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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우면산의 여름 6

두바퀴인생 2009. 9. 2. 16:25

 

 

우면산의 여름 6

 

 

예술의 전당 아침 풍경

 

동녘 아침의 찬란한 태양은 온 대지의 어둠을 점차 걷어내며 밝아오고 있다. 

 

지난밤 어두운 역사를 뒤안길로 하고 새로운 하루가 전개되고 있다. 그시대를 주름잡던 수 많은 영웅호걸들이 하나 둘 사라지듯이 어둠은 새로운 역사를 잉태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이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대의 역사를 만들고 우리 후세들이 우리들의 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 얼마나 잘 살게 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오늘 우리들이 이 나라를 어떠한 초석위에 올려 놓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살던 마을은 읍내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골 마을이지만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난다. 30~40년 전만 해도 아침 저녁으로 수 많은 거지들이 밥을 얻으려 오던 생각이 난다. 그만큼 못 살았고 굶주리던 시절이었다. 봄철이면 보릿고개라 하여 양식이 떨어져 이웃집에 구걸하다시피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쌀밥은 커녕 보리밥도 먹기 힘든 그 시절...

 

자유당 정권은 이 나라 국민들 배고픔 보다도 정권유지에 급급하였고 국회는 연일 싸움질로 세월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백성들의 배고픔은 뒷전으로 한 체 자신들의 부귀영달만을 추구하던 정치판이었다.

 

배고픈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자유와 복지를 만끽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역사를 보면 수 많은 반정과 쿠테타가 있었지만 모두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였던게 대부분이었다.

 

권력을 잡게되면 대부분의 무리들은 초기에는 나라를 위해 열심히들 일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의 단맛을 즐기게 되고 고인물이 썩듯이 부패하게 된다. 지도자가 무능하고 공권력이 무력화되면 나라는 극도의 혼란이 조성되고 목소리 큰 사람과 각종 이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준동하게 되어 있다. 그 결과 부패한 정권에 탐관오리들이 넘쳐나고 백성은 토탄에 빠지게 되며 그 무리와 정당, 그리고 나라는 멸망의 기운이 싹트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백성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 수준의 빈국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나라를 뒤집어 엎고 지금같은 나라를 만들게 해 준 지도자가 누구인가? 말로만 국민을 위한다고 외치면서 안으로는 자신들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게 아닌가?

 

나라의 존립을 가속화시키는 요소들을 얼마나 조화롭고 슬기있게 극복해 나가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북의 위협을 억제하고 통일 한반도를 서서히 구축해 나가는 것이며 후일 남북을 통일시키는 지도자가 반드시 후대에 영원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될 것이다.

 

금년에는 여러명의 지도자들이 이 세상을 떠날 모양이다. 큰 별 5개가 떨어질거라 한다. 큰 별이란 그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에게 자유와 복지를 만들어준 지도자들일 것이다. 칼럼을 보자! 

 

 

 

 

[김대중 칼럼] "2009년 큰 별 5개가 떨어진다"

