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돈, 권력, 모럴해저드... 본문
돈은 일반적인 유통수단이다. 사물의 가치를 나타내며,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고, 재산 축적의 대상으로도 사용하는 물건이며, 화폐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조가비, 짐승의 가죽, 보석, 옷감, 농산물 따위를 이용하였으나 요즈음은 금, 은, 동 따위의 금속이나 종이를 이용하여 만들며 그 크기나 모양, 액수 따위는 일정한 법률에 따라 정한다. 실제로 경제 생활에서는 화폐의 매개 작용으로 비로소 원하는 상품을 얻을 수 있다.
재화와 돈의 교환을 매매라 한다. 이와 같이 매매는 재화와 돈의 교환이므로, 재화와 재화의 교환은 교환이지, 매매가 아니다. 그러나 돈과 돈의 교환, 즉 환전은 매매이다.한편 유통 수단이나 지불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화폐를 유통화폐라고 한다.
최부잣집이 이런 철학을 갖게 된 배경에는 어떤 스님의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재물은 퇴비와 같아서 한군데 쌓아놓으면 썩어서 냄새가 나고, 여러 군데로 뿌리면 곡식을 살리는 거름이 된다'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최씨 집안에서는 만석 이상이 되면 사회에 환원하는 철학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돈을 거래해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게 된다고 한다. 수양이 되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물욕을 버리지 못하였는지는 돈거래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한다. 돈을 거래해 보아서 마음에 분노심이 나거나, 돈을 못 받게 되어 억울한 마음이 들면 아직 공부가 덜 되었고, 그런 마음이 안 생기고 담담하면 공부가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돈 가지고 흔들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도를 통한 군자이다. 한마디로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생각하라는 고려시대 최영 장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시대에도 얼마나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하였으면 그와 같은 말을 하였을까? 고대로부터 돈은 어느 사회에서나 출세의 지름길이며 누구나 치부하기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본성인가 보다. 돈은 인간생활에서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농부가 뙤약볕 아래 땀 흘려가며 땅을 갈고 씨 뿌리고 가꿔서 수확한 곡식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만든 물건은 누구의 몫인가? 농토가 자기 땅이 아니라면 지대를 감하고 남은 만큼만 농부의 몫이다. 노동자가 곧 공장의 소유주가 아니라면 생산물의 소유권은 공장소유주가 가지고 노동자는 다만 품삯만을 받는다. 그럼 지대와 임금은 누가 결정하는가?
동양이든 서양이든 신분사회에서 지대는 지주가 정했는데, 사실 그조차도 의미가 없었다. 지주는 곧 귀족 즉, 지배계급이었고, 지배의 한계나 방식에 관한 규제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지대를 얼마나 거두느냐는 문제는 철저하게 지주의 변덕에 달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속된 지대 이상을 거둬간다고 항의했다가는 어떤 보복이 뒤따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체제에서는 생산을 위해 대다수 민중이 흘린 땀의 결실을 소수 특권층이 빼앗아다 향락을 위해 소비했다. 땀 흘려 노동하고도 배불리 먹지 못한 사람들은 눈물조차 맘대로 흘리지 못했다. 너무 크게 울었다가는 피까지 흘려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초기 노동조합이 불법이던 시절에 노동자들은 자본주가 주고 싶은 만큼을 받으면서도 감지덕지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밉보여 해고되면 가족을 먹일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도 크게 울면 안 되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크게 울부짖은 사람들이 있어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노동조합이 형식적으로 나마 합법화되었다. 대한민국은 1970년에 '전태일'이 너무나 크게 절규한 이래 노동의 권리가 크게 신장되었지만, 아직도 공론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사적 공간 곳곳에서 협박과 전횡이 없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각자 땀 흘려 일한 만큼 생산의 결실을 나눠 가진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지주나 자본가도 땅과 자본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흘린 땀과 정성만큼 당연히 지분을 차지할 권리를 가진다. 다만 만일 땀 흘려 일하고도 지주가 너무 많이 가져가서 배가 고파야 한다면 눈물이 날 것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시끄럽다고 때리면 화가 날 것이다. 화가 나서 한번 눈을 부릅떴더니 다시는 그런 놈이 생기지 않게 시범 케이스로 조리를 틀거나 곤장을 치거나 굶겨 죽이거나 맞아 죽으면 오히려 나머지 노동자들이 원한을 품을 것이다.
