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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실록:에필로그 2

두바퀴인생 2009. 3. 15. 08:42

 

 

고구려 실록: 에필로그 2

 

 

 


 

 

 

 

안시성 싸움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지도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군과 거란군도 동원되었다.

 

당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요동을 향해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 사령관인 이세적(李世勣)이 선발대 6만 명을 이끌었고,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이 뒤를 따랐다. 또한 장량(張亮)이 수군 4만 3천 명과 500척의 함대로 등주에서 출발하였다.

 

영주 도독 장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또한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신성(新城)공격에서는 실패했지만,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켰다. 당나라는 개모성의 인구 2만 호와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킨 후 남녀 8천 명을 죽였다. 고구려도 당군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신성의 병력 4만을 요동성으로 급파하였다.

 

마침 신성의 구원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당군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세적의 주력군은 미처 도착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이때 보장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이도종(李道宗)은 도주하다가 고구려 군에 허점이 생기자 수천 기를 거느리고 고구려 군을 기습하였다. 이때 마침 이세적군의 주력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은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결국 신성의 지원군은 요동성에 합류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645년 5월 당군은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공격을 개시하였고, 요동성은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막아내어야만 하였다. 요동성 내부에선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며 성 안 군사들과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자 하였다. 이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는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남풍이 세게 불자 당 태종은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은 12일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개칭하였다. 당군은 뒤이어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백암성주 손대음(孫代音)은 당군이 두려워 전투를 치르지 않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태종은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였다. 이때 당나라의 진영에서는 건안성(建安城) 공격을 앞두고 많은 의견이 오고갔다. 이세적은 건안성이나 오골성(烏骨城)이 중요하지만 안시성을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배후로부터 공격을 받아 당나라의 군량미 수송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태종은 이세적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전시켰다. 대노인 고정의는 당 태종을 경계할 것을 고연수에게 당부하였으나, 고연수는 이를 간과하였다. 태종은 사자를 보내 고연수를 안심시킨 뒤, 이세적과 장손무기(長孫無忌)로 하여금 고연수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혼란에 빠진 고구려군은 퇴각로마저 잃었으며, 이때 용문 출신의 설인귀(薛仁貴)가 큰 공을 세웠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 3만 6천 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또한 말 5만 필·소 5만 두·명광개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태종은 전투가 일어난 산의 명칭을 주필산(駐蹕山)으로 개명하고, 고연수를 홍려경, 고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안시성 전투

이세적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안시성 사람들이 당군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태종이 분노하였다. 이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때 고연수·고혜진 등이 태종에게 안시성 대신 오골성을 공격할 것을 주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가 보급로 차단을 이유로 이에 반대하였다.

 

어느 날 태종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이세적에게 밤 중 안시성에서의 기습 공격에 대비할 것을 명하였다. 이날 밤, 안시성의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안시성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그럼에도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당군은 강하왕 이도종의 건의로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벽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양군은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나라 군사의 충거와 포석이 누대와 성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 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당나라 군사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土山)을 쌓았다. 이 작업에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높게 되어 밖에서는 성 안을 내려볼 수 있었다. 이도종이 부복애(傅伏愛)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폭우로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이 때 부복애는 사사로운 이유로 수비하던 곳을 떠나 있었다. 토산이 무너지자 안시성의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여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태종은 토산을 빼앗기자 진노하여 부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이길 수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이에 태종은 이도종에게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전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라고 하였다.

전투는 그 만큼 치열했으며, 심지어 당 태종이 안시성주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전설까지 남게 되었다.

 

당나라의 퇴각과 평가

645년 9월 당 태종은 요동이 추워지고, 병사들과 군마를 관리하기 힘든 것과 군량이 떨어질 것을 예측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안시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태종은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었다. 이때 안시성의 성주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어떠한 자료도 없이 그냥 "안시성의 성주"(安市城主)로만 기록되고 있었다. 특히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안시성주에 대해 크게 칭송하면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태종은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 습지의 진흙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태종이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겨울 10월, 태종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넜다.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서 군사들의 옷이 젖고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태종은 퇴각하는 길에서

"만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라고 말하였다. 이때 당 태종의 퇴각에 관련하여 많은 이견이 있는데, 근대의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태종이 패전의 수치를 감추고자 일부러 자신들의 전과를 부풀리고, 피해는 최소화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베이징 일대 또는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현토(玄菟城)·횡산(橫山城)·개모(蓋毛城)·마미(磨米城)·요동(遼東城)·백암(白巖城)·비사(卑沙城)·협곡(夾谷城)·은산(銀山城)·후황(後黃城) 등 10개 성이 함락 당하였고, 요주·개주·암주의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을 중국에 빼앗겼다. 그러나 당나라군의 피해는 경미했으며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따르면 그 수는 2천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당나라군이 퇴각로를 함락시킨 요동성 일대로 하지않고, 진펄지대인 요택(遼澤)으로 한 점과 많은 양식을 이전에 고구려에게서 탈취하였는데, 군량미가 떨어진다는 것을 핑계로 당군이 서둘러 퇴각한 점. 그리고 황제가 직접 퇴각을 도왔다는 점과 자신들의 구체적인 피해상황은 정확히 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이 전쟁을 당나라의 패배로 보고있다.

