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고구려 실록: 아! 고구려!(마지막회) 본문
고구려 실록: 아! 고구려! (마지막회)
위대한 나라, 고구려!
고구려 실록을 한 번 보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학창시절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면서 딱히 기억에 남는 나라와 사람의 이름은 극히 일부만이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역사를 배우면 배울 수록 답답한 우리 역사에 대해서 그 어떤 위대함도 느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나라가 망하고 다시 한국전쟁이 나서 반도는 반동강나고 너무나 힘들게 살아온 백성들을 눈으로 보았고 스스로 체험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조상의 위대한 역사는 축소되어 한반도 안에서 지지고 뽂아서 만든 꿰맞춘 역사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시절 답답하던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도 항상 짜증만 나던 우리역사였다.
왜 우리 선조들은 그토록 무능하게 나라를 통치하였으며, 수없이 외침을 당하고, 어느 시대나 당파싸움과 사화가 반복되어 왔으며 수시로 반란.반정이 계속되었고, 탐관오리와 백성들은 토탄에 빠져 고향을 버리고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가?
불교와 유교가 정치를 지배하고 모든 논리를 유교라는 중국의 썩어빠진 종교를 들여와서 가진자들이 부를 향유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고 백성들은 노예처럼 피땀나게 농사를 지어도 모조리 걷어가고 피죽으로 연명하면서 살아온게 유교사회였다. 유교를 국시로 사대부 선비들이 지배하던 조선은 탐관오리들은 넘쳐나며 백성들은 토탄에 빠지고 외세를 끌여들이는 등 권력투쟁만 일삼다가 결국 나라까지 말아먹은 게 아닌가!
그래서 다시 요약하여 블로그에 올리면서 나 스스로도 고구려 역사를 다시 음미하게 되었고 아직 식민사관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바로 알려주고 싶었다.
고구려는 위대한 나라였으며 중원을 호령하던 한민족의 나라였다.
우리 역사를 유대민족 역사서인 성경의 구약처럼 기술되어 유대교의 성전 '토라'처럼, 그리스도교의 신.구약 '바이블'처럼, 이슬람교의 '코란'처럼, 우리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온 국민들에게 어린시절부터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높은 이상과 진취적인 기상은 수나라 백 만 대군도 물리쳤고, 당나라의 침공을 수 없이 받았지만 능히 물리쳤으며 한 번도 패전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 남생이 배신하여 당나라 군대 앞잡이로 선봉에 서서 조국 고구려를 침공하여 멸망하기까지 한 번도 수나라와 당나라 군대에 패한 적이 없었던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지정학적 잇점은 이미 앞에서 설명을 했다. 특히 고구려의 철기군은 상대할 나라의 군대가 없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철기군은 상대방 군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오늘날의 전차가 밀집하여 공격하듯이 상대군대는 맥없이 무너졌다고 한다.
고구려 군사제도 |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6정이나 9서당과 같은 군사조직의 명칭이 전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에 군사조직과 제도가 있었음은 여러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고구려군은 크게 육군과 수군으로 나누어지고, 육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분된다. 안악 3호분이나 약수리고분의 행렬도를 보면, 행렬의 좌우에 기병이 서고 그 안으로 보병이 열을 짓고 있으며, 보병의 수가 기병보다 많다. 실제 전투에서는 기병과 보병은 합동작전을 하였고, 수적으로는 보병이 많지만 전투의 주력은 기병이었다.
군사의 무장도 기병과 보병이 달랐다. 기병의 주무기는 활·긴 창·칼 등이었다. 기병에는 병사 뿐 아니라 말까지도 쇠로 만든 철갑과 투구로 무장한 중장기병과 갑옷으로 그다지 무장하지 않은 경기병이 있었다. 보병 역시 궁시,칼,짧은 창,도끼,갈고리 등을 주무기로 하고, 투구와 단갑으로 무장한 병사와 갑옷을 입지 않고 무기만 지닌 병사로 구성되었다.
