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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우면산 등산길 8

두바퀴인생 2009. 2. 22. 11:38

 

 

새벽 우면산 등산길 8

 

 

 

 

FILA 코리아 건물

 

0645분쯤 남부순환도로 근방에 있는 FILA 코리아 건물에 도착했다.

FILA 코리아란 어떤 회시 인가? 이 시간에 건물 전체가 거의 불의 켜저 있으며 오늘의 일과를 준비하는 이 회사는 잘은 모르나 업계를 선도하는 회사임에는 틀림없을 것으로 판단되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았다.

 

< 전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FILA는 1923년 이태리 비엘라의 FILA 가족에 의해 탄생되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FILA" 트레이드마크를 소유하고 있는 본사 FILA Sport S.P.A.사 역시 이태리 비엘라에 위치해 FILA가 정통 이태리 패션 브랜드임을 입증하고 있다.


작은 가족의 가내수공업으로 시작된 FILA 제품은 현재 전세계 50여개국 9천여개의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스포츠 의류로서의 FILA 헤리티지는 수년간 익히 알려져 왔다.


90년대에 들어서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시장에서의 신발 산업을 강화, 96년도 미국 시장 점유율 8%로 3위에 랭크될 정도로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현재 FILA 코리아는 우리나라 의류,화장품 등 유통 및 패션계를 선도하는 외국기업으로 제품의 순환주기가 짧고 새로운 제품에 대한 끓입없는 개발노력으로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면서 소비자 만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회사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아침일찍 일과를 준비하는 회사의 열정적인 노력과 직원들의 참여가 있어야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아직도 대부분의 경쟁업체들이 출근도 하지 못한 이 시간에 FILA 회사의 건물에는 훤하게 불이 켜저 있으니 이미 다른업체는 경쟁력이 없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출근하는 사람들을 수송하는 마을버스

 

0740분경. 극립국악원을 지나 남부순환도로를 건너 상문고 쪽으로 내려오는 길 주변 풍경을 담았다. 아침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과 버스, 주변 건물에 대한 잔상을 담고 평소 생각하지 못하던 내용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았다.

 

 마을버스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 일정지역 10km이내의 골목 곳곳을 다니는 마을버스에 관하여, 대다수 사람들은 열악하고 서비스가 낙후되었다는 인식을 가져왔다. 하지만 최근 관련 업계에 새바람이 불면서, 확연히 달라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천연가스(CNG) 차량으로 교체하여 도시환경개선에 도움을 주었고, 마을버스 종사자의 서비스도 향상되었다. 전반적인 개혁과 서비스 만족 실현 등 오랜 세월 기울인 노력의 결실을 맺고 있다. 변화의 축인 서울특별시마을버스운송사업조합의 배무섭 이사장과 함께 조합의 다양한 역할과 마을버스의 비전에 관한 청사진을 그려보았다.

   

1980년대 초부터 운행되기 시작한‘마을버스’는 일반버스가 운행하는 노선에서 거리가 먼 지역과 오르내리기 힘든 고지대, 일반버스가 다니지 않는 지역 등 이른바 일반버스 노선의 틈새 구역을 운행하는 버스다. 자기 주거지에 가장 가까운 곳에 기점이 있거나 주거지를 지나가기 때문에 다음에 타고 가야 할 일반버스나 지하철도와 연계하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에 서울특별시마을버스운송사업조합(이하, 서울마을버스조합)의 배무섭 이사장은“서울시내 120개 업체(1,310여대)가 1일 기준, 약 100만 명 이상을 수송하고 있다”며“마을버스는 지역을 운행하는 노선으로서, 지역주민들의 애환을 함께하는 대중교통수단임”을 강조했다. 주민들의 마당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마을버스는 타 교통수단에 비하여 300원이나 저렴한 요금으로, 주부와 노인, 학생, 근로청소년들의 이용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운행특성상 중대형 차량을 운행하면서, 1일 대당 850명의 영세교통약자를 수송하는 중추적 지역 교통의 총아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마을버스 사장들의 지역시설 방문 및 교통애로사항 해소로 이어진다. 수시로 지역 내 불우노인과 불우시설 등을 방문하여, 선행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영세업체들이지만 지역주민의 수송사명수행에만 국한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일하려는 사업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전한 배무섭 이사장은“운수업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을 일부나마 사회에 환원하고자 성의껏 모아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서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관할자치구청 및 동사무소와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지역사회의 교통애로사항을 수시로 수렴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하는 등 지역사회 교통난 해소에도 공헌하는바가 크다.

