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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칼리프를 뒤이은 이방의 점령 왕조들

 

칼리프를 뒤이은 이방의 점령 왕조들

 

 

 

이슬람 제국 (650–1037)

이슬람 제국은 그때까지 있었던 가장 큰 나라를 만들게 되는데

지금의 스페인 땅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의 인더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우마이야 왕조(王朝:Umayyad dynasty)

Omayyad라고도 쓰며, 옴미아드 왕조라고도 부른다.

칼리프 제국을 통치한 첫번째 이슬람 칼리프 왕조(661~750)로 아랍 왕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우마이야 국가의 세속적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긴 전통적 이슬람교도들의 불만을 반영한 명칭). 아부 수피안에서 시작된 우마이야가는 주로 메카에 모여 살던 쿠라이시 부족의 상인가문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슬람을 거부하여 627년까지 개종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 마호메트와 그의 계승자들 아래서 두각을 나타내는 행정관이 되었다. 제1차 이슬람교도 내전(656~661, 제3대 칼리프 우스만[644~656 재위]이 암살당하고 난 뒤 칼리프직의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싸움)에서 당시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아부 수피안의 아들 무아위야가 마호메트의 사위이며 제4대 칼리프인 알리를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자 무아위야는 스스로 제1대 우마이야 칼리프 지위에 앉았다.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는 두 방계 가문의 통치로 나누어진다. 즉 아부 수피안의 후손들이 통치한 수피안계(661~684 재위)와 마르완 1세 및 그의 후손들이 통치한 마르완계(684~750 재위)로 구분된다. 수피안계, 그중에서도 특히 무아위야 1세(661~680 제위)는 다마스쿠스에 칼리프의 권력를 중앙집권화시켰다. 우마이야 왕조 권력의 토대가 된 시리아군 덕택에 이 왕조는 더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경쟁상대이던 아랍 부족들을 통치함으로써 통일된 제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슬람 지배는 호라산까지 확대되었으며 메르프와 세이스탄에는 중앙 아시아 및 인도 북서지역에 대한 원정기지로서 요새도시가 건설되었고, 아프리카 북서지역에 대한 침략전쟁이 개시되었다. 새로운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위해 연이어 출정했다(669~678). 비록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출정으로 우마이야 왕조는 세속적 이미지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교도들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수피안계는 대체로 점령한 지역들에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행정관료제를 유지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것을 아랍 부족의 노선에 따라 조직했다. 이 부족적 전통에 따르면 이론상 칼리프는 '동등한 가운데서 제1인자'로서 동급의 동료에 의해 선출되고 칼리프는 '슈라'(부족회의)의 자문을 받아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자기 생전에 야지드 1세에 대한 충성의 서약(bayah)을 받아냄으로써 전통적인 선출방식을 무시하고 아랍 부족으로서는 이질적인 세습제를 도입했다. 수피안계의 통치는 내전과 683년 야지드 1세의 죽음, 684년 무아위야 2세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부족전쟁이 한창이던 684년 마르완 1세가 시리아에서 자신을 칼리프로 선언했다.

 

우마위야 칼리프조는 마르완계 아브드 알 말리크(685~705 재위)의 통치하에서 전성기에 이르렀다. 이슬람교도 군은 서쪽으로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으며 인도의 무크란과 신드를 침략했다. 또 중앙 아시아에서는 호라산 수비대가 부하라·사마르칸트·크와레즘·페르가나·타슈켄트 등을 정복했다. 아랍화의 일환으로 아랍어가 공식어로 선정되었으며, 제국의 재정을 재조직하여 그리스인 대신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의 재정을 담당했다. 이전에 유통되던 비잔틴 왕국과 사산 왕국 모조주화에 대신하여 아랍 문자를 새긴 새로운 동전이 주조되었다. 또 다마스쿠스에서 지방 중심지를 잇는 정규적인 우편제도를 도입하여 통신제도를 개선했으며 건축사업이 활발히 일어났다.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이 시작된 것은 시리아군이 비잔틴의 이사우리안 레오 3세에게 치명적인 패배(717)를 당하고 나서이다. 점점 높아가던 마왈리(비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불만을 무마할 목적으로 모든 이슬람교도들에게 민족에 관계없이 똑같은 지위를 부여한 신앙심 깊은 우마르 2세(717~720 재위)의 재정개혁은 재정상의 위기를 가져왔으며, 남부 아랍 부족(칼브족)과 북부 부족( 카이스족) 간의 분쟁이 재발되어 군사력도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히샴(724~743 재위)은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했다. 제국이 팽창의 한계에 이르자 프랑스로 진군하던 이슬람군은 푸아티에에서 결정적인 저지를 받았고(732), 아나톨리아에서는 아랍군이 패배했다(740).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투르크군의 도전과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인의 도전을 막기 위해 시리아 군대로 충원된 국경방위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히샴이 죽고 나자 카이스와 칼브 간의 분쟁이 시리아·이라크·호라산에서 대규모 반란으로 발전했고(745~746), 마왈리는 우마이야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정치-종교 분파인 하시미야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749년 서부 속주들의 지원을 받은 하시미야파는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칼리프로 선포했다. 이로써 그는 아바스 왕조의 제1대 칼리프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744~750 재위)는 대(大) 자브 강 전투(750)에서 패했다. 우마이야 일족들은 색출·살해당했지만 생존자인 아브드 알 라흐만은 스페인으로 달아나 자신을 이슬람 사회의 통치자로 선언(756),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아바스(압바스) 왕조(王朝,Abbsid dynasty)

