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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실록:에필로그1

두바퀴인생 2009. 3. 15. 08:34

 

 

 

고구려 실록: 에필로그 1

 

 

연개소문 동상, 천안 국학원 내의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연개소문 등장과 일인독재 체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함으로써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연개소문은 서부 귀족 출신이다.그의 할아버지 연자유와 연태조는 모두 대인의 신분으로 재상 반열에 올랐다. <삼국사기>와 <신당서>에는 개소문의 성씨를 '천'씨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개소문의 '연'씨 성이 당나라를 세운 이연의 이름과 같다하여 고의로 천씨로 바꿔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버지인 연태조는 동부(東部 : 혹은 서부라고도 함)의 대가 및 대대로(大對盧) 직을 지냈고, 그의 사후 연개소문이 그 자리에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하였다.

 

연개소문은 아버지 연태조가 죽은 후에 서부의 대인 직위를 이어받으려 했으나, 당시 신하들이 연개소문의 성격이 지나치게 호방하여 위험한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작위 계승에 반대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자신이 직접 궁궐로 나아가 작위 계승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가까스로 서부 대인 직위를 얻을 수 있었다.

 

연개소문은 이에 반대파에게 한수 굽히며 대대로 자리에 간신히 올랐고, 취임 즉시 재차 대당(對唐) 강경책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류왕이 당나라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펼치며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크게 반발하게 되었다. 628년(영류왕 11) 왕명으로 천리장성을 쌓으니, 남녀를 막론하고 동원되어 고통이 심하였다고 한다.

 

서부 대인이 된 연개소문은 아버지 연태조가 추진하던 장성 축조작업을 지휘 감독하였다. 631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약 16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642년 한편 영류왕과 대신들이 모의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으나 연개소문이 사전에 눈치를 채고  연개소문은 성곽축성을 위한 출정식을 핑계삼아 도성의 남쪽에서 축성작업에 참여하는 군대를 사열하기로 하고, 조정 중신 1백여 명을 그자리에 초청하였다. 그리고 중신들이 사열식에 참여하기 위해 식장에 들어서자 모두 죽여버렸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제거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함이었으며, 다음으로는 고구려를 당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당나라에 조공하여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자는 온건파였고, 다른 하나는 당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이루어 고구려의 독자성을 고수하자는 강경파였다. 영류왕은 즉위 초부터 온건파에 기울어져 있다가 강겯파의 거두인 대대로 연태조가 죽자 완전히 온건파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조정은 온건파가 득세하였고, 강경파는 변경으로 밀려나거나 장성 축성작업에 동원되어야 했다. 그리고 급기야 온건파는 강경파의 핵심 인물인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백여 명의 온건파 중신들을 제거한 연개소문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궁성 안으로 들어가 궁성을 장악하고 영류왕을 살해했다. 이로써 하루 아침에 조정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보장을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스스로 막리지에 오른다.

 

막리지는 연개소문에 의해 도입된 관직로 행정과 병권을 동시에 가진 무소불위의 직위였다. 연개소문이 이 직위를 바탕으로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철저한 공포정치를 지속하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시신을 토막내어 구덩이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해에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옹립한 뒤 고구려의 최고 관직대막리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인척들을 모두 요직에 앉혀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연개소문의 고구려 내 권위는 엄청났는데, 《삼국사기》 열전은 그가 몸에 오도(五刀)를 차고 다니며, 말을 오르내릴 떄는 귀족이나 무관을 엎드리게 하였다고 기술하면서 그의 독재자의 모습을 비판하여 묘사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인이 주변 민족에 대해 쓴 《한원》(翰苑)을 보면 고구려인들은 누구나 오도를 차고 다닌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이 이렇게 일시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자 일부 지방세력들이 반발하였다. 하지만 대부분 연개소문에게 굴복하였으나, 안시성의 성주만이 유일하게 연개소문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연개소문의 호출을 받고도 전혀 응대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연개소문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한다. 그런데 안시성 성주는 군민들을 모두 성안에 집결시켜 체계적으로 정부군에 대항함으로써 수성전에 성공한다. 이에 연개소문은 자칫 내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안시성의 성주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더 이상 그를 소환하지 않았다. 또한 안시성 성주 역시 자신이 연개소문을 붙잡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 국가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영류왕이 제수한 안시성 성주직을 유지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짓는다.