 

마을버스가 긍정적 변화를 시도하며 모범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 정책에 맞춰 보호자를 동반한 유아 세 명에 대한 무임승차를 실시하는 한편, CCTV설치로 안전사고 예방에도 앞장서고 있다. 자체 점검도 더욱 강화해 차량을 청결히 하고, 운행관리 실태를 파악하는 등 승차여건 개선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다.

 

자체 환경점검 강화로 차량과 운행관리 개선

차량의 청결하고 안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서울시마을버스운송사업자 일동은 조기 대폐차 실시로 청결한 차량을 운행하고 있다. 천연가스(CNG)차량으로의 대체로 대기질 개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현재 50% 수준에 개량을 마친 상태다.“승객에게 청결하고 안전한 차량제공을 위하여 새로운 차종으로 개선하고 있다”고 밝힌 배무섭 이사장은 ▶열악한 차고지 환경과 정류장 시설 개선 ▶차량에 CCTV 설치 운영 ▶환경관리실태 집중점검으로 교통 환경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 있었다.“지금까지 시내버스 위주의 공영차고지 배정 때문에 마을버스는 상대적으로 완전한 차고지 확보에 난관을 겪어왔다”고 토로한 배 이사장은“종전에는 뒷골목과 도로변 등에 불법주차가 예사였으나, 현재는 각종 주차시설 등을 최대한 활용하여 주차하는 합법적 관행이 싹트고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서울시의 배려로 공영차고지 입주 등의 시책개선이 점진적으로 추진되고 있어, 향후 차고지 확보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류장 표지판의 통일되고 일관성 있는 유지관리와 도시미관 등을 고려한 관리사업체를 지정해 운영하고 있는 서울마을버스조합은 지자체와 긴밀한 협력 하에 정류장 관리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마을버스 전체 차량에 CCTV를 설치한 이후, 차내 절도사고와 승객안전사고 예방은 물론 보험료 절감과 운전자 근무태도가 개선되는 쾌거를 이루었다.“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서울마을버스조합, 지부장 및 구청직원 합동으로 마을버스 사업체 운영 실태와 차량관리, 종사원관리 등 집중점검을 실시하고 있다”며, 배무섭 이사장은“점검결과 불량업체는 시정기회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시정이 안 될 경우엔 조합에서 관할 관청에 처분을 요구하고 있으며, 조합상벌위원회에 징계회부되기도 한다. 물론 우수업체에 대하여는 공로패를 수여하고, 각종 사업수행 시 우대조치를 취하고 있다. 각 사업장마다 강력한 법적기준에 따라 시설장비 등을 개선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워크숍 통해 사업자의 마인드 전환 강조

 

 “공익사업인 마을버스의 건전한 성장발전을 통해, 국가시책에 적극 협력하면서 이용시민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편리하고 안전한 시민의 발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친절․봉사․안전운행으로 시민에게 다가서다

2009년 현재 마을버스 업계의 경영압박요인은 ▲차량가격 등 물가상승 ▲2010년부터 시작되는 복수노조 ▲마을버스 노선 및 업권확보 등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적극적인 추진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 배무섭 이사장은 서울마을버스조합의 기능 제고를 위해 ▷신속한 정보전달 및 불편사항 해소 ▷마을버스사업자들의 사명감과 자부심 고취 ▷마을버스 운송사업의 활성화를 위한 제반규제 해소 ▷환경관리실태 점검실시 대행 ▷조합사옥 확보추진을 중점적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

