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대발해 본문
대발해(大渤海)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역사 드라마 '대조영'을 다시 보았다.134회분이나 되는 긴 드라마지만 실제 방영시에는 가금씩 보았으나 며칠 전 수 일 동안 처음부터 줄기차게 다시보기를 통해 보았는데 단편적인 역사 인식에서 흐름과 연속적인 시청으로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연개소문,보장왕,남생,남건,대중상,대조영,검모잠,걸사비우,이해고,초란,이진충,손만영,설인귀 등의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음모와 야망,투쟁,명분,사랑,눈물,혈육,배신,포로,패배,승리의 장대한 드라마는 보는이로 하여금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간 느낌으로 때로는 손을 불끈 쥐게 만들고 눈물로 나게 만들기도 한다.
서기 698년 대조영에 의해 발해가 건국된 이래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북부, 연해주 일대를 장악하여 229년간 유지되다가 서기 926년 1월 기마군단을 이끌고 침입한 요나라 태조(아율아보기)에 의해 보름만에 나라가 멸망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발해에 대한 역사는 우리 국사에서도 거의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들의 행태를 대조영이 보았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자신들의 역사는 송두리체 잊어버리고 남의 역사인 구약성경이나 뒤지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 한심할 것이다. 그가 그토록 줄기차게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면서 세운 나라인 발해는 229년 동안 한마디로 고구려의 지배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영역을 확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유민,말갈,글안,여진 등 제 민족을 통합하여 통합 국가를 이루어 고구려를 다시 부흥시킨 나라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역사 드라마로 그냥 보고 즐기는 정도로 지나칠 것이 아니라 다시한번 재조명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치열했던 삶을 살아간 대조영의 영욕에 찬 삶을 되돌아 보며 위대한 고구려 1000년 역사가 외세의 침략에 당당히 맞서다가 일순간에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나라이기에 더더욱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않는가!
짧은 역사 지식으로 역사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많지만, 위대한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다시보게 됨은 새로운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각 방송국에서 역사 드라마를 줄기차게 방영하고 있는 것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역사 인식을 심어주는데 큰 역활을 한다고 생각된다. 조상들의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가르치지도 못했던 교육계도 문제거니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왜곡된 역사를 제대로 반증하지도 못하고 파벌싸움만 일삼는 역사학계도 많은 반성을 해야할 것이다. 잃어버린 우리들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해야만 우리들의 고토를 되찿을 수가 있을 것이며 자라나는 젊은 청소년들에게 조상의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이해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광대한 영토를 호령하였던 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여 언젠가는 고토회복의 꿈을 펼쳐야 할 것이다.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와 평양성,요동성,안시성,살수,요하,요동,요서의 위치,백제의 중원대륙 정벌, 고구려와 백제의 대륙전쟁,고구려의 북평-어양-상곡-태원까지 점령하였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황해도 안악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유주자사'의 그림도 심층 깊게 해석되고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이미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속방으로 편입시키려고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벌여 유네스코에 등제하려 하고 있으며, 청국과 일제가 맺은 '간도협약'에 의해 이미 간도 땅은 오는 9월 4일이면 간도협약 100년이 넘어가는 날로 국제기구에 정부가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국제법상 영원히 중국의 땅으로 인정되는 날이 되지만 정부 관계부처는 수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정부 관계부처에 청원을 해도 대북관계,대중관계, 6자회담, 대미관계를 고려하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건국 년도 | 698년 |
정치체제 | 봉건주의, 군주제 |
해체 년도 | 926년 1월 |
인구구성 | 고구려인, 말갈족 |
국교 | 불교, 유교 |
수도 | 구국, 중경, 동경, 상경 |
행정구역 | 5경 16부 |
수출 | 말, 모피, 철 |
수입 | 금, 은, 귀걸이 |
무역상대국 | 당나라, 일본 |
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를 계승하여, 229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중상(또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노려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한 축이 되었다가 926년 1월에 기마대를 이끌고 침략한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계승을 명분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의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에 걸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국호
한국의 역사 (연표) | |||||||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
환인 환웅 (신시) | ||||||
시 대 ‥ 고 대 원 삼 국 | 삼 국 | 남 북 | 후 삼 국 |
고조선 | ||||||
진국 | |||||||
삼한 | 옥 저 |
동 예 |
부 여 | ||||
진 한 |
변 한 |
마 한 | |||||
가 야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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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 려 | |||||||
신 라 | |||||||
발 해 | |||||||
후 백 제 |
태 봉 | ||||||
고려 | |||||||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
조선 | |||||||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
대한제국 |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 |||||||
군정기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건국할 당시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대신국(大辰國), 또는 대진국(大震國/大振國)이라 칭하였으나 이후 발해로 바꾸었다.
