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안중근 의사 순국 99주년을 맞이하면서... 본문
안중근 의사 순국 99주년을 맞이하면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숨지게 하고 순국한 지 99년이 된다. 작년 중국측의 협조하에 여순 감옥이 있던 장소에서 안의사 시체 발굴 작업을 하였으나 결국 발굴을 못하였다고 한다. 100여년이 다 되도록 안읫사 시체를 발굴하지 못한 우리 후손들은 그 분에 대한 죄송함을 금할 수가 없다. 작년에 울린 글을 다시보고 다시 보아도 다시 올리고 싶은 마음은 왜 일까? 그분의 위대한 사상과 조국애를 다시한번 되새기며 혼탁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이 무언가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한다.
어제 WBC 결승에서 우리 야구팀은 아깝게 일본에 졌다. 우리민족을 한없이 수탈하고 죽음으로 내몰고 삼천리 방방곡곡 젖가락 숟가락까지 공출이란 빌미로 빼앗아간 그들, 수많은 젊은 남여를 전쟁터로 보내 정신대로 총알받이로 대리고 간 그들, 이나라 방방곡곡 산마다 쇠못이요 감옥마다 신음소리가 넘쳐나던 그 시절! 우리 조상들은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간도로 정처없이 떠났던 것이다.
[안중근 서거 99년, 의거 100년] 100년 전… 그는 대한독립의 방아쇠를 당겼다
2009-03-26 13:45
![]() |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체포 당시의 안중근. |
"동양 평화를 염원한 독립투사이자 經世家"
26일은 1910년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장군이 일본제국주의의 적장을 사살하고 붙잡혀 적진에서 재판을 받고 순국(殉國)한 지 99주년인 날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동북아 정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높아가던 때였다. 동양 3국 중 일본은 재빨리 메이지유신을 거쳐 서구화로 무장해 대륙 침탈에 발 벗고 나서 대한제국을 첫 희생자로 삼았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차지했고, 대한제국은 그 지배 아래 놓인 것이다.
애천(愛天), 애인(愛人), 애국(愛國)의 정신으로 무장한 안중근은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을 몸소 실천한 애국투사였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고 외쳤다.
![]() |
오늘의 시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안중근이 32세의 일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얼마나 고난의 역정을 거쳤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의병장이었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인 군사지휘관이었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또 삼흥(三興)·돈의(敦義)학교 교장으로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섰고, 국채보상운동을 실천한 경제인이었으며, 동양평화론을 제창한 경세인(經世人)이기도 했다. 이처럼 안중근은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를 희생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독립을 성취하려고 한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의 독립과 함께 동양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 거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라고 외쳤다. 그의 의거가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교란하는 침략에 항거하는 '평화'의 메시지였음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안중근은 이미 100년 전 지금 논의가 활발한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상한 사상가이자 그 구체적인 실천방략까지 고민한 인물인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민족적 과제를, 안중근은 99년 전 적지의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감방에서 남긴 글과 서예로, 법정 진술로 웅변하고 있다. 안중근이 생각하고 실천한 업적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한 의사의 염원을 다시 떠올린다.