 

 

 

CITYbank 전경

 

CITYbank는 1967년 2월 3일 창립되었는데, 전신인 First National City Bank(FNCB)로부터 주)씨티은행이 청계천에 서울지점을 개설하면서 태어났다. 2004년 11월 한미은행과 씨티은행이 통합되면서 갈등이 발생되기 사작하였다. 한미은행은 1983년 3월 16일 창립된 은행으로 씨티은행과 통합되면서 카드대출,예금,보험,개인/기업뱅킹을 취급하는 금융업으로 하영구 씨가 책임자로 종업원은 6,000여 명에 달하는 굴지의 은행이다.

 

오늘 아침 뉴스(2009.2.22)를 보면,

< CITYbank는 이번 주(2.23∼27) 뉴욕증시는 일부 부실은행에 대한 국유화 논란이 지속될 것으로 보여 이런 논란의 향배에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 백악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씨티은행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부실채권 누적으로 인해 결국 국유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뉴욕증시에서 씨티그룹의 주가가 18년래 최저치인 주당 1.95달러로 떨어졌고 BOA도 사상 최저치인 3.79달러까지 급락한 것은 바로 이들에 대한 국유화 우려감이 그만큼 확산 돼 있다는 반증이다.

이들 은행이 부실채권 증가와 적자 확대로 인해 도저히 독자적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달하면 정부는 자금 투입 대신 우선주 등의 매입 형태로 국유화할 것이고, 이럴 경우 기존 주주들의 주식은 감자를 통해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2005년 당시 뉴스를 검색해 보았다.

 

< 한국씨티은행에는 아직도 한미은행 노조가 있다. 지난해 9월 씨티뱅크 서울지점과 한미은행이 통합하면서 한국씨티은행으로 이름이 바뀐 뒤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그런데도 노조는 아직 한미은행이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씨티에 대한 노조의 거부감이 얼마나 큰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씨티은행은 지난 17일, 올해 2반기 실적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이 은행의 2반기 당기순이익은 1236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3.1%나 늘어났다. 총 자산은 49조3천억원으로 19.5% 늘어났고 대출금과 예수금도 각각 2.6%와 15.6%씩 늘어났다. 하영구 행장은 보도자료에서 "통합작업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면서 "실적에 대해 만족한다"고 밝혔다. 몇몇 신문은 이날 은행이 낸 자료를 그대로 받아쓰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날 노조의 발표였다. 노조는 은행이 지난해 통합 전 한미은행의 실적을 올해 통합 은행의 실적과 비교해 실적이 크게 늘어난 것처럼 언론을 속였다고 주장했다. 노조의 계산에 따라 지난해 한미은행과 씨티뱅크 서울지점의 실적을 합산해 비교하면 이 은행의 올해 2분기 당기순이익은 113.1%가 아니라 19.3% 늘어나는데 그쳤다. 대출금과 예수금은 늘어나는 게 아니라 각각 -12.6%와 -9.8%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노조 박찬근 위원장은 "마치 대단한 실적을 거둔 것처럼 과대포장했지만 사실은 다른 기준을 적용해 실적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발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위원장은 "특히 대출금과 예수금은 과거 씨티뱅크 서울지점의 자산을 합산한 것일뿐 실제 통합은행의 자산 규모는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물론 한국씨티은행은 지난해 실적이 한미은행만의 실적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제출하는 실적 공시에는 굳이 통합 은행의 실적을 합산해 계산할 필요가 없다. 해석하기 나름일뿐 의도적으로 실적을 부풀렸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다만 은행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안 좋은 실적을 잘 포장해서 발표하고 싶었을 것이고 노조는 이를 그냥 두고 보지 못했던 것이다.

