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여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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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모과
군이 요동치고 있다.
이국방장관의 서한 파문으로 청와대에선 후임 국방장관에 김태영 합참의장을 내정했다. 이장관이 물러난다는 소식에 목을 빼고 정치권에 줄을 대고 있던 수 많은 예비역 장성들이 허탈에 빠졌을 것이다. 김태영 장관 예정자가 육사 29기이므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기생을 포함한 선배들은 모두 군을 떠나야 할 것이다. 짧은 우리군의 역사에 비해 예비역 4성장군 출신들이 너무나 많으며 우수한 예비역도 많지만 격변기에 어수선한 틈을 타서 하루아침에 별을 몇개나 달고 4성장군이라는 간판을 단 졸장들도 많다.
우수한 예비역은 평소 열심히 공부하며 청렴하고 솔선수범하며 전략이나 전술면에서 식견이 뛰어나고,부대관리나 부하사랑이 남다른 덕장으로 부하들에게 꿈과 비젼을 제시하며 모든면에서 솔선수범하여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나, 졸장들은 자신이 승진하기 위해서 정치권에 줄을 대고 사조직을 만들어 군권을 독식하며 평소 공부는 커녕 전략.전술에 대한 식견도 부족함은 물론 수시로 부대공금을 유용하는가 하면 부하들로부터 뇌물을 받는 정도에 따라 평정을 주고 미운 부하들을 대할 때는 욕설과 폭행을 일삼았다. 또 미련한 사람이 고집은 강하여 부하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상급자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수시로 음주오락에 심취하여 부대관리를 소홀히 함은 물론 그로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모든 것을 부하탓으로 돌려 처벌주기에 급급하고 부하들의 복지와 사기는 커녕 매사에 부하들을 노예부리듯 하며, 상관에게는 아첨하며 부조리한 인사관행으로 부하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사람이며 미래에 대한 비젼과 꿈을 부하들에게 주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소위 장군이지만 됨됨이에 따라 하사,병장 별칭을 듣던 사람들이다.
이대통령은 김태영 장관을 기용함으로써 군에 대대적인 대수술이 단행될 전망이다. 김태영 장관 내정자의 동기생인 육군총장을 비롯하여 모두 현역을 떠날 전망이며 1년 후배인 30기 대장 3명 가운데 합참의장으로는 이성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유력시 되고 있으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자리는 1군사령관인 김근태 대장이나 3군사령관인 이상의 대장 중에 선발될 전망이다. 두 사람 모두 인격이나 성품이 훌륭한 장군들이며 누가 선발되어도 젼혀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나 둘 중 선발되지 못하는 사람은 군복을 벗어야 할 것이다. 후임 육군총장으로는 현육참차장이나 합참의 김기수 중장이 고려되고 있다고 한다. 일반 출신으로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후원하는 김종태 보안사령관이 대장으로 진급하여 군사령관에 보직될 전망인 모양이다. 끝을 봐야 알겠지만 김보안사령관은 시운을 정말 잘 타고난 사람인 것 같다.
군인들의 승진 한계는 뻔하다. 4성 장군이면 현역 최고의 계급으로 군 생활에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으며 군출신으로 국방장관 자리에 오르는게 최후의 승자인지도 모른다.
군인들은 군복을 벗을 때 가장 충격이 크며 계급이 높을 수록 그 충격은 아파트 높이에 비유한다고 한다. 또 살아온 습관상 조직과 권력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게 군출신들이다.
문제는 전역 후다.