  • 입력 : 2009.08.30 21:33
김대중·顧問

2009년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건국 60주년을 지나면서 한 시대를 접고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는 서년(序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지난 시대의 큰 별들이 유난히 많이 떨어졌다. 김수환 추기경과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역술인들은 올해 한반도가 화개(華蓋·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암울한 기운)와 백호(白虎·사고, 자살 등 피를 부르는 기운)가 겹치고 토(土)의 기운이 강한 운으로, 큰 인물이 타계하고 대형사고 등이 일어날 수 있는 해라고 말하고 있다(문화일보 8월 20일자 보도). 항간에는 올해 북한을 포함해 한반도에서 적어도 5개의 별이 떨어질 것이라는 역술인들의 분석이 나돌고 있다. 실제로 중병설이 나도는 북한의 지도자, 와병 중인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굳이 올해가 아니더라도 2010년을 전후해 신상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60년 우리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독립과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이룩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의 터전을 일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로 적대하고 반목하며 국민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갈등의 장(場)으로 몰아넣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암울하고 비참한 후진국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이승만을 존경하며 박정희에게 감사하고 김대중·김영삼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나라를 보수 일변도로 이끌고 가는 것에 제동을 건 노무현에게서도 우리는 균형의 정치를 배울 수 있었다고 후대는 기억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들이 남기고 떠난 토대 위에 새롭고 살맛 나는 세상을 열어갈 책무를 지닌다. 특히 조만간 북한의 리더십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면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 구(舊)시대를 접고 새 시대를 열어 새로운 패러다임과 글로벌 기준에 따른 생활방식을 추구할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지난 세월에 빛났던 별들의 추락은 새롭게 세상을 비출 새 별들의 탄생을 의미한다. 2009년을 단순히 화개와 백호가 겹치는 해가 아니라 한반도에 어제의 장(章·chapter)이 닫히고 새 장이 열리는 해로 여기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이미
오바마를 선택한 미국은 새로운 진로를 예약하고 있다. 50여년 집권의 자민당을 깨고 민주당을 선택한 일본은 과거와 결연히 결별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어제의 중국이 아니다. 이미 미국과 세계 양대 축(軸)을 구성하며 세계를 지배하는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여기에 유럽이 뭉치고 인도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이런 전(全) 지구적인 변화가 숨 가쁘게 진행되는데 한국은 몇 건의 성취에 안주하고 우리가 이룩한 지난 세월의 업적에 함몰돼 우리끼리의 싸움에 너무 오래 천착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주변국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갈등 강국'의 앞날은 저질의 이전투구판일 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화해와 통합과 소통을 남기고 갔다고들 한다. 그가 진정 세상과 화해하고 정치적 가해자를 용서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국민 앞에 나섰을 때(6·15선언 기념식) 그는 여전히 '투쟁 중'이었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고 한다. 바라건대 그는 자신의 일생을 점철한 투쟁과 갈등의 요인들을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거두어 갔으리라 믿고 싶다. 그것이 역사의 요청이고 또 순리라면 DJ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DJ 화해'에 대한 긍정적 해석이다.

그의 서거를 계기로, 그리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남북의 지도자들이 생물학적인 생애의 마감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시대의 장(章)이 바뀌는 것을 오감으로 느낀다. 우리의 지난 60년이 준비의 시기였다면 이제 2009년을 넘어서며 도약의 시기로 접어들어야 한다.

우리가 화해하며 용서하고 사과하며 소통해야 할 것은 '과거'와의 악수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화해는 YS와 DJ의 쇼 같은 '악수'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화해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MB와 여의도의 소통만이 아니다. 구시대 스타일의 지도자가 떠나간 자리에 진정한 소통과 깊이 있는 화해의 길을 탐구하는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 아쉽게도 '큰' 별들은 계속 스러지는데 그 자리에 들어설 '새 별'은 아직 보이지 않고 별똥별들만 무성하다.

 
 

 

 

 우면산에서 영글어 가는 밤송이
 
우면산에는 아카씨아 나무,참나무,잣나무,밤나무가 많다. 해방 이후 황폐하였던 우리 산에 조림으로 숲을 가꾸어 왔다. 아카씨아 나무는 생존력이 강하여 빨리 자라며 뿌리가 깊지 못하지만 다른 나무보다 빨리 자란다. 그래서 우면산에도 아카씨아 나무가 많다. 폭풍이 불면 잘 쓰러져 인접한 다른 나무를 상처내고 울타리를 부수기도하며 등산길을 막아버리기도 한다. 나무는 재질이 무르고 병충해로 속이 썩기 쉬우며 봄철 꿀을 채취하는 것과 땔감외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나무이다.
 
밤나무에는 밤송이가 가을을 재촉하며 영글어 가고 있다. 어저께는 밤나무가 있는 곳을 몇 군데 정찰하여 두었다. 알밤이 익기 시작할 무렵이면 사람들이 마구 가지를 당겨 뿌러지고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모르는 곳 밤나무를 발견해 두면 가을에는 알밤 구경이 가능할 것 같다.
 
최근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즈음하여 '장지연'씨에 대해서 친일논란으로 말들이 많다.우리나라는 일제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일파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허약하던 정부는 친일 인사를 기용하여 정권유지에 이용하면서 친일 인사들이 해방 후에도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권력을 잡은 그들이 순순히 친일파 정리에 동참할 리가 없었다. 그러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친일파들의 존재가 희석되어버렸고 무관심해져 버렸다. 최근에는 친일 후손들이 조상의 땅을 찿기 위해 법정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나라다. 이제와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다고 한다. 물론 심사숙고하여 발간준비를 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선정과정에 불만을 제기하는 후손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36년 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망한 나라에서 개인은 살아가기 위해 친일아닌 친일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 무능한 조상들이 나라를 망쳐먹은 결과이다. 몽고군이 침공시 몽고군 앞잡이로, 글안족 칩입시 글안군 앞잡이로, 임진왜란시 왜군 앞잡이로, 병자호란시 청군 앞잡이로, 일제하 왜눔 순사 앞잡이로, 한국전쟁시 인민군 앞잡이로 나섰던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동안 가난했고 버림받았거나 소외당하였던 억압받고 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거나 적에게 포로로 잡힌 군인들이 대부분이다. 지금도 이 사회가 한번 쯤 뒤집어 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곧 출간한다고 한다니 과거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시기적으로는 너무 늦은 감이 든다. 이제야 그것을 만드는 목적이 과연 미래를 위해 얼만큼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친일파, 누구나 공감이 가는 자료와 선정기준, 선정과정과 당사자들의 소명을 받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진 다음에 그것이 앞으로 우리나라 발전에 얼만큼 큰 자료로 자리메김 할지는 모르겠다. 화합과 통합이 아닌 갈등을 부추기는 사전이 되기 않기를 바랄뿐이다.
 