 

궁금한 것은 이런 갈등의 배경이다. 오죽하면 노조가 나서서 회사의 실적을 깎아내리는 것일까. 심지어 회사의 부실을 파헤치거나 비리를 들춰내는데도 노조가 앞장서고 있다. 이용하 노조 부위원장은 "이런 식이라면 은행이 수익을 내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말할 정도다. 태업에 이어 파업까지 강행하겠다는 태도다. 도대체 노조가 이렇게 격렬하게 반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달 17일, 노조는 부동산담보대출 관련 사기혐의로 은행을 검찰에 고발했다. 대주주인 씨티그룹에 1조7천억원 가량 신용공여가 나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노조다. 은행법은 자기자본의 25% 이상을 모은행에 신용공여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7천억원 가까이 초과한 상태다. 노조의 주장에 따르면 씨티그룹의 한미은행 인수자금 4조원 가운데 3조7천억원 이상이 씨티그룹 계열사들에게 다시 빠져나갔다.

 

갈등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불평등한 인사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4월 승진인사에서는 모두 159명이 승진했는데 한미은행 출신이 141명, 씨티뱅크 출신이 118명으로 숫자는 거의 비슷했다. 문제는 전체 직원 수가 한미은행은 2836명, 씨티뱅크은 847명으로 한미은행이 세배 이상 많다는데 있다. 승진 인사가 씨티뱅크 출신에 몰리면서 한미은행 출신 직원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이번 승진의 결과 전체 부서장의 58.2%를 씨티뱅크 출신이 차지하게 됐다.

 

인사 불평등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욱 심각하다. 한미은행 출신 5명의 부행장 가운데 두명은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지만 나머지 세명은 모두 부행장보로 격하됐다. 그 자리는 씨티그룹에서 온 외국인들이 채웠다. 현재 상근감사위원을 제외한 7명의 부행장이 모두 외국인이다. 하영구 행장 역시 씨티뱅크 출신이다. 결국 부행장보 이상 간부 21명 가운데 한미은행 출신은 3명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다 달라진 근무환경도 반발을 불러왔다. 노조가 반발하는 것은 단순히 인사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씨티은행은 통합 이후 씨티그룹의 지침을 따라 이른바 매트릭스 시스템이라는 조직체계를 도입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사업부를 세분화하고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데 있다. 각각의 사업부는 소은행이라고 불릴만큼 완벽하게 독립돼 있다.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부서가 59개에서 167개로 늘어났고 부서끼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만큼 직원들의 업무 강도도 높아졌다.

 

노조가 지난달 한국갤럽에 의뢰, 한미은행 출신 직원 14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직원의 63.1%가 한국씨티은행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통합 후 한국씨티은행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16.8점, 조직 개편과 인력재배치 만족도는 12.8점으로 나타났다. 이직 및 퇴직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66.3%가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노조가 반발하는 것은 단순히 인사문제 때문은 아니다. 한국씨티은행은 통합이후 지금까지 세차례에 걸쳐 연 4%가 넘는 파격적인 금리의 특판 예금상품을 판매했다. 이 정도면 예대마진이 거의 남지 않게 된다. 노조의 주장에 따르면 이 은행은 이렇게 끌어들인 예금 고객들을 선취 수수료를 받는 투자상품으로 유인해 이익을 남기고 있다. 이를테면 투자상품으로 전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만기 이자율을 적용하고 중도 해지를 권유하는 방식이다. 이자는 높게 지급하지만 한꺼번에 1.5% 이상의 선취 수수료가 들어온다.

 

이자 수익보다는 비이자 수익에 집중하는 전략인 셈인데 문제는 은행이 이익을 내는만큼 고객들 손실이 커진다는데 있다. 사실 고객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금리를 포기하면서 굳이 예금상품을 위험한 투자상품으로 전환할 이유가 없다. 이런 고객들을 유인하려면 결국 지점에서 영업직원이 거짓말을 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은행은 선취 수수료를 챙길 뿐이고 모든 부담은 영업직원들의 몫으로 남는다.

