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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중국의 동북공정, 그 역사적 허구성, -고구려,백제를 중심으로-

 

중국의 동북공정, 그 역사적 허구성

 

-중국 중원을 지배한 고구려와 대륙백제를 중심으로-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날조 사업을 지금 열심히 펼치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역사를 폄하여 장차 그들이 기도하는 의미를 알고 분쇄해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한 우리들의 강력한 근거있는 항의와 국제 여론을 몰아 위대한 고구려의 역사를 되�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젊은이들은 지금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슨 대수냐? 지금 내가 잘 먹고 잘 사는데 지나간 역사가 무엇이며 중국의 동북공정이 무엇이며, 고구려 영토나 대륙백제가 지금 무어야고 할 지도 모른다. 삐뚤어진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이 배운 역사가 얼마나 축소되고 허황된 역사였는지 알게 될 날이 올게다. 독도?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불을 지피면 금방 동조하는게 우리 젊은이 들이다. 정신 처리지 않으면 역사의 모진 굴레를 다시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러나 광개토태왕릉비가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이래 만주 벌판에 우뚝 솟아 수천년을 찬바람 눈.비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도, 그리고 1870년대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 어느 조선인도 그 비석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런 일이었다. 그 비석은 금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는 것이며, 신라통일 이래 고구려에 대한 역사 연구와 역사서는 전래되는 것이 없음이 안타까운 일이며, 조선의 많은 문헌과 보물을 도굴, 약탈 등으로 훔쳐간 중국,유렵,미국,일본의 어느 박물관이나 사료 보관소에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역사학자는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반드시 현지 답사를 통하여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지역의 모든 비석,성곽,궁성터,이동로,전투 현장,비문 글씨 내용,기와 조각,봉분 형태와 구조, 내부 벽화 모양과 묘비명과 글씨 내용,현지 박물관/고서적,현지 주민 탐방,전래되는 야사, 지역명칭 유래, 그 지역 향토 역사서 등 다방면의 사료를 살피고 수집하며 현장에 대한 사진,동영상 촬영 등으로 근거를 �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남의 나라 역사학자가 쓴 왜곡된 역사서나 참조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특히 일제시대 식민역사학자 이병도를 포함하여 그의 제자들이 식민사관을 국정교과서에 삽입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하여, 온 국민이 자주성을 상실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무관심 하고 조상의 위대한 업적과 뿌리를 상실하게 만든 원흉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이병도의 제자들로 어느 역사학자도 제대로 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하면 70년대 중반에 어느 육사 출신 육군 포병 중위가 전쟁사를 전공하였는데, 임관 후 전방 지역 GP에서 관측장교로 근무시 비무장 지대내에서 삼국시대의 전적지를 연구하다가 비무장 지대내에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추가로 발견하여 역사학계를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뿌리도 못�고 파벌싸움만 하고 있을 때였다.  

 

고구려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광개토태왕릉비는 1870년대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포병 중위이며 첩보요원이었던 '사오쿠' 중위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일본군은 이 비석을 일본으로 밀반출을 시도하였으나 집안현 지사 '오광국'이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이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면 비문은 일제 침략을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변조되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1. 고구려의 건국기원과 영토확장 전쟁

 

고구려 시조 주몽은 동명성왕은 추모왕이라고도 불리며 가장 오래된 광개토태왕릉비에 잘 나와 있다. 중국의 고서  <한서>,<후한서>,<위서>,<양서>,<수서> 등지에 나타나 있으며, 한국의 고서로는 <삼국사기>,<삼국유사>와 지금은 전하지 않는 <단군기>,<구삼국사>가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사료 근거로는 광개토태왕릉비와 모두루묘지 묘지문에 나타나 있어 가장 근거있는 자료로 볼 수 있다.

 

주몽의 출신지역에 대하여 중국 사서들은 북부여,동부여,부여 등 여러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으나, 광개토태왕릉비에는 북부여로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로 봄이 타당 할 것이다. 주몽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자의 자식이니 고구려를 천자나라로 표기하고 있으며 단군이 창건한 고조선을 이어받은 나라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중국의 고서는 고구려 민족을 예.맥족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여 동북아 만주지역을 지배하였던바, 주몽의 고구려가 부족을 규합하고 그 세력을 떨치며 한사군을 쫓아내고 나라를 세우니 바로 고구려이다. 부여도 건국영웅이 동명왕으로 해모수나 해부루로 추측을 하고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으며 부여 동명왕이 태어난 사화가 고구려 주몽의 태어난 사화로 추앙 사용되면서 공식입장이 되었다. 부여의 잔존세력은 신예 고구려에 결국 합병되고 그로써 나라의 틀을 잡게 된다.