![]() |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인 1910년 3월 8일 정근·공근 두 아우와 프랑스인 빌렘 신부를 면회하고 최후 유언을 하는 장면. |
[김호일(안중근의사 기념관장)]
![]() |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를 실은 마차가 형장으로 가는 장면. |
공교롭게도 사형 예정일은 건원절(乾元節), 즉 순종 황제의 생일과 겹쳤다. 사실상 주권을 이미 빼앗긴 대한제국이었지만 그래도 황제는 황제였고, 통감부로선 무엇보다도 민심의 동요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소네 통감은 사형 집행일을 하루 늦출 것을 요청해 관철시켰다. 이토의 피격일과 같은 날짜(26일)를 골랐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일본 외교사료관의 공개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3월 25일, 옥중의 안중근을 두 동생 정근·공근 형제가 찾아온다. 안중근은 “나는 내 할 바를 다한 것이고 어차피 각오하고 한 일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노모 공양을 당부했다. 형장에서도 안중근은 의연했다. “그의 태도는 너무 침착하여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종용자약(從容自若)하게 죽음에 임했다.” (당시 통역 소노키 스에키의 기록) 안중근은 마지막 남길 말을 묻는 형무소장에게 “내가 일면식도 없는 이토를 미워서 죽인 게 아니라 오로지 동양 평화를 위해서 한 일”이라며 “동양 평화 만세”를 합창하자고 제의한다. 물론 마지막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이 25일부터 중국 뤼순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100년이 가깝도록 후손된 도리를 못한 죄를 씻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본격적인 안중근 전기를 쓰는 일이다.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해방 전 박은식 선생이 쓴 전기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전기가 여러 종류 나와 있지만 새로운 사료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확한 고증을 거친 전기는 거의 없다는 게 연구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가령 안 의사가 거사 전날 술을 마시며 비장한 심정을 토로했다는 기술도 있다. “조국 광복의 날까지 술을 끊겠다”고 맹세하고 실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앞서 예를 든 사형 집행일도 잘못된 해석이 퍼진 사례의 하나다.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많은 기념사업이 펼쳐지겠지만 핵심은 역시 제대로 된 전기 편찬사업이 아닐까 싶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
'대한남아 의사 안중근'
![]() |
우리는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수많은 우국 지사들의 희생 덕분이다고 생각한다. 안의사의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찿지를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이미 수차례 북에서 진행하였으나 찿지를 못했고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그 지역에 대해 유해발굴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찿지못하였다고 하니 후손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 매장 위치가 불분명하고 정확한 증인과 근거자료가 부족하여 여순 감옥터 근방을 모두 발굴했으나 찿지 못하였다고 한다.
안의사를 위한 우국충절 묘지는 아직 비어있는 체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찿을 날을 기대하면서 아쉬움을 삼켜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 후손들은 한번 쯤은 그분의 희생정신을 되돌아 보고 다시한번 결연의 의지를 다짐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국가 안보와 윤리적,도덕성이 황폐해가고 있는 지금, 자유와 민주 사회라는 구실로 방종과 타락의 구렁텅이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비젼도 꿈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가진자만이 행복한게 아니다. 행복을 물질에서만 찿지를 말고 마음에서 찿아라. 한 해 동안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머리속에는 소문과 풍문에만 의지할 뿐 자신의 이론이나 사고, 꿈은 없다.
우국 지사들이 흘린 선혈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도덕성의 회복과 철저한 안보의식, 경제대국 건설, 그리고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정치, 권력층과 사회 지도층, 가진자들이 앞장서는 사회, 서로가 신뢰넘치는 사회를 이룩하는 일이다.
우국 지사중에서도 가장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분인 '대한남아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그 분에 대한 의거 스토리를 소개한다.
"탕탕탕!!!"
![](http://i.kdaq.empas.com/imgs/knsi.tsp/289506/1/npee_easternwiz.jpg)
![]() |
<안중근 의사 일대기 2>
의사 안중근이 제시한 이등박문의 죄는 아래와 같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와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민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찬탈한 죄
6. 철도,광산,산림,천택을 탈취한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발행한 죄
8. 군대를 해산한 죄
9. 교육을 방해하고 신문을 금지한 죄
10.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11.교과서를 소각한 죄
12.일본의 한국 보호를 명분으로 세운 죄
13.태평 무사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15.일본 천황의 선제 고메이를 죽인 죄 등을 들었다.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이 체포되자 '우덕순,조도선,유동하,정대호,김성옥 등이 같이 체포되었으며 법정에서 검찰심문,변호인 변론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내용은 아래와 같다.
검찰의 반복된 심문에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의사): "일본이 비록 백만명 군사를 가졌고 천만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또 무슨 권세가 있을 것이냐! 사람이 태어나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검찰의 사형에 처하는 이유
( 검찰) : "이런 사람이 세상에 살아 남으면 많은 한국인이 그 행동을 본 뜰 것이다. 일본인들이 두려워 하고 겁이나서 편안하게 살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 "옛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협객과 의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모두 나를 본뜨서 그랫단 것인가! 속담에 어떤 사람이던지 열 사람의 재판관과 친해지기 보다는 단 한가지 죄 없기를 원한다더니 정영 옳은 말이다! 민일 일본인이 죄가 없다면 무엇때문에 한국인을 두려워 하고 겁낼 것인가! 그 많은 일본인 가운데 왜 '이토' 한 사람만 해를 입었던가! 오늘 또다시 한국인을 겁내는 일본인이 있다함은 그야말로 '이토'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내가 사사로운 혐오로 '이토'에게 해를 가했다고 하는데, 내가 본시 '이토'를 알지 못하거늘 무슨 사사로운 혐오가 있을 것인가? 만일 내가 '이토'에게 사사로운 혐오가 있어서 그랬다면 검찰관은 나와 무슨 사사로운 혐오가 있어 이러는 것인가!
