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봄 5 본문
우면산의 봄 5
심산 깊은 계곡에서도 잘 자라는 진달래,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우면산의 봄은 이 나라가 어찌되던지 어김없이 봄을 알려주고 있다. 수백억년 동안 진행된 지구의 변함없는 계절의 반복이다. 인류의 역사는 1만년도 채 되지 않는다.
오욕과 눈물의 역사를 반복해온 우리민족!
우리들은 이 민족의 후손들이다!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이 땅!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라!
지난 3월 11일 토요일 오후 코엑스몰을 지나다가 롱보 퍼포먼스 장면을 보게 되어 몇 컷 찍었다. 행복한 이 민족의 모습이기에...
지금은 광고와 홍보시대, 홍보없이는 수 많은 정보속에 소비자들이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홍보는 어쩌면 최면이며 소비자들은 그러한 광고와 홍보를 보고 그 물건이 최고인 것처럼 환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 물건값에는 광고와 홍보비가 포함되어 비싼가격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비슷한 물건이지만 얼마나 광고와 홍보비를 많이 들이느냐에 달렸다. 그 속내는 별 차이가 없으나 광고와 홍보로 인한 소비자들의 인상은 다른 제품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그 제품이 최고의 제품으로 포장되어 보이게 된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침탈사례를 보자!
중소기업이 아무리 좋은 제품을 개발해도 상품화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 기술을 특허나 실용신안으로 등록하려해도 관련부처에서 그 제품에 대한 정보를 대기업에 흘리고 그 대기업은 그 제품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만들어 먼저 등록하게 된다. 그러면 그 중소기업은 그 제품에 대한 정보가 송두리체 대기업에 넘어가고 실제 등록단계에 이르면 이미 대기업이 먼저 등록하여 우선권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중소기업은 법정공방을 벌이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 제품은 이미 대기업의 명의로 등록되어 특허까지 마친뒤에 해당관공서와 수의계약으로 대량생산단계에 돌입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법조계와 관련 변호사를 통해 우야무야 적정한 협상으로 얼마간의 위로금을 주는 조건으로 모든 개발권한을 양도받게 된다. 이것이 한국의 기술개발 실태이다. 수 많은 개인발명가가 개발한 새로운 제품이 국내대기업에 빼앗기거나 국외로 이관하여 외국기업과 협상하여 싼 값에 신기술을 팔아 넘기고 그 외국기업응 제품을 생산하여 한국에 몇 배의 비싼 가격으로 되팔게 된다. 이것이 신기술개발의 현실이다.
강원도 기린면 상남리 미산계곡 화타선생의 건강 이야기는 계속된다!
'병 나가라, 뚝딱!'하여 간경병 고친 외교관
과부와 술 마시면서 욕도 하고, 걸으면서 주문 외워 간경병을 고친 전직 고위 외교관
"씨X, 기분 좋다!"
"X같은 세상이다!"
"이 X같은 년아, 한 잔 받아라!"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간경병 환자에게 연 사흘 동안 술을 먹이면서 이런 욕설을 의도적으로 시켰다면 독자들은 나를 미친 한의라고 할지 모른다.
더욱이 그 환자가 세련된 품위와 매너를 지녔던 전직 고위 외교관 출신의 인텔리였다면 더욱 의아해 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간경병'이라니......
서울대 법대 출신의 이 선배(60세)가 나를 찾아온 것은 2년 전 봄이었다.
어느 날, 마치 저승에서 탈출한 듯한 몰골을 한 사람이 한약 방문을 열고 불쑥 들어섰다. 그는 다름 아니라 내가 대학생이던 60년대에 어지러운 시국을 함께
고뇌했던 선배였기에 더욱 놀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10연 년만에 만난 그 선배에게서 불치병 말기의 환자가 풍기는 시체나
다름없는 싸늘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다 보니 만난 지 어느덧 10여 년이 지났다.