 

한편, 항복한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홧병으로 죽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도착하였다.

 

제2차 고구려-당 전쟁

당나라 고종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661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연남생에게 5만의 군대를 내주며, 압록수 수비를 맡겼다. 연남생은 그동안 설필하력 군대를 잘 막아내었으나, 겨울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압록강이 얼자 강을 건널 필요가 없어진 당군은 대군을 한꺼번에 이동시켰고, 이에 고구려군 3만이 죽고 2만이 투항하였으며, 연남생은 목숨만 살아남았다.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하고, 소모전을 벌여 고려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군량미가 떨어진 소정방은 한편으로는 신라에게 군량미를 요청하고, 방효태는 20만으로 다른 성을 공격하여 군량미를 빼앗을 계획이었다. 이 사실을 안 연개소문은 5,000의 군대로 사수 작은 강가에 진을 친 다음, 당군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결과는 고려의 대승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방효태는 기습을 하려 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강의 얼음을 투석기로 깨버렸고, 20만 군사와 방효태는 물고기밥이 되었는데, 이 대첩이 바로 사수대첩 이었다. 한편, 소정방의 군대는 신라군의 군량미가 도착하자, 밥을 지어먹고 곧바로 퇴각하였다.

제3차 고구려-당 전쟁

제4차 고구려-당 전쟁

고구려의 멸망

668년2월,당 고종이 요하 근처에 주둔해있던 당군에 원군을 보내자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당은 항복한 연남생을 이용하여 신성 부여성을 쉽게 함락시켰고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나 대막리지 연남건은 이에 포기하지않고 요동에서 5만의 군사로 대항했지만 크게 패하여 2만의 군사만을 이끌고 압록강 이남으로 퇴각했다. 이후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다. 668년8월,당의 50만 군사는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신라군도 뒤를 따라 포위했다.나당연합군에 의해 포위당한 고구려군은 설상가상으로 평양성과 장안성 간의 연계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양성이 포위당하자 668년 9월,연남건의 동생 연남산은 군량이 부족하여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연남건과 보장왕에게 항복할 것을 건의했으나 실패하였고 고구려는 결사항전을 하였다. 그러나,당에 항복한 연남생의 밀지를 받은 승려 '신성'이 평양성의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나당연합군이 밀려들어오자 연남건은 자결하려했으나 실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연남산은 멸망하기 전에 항복하였다, 보장왕이 당군에 사로잡힘으로써 고구려는 패망하였다. 이 때가 서기 668년 9월21일이었다.

 

 

고구려인은 축성의 달인이었다

방어와 공격 기본을 산성에 두고 곳곳에 건설

국사를 배운 사람은 중국과 고구려의 항쟁 중에 일어났던 살수대첩(612)과 안시성 혈전(645)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외적과 전투할 때는 거의 전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성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고구려의 방어와 공격의 기본을 도처에 건설한 산성에 두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으로 거의 전 기간을 통해 일찍부터 국토를 지키면서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국경선 부근에 여러 겹의 방어용 성을 쌓았고 수도로 접근하는 통로에 차단용 성을 두었다. 또한 이런 전략 요충지가 격파되었을 경우 수도 보호하기 위해 서울을 평지성(平地城, 평화시)과 산성(山城, 전쟁시)으로 이원화하는 이른바 도성체제(都城體制)를 확립했다. 고구려를 '축성(築城)의 역사'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당 태종도 고구려는 산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게 정벌할 수 없었음을 인정할 정도로 고구려는 견고한 산성을 갖고 있었다.




[사진설명] 환도산성전경, 환도산성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천연 요새로 424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을 방위했다.


고구려의 산성체제를 북한에서는 요하 일대에 구축된 전연방어성(기본방어성)을 축으로하고 수도(집안)에 이르는 중간지역(태자하 상류와 소자하 일대)에 중심방어성(중간방어성)과 수도 방어성을 위한 수도방어성으로 나뉘어진 3중 구조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수도를 향하는 길목에 여러 방어성을 조성하는 수비책은 국초의 오녀산성(졸본성: 홀승골성)과 하고성을 비롯하여, 국내성과 환도산성, 평양 천도 후의 대성산성과 안학궁 등으로 이어진다.

