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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9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우면산의 여름 9

두바퀴인생 2009. 9. 5. 13:32

 

 

우면산의 여름 9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던가?

나라꽃 무궁화에 대한 애정도 점점 식어가듯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초개같이 묵숨을 던진 수많은 독립투사에 대한 기억도 하나 둘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듯 하다.

 

해방 후 36년간 일제의 앞잡이로 조선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데 앞장섰던 수많은 친일인사들을 단번에 척결하지 못한 잘못은 반대로 독립활동 인사들에 대한 천시와 홀대로 이어졌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거나 가족이 모두 흩어지고 가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의 어려움으로 교육은 커녕 달동네 판자집에서 외로이 병마에 시달리다가 대부분 소리없이 죽음을 맞이하며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독립투사들과는 반대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친일인사들이 대거 등용되는 바람에 그들은 재기에 성공하였고 권력과 가진 재산으로 후손들도 호의호식하며 살아 온 현실이다. 그들 후손들은 조상들의 매국행위를 감추기에 급급하였고 그래서 그들의 매국흔적은 하나 둘 감춰지고 가진자로 당당하게 이 땅에 군림하여 왔다. 최근에는 일부 친일 후손들이 조상들이 매국의 댓가로 받은 토지를 되돌려 받기 위해서 법정소송을 벌이고 있으며 일부는 돈에 눈이 먼 매국 변호사들의 줄기찬 노력(?)으로 법정공방에 승소하여 그들에게 토지를 환속시켜주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 후손들은 권력층에 안주하면서 가진 재물로 뻔뻔스럽게 살아 왔으나 자신의 목숨과 전가산을 독립운동에 탕진했거나 친일파에게 강탈당했던 독립투사 후손들은 해방후에도 가난과 홀대로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근근히 살아왔거나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어 처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국가에서 그들을 발굴하여 연금이나 생활을 도운 것은 일부에 불과한 실정이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말들이 많다. 또 안중근 의사 동상 반입에 대한 설치 문제로 말들이 많다. 이는 친일후손들이 벌이고 있는 물밑 저항일 것이다. 이 사전의 발간 목적과 의미도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하며 이참에 독립투사 인명사전도 발간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들을 발굴하여 아직도 제대로 처우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후손들에게 국가에서 진정으로 생계와 진로를 보상을 해 준다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 될 것이다.

 

 

여명  

                              

[서울광장] 안중근 의사 재발견/노주석 논설위원

[서울신문]지난 2일은 ‘대한국인’ 안중근의사 탄생 130주년이었다. 다음달 26일은 의거 100주기다. 우리에게 ‘10·26’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10·26사태’로 각인돼 있지만 10·26은 본래 100년 전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자랑스러운 ‘하얼빈 의거일’이었다.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국과 조선인민의 진정한 연대는 안중근 의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말한 바로 그날이다.

한국인 사업가가 중국 하얼빈의 명동 격인 중앙대로에 11일 동안 세웠던 안 의사의 동상을 국내에 들여왔다. 2006년 1월 저명한 중국인 조각가에게 의뢰해 만든 동상은 공안당국의 지시에 의해 철거됐다. 이후 3년 동안 숨어 있다가 이번에 햇빛을 보았다.

동상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사유지에 세운다면 꺼릴 것이 없겠지만, 공공장소에 세우기를 원한다. 서울시내 44개의 공공 동상은 ‘동상·기념비·조형물의 건립기준 등에 관한 규칙’을 통과한 것들이다. 전문가들이 작품성 등을 따져봐야 하겠지만 ‘한·중 합작’ 동상을 공공장소에 세우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입지는 청계천이나 서울광장, 서울역 어디라도 좋을 것이다.

지난해 어느 시사주간지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을 조사했더니 1위는 세종대왕, 2위는 이순신 장군, 3위는 백범 김구가 차지했다. 역사 속 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광개토대왕, 도산 안창호, 다산 정약용이 10위 안에 들었다. 안 의사는 근근이 공동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오히려 국가보훈처가 조사한 보훈 인물 중 백범에 이어 2위로 뽑혔다.

‘국민 속의 안중근’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토를 저격한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강해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쯤으로 비치게 한 탓이다.