▲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인가? 어떤 상태로 가고 있는가?" 지난 21일 희생자들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순천향대병원 분향소에서 통곡하는 유족. ⓒ프레시안 |
내가 땀 흘린 만큼 내가 차지하는 것을 정의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남이 눈물을 흘린 만큼 내가 차지하는 것을 정의라고 불러야 하는가? 각자가 노동해서 자기 생계를 챙기는 사회가 건강한가, 아니면 가능하면 권력에 빌붙어서 남이 생산할 결실을 뺏어먹으려 드는 사회가 건강한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인가? 어떤 상태로 가고 있는가?
이 나라에 함께 사는 일부는 남의 눈물도 모자라 남의 피까지 마셔야 배가 부른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그저 자기가 흘린 땀만으로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이웃이 억울하다고 울부짖어도 자기 밥벌이가 바쁜데다가, 가짜 울음도 워낙 많은 세상이라서 본체만체 지나가던 사람들도, 불에 타서 사람이 죽으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투입된 경찰관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희생된 젊은 경관만이 아니라, 단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인 모든 대원들도 피해자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의무"를 지금 한국의 특공대원들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순교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경찰 수뇌부에게만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아직은 분명치 않다. 세입자들의 목숨만이 아니라 수뇌부의 직책도 "청소하다 깬 접시"처럼 언제든 부담 없이 보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검찰의 편파성도 단정하면 안 된다. 의문과 의혹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증거를 가지고 해명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쳐야 한다. 시민들이 증거를 찾아서 제시하는 만큼만 뒤따라 수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아직은 축소하지 않나 눈을 부릅뜨고 경계만 해야지 은폐를 했다고 단죄하면 안 된다. 검찰은 추정만 가지고 농성자에게 발화 혐의를 씌우는 듯 마는 듯 언론 플레이의 의혹이 있더라도, 건강한 양식을 가진 시민들은 더욱 확실한 증거들이 충분히 축적되기 전까지는 아직 그것을 조작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아직은 대통령도 표적으로 삼으면 안 된다. 건설회사의 사장과 철거반원이 다른 만큼, 전직 사장과 현직 사장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 참극을 보고 기독교도답게 회개해서 무단통치를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대통령을 공격하면 안 된다. 증거가 없는 한, 아직은 특정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그저 사람이 죽더라도 투기 이익만 챙기면 된다는 탐욕을 과녁으로 삼아야 한다.
악령의 우두머리는 사람이 죽은 사고를 가지고 "경종"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못된 심보다. "서울서만 앞으로 450개 구역 재개발, 65개 재건축, 26개 뉴타운, 467개 도시환경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거나 계획"되어 있다는 이유를 가지고, 이번 일이 경찰의 과잉 진압이 아니라는 논거로 삼는 <조선일보>식 비뚤어진 논리학을 비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스러져야 할 이유가 없는 생명이 희생되었는데도, 차후의 사업 진행을 위한 시범 케이스로서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식의 악랄한 착취를 집중적으로 폭로하고 성토해야 한다.
아직은 투기꾼을 위한 정부라고 부르지는 말아야 한다. 성급한 공격에 토라져서 약간이라도 남아있던 양심의 흔적마저 지워버리는 사람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직은 저들의 공화국이라고도 부르면 안 된다. 죄도 없이 꺾여버린 여섯 목숨을 빌미로 공연히 반정부 투쟁을 선동한다는 반론이 적반하장임을 분간하지 못하고 혼동을 일으킬 착한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만 눈을 크게 뜨고 주시할 때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선택해야 할 기로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확인하고 마음 깊이 새겨둘 때다. 화염병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강경 진압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어떤 선택을 뜻하는지를 알려줄 때다. 이런 세상에 축소수사나 은폐가 가당하냐고 반문하는 순진한 백성들에게, 합당한 의심은 민주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임을 설명해 줄 때다.
지금은 당국의 진상 규명을 지켜볼 때다. 촛불을 켜고 보든, 노래를 부르면서 보든, 생업에 종사하면서 보든, 진상 규명이 얼마나 이치에 합당하게 이루어지는지를 공론의 주제로 삼아야 할 때다. 당국이 우연히 빠뜨리는 증거가 혹시 있다면, 당국이 부주의로 놓치는 논리가 혹시 있다면 줍고 챙겨서 당국의 수사에 협조할 때다. 이렇게 지켜보는 시선과 진상 규명을 위한 협조마저도 성가셔서 평화 시민의 눈을 강제로 가리려 드는지 않는지를 감시할 때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에 대해 확실한 답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 하면, 인간은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이면서 다른 동물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이라 부르기를 주저하며 동물과는 다른 고귀한 특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한다.-<윤리와 사상>(교육인적자원부) 10쪽
인간의 본질을 문제삼고, 전인간을 해명해 보려는 학문이 있다. 이를 철학적 인간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을 개척한 독일의 철학자 셸러는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에 관해서 모든 과학들이 얻어 낸 풍성한 개별 지식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자기 의식과 자기 성찰에 관한 새로운 형식을 전개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철학>(교학사) 132쪽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우리가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야. 그렇다면 사람다운 사람이란 무엇이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처럼 인간의 본질을 문제삼으면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이를 밝혀 보려는 학문이 바로 인간학(anthropology)이다.