전역 전에는 군이라는 특수한 조직의 우두머리로 제왕처럼 군림하다가 전역 후 집안에 틀어 박혀 있다가는 대부분 엄청난 스트레스로 정신적,육체적으로 쉽게 망가져 일찍 죽는 경우가 많으며 전역 후 10년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한다. 군출신들이 옛날처럼 사회에서 환대받는 곳은 아무 곳도 없다. 군에서는 장군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누리며 잘 지냈으나 사회로 나오는 순간 사회 이등병인 셈이다. 영관장교 이하는 환경미화원이던 아파트 경비던 무슨일이던지 할 수 있으나 장군으로 전역하면 아무일이나 할 수가 없다. 본인은 하고 싶어도 성우회에서 제지하며 주변에 소문이 나면 기사감이 되기 쉬우며 또 헛껍데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을 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군에 오래 근무할수록 계급이 높을 수록 사회생활은 거의 바보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회 사기꾼들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게 군출신들이라고 한다. 전역 후 사업을 한답시고 투자하면 100% 망하게 되어 있다. 동업을 하거나, 돈을 빌려 주거나,보증을 잘못 서면 알거지가 되기 쉽다. 목에 아무리 힘을 빼려도 빠지지 않는게 군출신들이다. 전역 후 아무곳이나 취업이 되지 않으니 장군 출신들은 어찌어찌하여 2~3류 지방대학에 안보관련 출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상부의 압력에 의해 대학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박사 학위도 없으며 국제적인 감각도 없고 기존 학자들의 논문을 복사하거나 추상적인 이론으로 강의를 진행하며 청강생도 적다. 대학에서 반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요즘 학생들도 군인과 안보에 대체로 무관심하여 흥미의 대상이 되지도 않으며 일반 교수들도 무시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
전역 후 취업이 되면 다행이나 지금은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이라 취업도 어렵다.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자격증,학위가 있다면 몰라도 대부분 군대라는 울타리 속에서 반복된 훈련과 교육, 승진을 위한 치열한 눈치보기 근무, 기관들의 감시 감독, 경력 쌓기에 급급하다 보니 사회를 보는 시각은 거의 무지에 가깝게 된다. 승진이 최고의 가치이며 동기생이 승진할때 자신도 승진을 하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군에서 낙오자가 된다. 특히 일반 출신에 비해 육사 출신은 선.후배 관계가 철저하기 때문에 동기생 그룹에서 진급시 1차로 진출하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낙오자가 되기 때문이다.
전역 후 골프를 치려면 군인공제회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남성대,육사,남수원 군 골프장이나 공군비행장, 군사령부,육군항공사령부를 이용해야 한다. 일반 골프장을 이용하기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한번 나갈 때마다 최소 20~30만원 이상의 비용이 든다. 또 내기라도 한다면 더 들 것이다. 예비역이 많으니 군골프장에 부킹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그래서 9홀의 공군비행장 골프장이나 구파발의 미니 골프장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골프 인구가 늘어나 그곳도 쉽지 않다. 일반골프장을 이용하는 예비역이라면 민간 스폰서가 초대했거나, 현역 시절 부인 몰래 착실하게 모아 둔 돈이라도 좀 있거나, 아니면 열심히 남모르게 치부를 했거나, 아니면 부인이 열심히 부동산 투자를 해서 건물이나 점포,아파트,땅에서 임차수입이라도 나오거나, 아니면 거액의 유산받았거나, 아니면 남 모르는 다른 수입원이 있으면 몰라도 단지 연금만 받는 입장이라면 아마 골프채는 얼마 안가서 남에게 주거나 처분해야 할 것이다.
전역 후 취업은 하늘에 별따기다. 3공 시절만 해도 군 장성은 전역 후 대부분 공기업 사장으로 천거되거나 취업이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전문성이 있어도 어렵거니와 자격증이 있어도 취업이 안되어 노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기꾼들에게 속아 바지사장을 하다가 퇴직금을 몽땅 날리고 빚만진 알거지가 되어 이혼을 당하고 집을 나간 후에는 연락도 두절되고 노숙자 신세가 된 사람도 있다. 또 부인이 노름이나 계모임,돈놀이,주식에 빠져 집안이 망한 사람도 많다. 중소기업에 회장,감사,부사장,특수사업부 등의 직함으로 친척,친구나 어떤 인연으로 사기업에 취업이 되어도 연봉 이상의 이익을 회사에 기여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2년을 버티기가 힘들다. 현직에 있을 때는 몰라도 전역 후 국방부나 각군본부,중앙경리단,조달본부 등 군부대에 인맥을 이용하여 로비를 하지만 성사가 쉽지 않다. 또 정부 부처별 유신사무관 선.후배나 실무자를 만나 계약건에 대한 협조를 부탁해도 성사가 힘들다. 이미 남모르게 장기간 연결된 인간관계 고리를 쉽게 끓을 수가 없으며 만약 성사가 된다해도 기존 거래업체들이 투서라도 넣게되면 여러사람이 다치기 때문에 성사가 어렵다. 과거 수많은 사례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갑'의 위치에서 '을'의 위치가 되니 요즘은 특히 몸을 사리느라 같이 대리고 있던 부하들도 무시하고 예비역을 만나주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1~2년이 지나면 약발이 떨어지면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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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정문 연못의 연꽃
하나회 사건
군에 하나회가 있을 때는 하나회끼리 자리와 승진이 보장되었으나 기타 부류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김영삼 시절 국방장관에 비하나회 출신인 K모씨가 기용되면서 하나회는 숙청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K씨는 전방 사단장을 지낸 3성장군 출신으로 사단장 시절부터 인품이 뛰어나 연대장/대대장/참모장교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다.