신문지상을 통해 지구촌을 누비는 그의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두메 산골에 있는 이름 없는 한의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로 이해가 맞물려 있어야 자주 만날 텐데 추구하는 세계가 다르다 보니 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세상살이이다.
이 선배는 공직에서 퇴직하고 그 동안 읽지 못했던 책이나 읽으며 한동안 하는 일없이 쉬었다. 그렇게 몇 달을 쉬었는데도 이상하게 직장에 다닐 때보다
쉽게 지치고 아침에 일어날 때면 몸이 천근 만근 같았다. 평소 건강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종합 검진을
받아 보라는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병원을 찾았는데 뜻밖에도 '간경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외국의 유명 의료진을 찾아 재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일단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그는 '노력해 봅시다'라는 의사의 말을 좇아 구내는 물론 외국의 유명한 의사의 처방까지 열심히 받았다. 그러나 2년여의 눈물겨운 투병 생활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좋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간경변은 간염 증상이 깊어져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평소 피곤함을 심하게 느끼거나 짜증나는 횟수가 잦아져 간 기능이 약해졌다고 자가 진단을 하다가 돌연 간경변이란 전문가의 진단을 받는 수도 많다. 일단 강경변이라는 진단이 내려지면 사람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사는 기간이 보통 6개월에서 10년 정도로 그 폭이 넓은 것도 특징이다.
이 선배는 완전히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이나 요행, 기적 이외에는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삶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지나온 날을 되새기다가 내 얼굴이 떠올라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찾아온 것이다.
물론 내 의술을 믿고 병을 고치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죽기 전에 가깝게 지내던 후배의 얼굴이나 보고 마지막으로 설악산도 구경할 겸 찾아온 것이었다.
욕설도 때로는 약이 된다
이 선배는 나를 만나자마자 눈물부터 흘리며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자기는 평생 남에게 못된 짓을 한 적도 없고 비록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십계명을 어긴 적도 없을 만큼 사회의 완전한 모범생으로 세상을 살아 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어째서 부정 부패나 사기 행각 같은 못된 짓을 많이 하고 과음과식으로 몸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탈없이 잘 살고 있는데, 왜 자신만 이런 불치병에 걸려야 하는지 하늘이 원망스럽다고 했다.
이 선배의 말처럼 질병이 마음씨 착하고 좋은 사람에게는 찾아오지 않으면서 나쁘고 악한 사람만 골라서 찾아오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질병은 착한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사전 통보 없이 찾아오는 교통사고와 같다. 사람의 인격이나 교양, 그리고 덕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는 밤새워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선배를 본능적으로 한 사람의 환자로 바라보게 되어 그의 병세와 정신 상태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한 가지 치료 방법을 떠올렸다.
다음 날, 나는 이 선배에게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의사가 술을 마시면 큰일난다고 했다면서 펄쩍 뛰었다.
사실 간병 환자에게 술은 독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왕 죽을 목숨인데 더 이상 무슨 큰일이 나겠느냐고 달래면서 억지로 끌다시피 술집으로 갔다. 나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동네 과부 두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무슨 말이든 한 마디 할 때마다 반드시 욕설을 끼워 넣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벌주와 벌금을 물기로 했다.
이 선배는 처음에는 무척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낯선 여인들 앞인지라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려는 듯했다. 옆에 앉은 과부가 술을 권하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놓고 술잔만 만지작거릴 뿐 별로 마시지 않았다.
내가 "아, 씨X 술 좀 드시오!"하면 "알겠소"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분위기가 그럴듯하게 흘러가자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했다. "에이, 씨X 내가 왜 이런 죄값을 치러야 하나!" 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앙금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날 곤죽이 되도록 욕을 하며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다음 날, 그는 평생 처음으로 과음하고 주정하고 욕지거리까지 해서 쑥스럽기도 하지만 마음은 홀가분하고 기분이 매우 좋아진 것 같다고 했다.