 

이 사건 이후 연개소문은 안시성의 독자성을 인정한 채 나머지 성의 성주와 조정 관료들을 대폭 교체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당나라 침략에 대비하여 자신이 주관해오던 장성 축조 작업을 완결시키고, 한편으로 군사의 수를 대폭 늘려 전쟁에 대비했다.

 

 

 

당나라와의 전쟁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외 정책을 고수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백제와 함께 신라를 쳐 당항성을 빼앗았다. 한편으로는 643년(보장왕 2) 당나라의 숙달(淑達) 등을 초청하여 도교를 퍼뜨리고, 평양에 용인성을 쌓았다. 자주 신라를 침공하니 신라의 요청으로 당 태종은 고구려·신라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려고 사신 장엄을 보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당나라 사신을 구금까지 하였다.

 

화가 난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 3년) 음력 12월에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을 걸고 군사를 내어 직접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당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음력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음력 6월에 함락당하고 당군은 안시성으로 향했다.

 

연개소문은 고연수 고혜진을 보내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출전시켰으나 안시성 동남쪽 주필산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당군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에 실패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보급로가 끊긴 당군은 고구려 군의 공격에 급하게 요택으로 퇴각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를 두고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베이징 일대 또는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과했으나 당은 듣지 않고 몇 차례 군사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660년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1년 고구려를 침략해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아들 연남생 막리지에 임명하여 압록강에 보냈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이 다시 침입하자 연개소문은 직접 사수 언덕에서 접전을 벌여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죽이는 등 당나라군을 몰살시켰다. 이후 장남 연남생에게 대막리지를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직인 태대막리지에 올랐다.

 

가족

아버지는 동부의 욕살이자 막리지 연태조(淵太祚)이며, 할아버지는 연자유(淵子遊), 증조부는 연광(淵廣)으로 모두 막리지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우로는 연정토가 있고, 세 아들은 연남생(淵男生), 연남건, 연남산이다. 일설에는 연개소문에게 젊은 누이가 있었다고도 한다.

 

죽음에 대한 논란

연개소문의 죽음에는 3가지 설이 있는데 신채호의 657년 사망설과, 662년 사망설, 그리고 666년 사망설 등이 있다. 연개소문은 지금의 평안남도 후창군 동림봉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의 평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고구려 9백 년 이래로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의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 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의 정책을 세웠고, 그래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죽여 자기의 독무대로 만들고, 서국(西國) 제왕 당태종(唐太宗)을 격파하여 지나 대륙의 침략을 시도했는데 그 선악 현부(善惡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아시아에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중국인들의 생활에 남아있는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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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연개소문(왼쪽)과 당태종 이세민이 라이벌로 등장한다. 그러나 중국의 전승에서 연개소문의 라이벌은 오히려 설인귀이다.

 

 중국 민중의 잠재의식에 공포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외국인 가운데 으뜸은  단연 연개소문이 아닐까 한다. 경극에서, 또 전승되는 설화.야사에서 연개소문이 악(惡)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황제인 당 태종 이세민이 하마터면 연개소문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고, 그에 따라 당나라가 멸망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당(唐)이 어떤 나라인가.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문물을 꽃피운 당은 그 시대 지구상에서 가장 앞선 선진 세계제국이었다. 그리고 그 당나라 번영의 기초를 닦은 제왕이 당 태종(이하 이세민)이다. 그는 수(隋)나라를 멸하고 당나라를 건국한 실질적인 주역이었고, 아버지인 고조가 즉위한 뒤에는 태자인 형 건성을 죽였다. 이에 고조는 황위를 이세민에게 물려준다. 황제가 된 이세민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사상 최고의 황제로 꼽을 만큼 업적을 쌓는다. 그의 통치시기를 정관의 치(治)라 하며, 그의 통치철학을 기록한 책 '정관정요'는 지금도 제왕학의 교과서로 일컬어진다.


 그런 이세민에게도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고구려 정벌이었다. 서기 645년 그는 고구려 친정 길에 나섰지만 실패한다. 그것도 안시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한쪽 눈을 잃은 뒤 허겁지겁 퇴각하는 것으로 끝난다.


