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봄 4 본문
우면산의 봄 4
심산 깊은 계곡에서도 잘 자라는 진달래,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아침 우면산 등산로를 열심히 걸어가는 부부가 있었다.
인간은 나이가 들고 나중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되고 그동안 일궈놓은 재물을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죽음을 맞아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 후 일생동안 먹고 싶어도 참고 갖고 싶어도 참으며 죽도록 고생하여 재산을 모아놓고 나서는 어느날 불현듯 숨겨온 병이 발병하여 먼저 가는 남편이나 마누라가 누가 최고라고 했던가?
종합병원에 한번 가 보시라!
수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지금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을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 보시라!
남여노소를 불문하고 병들어 죽은 사람, 사고로 죽은 사람 별의 별 사람이 다 차거운 주검이 되어 누워 있고 많은 유가족들이 통곡을 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유명하신 분, 정치인, 교수,학자,청년,어린이,노인,여자,남자....
재산이 많으면 뭐하고, 인기가 많으면 뭐하나...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인데...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별의별 수단을 다 강구하고 있다.
강원도 방태산에서 한의사 생활을 하면서 신토불이 치료를 통해 기적을 보여주는 화타 김영길 선생의 글을 소개한다. 그러나 자신의 처방이 최고이고 자신의 방법만이 최고라는 자만이 가득차 있는 분이라 좀 걱정스럽다.
'자만은 추락에 앞서 찿아 온다'는 말을 알고나 있을까?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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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명예와 권력과 재산의 '사냥터'이다. 도시에는 이 '사냥터'에서 얻은 획득물에 의해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 매겨지는 독특한 도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내가 이 '사냥터'를 벗어나 두메산골인 강원도 화전민 마을에서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이제 12년이 되었다.
야불폐호란 말이 있다. '밤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다들 착해서 도둑이 없는 세상으로는 요, 순 시대나 가능한 이야기다. 문명의 눈부신 발달은 많은 '문'을 만들고 이 문을 잠그는 집 열쇠,금고 열쇠, 자동차 열쇠 등 많은 열쇠가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었다. 하지만 화전민 촌의 가옥은 울타리가 없다. 울타리가 없으니 대문도 없다. 대문이 없으니 열쇠가 필요 없다. 자연 속에서의 생활은 열쇠가 필요 없다.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사는 사회, 열쇠가 필요 없는 사회, 이곳 생활이 공자가 그리워하던 요, 순 시대의 생활이다.
지난 12년 동안, 도시의 사냥터에서 많은 열쇠를 얻으려다가 난치병,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며 얻은 결론이 있다. '누워 있다가 죽던가,걸어서 살던가.' '인생이 비참해지는 비결은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이라고 버나드 쇼는 말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이 나을지 아닌지를 생각할 여유를 갖는 한 그는 자신의 병 감옥에서 헤어날 수 없다.
병상에 누워 있는 한 병이 나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글은 병상에 누워 괴로워만 하던 불치병, 난치병 환자들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병을 이겨낸 사례를 중심으로 그 동안 내가 살아온 숲 속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끝으로 고백성사를 하나 해야겠다.
나는 혁명가는 아니지만, 나로 인해 혁명가 가족처럼 힘든 세월을 보낸 아내 송자, 아들 지환, 딸 지원에게 이 책을 바친다.
-1995년 겨울, 눈 덮인 방태산 자락에서-
요즘 사람들은 '자연 건강'이나 자연 건강 식품의 노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원인을 밖에서 찾지 말라. 근본적인 문제는 당신 생활 그 자체에 있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누군가 당신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재벌 총수만큼 돈이 많기를 바라는가, 대통령만큼 지위와 권력이 탐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유명 연예인처럼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겠는가?
사람에 따라 꿈은 다르다. 하지만 도시에 살고 있다면 한 가지만은 똑같다.
답답하고 짜증나는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꿈이다. 자연 생활을 동경하는 것은 지금처럼 도시가 복잡하지 않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인구가 현재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안되던 시절에도, 그리고 서울의 모습이 농촌 풍경처럼 한가할 때도 낙향하고 싶어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시골 생활의 풍경은 어떠할까.