 

고구려는 2대 유리왕은 현도군에 소속된 고구려현을 점령하고 전한에서 전권을 행사하던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여 고구려는 신나라와 투쟁을 벌였다, 신나라 왕망이 재위 15년만에 망하고 후한 광무제가 나라를 세웠다. 3대 대무신왕 때는 신나라를 뒤이은 후한의 요동태수 공격을 받으나 고구려 대무신왕은 그들의 공격을 물리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무신왕의 맏아들 4대 모본왕은 한나라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하였는데, 한나라 요동태수 채용이 고구려와 화친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북평>.<어양>.<상곡>.<태원>은 <중국역사지도집> 제2권(진,서한,동한시기)에 따르면 <북평>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하북성 만성현' 부근이며, <어양>은 지금의 '북경 동부지역으로 북경시 밀운현 부근'이며,<상곡>은 지금의 지금의 '화북성 회래현으로 북경 북쪽으로 중국 북방 전진기지였던 요충'이다. 그리고 <태원>은 지금은 '산서성 성도인 태원시'로, 북 중국의 중심이자 훗날 당태종이 발원한 지역이다.

 

일본과 식민사학자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내용중 '초기내용 불신론'을 펴면서 고구려의 중원점령 치적을 폄하시키려고 하였다. 중국측 사료에는 <후한서> <광무제 본기 하>에 나오는데,"(광무제)25년(서기 49년) 춘정월, 요동 변방의 맥인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략하였는데,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는 구절이다. 고구려라고 쓰지 않고 맥인이라 쓴 것은 고구려에게 후한의 강역이 대거 유린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고 거짖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 뒤에 "맥인은 예맥군인을 뜻한다"라고 주석을 달아 예맥족의 고구려 국가임을 나타냈지만 끝내 고구려라고 쓰지는 않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태원은 후한의 수도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쪽으로 자칫하면 수도 낙양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는 철기 기마 부대를  북중국의 여러곳에 보내 공격함으로써 후한의 혼을 빼놓았다. 요동태수의 화친으로 더 이상의 공격은 진행되지 않았으나 요동이 당시는 북경 일대를 포함하여 불려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덕흥리고분

 

 

 

 

 

무덤의 내부(전실과 현실)
연도에서 전실과 그 뒤의 현실을 바라본 모습인데 전실 북쪽 왼편에 주인공의 초상화가 보이며, 현실로 이어지는 입구 위에 묘지명이 묵서로 쓰여있다.

 

 

 

 

 

묘주의 초상화(전실 북쪽벽)
전실 왼쪽 북벽에 묘주 진(鎭)의 초상화가 크게 그려져 있다. 그는 광개토대왕의 신하로 대신의 지위에 올랐는데 풍만하고 여유있는 모습에 청라관을 쓰고 갈색의 겉옷을 입고 있다. 장막의 상부 중앙에는 화염으로 둘러싸인 보륜문이 장식되어 있다.

 

 

 

 

 

묘지명(전실 북벽 상단)
현실과 통하는 입구 위에 주인공의 약력이 14행 154자가 적혀 있다. 내용은 주인공 진이 신도(오늘의 박천, 운전 지방)에서 태어나 여러 장군직과 태수직을 거쳐 유주자사를 지내다 77세에 사망하여 광개토대왕 때인 영락 18년(408) 12월 25일 이곳에 묻혔다고 쓰여있다.

 

 

 

 

 

관리의 모습(전실 남쪽벽)
유주자사 진이 거느린 관리들이 사무를 보는 모습으로, 한 가운데 네줄의 설명문 25자가 묵서로 쓰여 있다.

 

 

 

 

