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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9 본문
우면산의 여름 9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던가?
나라꽃 무궁화에 대한 애정도 점점 식어가듯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초개같이 묵숨을 던진 수많은 독립투사에 대한 기억도 하나 둘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듯 하다.
해방 후 36년간 일제의 앞잡이로 조선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데 앞장섰던 수많은 친일인사들을 단번에 척결하지 못한 잘못은 반대로 독립활동 인사들에 대한 천시와 홀대로 이어졌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거나 가족이 모두 흩어지고 가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의 어려움으로 교육은 커녕 달동네 판자집에서 외로이 병마에 시달리다가 대부분 소리없이 죽음을 맞이하며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독립투사들과는 반대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친일인사들이 대거 등용되는 바람에 그들은 재기에 성공하였고 권력과 가진 재산으로 후손들도 호의호식하며 살아 온 현실이다. 그들 후손들은 조상들의 매국행위를 감추기에 급급하였고 그래서 그들의 매국흔적은 하나 둘 감춰지고 가진자로 당당하게 이 땅에 군림하여 왔다. 최근에는 일부 친일 후손들이 조상들이 매국의 댓가로 받은 토지를 되돌려 받기 위해서 법정소송을 벌이고 있으며 일부는 돈에 눈이 먼 매국 변호사들의 줄기찬 노력(?)으로 법정공방에 승소하여 그들에게 토지를 환속시켜주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 후손들은 권력층에 안주하면서 가진 재물로 뻔뻔스럽게 살아 왔으나 자신의 목숨과 전가산을 독립운동에 탕진했거나 친일파에게 강탈당했던 독립투사 후손들은 해방후에도 가난과 홀대로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근근히 살아왔거나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어 처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국가에서 그들을 발굴하여 연금이나 생활을 도운 것은 일부에 불과한 실정이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말들이 많다. 또 안중근 의사 동상 반입에 대한 설치 문제로 말들이 많다. 이는 친일후손들이 벌이고 있는 물밑 저항일 것이다. 이 사전의 발간 목적과 의미도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하며 이참에 독립투사 인명사전도 발간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들을 발굴하여 아직도 제대로 처우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후손들에게 국가에서 진정으로 생계와 진로를 보상을 해 준다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 될 것이다.
여명
[서울광장] 안중근 의사 재발견/노주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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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사업가가 중국 하얼빈의 명동 격인 중앙대로에 11일 동안 세웠던 안 의사의 동상을 국내에 들여왔다. 2006년 1월 저명한 중국인 조각가에게 의뢰해 만든 동상은 공안당국의 지시에 의해 철거됐다. 이후 3년 동안 숨어 있다가 이번에 햇빛을 보았다.
동상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사유지에 세운다면 꺼릴 것이 없겠지만, 공공장소에 세우기를 원한다. 서울시내 44개의 공공 동상은 ‘동상·기념비·조형물의 건립기준 등에 관한 규칙’을 통과한 것들이다. 전문가들이 작품성 등을 따져봐야 하겠지만 ‘한·중 합작’ 동상을 공공장소에 세우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입지는 청계천이나 서울광장, 서울역 어디라도 좋을 것이다.
지난해 어느 시사주간지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을 조사했더니 1위는 세종대왕, 2위는 이순신 장군, 3위는 백범 김구가 차지했다. 역사 속 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광개토대왕, 도산 안창호, 다산 정약용이 10위 안에 들었다. 안 의사는 근근이 공동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오히려 국가보훈처가 조사한 보훈 인물 중 백범에 이어 2위로 뽑혔다.
‘국민 속의 안중근’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토를 저격한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강해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쯤으로 비치게 한 탓이다.
안 의사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 같다. ‘동양평화론’과 이토를 처단한 대의가 잊혀지고 있다. 동양평화론은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이 공동군대를 편성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자는 선각자적인 정치사상이다. 국제주의적 민족주의 개념이다. 유럽통합 방식을 100년 전에 주창한 것이다. 안 의사는 학교를 두 개나 세운 육영사업가이며, 200여점의 붓글씨를 남긴 명필이다. 최초의 해외 독립군부대인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한 전쟁영웅이다.
