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고구려 실록: 제22대 안장왕 신록 본문
고구려 실록: 제22대 안장왕 실록
(재위: 서기 519년 모월-531년 5월, 약12년)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안장왕의 치세와 국제정세의 변화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흥안이다.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태어난 년도도 알 수 없다. 서기 498년(문자명왕 7년) 7월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19년 문자명왕이 죽자 고구려 제22대 왕에 올랐다.
문자명왕이 즉위할 당시 중국은 남쪽엔 양 왕조, 북쪽엔 위 왕조가 서로 세력을 다투며 대립하고 있었다.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이들 양국관계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 중립외교노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중립노선에 위는 불만이었는데, 위는 자신들이 먼저 생긴 국가일뿐만 아니라 지리상으로도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양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곤 하였다.
그러나 안장왕은 위의 이러한 요구가 부당하다며 수용하지 않았고, 관례대로 520년 정월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양나라도 그해 2월에 사신 강주성을 보내 안장왕에 의관, 칼, 패물을 바쳤다. 이에 위나라는 뱃길로 돌아가는 양나라 사신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위와 양은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고, 고구려는 그같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국익을 챙겼다. 당시 위는 왕실과 선비 귀족의 불화로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고, 양은 지속되는 농민봉기로 항상 내정이 불안한 상태였다. 때문에 이들 양국은 고구려와의 외교노력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고구려는 실리적 노선에 바탕을 둔 중립외교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외교적 안정은 광개토왕 이후 지속되던 백제의 압박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를 대신한 말갈과의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521년(무령왕 21년)에는 천재지변이 잇따랐다. 그해 5월에는 홍수로 많은 지역이 물에 잠기더니 8월에는 메뚜기 떼가 몰려와 그나마 남아있던 농적물마저 황페화시킸다. 이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이를 이기지 못한 9백여 호의 백성이 신라로 대거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듬해 10월에는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가호가 무너졌다.
이처럼 천재지변이 계속되자 무령왕은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을 염려하여 523년 2월부터 15세 이상되는 장정들을 대거 징발하여 쌍현성을 중수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졌고, 그런 가운데 격무에 시달린 무령왕은 그해 5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고구려는 이같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안장왕은 523년 8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대륙기지를 공격하였다. 안장왕은 문자명왕 때 잃은 하수(황하) 이북 지역을 되찿으려 하였고,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패수에서 백제 장군 지충이 이끄는 1만 대군에 막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듯 고구려의 예봉을 꺽은 백제의 성왕은 고구려의 재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525년에 신라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이에 법흥왕은 백제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여 사신을 교환했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는 501년 이후 단절됐던 동맹관계를 복구하였고, 삼국의 관계는 또 한 번 전기를 맞이한다.
이 무렵, 북위에서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지고 잇었다. 위 왕 탁발원굉 이후 위 조정은 한족 지주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비족과 한족의 결혼을 장려하고 선비의 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꾸는 등 한족화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선비 귀족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523년에는 하북성 일대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산동, 섬서, 감숙성 지역에서도 대규모 군사봉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군사봉기는 수년 동안 계속되어 서부 지역의 혼란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 같은 혼란으로 북위 왕실은 마침내 무너져, 532년 서위와 동위로 분리된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는 대륙기지를 확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고, 이를 눈치 챈 고구려는 529년 10월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대륙기지를 선제공격하였다. 안장왕은 자신이 직접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의 북변 요새인 혈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이에 백제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대륙군 3만을 전부 동원하여 고구려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양국 군사는 오곡벌판에서 대혈전을 벌였다.
결과는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백제는 무려 2천의 전사자와 수 천의 부상자를 내고 퇴각하였고, 고구려는 그 여세를 몰아 백제군을 궁지로 몰았다. 또한 한반도 쪽 전선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재현되었다. 고구려군이 아리수를 넘어 진군하였고, 백제군은 수성전을 펼치며 가까스로 버텼다.
![]() 고봉의 미녀와 안장왕의 전설이 서린 곳 |
두 나라의 전쟁은 2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백제군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 결과 대륙의 하수 이북 지역과 한반도의 차령산맥 이북 지역이 거의 고구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그동안 백제에 대한 강력한 압박정책을 주도하던 안장왕이 531년 5월에 숨을 거뒀던 것이다.
그 결과 백제는 대륙기지에서의 기반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백제 성왕은 538년 웅진성을 버리고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겨간다. 뿐만 아니라, '백제'라는 국호를 버리고 '남부여'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백제는 535년에 새롭게 일어난 동위의 침략을 받아 대륙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서초동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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