고구려 초기의 국가체제는 자치권을 가진 那部의 연맹체제였기에, 군사조직도 각 나부를 단위로 조직되었다. 대가가 자신이 지배하는 나부에서 군사들을 동원하고, 계루부왕권이 주부를 통하여 대가들의 군사 활동을 적절히 통제하는 형태였다. 제가들은 자신의 군사력을 거느리고 고구려왕이 주도하는 군사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대외전쟁에서 얻어지는 성과물을 분배받거나 군공에 대한 포상으로 식읍을 하사받는 등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받았다. 4세기 이후에는 나부체제가 해체되고 왕권에 의한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제가들이 통솔하는 나부병들도 점차 왕권 아래의 군사조직 내로 편제되고,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차원의 병력 동원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일반민의 동원은 役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구려 후기의 군사조직은 중앙 군사조직과 지방 군사조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 군사조직으로는 수도의 5部 조직을 들 수 있다. 본래 수도의 5부는 행정조직이 군관구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각 부에는 일정 수의 군사가 배치되어 중앙군으로서 수도의 방위 임무를 담당하였다. 溫達이 소속되어 수렵에 참가한 5부병이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동원한 부병이 이에 해당한다.
중앙군의 무관직은 최고위급 무관으로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임명된 大模達 일명 大幢主 또는 莫何邏繡支가 있었다. 대모달 아래는 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되는 末客이 있어 병사 1천 명을 통솔하였다. 말객 아래에는 幢主가 있어 군사 1백 명을 거느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5부 조직과 관련시켜 보면, 각 부에는 1천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말객이 지휘하고 이들 5부의 중앙군을 대모달이 총괄 지휘한 것으로 짐작된다.
지방 군사조직은 지방 행정조직과 하나의 체계로 짜여졌다. 지방관이 곧 군관으로서 해당지역 지방군을 통솔하였던 것이다.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였던 高延壽와 高惠眞의 관직은 최상위 지방관인 褥薩이었다. 또 무관명인 말객의 다른 이름은 郡頭였는데, 이는 군의 지방관이라는 뜻이고, 최하위 지방관인 婁肖와 百頭도 무관직인 幢主와 대응시켜 볼 수 있다.
고구려 군사훈련의 대표적인 제도는 수렵행사였다. 초기부터 고구려왕은 잦은 수렵행사를 통하여 자신의 군사적 능력도 함양하고 군사훈련도 겸하였다. 평양천도 후에는 국가적 수렵행사가 봄·가을로 정례화되었다. 봄에는 매년 3월 3일에 수렵행사가 열려 중앙군인 5부병들의 군사훈련을 겸하였다. 또 수렵행사는 溫達의 예에서 보듯이 무예가 뛰어난 자를 선발하는 인재 등용의 통로로도 기능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행사 이외에도 고구려 귀족들은 평소 수렵을 즐겨 이를 통해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였다. 이는 고분벽화에 많이 보이는 수렵도에서 엿볼 수 있다.
미성년자의 교육기관인 경당도 군사훈련의 중요한 장이었다. 평민들의 자제들은 이 곳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 또 매년 초에는 대동강에서 왕의 관전 속에 두 패로 나뉘어 石戰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수렵도를 비롯하여 씨름도와 手搏圖·궁사도·전투도 등이 자주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전반적으로 상무적 기풍이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군의 주력은 육군이었으나 수군도 상당히 강력하였다. 본격적인 수군의 활동은 고구려가 낙랑군지역을 차지한 이후로, 이 지역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수군을 편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광개토왕 영락 6년(396)의 백제 정벌전에서는 수군을 동원하여 한성을 공격한 적이 있고, 후기에는 고구려 수군이 황해 연안로를 장악하여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방해로 사신을 보낼 수 없다고 당에 탄원할 정도로 강성하였다.
* * * * *
지금까지 고구려 실록을 읽어주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 나름대로 고구려 실록을 요약하면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보람도 느낌니다. 또 학습에 도움이 되었던지 아니면 새로운 고구려에 대한 역사를 재인식하셨던지 조금이나마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시게 되셨다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보람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다시한번 우리 역사를 음미하고 위대한 선조들의 위업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우리들이 나아갈 길을 설계할 수 있는 한국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성공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서초동-
1.기록상의 고구려 영토
①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영락 8년 영락태제(광개토대제)가 토곡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토곡은 토곡혼을 말하는데 토곡혼은 티베트에 있던 국가였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저 멀리 티베트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②중국 역사책 위서
중국의 역사책인 위서를 보면
"398년 북위의 수도 였던 업에 고구려인 46만명과 기술자 10만명이 가득하므로 왕이 이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도읍을 평성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북위의 수도였던 업(오늘날 태원)에 고구려인 56만명이 있었다는 것과 북위 조정이 이들을 두려워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정벌하여 영토를 산서성 이남까지 확대했음을 의미합니다.