나와 이 선배, 그리고 두 명의 과부는 연 사흘 동안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 술좌석의 주제는 특별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의 병에 대해서는 일부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흘 째 되는 날 아침, 나는 다소 무리한 탓인지 피곤했지만 이 선배는 오히려 흙빛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처음 나를 찾아온 날과는 딴판이었다.
화날 때 화내고 슬플 때 슬퍼해야
술좌석을 통해, 이 선배에게 이른바 '인성 소양 교육'을 시킨 것은 일찍이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응용한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대노하고 기가 역상하여 내리지 않고 협하에 쌓이면 간이 상하고 또 대노하여 기가 역상하면 간이 상한다'고 적혀 있다. 쉽게 말하면, 기는 몸의 위에서 아래로 순환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올라가 순환이 안되면 몸에 찌꺼기가 생기게 된다. 불순물이 많아지면 이를 해독시키는 간이 제기능을 다 못하게 되어 과부하 현상을 일으키고, 결국 간세포가 죽게 됨으로써 간 전체가 서서히 굳어지게 된다. 요즘 말로 하자면 간경변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간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어느 정도 좋은지 나쁜지를 얼른 알아차리게 해주는 '정직한 장기'는 아니다. 간세포가 절반 이상 파괴되어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될 때까지는 그 증상을 드러내지 않기에 '침묵의 장기'라고도 불린다. 어느 병이든 초기에 알아내면 쉽게 고칠 수 있지만 간질환의 조기 발견이 어렵고, 또 치료도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허준 선생이 동의보감을 저술하던 조선조 시대(선조)에는 공해 문제가 없었으므로 간이 상하는 주요 원인을 화를 내어 기가 역상하는데 두었다. 오직 스트레스만을 간병의 원인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간질환은 오염된 음식물, 오염된 공기, 오염된 물, 그리고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다. 다시 말하면 잘못 먹고, 잘못 마시고, 잘못 숨쉬고, 탐욕의 산물인 과도한 스트레스에 의해 생기는 병으로,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는 짓을 한 결과이다.
물론 화를 내는 것만이 간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다. 화를 참는 것도 겉보기에는 교양과 인격을 갖춘 것 같아 보기는 좋지만 속으로 곪기 때문에 건강에는 화를 내는 것보다 더 해롭다. 그러므로 허준 선생이 동의보감에서 지적한 '대노하고...' 라는 말을 '대인하고...' 로 바꿔야 한다.
인간이란 화날 때 화내고 슬플 때 슬퍼해야 한다. 로봇처럼 완벽한 것보다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결함 많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결점이나 잘못을 반성하면서 남의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 있다. 약간은 모자라고 짜증나고 변덕스러운, 항상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이 사람다운 사람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희로애락이 사람들 사이에서 흙탕물처럼 뒤엉키면서 여과되고 승화되어 자연스러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갚은 산 속에서 혼자 사는 대선사나 깡통로보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용기있는 사람, 지혜 있는 사람이란 지신의 허물을 알고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선배가 살아온 인생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삶이 아니라 틀이 정해진 깡통로보트의 삶이었다.
그는 얼릴 때부터 완전한 모범생으로 성장하여 일류 마크가 붙은 학교를 거치고 외무 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이 되었다.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세련된 매너는 치열한 공직 사회에서 남보다 앞서는 빠른 승진을 보장해 주었다. 그는 넓고 할 일이 많은 세계의 외교 무대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다가 정년 퇴직을 했다.
화려한 외교 무대에 걸맞은 생활을 하려면 극도로 절제된 말과 행동이 필수적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의 칭찬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기의 개성은 없어지고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를 세상살이의 척도로 삼았다.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그것을 배꼽 아래에 감췄다. 기분 나쁜 상태나 욕설을 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품위와 교양을 잃은 적이 없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도 십계명을 어기고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에 금이 갈까봐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언짢은 일을 당해도 의연하게 대처했다.
결국 이 선배는 간경변을 치료하기에 앞서 이같은 깡통로보트 의식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했다. 외교관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접촉했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만남이 아니라 박제되고 경직된 삶이었다. 지구를 수십 바퀴 돌았어도 실제로는 평생 열 발자국도 못 걷고 죽는 양계장에 갇힌 닭의 일생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 선배와 비슷한 처세술로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다 죽을병에 걸려야 되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답은 간단하다.