장지연씨에 관련된 자료와 시론을 옮겨 놓았다. 판단은 방문자님들의 몫 일 것이다.

장지연

장지연(張志淵, 1864년 ~ 1921년 10월 2일)은 한국의 언론인이다. 아호는 위암(韋庵). 을사조약 때의 반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해졌지만 이후의 행적에는 친일 경력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본관은 인동()이며 호()는 위암(), 숭양산인()이다. 초휘()는 지윤(), 자()는  순소()이다.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 동곽리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고종 31)에 식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일본 공사의 사주를 받은 낭인()들에게 살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였다. 1897년에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를 기초하였다.

장지연은 1897년 사례소() 직원으로 《대한예전()》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듬해 내부주사()가 되었다. 하지만 곧 사직하고, 이승만(),
남궁억(), 양흥묵()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열어 총무위원으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였다. 1899년시사총보()》의 편집인이자 주필로 언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재정 문제로 8개월 만에 《시사총보()》가 폐간된 뒤에는 광문사()를 설립하여 정약용의 《목민심서()》《흠흠신서()》 등을 간행하였다. 1902년에는 남궁억의 뒤를 이어 1898년 창간된 '황성신문()'의 사장이 되었다.

당시 황성신문은 애국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언론으로서의 명성도 가지고 있었다. 황성신문은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사실을 보도하였다가 기사를 삭제당했고,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폭로하여 국민적 반대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905년(광무 9)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오늘 목놓아 통곡한다)'이라는 사설을 써서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널리 알렸다. 이 일로 황성신문의 집행진은 모두 체포되었고, 신문도 정간되었다. 장지연도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정부에서 그를 통정대부()로 기용하였으나 거절하고, 물러나 역대 문헌의 수집과 저술에 힘썼다.

그는 1906년
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구국운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강제로 해산을 당하자 대한협회()로 개편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해조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상하이[], 난징[] 등지를 방랑하다가 귀국해 190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간된 <경남일보()>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1910년 일본의 국권침탈이 이루어지자, 10월 11일자의 <경남일보>에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하였으며, 이 때문에 <경남일보>는 10일간 발행정지가 되었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은 일본 침략의 만행을 폭로하고 규탄한 글로 널리 알려졌으며, 때문에 그는 언론인으로서 일본 침략에 저항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장지연은 1914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구실을 한 <매일신보>에 주필로 참여하여 그 해 12월 23일부터 1918년 7월 11일까지 친일 경향의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는 연구 결과가 알려지면서 친일 행적을 둘러싸고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1915년 12월 26일 <매일신보> 1면에 실린 글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인용해 '조선 사람은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개탄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1917년 순종의 일본 방문 때에는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던 바 일선(, 일본과 조선)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라는 한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친일 불교단체로서 1914년 이완용 등이 발기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간사를 역임하는 등 일본 총독부의 지배에 순응하고 다양한 형태로 협력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그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언론 부문의 해당자로 수록되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는 만년에 실의에 빠져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취에 이르도록 술을 마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신보>를 그만둔 뒤에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생활하였으며, 1921년 10월 2일 사망하였다. 마산시 합포구 현동에 묘가 있다. 저서로는 《유교연원()》《동국유사()》《대동시선()》《농정전서()》《일사유사()》《위암문고()》《대한최근사()》《대동문수()》《대동기년()》《화원지()》 등이 있다.

생애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898년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사흘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되었다. 을사조약을 규탄한 <시일야방성대곡> 은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 에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되어 기사로 나갔다.이후 「코리아데일리뉴스」, 「제팬크로니클」 등의 언론이 이 명문을 인용했다.

 

이후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며 1년 가량 머물렀고, 귀국하여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이 신문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 복간되는 과정을 거쳤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바 있다.