고구려 산성의 숫자는 학자에 따라 달라지나 요령성에서만도 120여기로 추산하며 길림성이나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을 합하면 대체로 200여기로 추정한다. 이는 고구려가 고분과 함께 돌의 문화를 이룬 국가로서 결국 고구려의 성장과 문화는 돌을 통해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국가들이 치수(治水)에 의한 대규모 인력동원으로 성장한 것처럼 고구려는 치석(治石)을 통한 많은 인력동원에서 나라를 이룩하고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 지형에 알맞는 산성 축조

산성은 지형에 따라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고로봉식'으로 이는 고리짝같이 4면 주위가 높은 산등으로 둘러막히고 가운데가 오묵하게 생긴 지형이며 둘째, '산봉식'으로 마늘밑둥 모양으로 높은 산. 넓은 대지가 있고 그 둘레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룬 지형이며 셋째, '사모봉'형으로 사모(고대 관리들이 쓰던 모자의 한가지) 모양으로 뒤에 산이 가로막히고 앞은 평지로 되어 있어 그 등성이와 평지에 걸쳐 성을 쌓은 형태이며 마지막으로 '마안봉식'으로 말안장 모양으로 산마루의 양쪽이 높고 중간이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것을 말한다.




[사진설명] 단양의 온달산성,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온달산성은 해발 400미터의 낮은 산성이지만 높고 견고한데다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성벽으로 유명하다.


외적과의 빈번한 싸움을 해야하는 고구려는 전쟁에서의 장병들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장기전에 대비한 고로봉식 산성을 위주로 건설했다.

고로봉식 산성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산 능선 또는 절벽을 따라 성벽을 쌓기 때문에 적이 쳐들어오기에는 불리하고 적을 방어하기에는 유리하다.

둘째로 성벽을 산 능선을 따라가면서 쌓기 때문에 겹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다.

셋째로 성 안은 묵묵한 골안을 이루었기 때문에 성 안에서는 쳐들어오는 적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으나 성밖에 있는 적들은 성 안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전투에서 전술상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으며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넷째로 풍부한 수원과 넓은 골짜기를 내부에 갖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데다 또한 전투물자들을 비축할 수 있으므로 장기전에 대처할 수 있었다.

산성을 쌓을 때 지형이 고르지 않으므로 현지 지형 조건에 맞게 쌓았다. 지반이 좋고 나쁨에 따라 기초 공사를 달리했는데 특히 고로봉식 산성에서는 성벽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등 지반이 나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인공지반을 구축하여 성벽의 안전성을 높였다. 지반이 나쁜 경우 토압이 3N/제곱미터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보통지반의 토압인 10∼20N/제곱미터가 되도록 보강공사를 했다.

아주 지반이 연약한 경우 성벽이 통과할 구간의 하단부의 지반을 완전히 들어내고 거기에 직경 약 30센티미터, 길이 5∼6미터의 통나무를 1∼1.5미터 간격으로 놓았다. 그 위에 다시 이보다 더 굵은 직경이 약 50센티미터의 통나무를 마치 철길모양으로 약 4미터 간격으로 세로방향으로 놓았으며 그 위에 자갈과 모래, 흙을 넣고 다진 다음 돌로 성벽을 쌓아올렸으므로 축조할 때 공은 많이 들어가지만 매우 견고했다.

성벽은 기초 부분은 큰돌로 밑받침을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았다. 사용된 돌의 크기는 가로, 세로는 20∼60센티미터. 높이는 15∼40센티미터 정도이다. 성벽 축조는 위에서 아래까지 직선이나 약간 경사지게 하였고 성벽하단부는 굽도리벽을 조성하여 경사지게 쌓았다. 이러한 굽도리를 조성한 계단식 기단부의 축성은 협곡이나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적용되었으며 백암성의 경우 높이가 4∼6미터나 된다.

[사진설명] 장군총의 그랭이 공사법, 돌과 돌이 맞닿는 곳은 자연석의 생김새대로 돌을 맞추어 공사했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 중에 하나는 유명한 그랭이 공법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성벽을 쌓으면서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쌓는 돌을 바위가 생긴대로 쪼아내어 이빨을 맞추듯 완벽하게 접합시키는 것이 그레질이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분인 태왕릉이나 장군총은 물론 불국사 석벽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공법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지만 정확하게 접합시키면 상하가 밀착되어 매우 안전한 장점이 있다.

원래 자연석과 자연석을 접합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바위는 울퉁불퉁하게 생겼고 이가 벌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고르게 쌓으려면 자연석을 가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랭이 공법은 특정 바위를 생긴대로 놓아둔 채 바위의 형태에 따라 다듬어 가면서 맞추는 것이다.