③한단고기
한단고기를 보면 고구려 21대 황제 문자호태열제 때 신라인을 복건성 천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문자호태열제 때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므로 신라인을 이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인을 중국 최남단인 복건성 천주(홍콩 근처)에 이주시켰다는 것은 적어도 고구려가 이 지역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2.고고학 상에 의한 고구려의 영토
①덕흥리 고분 벽화
북한 평남 대안시에 가면 덕흥리 고분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의 주인공은 유주자사 진으로 광개토대왕 때 활약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벼슬인 유주자사에 유의해야 합니다.
유주는 오늘날 중국 북경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인데 고구려 고분의 주인공이 유주자사라는 것은 고구려가 이미 북경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지요
②아프가니스탄의 아프라시압 벽화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아프라시압 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를 보면 고구려 사신이 그러져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적어도 이 지역을 영토로 확보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가 이 지역까지 진출했다면 소설 광개토대제는 소설의 상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 1. 고구리(高句麗) 최대영역은 동북아시아 전역이었다 ! >
# 서화(西華) 동쪽을 다스렸다는 기록과 반도를 통치했다는 기록들 #
지금까지 고구리(高句麗)영토는 만주와 반도 북부에 국한하고 있으나 이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반도가 고구리영역이였음을 나타내는 유적과 유물
① 경남경주의 황남대총에서 영락(永樂 : 광개토대왕연호)이 새겨진 항아리
② 창녕진흥왕 비문에서 碑利城(비리성)
③ 중원고구리비(碑)에서 고리대왕상왕(高麗大王相王)
④ 한강이남의 석촌고분, 안동의 방형묘, 경주의 방형묘는 즙안의 고구리(高句麗)고분과 흡사하다.
⑤ 평남 대안시 대흥리에서 발굴된 진(鎭)묘비
⑥ 평안도청에 있는 평양성벽각자
⑦ 태천의 고구리성벽각자(高句麗城壁刻字) 등
반도 전역에서 고구리 흔적을 찾을 수 있고
기록으로는
- 삼국사기의 간(干 : 환도성간, 마립간 : 丸都城干, 麻立干),
- 삼국유사의 마립간("한"음"간"), 구간(麻立韓, 九干) 등이 있다.
㉯ 서화(西華)(중국하남성)의 동쪽에서부터 고구리 영역임을 나타내는 기록
① 고구리,맥제 강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였다. (최치원전)
② 섭라(涉羅 : 안휘성)를 고구리가 맥제에게 빼앗겼다. (위서, 북사, 삼국사기)
③ 항성(項城 : 하남성)을 맥제가 고구리와 함께빼앗으려 하였다. (신구당서, 삼국사기)
④ 태원(太原 : 산서성)을 모본왕2년(49년)에 평정하였다 (후한서, 삼국사기)
⑤ 광녕(廣 ), 代(내)가 광개토대왕시대, 고구리지(高句麗地)이다. (진(鎭)묘비)
⑥ 신성(新城 : 銀山 : 은산)에서 당과 고구리가 전투를 하였다 (신구당서, 삼국사기)
⑦ 선비(鮮卑)는 BC9 년부터 고구리민(高句麗民)이다. (삼국사기의 유리왕, 신구당서의 가한신(可汗神))
⑧ 5세기 이전 사로신라는 고구리, 맥제(百濟)에 속하여 있었다 (북사)
위와같이 고구리의 최대영역은
- 서화(西華) 중심의 남쪽 월(越)에서 부터
- 섭(흡과 동음: ), 태원, 광녕(太原, 廣 )으로 이어지는 선과
- 선비의 영역을 포함하였고,
- 동으로는 반도의 경주까지 아시아 전역이 高句麗의 영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고구리의 후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 있으니
- 반도의 코리아(고리:高麗),
- 몽고(蒙古 : 몽고리 : 蒙高麗),
- 위구르(爲溝 ),
- 黎(리)등은
고구리의 후예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고구리의 최대영토는
- 고조선(古朝鮮)시대의 영토이며
- 구리(九黎)시대의 영역인 것이니
기록이 많은 시대 고구리를 명확히 밝혀서 동이(東夷)의 유구한 역사를 바르게하여야 할 것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한 고구리(高句麗)의 영역 >
- BC 30년 행인국(行人國)을 병합
-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병합
- BC 9년 선비(鮮卑)를 병합
- 14년 양맥(梁貊)을 병합, 한고구리현(漢高句麗縣)병합
- 22년 부여(夫餘)를 병합(동부여)
- 26년 개마국, 구다국(蓋馬國, 句茶國)을 병합
- 32년 낙랑왕국(樂浪王國)을 병합 (반도와 만주로 진출)
- 37년 낙랑군(樂浪郡)을 병합 중원으로 진출
-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평정
- 56년 동옥저(東沃沮) 병합(동으로 창해(滄海), 남으로 살수(薩水)=하북성의 중북부지역)
- 72년 조나(燥那) 병합
- 74년 주나(朱那) 병합
- 121년 遼隊(요대), 新昌(신창)에서 전투
- 146년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에서 전투
- 169년 현도태수와 부산(富山)을 평정
- 242년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을 평정
- 300년 (낙랑대방(樂浪帶方)이 강회(江淮) 사로신라에 귀속)
- 302년 현토군(玄 郡)을 평정
- 311년 요동서안평을 평정
- 313년 낙랑군을 평정
- 314년 대방군을 평정
- 315년 현토군(玄 郡)을 평정
- 385년 용성(龍城)을 평정
- 391년 남으로 맥제(百濟)를 북으로 계단(契丹)을
- 468년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동신라 ?)