안 의사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 같다. ‘동양평화론’과 이토를 처단한 대의가 잊혀지고 있다. 동양평화론은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이 공동군대를 편성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자는 선각자적인 정치사상이다. 국제주의적 민족주의 개념이다. 유럽통합 방식을 100년 전에 주창한 것이다. 안 의사는 학교를 두 개나 세운 육영사업가이며, 200여점의 붓글씨를 남긴 명필이다. 최초의 해외 독립군부대인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한 전쟁영웅이다.

나라 안팎에서 ‘안중근 재발견’이 활발하다. 왜 안중근인가. 뤼순 감옥에서 쓴 ‘안응칠 소회’에 오롯이 담겨 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해,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안중근전쟁, 끝나지 않았다’를 옮겨 엮은 열화당 이기웅 대표는 “위대한 스승 안 의사의 말씀은 그 시대 청년들에게 머물지 않고, 시대를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서운 죽비로 다가온다.”라고 평했다. 그렇다. 안 의사는 사표(師表)가 없는 이 시대의 스승될 자격이 차고 넘치는 분이다.

이 땅의 청년들은 안 의사의 당당함과 논리를 배워야 한다. 불멸의 민족혼을 본받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안 의사의 원혼은 100년째 중국 뤼순감옥 사형수 무덤 주위를 떠돌고 있다. 독립된 고국에 묻어달라던 ‘백년원(百年寃)’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재발견은 유해찾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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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남아 의사 안중근'

 

 

지난 2일은 안의사 탄신 130주기, 다음달 26일은 의거 100주기이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수많은 우국 지사들의 희생 덕분이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살아긱 바쁜 현대인들이지만, 한번 쯤은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되돌아보고 다시한번 결연의 의지를 다짐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국가 안보와 윤리적,도덕성이 황폐해가고 있는 지금, 자유와 민주 사회라는 구실로 방종과 타락의 구렁텅이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비젼도 꿈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가진자만이 행복한게 아니다. 행복을 물질에서만 찿지를 말고 마음에서 찿아야 할 것이다. 한 해 동안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머리속에는 소문과 풍문에만 의지할 뿐 자신의 이론이나 사고, 꿈은 없다.

 

우국 지사들이 흘린 선혈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도덕성의 회복과 철저한 안보의식, 경제대국 건설, 그리고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정치, 권력층과 사회 지도층, 가진자들이 앞장서는 사회, 서로가 신뢰넘치는 사회를 이룩하는 일이다. 

 

우국 지사중에서도 가장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분은 '대한남아 안중근 의사'이다. 그 분에 대한 의거 스토리를 소개한다.

 

                                                                
                             

 

 

 

 

 

"탕탕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한의군 참모 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 군사장인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여 쏜 정의의 총성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고
또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는 영웅이지만
대한민국의 측에서는 최대의 원수로 볼 수 밖에 없었다.

 
1905년 조선의 초대 통감부가 된 이토는
조선의 왕실을 모욕하였고 조선 지배 계획을 착실히 수행하였다.
이런 상황에 안중근 의사가 나서서 그를 처단한 것이다.
  
 
 
 
< 안중근 의사 일대기 1 >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기전 두 동생과 홍신부에게 -
 
 -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백척간두에 몰렸을때,오직 나라사랑과 구국의 일념 으로 국권강탈의 원흉을 쓰러뜨린 안의사의 용기야 말로 우리민족의 살아있는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 주변 열강들의 야욕과 그들의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에 끼어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아픔을 좌시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행동으로 맞섰던 그는 유독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
 
 - 유년에는 학문보다도 산야를 달리며 사냥에 열중하며 남아의 기상을 길렀고, 성년 이후에는 가산을 털어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학교를 세웠으며, 나라의 국권이 완전히 기울었을 때에는 국외로 벗어나 독립을 위한 투쟁과 나라사랑을 외치며 해외동포의 힘을 결집하는데 온 몸을 바쳤다.
 
 -지구촌 사람들이 경천동지케한 거사의 계획도 많은 시간이나 자금이 소요되지 않은 어쩌면 천우신조의 필연적인 결과 였는지도 모른다.
 