한가지 예를들면, 그가 사단장으로 재직시 어느 예하대대에서 사단 시범을 보이게 되었다.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사단장은 해당 대대장을 조용히 불러 시범에 대한 세부적인 지침을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시범 당일 성공적으로 시범이 끝난 후 사단장이 훈시하는 자리에서 대대장을 극구 칭찬하는데, 자신이 알려준 착안사항을 대대장이 착안한 것처럼 칭찬하는 것이다. 해당 대대장은 사단장의 자상하고 세밀한 부하사랑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그가 국방장관, 안기부장 재직 동안 K씨가 사단장 시절 같이 근무했던 0사단 출신 중 진급에 해당된 대부분의 참모.연대장,대대장,직할대장들이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참모총장,군사령관,보안사령관,국방부/육본 주요보직은 모두 그들이 차지했다. 대령에서 장군 진급에 세번이나 낙방하였던 한 참모는 마지막으로 진급되어 나중에는 3성장군까지 달고 기무사령관까지 역임했다. 바야흐로 그 당시는 0사단 출신들의 전성기였다.
그 시절 하나회 사건이 터지면서 군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K국방장관에 의해 진행되었다.
하나회 탄생 배경
하나회의 대부 윤필용 장군
박정희 시절, 윤필용 장군은 육사8기 출신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파워의 소유자였으며 이른바 하나회의 후원자였다. 그러나 요정에서 술마시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하야발언이 빌미가 되어 결국 구속된다. 이후 1975년 석방되어 5공화국에서 도로공사 사장과 담배인삼공사 사장을 맡았다.
윤필용 사건이 일어나기전 1970년대에 들어와 하나회 세력은 더욱 커졌다. 1973년 1월 전두환은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서는 처음으로 4명이 별을 달았다. 육사 후배들은 진정한 그들의 선배는 4년 교육과정을 마치고 임관한 육사 11기부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월 초 전두환은 손영길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이 베푼 만찬에 초대받아 크라운 4기통 세단 승용차와 금일봉을 하사받았다. 뒤이어 노태우와 정호용도 준장으로 진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에게 '一心'(일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하였다. 핵심 멤버들이 장군으로 진급함으로써 하나회는 군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선배 장교들도 하나회를 지원하는 측과 견제하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윤필용(尹必鏞) 수경사령관,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서종철(徐鐘喆) 국방장관, 차규헌(車圭憲) 2군사령관, 진종채(陳鍾埰) 보안사령관, 유학성(兪學聖) 3군사령관, 황영시(黃永時) 육군참모총장, 김시진(金詩珍) 헌병감 등이 이들을 지원하였다. 특히 윤필용 장군은 같은 경상도 출신의 하나회 후배들을 적극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하나회의 대부(代父)라고 불렸다. 반면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 정승화(鄭昇和) 장군 등은 하나회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세력다툼의 과정에서 1973년 '윤필용 사건'과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3년 4월의 '윤필용 사건'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李厚洛)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거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권익현, 신재기 등 장교 10명이 구속되었고, 안교덕, 정동철, 배명국, 박정기, 김상구, 정봉화 등 31명이 예편되었으며, 24명이 인사이동 그리고 160여명이 감시대상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민간인으로서 육사 11기와 가깝게 지내던 이원조(李源祚) 제일은행 차장이 해직되고, 윤필용 장군과 가깝게 지내던 김연준(金連俊) 한양대 총장 겸 대한일보 사장이 구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명되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초조한 마음에 '김대중 납치 사건'을 벌였다가 해임되었다.