세상살이는 자신의 감정이나 개성을 어느 정도 감추거나 절제하고 살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같은 박제된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포장마차에서 소주 몇 잔을 마시며 세상을 욕하거나,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것은 건강을 지키는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싫은 것은 싫다고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누가 뭐라도 하는 X세대들의 생활 방식을 두고 기성세대는 많은 걱정을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따지면 그들과 같은 생활 태도는 건강이란 측면에서 오히려 바람직한 면도 있다.
내가 이 선배로 하여금 연 사흘 동안 고주망태가 되어 상스런 욕설을 하며 주정하게끔 만든 까닭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30여 년 동안 응어리진 그의 깡통로보트 의식에서 비롯된 고정된 사고의 틀을 부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였기 때문이다.
녹즙은 간에 해로울 수 있다
간경변 환자인 이 선배에게 사용한 치료법은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의 적성과 체질, 병의 상태,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강원도 방태산의 자연 환경을 고려한 것이었다.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을 다듬는 방법으로 수양법과 도인법을 사용했다.
수양법은 매월 초하룻날 새벽에 동향평좌하고, 이를 세 번 마주치면서 동방의 청기를 아홉 번 마시고 아흔 번 폐기한다. 도인법은 정좌하여 양손으로 계하를 여러 번 안마하고, 서서히 3-5도에 걸쳐 몸을 낮추고 다시 정좌하여 양손을 끌어서 서로 교차하고 반복하면서 가슴에 닿도록 3-5도 한다. 이것을 오래 하면 간의 적취와 풍사와 독기가 제거된다.
다음으로 처방인데, 동의보감에 따르면 간허에는 사물탕, 청간탕 혹은 보간환을 쓰는데 간병에는 당풍하는 것을 금하도록 되어 있다. 청간탕은 간의 경락인 간경이 혈허하고 노화가 있는 증상을 다스리는데 백작약, 천궁, 당귀 각 4그램, 산치자인 목단피 1.6그램으로 만든다. 보간환은 간허를 다스리는데, 사물탕에 방풍 강활을 가하여 밀환한 것이다.
이밖에 단방으로 21종이 있으나 이곳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초용담,세신, 결명자, 차전자, 제자, 복분자, 청상자, 산조인, 산수유, 사삼, 창이자,작약, 고삼, 청피, 모과, 소맥, 총백, 이 같은 나물과 약초를 사용했다. 사실 동의보감에 적혀 있는 단방의 나물과 약초만 먹으려고 해도 다 먹기가 쉽지 않다.
산을 돌아다니면서 호흡할 때마다 '병 나가라, 뚝딱!' 하면 단전호흡의 효과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간병에 걸리면 마음이 약해져서 이상한 학설의 약초나 나물, 비방, 고가의 약품, 수입품 약초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산과 들에 사시사철간에 좋은 나물과 약초가 즐비하게 자라고 있으니,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요즘 녹즙을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녹즙은 간에 해를 줄 수 있으므로 단방 내에 있는 것으로 자연산을 직접 캐 먹거나 나물국을 끊여 먹는 것이 좋다.
즙을 내어 먹는 것은 자연 상태로 먹는 게 아니다. 식물의 어느 특정 부위만을 빼먹는 것은 위험할 수가 있다. 물론 신선한 비타민을 섭취한다는 면에서 보면 녹즙을 먹는 것이 안 먹는 것보다 나을 수 있지만, 녹즙처럼 액기스만 빼서 먹게 되면 그 식품의 성분만을 빼먹는 꼴이 된다.
자연 식품은 그 식품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기를 섭취해야 효과가 있다.
산삼이나 도라지에는 사포닌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성분은 자연산에서만 그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완벽한 유기농법으로 재배를 했다고 해도 자연산의 효능을 따라갈 수는 없다.