 - 안의사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비바람 그 어느때에 그치리오!" 라고 외쳤으며 
 
 - 형장으로 가면서 " 이번 거사는 내가 할 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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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
 
1879년 기묘년 7월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성은 안씨요 이름은 '중근', 자는 '응칠'이였다. 배와 가슴에 7개의 점이 있으며 성질이 가볍고 급하여 이름을 중근(重根)이라 지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안인수씨로 진해현감을 역임하였고 6남3녀를 두었는데 태진,태현,태훈,태건,태민,태순의 6남중 셋째인 안태훈씨가 안중근의 아버지로 중년에 과거를 보아 진사로 합격하였으며 조씨에게 장가를 들어 3남1녀를 두었는데 중근,정근,공근의 3형제중 장남이 안중근이였다.
 
1884년 갑신년에 박영효의 천거로 70명의 해외유학생에 뽑혔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망가고 많은 유학생들이 잡혀 살육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자 안중근의 아버지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70-80여명의 가솔들을 대리고 숨어 들었다.
 
청계동은 전답이 많고 산천이 수려하고 계곡이 깊어 별유천지라, 안중근은 6-7세 때 부터 서당공부를 시작하였고 14세 때에 할아버지 안인수씨가 돌아가셨다. 중근은 사냥을 즐기고 글 공부는 소홀히 하여 주변 사람들로 부터 야단도 맞았으나 중국의 초패왕에 비유하면서 '이름석자만 쓸 줄 알면 되지 않느냐'하면서 말타기와 총쏘기를 즐겨하였다. 1894년 16세때에 아내 김씨에게 장가를 들어 두아들과 딸 하나를 두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동학당이 창궐하여 청계동에도 그 여파가 미쳐 안중근의 아버지는 포수들을 모으고 전 가솔들과 청계산중에 진을 치고 동학군에 항거하였다. 동학군 2만여명이 몰려오자 70여명으로는 대적이 되지 않자 겨울이라 동학군이 추위에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진을 쳤다. 안중근 아버지는 안중근을 포함하여 포수들과 가솔들 중 청장년들을 모아놓고
 
'내일이면 2만명의 동학군이 이곳으로 몰려오면 우리들은 전멸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밤에 적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일시에 기습을 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고 설득하여 새벽을 노려 70여명으로 일시에 총포를 쏘며 화공작전으로 기습을 감행하자 2만여명의 동학군은 오합지졸로 변하여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자 우리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동학군이 버리고간 많은 총포와 탄약,쌀 천여포대 등 군수품을 비롯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동학군으로 부터 노획한 쌀 천여 포대가 나중에 확인한바, 탁지부대신 '어윤중', 선혜청 당상 '민영준'의 쌀로 동학군에게 탈취되었던 것으로 조정에서는 안중근의 아버지가 중간에서 가로챈 것으로 안중근의 아버지가 모함을 받게 되자 안중근은 한양으로 달려가서 무고함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여러번 호소하였으나 '어윤중'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며칠되지 않아 다행히 민란이 일어나서 '어윤중'이 살해되자 '어윤중'으로 부터의 모함은 종결되었으나 '민영환'은 계속적인 압력과 모함이 진행되자 '민영환'의 보복을 피해 안중근은 천주교 수도원으로 숨어 들어 수 개 월 동안 지내면서 그곳에서 홍신부를 만나게 되고 결국에는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많은 서적을 탐독하기도 하고 성경을 여러번 읽고는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다.
 
안중근은 삶을 살아감에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신조가 있었는데
째, 친구와의 의를 중히 여기고
둘째, 술과 노래를 즐기며
세째, 총을 쏘며 사냥을 즐기고
네째, 말타기를 즐겨하는 것을 신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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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얼빈역두에 울린 7발의 총성(아래글은 안중근 의사가 직접쓴 기록임)
 
 
나는 청년시절 의협심이 강하여 중국상인의 야만적인 행동에 달려가서 담판을 짓거나 하였으며 지방의 사업적인 단체모임에서 문제가 생겨 회원들이 집단으로 항거하자 대부분의 간부들이 도망갔으나 나는 단신으로 그들과 설득으로 담판을 짓는 등 어려움이 봉착하면 정면에서 직접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인재양성을 하기 위하여 진남포에 학교를 세우고 나라의 독립은 첫째,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 사회를 확장하는 것이요, 세째, 민심을 단합시키는 것이요, 네째,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학교운영도 점점 옥죄는 일본관헌의 압력에 더 이상 운영이 어렵게 되자 동지에게 학교 운영을 넘겨주고 단신 북간도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톡'등 지를 돌아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짜는 등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수백명의 동지들이 모이자 나는 동지들을 훈련시켰는데 말타기, 사격 등 훈련을 시키고 조직을 확장하여 나갔다.
 
