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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노서아 가비' 저자 김탁환

 

 

'노서아 가비'

 

작가 김탁환씨의 책은 처음 접하였다.

이 분이 '불멸의 이순신'을 썼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작가들의 상상력과 탐구열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지난시절 '여명의 눈동자'라는 장편 10권을 읽으면서도 많이 느낀 점이다. 또 작가는 이순신에 대한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떠나 새로운 면에서 이순신을 조명하는 심층적인 글을 다시 쓴다니 대단하신 작가라고 생각된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을 통해서 이순신의 적은 왜군이 아니라 이순신을 모함한 원균이라는 장수와 대신들이었다는 사실을 언연중에 후세에 각인시킨 이광수의 친일소설은 민족개조론 발상에 닿아 있다는 작가의 말이다.

 

'노서아 가비'는 조선말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서 역관이었던 '김홍록'이 고종을 독살하려했던 사람으로 사전 발각되어 처형당한 사실에 관한 글을 읽고 이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은 '황석영'씨의 '바리데기'와 비슷한 상황으로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바리데기도 북한의 한 처녀가 북의 절망적인 삶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 탈북, 만주땅에서 갖가지 고생을 하다 도망길을 나서서 몰래 배를 타고 영국 런던까지 흘러가서 어두운 거리에서 힘들게 살아가다 무슬림 청년을 만나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9.11 테러 사건으로 관타나모 수용소로 끌려가고 상처받고 비참한 삶 가운데서도 바리데기라는 주술적 이상향의 삶을 추구하려는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 줄거리가 시대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다 뿐이지 너무 흡사한 이야기였으며 가볍게 읽을 수가 있었다.

 

'노서아 가비'는 러시아 커피를 지칭하는 말로 고종황제가 즐겨 마셨다는 커피를 상징적으로 등장시켜 망해가는 조선의 비참한 상황을 쓴 커피로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이러한 커피를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동안 고종황제에게 제공하였던 여인은 역관 출신으로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고종황제를 등에 업고 엄청난 부패를 일삼던 김홍륙의 부인인 임신 5개월의 김소사를 '따냐'로 변신신킨 듯 하다. 소설에서는 고종의 독살을 '따냐'가 달려가 위기에서 구하게 되지만 실제 김소사는 독살음모에 가담한 죄로 3년 유배형을 맏게 된다.

 

작가는 따냐라는 조선의 한 여인을 등장시켰다.

대대로 역관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여주인공 따냐는 평안하고 유복한 삶을 누리던 중, 청나라 연행길에 수행역관으로 따라갔던 아비가 천자의 하사품을 훔쳐 달아나다 절벽에서 떨어져 즉사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누명임에 분명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천자의 하사품을 훔친 대역죄인의 딸이 짊어지게 될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로 국경을 뛰어넘어 광활한 러시아로 향하게 된다.


그 뒤로 따냐는 그림 위조 사기꾼인 칭 할아범과 동업하여 가짜 그림을 팔아치우다가 그곳을 떠나 러시아의 서쪽 수도 페쩨르브르그에 안착하여 희대의 사기꾼 그룹에 가담하게 된다. 얼음여우 무리에 가담하여 광대한 러시아 숲을 어수룩한 유럽 귀족에게 팔아치우는 등 이 대담한 여자사기꾼의 모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기를 치다 만난 연인 이반과 같이 마지막 사기를 치기 위해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던 조선사절 민영환이 조선으로 돌아갈 즈음 하사품을 탈취하기로 하나 실패하고 조선으로 흘러들어와 러시아 공사관의 이반을 만나게 되고 때마침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와 있던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바리스타로 변신, 고종황제에게 러시아 가비를 매일 진상하게 된다. 고종황제는 커피를 무척 좋아하였는데 적절하게 쓴 커피맛이 망해가는 조선의 운명처럼 혀과 가슴에 와 닿았으리라! 이반은 아관파천 시 고종황제를 등에 업고 이완용 등 러시아파들이 벌어는 더 거대한 음모와 협잡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러시아 평원부터 대한제국 황실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질주하는 따냐의 행적을 따라가며, 따냐의 아버지를 모함한 진범은 누구이며 이반의 진실된 정체는 무엇인지? 99%는 믿으나 단지 1%에 대비하는 사기꾼들이 마지막까지 벌이는 음모와 배신이 점철되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완용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고종황제의 독살을 기도하는 무리는 누구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과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의 반전으로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숨 돌릴 틈 없이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고종황제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러시아 가비 커피전문점을 하는 따냐에게 고종이 자신의 황제복장을 한 모습의 사진과 서찰을 궁중요리사를 시켜 보냈다는 점, 따냐는 그 사진을 보며 동봉한 서찰을 읽었다. 서찰에는 고종황제께서 써 보낸 단 두 줄의 글을 보게 된다.
 