사냥도(전실 동쪽 천정 하단)
전실 천정의 하단부에 그려진 사냥 장면은 8명의 기마인물들이 달아나는 짐승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몇 개의 봉우리로 그려진 산과 간략한 나무의 표현은 인물의 비례에 비해 작으나 고구려 초기 산수화 표현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천마도(전실 북쪽 천정)
이 고분의 천정부분에는 다양한 종류의 상서로운 짐승들이 등장한다. 그 중 날개가 달린 천마 그림으로 서쪽 방향을 향해 앞발을 치켜들고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이다. 왼쪽 옆으로‘天馬之象’이라는 묵서명이 보인다.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
덕흥리고분은 묵서명문을 통해 영락 18년(408)에 사망한 유주자사 진의 묘임이 밝혀져 사료적 가치가 높다. 연도와 전실, 현실이 격식대로 갖추어져 있고, 전실과 현실의 천정은 궁륭평행고임식이다. 특히, 600여 자의 묵서에는 관직명을 비롯하여 각 장면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어 고구려의 사회상을 알려준다. 벽화의 내용도 실내의 장식무늬를 비롯하여 주인공의 생활상, 신앙생활, 인물상, 행렬도, 천상세계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고구려인의 문화와 풍습 및 사상을 알려준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이때, 고구려군은 막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는데, '요서지방에 성 열개를 쌓아 한나라 침략에 대비했다'고 <삼국사기> 태조대왕 3년 봄 2월 조에 나와 있다. 성을 쌓아 한나라 침략에 대비했다는 것은 그 지역을 영구히 차지하려는 고구려의 의지를 나타낸다. 10개의 성은 만리장성 끝단인 산해관 남쪽 '청려','건평'에서 대릉하 하천을 따라 서북쪽으로 축성되었으며,만리장성 외곽 서북 방향으로 '평천','승덕','융화','위장','다륜','적봉'의 10개 성이 축조되었다. 그후 태조대왕은 53년(서기 105년) 요동 6개현 공격,태조대왕 59년(서기 111년) 현도군 공격, 태조대왕 66년(서기118년) 요동의 현도군 공격, 태조대왕 69년(서기 121년)에는 고구려의 잇단 공격으로 후한이 반격에 나섰는데, '유주자사 풍환,현도태수 요광,요동태수 채풍 등이 같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고 <후한서>는 적고 있다. 같은 해 4월 태조대왕은 서북방 선비족과 같이 공동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전사시켰다. 태조대왕 94년(서기 146년) 8월에 요동 서안평현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 잡았다. 서안평은 전략요충지로 미천왕 12년(서기 311년)에도 공격하게 되는데, <한서>의 <지리지>에 '왕망은 북안평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으며 <위씨춘추>에는 '서안평현 북쪽에는 '소수'라는 강이 있다' 고 전하고 있는데, <후한서>의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구려(句驪)는 일맥 맥이(貊耳)다. 따로 별종(別種)이 있는데,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소수는 고구려 초기 강역을 추정할 때 중요한 지역이다. <위씨춘추>는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에는 소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때문에 구려의 별종을 소수맥이라고 한다" 고 전한다.

 

정리하면, 서안평현은 소수라는 강 남쪽에 있고, 소수에는 맥의 별종인 소수맥이 살고 있다. 곧 소수 출신 맥인들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소수는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중국측은 이병도의 주장을 반갑게 받아들여 소수를 지금의 압록강변 단동시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병도가 일본 학자들과 지금의 신의주 건너편 단동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동은 북쪽에 소수라는 강이 없고 또 압록강은 남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이병도는 고구려사를 축소하기 위해 지리적 감각도 없이 역사왜곡을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이다.

 

<한서>의 '지리지 8'에 기록된 현도군 소속 서개마현의 위치도 서안평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서마개현 마자수는 서안평에 이르러 서북쪽으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쪽은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는 구절이다. 염난수는 현재 내몽골을 가르지르는 '시라무렌' 강을 뜻한다. 따라서 서북으로는 서러무렌 강에 닿고 서남쪽으로는 서안평을 거쳐 바다로 흘러가는 강을 �아야 하는데, 이는 산해관 부근의 '대릉하'나 '난하'다. 중국은 이병도의 말을 믿고 단동을 서안평으로 표시하고 서개마는 요하 북쪽에 있는 현재의 무순시로 표시해 놓았다. 중국이 스스로 오류를 자인하고 있는 역사지도 표기이다.  

 

고구려 태조대왕 때 서안평을 쳐서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것은 서안평이 낙랑군과 그리 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낙랑군은 갈석산 부근의 '창려'~'난하'일대로 추정되고 있는데, 한나라 때의 대방현은 조선.패수.점제.열구 등과 같이 낙랑군 18개 속현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서안평도 대릉하~난하에서 �아야 된다.

 

고구려 미천왕 12년(서기 311년)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여 서쪽 진출 교두보를 확보했고, 서진하여 미천왕 14년(서기 313년)에는 낙랑군에 칩입하여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았으며, 이듬해 (서기 313년) 가을 9월에는 대방군을 침공했다. 계속해서 그 이듬해(서기 315년)에는 현도군을 공격함으로써 서안평을 교두보로 한 서쪽 지역의 공략을 마무리 지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고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중국 세력인 한사군을 지금의 난하 밖까지 축출하고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2. 덕흥리 고분벽화: 유주자사 진의 진실

 

1976년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고분벽화는 묘지명을 통해 피장자의 신분이 �혀져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의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진전을 가져왔다. 고분벽화에 나타난 명문에 따르면 무덤의 주인공은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으로 77세에 죽어 광개토태왕 18년(서기 408년)에 이곳에 묻혔다. 유주자사는 지금의 하북성 일대를 관할하는 자로 그 휘하에 13개 군의 태수를 거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하게도 고분벽화에는 이 13군의 태수가 주인공인 유주자사에게 하례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뚜렸하게 남아 있다.