 현재 중국의 공식적인 사서인 '25사(史) 중에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처절하게 당한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화사상을 드높이고자 중국에 치욕적인 역사적 사실은 철저하게 은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 백성에게는 이세민의 처절한 패배가 곧 악몽이었으며, 그 끔찍한 기억은 구전. 기록 등을 통해 후손 대대로 전승한다. 그 기억이 이 시점까지 남아 있는 형태가 곧 경극이요, 설화요, 야사이다.


 연개소문과 이세민의 관계를 그린 경극에는 '독목관' '살사문''어니하'등이 있다. 한결같이 전쟁터에서나,  이세민이 사냥 나간 길에서 연개소문을 만나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가 극적으로 구출된다는 내용이다.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라는 야사에는, 연개소문이 이세민을 중국 황제가 아닌 '소진왕'으로 낮춰 부르며, 내가 단지 일개 부대로도 네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호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이세민은 겁에 질려 "황제인 것도 소용 없구나.누가 나를 구해주면 당나라 땅의 절반을 주겠다."고 울부짖는다. 참으로 비참한 패배인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경극, 설화는 연개소문의 막강함을 보여줘 공포를 전파하는 것으로 끝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거대한 악이 존재하면, 이를 쳐부수고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당연히 등장하는 것이다. 그 인물이 요즘 TV 드라마 '대조영' '연개소문'에 등장하는 설인귀이다.


 강한 연개소문과 나약한 이세민을 그린 경극과 야사에는 이세민을 구해 결국 당나라를 구원하는 인물로 설인귀가 등장한다. 이세민이 위기에 처했을 때 설인귀가 번개처럼 등장해 연개소문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사태를 반전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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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의 설인귀 이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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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설인귀 유태웅.

 

그렇다면 연개소문과 설인귀는 실제로 마주친 일이 있을까. 역사학자들은 그럴 수가 없다고 단정한다. 설인귀는 이세민의 고구려 침략 때 군졸로서 지원해 원정 길에 따라나선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이 인시성 전투이다. 이세민이 직접 거느린 당나라 군이 안시성을 처음 공격하자 고구려 군이 마주 나와 당 군대의 일부를 섬멸하기 시작했다. 이때 무명이던 설인귀가 과감히 나서 고구려 장군을 죽임으로써 비로서 이름을 알린 것이다. 이후 연개소문 생존시에도 당은 몇차례 고구려를 침범했고, 설인귀도 출전 장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직접 전장에 나선 일은 없었다.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이 연개소문과 설인귀를 엮어, 설인귀가 연개소문을 꺾고 당나라를 구한 것처럼 설화를 지어낸 것은 그야말로 보상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예컨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사명대사나 박씨 부인이 도술을 써서 왜적을 무찔렀다는 내용의 군담소설이 유행해 우리 민중에게 위안을 준 거나 같은 맥락이다.


 설인귀는 훌륭한 장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라 침공에 두차례 실패하는 등 여러차례 패전도 기록했다. 그런데도 중국 민중의 영웅으로까지 떠오른 건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를 희석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인귀는 무명 소졸에서 발딱 일어나 대장군까지 지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때 평양성을 함락한 장본인이다. 중국인에게는 '최악의 강적' 연개소문에 비교할 만한 자격을 그나마 갖춘 것이다.


 설인귀는 그렇다 치고 그러면 이세민은? 중국 정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위대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연구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우리 역사서 한단고기에는, 퇴각하는 이세민을 쫓아 연개소문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장안까지 진격하자 이세민이 사람을 보내 항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장안에 입성, 중국의 산서, 하북, 산동 일대의 땅을 받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연개소문과 이세민이 맞붙은 고-당 전쟁의 실상일지 모른다.


연개소문과 이세민, 그리고 설인귀를 둘러싼 중국 민중의 전승이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진실은 단하나뿐이다. 전쟁은 고구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는 것, 연개소문은 중국인들의 잠재의식에 지금도 공포의 상징으로 남아 있을 정도로 위대한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이다.


<대표 참고서적: 김용만 저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바다출판사 간>

 

 

 

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 1

 

연개소문은 악날한 독재자이며 폭군에 불과한가? 아니면 고구려를 구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인가?

 

결론적으로 연개소문은 운이 다해가던 고구려를 위대한 나라로 다시 우뚝 서게 만든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 물론 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독재자였다는 점과 자신의 사후 권력이양에 대한 확고한 조치를 하지 못하고 권력기반이 약한 자신의 장남 남생에게 전권을 세습시켰다는 잘못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며 그로 인해 고구려의 멸망이 당겨졌다는 점이다.