이 공법은 우리나라 건축의 독특한 특성 중에 하나이다. 서양의 건물은 주춧돌과 기둥을 서로 견고하게 결색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주춧돌 위에 기둥을 간단하게 올려놓기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건물은 지진과 같은 충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재에 의해 건물이 소실되는 경우는 많지만 지진 등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에 큰 지진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한국의 건물들 대부분이 충격에 강한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주춧돌을 아무리 유리와 같이 갈아 놓는다하더라도 기둥을 올려놓으면 유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기둥과 주춧돌 사이의 간격을 없애고 밀착시키기 위해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다. 주춧돌을 생긴 모습 그대로 두고 나무기둥 밑둥을 도려내어 밀착시킨 것이다. 그레질칼로 기둥을 다듬어 돌에 맞추면 돌의 요철에 따라 기둥이 톱니처럼 서로 맞물린 듯이 된다. 기둥과 주춧돌은 막중한 건물의 하중으로 인해 밀착되기 때문에 지진에 흔들렸다하더라도 기둥의 요철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들어서는 것이다.

신영훈은 1967년에 멕시코의 멕시코시에 건설한 한국정(韓國亭)이 멕시코에서 일어난 수많은 지진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없이 아직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그랭이 공법은 한국의 건축 특성으로 목조건축이 1천년을 끄떡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인데 산성을 쌓을 때도 바로 이런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1500년이 지난 현재도 많은 유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산성의 또 다른 특징은 전투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치성을 쌓았다는 점이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쉽게 관측하는 등 전투력을 배양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을 치성(雉이라고도 함)이라고 한다. 백암성의 치는 5개이며 석대자산성에서는 10개나 된다.




[사진설명] 백암성의 치.


성문을 철통같이 막는 옹성(甕城)도 고구려 산성의 자랑거리다. 성문에 적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에 성벽을 이중으로 쌓는 것을 말한다. 성문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관문일 뿐 아니라 전투할 때 적의 주요한 공격목표가 된다. 성문이 함락되면 성 자체가 함락된 것과 같으므로 성문을 보호하고 취약점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설치했다.


■ 백제 신라도 고구려 축성 기술 도입

산성은 산성 자체를 보호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용도이므로 어느 정도의 필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우선 성문은 성의 정문으로서 출입고인 동시에 장엄한 외형을 나타낸다. 산성의 경우 성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은폐시키지만 평지성의 경우는 교통 요지에 둔다.

가장 높은 곳에 전체를 지휘하는 내성(아성)과 장대(성 안에서 안팎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를 설치했다. 주변과 연락하는 통신시설인 봉수대는 필수적이고 적군이 성벽을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밖으로 물줄기를 파서 도랑을 만든 해자를 설치한 곳도 많다. 특히 군사들이 장기간 머물수 있는 도 병영을 온돌로 만들었고 커다란 곡식과 무기 창고로 장기전에 대비토록 했다.

현재 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대체로 2층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은 망루의 역할을 한다. 성문의 중요성은 적의 제일 중요한 공격목표인 동시에 최후 방어선이므로 당나라의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할 때 고구려군이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성문이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격군은 가능한 한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성문이 스스로 열리도록 하는 계책을 주로 사용했다.

이와 같이 견고하고 지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세워진 산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성 밖에 토산(假山)을 만들어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와 혈전을 벌였던 안시성(645)의 전투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진설명] 안시성 내부 모습, 당태종을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친 안시성은 현재 산허리의 대부분이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제법 큰 마을이 있다. 멀리 산성이 보인다.


‘강하종(江夏宗)은 군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 귀퉁이에다 돌산을 쌓고 성을 침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당의 사졸이 분전하여 교전하기를 하루에 6∼7회, 충차(衝車)와 포차(抛車)로 성을 파괴하니 성 안에서는 목책(木柵)을 세워 빈 곳을 막았다.’

고구려의 성곽은 산성이 중심이었지만 평지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지성은 주로 도성체제상의 산성에 대응되는 평화시의 성곽과 책성(柵城)으로 되어 있다. 평지성의 경우 대체로 정상적인 평지에 있고 왕성으로 국내성과 압압궁이 있다. 대표적인 평지성으로 하고성은 오녀산성이 험준한 절벽에 있으므로 그 보완적 의미가 있다.

고구려의 축성 기술은 고구려가 진출한 한반도 남쪽의 온달산성에서도 볼 수 있으며 신라와 백제에서도 도입했다. 백제와 신라는 처음에 거의 산봉식산성이었는데 백제의 경우 산봉식산성의 단점과 고로봉산성의 장점을 파악하고 이미 축조된 산봉식산성에 고구려의 고로봉식산성을 결합하여 이른바 ‘복합식 산성’을 건설했다.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의 사산성,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견지산성, 경기도 화성시의 당성 등이 그런 예이다. 신라의 경우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고로봉식산성을 건설했는데 충북 보은군 삼년산성, 경기도 여주군 파사성(매초성) 등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서초동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