 

13군태수(전실 서쪽벽)
묘주 초상의 오른쪽 서쪽벽에는 고구려 유주의 13군태수들이 상하 두 줄로 서서 유주자사 진에게 축하를 드리는 모습이다. 특히, 윗줄의 6명 태수들의 모습은 보존 상태가 좋아 글자와 얼굴모습이 생생하게 보인다.

 

 

 

 

유주자사 진의 묘지명에 의해 그에게 제수되었던 벼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건위장군(建威將軍)

2) 국소대형(國小大兄)

3) 좌장군(左將軍)

4) 용양장군(龍釀將軍)

5) 요동태수(遙東太守)

6) 사지절 동이교위(使持節東夷校尉)

7) 유주자사(幽州刺史)

 

그에게 제수된 벼슬은 무려 일곱가지나 된다. 이중에서 건위장군, 용양장군은 중국 대륙 벽제의 벽제 장군들의 벼슬과 일치한다. 이처럼 중국 대륙에 개척한 식민지를 다스리는 관원에게 중국식 관작명을 하사한 것은 대륙 벽제나 고구려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통치술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소형,대형은 고구려 고유의 관작이며 주목할 것은 '사지절 동이교위'란 직책이다. 중국측에서는 오랑케를 관리하고 교화시키는 벼슬로 인식하고 있으나, 사자절이란 천자의 임명부절을 가지고 전권을 위임받은 사령관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점령지역 주민들을 통치하기 위한 통치술로 중국식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 진의 계급이나 위치는 막강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행정책임자인 요동태수를 지내고 군사 책임자인 유주자사까지 겸했다는 것은 그의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말하며 유주와 요동이 긴밀한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유주자사 진을 알현하고 정무보고를 하는 13개 군의 태수의 면면을 보면 유주의 관할 지역을 알 수 있다. 이들 13개 군의 태수는 다음과 같다.

 

범양태수,아양태수,연군태수,상곡태수,광녕태수,대군태수,북평태수,요서태수,창려태수,요동태수,현도태수,낙랑태수,대방태수

 

<진서> <지리지> '유주조'에 의하면 유주는 일찍이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한 후 이곳에 아양,상곡,우북평,요서,요동의 5개 군을 설치했고, 한나라 고조 때는 상곡을 나누어 탁군을 설치했으며 무제가 전국에 13개 주를 설치할 때 유주는 옛 명칭을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그 후 현도,낙랑을 그에 속하게 했다. 또한 한나라 소제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연을 광양군으로 하고 유주는 9개 군을 거느렸다. 후에 위나라 때 동이를 다스리기 위하여 평주를 설치하고 요동,현도,창려,대방,낙랑 5개 군을 설치했다.(진서 지리지 상 유주.평주편)

 

청나라 초기에 만든 <독사방여기요>에서도 진나라와 16국 시기 유주의 치소는 탁군(지금의 북경 부근)이며 속군은 범양,연,북평,상곡,광녕,대,요서군이며, 평주의 치소는 찰려(난하 갈석산 부근)이며 속군으로 창려,요동,낙랑,현도,대방군이다(독사방여기요,권3,역대주역형세3,유주.평주)

 

결국 유주를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고, 후대로 오면서 유주는 요서군을, 평주는 요동군을 중심으로 군현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일찌기 모본왕 때 중국 동북부 지역 깊숙이 진출했는데, <삼국사기> '모본왕 2년(서기 49년)조'의 기록과 <후한서> '동이열전' '구려조' 편에도 실려있다.

 

고구려 모본왕이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차례로 공격하였을 때 한나라 요동태수 채융(채동)이 은혜와 신의로 대하므로 화친하였다는 것이 바로 유주며, 평주요, 요동임을 알 수 있다. 유주가 속한 지역인 범양,연,광녕,상곡,아양,대 지역은 오늘날 북경을 중심으로 한 하북성,산서성에 해당한다. 요동태수 채융은 고구려에 항복하였는데, 많은 전쟁보상금을 주고 화친을 맺었다는 중국식 표현이다. 요동태수가 이 지역까지 와서 항복하였다는 것은 그가 관할 하였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일본 식민사관들이 주장하는 단동이 서안평이고 요하의 동쪽이 요동지역이라면 동쪽 끝에서 이곳 북경까지 달려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동지역에 대해서 학계에서 치열한 논란이 있었다는데, 바로 현장의 실제 증거를 �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고서 기록으로만 탁상공론하는 오늘날의 역사학계이다. 그동안 요동은 요하의 동쪽으로 인식되었고 요동군의 치소는 양평이라 했다. 또한 양평은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로 비정하고 있는데, <후한서> '원소.유표열전 하'에 요동군의 위치는 "양평현은 요동군에 속하는데 그 고성이 지금의 평주 노륭현 서남쪽에 있다"고 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평주의 치소가 노룡현인데 이곳에 요동군의 고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노룡현은 창려현과 갈석산의 북쪽, 산해관의 서쪽,난하의 하류의 동쪽에 현존한다.