인간은 동물이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고찰할 때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인간을 동물로 바라보는 연구이다. 이처럼 인간을 동물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로 ‘생물학적 인간학’이다. 뼈대 구조와 두개골, 생물 습성 등을 비교하여, 인간이 동물과 어떤 점에서는 같고 어떤 점에서는 다른가 하는 특징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윈'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적 진화론에서는 유사성의 관점에서 인간을 동물과 비교했는데, 그 결과,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진화론적 관찰은 인간과 유인원의 유사점을 보게 했고, 그 결과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본질 규정을 배제해 버렸다. 그래서 인간이 다른 동물에 견줘 보다 복잡한 신체 구조와 기능을 가졌다는 것 이상을 보여 주지 못했지. 모든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이론이다.
20세기 들어 생물학의 새로운 연구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성이라고 하는 관점을 열어 놓았다. 대부분의 동물은 태어나서 1주일 안에 걷거나 달릴 수 있지만, 인간은 1년이 지나지 않으면 걸을 수조차 없어. 그런데 동물의 전문성이 동물을 언제나 동물의 자리에 머물러 있도록 만들었는데, 인간은 비전문성 때문에 오히려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비전문적 신체 구조 때문에 그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방도를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됐고, 이러다 보니 생각이 발달해 도구를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견해만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고 할 수 없으며, 거기에는 인간적인 특성을 이루는 풍부한 성질을 생물학적 유기체의 작용으로 ‘환원’해서, 인간을 전적으로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작용과 반응에 따라 해석하려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 가치론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사실적인 문제만을 다루는 것은 인간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가져와. 분명히 인간은 물질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인과론적인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이지만, 이러한 방법만으로 인간을 전부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아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견해가 나타나게 됐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본질적 특성이라 한다.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Homo sapiens)이라고 규정하는 고전적 정의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이성적 인간학’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성이란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을 식별하는 능력이다. 다른 동물들이 오직 본능에 따라서 행동하는 데 견줘, 인간은 이성을 통해 거짓이 아닌 참을, 그름이 아닌 옳음을, 추함이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에는 이성에 대립되는 다른 힘들이 함께 있기는 해도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끌어 가는 것은 이성이고, 이러한 이성은 자율적이며 가장 높고 강한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성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인간은 항상 이성적이지만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때로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봐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공장 아우슈비츠는 말할 것도 없고, 꿈의 공장 할리우드 또한 말초적 환각을 제공할 뿐이다. ‘이성에 의한 사회의 진보와 역사의 완성’이라는 근대의 단일한 가치 체계는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어느 하나의 극단을 피하는 종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동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폭넓은 사회적 관심을 가진 책임 있는 존재로도 살아갈 수 있다.박용성/<교과서와 함께 구술 논술 뛰어넘기> 저자, 여수여고 교사
검찰에선 게이트급 수사 때 애용되던 T 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 시 구절이 다시 유행이다. "4월은 잔인한 달,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
차떼기당, 부패원조를 실컷 조롱하다가 똑같이 검은 속이 들통난 진보진영에선 귀에 익은 군색한 항변이 나온다. 표적 수사, 야당 탄압, 공안 정치…. 미심쩍은 사람들일수록 수사기관에 출두할 때 당당해지는 모습 역시 낯설지 않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던가. 하지만 정작 진실이 밝혀지면 잠잠해지더라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또 한번 여론의 기요틴 앞에 선 정치인, 기업인, 그리고 다른 지도층 인사들. 그들이 떠올려주는 건 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에 담긴 카타르시스적 자학이다. "죄악은 끈질기고 참회는 비루할 뿐…우리를 끈에 매달아 조종하는 건 악마다."
돈과 권력. 인간들이 집요하게 좇는 한 쌍의 무지개다. 돈을 선점한 자는 권력을 사려들고 권력을 장악하면 돈마저 거느리려 든다. 그 사이엔 '여자'도 꼭 개입된다. 봄볕 따사로워지는 시절에 논하기가 참 썰렁한 주제이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사란 늘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데.