숨쉴 때마다 '병 나가라, 뚝딱!'
봄철에 찾아온 이 선배는 나의 지시대로 이곳 방태산에서 오대산을 오가는 심마니들을 따라 다니며 위에서 말한 단방 약초를 캐어 날것으로 먹고 나물로 무쳐 먹거나 뿌리를 삶아 먹었다. 환자들, 특히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은 음식을 많이 가려먹는다. 무슨 체질에는 무슨 음식이 좋고, 어떤 병에는 어떤 음식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의사보다도 더 자세하게 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종류의 환자이건 간에 음식을 가려서 먹게 하지 않는다. 아무리 불치병에 걸려도 마찬가지다. 아무 음식이든지 입맛에 맞는 것을 먹도록 할 뿐 몸에 좋다고 해서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게 하지는 않는다. 환자가 먹어 보고 맛이 입에 맞으면 그 음식은 그 환자의 체질에 맞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 하면 병 상태에 따라, 체질에 따라 입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덧 가을이 왔다. 그런 사이에 이 선배의 몸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내 치료 방식에 120퍼센트의 확신을 가진 그는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몸이 좋아지니 우울증에서 벗어나 '나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모든 일에 솔직하고 적극적이었다.
이 선배는 본래 냉소적인 지성인이라 믿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 내가 만든 하나의 '주문'을 외우게 했다. 그는 이 주문을 외면서 하루 종일 높은 산을 돌아다녔다. 만약 그가 카톨릭이나 기독교 신자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로 시작되는 주기도문을 외웠을 것이고, 불자라면 '관자재 보살...' 하는 반야심경을 중얼거리며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믿는 종교가 없는 그에게 '병나가라, 뚝딱!' '병나가라, 뚝딱!' 이란 주문을 중얼거리게 했다.
이 주문은 정신적인 치유 능력을 높이기 위해 내가 특별히 고안한 진언이다.
호흡을 할 때 숨을 힘있게 들이마신 다음 다시 힘있게 내쉬면서 이 주문을 중얼거리면 단전호흡의 효과와 같이 마음이 편해진다. 고민이 있거나 문제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이 나가라는 의미를 두고 호흡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병이 나가는 체험은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의 능력 때문이다.
병도 살아 있는 생명체이니 나가 달라고 사정을 하고 성의를 보이면 환자의 몸에서 떠난다. 약보다 정신력이 병을 낫게 하는 더 중요한 요소이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라 감병이다.
이 선배가 결코 죽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병나가라, 뚝딱!'을 외친 지 8개월 후 병원에 가서 재검진을 받아 보니 그의 몸에서 간경변이 뚝딱 사라져 버렸다.
우면산에도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아마 북녘 땅에도 곧 진달래가 곱게 필 것이다.
최근 북은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김정일의 위상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건강이상 징후가 계속 포착되는 가운데 후계자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북의 후계자에 따라 앞으로 남북관계는 어떤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현재 북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투쟁의 실태를 살펴보자.
