벌이는 권력에 대한 야욕을 억누르면서 어린 황제를 지키기 위해 여러 갈등 문제를 절묘하게 조정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그러나 청은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각 지역의 한족들이 대대적인 반항으로 반란이 발생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 강남 지역 행정 책임자인 범호정과 군사 책임자인 타택간에 반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로 범호정이 다택의 함정에 빠져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된 도르곤이 직접 강남으로 가서 범호정에 대한 심문을 하여 법을 어긴 문제로 현지 재판이 이루어 지고 도르곤은 범호정을 처형하도록 결정을 내리는 순간 황후가 보낸 별감 유공공이 범호정은 경성에서 최종 판결을 받도록 어명을 들고 나타난다. 관련자들이 잡혀와서 일일이 심문을 받고 다택의 음모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자 다택은 범호정과 황후가 결탁하여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라며 노골적으로 황후에게 반기를 든다. 황후 측과 도르곤 측의 증인 대질 심문에서 다행히 범호정에 대한 범법 사실이 허위임이 증명되자 무의로 풀려나면서 황제는 범호정에게 강남 4성을 통치하는 행정관에 임명하여 다택까지도 통솔하도록 직윌르 부여하여 내려 보낸다. 황제는 유사시 긴급한 연락이 가면 군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속히 올라 오도록 밀지를 내린다.
도르곤의 동생인 영친왕 다택은 성격이 과격하여 노골적으로 황후를 미워하며 어린 순치제를 제거하고 도르곤이 황제 자리에 오르도록 도르곤을 충동질 시킨다. 다택은 도르곤 몰래 황제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데, 황제가 사냥을 나가는 날을 선택하여 비밀리에 병사들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황제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게 된다. 순치제가 황실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는 어느날 다택은 수하 병력 수천 명을 풀어 사냥터에 매복하였다가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황후가 미리 알고 황실 친위 병력을 급히 사냥터로 보낸다. 황제는 병력 300명으로 다택군 수천명을 상대할 수가 없어 친위대장이 살해되는 등 거의 전멸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다행히 급하게 달려온 친위부대가 다택군을 물리치면서 황제가 살해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구하게 되고, 이에 다택의 암살 음모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황제 살해를 실패한 다택은 도르곤 진영으로 몸을 피하면서 도르곤을 충동질하여 경성을 공격하여 황제를 제거하기 위해 황제군과 일전을 준비한다. 도르곤은 다택의 꾀임에 빠져 경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다택에게 정황기,황정기 2개 부대 지휘권을 넘겨준다.
도르곤 측 전력은 홍의포 80문, 청의 최정예 2개 팔기군 16만 명이 출전을 준비하는 가운데 황후는 도르곤 측의 경성 공격을 예견하고 경성에 남아 있는 8만의 병력으로는 도르곤 측과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강남의 4성 총독 범호정에게 가용병력을 최대한 긴급 출동시켜 경성으로 올라와 도르곤 측에 대응하도록 하는 한편, 강남의 병력이 도착하는 시간은 이틀내지 삼일이 소요되는 먼 거리라 황후는 자신을 지원할 병력이 도착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도르곤 측 진영 정문에 천막을 치고 죽음을 불사하고 병력 출동을 막는다. 도르곤은 16만 정예 팔기군과 최신 홍의포 80대를 가진 무적의 팔기군으로 황제 측 군대 8만을 괴멸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도르곤 측이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중, 범호정이 이끌고 온 선발대인 강남 지원병 10만 명이 이틀만에 도착하여 경성의 황제군 8만과 합쳐 도르곤 진영을 포위하고 대치한 가운데, 양측은 긴장감이 흐른다. 황후는 황제,범호정 포함한 중신들과 상의 한 결과 싸움이 벌어지면 황제군이 도르곤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양측이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황후는 황제를 포함한 황제군 전체 지도부가 도르곤군 진영을 찿아간다.