친일 논란

장지연은 이 황현의 절명시 필화 사건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시와 논설을 기고했다. 매일신보 기고 활동은 1914년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조선인은 단결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 오른 이들 가운데 논란이 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논란의 이유로는, 오랫동안 교과서 등을 통해 알려진 통념에 배치된다는 점, 지방에서 기고 위주로만 활동하면서 말년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 일반적인 전향 친일 인사들이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사건이나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압박과 같은 계기를 통해 집단으로 친일파로 방향을 바꾸는 데 반하여 1910년대 초반에 특별한 동기가 알려진 바 없이 이미 천황을 찬양하고 총독을 칭송하는 행적을 보였다는 점, 친일 증거물 중 그가 쓴 것으로 의심 받는 《경남일보》의 시나 기사에는 기명 기사를 내지 않는 관례 때문에 글쓴이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장지연의 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 등이 있다.

같이 보기

주석

  1. 이순혁. “위암 장지연 친일시 공개”, 《한겨레》, 2005년 6월 2일 작성. 2008년 5월 14일 확인.
  2. 강명관. “친일인사 ‘장지연의 비극’ 거듭되는가”, 《한겨레》, 2008년 6월 27일 작성. 2008년 7월 1일 확인.
  3. 《오마이뉴스》 (2005.8.29)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장지연, 마지막까지 '고심'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 재평가 논란 일 듯
  4. 《연합뉴스》 (2005.5.29) 장지연 후손 `친일행적 의혹' 제기자 고소
  5. 《연합뉴스》 (2005.8.29) 다시 친일 논란에 휩싸인 장지연
  6. 정대수, 성급한 친일판정 언론사 왜곡우려 《경남일보》 (2005.9.5)
  7. 《세계일보》 (2005.10.8) 정대수씨 "장지연 친일 인정 어려워" - 언론학회 학술대회서 진상규명 제안

 

 

[사설] 장지연과 '시일야방성대곡'을 둘러싼 소동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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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주필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은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에서 "저 개·돼지만도 못한 우리 대신이란 자들은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됐다"며 "아! 분한지고, 2000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고 통곡했다.

그로부터 100여년 후 장지연은 자신이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했던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매국노들과 나란히 '친일 반민족행위자'에 이름이 오르는 운명에 처했다. 2005년 활동을 시작한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장지연이 1914~1918년 쓴 몇개의 글을 '친일 성향'이라 보고 지난 1월 그를 친일 행위 조사대상으로 선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경남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장지연 무덤을 경상남도 문화재에서 해제하라고 요구했고 마산시는 시내에 있던 '장지연로(路)'의 거리 이름도 없애버렸다. 2004년 국가보훈처는 장지연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었다. 세월에 따라 장지연을 민족 언론의 상징처럼 떠받들기도 하고 '반민족행위자'의 구렁텅이에 처박기도 하는 모순과 혼란이 이어졌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지난 6월 22일자로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에 "여러 정황상 (장지연에 대해)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엄격히 적용하기에는 다소 미흡해 선정을 취소했다"는 통지문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은 지하에서 백골(白骨)이 되고 진토(塵土)가 되었을 장지연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 되찾으려 했던 조국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벌이는 이 소동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군화와 총검으로, 이어서는 고문과 징역으로 짓밟으며 2000만 국민의 목을 조이던 시절에 생(生)을 영위(營爲)한 조선 사람의 일생을 100년이 흐른 후 오늘의 기준으로 재단한다는 것은 이만큼 위태롭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운 일이다.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의 부분적 행적에 매달릴 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그가 한 일을 종합해 균형 있게 본 후 내려져야 한다.

장지연의 경우 1910년대 일제하에서 친일 성향의 글을 썼다고 하지만 1920년대에는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해석하기에 따라 친일 소지가 있을 수도 있는 몇편 글을 빌미로 '시일야방성대곡' 집필이나 독립운동 참여 등 그의 다른 공적에는 애써 눈을 감아버린 채 그를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는 것은 역사를 보는 균형 있는 자세가 아니다.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장지연과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등 4430명을 수록한 '친일 인명사전'의 올해 안 출판을 강행할 것이라고 한다. 정권이나 권력이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 개입하고 대한민국 역사를 굴절(屈折)된 시각으로 보는 특정 이념 성향의 학자와 시민단체가 편을 지어 자기들의 색깔로 역사를 개찬(改撰)하는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해도 되는 것인가를 생각할 때다.
                                                       
                                                                           -서초동 퍼오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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