사료에 따르면 713년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의 국왕에 책봉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이 책봉 이후로 진국이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고 하며, 북조선 학계에서는 진국이 스스로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는데 당나라가 이를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
건국
669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 지방의 영주(營州)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당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진국(震國 혹은 振國)을 세웠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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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 과정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당나라와 발해 북쪽의 흑수부 말갈(흑수말갈)이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으며, 신라도 북방 국경에 성을 쌓아 경계를 강화하고 발해와의 대결에 대비하였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등주(登州)를 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하는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후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구성하여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발해의 성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 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그 무렵 발해의 고민 또한 커지고 있었다. 우선 면적에 비해 발해의 자연 환경은 너무 거칠었다. 모진 추위와 눈으로 덮히거나 얼어붙은 땅은 농사를 어렵게 하였고, 사냥이나 가축을 기르기가 발해의 산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늘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발해의 두 번째 고민은 여러 종족을 잘 통합하여 국력이 하나로 일치된 나라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만주 지역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훗날 여진족 혹은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고구려인이 된 세력이 있었던 반면, 이때 새롭게 정복된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컸다.
오랜 고민 끝에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선 756년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상경에 자리잡은 뒤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그밖에 3성(三省)과 6부(六部)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음으로써 거친 자연 조건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별다른 치적은 없고, 국력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일시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 간왕에 이어 그의 종부(從夫)이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발해를 중흥시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으며,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설치하였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6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지방에는 부 밑에는 여러 개의 현을 두었고,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다.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멸망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 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 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여 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에 멸망시켰다. 이때 발해는 귀족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926년, 이로써 15대 왕 230년 동안 지속된 발해의 역사는 끝이 났다.
일부 학자들은 발해가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발생된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발해 국토를 황폐화했기 때문에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하였다고 주장하며, 또한 지배층인 말갈족의 이탈로 인해 발해의 체제 붕괴로 인하여 멸망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요나라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으며, 아울러 한민족은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연표
연도 | 성명 | 연호 | 설명 |
---|---|---|---|
668 | 고구려 멸망. 걸걸중상, 식구를 이끌고 영주로 옮김. | ||
698 | 대조영 | 인구 10여만호, 군사 정예군 수만 명으로 대진 건국. 고왕 즉위. | |
713 | 국호를 발해로 고침. | ||
719 | 대무예 | 고왕 사망. 무왕 즉위, 연호 인안. | |
732 | 인안14년 | 장문휴를 보내어 해군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 | |
733 | 인안15년 |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중지. | |
737 | 대흠무 | 인안19년 | 무왕 사망. 문왕 즉위, 연호 대흥. |
756 | 대흥20년 | 상경으로 수도를 옮김. | |
793 | 대흥57년 | 문왕 사망. 동생 원의가 즉위했으나 1년 후 사망. | |
794 | 대화여 | 성왕 즉위, 연호 중흥. | |
794 | 대숭린 | 중흥원년 | 강왕 즉위, 연호 정력. |
809 | 대원유 | 정력16년 | 강왕 사망. 정왕 즉위, 연호 영덕. |
812 | 대언의 | 영덕4년 | 정왕 사망. 희왕 즉위, 연호 주작. |
817 | 대명충 | 주작6년 | 희왕 사망. 간왕 즉위, 연호 태시. |
818 | 대인수 | 태시2년 | 간왕 사망.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침공, 북쪽 부락을 공략. |
830 | 대이진 | 건흥13년 | 선왕 사망.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
857 | 대건황 | 함화26년 | 대이진 사망. 대건황 즉위. |
871 | 대현석 | 15년 | 대건황 사망. 대현석 즉위. |
894? | 대위해 | 24년? | 대현석 사망?. 대위해 즉위?. |
906? | 대인선 | 13년? | 대위해 사망?. 대인선 즉위?. |
906 | 7년? |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 |
924 | 19년? | 거란 공격,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 |
925 | 20년? |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 |
926 | 21년? | 부여부 거란군에 함락.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태자가 통치. |
정치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적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발해는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지향하였다. 중앙의 정치조직은 3성(三省)과 6부(六部)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성하였다. 3성·6부 밑에는 5감(五監)·9시(九侍) 등의 기구를 두었다.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고구려의 전통을 살려서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는데(오늘날의 광역시에 해당), 국도(國都)인 상경(上京)과 중경(中京)·동경(東京)·남경(南京)·서경(西京)을 가리킨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長安城)과 그 규모를 같이하여 외성(外城)·내성(內城)을 두고 시가지를 바둑판같이 구획하였다.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 최근 러시아의 연해주에선 발해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발굴되면서 연해주가 발해에 속해있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다.