  

그 당시 고구려 사회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연개소문은 이미 고구려가 장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귀족들의 상무정신이 점점 퇴보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몸보신을 위해서 선조들이 쌓아놓은 역사와 전통을 잊어버리고 굴욕적인 대당외교를 감수하자는 중신들의 의견에 영류왕이 의견합치를 보인데서 결정적인 망국의 기운이 싹텄다. 역대 고구려 제왕들이 대부분 백발을 휘날리며 전장터에서 앞장서서 적과 싸우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류왕이 대당외교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인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고구려의 병력이나 전투기술이 당군에 비해 뒤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말갈군을 포함한 고구려군  20만 군대를 동원한 연개소문은 남부 신라국경 쪽에 5만을 배치하고, 서부전선에 15만을 배치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10만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니 충분히 대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매번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패전을 몰랐던 군대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의 소정방은 평양성을 포위하고 공략하던 중 군량미가 떨어져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등 애로를 겪다가 고구려군에 퇴로가 차단되어 소정방은 이 평양성 전투에서 대부분의 자신의 군대와 같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전장에서 소정방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가 때문이다. 또한 사수언덕에서 벌인 당나라 방효태 군대는 연개소문과의 전투에서 완전히 전멸한 것으로 당나라 사기에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다른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가 패전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인 당나라 이세민의 치적에 흠집이 나는 역사 사실은 대부분 생략하게나 사실을 감추고 거짖말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의 사서를 참고하여 기록한 고려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대부분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였던 바, 사실이 아닌 부분이 대부분이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25년간이나 대당전투에서 고구려를 지켜온 것은 오로지 연개소문 혼자의 능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연개소문의 실수라면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자신의 아들 남생에게 위임하였다는 것이며 연개소문에 버금가는 장수들도 많았을 것이나 연개소문은 그 점을 간과한 점이다. 당시의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나 그의 사후 권력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주변 권력층의 의견합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고대 로마는 위기시에 집정관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하는 독재권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위기시에 신속한 결정과 주도적인 통치력을 발휘하는게 당연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도 6개월로 제한했으나 나중에는 연장하기도 하였다. 예로 시이저의 경우가 그기에 해당된다. 독재권력을 장기간 갖게되면 자연히 반대파들의 암투가 나타나게 되고 결국에는 독재자 시이저의 암살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고 고구려의 역사를 존속시키려 했다면 추천과 합의에 의한 후계자를 선출하는 방안을 강구했어야 했다. 다시 왕권도 되살리고 본래의 체제로 빠른 전환을 기해야 했었다. 한 사람의 독재자로 인해 강력하게 대당전을 수행하던 고구려는 그의 사후에 권력의 공백이 갑자기 생기자 아들 세 명의 권력다툼으로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고구려 서부 변경의 여러 성들이 당나라로 도망갔던 남생이 앞장 선 당나라 군대에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게 되고, 결국 보장왕이 피난해 있던 하평양성까지 성문을 열고 항복하게 되자 보장왕과 남건,남산의 두 형제는 포로로 잡히는 비운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남생은 당나라 직위를 받고 식읍 3,000호를 통치하는 권력을 누리면서 좀 더 살았을 뿐이다. 그 후 안시성은 3년을 더 버티다가 결국 당나라 군대에 점령당하게 되고 안시성주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연속극에서는 안시성주가 반대파 고구려군에게 피살되는 장면이 나오지만 다만 추측일 뿐이다. 그 후에도 고구려 부흥운동은 끈질기게 지속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고구려 땅을 위임통치하던 보장왕 마저도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내지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후신이 대조영에 의해 발해가 태동되면서 그 명맥은 수 백년 간 지속되지만 결국 중국을 지배하는 신흥세력의 지배속에 놓이면서 동화되고 만다. 