이슬람 제국을 다스린 2개의 큰 칼리프조 가운데 2번째 왕조이다.

아바스 왕조(750-1258)는 750년에 우마이야조의 칼리프마르완 2세를 폐위시키고, 1258년 몽골족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 칼리프로서 이슬람 제국을 다스렸다. 아바스라는 이름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숙부인 알 아바스(653경 죽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알 아바스는 메카의 쿠라이시족 하심 가문 사람이었다. 718년경부터 그의 가문 사람들은 제국의 패권을 얻으려고 애썼으며, 교묘한 선전으로 많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시아파 아랍인과 호라산의 페르시아인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747년 하심 가문 사람들은 아부 무슬림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메소포타미아의대 자브 강 전투(750)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를 무찌르고,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아바스 왕조의 첫번째 칼리프로 선언했다.

 

아바스 왕조 시절에 제국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칼리프들은 우마이야 왕조처럼 서쪽, 즉 북아프리카, 지중해, 유럽 남부에 주의를 집중하는 대신, 이제 동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새 도시인 바그다드로 수도를 옮기고 페르시아와 트란스옥사니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칼리프의 통치구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교 지역과 경계선을 같이하지 않았다. 이집트·북아메리카·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현지 왕조가 제각기 칼리프의 지위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아바스 왕조는 처음부터 아랍 민족보다는 오히려 이슬람 공동체를 강조했기 때문에 이슬람 제국 내에서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은 국제적인 기반을 갖게 되었다. 아바스 왕조는 페르시아 개종자들한테서 많은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사산 왕조) 정부의 전통을 많이 이어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바스 왕조는 또한 신앙심 깊은 이슬람교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갓 생겨난 이슬람 법률을 공공연히 승인하고 통치기반을 이슬람교에 둔다고 공언하게 되었다 

 

750~833년 아바스 왕조는 제국의 명성을 높이고 세력을 강화했으며, 특히 알 만수르, 하룬 알 라시드, 알 마문 시대에는 상업·산업·예술·과학을 크게 진흥했다. 그러나 알 무타심 이슬람교도가 아닌 베르베르족과 슬라브족 용병, 특히 투르크 용병들을 사병으로 끌어들인 뒤 아바스 왕조의 세속적 권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용병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했지만, 종교를 통한 제국통합의 기반은 무너졌고, 새로운 군대 장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 칼리프를 암살함으로써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하기도 했다.

이란의 부이 왕조 945년 바그다드에 들어와 알 무스타크피(944~946 재위)에게 자신들이 다스리는 영토에서는 자신들을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때 칼리프 군대 장교들의 세력은 내부 경쟁으로 이미 약해져 있었다. 부이 왕조가 바그다드에 들어온 사건을 계기로 그후 1세기 동안 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현지의 세속 왕조가 다스리는 시대로 전환되었다. 1055년 아바스 칼리프조는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압도당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칼리프에게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세속적 권력마저 모조리 빼앗았지만 종교 지도자의 지위는 존중해주었다. 특히 알 무스타르시드(1118~1135 재위), 알 무크타피, 안 나시르 시대에 칼리프는 권위를 되찾았다. 그 직후인 1258년 아바스 왕조는 몽골족의 바그다드 공격에 무릎을 꿇고 무너졌다.

 

셀주크(Seljuq,Seljuk라고도 씀)

오구즈(구즈) 투르크멘 부족의 집권 군인가문이다.