성서의 가르침처럼 모든 죄악의 근원은 탐욕이다. 작금의 글로벌 금융위기도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으로 돌진하던 월가의 탐욕이 거스를 수 없는 중력에 곤두박질친 결과 아니던가. 허우대만 큰 미국의 국민약골 AIG가 납세자 호주머니를 털어 보너스 잔치를 벌이다 망신 사는 꼴은 또 어떤가. 의회에선 "AIG도 실패한 경영자가 자살하는 일본모델을 따르라"는 독설까지 나왔다. 그래놓고도 자본주의 근간을 해쳐선 안 된다는 보너스 회수 반대론이 만만찮은 걸 보면 인간욕심엔 분명 끝이 없다.
하지만 탐욕을 탓하는 건 날씨를 탓하는 것만큼이나 무용(無用)하다. 탐욕은 어쨌건 인류역사를 끌어온 동력이고, 해탈의 경지에 오른 성인이 아닌 다음에야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윗물이 탁류라 해서 중간물, 아랫물 역시 큰소리 칠 만하지는 못하다는 얘기다.
탐욕덩어리 지배계급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 이론가는 아마 마르크스일 게다. 그에 따르면 법, 문화, 도덕, 가치관 같은 상부구조는 대중의 눈을 흐릿하게 만들고 노동자에게 까닭 모를 죄의식을 심기 위해 뿌려놓은 최면제다. 그 선각자적 호소를 받들어 투쟁을 거듭한 결과 오늘날 구축해놓은 새로운 상부구조는 귀족노동운동과 떼쓰기 시위다. 누가 누굴 욕하겠는가.
물론 시니컬해지는 건 해법이 아니다. 제도로 말하자. 탐욕 자체보다는 탐욕의 과잉이 문제다. 윗물이건 아랫물이건 분수 모르는 과잉탐욕을 부추기는 요인을 하나씩이라도 제거하는 게 실존주의적이다.
그 첫 걸음은 모럴 해저드부터 추방하는 일이다. 모럴 해저드는 역선택을 조장하는 독소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고임금 나눠 먹는 금융회사, 미분양 깡통아파트를 제값 다 쳐서 사달라는 좀비기업, 공부 대충하고 좋은 대학 가려는 학생, 능력 대신 로비로 승진하는 문화….
10여 년 전 외환위기 때도 그 독소를 빼는 데 실패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게 화근이었다. 요 며칠 금융시장과 경제지표에 봄기운이 좀 느껴지자 탐욕의 샴페인을 또 꺼내들려는 분위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명심하자. 1997년 외환위기는 지붕이 무너지는 충격에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사고였지만 지금의 위기는 바닥과 기둥부터 소리없이 썩어올라오는 암(癌)이다. 눈에 안 보이니 위기의 체감도는 훨씬 낮지만 심각성은 더하다.
지도층 인사 몇몇이 추한 리스트에 오르내린다고 해서 하부구조까지 함께 무너질 수는 없다. 샴페인은 뒤로 미뤄두고 각자 해야 할 일에 몰두하자. 민주주의는 원래 민초들이 이끌어가는 것 아니던가.
[이동주 논설위원]
이 나라는 부패와 도덕성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직업을 포기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천 만명 이상이 직업도 없이 지금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실업자 천국이다. 언론은 언론대로 재갈을 물리려는 정부권력에 대해 인권과 언론자유를 내세우며 범세게언론기구들의 지원하에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발버둥을 치고 있다.
![](http://devnewsimg.mydaily.co.kr/2009/03/29/200903291146502271_1.jpg)
지금 자신의 주변에 어떤 희망과 꿈이 있는가?
미래를 내다보고 비젼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희망이라도 있는가?
나에게 내일이 있고 행복이 보장되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출근이 나의 미래를 보장하는 직장인가?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이 나와 가족의 미래를 위해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인가?
정부와 국민들은 기름과 물처럼 서로 갈라져 증오와 갈등만이 넘치고 있지 않는가?
지난 10년을 뒤쑤셔 부정과 비리를 밝혀 마지막 칼끝을 겨누어지고 있는 방향은 어딘가?
우리는 왜 포용하지 못하고 감싸주지 못하는 나라이며 국민들인가?
털어서 먼지안나는 눔이 어디있으며 누가 성인군자인가?
돈 줘서 싫어하는 눔 보았냐?
'같이 잤다! 그러나 아무일 없었다' 무슨 화장품 광고인가?
'줬다! 받았다! 그러나 대가성은 없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그들은 모두 같은 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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