나는 독립군 의병장으로 '참모중장'이란 직책에 임명되었으며 정예 장병 수백명을 이끌고 함경도 지역으로 숨어들어가 일본군을 기습하고 일본 관헌을 습격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다가 혹한의 산악지역에서 군수품의 부족과 이탈자가 속출하자 몇몇의 동지들과 한달반을 해메다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인 '엔치야'에 도착하였으나 피골이 상접하여 동료들이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십 수 일을 휴식한 뒤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귀대하자 남아있던 동지들이 대대적인 환영식을 준비하였으나 거절하고 짐을 꾸린 다음 '하바로프스크'-->'헤이롱장(흑룡강) 상류지역'-->수찬(水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단체조직을 확대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교육을 통하여 사명감을 확산시켰다.어느 지역에서는 '일진회' 잔당에게 의병장 경력이 발각되어 구금되었으나 그들을 간신히 설득하여 죽음에서 살아나온 경우도 있었다.
 
1909년에 나는 '엔치야'로 돌아와 동지 12인과 결의를 하였는바, 같이 모여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약지를 절단하여 피로써 혈의 맹세를 하였는데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란 글자를 쓰고 장지를 찍었다.
 
그해 9월경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향하여 정보를 수집중에 '이토' 총독이 '블라디보스톡'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운 시일내에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자 나는
 
" 여러해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하얼빈'으로 갈 것을 마음먹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그 지역 갑부였던 '이석산'을 아가서 여비 백원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권총으로 위협하여 여비를 강제로 받아내었다.
 
나는 '우덕순' 동지와 만나 8연발 권총을 준비하고 같이 '쓰이펜호' 지방으로 이동하여 통역을 담당할 '유동하' 동지를 만나 상의를 하였다. 그들과 같이 '하얼빈'에 도착하여 '김성백' 동지집에서 유숙하면서 신문 등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고 정확한 '이토'의 도착 일정을 수집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우리는 '창춘'으로 이동하여 거사하는 방안도 고려하였다. 나는 '유동하'가 개인 사정으로 집에 다녀오겠다 하여 통역을 담당할 '조도선' 동지와 합류하여 김성백 집에서 유숙하였다.
 
여비가 부족하여 애태우면서 우,조 동지와 같이 '지야이지스고'로 이동하여 현지 정거장을 답사하고 조도선이가 역무원에게 물었다.
 
"이곳에 매일 기차가 몇차례나 내왕하는가?"
"매일 세번씩 내왕하는데,오늘밤에는 특별열차가 하얼빈에서 창춘으로 가서 일본대신 '이토'를 영접해 가지고 모래 아침 여섯시 경에 여기에 이를 것이다"
 
나는 '모래 아침 여섯시 쯤이면 아직 날이 밝기 전이니 '이토'가 반드시 정거장에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설사 차에서 내려 시찰을 한다해도 어둠속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토'의 모습을 모르는데야 어찌 능히 일을 완수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라고 생각하고 다시 앞서 '창춘'을 가보고 싶어도 노자가 부족하니 어쩌면 좋은지를 고민하다가 '김성백' 동지에게 여비를 구하기 위하여 보낸 '유동하' 동지에게 전보를 쳤다.
 
"우리는 여기 이르러 하차했다. 만일 그곳에 급한 일이 있거든 전보 쳐주기 바란다." 황혼이 다 된 뒤에 답장이 왔으나 그 말뜻이 분명치 아니하여 더욱 의아스러움이 적지 않아 그날밤 깊이 생각하고 좋은 방책을 헤아렸다.
 