산나물이나 약초 등으로 식탁을 차리고, 텃밭에서 기른 고추를 따서 백복령으로 담근 고추장에 찍어 먹고, 백출로 담근 식혜를 한 사발씩 들이킨다. 점심에는 칡을 캐어 국수를 만들고 송홧가루로 과자를 만들어서는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준다. 가끔씩 얼기설기 울타리를 쳐 놓은 뜰에 놓아기른 토종 돼지와 토종닭을 잡아 특식을하고, 훈련시킨 진돗개가 잡아오는 산토끼로 별식을 요리해 먹는다.
더우면 시원한 계곡 물에 몸을 담그고 시조 한 가락을 읊어 본다. 저녁이면 통나무를 자라 군불을 지피고 뜨끈뜨끈한 방에서 늘어지게 잠을 잔다. 새벽에 종알대는 새 소리에 잠을 깨고, 깊은 밤에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촛불 밑에서 책을 읽으며 명상에 잠긴다. 파란 하늘에 한가롭게 떠가는 구름과 밤하늘의 별들과 더불어 지내다 보면 신선이 따로 없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희열로 떨린다.
이렇게 살다 보면 누가 대권을 잡건 망령을 떨건 상관이 없다. 돈이 필요 없으니 몇 푼 안되는 봉급을 받으려고 아둥바둥 댈 일이 없다. 변덕스럽고 잔소리 많은 상사한테 아부할 필요도 없다. 주는 것 없이 밉고 짜증나는 사람들 틈에서 점잖은 미소를 억지로 지을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오염된 공기, 중금속탕 식수, 방부제 음식물, 짜증스럽기 만한 세상살이, 파렴치한 인간들과는 "영원히 안녕이다! 나는 떠나간다!" 고 외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과연 산 속의 자연 생활이 그렇게 생각처럼 좋은 것일까.
옛날에 힘든 일은 꾀를 부려 피하고, 잠자는 것과 먹기만을 좋아하는 머슴이 있었다. 머슴 때문에 고민을 하던 주인은 머슴한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일을 안 시키고 하루 종일 잠만 자고 포식하게 해주겠는데, 만일 자지 않거나 먹지 않는다면 매를 때리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좋아서 입이 벌어졌던 이 머슴은 불과 보름이 못 가서 매를 맞더라도 일을 시켜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자연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한약방을 하고 있는 강원도 인제군 상남은 우리 나라에서 오지 중의 오지이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승용차로 4시간은 걸리고, 높고 험한 고개를 적어도 네 개는 넘어야 한다. 이처럼 산간 벽지인데도 서울에서 온 환자들은 처음에는 이구동성으로 "이곳에 살면 저절로 병이 낫겠다"고 좋아하다가 막상 한 달쯤 지내다 보면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서 안달을 한다.
일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며칠만 쉬겠다고 이곳을 찾아온 그들은 처음에는 내가 원시적인 자연 생활을 하게끔 산속에 지어 놓은 '황정계 토막집'이나 '백세터 집'에서 한 달을 묵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하지만 사나흘이 지나면 대부분 기가 죽어서 내려온다.
파란 하늘도 지겹고, 총총히 빛나는 별도 못난 여자 얼굴의 주근깨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다.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계곡 물이 흐르는 소리도 자동차 소음보다 더 시끄럽게 들리고, 명상을 잠기면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장터와 밉살맞던 상사가 보고 싶어진다. 물론 산나물도 먹기 싫다. 바로 이것이 도시 문명에서 성장한 인간의 참모습이다.
내 한약방에서 산 속으로 십여 리 더 들어가면 원시적인 자연 생활을 실천하며 사는 무리가 있다. 특정 종교를 믿는 그들은 대부분이 가족 단위로 생활한다. 이곳 산골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면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조차 읽지 않는다. 아이들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르친다. 그야말로 바깥 세계와는 담을 쌓은 채 살고 있다.
그들은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산나물 같은 채식만 하며 육식을 금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열심히 일을 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화를 내거나 소리내며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언제나 착한 일만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흡사 에덴의 동산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건강 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아주 건강하고 오래 살아야 한다.