유신 직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서 윤필용이 박정희에 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은 병력동원과 같은 구체적 거사계획을 잡은 것은 없기 때문에 쿠데타 모의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비영남파 세력이 군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나회를 상대로 집요한 수사를 벌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윤필용 약력
1961년 초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대리
1962년 연대장 1963년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분석과장
1965년 육군 방첩대장
1968년 사단장
1970년 제 3대 수도경비 사령관
1973년 육군 소장 예편
1973년 업무상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8개 죄목으로 징역 15년, 벌금 2000만원, 추징금 590만원)
1975년 석방 1980년 제 4대 한국도로공사 사장
1982년 한/미 친선회 이사 1987년 한국전매공사 이사장
1989년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
수상경력
월남 1등 육군훈장
을지무공훈장
태국2등 무공훈장
자유중국 은휘훈장
윤필용장군 월남전투사항
1965년 10월 12일 서울 여의도 광장(당시 비행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보병 수도사단 맹호부대는 초대 사단장 채명신 소장의 지휘로 1965년 10월 16일 부산 3부두를 출발, 1965년 10월 22일 월남 퀴논에 상륙하여 인근지역에 주둔했다.
선발대가 출발한 1965년 9월 25일부터 1973년 3월 7일까지 파월기간 동안 114,902명(장교 7,562명, 사병 107,340명)이 참전하여 2,111명(장교 186명, 사병 1,925명)이 전사하고 4,474명(장교 236명, 사병 4,228명)이 부상하였다. 초대 채명신 사단장에 이어 유병현, 정순민, 윤필용, 김학원, 이희성, 정득만 소장이 지휘를 맏았다.
파월기간중 521회의 대부대 전투와 174,586회의 소부대 전투를 실시하여 총 175,107회에 전투를 치루었다.
퀴논 지역에 문화센터, 학교건물, 교량 댐,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여 퀴논시 당국에 기증하는 등 많은 대민지원사업 등을 벌였으면 1972년 4월 18일부터 5월 15일까지 약 한달 동안 파월 한국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안케패스 전투를 비롯하여 1966년 8월의 두코작전, 월계작전, 돌풍작전, 맹호작전, 혜산진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세계전사에 새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 전술기지 운용 개념을 확고히 입증한 둑코전투 승리는 월남전의 기적으로서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월남전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우방의 각국 군부대 전술전략 전문가와 지휘관들이 한국군 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중대단위 전술기지 운용과 대민사업 활동 사항 등을 답습해 가서 교훈을 삼아 '무서운 한국군' 이란 대명사가 되었고 밀림(정글)의 왕자로서 맹호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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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새벽 숲속 등산로 풍경
사건의 결과와 또다른 사조직
명단 살포의 주인공은 육사 31기 중 백 모장교로 밝혀졌다. 그는 하나회 명단을 동빙고 아파트에 전단지를 뿌린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았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수사는 허지부지되고 백모 장교는 조사를 받았으나 별다른 처벌없이 그 후 버젓이 군생활을 계속하였다. 아마 혼자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며 나중에 헤택을 본 상위층의 누군가의 비호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그 사건은 군에서는 엄청난 사건으로 확대되어 대대적인 하나회 숙청으로 이어졌다. 당시 잘나가던 하나회들이 줄줄이 낙마하고 진급에 제외되었으며 주요 보직에서 축출되어 부사령관,부군단장,부사단장 등 한직으로 쫒겨났다. 어느 사단장 출신의 하나회 장군은 국방장관과 회식시 울분을 참지 못하여 폭언을 하는가 하면 취한 상태에서 승용차를 몰다 지하층으로 떨어져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어 하나회에 대한 살육전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9년 그해는 하나회의 수 많은 별이 우수수 낙엽처럼 떨어지는 해였다. 김 전대통령은 구제를 공언했지만 그 다음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나회 숙청작업은 문민정부 내내 이어졌다.