이튼날 나는 '우덕순'과 상의하면서
"우리가 같이 이곳에 있는 것은 좋은 방책이 아니다. 째는 돈이 부족하고, 둘째는 '유동하'의 답전이 의심스럽고, 셋째는 '이토'가 내일 아침 새벽에 여기를 지나갈 것인즉 일을 치르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일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다시는 일을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여기서 머물며 내일의 기회를 기다려 틈을 보아 행동하고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내일 두곳에서 일을 치르면 충분히 편리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일을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성공할 것이요,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가 꼭 일을 성공시켜야 할 것이다. 만일 두곳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비용을 마련한 다음 새로 상의하여 거사토록 하는 것이 완전한 방책일 것이다" 라고 하고 '우덕순'은 그곳 정거장에서 새벽에 도착하는 '이토'를 노리도록 조치하고 나는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나는 '유동하'에게 답신 내용을 확인한바  제대로 이야기를 못하기에 화를 내었던바 '유동하'는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다. 나는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새옷을 벗고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권총을 차고 바로 정거장으로 나가니 아침 7시쯤이었다. 정거장에는 러시아 장관,군인들이 나와서 '이토'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파는 집안에서 차를 두세잔 마시면서 초조하게 기다린바 9시쯤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와사 닿았다. 나는 찻집에 않아서 그들의 동정을 엿보며 어느때 저격하는 것이 좋은까 하고 십분 생각하였으나 미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차 이윽고 '이토'가 차에서 내리는게 아닌가!
 
'이토'가 내려오자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터져 일어나고 3천길 엄화가 머리속에 치밀어 올랐다.
 
"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나라를 강제로 빼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어찌하여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다시 더 말할것 없이 나는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있게 나가 군대가 늘어선 뒤쪽에 이르렀다. 앞으로 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중에 맨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만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하늘과 땅사이를 횡횡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 저것이 필시 늙은 도독 '이토'일 것이다!"하며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하여 신속히 네발을 쏘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리속에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한번 잘 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뒷쪽을 향하여 다시 3발을 잇달아 쏘았다.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죄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 된 일이 아니라 잠깐 주춤하여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벙에게 붙잡혔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란 뜻의 러시아말)를 세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파견대로 잡혀 들어갔다.
 
1909년 음력 9월 13일(양력10월 26일) 상오 9시반쯤이었다
 
 

 

                    

             <안중근 의사 일대기 2>

 

 

의사 안중근이 제시한 이등박문의 죄는 아래와 같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와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민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찬탈한 죄

6. 철도,광산,산림,천택을 탈취한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발행한 죄

8. 군대를 해산한 죄

9. 교육을 방해하고 신문을 금지한 죄

10.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11.교과서를 소각한 죄

12.일본의 한국 보호를 명분으로 세운 죄

13.태평 무사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15.일본 천황의 선제 고메이를 죽인 죄 등을 들었다.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이 체포되자 '우덕순,조도선,유동하,정대호,김성옥 등이 같이 체포되었으며 법정에서 검찰심문,변호인 변론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내용은 아래와 같다.

 

검찰의 반복된 심문에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의사): "일본이 비록 백만명 군사를 가졌고 천만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또 무슨 권세가 있을 것이냐! 사람이 태어나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검찰의 사형에 처하는 이유

 

( 검찰) : "이런 사람이 세상에 살아 남으면 많은 한국인이 그 행동을 본 뜰 것이다. 일본인들이 두려워 하고 겁이나서 편안하게 살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 "옛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협객과 의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모두 나를 본뜨서 그랫단 것인가! 속담에 어떤 사람이던지 열 사람의 재판관과 친해지기 보다는 단 한가지 죄 없기를 원한다더니 정영 옳은 말이다! 민일 일본인이 죄가 없다면 무엇때문에 한국인을 두려워 하고 겁낼 것인가! 그 많은 일본인 가운데 왜 '이토' 한 사람만 해를 입었던가! 오늘 또다시 한국인을 겁내는 일본인이 있다함은 그야말로 '이토'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내가 사사로운 혐오로 '이토'에게 해를 가했다고 하는데, 내가 본시 '이토'를 알지 못하거늘 무슨 사사로운 혐오가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이토'에게 사사로운 혐오가 있어서 그랬다면 검찰관은 나와 무슨 사사로운 혐오가 있어 이러는 것인가!

