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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새벽의 우면산 등산길6

두바퀴인생 2009. 2. 19. 17:05

 

 

새벽의 우면산 등산길 6

 

 

 

 

 

 

국립국악원

 

 국악원의역사

 

 

1950

1950년 01월 19일:

 

 

국립국악원 직제 공포(대통령령 제 271호),
총 제 10조 부칙으로 문교부장관 감독하에 국립국악원을 둔다.

 

1951년 04월 09일: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 이주환 발령

 

1951년 04월 10일:

국립국악원 개원

1954년 10월 01일:

 

 

국립국악원 부설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 설치


이주환 국립국악원장이 초대소장 겸직

1955년 04월 01일: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개소

제 1기 학생 30명 공모 선발 입소

1958년 02월 21일:

국악사양성소의 수업 연한을 3년에서 6년으로 한다.

1960

 

1961년 02월 11일:

 

 

문교부장관으로부터 동계 상급학교(대학)입학 학력인정

 

1961년 03월 18일:

 

국악사양성소 제 1기(17명) 졸업

 

1961년 10월 02일:

 

문교부에서 공보부로 소속 이관

 

1962년 01월 05일:

 

악기진열실 및 연주실 증축 신장 개관

 

1967년 12월 09일:

 

종로구 운니동에서 장충동 청사(현 국립중앙극장 별관)로 이전

 

1968년 07월 24일: 공보부에서 문화공보부로 소속 이관

1970

 

 

 

1972년 07월 11일:

 

국악사양성소가 국악고등학교로 승격과 동시에 문교부로 이관

 

1973년 08월 25일:

 

장충동 청사(현 국립중앙극장 별관)에서 극장으로 이전

1980

 

1987년 11월 09일:

 

국립국악원에 관리과, 장악과, 국악진흥과 및 국악연구실을 둠

 

1987년 12월 28일: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서초동 현 청사로 이전

 

1988년 02월 15일:

 

서초동 청사<소극장(현 우면당), 사무연습동> 개관

1990

 

 

1990년 01월 03일:

 

문화공보부에서 문화부로 소속 이관

 

1991년 12월 17일:

 

국립국악원 소속하에 국립민속국악원 설립

 

1992년 03월 20일:

 

남원 노암동에서 국립민속국악원(초대원장 박재윤) 개원

 

1993년 03월 06일:

 

문화부에서 문화체육부로 소속 이관

 

1994년 11월 30일:

 

교육연구동 준공

 

1995년 02월 23일:

 

국악박물관 개관

 

1996년 02월 05일:

 

전속국악연주단의 조직을 정악단, 민속단, 무용단으로 함

 

1996년 10월 22일:

 

예악당 개관(서초동 현 청사 전관 개관)

 

1997년 03월 20일:

 

무대과 신설

 

1997년 05월 30일:

 

국립민속국악원 어현동 신축청사 개관

2000

 

2001년 03월 02일:

 

국악FM방송국 개국(FM99.1 MHz)

 

2001년 04월 10일:

 

국립국악원 개원 50주년 기념식

 

2004년 07월 07일:

 

국립남도국악원 개원(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2008년 10월 28일:

 

국립부산국악원 개원(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

 

 

 

 

국립국악원 박물관 전경

 

국립국악원은 박물관 뒷편으로 새벽 우면산이 북향으로 국립국악원을 감싸고 있으며 한강과 남산, 북악산을 바라보면서 민족의 정기를 이어오고 있는 문화와 전통의 명소이다. 일제점령하에서는 왜색 문화가 민족문화를 짖밟고 이땅에서 활개를 치다, 해방후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점령군으로 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의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자 우리 국악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게 되었다. 암울한 일제치하에서는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  전통과 관련된 것은 대부분의 금지되었으며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된 이후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국악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왔다. 느린 속도와 지루한 음률은 듣는이로 하여금 외면하게 하였으며 사람들이 외면하니 성장이 있을 수가 없었고 전통의 맥도 거의 끓어지고 말았다.