북한의 권력투쟁 실태
장성택은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경제 시찰팀을 이끌고 남한과 동남아시아로 자본주의를 학습하기 위해 순회했다. 2002년 7월 1일 발표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에 따라 북한 경제를 새롭게 개혁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사실 북한이 발표한 7.1 조치는 이미 2001년 벽두부터 예고되었다. 2001년 1월 4일자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일은 “지난 시기에 마련한 터전에서 그 모양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게 그 면모를 끊임없이 일신시켜야 한다”며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높이에서 보고 풀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를 ‘김정일식 신사고’ 발언이라고 평가 한 바 있다. 또한 같은 해 10월 3일 발표된 “강성대국 건설의 요구에 맞게 사회주의 경제 관리를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담화는 9개월 후 시행된 7.1 조치의 골자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7.1 조치가 상당기간의 준비와 고심 끝에 나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다. 소위 북한에서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들을 발표해 나갈 때 절대 통치자 김정일 다음으로 북한의 최고 실세가 누구였나 하는 점이다. 김정일이 이런 일을 상의하고 대화하고 김정일에게 이 모든 조치들을 자신 있게 제안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였을까 하는 점이다. 그 인물이 바로 장성택 이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이 이뤄지고 구상되고 발표된 시기는 다름 아닌 장성택이 김정일의 아들들을 제치고 김정일 후계자 제1순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때 발표되었다는 시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2002년 9월과 11월에는 신의주 특별행정구역 설치를 발표하고 ‘금강산 관광지구법’ 및 ‘개성공업지구법’을 공포하는 등 일련의 특구확대 정책을 취하였다. 이 모든 경제개혁 조치들이 그리고 경제특구 설치를 비롯한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이 획기적으로 도입될 수 있는 모멘텀을 마련한 인물은 장성택이었다. 그는 공부는 모스크바에서 했지만 중국의 경제 개혁개방을 살피기 위해 누구보다도 중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고안한 북한식 맞춤형 경제 개혁개방 계획을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남아를 누비고 다녔던 인물도 장성택이었다. 2002년 북한의 대남 경제시찰팀들이 남한의 산업시찰을 모두 마친 후 동남아시아로 향했을 때 이들을 이끌고 동남아 각국을 지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장성택이었다. 그는 최근에도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를 가끔씩 가고 있다. 2007년에도 자신의 지병인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치료하기 위해 러시아 크렘린 행정실 산하에 있는 중앙 클리닉 병원을 방문하여 치료를 받은 후 귀국길에 싱가포르를 들러 이곳에서 김정남을 만나 두 사람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만큼 북한 이외지역을 자유스럽게 누비고 다닐 수 있는 또 다른 인물은 장성택뿐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승승장구하던 장성택이 숙청된 것은 2004년.당 조직지도부 고위간부 자녀의 호화 결혼식에 그와 가까운 인물들이 대거 참석한 사실이 밝혀져 김정일 위원장이 엄벌을 지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장성택을 김정일 후계구도에 최대 걸림돌로 보고 있는 김정일의 처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장성택은 고영희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장성택은 김정일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옹립하는 역할보다는 자신이 직접 킹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아내 김경희도 장성택을 포스트 김정일 시대를 개막하는 북한의 통치자로 만들 그런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장성택이 권력의 변방으로 밀려날 때 북한 경제관리 세대교체의 대표적인 예로 꼽혔던 리광근 내각무역상과 박명철 체육위원장 등과 같은 소위 장성택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들이 동시에 해임됐다. 또한 70년대부터 청년 조직인 ‘김일성 사회주의 청년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장성택과 친분이 두터웠던 지재룡 당 국제부 부부장이 2004년 3월 이후 공석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인 최춘황도 김일성 고급당학교로 좌천된 것으로 확인됐다. 장성택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최용수 인민 보안상도 해임되었다. 소위 이즈음에 장성택파는 ‘종파(파벌)행위’와 ‘권력남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줄줄이 낙마했다.
2004년 5월 26일에 고영희가 세상을 떠났다는 시점을 감안하면 장성택파를 하루라도 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고영희측근들의 생각은 그 만큼 절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영희 씨의 핵심 인물로는 장성택 이후 최대 실세자리라 할 수 있는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맡고 있는 리제강, 현역 장성으로 당 제1부부장을 맡고 있는 리용철 등이 고영희의 최측근들이었다. 리제강은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고 당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장성택 라인을 제거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정일의 친 동생이었던 장성택의 부인 김경희는 남편이 숙청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에 걸렸으며 김정일에게 심하게 따져 묻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2004년 9월 일본의 도쿄 신문은 북한 사정에 밝은 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경희 노동당 경공업 부장이 알코올 의존증과 정신질환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보도했었다.