 

유주자사 진에게 알현한 태수들의 근무지는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준다. 대형 등의 관직으로 보아 그는 고구려 사람이 분명한데 그가 유주자사와 요동태수를 지냈고, 13개 군의 태수들이 와서 알현했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한때 중국의 중원인 이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중 이덕일,김병기 지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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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위와 같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며 그런 역사와 관련된 사적을 지우고 없애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중국의 동북공정은 무슨 의도일까?그들이 반드시 목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무너지고 파괴된 고구려의 성곽과 봉분을 제대로 된 고증도 없이 보수를 하고 덧칠을 하는 등 자기들 속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유네스코에 등제 하려고 까지 하고 있다. 이 문제는 북한과 같이 공동으로 강력대처해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주요 안건으로 제안하고자 하는 역사학자나 정치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탁발씨가 건국한 선비족의 나라 위나라, 글안족이 세운 금나라,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주변 수수민족이지만 중원을 장기간 점령하여 한족을 통치하였는데, 그들 소수민족은 몽고를 제외하고는 국가다운 국가를 지금까지 유지해온 민족은 없다. 그들은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소수민족으로 한족의 지방자치구로 차별받으며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세운 나라는 사라졌다.

 

그러나 중국의 수,당나라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백만 군대를 저지한 고구려는 그후 신라의 외세 세력을 이용한 통일 전쟁을 통하여 결국 멸망하였으나,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에 의해서 대발해의 발흥으로 수백년간 명맥을 유지하였다. 비록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은 달성하였지만 지금은 재평가 되고 있으며 만주강역의 고구려 고토를 상실하고 오로지 반도내에서 안주하게 되었다.

 

중국의 수와 당은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수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당태종도 중국 역사에서는 현명한 군주였으나 치적 말년에 고구려를 3차에 걸쳐 침공했던 것이 당나라 국운이 쇠약해지는 큰 요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비록 고구려와 벽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였으나 그들의 지방정권이 아닌 당당한 개별국가로 자리메김 하였던 것이다. 수나라 인구수는 당시 2000만 명 정도였는데, 전투 참가 병력이 100만 명이라면 그 지원병력은 전투병력의 2배 정도로 보았을 때, 거의 3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며, 결국 약 30만 명의 수나라 별동대인 육군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에서 전멸되었고, 수군 30만 명도 대동강 입구 전투에서 상륙하다가 전멸되었던 것이다. 그후 당나라와 원나라, 청나라는 고구려, 고려, 조선 정벌시 엄청난 전비와 병력으로 나라가 망했던 수나라를 상기하고, 한반도 지배에 연연하지 못하고 군신관계, 형제관계, 조공, 상국대우만 요구하고 물러났던 것이다. 한반도는 그들 입장에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사지이며 망지였던 것이다. 

 

 

3. 백제의 대륙 진출 과정과 그 증거들

  

백제는 언제 대륙에 진출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백제의 땅이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 되어 있지만, 그 구체적인 성립 과정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에 관련된 사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수수께끼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륙백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자들은 백제의 대륙영토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중국 사서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대륙백제에 관한 내용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설사 인용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편찬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편자들의 이러한 시각은 결국 백제사를 한반도 안에 가둬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오히려 중국의 사서들은 대륙백제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으며, 그 성립과정과 시기를 명백히 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 백제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납북조 시대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송서(宋書)>다. <송서>는 남조 제나라 무제 연간인 488년에 '심약'이라는 인물이 무제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역사책으로 권 97, 열전 제57 ,이만(夷蠻)편에서 백제에 대한 언급을 이렇게 시작한다.

 

" 백제국은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으며, 그 뒤에 고구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던 곳을 일컬어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삼국사기> 편자들도 <송서>를 참고했을 터이고, 틀림없이 도입부의 이 기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의 상식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백제란 그저 한반도 서쪽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니 대륙의 요서 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부 학자들은 백제의 요서 점령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어떤 경로로 바다 건너 대륙의 요서 지역을 장악하여 다스렸단 말인가? 진평군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나와 있는 것으로 봐선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린 것은 분명한데, 그 경로는 그저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다.