농약을 쓰지 않으니 농약에 중독될 리도 없고, 싸우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다. 맑은 공기와 물을 마시면서 살고 있으니 건강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무것이나 먹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산골 사람들에 비해 질병이 더 많고 한 번 병에 걸리면 저항력이 약해 치료 기간이 길다. 또 기르는 염소가 감기가 걸리면 그들도 감기에 걸길 정도로 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 심지어 영양실조에서 오는 간질성 질환을 앓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당신은 '자연 건강'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연건강 식품' 한두 가지는 먹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은 자연 건강에 대해 아는 체를 안하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고, 자연 건강 식품을 먹지 않으면 당장 탈이 날 것으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 건강과 자연 건강 식품에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약삭빠른 장사꾼들은 금세기의 복음처럼 별의별 자연 식품, 건강 식품을 선전하고 대중매체들은 이에 편승한다. 자연건강서에 쓰여 있는 대로하고 자연 건강 식품만 먹으면 그 어떤 명에도 걸리지 않고 불로장생 할 것 같다.
적어도 건강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하면 '자연' '건강' '생명' '환경' 이란 네 단어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알코올중독자나 약물 중독자까지 거창하게 생명 문제를 이야기하는 세상이고 보면 서글픈 느낌마저 갖게 된다.
자연 건강 식품이라고 떠드는 것은 사실 30년 전만 해도 소름끼치는 구항식품이었다. 그 시절에는 하루 세 끼 밥만 배부르게 먹으면 대통령이나 재벌이 부럽지 않았다. 춘궁기가 되면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어 떡을 해먹거나 산나물 죽으로 허기를 채웠던 시절이었다. 이러니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나고, 산모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요행으로 살아남은 아이는 뼈가 채 자라기도 전에 산에 가서 땔감을 하든가 농사일을 거들어야만 했다.
지금처럼 섬유질 식품을 골라서 먹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섬유질로 된 한 가지 음식만을 먹었으니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40세가 넘으면 늙은이가 되고, 간혹 명이 길어 환갑까지 살면 온 마을 이 장수 기념 축하잔치를 벌리곤 했다. 이들에게는 요즘 도시에서 천대받는 설탕, 쌀밥, 돼지고기가 건강 장수를 위한 고단위 영양식이었다.
자연 건강 식품이 건강에 좋은 것은 사실이다. 또 맑은 물, 좋은 공기하는 자연 환경 조건이 중요하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그같은 조건으로 살아도 40세를 넘기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자연생활의 한계이다. 또 공해 없는 자연 환경과 자연 건강 식품이 건강과 행복의 충분조건은 될지언정 필요조건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그렇다면 도시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도시인들, 몸에 좋다는 자연 건강 식품만을 먹지만 별로 건강하지 못한 도시인들이 참으로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는 적게 몸을 움직이고 적정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식사를 하며, 욕심사납게 생각을 많이 하는데 참된 원인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만 돌리고 싶어한다.
원인을 밖에서 찾지 말아라. 근본적인 문제는 당신 자신의 내무에 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거기에 천당이 있고 극락이 있고 유토피아가 있다. 자연 건강 식품과 공해 없는 자연 환경은 결코 건강과 행복의 필요 충분조건이 아니다.
현재 당신이 처한 입장에서 바쁘게 일하고, 음식에 대한 편견을 머리고, 또 욕심을 버려 자기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면 저절로 건강하고 행복해진다. 일상생활과 격리된 채 산속에서 도를 닦는다는 사람들의 넋두리는 무시해도 좋다. 산속에서 수도자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선을 찾으려는 욕심이 강하다 보니 갈등이 생기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사고의 폭이 좁아지게 마련이다. 겉보기에는 군자나 성인 같지만, 속은 병들은 소인배나 다름없다.
고기가 물에서 떠날 수 없듯이 인간은 사회에서 떠날 수 없다. 잘난 것과 못난 것, 이런 것과 저런 것이 사람들 틈에서 서로 부대끼면서 여과되고 승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사람은 사람답게 된다. 이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숨에 결론에 이르려 한다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복잡하고 짜증나는 도시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기 전에 자신이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를 먼저 떠올려 보자. 진짜 건강한 사람은 참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
'강간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도시를 강간의 질곡으로 파악하느냐, 즐거움의 공간으로 받아들이냐는 각자의 선택이다.