하지만 하나회가 숙청되자 군내에서는 또다른 신흥 사조직인 만나회, 나눔회가 하나회 자리를 채우면서 숙청작업의 순수성에 의혹이 제기되었다. 군권 장악을 위한 음모라는 시각이다. 백대령이 나눔회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회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하나회 제거는 마녀사냥식으로 이뤄졌다”며 “만나회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쓰레기장에 버려진 하나회를 재포장해서 상품화했다”고 분노했다. 하나회는 이미 해체된 조직이라는 주장이다.
명예회복이 때로는 김영삼 정부를 골탕먹이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94년 상무대 사건이 한 예다. 당시 TK 출신이라면서 현역 중령인 하나 회원의 제보로 사건이 시작됐다.
또 지난 대선에서는 후보를 통해 명예회복을 꾀하기도 했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김종필 후보 선거운동에 나섰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회 명예회복이었다.
임종섭(육사 22기)-곽동도(육사 23기)-김석재(육사23기)-김희상(육사24기)-박노숙(육사 24기).
김영삼 정부 군 최고 핵심요직인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거쳐간 사람들이다. 6개월동안 재임한 곽동도 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나회 사람들이다.
인사참모부의 하부 요직은 나눔회가 대물림을 하고 있다. 영관 진급심사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리에 나눔회원인 이모중령에 이어 부모 중령이 맡는 식이다. 이들이 진급심사 때 자기 사조직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인사참모부장의 권한이 더욱 막강해졌다. 김희상 부장 시절, 독립된 인사운영감실이 인사참모부로 편제되면서 견제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인사권은 만나회와 나눔회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하나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신흥 사조직 만나회는 노태우 정부때 이진삼 당시 육군총장과 김진선 당시 육본인사참모부장의 주도로 결성됐다는게 정설이다. 하나회 비주류인 이들이 TK중심의 전두환계에 맞서기 위해 육사 20기부터 29기까지 후배들을 결집시켰다. 만나회에 비해 기수별 숫자가 늘어났고 결속력도 강했다.
강창성 전의원은 “만나회는 공식적으로는 하나회의 마지막 기수에 해당하는 육사 22기부터 34기까지 기수별로 구성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군관계자는 이를 30기대에도 하나회 후신격으로 알자회가 있었지만 만나회 기수만큼 하나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80년 이후 이른바 하나회라는 군 사조직 소속 군인들이 정치에 간여, 정권까지 독식해온 사실에 비추어 군부내에 다시 사조직이 등장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하나회 이후 다시 알자회가 등장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었다.
알자회는 육사 34기에서 43기까지에 걸쳐 매기당 12명씩 모두 120명이 회원인 것으로 밝혀졌다.
알자회는 1976년 말경 당시 육사 3년생이던 34기의 간부생도 중 3명이 최초로 조직을 발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육사 3년동안 명예와 규정을 생명으로 여기며 지내면서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고 개탄하면서 친구를 제대로 알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도우며 살자고 약속하면서 조직 결성에 나섰다는 것. 이들 3명은 모두 크리스찬이어서 예수님의 12제자를 본떠 회원을 12명으로 제한했고 이듬해인 77년 5월에는 소요산으로 등산을 가 모임의 이름을 알자회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알자회는 구성원들이 모두 육사시절 간부생도였다는 게 특징이다.
알자회라는 사조직 결성사실이 외부에 노출된 것은 1986년 이었다. 육사 42기 알자회가 3기 후배들에게 조직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보안사에 발각된 것.
그러나 알자회는 하나회와 같이 일방적인 평가를 받지는 않았다.