 

당나라 태종 연간인 636년에 편찬한 <양서(梁書)>는 남조의 양나라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거기엔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자, 백제 역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양서>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차지한 때를 진나라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고, 여기서는 진평군 이외에 요서군이라는 지명과 백제군이라는 지명이 추가 되었다.

 

<양서>에서 말하는 진나라는 사마염이 266년에 세운 진(晉)을 일컫는다. 진은 서진과 동진으로 나뉘는데, 서진은 사마염이 세운 것이고 동진은 흉노족 유연에 의해 서진이 몰락하자 사마씨의 후예 사마예가 동쪽으로 달아나 세운 나라를 일컫는다. 서진은 266년에서 316년까지 유지되었고, 동진은 317년에서 42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시기는 서진 시대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13년(298년) 9월 '한(漢)나라가 맥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흉노의 귀족 유연의 세력을 일컫는다. 유연은 이무렵 서진의 세력이 약화되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가 304년에 '한(漢)'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 한나라는 원래 평양(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서남쪽)에 도읍했다가 나중에 장안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조(趙)'로 고쳤는데, 이를 중국 사기에서는 '전조(前趙)'라고 부른다.

 

한이 침입한 백제 땅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이었다. 따라서 백제가 요서 지역을 장악한 시기는 서진이 세워진 266년에서 한의 침입으로 책계왕이 사망한 298년 사이로 한정된다.

 

그런데 책계왕의 부인이 대방 왕의 딸 '보과'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책계왕 즉위년인 268년 이전에 대방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가 산동성 아래 위치한 대방을 세력권 아래 뒀다는 것은 이미 그때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즉, 백제는 고이왕 연간에 이미 대륙에 진출하여 요서를 장악하고, 진평군과 요서군을 합쳐 백제군으로 불렀으며, 대방 왕은 그런 백제의 막강한 힘에 의지할 요량으로 딸을 백제 태자에게 내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언제부터 대륙에 진출했을까? 고이왕 13년(246년) 8월에 위나라 유주 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이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그 주민을 잡아오는 사건이 있었는데, 백제의 대륙 진출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대륙백제의 위치는 어디인가?

 

고이왕이 개척한 대륙백제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송서>와 <양서>에서는 대륙백제의 위치를 요서 지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요서 지역은 요수 서쪽 일대를 통칭하는 것으로 그 범위가 매우 넓다. 때문에 요서 지역이라는 표현으론 대륙백제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다.

 

북위의 역사를 다룬 <위서>의 다음 내용은 대륙백제의 위치를 좀더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1천 리 떨어져 있으며,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땅이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에 모두 산에 기거한다."

 

북위는 386년에 창업되어 528년에 망한 나라로 한때 백제와 직접 전쟁을 치른 나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북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형성된 <위서>는 당시 영토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위서>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붙어있지 않았으며, 그것도 1천 리나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의 위치를 소해의 남쪽이라고 구체적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해는 발해를 의미한다. 즉, 대륙백제는 요서 지역으로서 고구려 국경과 1천 리 이상 떨어진 발해 남쪽 일대에 형성됐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기후와 거주 지역에 대한 설명은 그 위치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다는 지형과 기후에 대한 설명은 발해 남쪽의 지형과 기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발해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롤 둘러싸인 내해로 '안개바다'라는 뜻인데, 지대가 낮고 깊은 만이 형성되어 있는 까닭에 늘 안개가 끼어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총 7만 7천 제곱키로미터이고,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서부는 발해만, 북쪽은 요동만, 남부는 내주만, 가운데는 발해중앙분지이다.

 

발해는 3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 대륙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 수온의 연변화가 크고, 황하를 비롯한 난하.요하.해하 등의 거대 하천들이 모두 흘러드는 곳이라 늘 습기가 많은 곳이다.

 

발해 남쪽은 내주만과 산동반도 지역으로 지표면은 장기간 침식을 받아 대부분 구릉지이고, 아주 일부만 1천 미터 이상의 높은 고지대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구릉지에 기거하고, 농작물도 구릉지에 적합한 사과와 배를 대량으로 생산한다. 이곳의 수목으로는 구릉지에 잘 잘라는 참나부가 가장 많은데, 이것은 멧누에인 작잠의 사료로 쓰인다. 이 곳의 연 강수량은 650에서 950밀리미터 사이로, 다른 화북 지역 강수량보다 200밀리미터 이상 많다.