 

어찌했던, 연개소문은 무너져가던 위대한 고구려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내쉰 큰 숨으로 생각된다. 위용을 자랑하던 고구려가 온건주의로 변질되고 굴욕적인 외교로 당나라의 지배 까지 허용할 정도로 나라는 외형은 든든하였으나 머리가 썩고 있었던 것이며 그러한 고구려가 마지막으로 연개소문이라는 한 영웅에 의해 용틀임 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그 나라의 지도층이 썩고 통치자자 나약해지면 나라는 금방 절단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淵蓋蘇文에 대한 재평가 2
서병국(대진대학교 교수)

중국인의 관련 기록들이 말하고 있듯이 고구려의 멸망을 앞두고 나타난 온갖 말기적 병폐 요소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일으킨 장본인으로 모든 책임이 한 몸에 모아지고 있는 인물이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의 인간성과 정치적 독재성에 관해 중국인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삼국사기》에 실린 그의 열전(권 19)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의 인간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부출신의 대인(大人)으로서 대대로라는 벼슬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연태조(淵太祚)가 죽은 후 연개소문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으나 잔인한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라 사람들은 처음에 이를 반대했다.

 

결국 반대자들의 양해하에 그는 대대로 벼슬을 차지하긴 했으나 대신들은 꺼려 영류왕과 모의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거사를 앞두고 기밀이 누설되자 연개소문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사열식을 거행한다고 빙자하여 대신들의 참관을 청했다.


연개소문의 지휘를 받는 부병(部兵)들은 계획한 대로 현장에 나온 100여명의 고급관리들을 모조리 죽이고는 즉시 궁중에 있던 영류왕을 시해하고 그 시신을 여러 토막으로 잘라 구렁창에 내버리고 나서 영류왕의 동생 보장을 새왕으로 세웠다. 쿠테타를 통해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당나라의 병부상서와 중서령 벼슬을 겸임한 것 같았다. 전국의 모든 권력을 쥐어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다보니 누구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말을 타거나 내릴 때는 땅에 엎드린 무장들의 등위를 밟고 오르내렸다. 또한 외출할 때면 반드시 의장대를 내보내고 길을 인도하는 사람은 고함을 크게 질러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피했다. 그러다 보니 온 나라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했다는 것이다. 보았듯이 연개소문의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 기록 외에 다른 자료가 없다면 누구든지 위 기록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인간성에 대해 여론을 조작한 당나라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해 사건과 이에 따른 국권 전횡을 트집잡아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으나 장손무기(長孫無忌)의 신중론을 받아들여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갑자기 바뀌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틈을 타고 신라가 점령한 5백리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가 신라를 압박했는가 하면 신라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외교적 몸짓으로 사신 상리현장(相里玄長)을 고구려에 보내 이의 중지를 청했으나 연개소문은 완강히 거부했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태종은 다시 장엄(蔣儼)을 고구려에 보내 최후 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사신을 가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잃어버린 옛 땅을 다시 찾는 것은 고구려의 기본 생존권이 아닐 수 없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태종의 위협적인 압력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데서 지금까지 내려진 그에 대한 평가와 달리 그는 고구려의 민족정신을 계승한 철저한 민족주의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집권 초에 그는 민족주의를 추구하여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빚긴했으나 이는 고구려 침공의 명분만 찾고 있던 태종에 의해 조작된 여론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 침공을 앞두고 태종은 의도적으로 연개소문을 시해 사건과 관련지어 여러 차례 비난했으나 침공을 반대한 신하가 한 두명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처럼 태종이 연개소문을 비난한 것은 시해 사건일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사실상 연개소문은 집권전부터 당나라와 마찰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도교의 도입을 영류왕에게 건의하여 왕의 이름으로 도사의 파견을 당나라에 청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가 당나라 왕실의 조상이라는 데서 도교는 당나라 왕실로부터 극진한 보호를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나라는 즉시 도사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도덕경(道德經)의 강론이 영류왕 이하 대신들의 참석하에 매일 성황을 이루어 마침내 불교의 사찰이 도사들이 머무는 장소인 도관(道館)으로 바뀔 정도였다. 고구려에 처음 도교가 들어오는 길을 열어놓은 연개소문이 도교에 남다른 관심을 쏟은 것은 중국에서 유교·불교·도교가 나란히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에서도 도교의 발전을 똑같이 이루어 보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왕실의 관심과 보호를 받고 있는 도교의 도입을 역설한 것은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데서 주목할 일이며 더 나아가서 고구려의 문화를 당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연개소문은 민족주의를 추구하긴 했으나 문화의 세계사적 흐름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문화의 선각자였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가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도교의 갑작스런 성행으로 불교가 큰 영향을 받아 세력이 전보다 줄었을 것은 명백하다. 650년(보장왕 9) 고구려 사람들이 도교에 큰 관심을 쏟고 있어 고구려에서 불교의 세력이 전만 같지 못하게 됨으로써 불교의 위기의식을 느낀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은 백제의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는 그만큼 불교의 세력이 도교에 의해 크게 잠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적 망명을 한 보덕화상의 이후 활동은 불교세력을 만회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사상면에서 도교와 종교적 논쟁을 전개해 나갔다. 보덕은 세력을 펴 나가고 있는 도교의 기본사상인 불로장생설(不老長生說)을 누르기 위해 모든 중생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는 만큼 누구든지 수양만 올바르게 하면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내세우고 있는 열반종(涅槃宗)을 열었는데 크게 유행하여 후일 신라 5교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듯 열반종이 고구려에서 만들어지지 못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이 불교에서 도교로 완전히 기울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태종은 도교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국왕을 시해한 것은 고구려를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으로 몰고 있는 강경파의 대당나라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시해 사건 전에 그의 제거가 영류왕 등 강경파에 의해 시도된 적이 있었으며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강경노선을 뒤집기 위해 영류왕 등 100여명의 강경파 인물들을 일시에 제거했다. 강경파의 숫자를 알 수 없으나 백여 명이 넘었던 것으로 보아 온건파에 속한 인물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연개소문은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은 다수의 온건파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으로 고구려를 이끌어 나가는 제1인자가 되었다. 정변으로 중앙의 강경파가 모두 제거되었다 하겠으나 지방에는 강경파 인물이 여전히 남아 있어 온건파 중심으로 구성된 중앙정부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집권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저항한 지방의 강경파 인물은 주로 수나라와의 혈전시에 실전 경험이 많은 안시성 등 서부의 모든 성주들이었다. 지방의 강경파 인물들이 건재하고 있는 한 연개소문 정권은 오래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연개소문파는 정권 유지 차원에서 요동지방의 저항적인 성주들을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연개소문 중심의 온건파 정부는 반항하는 성주들의 저항을 분쇄하는 작전으로 나와 거의 이들 성주들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운명이 걸린 연개소문 정권의 분쇄작전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아 연개소문도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은 안시성을 지키는 성주 한 사람 뿐이었다. 연개소문의 온건 노선에 강한 불만을 갖고 서부의 모든 성주들이 반항한 사건은 고구려의 국내문제이지만 당나라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러하다보니 강·온 양파의 대결 상황이 벌어지고 안시성주 한 사람만 끝내 연개소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내분사건인 만큼 태종도 그 전모를 알고 있었다.


