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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실록 : 제21대 문자명왕 실록 본문
고구려 실록 : 제 21대 문자명왕 실록
현재 고구려의 영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대포장한 것에서 부터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표현한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고구려 전성기 지도를 펴 보며
기나긴 여운을 되새기려 한다.
제21대 문자명왕 실록(재위 서기 491년 12월-519년 모월, 약 28년)
문자명왕의 영토수호 노력과 나제연합군의 협공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이며 이름은 나운이다. 아버지는 장수왕의 맏아들 고추가 조다인데, 그가 결혼 후에 일찍 죽음에 따라 장수왕은 손자인 나운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장손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서기 491년 장수왕이 죽자 나운은 고구려 제21대 왕에 올랐다.
문자명왕이 즉위하자 북위 왕 탁발원굉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다. 그리고 왕자를 보내 자신을 예방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문자명왕은 왕자는 병이 들어 보낼 수 없다고 거절하고, 대신 종숙 승간을 북위에 보낸다. 이후 고구려는 북위와 사신을 교환하며 화친을 맺고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운영하였다.
문자명왕은 광개토왕과 장수왕에 의해 확장된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 연합군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문자명왕은 나제연합군에 밀려 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결과적으로 고구려 영토는 다시 축소되기에 이른다.
이 무렵 고구려의 북쪽 부여에 물길이 칩입하여 부여성을 함락하고, 부여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또한 한반도 남쪽 경계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같은 변방 정국의 변화에 따라 고구려는 방비를 강화하고 주변 국가의 정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493년 2월 물길에 의해 함락된 부여의 왕이 처자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투항해 왔다. 이로써 서기전 4세기 이래 약 800년 동안 지속되던 부여 왕조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한편, 한반도 남쪽 경계에서 신라군이 칩입하여 계속 북상하였다. 신라는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와 함흥을 거쳐 493년 7월에는 대동강을 넘었다. 이에 고구려군이 청천강 부근에 진을 치고 신라군의 북진을 차단한 후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자 신라군은 퇴각을 거듭했다. 이에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견아성으로 몰아넣고 포위했지만 안타깝게도 백제의 원군 3천이 달려와 후미를 치는 바람에 다시 퇴각해야 했다.
백제에 의해 신라 공략에 실패한 고구려는 이듬해 8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이 치양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하는 동안 이번에는 신라군이 백제를 돕는 바람에 또다시 퇴각해야 했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서로 혼인관계를 형성하고 동맹을 맺은 상태였기에 고구려 공격에 대해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쉽사리 공략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백제는 488년 대륙에서 북위의 침략에 맞서 대승을 거둔 이래 꾸준히 대륙백제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이는 고구려의 대륙 쪽 변방과 한반도 변방을 동시에 위협하는 요소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문자명왕은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495년 7월에는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물러났고, 이듬해 8월에는 다시 우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함락시켰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고구려에 휴전을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신라의 제의를 받아들여 백제 공략에 주력한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그 무렵 백제 땅에는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민심이 흉흉해지고,경제적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499년 8월에는 기근에 시달린 백제 백성 2천 명이 고구려에 투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와 휴전한 것을 책망하고, 475년 이래 지속되던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종식되었다.
백제와 신라의 결별은 고구려에게는 희소식이었으며 백제 공략의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 무렵인 502년 8월에 메뚜기 떼가 밀려오는 바람에 고구려는 농사를 완전히 망쳐 경제가 피폐해졌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두 달 뒤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가옥이 파손되고 많은 사상자를 내는 바람에 고구려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백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해 11월 고구려의 남쪽 변방을 공략하였고, 다시 이듬해 11월에는 군사 5천으로 수곡성을 공략하였다.
즉 함흥에서 원산 사이 동해안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상쟁하는 요충이었다.
이렇듯 백제의 침략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고구려는 내부의 어려움으로 방어전에만 주력해야 했다. 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북위와 무역량도 줄어 북위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문자명왕은 이러한 어려움의 원인이 모두 백제에 있다고 결론짓고, 506년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폭설로 인해 퇴각하였으며, 이듬해 507년 10월에 장수 고보로 하여금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치기로 하고 공략하였으나 백제군에 밀려 퇴각해야 했다.
그 후 문자명왕은 한동안 주변 국가들과 평화상태를 유지하면서 내부 경제를 다졌다. 또한 외부적으로 북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한편으로 남방에서 제나라를 무너뜨리고 일어난 양나라와도 화친을 맺었다. 이에 고구려는 내부 경제도 살아나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었다.
이러한 안정은 곧 국력의 강화와 군사력의 증강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백제 공략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자명왕은 512년 9월에 백제를 침공하여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포로로 잡는 대성과를 올린다. 이는 문자명왕이 백제와 싸워 승리한 최초의 전쟁이었으며 백제는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더 이상 고구려를 침입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문자명왕은 재위 후반기 7년 동안은 비교적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51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문자명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위의 영태후는 동당에서 애도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장레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이는 고구려와 북위와의 대등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예이며 문자명왕을 '명치호왕'으로도 불리는데, 여기서 '명치'는 문자명왕의 연호인듯하다.
문자명왕은 한 명의 왕후에게서 흥안(제22대 안장왕)과 보연(제 23대 안원왕) 등 두 명의 아들을 얻었다.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서초동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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