 

이 곳 사람들이 발해만 주변의 저평원지대에 기거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평원 지역이 모두 염화저평원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해수가 들어온 후 조수가 빠지지 못해 해수가 증발되고 지하수 염분 농도가 증가되어 고등식물이 번식할 수가 없다. 산동,화북, 강소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륙백제의 영토 확장에 주력한 책계왕

 

백제 책계왕은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고이왕의 아들이기는 하나 장남은 아니었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책계왕은 즉위와 동시에 장정들을 선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였는데, 이 때 보수한 위례성은 한강 북쪽의 위례성이 아니라 온조와 비류가 건국 초기에 대륙의 대방땅에 건설한 하남 위례성으로 판단된다. 당시 백제는 한반도이 있던 위례성은 북방의 말갈과 화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와도 평화를 지속하고 있던 시점이었기에 굳이 보수할 이유가 없었다.

 

책계왕이 위례성을 보수하였다는 기사에 이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등장한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 대방은 우리와 옹서지간이 되는 나라이니, 그들을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켰다.'

 

위 내용은 위례성 보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미 밝혔듯이 대방은 중국의 산동성에 자리 잡고 있었고, 고이왕 대에 백제의 지배권 아래 놓인 곳이었으며, 대륙백제의 전초기지 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방 맹주는 딸을 백제에 시집보내야 했고, 그 딸이 책계왕의 아내 보과이다. 책계왕은 그런 대방 땅을 지키기 위해 백제 초기에 건설했던 위례성을 보수하고 대방 땅을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이 때 쳐들어온 병사가 고구려군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같은 책 '고구려본기'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책계왕 원년은 고구려 13대 서천왕 17년에 해당하는데, 당시 기사에는 대방을 공격했다는 기사가 없다. 왜냐하면 그해 2월 고구려 서천왕의 아우 일우와 소발이 모반을 도모하여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고구려는 대방을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책계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대방을 구원하자 '고구려에서 원망하였다'라는 기사가 있고,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케 하였다'라는 기사가 덧붙여 있는 것으로 봐선, 이 때 대방을 침략한 세력 중에 고구려군이 포함된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대방 공격의 주도세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 대방을 공략한 주력군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낙랑태수 군대였을 것이다. 대방은 원래 낙랑에 속한 땅이 였는데, 고이왕에게 빼았겼다가 고이왕이 죽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낙랑이 고구려군에 의지하여 대방을 쳤을 것이라는 뜻이다. 책계왕이 한나라 군대와 맥족 백성들로 구성된 연합군과 싸우다가 죽는 사실이나, 책계왕의 아들 '분서왕'이 낙랑과 영토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낙랑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는 것은 백제를 공격해 온 중심 세력이 낙랑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책계왕은 재위 13년(296년) 9월에 죽는데, 그때 상황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한나라가 맥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했다. 왕이 직접나가 방어하다가 적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나라는 흉노의 세력 유연을 일컫는다. 당시 서진(西晋)은 외척과 왕족들의 내분으로 곳곳에서 전쟁을 일삼고 있었는데, 그 혼란을 이용하여 '저족'과 '흉노족'이 대거 봉기하여 세력을 형성했고, 이 때부터 이른바 외방 오족인 5호의 16국 시대가 시작된다.

 

유연의 터전은 대륙백제가 형성된 산동 지역에서 멀지 않은 평양(산서성 임분)이었다. 이들은 304년 평양을 도읍으로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이미 이 때부터 이 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때문에 낙랑 지역은 유연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다고 불 수 있다.

 

유연이 세력을 확대하던 시점에 백제 또한 세력 확대를 시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이 몰락상을 보이며 내분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백제가 대륙 땅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흉노나 저족 등의 외족들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는 상황이라면, 산동에 자리 잡고 있던 안정된 국가인 백제가 영토를 확충하려 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책계왕은 이 일을 위해 자신이 직접 대륙에 머물렀다. 흉노족이 맥사람들과 같이 쳐들어 온 곳이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의 백제 땅이었고, 책계왕이 그들을 막다가 죽었다는 것은 그가 직접 대륙으로 나가 싸웠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한과 맥족이 어느 성을 어떻게 침입했는지는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면 구체적인 격전지를 기록했을 것이도, 또 그들이 쳐들어온 곳이 백제의 도성인 한성이라면 그 점을 기록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이는 <삼국사기> 편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임을 기록한 사료, 즉 중국 대륙에서 책계왕이 죽었다는 내용을 담은 사료를 보고 납득할 수가 없어 그냥 죽은 내용만 기록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삼국시대 이후의 한반도

 