결국 고영희는 2004년 5월 26일 프랑스 한 병원에서 유선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6월초 북한에서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가 2004년 2월에 ‘권력욕에 의한 종파행위’를 이유로 직무정지 처분을 받았던 장성택은 2005년 12월에 다시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를 하게 된다. 꼭 1년 10 개월만에 복귀한 셈이다. 김정일이 그를 복귀시키기로 결심했던 배경으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선 장성택을 강력하게 견제했던 고영희가 죽고 없어진 이후 국정운영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는 최측근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둘째, 고영희 쪽의 파워가 너무 비대해지고 있어서 이를 전반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측근의 힘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상의 두 가지 요인보다도 어쩌면 더욱 중요한 이유로 보이는데 장성택을 통해 북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요구가 절박해 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성택은 북한 경제개혁개방조치를 주도해 왔었다. 그러다가 고영희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장성택이 구상해 왔던 경제특구신설 문제와 개혁 조치들이 사실상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명확히 증명되었다. 지난 2006년 1월 이었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었다. 당시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두 가지 목적이 핵심 이유였다. 하나는 방코델타 아시아 은행에 불법자금으로 묶여 있었던 자신의 통치자금 2500만 달러를 해제시키기 위해서 중국정부측과 상의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의주 경제특구 개발 착수에 대한 중국측의 입장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김정일의 중국 방문 이후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동(丹東) 일대에는 ‘신의주 특구 개발 재착수’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장군님이 장성택에게 경제 완전 위임 곧 신의주,남포 경제특구 발표’란 제하의 기사들이 북한 무역성 간부의 익명성 증언 형태로 나왔고, 남한 정보 당국자도 ‘지금 북한의 모든 경제정책 결정이 장성택에게 몰린다는 정보가 입수됐다’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흘렸다. 당시 중국 단동에 파견된 북한 무역성 산하 K 무역회사의 고위 간부인 김모(51)씨는 익명을 전제로 한 월간지와의 인텨뷰에서 “현재 북한이 직면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올해 안에 신의주와 남포(南浦)를 경제특구로 만드는 것에 대한 중앙당의 내부 방침이 결정된 상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씨는 “발표 시기와 내용은 장성택 제1부부장(수도건설)이 귀국하는대로 결정될 것”이라고 했고, 그 무렵에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던 장성택은 그의 말대로 3월 28일에 북한으로 돌아 갔다. 이 익명의 북한 무역회사 고위 간부의 발언은 4.15 태양절을 맞아 경제특구가 발표된다는 소문과 딱 맞아 떨어졌다. 그의 발언을 좀 더 살펴 보면 이렇다. “당시 장군님(김정일)께서는 이미 해가 바뀌기 전(2005년말)에 결심을 세운 것 같다. 장군님께서는 결심을 세운 뒤 1월(2006)에 중국에도 다녀가신 것이고, 장성택 부부장도 중국에 보내신 것 같다. 장군님께서 중국에 다녀가신 후로 중앙에서 외국과의 합영,합작 사업을 더 다그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의 발언대로 북한은 외국과의 합영 합작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익명의 북한 무역회사 고위 간부가 장성택 부부장의 당 복귀와 중국 방문이 경제특구 추진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장군님께서) 결심을 굳히신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장성택 부부장을 다시 부르신 것이다. 중앙당에서는 앞으로 특구를 꾸리는 사업뿐만 아니라 경제문제 전반을 장성택 부부장이 틀어 쥐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김정일이 자신의 매제인 장성택에게 경제전반을 위임했다는 김씨의 증언에 대해서 우리 정보당국은 “상당히 신뢰할 만한 정보”라고 평가했다. 그 당시 우리 정보당국자는 “최근 북한과의 경제교섭을 벌였던 우리 경제인들이 ‘모든 결정이 장성택에게 집중돼 있다’는 얘기를 한다”. “심지어 가택연금 당했던 장성택이 연금당한게 아니라 북한의 개혁, 개방을 준비해 왔다는 정보도 있다”라는 말까지 했다.