"러시아 가비는 여전한가?
이제는 어울리는 옷을 만들었으니, 한번 살펴 평하라"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동봉된 사진에는 황제의 예복을 깔끔하게 입은 '대한제국' 초대 황제께서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 계셨다. 나는 그 사진을 안고 잠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매일 러시아 시를 원어로 읽은 후에, 더덤더덤 서툰 영어로 '노서아 가비'에 얽힌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한 자락씩 들려주기 시작했다.. 노트에는 손님들이 저마다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쓰도록 했다. 그 노트에는 노서아 가비라는 제목을 붙였다....
 
두 번째 노트를 샀을 때, 나는 이런 문장 한 줄을 첯 장 첯머리에 써넣었다.
 
'커피는 끝나지 않은 당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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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관파천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
구러시아공사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 사적 제253호.
   아관파천 당시 고종과 신하들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 영향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내각은 일세일원연호(),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Waeber)와 협의하여 보다 안전한 러시아 공관으로 이동(파천)하였다.

이들은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 150명과 포()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리에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일국의 왕과 왕세자가 자국의 왕궁에 있지 못하고 타국의 공관에 피신하여 타국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친일파 대신들인 김홍집(총리대신유길준(정병하( 농상공부대신)·조희연()·장박()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이 나붙고, 그 속에 고급 관료들을 거명하며 참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순검들과 흥분한 군중들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체포하여 바로 타살하였고, 피신한 어윤중( 탁지부대신)은 다음날 지방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유길준·조희연·권영진(우범선() 등은 일본인의 보호하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한 동안 잠적했던 김윤식( 외부대신)은 결국 체포되어 다음해에 제주도로 종신 유배당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이완용·조병직(이윤용(윤용구()·이재정() 등 친러 친미파 인사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는 한편, 친일정권하에서 일본식으로 개혁하였던 ‘내각’제도를 구제()인 ‘의정부’제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공포가 도사린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조선 정부가 이와 같이 나약하여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이러한 시점을 계기로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종성()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 및 경의선()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탁지부 고문으로 있던 러시아인 알렉세예프(K. Alexeev)는 탁지부대신처럼 행세하였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 -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 중 김홍륙 관련 내용

 

 

황현

 

 

1898, 무술년, 고종 35년

 

임금을 독살하려던 김홍륙을 처형하다.

 

8월에 김홍륙을 처형했다. 김홍륙이 귀약가면서 아편 한 봉지를 꺼내 어선주사 공흥식에게 주면서 음식을 만들어 올릴 때 넣어 올리라고 했다. 공흥식은 김종화에게 시키면서 은 천 원을 주겠다고 약조했다. 김종화는 평소 서양요리를 맡아서 임금에게 올리던 자다. 만수절에 아편을 소맷자루에 숨겨 주방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가베다(커피)가 끓고 있어 그 속에 아편을 집어 넣었다. 임금은 겨우 한 모금 마시고 바로 토했으며, 태자도 맛을 보다가 어지러워 쓰러졌다. 내시와 희빈들도 맛을 본 이는 다 토하면서 복통을 일으켜 대권안이 온통 뒤집어 졌다.

 

국청을 설치하자 김종화와 공흥식은 고문도 받기도 전에 자백했다. 김홍륙이 잡혀 오기 전 공흥식이 증거를 없애려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상처가 깊지 않았다. 김홍륙이 잡혀오자 큰소리로 승복했지만 말이 안되는 소리가 많았다.

 

김홍륙.공흥식,김종화는 모두 교수형에 처했고, 김홍륙의 아내  김씨는 마침 임신한 지 5개월이 되었으므로 삼 년간 유배시켰다. 장안 백성들은 김홍륙의 시신을 끌어내 살점을 베었다. 이때부터 민영소가 대궐에서 숙직하면서 반드시 맛을 보아 이러한 사태를 예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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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는 1987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환궁한 상태였다.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내외에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역관 김홍륙은

함경도 출생. 천인() 출신이나,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러시아말을 배워 역관이 되었다. 1894년(고종 31)부터 이듬해 사이에 이범진()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 유일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활약하였다. 1895년 임최수() ·안경수() 등과 춘생문()사건을 일으켰다. 이듬해 아관파천 때 비서원승()으로 있으면서, 고종과 베베르 사이의 통역을 맡았다.