 

노조는 씨티그룹이 미국 본사의 업무관행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를테면 거래정보가 없는 비고객에게는 신분증 확인 뿐만 아니라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 등을 적도록 하거나 거래금액이 500만원을 넘을 때는 지점장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국내 현실과 맞지 않는 업무관행이 많다. 기업 대출의 경우에도 자금세탁 위험도나 조세회피지역 신탁여부를 조사하도록 하는 등 국내 은행에 없는 절차가 많다.

 

직원 교육에서는 "마약상 또는 마피아와 거래하거나 돈 세탁을 하지 말 것", "쿠바 등 적대국가의 금융거래는 불법"이라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업무지침이 내려오기도 했다. 미국에서 쓰던 업무지침을 그대로 번역해다 쓸만큼 이 은행이 국내 토착화에 실패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일부 전산업무를 씨티그룹의 관행에 따라 수기업무로 전환하기도 했다. 진창근 노조 홍보국장은 "통합 이후에는 사무용 기기까지도 모두 미국 제품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진 국장은 씨티그룹을 "점령군 같다"고 표현했다.

 

노조는 독립경영을 요구하고 있지만 100%에 가까운 지분구조에서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핵심은 결국 토착화다. 은행은 노조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아직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은행이라는 수사가 무색하게 실적도 형편없다. 박선오 한국씨티은행 홍보부장은 "여러가지로 해법을 고민하고 있다"면서 "갈등 해소와 통합의 시너지 창출을 위해 외부 기관에 컨설팅을 의뢰해둔 상태"라고 밝혔다. >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방초교회와 어린이 집

 

방초교회는 1970년 6월 9일 영등포구 신길3동 김돈수집에서 교회교역자 8명이 모여 가정교회로 시작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시온교회로 출발하였다. 아마 천막교회로 시작된 듯하다.

 

1978년 동작구 흑석2동에서 10평 남짓한 곳에서 진행하다가 30평으로 넓혔다. 1981년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평북노회에 가입하여 시온교회로 명명되었다. 통상 교회는 천막에서 출발하여 외적 성장을 하면서 규모가 커지면 특정 교단에 가입하게 되고 집단화되면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1981년 6월 윤모 권사가 서초동 대지 200평을 기증하게 되고 교회를 착공하게 된다. 물론 건축헌금이 지속적으로 유입된 결과이며 고액 기증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1983년에는 시온교회의 명칭을 버리고 방초교회로 변경하고 독립화하였다. 1988년에는 기증된 서초동 땅에서 교회 기공예배가 열리고 착공준비 및 허가를 받아낸다. 1989년에는 입당예배를 올리고 개관하게 되며 2002년에는 93평 연건평 330평의 교육관을 매입하고 방초유아원도 개관하였다. 2004년에는 교육복지관 1층에 방초어린이집을 개원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현 담임목사는 김기현목사이다.

 

교계도 성장위주의 교세확장에만 주력할게 아니라 이제는 말씀위주의 성장을 도모하지 않으면 권력화하고 세습화하며 부패하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력화하고 집단화된 종교는 권력에 편승하거나 교세를 믿고 정치권에 대항하게 되고 성경말씀을 따르는게 아니라 이중적인 행태로 변질되고 모든 논리를 자신들이 편하게 해석한 교리로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전통종교는 사라지고 바다를 건너온  쫒겨나고 버림받은 종교에 심취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과 그렇게 만든 우리나라의 역사가 안타까울 뿐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고 약속의 땅에 성지순례를 하려는 미련한 국민들이기에 나라의 미래는 남의 손에 내던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유대민족은 우리와는 다르다.