- 475년 맥제(百濟)의 한성(漢城)을 함락(요의 동쪽에)
- 494년 신라와 살수(薩水)에서전투(맥제가 지원)
- 503년 동신라(東新羅)독립(요하의 동쪽)
- 504년 이전 섭라(涉羅 : 안휘성)을 맥제에게 병합
- 550년 맥제가 도살, 금현등 두 성을 공격하니 그 틈에 新羅(서신라)가 고구리의 두성을 빼앗음 (서신라의 광복운동(?))
- 631년 동신라와의 국경에 장성을 구축(동북의 부여성에서 동남의 해(海)까지)
- 645년 당과과 고구리 전투지명 용도, 은산, 신성, 고대인성, 건안, 개모성, 백암성, 안시성(甬道, 銀山, 新城, 古大人城, 建安, 蓋牟城 白巖城 安市城)
- 647년 신성, 석성, 적리성(新城 石城, 積利城)에서 전투
- 668년 고구려역사 九百年( BC239-AD668년)
< 주(周), 진(秦), 한(漢)의 전통을 이은 장안중심의 한족(漢族)기록에서 고구리영역 >
㉠ 후한서 (後漢書)
- 49년 한(漢)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右北平(우북평), 漁陽(어양), 上谷(상곡), 太原(태원)
- 121년 한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廣陽(광양), 漁陽(어양), 右北平(우북평), (탁), 遼隊(요대), 新昌(신창)
- 146년 한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
㉡ 삼국지(三國志)
- 121년 전투지역을 요동(遼東)
- 146년 전투지역을 신안(新安), 사안평(西安平)
- 242년 (정시 : 政始 3년) 궁구서안평(宮寇西安平)
㉢ 위서(魏書 : 북사)
- 黃金出自夫餘珂則涉羅所産今夫餘爲勿古所逐涉羅百濟所幷
- 황금출자부여가칙섭라소산금부여위물고소축섭라백제소병
㉣ 송서(宋書 : 南齊西 : 남제서)
- 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驪王
- 영평이주제군사정동대장군고구려왕
㉤ 양서(梁書)
- 寶立以句驪王安爲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
- 보립이구려왕안위평주목봉요동대방이국왕
㉥ 구당서(舊唐書)
- 당과 고구리의 전투지명 후황성, 은성, 건안, 안시, 박작성, 신성(后黃城, 銀城, 建安, 安市,泊灼城, 新城)
㉦옛 군(郡)의 거리 측정 기록
- 동평군 수장현(東平郡壽張縣 : 치우천자능)과 산양군거야현(山陽郡鉅野縣 : 치우 천자의 부인 견비능 : 蚩尤肩 능)은 모두 산동성에 있으며 거리는 약 80KM이내로 본다.
-서초동 퍼옴-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 권력, 모럴해저드... (0) | 2009.04.03 |
---|---|
안중근 의사 순국 99주년을 맞이하면서... (0) | 2009.03.25 |
우면산의 봄: 대지의 열기,성미급한 봄꽃... (0) | 2009.03.19 |
고구려 실록:에필로그 2 (0) | 2009.03.15 |
고구려 실록:에필로그1 (0) | 2009.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