 

그 뒤 고종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리고 상작()을 함부로 조작하며 뇌물을 탐해 비난을 받았다. 윤용선() 내각이 조직되어 학부협판()으로 승진하였다가, 1898년 친러파의 몰락과 함께 사퇴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총애와 러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하면서 반개화파의 주동인물이 되어, 독립협회를 모함 ·탄압하였다. 같은 해 8월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적소 흑산도로 떠나기 직전 처 김소사(), 공홍식()과 함께 궁중 주방에 있는 김종화()를 꾀어, 고종이 즐기던 커피에 독약을 넣었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으나 태자는 마시고 피를 토한 채 쓰러졌다. 유배지에서 잡혀 올라와 관련자와 함께 사형되었다.

 

 

 



 

소설가 김탁환에 관하여...

단정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기억과 자료를 가로지르며
삶을 탐험하는 소설가 김탁환(金琸桓)은 1968년 10월 27일,군항제로 유명한 경상남도 진해에서 태어났습니다.
창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87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였고, 1989년에는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
「길안에서의 겹쳐보기-장정일론」으로 당선되었습니다.


학부 시절 '문학예술연구회(약칭 문예연)'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였습니다.

1991년 대학원에 진학하여 고전소설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시와 소설을 습작하였고,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노동문학회 '건설'에서 활동하였습니다. 1993년 동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였고첫 장편(미발표)을 탈고하였습니다.


1994년 1월 29일 민수경과 결혼하였습니다.
1994년 '상상' 여름호에 「동아시아 소설의 힘」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94년 겨울부터 '상상'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여 1996년 여름까지 문학평론 일곱 편을 연이어 발표하였습니다.

 
 
 
 
 
 
 



1995년 3월 박사과정을 수료하는 것과 동시에 해군사관학교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어 고향 진해에서 5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1995년 8월부터 1998년 6월까지 해군사관학교 교수부 사회인문학처 국어교수로 근무하였습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군사관학교 연구실에서, 비평집
『소설중독』(1996년)과 『진정성 너머의 세계』(1996)를 묶었고,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열두 마리 고래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이해 각각의 희망봉을 찾아 떠나는 자유인들의 여정을 그린 처녀작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1996)을 출간하였으며, 두 권 분량의 단편소설과 『불멸』 4부작의 초고를 완성하였습니다.

1998년 6월 제대와 함께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불멸을 꿈꾸는 인간군상들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원적 문제를 탐구한 『불멸』(전4권)이 9월부터 11월까지 출간되었습니다.
1998년 12월 8일 첫딸 김예영이 태어났습니다.

 
 
 
 
 
 
 
 
 



1999년 3월 건양대학교 문학영상정보학부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6개월 동안의 짧은 서울 생활을 접고 노을이 아름다운 뫼 논산으로 이사하였습니다. 1999년 7월, 이 시대 청춘들의 치명적인 삶과 사랑을 슬픔 어린 문체로 이야기하는 연작장편 『누가 내 애인을 사랑했을까』를 발표하였습니다.

 

1999년 12월, 조선 중기 지식인들에게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투영하여 그 해답을 찾아 헤맨 새로운 방식의 후일담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전2권)을 발표하였습니다.

 

2000년부터 2001년 늦봄까지 임경업의 젊은 시절을 성장과 방황의 관점에서 다룬 대하역사소설 『압록강』(전7권)을 출간하였습니다.

 

2001년 12월 독도를 주인공으로 삼아 460만년 동안 섬의 일생을 추적한 소설 『독도평전』을 발표하였습니다. 2001년 12월 26일 둘째딸 김문영이 태어났습니다.

 
 
 
 
 
 
 
 
 


2002년 8월 황진이의 내면을 1인칭으로 살핀 고백 소설 『나, 황진이』를 출간하였습니다. 2002년 8월 그 동안 소설을 쓰면서 고민했던 창작방법에 대한 논의들을 『한국소설창작방법연구』란 책으로 묶었습니다. 2002년 11월 김만중의 마지막 나날을 다룬 추리로맨스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을 펴냈습니다.

 

2002년 3월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로 부임했습니다.


2002년 3월 현재 김탁환은 실학파들의 고뇌와 우정, 사랑과 투지를 다룬 소설들을 쓰고 읽고 고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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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이순신의 적은 원균이 아니라 왜군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같은 엄연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김탁환(36.한남대 문창과 교수)씨가 개작해 내놓은 장편역사소설 '불멸의 이순 신'(황금가지 刊. 전8권)은 비현실적으로 이상화한 '성웅 이순신'의 모습을 지우고 역사적 현실속에서 부대끼며 살았던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3년간 교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생도들에게 이순신의 적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 원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이 상대해 싸 웠던 왜장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구요."