그후 건국된 고려는 한반도에 국한된 영역을 차지하고 치세를 유지하였으나, 만주 고토회복의 꿈은 문민통치와 무인정치,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내부적인 갈등에 시달리는 바람에 고토회복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는 글안족의 3차 침공과 원나라 몽고족의 끈질긴 6차 침공에도 견디어 내었다. 결국 정치적으로 부폐하게 된 고려는 이성계의 성공한 쿠테타로 나라가 망하고 이씨조선이 잉태되었으나, 세종대에 김종서를 통해서 북방의 4군과 6진개척에 머무렀으며 만주 고토회복은 고사하고 새로운 나라인 중국 명나라의 간섭속에 왕권유지에 급급하였고, 창업공신,세조반정,반란평정 등의 공신들인 훈구파들이 오랜 집권 기간을 통하여 부폐와 무능이 극에 달하고 정치력의 상실, 붕괴된 국방력, 유교의 도입으로 형식과 공리공론으로 일관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그후 명이 망하고 청나라의 침공으로 삼전도 치욕을 견디어 내면서 북벌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사림들의 극력 반대와 효종의 급서(독살설) 등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권력싸움으로 일관해온 조선 말기에는 외척발흥,권력투쟁,사색당쟁, 매관매직으로 나라가 피폐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쟁탈전이 반복되었고, 심지어 고종과 민비까지 매관매직과 민씨 일파 등 외척기용으로 통치력의 무능은 극치에 달하였으며, 결국에는 외세가 개입하는 가운데 망국의 한을 겪게 되었지만, 어느 나라던지 있을 수 있는 현상을 중점적으로 부각하여 민족의 기상과 혼을 말살하려 한 일제와 그에 뇌화부동하였던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은 영원히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 조선은 국력이 쇠약하여 북방정벌을 소홀히 한 결과 중원대륙, 만주벌판, 간도땅까지 빼았기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겪고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남북으로 두동강 나고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금수강산은 초토화 되었으나, 다행히 5.16 군사혁명을 통해서 이나라는 가난의 굴레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며 오늘날의 번영을 가져오게 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북한 김일성의 통치방식은 철저한 배급제를 통한 인민을 통치했다. 인간의 기본적이며 1차적인 욕구인 생리적 욕구를 통제받는 경우에는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즉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은 무기력해지고 동물화된다. 그래서 김일성은 배급제를 통해서 북한 인민을 철저하게 통제해온 것이다. 오늘날 이 나라 백성들은 배가 너무 부른게 문제일까? 어찌했던,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대내외적인 큰 전쟁으로 인한 피해 없이 지나오면서 이룩한 경제 발전은 이제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 올라설 정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기도는 장차 유사시에는 북한을 흡수하고 남한까지도 흡수하여 자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드려는 불순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만주 벌판에 수많은 조선족이 살아온 핍박의 세월을 보라! 그들은 '서북공정', '서남공정' 을 진행하면서 티베트와 타림분지의 억압과 통치방식을 보라! 그리고 무자비한 진압으로 탄압했던 톈안먼 사태와 사람의 장기를 추출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사리지게 만든 파륜궁 탄압을 보라! 파키스탄과 네팔, 부탄,미얀마,태국,라오스 등지에 반군공산군들에게 무기공급하여 정부 전복으로 친중국 정부를 구성하거나 흡수하려고 하는 패권주의의 기도를 보라!  아프리카 등지에 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지원하는 등 미국과 미래에 군사,경제,정치적인 경쟁에 대비하고 있는 그들을 보라!

 

그들은 유사시 공룡이 토끼를 잡아먹듯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한반도 쯤은 식은 죽 먹기로 처리할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한반도를 침공하여 군신, 형제, 혈맹의 의를 강조하였으나 속국으로 만들려고는 하지 않았다.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도덕적,윤리적이지 못하고 야만적이던 영웅들은 존경도 받지 못하였으며 위업을 이루지도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 그들이 기도하는 동북공정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세계적인 비난을 받을 때는 그들의 역사도 소리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속국으로 보던,지방정권으로 보던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이러한 사실을 세계 만방에 강력하게 제시하여야 한다. 한반도는 엄연히 한 민족을 뿌리로 여러 왕조를 유지하면서도 국방의 힘이 딸려 그들에게 복종한 것이지 자체적인 찬란한 민족역사와 왕조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그들이 목적하는 불손한 기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은 경제대국으로 국력을 배양하고, 합리적인 평화통일을 추구하며, 남북통합 최첨단 과학군을 만들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는 방법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자주의식과 역사의식으로 그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며 권위있는 논증과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역사학자들이 배출되고 정치적으로 현명한 대중외교와 국제적인 홍보와 설득외교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끝)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