나라 안팎에서 ‘안중근 재발견’이 활발하다. 왜 안중근인가. 뤼순 감옥에서 쓴 ‘안응칠 소회’에 오롯이 담겨 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해,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안중근전쟁, 끝나지 않았다’를 옮겨 엮은 열화당 이기웅 대표는 “위대한 스승 안 의사의 말씀은 그 시대 청년들에게 머물지 않고, 시대를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서운 죽비로 다가온다.”라고 평했다. 그렇다. 안 의사는 사표(師表)가 없는 이 시대의 스승될 자격이 차고 넘치는 분이다.
이 땅의 청년들은 안 의사의 당당함과 논리를 배워야 한다. 불멸의 민족혼을 본받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안 의사의 원혼은 100년째 중국 뤼순감옥 사형수 무덤 주위를 떠돌고 있다. 독립된 고국에 묻어달라던 ‘백년원(百年寃)’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재발견은 유해찾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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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남아 의사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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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은 안의사 탄신 130주기, 다음달 26일은 의거 100주기이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수많은 우국 지사들의 희생 덕분이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살아긱 바쁜 현대인들이지만, 한번 쯤은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되돌아보고 다시한번 결연의 의지를 다짐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국가 안보와 윤리적,도덕성이 황폐해가고 있는 지금, 자유와 민주 사회라는 구실로 방종과 타락의 구렁텅이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비젼도 꿈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가진자만이 행복한게 아니다. 행복을 물질에서만 찿지를 말고 마음에서 찿아야 할 것이다. 한 해 동안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머리속에는 소문과 풍문에만 의지할 뿐 자신의 이론이나 사고, 꿈은 없다.
우국 지사들이 흘린 선혈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도덕성의 회복과 철저한 안보의식, 경제대국 건설, 그리고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정치, 권력층과 사회 지도층, 가진자들이 앞장서는 사회, 서로가 신뢰넘치는 사회를 이룩하는 일이다.
우국 지사중에서도 가장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분은 '대한남아 안중근 의사'이다. 그 분에 대한 의거 스토리를 소개한다.
"탕탕탕!!!"
![](http://i.kdaq.empas.com/imgs/knsi.tsp/289506/1/npee_easternwiz.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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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일대기 2>
의사 안중근이 제시한 이등박문의 죄는 아래와 같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와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민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찬탈한 죄
6. 철도,광산,산림,천택을 탈취한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발행한 죄
8. 군대를 해산한 죄
9. 교육을 방해하고 신문을 금지한 죄
10.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11.교과서를 소각한 죄
12.일본의 한국 보호를 명분으로 세운 죄
13.태평 무사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15.일본 천황의 선제 고메이를 죽인 죄 등을 들었다.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이 체포되자 '우덕순,조도선,유동하,정대호,김성옥 등이 같이 체포되었으며 법정에서 검찰심문,변호인 변론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내용은 아래와 같다.
검찰의 반복된 심문에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의사): "일본이 비록 백만명 군사를 가졌고 천만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또 무슨 권세가 있을 것이냐! 사람이 태어나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검찰의 사형에 처하는 이유
( 검찰) : "이런 사람이 세상에 살아 남으면 많은 한국인이 그 행동을 본 뜰 것이다. 일본인들이 두려워 하고 겁이나서 편안하게 살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 "옛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협객과 의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모두 나를 본뜨서 그랫단 것인가! 속담에 어떤 사람이던지 열 사람의 재판관과 친해지기 보다는 단 한가지 죄 없기를 원한다더니 정영 옳은 말이다! 민일 일본인이 죄가 없다면 무엇때문에 한국인을 두려워 하고 겁낼 것인가! 그 많은 일본인 가운데 왜 '이토' 한 사람만 해를 입었던가! 오늘 또다시 한국인을 겁내는 일본인이 있다함은 그야말로 '이토'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내가 사사로운 혐오로 '이토'에게 해를 가했다고 하는데, 내가 본시 '이토'를 알지 못하거늘 무슨 사사로운 혐오가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이토'에게 사사로운 혐오가 있어서 그랬다면 검찰관은 나와 무슨 사사로운 혐오가 있어 이러는 것인가!
