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실록:제23대 안원왕-제24대 양원왕 실록
(재위;서기 531년 5월-545년 3월, 13년 10개월)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안원왕의 복구노력
안원왕은 문자명왕의 차남이며, 안장왕의 아우로 이름은 보연이다. 안장왕은 아들을 낳지 못하여 보연을 자주 궁으로 불렀다. 보연은 키가 7척 5촌이나 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인품 또한 뛰어나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이런 까닭에 형인 안장왕은 그를 무척 총애했고, 결국 계승자로 삼기에 이른다. 그리고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죽자 보연은 고구려 제23대 왕에 올랐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왕 계보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안원왕이 즉위했을 때 중원의 최강국이던 북위는 내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은 528년에 호태후가 위 왕 탁발후를 살해하고 자신의 당질을 왕위에 앉히면서 시작됐다. 자신의 당질 원조를 왕으로 옹립한 호태후는 그때부터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권을 농단했다. 당시 선비의 귀족들은 탁발원굉에 의해 5세기 말부터 계속되던 왕실의 한족화정책에 반발하고 있던 터였는데, 호태후가 왕을 폐위하자 이를 기화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반란의 주모자는 글호족의 추장 이주영이었다. 호태후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기습적으로 장악하고 호태후를 사로잡았다. 또한 호태후가 옹립한 원조를 익사시키고 왕족과 신하 2천여 명을 살해했다. 이 때 살해된 귀족 가운데 대부분이 한족 관리였다.
정권을 장악한 이주영은 원자유를 왕으로 세우고 조정을 농단하였다. 하지만 원자유는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거부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이주영을 죽인다. 그러나 원자유는 이주영의 아들 이주조에 의해 다시 죽임을 당하고, 이주조는 종실 원공을 왕으로 세워 정권을 장악한다. 그런데 이 무렵 하북성에서 고환이 반란을 일으켜 이주조에 대항하였고, 결국 그는 이주조를 제거하고 종실 원수를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 이로써 고환은 이주조가 제거되자 새로운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왕으로 등극한 원수는 고환을 싫어한 나머지 낙양을 탈출하여 서쪽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우문태에게 의지한다. 이에 고환은 종실 원선견을 다시 왕으로 세웠고, 그 후에 업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무렵 서쪽 권력자 우문태는 자신을 찿아온 원수를 살해하고 원보거를 새 왕으로 옹립하여 장안에 도읍을 정한다. 그 결과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게 된다.
이들 두 나라 중 고구려에 먼저 손을 내민 쪽은 동위였다. 동위는 지리적으로 고구려에 가까울뿐 아니라 서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업도를 도성으로 삼은 534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고 화친을 제의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동위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이고 산동의 대륙백제에 대해 압력을 가해줄 것을 부탁했다.
백제가 대륙(산동성)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가 많으나, 가장 확실한 근거로는 <삼국사기 신라국본기>로 문무왕 하편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함형 원년(670년) 7월에 이르러 입조사 김흠순 등이 와서 경계선을 그으려 하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전부 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이 되지 아니하여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3.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다 실망하고 모두 말하기를 (이하생략)” (주 太山 = 泰山)
여기서 황하와 태산이라 함은 산동성에 있는 그 유명한 황하와 태산으로 이곳이 바로 백제의 옛 땅이라고 <삼국사기>는 밝히고 있다. 이 기록 하나만 봐도 백제는 확실히 산동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백제가 중국 대륙의 산동성에 있었다는 다른 근거로는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 백제의 옛 영토는 황하와 태산이라고 <삼국사기>에 엄연히 씌어있다. 황하와 태산이 한반도에 있는 강과 산인가? | |
백제의 8대 성씨로 본 백제의 위치?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 편과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편의 백제 조에 "나라 안에 8대 성씨가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했다.