알자회를 단순한 친목모임으로 볼 수 없다는 시각은 이미 6년 전에 문제가 제기돼 해체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직이 이어져온 점을 들었다. 알자회의 배후세력이 없는 것으로 돼 있지만 특정한 세력이 뒷받침 해주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심지어는 육사 22기~23기에서 단절된 것으로 알려진 하나회가 명칭을 바꾸어 지속시킨 조직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알자회를 하나회와 동떨어진 모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들은 “군대에서 사조직이라는 것은 젊었을 때 뿐이다. 나중에는 진급이 좁은 문을 뚫기 위해 서로 견제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자연적으로 조직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든 알자회 파문은 ‘하나회'이후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군부내 사조직의 부활이었기에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군인은 군내에서 사조직을 만들지 못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출신별 군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비밀리에 사조직을 암암리에 결성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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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내 사조직 척결과 진급제도 개선
군내에서 사조직은 파벌을 조성하기 쉬우며 하나회와 같은 경우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다. 주요보직과 진급을 독식하며 군내 주류를 형성하여 자신들만의 군대로 영향력을 향사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군의 결속을 와해시키고 이질감을 조장하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자신들만 선택된 선별의식으로 다른 동기생들의 진입을 차단하고 권력을 독식하려는 파벌주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0.26이나 12,12사태를 통해서 군인인 하나회 회원들이 상관을 배신하고 하나회 선후배끼리 무혈쿠테타를 눈으로 잘 보았고 전두환 정권의 태동을 잘 알고 있다. 한국전쟁전 일본군 출신을 포함 국방경비대를 조직시 일제시대 일본군 경력을 고려하여 단기교육을 받고 임관한 기수들이 육사1~10기까지이며 54년부터 4년제 졸업생인 육사11기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후배들은 출신이 불투명한 육사1~10기까지의 선배는 진정한 선배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고 육사 11기부터 진짜 육사 선배로 인정하였다.
5.16 이후 3공시절 군출신들이 전권을 행사할 때 시관학교 지원자가 대폭 늘어 났다. 특히 18기 이후 30기까지 대부분의 육사 출신들은 우수자원이 많았는데, 육사 입시 수준은 서울대를 능가할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지원했다. 그러다가 월남전에서 젊은 소대장들이 무수하게 전사를 하여 소위 부족사태가 발생되자 제3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단기 배출로 매년 수 천명씩 임관시켜 월남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70년 이후부터 2년제로 점점 정착시켰으나 학과 교육 위주가 아닌 실전훈련 위주로 훈련시켰다. 당시 경북 영천에 사기학교(병과학교)가 이전한 현재의 자리에 3사관학교가 설치되었는데, 후보생들은 상급후보생들로부터 구타는 물론 폭행이 전횡하던 시대라 얼차려 중에 사망사고는 물론 정모 학교장 시절에는 무장구보를 하다가 죽어나간 후보생들이 하나 둘 아니었다.
당시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를 가야할 상황이라 이왕이면 장교로 가는게 좋다고 판단하고 3사관학교를 지원하였는데 학군장교들에 비해 수준이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임관 후 전후방 부대에 배치된 3사관학교 출신들은 배운대로 병사들을 쿠타로 일과를 시작하여 구타로 끝냈으며 병사들이 치를 떨었다. 그들은 군생활을 하다가 대부분 제대를 하여 사회로 나갔으나 군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장기지원으로 군생활을 계속했다.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가 커져만 갔다. 일부장교들은 자신이 정식 육사를 나온 장교로 행세하기도 하면서 결혼도 하였다. 다른 출신들에 비해 동기생들 숫자도 많고 진급 경쟁도 치열하였으며 육사,학군출신들에 비해 항상 숫자는 많으나 선후배들간에 결속력도 약하고 학위나 능력이 딸리는 상황이라 소외받는 계층으로 극히 적은 숫자만이 승진하여 장군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한국군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유리한데 진급 공석을 좌지우지 할 수 있기 때문에 파벌을 조성한다는 것은 자신들만 유리한 인사권을 행사하기 쉽다. 즉 장군 진급을 독식하여 그들끼리만 출세를 보장받겠다는 몰염치로 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진급심사가 삼심제도로 비교적 공정하게 평가가 이루어 지지만 과거 단심제로 진급심사를 하던 시대는 능력있는 장교는 심지어 없는 공석도 만들어 진급하는 기막힌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중령급 이상은 경력을 비교해 보면 토토리 키재기다. 갖출 경력은 거의 다 갖추지만 수도권,상부기관,인사관련부서 근무자가 유리한게 우리나라 군 진급 심사 실태이다. 거리가 멀고 근무가 힘든 동부전선 3군단 지역은 누구도 가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은 알 수 없으나 과거에는 힘없고 빽없는 장교들은 그 지역으로 전출갔다고 한다. 군별 순환보직을 장교들에게 적용하였지만 하나회들에게는 예외였다. 청와대,보안사,수방사,특전사, 국방부/육본같은 상급부대 근무자,수도권 근무자, 인사관련 부서 근무자는 수도권을 뱅뱅 돌면서 자신의 경력을 쌓고 평정점수도 만점을 받을 수 있는 부대만 찿아 다닌다. 초군반,고등군사반,육대 성적은 군생활 내내 꼬리를 물고 따라 다닌다. 평정도 지휘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뇌물을 좋아하는 지휘관에게 아무리 열심히 근무해도 마음에 들지 못하면 좋은 평정을 받을 수가 없다. 지휘관에 따라 A지휘관이 근무시에는 최고의 군인이 어느날 B지휘관이 부임해 오면 최하의 군인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이제 군도 개혁을 시도하여야 한다.