11세기에 서아시아를 침공해 메소포타미아·시리아·팔레스타인 및 이란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제국을 세웠다. 이들의 진출은 중동지역에서 투르크 권력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셀주크 투르크의 최대 판도 1092 

                     셀주크 투르크의 최대 판도 (1092)

 

10세기 중앙 아시아와 러시아 동남부로부터 투르크민족들이 이주하는 동안 셀주크라는 이름의 족장이 이끄는 한 유목부족은 시르다리아(작사르테스) 강의 하류지방에 정착했다. 이들은 나중에 이슬람교 수니파로 개종했으며 사만 왕조와 나중에는 간자의 마무드가 이끄는 변경수비군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셀주크의 두 손자 차그리 베그와 토그릴 베그 페르시아의 지원을 얻어 그들 자신의 왕국을 만들었으며 그결과 차그리는 호라산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1063년 그가 죽은 후 동생 토그릴은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포괄하는 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알프 아르슬란 말리크 샤 통치하던 때의 셀주크 제국은 이란 전역,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시리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대했으며 1071년 알프 아르슬란은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틴의 대군을 섬멸하고 비잔틴의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황제를 포로로 붙잡았다. 이로써 투르크멘 부족 사람들이 소아시아에 정착할 길이 열렸다. 토그릴 베그가 1055년 바그다드에서 부와이 왕조에게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셀주크는 수니파 칼리프 주도하에 이슬람의 통일을 회복시킨 존재로 여겨졌다.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 샤가 이집트 변경지대까지 제국을 확장하는 동안 두 사람 밑에서 와지르(총리)로 일하던 니잠 알 물크 제국내 행정조직을 감독했다.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특색이 강했던 셀주크 제국은 이슬람 문화에 크나큰 유산을 남겼다. 셀주크의 지배시기에 마드라사(Madrasah : 이슬람 신학교) 조직이 형성되어 국가 행정기관의 관료들과 종교학자들에게 통일된 교육훈련을 시킬 수 있었다. 술탄들이 세운 많은 모스크 가운데 매우 훌륭한 건축물로 이스파한(Masjed-e-Jme)이 있다. 또한 셀주크 제국에서는 페르시아어로 된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했다. 투르크의 셀주크 제국에는 이슬람 전통이 없었으며 또한 고유한 문학 유산이 풍부하지 못했기 때문에 셀주크 제국 사람들은 페르시아 선생들이 사용하는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문화적 언어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페르시아 문학이 이란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아랍 언어는 종교서적들을 제외하고는 사라졌다. 이 제국은 테러주의 분파인 아사신 성장을 막지 못했으며 1092년 와지르 니잠 알 물크가 이들의 손에 살해당했다. 게다가 죽은 통치자의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해 나누어주는 셀주크 가문의 관행에 따라 독립적이면서도 불안정한 공국들이 수없이 탄생됨으로써 제국은 점차 약화되어갔으며 권력쟁취를 위한 피비린내나는 다툼이 잇따랐다.

 

1194년 이란의 마지막 셀주크가 전사하고 1200년경 셀주크 권력은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끝났다. 알프 아르슬란이 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거둔 승리는 오구즈 부족민들에게 비잔틴 변경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들은 곧 그 지역의 전투에서 용병으로서 지위를 굳혔다. 동로마 제국의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장군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됨으로써 이들의 영향력은 강화되었으며 점차 비잔틴 제국 황제의 동맹세력으로서 아나톨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떠맡게 되었다. 이들은 1097년 십자군에 의해 내륙지방으로 쫓겨갔으며 또한 동부지방에서는 소란스런 여러 부족들의 난맥상에 둘러싸여 있다가 아나톨리아 지역에 자신들의 술탄국을 건설했다. 왕국의 주민들은 그리스도교도,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이란 이슬람교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룸 술탄국은 당시 사람들에게 '투르크'로 간주되었다. 상업과 농업이 성하고 예술이 발전했으며 다른 인종과 종교에 대한 관용으로 질서와 안정이 유지되었다. 1230년 술탄 알라 앗 딘 카이 쿠바드(카이코바드) 1세에 의해 유발된 화라즘 샤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룸 술탄국과 셀주크 권력의 분열을 가져왔다. 호레즘 완충국가의 상실로 몽골 세력이 투르크 변경지역에 도달했을 때 셀주크는 이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1243년 쾨세다그 전투에서 패배해 셀주크 자치왕국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일부 투르크멘 아미르들이 멀리 떨어진 산간지역에서 자신들의 소규모 공국을 유지해나갔으나 셀주크의 술탄국은 당분간 몽골의 속주로서 존속했다. 마침내 셀주크 왕조는 13세기초에 소멸했다.