 

전세계에서 지금까지 각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의 30% 이상은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조상들의 역사와 위대한 업적을 '토라'를 통해서 어린시절부터 학습하고 매일 부모에게 5가지 이상은 반드시 질문하게 만들고 그들 조상과 문화, 전통을 반드시 숙지하게 만들며 유대교 성경인 '토라'를 암송하고 배우며 다른 어느 민족보다 철저하게 민족의 역사,문화,전통,혼을 가르치고 있다.

 

기원 후 70년. '마사다'요새에서 마지막까지 로마군에 저항하다 전원 옥쇄한 유대민족은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 땅을 쫒겨나면서 '디아포라스'가 시작되었고 전 세계 각지에서 버림받고 멸시받으면서 '토라'에 집단수용되어 모여 살았고, '시오니즘'으로 뭉쳐 20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자신들의 땅인 약속의 땅에 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아브라함 이래 '바빌론 유수'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다 이집트로 들어가게 된 유대민족은 민족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이집트 왕의 미움으로 노예로 전락하게 되고 모세에 의해 출애급기 역사가 전개 되었다.

 

시나이 반도에서 방황하기를 40년, 약속의 땅이 보이는 언덕에서 모세는 숨을 거둔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신격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무덤을 아무도 모르게 하였다. 하나님외에  또 다른 신은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후 로마의 폭정하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에게 어느날 예수가 나타났다. 예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숭배되면서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이단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게 된다. 그 후 가나안 땅에서 쫒겨난 유대민족은 로마의 탄압하에 세계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전유럽지역으로 급속하게 교세가 확장되고, 성지회복을 빌미로 십자군전쟁,종교전쟁,백년전쟁 등을 벌이며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암흑기가 찿아온다. 그리스도교가 교황에 의해 세계를 지배하면서 권력을 휘두르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이단으로 인정되는  유대교를 포함한 타종교에 대해 화형 등 무자비한 탄압이 지속되었다. 모든 것을 종교적인 논리로 해석하여 처리하였으며 창세기를 부정하는 과학은 탄압되고 문화의 발전은 오직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졌다.

 

 

 

부동산 간판들

 

국정홍보처 부동산 관련 브리핑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는 1967년 이후 2007년까지 40년 동안 4차례 땅값과 집값이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부동산 경기 순환주기’가 있었으며, 59건의 주요 부동산 정책과 조치를 내놓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홍보처의 국정브리핑이 정부 부동산 정책의 40년 역사를 정리하는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기획을 위해 각종 정부 기록물과 학계 보고서 등을 종합한 결과, 부동산 정책 가운데 투기 억제 및 가격안정을 위한 정책이 31건이었으며 부동산 규제완화 등을 통한 경기활성화대책이 17건, 임대주택 확대 등 서민 주거복지 정책이 11건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정책은 1967년 11월29일 발표된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이에 근거해 서울과 부산에서는 부동산 양도 때 무조건 차액의 50%를 ‘부동산 투기 억제세’로 매겼다.

당시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로 촉발된 강남 말죽거리(현 양재역 부근)의 땅 투기열풍은 1966년 초 평당 200~400원이던 땅 값을 1968년 평당 6000원선까지 끌어올렸다. 정부는 자고일어나면 오르는 땅값을 잠재우기 위해 대책마련에 나섰고 민간 연구용역 끝에 ‘부동산투기 억제에 관한 특별조치세법’을 제정, 이듬해인 1968년 1월부터 시행했다.

조사 결과 토지 가격이 가장 많이 상승한 시기는 부동산 경기 1차 순환기인 1978년으로 전년대비 49.0%나 급등, 박정희 대통령이 소위 8.8조치로 불리는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주택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시기는 1987년부터 시작된 3차 순환기의 최고 정점인 1990년으로 전년대비 21.0%나 집값이 급등하는 투기열풍이 일어났다.