미래전에 부응하고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에서 한반도를 통일하고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개혁부터 단행해야 할 것이며 군대를 개인이나 소수집단만을 위한 출세도구로 이용하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공정한 경쟁과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전문성 있는 인력으로 양성해야 한다. 별을 달기 위한 편제가 아닌 보병위주의 편제에서 기계화,특수전,전자전/미사일,전술핵,해.공군 위주의 전력으로 증강되어야 한다.
근무제도와 기관들의 부조리를 견제할 수 있는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수도권 장기/반복 근무자에게 불이익을 주고, 인사분야 근무자는 순환보직을 하되 주특기를 없애고 누구나 보직이 가능해야 하며, 헌병,기무의 동향보고제도를 없애고 본연의 전투준비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어떤 문제가 보고되면 처벌지시만이 능사가 아니며 실태조사 후 보고에만 의지하지 말고 소명기회를 주어야 한다. 기관원들은 평소 용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휘관을 모함하여 허위사실을 보고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기관원들의 횡포에 대해서 전면적인 쇄신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군의 발전은 기대할 수가 없으며 군의 부패는 근절할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후방지역 급식,보급,시설,구매,감독,용역 등의 분야는 기관원들의 먹이사슬이 오랫동안 형성되어 있다.그들은 부패를 조장하고 같이 먹으면서도 보고는 별도로 다 하기 때문이다.
진급심사도 개선하여야 한다.
진급심사를 전면 공개하고 사람에 의한 심사보다 컴퓨터로 점수화하여 계급별 서열을 정하여 공석에 따라 진급시키되 심사 후 결격사유가 없는 한 서열대로 진급시키며, 출신별,부대별 안배에 대해서도 재검토 해야 할 것이다. 또 병과별 공석 안배에 대해서도 전면 재검토 되어야 하겠으며 물자,보급,급식,시설을 취급하는 병과는 과감하게 통합하고 민간 위탁으로 전환시키며 부패와 비리 근절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80년대만 해도 사단별 매년 겨울에 전방 대대막사 A타입 한 동 정도가 화재로 전소되어 총기와 보급품은 물론 사망사고까지 났었지만 보고를 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자체 복구로 마무리를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모두 사고를 은폐하려는 의도이며 이는 결국 부패를 조장하는 지휘관들이었다.
평정/복지제도도 개선하여야 한다.