아랍족의 융성과 중세 이란

아랍족은 이란인들보다 문화적으로 뒤쳐져 있던 사막의 유목민족이었다. 그런 아랍족이 '大페르샤'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보통 이란을 아랍국으로들 알고 있지만 아랍과 이란은 뿌리도 언어도 다르다. 비슷한 점이라면 같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정도다. 이란은 이란이고 아랍은 아랍이다. 실제 아랍국들은 이란을 경외시 혹은 백안시한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아랍국들도 모두 아랍 형제인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를 장악한 뒤 이슬람군대가 가장 먼저 전쟁을 건 대상도 바로 이란(페르샤)이었다.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로 취임한 아부 바크르 Abu Bakr는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 동쪽으로는 사산 제국를 향해 정벌의 칼날을 돌린다. 650년 아랍군은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사산군을 대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정통 칼리프(650-661)가 멸망한 뒤 이란에는 우마이야 왕조(661-750)와 아바스 왕조(750-821)가 대를 이어받았다.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Dabooyeh)가 망국의 유민들을 모아서 작은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페르시아의 후계자로 보기엔 미약하다(다만 이들은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 950년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아바스 왕조 말기, 이란 땅에서는 반란이 줄을 잇는다. 사파르(Saffarids), 사만(Samanids), 가즈나(Ghaznavids), 부이(Buyids) 등 자잘한 왕조들이 명멸했던 시기(821-1055)를 이란의 막간(Iranian Intermezzo)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교 포교 과정에서 무슬림이 보여준 관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 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이란인의 개종이 빨랐던 것은,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 속성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유사했다기보다는 이슬람이 조로아스터의 여러 요인들을 흡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겠다). 몽골인이 한족의 문화를 배운 것처럼,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샤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버나드 루이스같은 서방 이슬람학자는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라고 말하곤 한다. 고대 페르샤 시절부터 이란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루이스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을 헐뜯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이란의 군주인 샤 (Shah)는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일례로 페르도우시(Ferdowsi, 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왕들의 책’이라는 뜻) 영역본은 샤(Shah)와 왕(King)을 구분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황제’와 ‘군왕’쯤 될 터인데,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의 자부심이 중화사상 못지않았음을 볼 수 있다.

 

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을 비롯한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 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몽골의 침입

 

몽골 제국 점령 시대(1219–1500)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의 침략으로 바그다드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관개시설이 파괴당함에 따라 이 지역은 긴 암흑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도시가 붕괴했고 농업이 쇠퇴한 데다가 파괴적인 사막 민족의 대규모 침입이 거듭되어 1258~1534년의 3세기 동안 메소포타미아 역사는 가장 단조롭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처음 80년 사이는 몽골족이 세운 일 한국의 총독들이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렸으나, 이들 중 일 한국 황금시대를 쌓은 가잔 칸(1295~1304 재위) 이외에는 모두 행정에 무능했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에만 급급했다. 1336~39년의 내전 뒤에 하산 젤라이르가 패권을 쥐었다. 하산은 1340년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젤라이르 왕조를 세운 다음 수도를 타브리즈에 정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다. 그러나 1401년 몽골의 티무르는 훌라구보다 더욱 심한 파괴를 자행했다. 몽골이 물러간 뒤 이란 북부에서 새로 일어난 투르크멘족의 카라 코윤루('검은 양'이라는 뜻) 왕조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다. 약 60년간 계속된 이들의 지배는 훗날 아크 코윤루('흰 양'이라는 뜻) 왕조를 이루는 같은 투르크멘족의 다른 세력에게 넘어갔다. 아크 코윤루 왕조의 지배 영토는 급속히 발흥한 페르시아의 지배자로 사파위 왕조 창시한 이스마일 1세에게 넘어갔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에게 무너진다. 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가잔(Ghazan) 칸 치세(1295-1304)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Abu Said) 칸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와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 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Tabriz)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Safavid, 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권력에 굴종하는 공포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오스만 제국 지배

 

 

 