김씨는 이같은 왜곡의 연원을 춘원 이광수가 쓴 역사소설 '이순신'에서 찾고 있 다. 임진왜란은 당연히 조선과 왜국의 대결이었는데, 이광수는 이를 '이순신 대 이 순신을 모함한 장수와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광수의 '이순신'에는 왜장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임진왜란을 내부의 전쟁으로 치환해 놓았다"면서 "임진왜란을 마치 조선인 내부의 대립처럼 바꿔놓은 것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적 발상에 닿아 있다"고 말했다.

'불멸의 이순신'은 1998년 네 권 분량으로 발표했던 소설을 "초간본과 같은 문 장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완전히 뜯어고쳐 200자 원고지 8천500장 분량의 대하소설로 새롭게 출간했다.

기존의 이순신 일대기는 전성기였던 45-50세를 주로 다루고 있으나 이번 소설은 10-20대 젊은 시절을 새롭게 복원하고 있다. 전8권 가운데 우선 출간된 3권은 초간 본에서 가볍게 다뤘던 이순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확장한 것이다.

저자는 "조상이 대제학까지 지낸 명문가의 후손인 이순신이 굳이 32세에 뒤늦게 무과에 급제해 무관의 길로 나선 것은 당대 역사 속에서 그의 성장배경을 살피지 않 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순신의 조부는 조광조의 급진개혁에 공조했다가 가문을 기울게 했고, 그의 부친은 그로 인해 충청도로 낙향해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이순신의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지를 따라 은둔의 길을 걸었지만 이순신은 조부의 삶을 따르면서도 방식을 바꿔 문신의 길 대신 무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소설의 앞부분은 세상을 향한 반항심에 가득 찼던 이순신의 10대, 그리고 협(俠) 과 의(義)를 고민하고 방황하는 20대를 묘사하고 있다. 개인적 고민과 집안의 고민 이 뒤엉킨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인간 이순신'의 신념이 단련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조선조 명종시대를 다룬 '나, 황진이', 광해군에서 인조시대를 다룬 '허 균, 최후의 19일' 등의 소설을 통해 조선시대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을 작 품화해 왔다. '불멸의 이순신'은 두 작품의 중간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사림파의 싸움과정 속에서 이순신의 삶의 궤적을 재구성하고 있다. 저자가 이순신을 '활을 든 사림'으로 정의하는 것은 조선 중기의 역사를 사림들의 내부 경쟁과 분열과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역사관에 맞닿아 있다.

"영민한 소년 이순신은 집안 사정으로 문과에 진출하지 못했으나 마음속 울분을 달래며 대기만성했습니다. 그는 45세에 조선, 일본, 중국이 얽힌 세계대전을 만나 전쟁영웅이 됩니다. 그가 다른 장수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웠던 것은 문신 가문 에서 자랐던 그의 성장과정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순신과 원균의 대립은 사림의 피를 지녀 언제나 전위에서 홀로 고민 하고 연구했던 이순신과 무신으로 출세했던 집안에서 자란 원균이 기존의 방법을 비 판없이 답습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며 "이순신의 경쟁자는 원균이 아니라 앞에 놓인 왜군이며, 등뒤에서 끊임없이 반역을 의심하며 신하들을 추궁하고 다그쳐 쳤던 국왕 선조였다"고 말했다.

소설은 '국가는 곧 백성'이라고 여겼던 '전쟁 영웅'과 '짐이 곧 국가'라고 생각 한 '현실 권력자'의 대립을 큰 줄기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소설이 이순신의 모습을 왜곡했다는 일부 지적에 대해 저자는 "군사정권 시 절에 멸사봉공의 성웅 이미지로 고착된 이순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과정에 서 발생한 소용돌이"라면서 "문제는 누가 이순신의 삶을 논리적이고 질적으로 타당 하게 해석해내느냐에 있다"고 대꾸했다.

그는 "이순신의 삶을 다룬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첼로독주곡이라면 '불멸 의 이순신'은 이순신의 개인적 삶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속에 시인, 의 사, 장사꾼 등 100여명의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당대의 삶을 교향곡처럼 들려준다 "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임진왜란은 세계대전이었고 한.중.일에서 계속 새로운 자료가 나오 고 있다"면서 "이번 개작에 머무르지 않고 20년 후에 다시 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 으며, 앞으로 나의 작가적 인생과 함께 계속 새롭게 완성시켜가고 싶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서초동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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