중국의 성씨사전에는 부여(夫餘)씨와 복(福)씨 골(骨)씨 등도 백제의 8대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는 분명한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씨가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다음에야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 2000년도에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국(國)씨가 2,182명으로 성씨 순위 154위이며, 연(燕)씨는 3,549명으로 138위, 진(眞)씨는 1,579명으로 성씨 순위 164위, 묘(苗)씨는 61명으로 성씨 순위 258위 등이며, 나머지 사(沙)씨나 리(또는 협)씨, 그리고 해(解)씨나 목(木)씨는 단 한 명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멸망 당시 200여개의 성(城)이 있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로 되어 있다. 옛날은 지금과 같은 핵가족제가 아니고 대가족제도이므로 백제의 인구는 450만 ~ 550만 명 정도로 추산이 된다. 이중에 8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을 것이다. (참고로 구당서에는 호당 인구가 5.7명 ~ 7명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천삼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백제 8대 성씨의 후손이 7,300명 정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에 백제의 주 강역이었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하남성 일대에는 백제의 8대 성씨가 득실득실 엄청나게 살고 있다. 이는 백제의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황하이남~양자강 이북 사이의 동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동위는 산동 지역의 일부가 백제의 영역이라는 점을 못마땅해하고 있던 터라 고구려의 부탁과 상관없이 백제를 공략했다. 이 때 백제의 대륙기지는 529년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고구려의 침략으로 매우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위의 공략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에 백제는 양나라에 도움을 청했지만 양나라는 고구려와 동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 결과 백제의 대륙기지는 붕괴되어 동위에 함락되고 말았고, 이 때부터 대륙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렇게 되자 백제의 성왕은 538년에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다. 그리고 잃은 땅을 만회하기 위해 540년에는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했다. 우산성은 고구려가 498년에 신라로부터 빼앗아 한반도 남진의 전략기지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백제는 우산성을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한반도 지역 공략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무렵 고구려는 535년 여름 발생한 대홍수와 그해 겨울에 일어난 지진,그리고 536년 여름에 닥친 가믐, 또 그 해 가을에 밀려온 메뚜기 떼 등에 의한 피해가 극심하였고 2년 동안 계속된 자연 재해는 백성들을 기근에 시달리게 하였고, 이 때문에 많은 유랑민이 발생하여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안원왕은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전국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였고, 한편으론 경제적 궁핍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동위와 양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백제의 성왕은 이러한 고구려의 경제적 파탄을 놓치지 않고 우산성을 공략하였던 것이다. 백제가 우산성을 공략하자 고구려는 미쳐 손을 쓸 틈이 없이 수세에 몰렸다. 우산성이 백제군에 포위되자 안원왕은 중앙 정예기병 5천을 급히 우산성으로 파견하였고, 우산성의 고구려군은 사력을 다해 수성전을 펼치고 있던 중, 5천의 고구려 기병이 도착하여 백제군 후미를 공격하자 가까스로 성을 지킬 수가 있었다.
이처럼 백제군에게 기습을 받아 혼쭐이 난 고구려는 국내적인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는 바람에 이후에도 보복전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안원왕은 재위기간 내내 이처럼 재해에 시달리며 노심초사했는데, 설상가상으로 544년 12월 자식들이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장남 녹군(양원왕)과 다른 아들 세균 사이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져 녹군이 세균을 죽이고, 그 가족을 몰살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안원왕은 중병으로 누워있던 중이며, 그 사태가 벌어진 지 3개월 만인 545년 3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제24대 양원왕 실록
(재위: 서기 545년 3월-559년 3월, 14년)
양원왕의 계속된 패전과 고구려의 위축
양원왕은 안원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평성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호방한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원왕 3년인 서기 53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45년 3월에 안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 24대 왕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한 차례 홍역을 치른다. 부왕 안원왕이 병상에 있을 때 아우 세균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려 한 것이다. 세균은 기습적으로 난을 일으켜 반란 초기에는 승기를 잡고 단숨에 궁궐까지 밀려왔고, 태자 평성은 금위병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궁궐을 지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균의 군대는 궁지에 몰리게 되고 결국 3일만에 난은 진압됐다. 안원왕이 병중에 형제들끼리 난을 일으켜 싸움을 벌인 것은 고구려 조정을 크게 흔들어 놓았고, 양원왕의 위상도 크게 실추되었다.
양원왕이 즉위했을 때 국제정세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북위가 동위와 갈라져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북쪽에서 돌궐이 일으나 고구려의 서쪽 변경을 위협하였고, 진흥왕이 즉위한 신라는 국력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고구려 변경을 노렸다. 또한 백제는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 공격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북쪽 변방에 물길과 말갈이 힘을 강화하여 남진하였다.