안시성 성주는 굴복하지 않았으나 다른 성주들이 모두 굴복했다는 면에서 일단 연개소문은 지방의 반대파를 완전히 장악하여 비로서 고구려의 전 지역에 그의 통치권이 미치게 되었다. 완전히 온건파로서 구성된 고구려 정권은 당나라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은 고구려의 온건노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연개소문이 주도한 시해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시켜 이를 고구려 침공의 다시 없는 명분으로 고리를 엮어 자신의 구상대로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태종은 고구려의 당나라에 대한 온건노선보다 시해 사건에만 비상한 관심을 두었다 하겠다. 그런데 온건노선을 전개하려면 연개소문으로서는 강경파의 중심인물인 영류왕 시해 사건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해 사건을 일으킨 연개소문은 중국의 전통적인 윤리관념에 따라 잔인한 성격의 강경한 인물로 관련된 모든 기록에 묘사되고 있는데 그렇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강경보다 온건노선이 당나라의 침공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면 일단 추구해 볼만도 하다. 그러나 강경파로서는 온건노선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 아니라고 확신하여 먼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에 온건노선을 추구하는 정권이 나왔는데도 태종은 고구려라는 반당적인 대제국 자체를 역사에서 소멸시키려 하니 태종의 배신행동에 대한 연개소문의 실망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도교의 도입을 그처럼 역설한 연개소문이 도교의 강론까지 폐지했다는 일설도 있는데 이는 당나라에 대한 배신감에서 나온 듯하다. 연개소문이 도교의 도입을 주장한 것은 당나라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을 끝내 악인으로 몰고가는 태종의 악의적인 적대행동을 확인하고 나서 연개소문의 온건노선이 강경책으로 바뀐 것은 태종에 대한 실망에서 나타난 반사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연개소문을 더욱 악인으로 조작하려는 태종에게 빌미를 준 셈이되어 연개소문은 가일층 잔인하고 난폭한 성격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지고 국왕을 죽인 죄인의 모습만 확대되어 중국인의 모든 기록에 실려지게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당나라 태종의 악의에 찬 배신행동에 분격한 연개소문은 드디어 강경파로 변신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분자로서 그 이름을 떨친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과의 불편했던 관계도 화해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침공군의 필사적인 포위 공격가운데서도 안시성은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연개소문의 적극적인 군사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의 침략군을 완전히 제압한 연개소문은 태종을 앞세운 가운데 양만춘과 함께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입성하여 항복의 조건으로 상당한 영토를 할양받았다고 한다. 이는 원래 온건노선을 주장했던 연개소문이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하여 양만춘의 강경노선을 따르는 등 두 사람이 당나라에 대한 노선문제에서 완전히 일치하여 화합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해서 요동지방의 전열이 전처럼 가다듬어진 듯하지 않다. 연개소문의 집권에 저항했던 성주들이 굴복함으로써 연개소문파의 인물이 성주자리를 차지했을 것은 분명하다. 다시말해 당나라의 침공을 앞두고서 영류왕파의 성주들이 연개소문 추종자들로 교체됨으로써 고구려의 군사 전략상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 같아 전력의 약화가 빚어졌을 가망이 크다는 것이다. 요동을 침공했다가 여지없이 참패한 태종의 원수를 갚기위해 고종이 보복전을 전개할 때 요동지방의 큰 성 몇 개가 무너지자 연쇄적으로 주변의 성들이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않고 항복한 것은 성주의 교체에 따른 전력약화와 상당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연개소문의 가계가 고구려의 동부출신으로 밝혀진 만큼 옛 성주들이 물러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역시 동부출신의 사람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를 달리하는 성주의 교체가 이루어짐으로써 신·그 성주들간에도 대립·반목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것은 분명하다.