 

남의 것을 무분별하게 잘 받아들이는 민족의 특성인지는 몰라도 강자에게 빨리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5천년 역사의 굴레 때문일까? 

 

 

 

 

국립국악원 예악당 전경

 

고구려 말년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은 당나라로 도망가서 당나라 군대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의 조국 고구려 멸망에 앞장섰던 것이나, 글안족의 침공에  항복하고 그들의 앞잡이로 글안군 선두에서 안내하던 사람들, 몽고군의 침공에 몽고군의 선봉에서 길을 안내하던 사람들, 임진왜란시 왜군의 앞잡이로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던 사람들, 청나라 군대의 앞잡이로 남한산성을 공략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 일제치하에서 완장차고 앞장서서 민족지도자나 독립투사를 잡아 죽이던 일제 앞잡이들, 한국전쟁시 북한군의 앞잡이로 선두에서 안내하던 사람들, 미군정하에서 미군을 등에 업고 설치던 정치꾼들... 그들은 당대에는 잘먹고 잘 살았는지는 몰라도 역사는 그들을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될 것이라지만 그들을 다시 고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던 정치꾼들로 인해 아직도 민족반역자 처벌법은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굴레로 인해 사람들은 각자 죽지않고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민족과 조국을 져버린 그들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고대 로마시대 로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로마를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사람들이기에 로마는 강대국이 될 수 있었고 2천 년 가까운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면산에서 국립국악원으로 내려가는 길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로마가 카르타고와 1차 포에니 전쟁을 치루는 동안 로마군이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접경지역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로마군은 겨울이면 전투를 중지하고 휴전을 하고 다음해 봄이되면 다시 전투를 재개했다. 최고지도자인 집정관은 매년 두 명씩 선출되고 하루씩 교대로 업무 결재를 하였으며 임기는 1년으로 다음 집정관이 선출되면 인계인수했다. 그리고 전쟁 발발시에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 전투를 지휘했다. 적은 규모의 전쟁터는 한 사람의 집정관이 나가지만 적이 강하거나 규모가 크면 두 사람이 같이 나갔으며 하루씩 교대로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러면 그의 임무성공 정도에 따라 귀국시에는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로 잡은 적장들을 대리고 로마로 개선식도 하였으며 다음번 선거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해 집정관으로 성공적인 임무를 수행했다면 다음번 집정관 당선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집정관들은 임무가 종료되는 겨울이 오기전 공명심에 앞서 무리하게 작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카르타고군과 무리한 작전을 전개하던 로마 집정관이 그만 카르타고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카르타고는 포로가 된 로마 집정관을 대리고 로마로 가서 원로원에서 카르타고가 원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도록  강요했다. 집정관은 그러겠다고 하고 연단에 올라가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전 원로원들은 포로가 된 집정관의 연설을 듣기위해 숨 죽이고 긴장하여 그를 쳐다보면서 기다렸다. 그 집정관은 연설을 시작하였는데 "로마는 절대로 카르타고의 요구를 들어주면 안된다"는 내용으로 카르타고 요구와는 반대로 연설했다. "자신은 죽어도 관계 없으니 카르타고와는 절대 협상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카르타고에서 온 사신들이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들은 다시 그 집정관을 대리고 카르타고로 돌아와서 둥글게 만든 대나무바구니에 넣고 코끼리가 돌아가면서 축구하듯이 발로 차도록 하여 죽였다. 그의 장렬한 죽음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전 로마시민과 원로원은 카르타고와는 절대로 협상은 없으며 끝까지 싸우자고 하였다. 그 후 로마는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카르타고 해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하게 되는데 전로마연합국에서 전함을 건조하고 병력을 훈련시키며 약한 해군력을 육군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까마귀'라는 사다리를 고안하여 배에 장착하여 근접하여 적함에 걸치면 중보병이 적함에 넘어가 전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전투를 하였다. 그래서 결국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게 되는데 이는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 집정관이 로마를 강대국으로 우뚝 서는데 초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뒷편 조경

 