비록 장성택이 지금 맡고 있는 당 중앙위 행정부장이라는 자리는 과거 자신이 맡았던 조직 지도부 제1부부장직에 비해서 실질적인 권한은 많이 약할지 모르지만 그는 현재 김정일과 가장 가까운 친인척 이라는 점 이외에 워낙 친화적이고 겸손한 성품에다가 다재다능해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지난 2002년 북한 경제시찰단과 함께 남한에 왔을때 서울 시내를 이동하던중 지하철 3호선에서 나이가 많은 송호경 아태위원장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지하철에서 내릴 때 까지 서서 갔었던 인간적인 면모와 겸손함을 보여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종파주의’로 몰려 견제를 받아 왔던 측면도 없지 않았다.
장성택은 이미 그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와는 상관없이 김정일 다음으로 북한내 최대실세임이 드러났다. 그를 견제했던 고영희도 없어졌고, 북한의 권부가 노년기를 향하고 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통한 경제회복의 필요성도 절박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최근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와병으로 인하여 김정일의 권력 공백기를 매울수 있는 대리통치자가 필요해 졌고 이런 제요인들이 장성택에 대한 김정일의 필요성과 의존도를 더욱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갈수록 장성택의 파워는 커질 것이다. 그것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김정일의 건강이 완벽한 단계의 정상적인 건강한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면 북한 내부에서 가장 우려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김정일이 과거처럼 현장시찰을 나서지 못한다는 점이고, 그렇게 되면 현장지도를 통해 북한인민들의 불만을 달래오고 지지를 유도해 냈던 통치리더십에 커다란 공백이 초래된다는 점이다. 바로 현장지도의 리더십 공백이 생기면 이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하는 것이 김정일 건강 악화 이후의 북한이 안게될 또 하나의 숙제인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라도 김정일은 장성택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건강 이상설이 확산되면 자칫 군의 통제가 이완될 가능성이 있고, 행정조직의 권력누수 현상이 빚어 질 수 있으며, 인민들의 체제에 대한 결속력이 저하 되면서 내부 관료들의 불안심리가 커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동원정치가 불가능해 질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권력의 누수현상과 체제의 이완상태를 막기 위해서는 김정일을 대신할 수 있는 상징적인 김정일의 복심腹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의 권력 대리자는 누구 보다도 북한의 전군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행정,조직,당,정보,외교등의 문제에까지 총괄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야 하고 북한 내부의 국정상황을 한 눈에 꿰뚫어 볼수 있는 충복이어야 한다. 지금 김정일의 입장에서 북한 내부체제를 유지해 나가는데 자신의 여동생의 남편인 처남 장성택만한 인물은 없는 것이다.
이미 장성택은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때 사실상 김정일을 대신해서 북한 전역을 관리하는 2인자로서의 위치에 들어섰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신임아래 북한 내부를 거의 장악한 것으로 전해 진다. 김정일이 북한의 경제를 개혁개방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도 장성택의 역할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아들들에게 이양하기 위한 마음의 작업을 마쳤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의 도움과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직은 김정일의 아들들이 지도자로 나서기에는 너무 어리거나 아니면 지도자 수업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일정한 권력이양의 과도기를 거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 않고 바로 김정일의 세 아들중 한 명을 상징적으로 내세워 북한의 통치방식을 집단지도체제의 형식으로 꾸려 나가거나 아니면 단일지도체제로 이끌어 나간다고 하더라도 김정일 아들 중심의 통치행위가 작동하려면 장성택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관련 기사
-장성택, 김정일 이후 킹인가,킹메이커인가 (1)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에서 북한정치를 연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세인트존스대학 국제문제연구소에서 '현대 영국과 국제문제'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미국 듀크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연구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초대 국정상황실장과 16대 민주당 의원을 지냈다. 의원시절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로 활약중이다. 저서와 역서로 '전쟁과 평화: 김정일 이후, 북한 어디로 가는가' '전환기 한반도의 딜레마와 선택"9·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등이 있다.
봄기운이 무르익고 있는 우면산 골짜기
짙어가는 녹음
울타리와 회양목이 조화롭게 보인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