도르곤 측과 마주한 황후는 황제 자리를 원한다면 자신을 포함한 지도부 전부를 이 자리에서 죽이라고 하면서 도르곤 측과 담판을 짓는다. 범호정을 포함한 황제 측 지도부 각자가 모두 이자리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충돌을 막고 황후의 제안을 받아 들이도록 충언한다. 황후는 청의 미래를 위해서 서로 피를 흘려서는 안되며 황제를 암살하려 한 다택의 충동질에 도르곤이 흔들리지 말도록 권유하며 도르곤이 진정으로 황위가 그토록 탐이 난다면 자신이 먼저 독약을 먹고 죽을테니 황제를 포함한 모두를 이자리에서 죽이라고 하면서 숨겨온 독약을 꺼낸다. 이에 놀란 도르곤이 독약을 달라고 하여 받은 다음 자신은 청을 일으킨 큰 역활을 한 사람으로 황제 자리도 양보하고 지금까지 섭정왕으로 지내온 점과 황제 자리는 원래 자신의 것이라면서 황후와 설전을 벌인다. 그러다가 나머지 사람들은 기다리게 하고 황후,범호정,정친왕만 대동하고 별도의 지하 별실로 가서 술을 꺼내서 황후가 자결용으로 가지고 있던 독을 넣은 술을 먼저 가까이 있는 병사에게 한잔 먹이자 독주를 마신 병사가 그자리에서 쓰러진다. 다음에는 황후에게 따르면서 마지막 할 말을 다하게 한다. 황후는 자신은 도르곤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황제 자리는 원래 도르곤 것이니 자신이 죽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살려 주고 황제 자리는 가져 가 청을 반드시 부흥시켜라면서 독이 든 술을 마신다. 수행하였던 정친왕과 범호정이 놀라 어쩔줄 모르는 사이 독주를 마신 황후가 쓰러지자 도르곤이 황후를 침대에 눞힌다. 그런다음 도르곤은 또 독이 든 술을 다음 사람에게 줄 듯이 따른 다음 황제를 잘 보필하고 청의 부흥을 반드시 도모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이 그 술을 마신 후 모두 나가라고 명령한다.
한편 모두가 나가자 도르곤의 충복인 하락회가 사전 도르곤의 지시대로 황급히 황실 어의를 불러 해독제를 황후에게 먼저 먹인 다음 시음한 병사에게도 먹이자 조금 후 황후가 깨어 나게 된다. 도르곤이 독주를 마신 것을 알게 된 황후는 울면서 도르곤에게 해독제를 급히 먹인다. 잠시 후 도르곤이 다시 살아나고...
한편 다택은 갑작스런 감기 몸살로 드러 높게 되는데, 천연두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황제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도르곤과 황후가 죽었다는 사실에 서로 대치했던 군대는 본대로 해산하게 되고, 황제 직속으로 팔기군의 지휘권이 넘어오게 된다. 나중에 도르곤과 황후가 살아 났다는사실에 황제와 대신들은 환호하고...청 조정은 순치황제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재편되는 가운데 다택이 천연두 병으로 인해 결국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그로인해 황제는 다택의 죽음을 애도하고 황제에 버금가는 대우의 장례를 명령하고 진정한 친정을 시작하게 된다. 다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정은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고 황제의 17세 생일과 도르곤과 황후의 결혼식 준비로 청 조정은 축제 분위기에 빠져 있던 어느날 황제가 범호정,정친왕 등 제신들의 권유로 오랫만에 도르곤을 찿아 가 문안 인사를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황제는 상황제 호칭인 '부황'이라는 호칭으로 도르곤을 부르면서 소인이라고 자신을 칭하자 그 말을 들은 도르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날 기분이 좋아진 도르곤이 갑자기 사냥을 준비하여 사냥터로 나가게 된다. 도르곤이 사냥터로 나가자 도르곤을 찿아 왔던 황후가 도르곤이 사냥터로 나갔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조여오는 통증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도르곤이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직감한 황후는 급히 말을 타고 사냥터로 급히 달려간다. 그즈음 도르곤은 뿔이 달린 잘 생긴 사슴을 발견하고 녹각을 결혼식날 황후에게 선물로 줄 요량으로 사슴을 직접 잡겠다며 활을 들고 사슴을 쫒는다. 한발... 두발...세발을 쏘았건만 사슴은 맞지 않고 계곡을 건너 뒤돌아 보면서 설금설금 도망을 가는게 아닌가! 도르곤은 사슴을 잡겠다는 일념에 계곡을 건너 뛰기로 하고 말을 달려 계곡을 넘으려는데, 그만 말과 같이 계곡 밑으로 떨어져 중상을 입게 된다. 그 순간을 예감한 황후는 그를 바라 보면서 '도르곤! 도르곤!'을 오치면서 달려오고...