 

미즈노,가마타 두 일본인 변호사 변론

 

(변호사): "피고의 범죄는 분명하고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해에서 된 일이므로 그 죄가 중대하지 아니하다. 더구나 한국 인민에게 대해서는 일본 사법권의 관할권이 없다"

 

(안중근 의사): "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이 모두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 의병 참모중장으로 임무를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여순 지방 재판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니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판결하는 것이 옳다"

 

(재판관): "모래와서 다시 선고하겠다"

 

(안중근 의사): "모래면 일본국 4천 7백만 인격의 근수를 달아보는 날이다! 어디 경중고하를 지켜보리라!"

 

선고일

(재판관):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우덕순은 3년 징역,조도선.유동하는 각각 1년반 징역에 처한다!"

 

감옥에 돌아온 안중근 의사 독백

 

(안중근 의사): "내가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부터 허다한 충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윗사람의 잘못을 간하고 정략을 세운것이 뒷날의 역사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이제 동양의 대세를 걱정하여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방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통탄한들 무엇하랴! 그러나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비바람이 어느 때에 그치리요! 지금의 일본 당국자가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다면 이같은 정략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지난 1895년(을미년)에 한국에 와있던 일본공사 '미우라'가 병정을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여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했으나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석방하였다...(중략)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나의 일을 말하면 비록 개인간의 살인죄라고 할 지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가 어느쪽이 중하며 어느쪽이 경한가? 그야말로 머리가 깨어지고 쓸개가 찢어질 일이다! 내개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느냐! 그래 내가 큰 죄인이로다!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약한 한국 인민이 된 죄로다!"

 

안중근 의사는 고등법원에 항고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고등법원장인 '히라이시'가 아와서 안중근 의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형판결에 대한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뒤에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의 의견을 말했다. 그랬더니 '히라이시'가 다 듣고 난 뒤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내가 그대에 대하여 비록 두터이 동정하지만 정부주권의 기관을 고칠 수는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만 그대의 진술내용을 정부에 품달 하겠다"

 

(안중근 의사):" 이같이 공평한 논평이 우뢰처럼 귀를 스치니 일생에 두번 듣기 어려운 일이다! 이 같은 공의 앞에서야 비록 목석이라도 감복하겠다! 만일 허가가 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을 저술 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

 

(고등법원장 '히리이시'):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 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고 안중근 의사를 달랜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1. 전감(前鑑) 2. 현상(現狀) 3.복선(伏線) 4.문답(問答) 등 4개의 제목 중 전감에 대한 개요 부분만 기술후에 본론 부분은 제목만 적어놓고 끝을 못 맺은채 사형 집행을 당했다.

                                                             -집행일:1910.음력2.5(양력3.15)-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을 기술한 후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겠다고 한 달 동안의 말미를 요청하여 좋다고 쾌락받고 그것도 몇개월이 소요되어도 좋다고 약속받아 고등법원 공소를 포기하고 이 글의 집필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완성되었다면 당시 그의 예리한 정치적 국제정세 판단력과 동양 평화에 대한 원대한 구상을 볼 수 없었다는 안타까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안의사의 위대한 조국사랑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가슴속으로 뜨거운 느낌을 담아 스스로를 깨우치고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나라의 위태로움에는 초개같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안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앞날을 살아가는데 각자가 삶의 지표로 삼아야 될 것이며 후세에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사형을 시켜서 높이 6~70cm도 안되는 이런 통 속에 시체를 구겨 넣는다> 
 
저 속에 안중근 의사의 통도 있을지…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안중근 의사의 시체를 찾기 위해
이곳을 두번 방문 하였고,
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안중근 의사의 시체를 찾는데는
실패 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손가락을 자른 후 '대한국인'이라고 적은 문서>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人無遠慮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안중근 의사가 혈서로 쓴 대한독립 문서>


 
사형 집행인이 안중근 의사에게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사형 집행 전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술을 마시게 해 달라거나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해 달라는 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는 5분 동안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초동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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