미즈노,가마타 두 일본인 변호사 변론
(변호사): "피고의 범죄는 분명하고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해에서 된 일이므로 그 죄가 중대하지 아니하다. 더구나 한국 인민에게 대해서는 일본 사법권의 관할권이 없다"
(안중근 의사): "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이 모두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 의병 참모중장으로 임무를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여순 지방 재판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니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판결하는 것이 옳다"
(재판관): "모래와서 다시 선고하겠다"
(안중근 의사): "모래면 일본국 4천 7백만 인격의 근수를 달아보는 날이다! 어디 경중고하를 지켜보리라!"
선고일
(재판관):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우덕순은 3년 징역,조도선.유동하는 각각 1년반 징역에 처한다!"
감옥에 돌아온 안중근 의사 독백
(안중근 의사): "내가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부터 허다한 충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윗사람의 잘못을 간하고 정략을 세운것이 뒷날의 역사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이제 동양의 대세를 걱정하여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방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통탄한들 무엇하랴! 그러나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비바람이 어느 때에 그치리요! 지금의 일본 당국자가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다면 이같은 정략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지난 1895년(을미년)에 한국에 와있던 일본공사 '미우라'가 병정을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여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했으나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석방하였다...(중략)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나의 일을 말하면 비록 개인간의 살인죄라고 할 지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가 어느쪽이 중하며 어느쪽이 경한가? 그야말로 머리가 깨어지고 쓸개가 찢어질 일이다! 내개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느냐! 그래 내가 큰 죄인이로다!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약한 한국 인민이 된 죄로다!"
안중근 의사는 고등법원에 항고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고등법원장인 '히라이시'가 아와서 안중근 의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형판결에 대한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뒤에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의 의견을 말했다. 그랬더니 '히라이시'가 다 듣고 난 뒤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내가 그대에 대하여 비록 두터이 동정하지만 정부주권의 기관을 고칠 수는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만 그대의 진술내용을 정부에 품달 하겠다"
(안중근 의사):" 이같이 공평한 논평이 우뢰처럼 귀를 스치니 일생에 두번 듣기 어려운 일이다! 이 같은 공의 앞에서야 비록 목석이라도 감복하겠다! 만일 허가가 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을 저술 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
(고등법원장 '히리이시'):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 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고 안중근 의사를 달랜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1. 전감(前鑑) 2. 현상(現狀) 3.복선(伏線) 4.문답(問答) 등 4개의 제목 중 전감에 대한 개요 부분만 기술후에 본론 부분은 제목만 적어놓고 끝을 못 맺은채 사형 집행을 당했다.
-집행일:1910.음력2.5(양력3.15)-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을 기술한 후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겠다고 한 달 동안의 말미를 요청하여 좋다고 쾌락받고 그것도 몇개월이 소요되어도 좋다고 약속받아 고등법원 공소를 포기하고 이 글의 집필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완성되었다면 당시 그의 예리한 정치적 국제정세 판단력과 동양 평화에 대한 원대한 구상을 볼 수 없었다는 안타까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안의사의 위대한 조국사랑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가슴속으로 뜨거운 느낌을 담아 스스로를 깨우치고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나라의 위태로움에는 초개같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안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앞날을 살아가는데 각자가 삶의 지표로 삼아야 될 것이며 후세에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http://i.kdaq.empas.com/imgs/knsi.tsp/289506/3/%ED%86%B5.bmp)
![](http://i.kdaq.empas.com/imgs/knsi.tsp/289506/4/%EC%86%90.bmp)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人無遠慮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안중근 의사가 혈서로 쓴 대한독립 문서>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해 달라는 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서초동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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