수나라와 싸웠던 경험이 많은 서부출신의 성주들이 물러나고 별로 실전경험이 없는 동부출신의 사람들이 연개소문 추종자로 서부지방의 성주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빚어진 현상은 고구려 동서간의 일대 분열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분열이 몰고 온 피할 수 없는 결과는 운명을 걸고 전쟁터에 나온 당나라군의 침공이긴 하지만 고구려군이 전처럼 완강한 저항도 제대로 하지못함으로써 평양성이 함락되어 최후를 맞는 비운을 보게된 것이라 하겠다.


연개소문이 주도한 온건노선을 당나라가 받아들였다면 고구려의 운명은 이처럼 빨리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연개소문의 온건노선은 결국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연개소문이 처음부터 온건노선을 들고나온 것은 그가 동부출신으로서 수·당나라의 패권주의에 밝지못한 데서 그 단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동부사람들은 거리상 중국실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서부사람들은 중국과 전쟁을 거의 해마다 치루다보니 누구보다 중국실정에 밝아 끝까지 싸우는 것 외에 고구려의 살 길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동부사람들은 수나라와 치룬 싸움에서 이긴 고구려에도 엄청난 손실이 있었음을 의식하여 사전에 당나라의 침공을 막으려하여 온건노선을 구국의 이념으로 들고 나온 듯하다. 연개소문의 가계 뿐 아니라 동부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전쟁을 피하려하여 미리 전쟁을 막는데 온힘을 쏟은 듯하다. 시해사건이 일어나기 1년전에 고구려의 지리 등 기밀 전반에 걸쳐 고도의 정보수집을 주된 임무로 부여받고 고구려에 합법적으로 들어온 당나라의 사신 진대덕(陳大德)을 영접한 대대로 연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진대덕으로부터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이 당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말을 전해듣고 진대덕이 머물고 있는 객관(客館)으로 세 차례나 찾아와 예를 베푼 사실도 있었다. 그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연태조가 세 차례나 찾아온 것은 당나라에 대해 겁을 먹었기 때문인 듯하다. 연태조의 이러한 점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한 연남생(연개소문의 맏아들)이 온순, 후덕하며 예의있는 성품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할아버지의 온건한 성품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대해 나타낸 온건노선도 그의 온순한 성품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인의 모든 기록에서는 연개소문이 악인으로 낙인이 찍혀져 있으나 일설에 의하면 선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일설이란《환단고기》에 인용된《조대기(朝代記)》를 말한다. 여기서는 연개소문을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얼굴과 모습이 웅장하며 의기가 호탕하고 항상 사병과 함께 거적을 깔고 자며 몸을 아끼지 않고 말은 일에 성의를 다하는 인품을 지녔다.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살피며 마음을 주는 아량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복하여 다른 생각을 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법을 쓰는 것이 엄격하고 밝아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하며 범법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다스리며 큰 어려움을 당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당나라 사신과 대화할 때도 뜻을 굽히지 않으며 항상 자기민족을 음해하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여 당나라 사신도 그를 영웅시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천한 사람을 가까이 하며 노하면 권세있고 귀한 사람도 모두 벌벌 떨었다. 실로 한 세상의 쾌걸이었다."