결국 도르곤은 며칠을 병상에서 신음하다가 황후의 가슴에 안겨 조용히 숨을 거둔다. 청을 이룩하고 중원을 통일하여 근세 중국을 이룬 기초를 다진 위대한 섭정왕 도르곤! 사랑을 위해서 황위도, 천하도 버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살았던 사나이... 아름다운 미모와 지혜로움으로 도르곤을 끝까지 사랑했던 여인 효장황태후!
그녀는 순치제의 아들 현엽(강희제)이 황제에 오른 후 소성태황태후로 봉해져 불렀으며 손자인 강희제가 통치하는 청이 융성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사랑과 눈물, 자식에 대한 뜨거운 모정, 그리고 도르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한 체 조용히 홀로 살다가 1688년 강희제 27년 76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하였다. 그녀는 청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황권을 안정시키면서 어떠한 고난과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청의 부흥을 바라던 여인이었다.
황후와 도르곤 측이 벌이는 권력 투쟁의 치열함과 그런 갈등을 웃음과 눈물로 때로는 죽음을 불사하는 당당함으로 황후가 보여주는 사랑과 권력, 모성애 간의 인감심리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우리들 역사와 비교할 때 흥미롭다.
채널 '칭(Ching)'은 2009년 1월 현대백화점계열 종합유선방송사업자 HCN이 인수한 HCN미디어에서 운영하는 드라마 전문 채널로 중국, 대만, 홍콩 등 다양한 중화권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홈페이지에서 재방을 보려면 유료이다.주간에 방영시 방송상태가 불안정한 게 흠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주요 장면이 몇 분간씩 먹통이 되곤한다.
대청풍운(大清风云,清宫风云)의 초기 청나라 시기 효장황태후와 도르곤, 순치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2005년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 효장황태후 대옥아 - 허청
- 예친왕 도르곤 - 장풍의
- 순치제 복림 - 당이낙
- 홍타이지 - 강문
- 범호정 - 손순
- 색니 - 서보충
- 예친왕 다탁 - 이광결
- 영친왕 아제격 - 양립산
- 범호민(범호정의 형) - 왕회춘
- 소극살합 - 장호
- 소란 - 한효
- 오배 - 곽도
- 유광재(유공공) - 후정민
- 오랍대복진(효열무황후) - 도혜민
사전에 나와있는 내용을 발췌했다.
도르곤
도르곤(중국어: 多爾袞 duō ěr gǔn[*] 둬얼군; 만주어: , 1612년 11월 17일 ~ 1650년 12월 31일)은 청나라 초기의 황족이다.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14남으로 예친왕(睿親王)의 직위에 있었다. 순치제의 섭정이 되었고, 청나라가 건국된 때부터 지도력을 발휘했다. 추존된 묘호는 성종(成宗)이고 시호는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이다.
생애 [편집]
도르곤의 어머니는 누르하치의 4번째 왕비였고 오랍나랍 씨 출신의 황후로, 누르하치가 죽을 때에는 순사를 명령받았다. 1626년 예친왕(睿親王)에 봉해졌다.[1] 홍타이지 치하에서 몽골의 차하르를 토벌하는 것으로 공적을 올려서 실력자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정벌하는 데 기여하였다.