하급자가 상급자를 평가하는 제도를 포함한 상.하평정이 제도화되어야 하고, 전방지역이나 격오지 근무자에게 가중치 점수를 주어야 하며, 실전/해외파병자에게도 가중치를 주어야 함은 물론 특수수당도 남이 부러워 할 정도로 대폭적으로 주어야 할 것이다. 추가로 군조직 특성상 피라미트 구조로 인해 중간에 도태되는 인재가 많다. 따라서 많은 국가 예산을 들여 양성한 인재들이 조기전역으로 인해 실업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전역 후 사회적응에 따른 적응훈련과 교육제도도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지금 젊은 나이에 어쩔 수 없이 사회로 나온 많은 군간부 출신 예비역들이 취업이 어려움으로 인해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것이다.젊음을 송두리체 군에 투사하고 한창 일 할 중년 나이에 진급 실패라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사회로 나왔지만 자녀들의 학비는 눈덩이 처럼 부담이 되는 현실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간 갈등이 심화되고 가정파탄까지 발생되고 있다.그래서 실업자가 넘쳐나는 현실에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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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숲속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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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넷 8명 중 6~7명 옷 벗거나 이동 불가피
前장관보다 육사 3기수 젊은 장관
將星수십명 물갈이…軍에 개혁바람 넣겠다
李대통령 의지 담긴듯김태영 합참의장(육사 29기)이 국방 장관에 내정된 3일 국방부와 육해공군 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대 등 예하 부대는 하루 종일 술렁였다. 현 이상희 장관(육사 26기)에 비해 3개 기수나 젊은 장관을 발탁한 탓에 총 8명의 대장 중 6~7명이 옷을 벗거나 자리를 옮기고, 그에 따라 수십명의 장성이 이동하는 군 수뇌부 물갈이 후속 인사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당장 김 내정자와 육사 동기인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이 '동기 상관(上官)'의 지휘를 받기는 거북한 입장이어서 거취를 밝힐 가능성이 크다. 또 김 내정자 후임 합참의장으로 육사 30기가 임명될 것으로 예상되고, 그럴 경우 군 관행에 따라 육사 29·30기인 현 4성 장군 중 상당수가 옷을 벗게 되는 상황이 예상된다.그동안 유력한 국방 장관 후보로 거명된 사람은 주로 육사 24~28기 사이의 예비역 장성들이었다. 김 의장도 후보로는 거명됐지만 이처럼 대규모 군 수뇌부 조기 인사가 불가피해져 군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군내에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전망했었다. 합참의장이 국방 장관으로 곧바로 진출한 것은 지난 1996년 김동진 합참의장이 장관이 된 뒤 13년 만이다.군내에선 우선 이번 인사가 군에 자극을 주고 변화와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특히 최근 국방예산 문제를 둘러싸고 이 장관이 삭감 반대 서한을 청와대 등에 보내고 장·차관 간의 갈등이 노출되는 유례 없는 파문이 일어난 터여서 군 수뇌부 물갈이를 통한 분위기 쇄신과 '군기 잡기'의 성격도 있는 것으로 군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군내에선 김 의장이 이 장관의 경기고 4년 후배로 지금까지 세 차례나 이 장관으로부터 같은 자리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 장관의 기존 정책을 단시일 내에 바꾸지 않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강도 높은 군 개혁을 주문할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김 의장은 독일 육사에서 유학한 '독일파'로 수도방위사령관, 합참 작전본부장, 1군사령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매일 5㎞ 이상씩 뛰는 '마라톤맨'이다.이번 인사로 군내 특히 육군의 인사 적체가 다소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는 군 관계자들도 많다. 육군은 현 수뇌부가 사관학교 기준으로 해·공군에 비해 2기수가량 늦어 육군 장성 및 장교들의 불만을 사왔다.김 내정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장관 취임 전에는 합참의장 등 군 수뇌부 인사를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합참의장도 국회 인사청문회 대상이기 때문에 조만간 발표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 내정자가 청문회를 통과해 장관으로 정식 취임하기 전까지는 합참의장과 장관 내정자 신분을 겸하게 된다.후임 합참의장으로는 이성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김근태 1군사령관, 이상의 3군사령관(이상 육사 30기)도 거명된다. 육군참모총장으로는 한민구 육군참모차장이 유력한 가운데 장광일 합참 작전본부장, 김기수 합참 전략기획본부장, 황의돈 국방정보본부장(이상 육사 31기) 등도 거명되고 있다.야전 지휘관인 1·3군사령관과 제2작전사령관은 정승조 육사 교장, 김상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 임관빈 수도군단장, 황중선 1군단장(이상 육사 32기), 김종태 기무사령관(3사 6기), 정두근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3사 7기) 등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유용원 군사전문기자 bemi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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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찍고,쓰고,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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