사회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고구려계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발해의 주민 구성은 발해인들로 구성되었는데, 다수를 차지한 것은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 이들은 피지배층이 되어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발해의 지식인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 사람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해는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하층 촌락민들은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사용 언어는 발해어로 총칭한다.
경제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콩·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명주·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나 수렵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하였다.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송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수공업은 철·구리·금은 등 금속가공업과 삼베·명주·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철의 생산량이 상당히 많았고, 구리의 제련술도 뛰어나 좋은 품질의 구리를 생산하였다. 세금으로는 조세,공물,부역 등이 있었다.
한편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품매매에는 현물 화폐를 주로 썼으나 다른 나라의 화폐도 함께 사용하였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 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하였다.
당나라와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나라는 산둥 반도와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들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
교육
3대 문왕 때 학문 연구 기관인 주자감을 세웠으며, 관리들이 학습시킬 수 있게 서적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휴학생 중에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나 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문화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나라, 말갈의 문화가 섞인 것이었으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고급 문화를 향유했음을 시사한다.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또한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터를 통해 당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 떠 설계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발해에서 발견되는 절터나 불상 등은 고구려의 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다른 조각상도 고구려의 것을 닮아서 소박하며 힘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기 공예가 발달하여 가볍고 광택이 있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당나라 사람이 자주 구해갔다고 한다.
군사
발해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지배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외교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자처한 바 있으나 그 밖의 나라들과의 외교 관계에서는 고구려와의 계승 관계를 주장한 일이 없다.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처음에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와 외교관계가 피할 수 없는 과제라 여긴 발해는 결국 713년에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 때부터 당나라와 무역과 외교관계가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발해에서는 문방구를 비롯한 여러가지 당나라의 물품들을 수입하고, 당에서는 모피와 가죽, 그리고 여러가지 산림자원을 수입했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후일에는 문화적 교류와 상업적 목적이 더 강했다.
발해의 역대 국왕과 연호
- 고왕 대조영, 재위 698년-719년
- 무왕 대무예, 재위 719년-737년 - 인안(仁安)
- 문왕 대흠무, 재위 737년-793년 - 대흥(大興), 보력(宝暦)
- 폐왕 대원의, 재위 793년-794년
- 성왕 대화여, 재위 794년-794년 - 중흥(中興)
- 강왕 대숭린, 재위 794년-808년 - 정력(正暦)
- 정왕 대원유, 재위 808년-812년 - 영덕(永徳)
- 희왕 대언의, 재위 812년-817년 - 주작(朱雀)
- 간왕 대명충, 재위 817년-818년 - 태시(太始)
- 선왕 대인수, 재위 818년-830년 - 건흥(建興)
- 대이진, 재위 830년-857년 - 함화(咸和),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 대건황, 재위 857년-871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 대현석, 재위 871년-895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 대위해, 재위 895년?-906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 대인선, 재위 906년?-926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발해와 역사 인식
발해인이 남긴 역사적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의 사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발해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 일연의 《삼국유사》, 유득공의 《발해고》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발해와 역사서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에 의하면, 18세기의 규장각에서도 발해의 정식 역사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 중에는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으나 발해 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들이 있다.
- 《규원사화》의 토대가 된 《진역유기(震域遺記)》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할 때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대기》를 근거로 쓰였다고 한다.
- 《단기고사》는 그 서문에서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편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발해가 아닌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단기고사는 그 내용이 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내용의 상당 부분이 위작으로 여겨진다.
발해와 역사 인식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 발해 말갈전과 《신당서》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식했으나 한국사에서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사를 한국의 역사이고 남북국시대로 주창한 이후 한국사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발해 멸망 후의 국가
발해 멸망 후에 발해의 터에 유민이 여러 나라를 재건하였으나 곧 멸망하였다. 그 중 다음과 같은 나라가 알려져 있다.
-서초동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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