봄 기운으로 푸르게 융틀임하는 우면산
지층의 기운이 서서히 솟아나듯이 봄기운은 온 대지를 달구고 있다. 오솔길을 걸으면서 들려오는 아침뉴스는 아무리 들어도 기쁜 뉴스라고는 들리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 아들과 영부인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고 받은 돈의 행방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은 집에서 초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블로그에 '나는 모르는 일이다. 검찰과 박회장이 다른말을 하고 있다.' 등등 .. 차마 전직 대통령으로 책임을 면하기에 급급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려는 자세를 보고있는 국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자격도 없고 수양도 덜 된 이기도 않은 풋과일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이나라 국민들이 불쌍할 뿐이다. 초연하게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고 부패한 자신에 대해서 과감하게 국민들께 용서를 구한다면 누가 그를 욕할 것인가?
전직 다른 대통령들은 수 천억원씩 비리를 저지르고 법정에 섰지만 국고환수를 선고받고 풀려난게 아닌가? 왜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을 하려하지 않을까? 액수가 너무 적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일까? 다른 대통령들은 수 천억씩 먹었지만 자신은 너무 쬐금이라서 그럴까?...도덕이라고, 윤리라고,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는 사람일 수록 인간은 뒷구멍으로 다른 짓을 저지른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언론에 대한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시론을 보자!
자유는 누릴 자격이 있는 자에 한해서만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자유를 빙자하여 자신과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그로인해 피해받는 국민들은 누구에게 보상받고 보호받아야 하는지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공정한 보도, 사실에 근거한 보도를 망각한 파렴치한 보도,부패고리와 먹이사슬, 집단 이기주의를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언론을 부패의 온상으로 보는 시각을 모르는가!, 어용언론으로, 편향된 보도,허구와 왜곡보도를 일삼아온 언론 스스로도 자성의 기회를 삼아야 할 것이며 언론을 치부의 수단으로, 치외법권의식으로, 정치적 출세의 방법으로 이용하려는 일부 몰지각한 언론인들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자유여! 누가 너를 격렬히 뜯어먹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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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홍성태 상지대 교수·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결국 신경민 앵커가 문화방송(MBC) <뉴스데스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마도 신경민 앵커는 최고의 뉴스 진행자로서 우리의 방송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는 외모, 음성, 내용까지 뉴스 진행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모두 충실히 갖춘 참으로 보기 드문 뉴스 진행자였다.
그가 시민들의 열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퇴출'되는 상황을 접하면서 나는 <굿 나잇, 앤 굿 럭>(2005)이라는 미국 영화를 떠올렸다. 이 영화는 매카시즘의 광기에 맞서서 미국 언론의 양심을 지킨 미국 CBS 방송국의 뉴스 진행자 에드워드 머로와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의 이야기이다. 아마도 신경민이라는 이름은 에드워드 머로와 함께 기억될 것이다.
캐나다의 경제사학자였던 해럴드 이니스(Harold Innis)는 일찍이 매체기술의 힘을 강조한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는 사람의 생각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매체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회가 변화한다는 '매체 결정론'을 주장했다. 사람들이 생각을 주고받는 것을 뜻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어원은 '공유'나 '공통'을 뜻하는 라틴어 '코무니스(communis)'이다. 공동체를 뜻하는 '코뮨(commune)'도 당연히 이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을 주고받는 데서 사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매체기술의 발달과 함께 사회는 크게 변화하였다. 각종 생산기술이나 운송기술만이 아니라 매체기술도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핵심 기술이다. 이니스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니스는 사회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매체기술의 힘을 강조했다. 예컨대 그는 영토의 크기는 매체기술에 의해 규정된다는 식의 명제를 제시했다. 이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우리는 이에 앞서서 더욱 근원적인 매체기술의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라틴어 어원이 잘 보여주듯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기술인 매체기술은 결국 사회를 형성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탈산업사회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에 따르면, "괴테(Goethe)는 인간 공동체의 기초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였다." 글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박식했던 괴테는 매체기술의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했던 모양이다. 언론매체를 장악하는 것은 공동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언론매체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집권에 따라 이 나라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갈수록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공동체와 직결된 언론매체와 관련해서 더욱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세를 크게 완화해서 투기의 달인인 '강부자'를 기쁘게 하는 반면에 빈민층과 서민층은 물론이고 중산층조차 크게 괴롭게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 사회의 공동체성을 계속 약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모든 언론매체를 완전히 장악해서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조차 강력히 통제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강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알고 말할 자유조차 강력히 억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기술은 방송, 인터넷 휴대전화의 세 가지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세 가지 모두에 대해 강력한 억압책을 강행하고 있다. 방송법 개악, 정보통신망법 개악, 그리고 통신비밀보호법 개악의 시도는 명명백백한 증거이다. 방송법 개악의 핵심은 방송을 이미 '보수 언론'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재벌과 족벌이 장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정보통신망법 개악의 핵심은 시민들이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소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통신비밀보호법 개악의 핵심은 국가정보원에 시민들의 휴대전화 이용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시도하는 대로 세 가지 법의 개악이 이루어진다면, 2008년에 세계 47위로 추락한 이 나라의 언론자유 지수는 아예 세계 100위 밖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언론매체를 장악하기 위해 강행하고 있는 것은 매체기술과 관련된 세 가지 법의 개악만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모든 언론매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시민들에게 홍보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정연주 사장을 쫓아낸 뒤에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그 좋은 예이다.