우면산에는 소나무보다 참나무가 많다. 아카시아 나무도 많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전통을 대표하는 나무로 민족성을 잘 나타내는 나무라 할 수 있다. 참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는 청살모,다람쥐,까치ㅣ산비둘기들의 먹이가 되고 나무도 단단하여 쓰임새가 많다. 그러나 아카시아는 번식력이 강하여 어디서나 잘 자란다. 아카시아꽃 향기는 달콤하여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러나 아키시아 나무의 쓰임새는 별로다. 성장속도가 빨라 위로만 자라고 고목이 되면 뿌리가 견고하지 못해 잘 넘어진다. 소나무는 진한 진향기를 내품고 소나무 숲속을 지나가면 그윽한 진냄새가 향기롭다. 소나무는 토양에 관계없이 잘 자라서 예로부터 건축자재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또 사계절 푸른색으로 청청한 색깔과 자란 모양이 다양하여 관상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눈덮인 소나무의 독야청청한  모습은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의 신비 백인백경-김태수 '일출빛을 받은 금강노송'

 

소나무는 우리나라 역사와 같이 이땅에서 숨결을 같이해온 대표적인 토종나무로 적송,금강송,백송,해송 등이 주로 많다. 태백준령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양령지역에 품질좋은 소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많은 궁중 건물과 민간가옥에 많이  이 소나무를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민초들의  땔감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소나무는 한반도 사계절의 계절의 영향으로 재질이 단단하며 벌레 등 해충에도 강하고 송진냄새의 향기로움은 수백년을 갔다. 이조시대는 소나무 무단 벌채를 엄중하게 다스렸으며 일제 강점하 무차별 남벌로 전 국토가 벌거숭이가 되었다.뿌리가 깊어 바람에도 잘 넘어지지 않으며 흙이 없는 바위틈에서도 잘 자란다.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 씨앗을 내려도 잘자라는 이유는 뿌리에 곰팡이가 번식하여 양분을 공급하고 있으며 번식력 또한 강하다. 암수수술이 같은 나무에서 암수술은 윗쪽에 숫수술은 아랫쪽에 달리며 바람에 꽃가루를 날려 이웃나무의 암수술에 날아가 번식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솔방울이 영글어 지고 솔방울이 떨어져 바닥에서 씨앗을 토해낸다.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나무이며 민족과 같이 살아온 삶과 애환의 나무이다. 많은 동양화에 등장함은 물론 산수도에 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나무였다. 절개곧은 선비의 표상이었으며, 어떠한 고난도 견디내는 독야청청의 상징이었으며, 눈비 맞으며 고산준령 바위위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는 조선 유교사회의 상징적인 나무였다. 시골 마을마다 소나무가 있어 명절이나 봄날이면 그네타기,술레잡기,풍물놀이의 장소였으며, 남편이나 아들의 성공과 건강,무사귀가를 기원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농사철이면 농부들이 새참먹는 그늘진 시원한 장소로 사용되었고 어린 소년들이 소를 메어놓고 산에 나무를 하곤 하던 장소였다.

 

벌거숭이 민둥산이 60-70년대에 대대적인 사방공사로 우리 산하는 다시 푸른옷으로 옷을 입게 되었고 옛 모습을 다시 찿게 되었으나 솔입혹파리 등 해외에서 들어온 해충들이 번식하여 소나무 군락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금강산에서 몇년 전에 남북 방제팀이 같이 솔입혹파리 방제작업을 하였는데 이념과 사상을 떠나 이땅의 나무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땀을 흘린적이 있다. 곤충,동물들이 다시 번창하여 확산되고 있으며 갖가지 산나물, 버섯,야생화,다른 종류의 수목 등이 환경보존 단체들의 노력으로 다시 제 모습을 찿고는 있다.

 

 

 

 

내려가는 길 조경, 통나무 계단이 이채롭다.