위의 면모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선인으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와 아들의 온순한 성품으로 보면 연개소문의 성품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인의 모든 관련기록은 연개소문을 악인으로 낙인을 찍고 있다. 당나라가 연개소문을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고 여겼다면 중국인의 기록에 악인으로 둔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연개소문이 다루기 힘든 거북스런 인물이다 보니 당나라는 고의적으로 그를 악인으로 꾸몄던 것이다. 이 같은 중국인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다 보니《삼국사기》역시 연개소문을 악인으로 단정을 짓기에 이르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삼국사기》가 인용한 중국인의 기록과 《환단고기》는 연개소문의 성품, 인간성과 관련하여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당나라 정책과 관련하여《환단고기》는 그를 강경파로 보고 있는 반면 중국인의 기록은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즉, 연개소문이 도교의 도입을 건의했다는 점으로 보면 온건파에 속한 인물로 느끼게 하고 있으나 태종이 시해사건을 여러 차례 비난한 것으로 보면 강경파에 속한 인물로 보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나타내려 한 것은 연개소문이 독재자로서 국정을 전담하여 고구려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만 안겨주고 나라를 망친 악인이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을 강경파 인물이라고 보고있는《환단고기》는 영류왕을 친당적인 온건파라고 단정짓고 있다. 영류왕이 국왕이 되기 전에는 장군으로서 수나라와 친하게 지내려 했고 즉위하면서 먼저의 왕들이 심혈을 기우린 강경노선을 따르지 않고 친당적인 태도로 나와 노자의 초상화를 들여다가 고구려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듣게 만들었다하여 영류왕을 온건파의 우두머리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면에 연개소문은 수나라 때부터 강경노선을 고집하여 도교의 강해를 폐지하고 심지어 장성축조 공사도 그만둘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군사권을 뺏고 대신 장성축조 공사 감독권을 맡겼다고 한다.《환단고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노선을 고수했다 하겠으나 중국인의 기록에 의하면 강·온파중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 가리기 매우 힘들다. 그렇다해서 중간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태도에서 처음에 온건노선을 지키다가 당나라 태종의 고의적인 트집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강경파로 급선회했다는 논리를 앞에서 폈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명예를 깎아내리려는 저의를 반영하고 있는 중국인의 기록을 맹종하다 보면 연개소문이 태종의 침공을 받은 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욱 포악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는 따위의 표현밖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의 쉴새없는 침략적 도발로 고구려가 인명과 물질면에서 큰 손실을 입어 국력의 소모가 컸던 것은 인정할 수 있으며 해마다 침공한 것은 고구려의 국력을 최대한 소모시키는데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쉴 사이를 주지않고 계속 퍼분 공격으로 연개소문 집권시에 있었던 최악의 위기는 661년 설필하력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연남생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의 방위망을 돌파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수십리 내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군은 이듬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은 방효태가 거느린 당나라군을 청천강에서 섬멸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 결국 연개소문의 생존시 고구려는 최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666년 연개소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비상시국을 맡게 된 인물은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었다. 아버지의 대권을 계승한 그는 막리지로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직접 여러 성을 돌아다니면서 살피는 등 동분서주했던 시기에 아들 삼형제 간에 대권을 둘러싸고 싸움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멸망의 모든 책임을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와 아들간의 내분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들의 기록은 이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됨으로써 나타난 포악한 정치가 빚어낸 결과라고 마무리짓고 있으나 멸망원인은 중국인이 강조하고 있듯이 연개소문과 그 집안사람들의 국정 운영이 잘못되었다는 데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다각적인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하다.

*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님에 의해서 게시물 퍼옴)
 

                                                                              -서초동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