순치제는 부황의 갑작스런 붕어로 제후회의에서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그때 순치제의 나이 6세였다. 제후 회의는 순치제의 나이가 어려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하치의 6남 정친왕 지르하랑을 각각 좌우 섭정왕으로 삼아 정무를 대리케 하였다. 득히 순치제가 즉위하게 된 것은 숙부인 도르곤이 강력하게 추천한 덕분이었다.
1643년 어린 순치제가 즉위하자 도르곤은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의 지위로 섭정을 하였다.
도르곤은 1644년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죽고 명이 멸망하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넘어 함께 이자성을 공격, 어부지리로 중국 대륙을 거의 통일하였고, 명의 수도 베이징에 들어가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라고 선포하였다. 도르곤은 이자성을 체포하라 명령하였고, 이듬해인 1645년 이자성은 쫓기는 도중 살해당한다.
도르곤은 1650년에 죽었다. 그가 죽자 순치제는 그를 추숭하여 묘호를 성종(成宗) 의황제(義皇帝)로 추숭하였다.
가계
- 조부친 : 현조선황제 애신각라 탑극세(顯祖宣皇帝 愛新覺羅 塔克世)
- 조모친 : 현조선황후 희탑랍씨(顯祖宣皇后 喜塔拉氏)
- 부친 : 태조 고황제 애신각라 노이합적(太祖 高皇帝 애신각라 노이합적)
- 모친 : 대복진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大福晉 孝烈武皇后 烏拉那拉氏)
- 이복형 : 태종 숭덕문황제 애신각라 황태극(太宗 崇德文皇帝 愛新覺羅 皇太極)
- 조카 : 세조 순치장황제 애신각라 복림(世祖 順治章皇帝 愛新覺羅 福臨)
부인 & 자녀들
- 경효충공정궁원비 박이제길특씨(敬孝忠恭正宮元妃 博爾濟吉特氏 1611~1649), 시호는 경효충공의황후(敬孝忠恭義皇后)
- 측복진 동가씨(佟佳氏) : 상서 몽아도(蒙阿圖)의 딸
- 측복진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이름 찰이망(紮爾莽) / 찰로특부 태길 근두이(紮魯特部 台吉 根杜爾)의 딸
- 측복진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과이심 태길 납포희서(拉布希西)의 딸
- 측복진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과이심 태길 색낙포(索諾布)의 딸, 원래 호격의 적복진이었다
- 측복진 이씨(李氏 ?~1662) : 조선 종실 금림군 이개음(金林君 李愷音)의 딸, 의순공주(義順公主)
- 첩 공제특씨(公齊特氏) : 찰합이 태길 포연도(布延圖)의 딸
- 첩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태길 두사갈이탁농(杜思噶爾卓農)의 딸
- 첩 제이막특씨(濟爾莫特氏) : 방도무(幇圖武)의 딸
- 첩 이씨(李氏) : 조선 여인, 이세서(李世緖)의 딸, 도르곤의 외동딸을 낳았다.
- 첩 오이고예(吳爾庫霓) : 과이심친왕 오극선(吳克善)의 노비, 도르곤 사후 순장됨
효장문황후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孝莊文皇后博爾濟吉特氏, 1613년 3월 28일/음력 1613년 2월 8일-1688년 1월 27일/음력 1687년 12월 25일)는 청나라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의 비이며, 순치제의 모후이다. 이름은 포목포태(布木布泰). 시호는 효장인선성헌공의지덕순휘익천계성문황후(孝莊仁宣誠憲恭懿至德純徽翊天啓聖文皇后)이며 청나라 유일의 그리고 중국 최후의 태황태후(太皇太后)이다.
생애
1613년 몽고 과이심(科爾沁)에서, 과이심패륵 채상(科爾沁貝勒 寨桑)의 막내손녀로 태어났다.