 

 

이러한 소나무의 멋과 운치는 부자들의  정원에 조경업자들에 의해 도굴.운반되어 수 백만원에 거래되는 등 수난을 겪고 있으며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골짜기 마다 골프장,전원주택,레저타운,실버타운,리조트,콘도 등이 들어서면서 무차별 남벌되고 있다. 민족의 나무인 소나무가 사라지면 우리들의 역사나 민족혼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무분별한 개발론자들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운무 낀 깊은 계곡을 바라보며 갖은 풍진세파에도 수백년을 묵묵히 자리지켜온 소나무! 이나라 금수강산을 푸르름으로 수 놓고 자연의 무궁무진한 혜택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려는데도 사람들은 오로지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차 권력과 재물을 탐닉하고 부귀영화만을 생각하며 베품과 봉사는 커녕 냄새나는 재물을 끌어앉고 천년만년 살거라고 생각하는가? 삭풍이 몰아쳐도 자리탓 하지 않고 바위위에 씨앗이 떨어져도 불평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뿌리 내려 그 멋있는 자태와 그 숭고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이 조상탓,부모탓,지역탓,학벌탓,인물탓을 하던가? 깊은 산 절벽위라고 삶을 포기하였던가? 오로지 군자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처럼 먼 산하가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고 있지 않는가!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최선을 다해서 오로지 나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가! 비가 내리면 적절히 조절하고, 햇빛을 아래나무에도 조심스럽게 나누어 주고, 바위와 대화하며, 야생화를 칭찬하고, 산새들을 부르며, 송이버섯을 키워내고, 스스로 쓰러져 고목이 되어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거름이 될때까지 소나무는 자리메김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는가!

 

 

 

언덕에서 바라 본 새벽 서울 전경

 

우리들은 어떤가? 자신의 욕망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가? 부하를 천대하고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던가? 돈 있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각종 모임에 나가서 거드럼 피우지 않았던가? 부동산 투기에 열심히 뛰어 다니지 않았던가? 남을 속여 돈을 가로채고 사기도 치지는 않았던가? 윗사람을 찿아가서 승진을 부탁하고 거래를 위해서 술집에서 방탕하지 않았던가? 겉으로는 군자인척 뒷구멍으로 얼마나 못된 짖을 많이 했던가? 재산문제로 부모형제와 다투지 않았던가? 자신의 처지를 못난 부모탓으로 돌리지 않았던가? 지금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허망한 것잊지 아는가? 당신으로 인해 피해보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돈을 바라고 남을 유혹하지는 않았는가? 권태를 빙자하여 탈선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가?

 

자녀가 해외연수 보내달라 때쓰면 부모는 등골빠지는 줄 알면서도 남들이 보내니까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을 해외연수 보내지만 그 자녀들은 어떤가? 해외연수간 그들은 공부는 커녕 주지육림에 빠져 탈선과 방종을 일삼다가 현지 처녀들을 울리고 한국인의 오점을 남기고 돌아오지 않는가! 나의 취업 어려움이 부모나 학벌문제라며 부모의 가난과 좋은 대학 못나온 자신의 탓은 가난한 부모님 탓으로 돌리며 게임에나 몰두하고 있지 않는가! 시대의 흐름과 미래는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시대의 변화도,미래사회도 예견하지 못하고 오로지 편하고 멋있고, 돈많이 주고, 적절히 근무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직장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군대는 손해보고 불필요하다는 생각에 병역면제나 특혜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당신이 그렇게 살아 왔기에 자식이 군대가서 자살해 죽어도 군대탓으로 돌리지 않았던가? 부도덕한 부모들이 그들이 가정에서 어떻게 자식교육을 시켰는가를 한번쯤 생각해 보야 하지 않는가! 다른 자식들은 모두 잘 견뎌내고 있는데 당신의 자식은 왜 그토록 심약하고 이해심이 없으며 인내심과 참을성이 없는가?

 

 

 

 

언덕위에서 바라 본 전경

 

얼마전 설날이었다. 명절 때만 되면 많은 가족들이 이혼과 가족싸움,부부싸움으로 얼룩진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면서 허례허식이 가득찬 유교문화의 악습이 우리 마음에 차지하고 있는 엄청난 피해를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체면과 허상만 보면서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부디 소나무 처럼만 살아라!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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