사방이 적의 위협에 놓이자 양원왕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쟁준비에 돌입하였고, 547년 7월에 백암성과 신성을 개축 및 수리한다. 그리고 이듬해 동예 지역에 주둔하던 군사 6천을 동원하여 아리수 이북의 백제 요새인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독산성을 함락시킬 무렵 신라 장군 주령(또는 주진)이 기갑병 3천을 이끌고 백제군에 가세하는 바람에 퇴각하고 말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을 즈음 중국의 정세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리된 이후 남조의 양나라는 동위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하지만 번번이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547년 동위의 장군 후경이 동위의 실질적 통치자인 고징과 불화를 겪다가 하남지역 13개 주를 가지고 양나라에 귀순했다. 이에 양왕 소연은 그를 환대하였는데, 막상 양나라에 귀순한 후경은 그 곳의 복잡한 내부사정에 염증을 느께게 되자 모반을 계획하게 된다. 549년 군사를 일으켜 양나라 건강(남경)의 왕성을 포위하고 마침내 함락시켜 소연을 궁중에 연금하기에 이른다. 그 후 소연이 궁중에서 굶어죽자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부터 양나라는 정권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한게 된다.
그런데 중국은 남조의 혼란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550년 동위의 실력자 고환이 죽자 그의 아들 고양은 동위 왕 원선견을 폐위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국호를 '제'나라로 칭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서위에서는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이 왕위를 노린다.
중국 대륙이 급격한 변화를 겪자 고구려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중국 쪽을 경계한다. 이를 눈치챈 백제는 550년 정월에 고구려의 도살성을 기습하여 함락시킨다. 이에 고구려는 보복전을 펼치며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전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쪽 병력은 피로에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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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가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신라는 양국의 전력이 약화되기를 기다리며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습적으로 도살성과 금현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과 백제군을 내쫒고 두 성을 차지하였다. 이 사건으로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깨지고, 삼국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라의 강성으로 삼국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 또 하나의 세력이 고구려 서북쪽 변방을 향햐 몰려오고 있었다. 북위의 멸망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던 돌궐이 어느듯 거란을 뒤로하고 고구려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551년 그들은 고구려의 국경을 넘어 침입해 왔으며, 9월에는 평양성 북쪽 신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을 내주어 돌궐군을 치게 하자 고흘은 뛰어난 용병술로 적 1천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그런데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의 위기를 이용하여 한반도 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거칠부를 수장으로 내세워 공략에 나섰고, 돌궐군과의 싸움으로 전력이 약화된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10개 성을 빼았겼다. 이로써 고구려의 한반도 쪽 영토는 평안남북도와 항해도, 함경북도 지역으로 축소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양원왕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더 안전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여 552년에 장안성을 축성한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싸움을 벌여 신주를 차지하고 더욱 세력을 확대한다. 이에 백제의 성왕은 진흥왕에게 회친을 제의하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후비로 시집보내 양국간에 결혼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이전같지 않았다. 이미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파기했기 때문에 양국간의 결혼동맹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백제 성왕은 왜에 왕자 창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고,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제를 공략할 계획을 수립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북제의 공격을 받은 거란 백성 1만여 호가 귀순해오는 바람에 백제공격계획을 뒤로 미루게 된다. 그 무렵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는데, 554년 7월 백제의 성왕이 야음을 틈타 신라를 공격하려다가 되레 신라 복병에게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계획을 수립하여 554년 10월 백제의 요충지인 웅천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위덕왕(왕자 창)이 이끄는 백제군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양원왕은 더 이상 백제 공략에 나서지 못하였다.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거듭된 패배로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으며, 중국 쪽의 정세도 불안하게 치닫고 있었다.
557년에 서위의 실력자 우문태가 죽자 그의 아들 우문각이 서위 왕 탁발곽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주'(북주)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북조에는 북제와 북주가 건립되고 남조에서도 한동안 권력쟁탈전이 계속 이어지다가 552년에 상동 왕 소역이 후경을 제거하고 왕이 되자, 종실인 옹주 자사 소찰이 이에 불만을 품고 서위에 항복한다. 그리고 소찰은 서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소역을 제거한다. 하지만 소찰은 서위의 통제를 받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여 장군 왕승변과 진패선이 소역의 아들 소방지를 왕으로 옹립해 소찰에 대항하였고, 얼마 뒤에 진패선이 왕승변을 살해하고 다시 557년에 소방지를 폐위한 후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또한 국호도 '진'으로 바꾼다. 이로써 중국은 북쪽엔 북주와 북제, 남쪽엔 진이 성립되어 남북조 시대는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중국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557년 10월에 고구려에서도 모반사건이 발생하여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든다. 환도성의 장수 간주리가 흉흉해진 민심을 등에 업고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반란군은 관군에게 진압되고, 간주리는 생포되어 처형됨으로써 가까스로 반란이 확산되지 않고 진압되었다.
양원왕은 이처럼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위태롭게 왕위에 머물다가 559년 3월에 생을 마감한다.
양원왕은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며 한 명의 왕후에게서 아들 한 명을 얻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양성(평원왕)이다.
-서초동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