1625년(천명 10년)에 누르하치(努爾哈赤)의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의 처가 되었고, 1636년(숭덕 원년), 홍타이지가 연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그녀는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에 봉해졌다.
이후 아들 복림이 즉위하여 순치제가 되면서 황태후에, 다시 손자 현엽이 즉위하여 강희제가 되면서 태황태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존호를 받으며 소성태황태후(昭聖太皇太后)로 불렸다. 1688년(강희 27년)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라고 부른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부인이자 황후인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는 그녀의 고모이고, 홍타이지의 비(妃)인 민혜공화원비(敏惠恭和元妃)는 그녀의 친언니이다.
자녀
순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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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제3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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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643년 ~ 1661년 |
황후 | 폐후 박이제길특씨 효혜장황후 효강장황후 |
부황 | 숭덕제 |
모후 | 효장문황후 |
이전 황제 | 숭덕제 |
다음 황제 | 강희제 |
묘호 | 세조(世祖) |
시호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 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 至仁純孝章皇帝) |
순치제(順治帝, 숭덕(崇德) 3년 음력 1월 30일 (1638년 3월 15일) ~ 순치(順治) 18년 음력 1월 7일 (1661년 2월 5일)?)는 청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643년 ~ 1661년)이다. 휘는 복림(福臨),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연호는 순치(順治), 법명은 행치(行痴)이다. 만주어로는 이지슌 다산 한(Ijishūn Dasan Han)[1]이라 하고, 몽골어로는 아이비어 자사크 칸(Eyebeer Zasagch Khaan)[2]으로 불리기도 한다. 홍타이지의 9남으로 어머니는 그의 후궁이었던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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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638년(숭덕 2년) 3월 15일에 성경(盛京) 고궁 영복궁(永福宮)에서 장비(莊妃)인 효장문황태후 박이제길특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643년 부황의 갑작스런 붕어로 제후회의에서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그때 복림의 나이 6세였다. 제후회의는 복림의 나이가 어려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누르하치의 14남이자 복림의 숙부 예친왕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의 6남 정친왕 지르하랑을 각각 좌우 섭정왕으로 삼아 정무를 대리케 하였다.
그가 즉위하게 된 것은 숙부 도르곤이 강력하게 추천한 덕분이었다. 도르곤은 1644년(순치 원년)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죽고 명이 멸망하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넘어 함께 이자성을 공격, 어부지리로 중국 대륙을 거의 통일하였고, 명의 수도 북경에 들어가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라고 선포하였다. 도르곤은 이자성을 추포하라 명령, 이듬해인 1645년(순치 2년) 이자성은 쫓기는 도중 살해당한다. 1650년 도르곤이 죽자 순치제는 비로소 청나라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치세에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대포 기술과 고딕 양식의 건축 기술을 들여와 북경에 고딕 양식의 성당을 지었다.
순치제는 몽골 출신의 어머니 효장태후를 싫어하여 당시 역시 싫어하던 몽골 출신인 황후를 폐하고 새로운 황후 효혜장황후를 세웠는데, 그녀 역시 몽골 출신이었다. 그는 현비 동악씨라는 후궁을 총애하였는데, 그녀가 1660년(순치 17년)에 사망하자, 정치에 뜻을 잃었다. 얼마 안가 순치제는 그녀를 황후로 추시하였으나, 대신들은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61년(순치 18년)에 황위를 황태자인 3황자 현엽에게 물려주고 24세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했는데, 일설에는 동악씨의 죽음과 동악씨의 황후 추서 반대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해서 제위에서 물러난 뒤 오대산으로 출가를 했고, 1669년(강희 8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심지어는 손자인 옹정제 초기까지 살고 입적하였다고는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출처 필요]
황후
- 폐후 박이제길특씨(廢后 博爾濟吉特氏 ?~?)