당시 전세 값 파동은 1987년 국제수지 흑자와 88올림픽 이후 통화량 급증에 따른 물가오름세 심리 확산에 따른 것으로, 정부는 1988년 ‘8.10부동산 종합대책’과 신도시 건설 구상을 담은 1989년 ‘긴급부동산 투기억제대책(2.4)에 이어 1990년에만 3차례 투기억제 및 물가안정을 위한 특별대책을 내놓았다. 특히 당시 전세가격이 16.8%나 치솟는 전셋값 폭등 속에서 생활고를 비관한 10여 명의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가 보도되기도 했다.

집값이 가장 안정됐던 시기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로 5년 연속 하락했다. 외환위기로 1998년 12.4%나 폭락했던 집값은 정부의 대대적인 건설경기 부양과 부동산 규제 철폐로 1999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서 2003년까지 5년 연속 최장기간 상승세를 지속했다. 특히 월드컵이 열린 2002년에는 집값이 16.4%나 뛰어 2000년대 들어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으며 땅값도 9.0%나 급등했다.

2003년 6건의 잇따른 부동산 가격 안정대책 및 서민 주거복지 정책 발표의 영향으로 2004년 잠시 주춤하던 집값은 2005년부터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지난해 11.6% 상승률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책은 주기적인 가격상승과 하락에 대응하여 대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 긴급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고 이에 따른 문제점이 발생하면 후속조치를 시행해 가격 안정을 찾는 형태로 유형화 돼 온 것으로 분석됐다.

근본적이기보다는 임기응변적 처방은 결국 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투기 억제 및 부동산 가격 안정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0가지 부동산정책 주제별로 정책담당자 증언, 에피소드, 숨겨진 사연 담아

국정브리핑과 주택도시연구원, 국토연구원, 금융연구원이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시리즈는 전-현직 부동산 정책 담당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각종 정부 기록물, 국회 속기록, 학계 연구 보고서와 간행물 등을 토대로, 각 부동산 정책의 시대 상황과 내용, 정책 탄생의 갈등과 에피소드, 주요 사건, 시장 반응과 이후 영향 등을 상세하게 분석했다.

특히 강남 불패 신화의 근원과 투기와의 숨바꼭질의 역사, 신도시 건설의 숨은 이야기, 부동산 세제개편에 얽힌 저항과 좌절의 역사 등 20여 가지 주제별로 우리 부동산 시장을 둘러싼 만성화된 투기 메커니즘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면서 정부의 정책적 노력, 숨은 이야기, 정책적 유산 등을 전한다.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이밖에도 강남 개발이 2000년대까지 지속되며 경부고속도로 축선을 따라 남쪽으로만 도시 개발이 진행되는 사연, 70년대 투기부인에서부터 '빨간바지 복부인'을 거쳐 2000년대 '떳다방'까지 투기의 변화와 투기세력과의 숨바꼭질 역사, 부동산 양도소득세의 후퇴 과정, 오락가락한 아파트 분양가규제의 숨은 딜레마 등 각 정책의 시대별 변화를 정책 담당자들의 목소리와 정부기록, 언론보도 등을 통해 사실적으로 전달할 계획이다.

또 분당과 일산 판교 신도시 건설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불임시술자에게 특혜를 주던 청약제도가 다자녀 가정에 혜택을 주는 제도로 바뀌기까지의 과정, 공인중개사 시험의 역사, 강남8학군 특목고 등 교육과 집값의 방정식, 종합부동산세를 둘러싼 정부 내 파워게임, 부동산실명제와 실거래가 등기제가 탄생하였으며,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전세 제도가 우리나라에만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

 

그래서 부동산이 재테크의 최고 수단으로 부상하자 매년 수 십만 명의 공인중게사가 탄생되고 기획부동산이 활개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허비하고 피해를 보고 있다.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은 교육정책과 더불어 영원히 합리적인 방안을 찿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정책들이 조석으로 바뀌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신의 조화인지도 모르겠다. 주먹구구식으로, 임기응변식으로 정확한 예측도 하지 못하고 정책을 수립하기를 수 십년, 그러는 동안 무능한 정책수립자들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국민들 뿐이었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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