KBS에서는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계속 강제로 내쫓으려 하고, 또한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그램들을 계속 없애려 하고 있다. 김현석 기자를 비롯한 기자들을 터무니없게 쫓아내려고 했다가 안팎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취소했고, <시사투나잇>처럼 훌륭한 시사프로그램을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없애 버렸다. 지금의 KBS를 과연 정상적인 방송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좋은 기자들을 쫓아내고 좋은 프로그램들을 없애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KBS는 계속 이상한 프로그램들을 방영해서 큰 논란을 빚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서 방영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 프로그램은 그 좋은 예이다. 조사 대상을 갑자기 대선 패널로 바꿔서 이루어진 이 조사 결과를 두고 KBS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상승했다고 강조했다.
이런 KBS를 두고 <대한뉴스>가 돌아왔다거나 '방관자 저널리즘'이 횡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좀 더 최근에는 <추적 60분>의 교육 개혁 시리즈가 사실상 '사교육 홍보물'과 다름없었다는 비판마저 받고 있다. KBS의 간판 시사프로그램마저 커다란 불신과 의혹의 대상으로 전락한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KBS는 윤도현의 출연마저 봉쇄했다. 윤도현은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이다. 그와 그의 밴드는 음악의 면에서 '한류'를 대표하는 스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를 이 나라의 공영방송에서는 이제 볼 수가 없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그의 '잘못'은 작년에 광우병 반대 촛불 집회에 참여했다는 것과 최근에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멋진 노래를 발표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렇듯 황당한 일이 이제는 마침내 문화방송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신경민 앵커의 '퇴출'이 그것이며, 개그우먼 김미화의 '퇴출' 시도가 그것이다. 신경민, 김미화, 윤도현의 앞에는 이미 정연주와 '미네르바'가 있었다. 신경민, 김미화, 윤도현이 끝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또 누가 쫓겨날 것이며, 누가 출연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어떤 프로그램들이 없어질 것인가?
'미네르바'가 유언비어를 유포해서 구속되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살아야 할 아주 나쁜 '죄인'이라면, 이른바 '747'의 성공을 확신에 차서 공언하고 '대운하'를 대박 사업으로 선전한 자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미네르바'는 구속되고, 신경민, 김미화, 윤도현은 '퇴출'되고,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강력한 규제권을 휘두르고 있다.
이 나라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갈수록 크게 어려워지고 있다. 2009년 3월 현재, 미국의 <포린폴리시>는 이 나라를 '소리 없는 인터넷 검열 국가'로 선정했고, 세계적인 NGO인 '국경없는 기자회'는 이 나라를 인터넷의 자유와 관련해서 '감시 대상 국가'로 선정했다.
이 나라는 이미 히틀러나 전두환을 떠올리는 게 당연한 상태에 이르러 있는 것 같다. 그리워라, 자유여.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자유여
누가 너를 격렬히 뜯어먹고 있구나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이며
언론의 자유는 사회의 기본이다
누가 이 자유를 억압하는가
무지한 자들이 지혜를 구속하고
한심한 자들이 인재를 탄압하네
지금 이곳은 맹렬히 후진화하는 중
그래도 희망은 사라지지 않아
촛불을 들어 어둠을 밝혀 나아간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tyio@pressian.com)
계곡 배수로, 석축은 영구성은 있으나 자연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벗꽃잎이 봄바람에 눈꽃처럼 흩날리며 자신의 의무를 다한듯 미련없이 떨어져 있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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