- 효혜장황후 박이제길특씨(孝惠章皇后 博爾濟吉特氏 1641~1717)
-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 1640~1663)
- 효헌단경황후 동악씨(孝獻端敬皇后 棟鄂氏 1639~1660)
후궁
- 정비 동악씨(貞妃 蕫鄂氏 ?~1661) : 세조 사후 순장
- 숙혜비 박이제길특씨(淑惠妃 博爾濟吉特氏 ?~1713)
- 공정비 박이제길특씨(恭靖妃 博爾濟吉特氏 ?~1689)
- 단순비 박이제길특씨(端順妃 博爾濟吉特氏 ?~1709)
- 영각비 동악씨(寧慤妃 蕫鄂氏 ?~1694)
- 도비 박이제길특씨(悼妃 博爾濟吉特氏 ?~1658)
- 각비 석씨(恪妃 石氏 ?~1667)
- 서비 파씨(庶妃 巴氏)
- 서비 진씨(庶妃 陳氏)
- 서비 당씨(庶妃 唐氏)
- 서비 뉴씨(庶妃 紐氏)
- 서비 목극도씨(庶妃 穆克圖氏)
- 서비 왕씨(庶妃 王氏)
- 서비 양씨(庶妃 楊氏)
- 서비 오소씨(庶妃 烏蘇氏)
- 서비 납라씨(庶妃 拉喇氏)
아들들
- 장남 우뉴(牛鈕 1651~1652) : 서비 파씨 生, 2세에 요절
- 차남 유헌친왕 복전(裕憲親王 福全 1653~1703) : 영각비 동악씨 生
- 3남 성조 현엽(聖祖 玄燁 1654~1722) : 효강장황후 동가씨 소생, 제4대 천고일제 성조 강희인황제
- 4남 영친왕(榮親王 1657~1658) : 효헌황후 동악씨 生, 3개월만에 요절
-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1657~1703) : 서비 진씨 生
- 6남 기수(奇授 1659~1665) : 서비 당씨 生, 7세에 요절
- 7남 순정친왕 융희(純靖親王 隆禧 1660~1679) : 서비 뉴씨 生, 19세에 요절
- 8남 영간(永幹 1660~1667) : 서비 목극아씨 生, 7세에 사망
딸들
- 장녀(1652~1653) : 서비 진씨 生
- 차녀 화석공각공주(和碩恭慤公主 1653~1685) : 서비 양씨 生
- 3녀(1653~1658) : 서비 파씨 生, 16세에 요절
- 4녀(1654~1661) : 서비 오소씨 生, 8세에 요절
- 5녀(1654~1660) : 서비 왕씨 生
- 6녀(1654~1661) : 서비 납라씨 生, 5세에 요절
- 양녀 화석화순공주(和碩和順公主 1648~1691)
- 양녀 화석유가공주(和碩柔嘉公主 1652~1674)
- 양녀 고륜단민공주(固倫端敏公主 1653~1729)
![](http://pds13.egloos.com/pds/200902/13/09/a0107809_49944d8096672.jpg)
대청풍운 大淸風雲
<캐스팅>
장풍의 - 도르곤
명 말기, 청의 건국과 함께 황실의 암투와 혼란, 사랑 등
중국 역사에서 격동의 시대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http://pds13.egloos.com/pds/200902/13/09/a0107809_49944b65ad3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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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ds10.egloos.com/pds/200902/13/09/a0107809_49944c304fe60.jpg)
첫 영화는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의 합작영화《변주변창 邊走邊唱, 1988년》이며
1992년 싱가포르로 진출하여,《백인성금百忍成金》등으로 동남아등지에서 인지도를 높였으며
이 여파를 몰아《東邊日出西邊雨》,《秦頌》,《來來往往》,《說好不分手》등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
2001년 許晴은 《소오강호笑傲江湖》의 임영영역을 맡음으로서 확고부동한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http://pds14.egloos.com/pds/200902/13/09/a0107809_49944c3935750.jpg)
-서초동 퍼옴,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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