미즈노,가마타 두 일본인 변호사 변론
(변호사): "피고의 범죄는 분명하고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해에서 된 일이므로 그 죄가 중대하지 아니하다. 더구나 한국 인민에게 대해서는 일본 사법권의 관할권이 없다"
(안중근 의사): "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이 모두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 의병 참모중장으로 임무를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여순 지방 재판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니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판결하는 것이 옳다"
(재판관): "모래와서 다시 선고하겠다"
(안중근 의사): "모래면 일본국 4천 7백만 인격의 근수를 달아보는 날이다! 어디 경중고하를 지켜보리라!"
선고일
(재판관):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우덕순은 3년 징역,조도선.유동하는 각각 1년반 징역에 처한다!"
감옥에 돌아온 안중근 의사 독백
(안중근 의사): "내가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부터 허다한 충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윗사람의 잘못을 간하고 정략을 세운것이 뒷날의 역사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이제 동양의 대세를 걱정하여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방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통탄한들 무엇하랴! 그러나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비바람이 어느 때에 그치리요! 지금의 일본 당국자가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다면 이같은 정략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지난 1895년(을미년)에 한국에 와있던 일본공사 '미우라'가 병정을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여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했으나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석방하였다...(중략)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나의 일을 말하면 비록 개인간의 살인죄라고 할 지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가 어느쪽이 중하며 어느쪽이 경한가? 그야말로 머리가 깨어지고 쓸개가 찢어질 일이다! 내개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느냐! 그래 내가 큰 죄인이로다!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약한 한국 인민이 된 죄로다!"
안중근 의사는 고등법원에 항고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고등법원장인 '히라이시'가 찿아와서 안중근 의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형판결에 대한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뒤에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의 의견을 말했다. 그랬더니 '히라이시'가 다 듣고 난 뒤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내가 그대에 대하여 비록 두터이 동정하지만 정부주권의 기관을 고칠 수는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만 그대의 진술내용을 정부에 품달 하겠다"
(안중근 의사):" 이같이 공평한 논평이 우뢰처럼 귀를 스치니 일생에 두번 듣기 어려운 일이다! 이 같은 공의 앞에서야 비록 목석이라도 감복하겠다! 만일 허가가 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을 저술 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
(고등법원장 '히리이시'):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 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고 안중근 의사를 달랜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1. 전감(前鑑) 2. 현상(現狀) 3.복선(伏線) 4.문답(問答) 등 4개의 제목 중 전감에 대한 개요 부분만 기술후에 본론 부분은 제목만 적어놓고 끝을 못 맺은채 사형 집행을 당했다.
-집행일:1910.음력2.5(양력3.15)-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을 기술한 후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겠다고 한 달 동안의 말미를 요청하여 좋다고 쾌락받고 그것도 몇개월이 소요되어도 좋다고 약속받아 고등법원 공소를 포기하고 이 글의 집필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완성되었다면 당시 그의 예리한 정치적 국제정세 판단력과 동양 평화에 대한 원대한 구상을 볼 수 없었다는 안타까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안의사의 위대한 조국사랑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가슴속으로 뜨거운 느낌을 담아 스스로를 깨우치고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나라의 위태로움에는 초개같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안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앞날을 살아가는데 각자가 삶의 지표로 삼아야 될 것이며 후세에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http://i.kdaq.empas.com/imgs/knsi.tsp/289506/3/%ED%86%B5.bmp)
![](http://i.kdaq.empas.com/imgs/knsi.tsp/289506/4/%EC%86%90.bmp)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人無遠慮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안중근 의사가 혈서로 쓴 대한독립 문서>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해 달라는 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서초동-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면산의 봄 2 (0) | 2009.04.05 |
---|---|
돈, 권력, 모럴해저드... (0) | 2009.04.03 |
고구려 실록: 아! 고구려!(마지막회) (0) | 2009.03.21 |
우면산의 봄: 대지의 열기,성미급한 봄꽃... (0) | 2009.03.19 |
고구려 실록:에필로그 2 (0) | 2009.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