사파위 왕조의 지배는 도시 지역의 치안은 급속히 회복시켰지만 야산 지대까지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통치한 26년간은 메소포타미아에는 불안한 시대였다. 오스만 제국의 동방진출은 사파위 왕조 페르시아의 변경 지대에 있는 쿠르드족과 자지라인(人)의 여러 도시의 지지를 얻었으므로 술탄 술레이만 1세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1534년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어 이후 약 4세기에 걸쳐 투르크의 한 지방이 되었다. 군사국가의 색채를 띠고 도시 지역에만 세력을 미쳤던 오스만 제국의 통치의 처음 90년간은 1623년 사파위 왕조 페르시아의 아바스 1세가 이 지역을 재탈환함으로써 일단 끝났다. 페르시아 재통치시대가 15년 계속된 뒤 술탄 무라드 4세는 다시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다(1638). 부패하고 쇠약해진 모술·바그다드·바스라 3개주의 통치자들은 매우 작은 지역의 치안 유지만을 맡았고 임무도 별로 없었지만 적어도 약 1세기에 걸쳐 외국세력의 침입을 막고 중요 지역의 질서를 유지시켰다.

 

18세기에도 이런 상태는 계속되었지만 한쪽에서는 새로운 변화도 일어났다. 오스만 정부의 내부에서는 문관이 늘어났고 그의 기능도 분화되었다. 또 군대의 세력 증대가 두드러졌으며 술탄의 영향력은 떨어졌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유럽인 상인·영사·사절 등이 나타났고 쿠르드 지방과 모술에는 지방정권이 탄생했다. 나디르 샤가 이끄는 페르시아가 다시 침략을 개시한 일, 여러 번의 싸움, 바그다드의 파샤(아메드 파샤와 하산 파샤)가 이끈 저항과 반격, 바그다드와 모술의 포위전도 18세기의 일이었다. 내정개혁 전 오스만 제국의 통치는 권력쟁탈전의 연속이었다. 개혁 이후 메소포타미아에서 오스만 제국 지배의 마지막 1세기(1831~1914)는 불완전하고 적용 불가능한 개혁이 오스만 제국의 여러 주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지고 낙후한 이 지역에까지 미친 시기였다. 동시에 이 지방이 인도로 통하는 육로의 입구에 해당하며 고고학상 또 성서 연구상 매혹적인 땅으로 유럽인에게 알려진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영국인이 관심을 보여 영국 영사들은 절대적인 힘과 특권으로 이 지방 경영에 나섰다. 19세기 중반 이래 메소포타미아의 중부와 남부는 영국의 세력권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었고, 한편 북부의 모술은 프랑스의 영향하에 있었다. 영국이 전보·우편사업을 비롯해 도로·다리 등의 건설을 시작해 이곳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 변경 지대의 불안정(1912까지 정식 국경이 결정되지 않았음)이나 아라비아 반도 내 유목민(오스만 제국은 이름뿐이기는 하나 이 땅을 자신의 영토에 포함했음)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그밖의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 있었다. 근대화한 군대는 모술·바그다드·바스라를 통치하는 사람(파샤)의 정책을 지지했다. 각 지역 통치자 가운데는 청렴하고 현실주의적인 지성을 겸비한 사람들도 약간 있었다. 이들은 알리 리다 파샤(1831~42 재위), 나지브 파샤(1842~52 재위), 모하메드 라시드(1853~58 재위), 나미크 파샤(1853~60 재위), 미드하트 파샤(1869~72 재위), 나딤 파샤(1911~12 재위) 등인데, 이들은 충성하지 않는 부족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질서있는 시책을 폈고, 또 국민이 요구하는 정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준비나 능동적인 정부기구 정비에 노력했다. 각 지역 통치자들의 이런 노력은 근대적인 법제를 바탕으로 했고, 아랍인이 가능한 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몇 십 년 사이에 정부의 기능이 강해졌고 정부와 대중, 부족민과 도시인, 종교와 사회의 관계는 서서히 개선되었다. 19세기는 특기할 만한 일은 적었지만 진보의 싹이라고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담고, 다가올 이라크 국왕 파이잘 1세(1921~33 재위)의 정부에 대해 많은 조건을 준비한 형성기였다.

 

술탄 칼리프 제도의 권위에 바탕을 둔 오스만 제국정부는 튼튼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변동과 개혁이 퍼져갔다. 1900년 이후 소수의 지식인이 벌인 문화·정치운동으로서, 레반트 지역과 이집트에서 두드러졌던 민족주의 운동은 이라크에도 전해졌다. 이 운동은 아랍의 자아의식 회복과 자치에 대한 희망, 이방인인 투르크족의 장기간에 걸친 실정(失政)에 대한 불만을 바탕으로 한 운동이었다. 아랍 민족주의 사상은 일정한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똑같은 목표도, 효과적인 행동수단도 없었으나 1920년 이후의 군주제 이라크를 걸머질 장래의 정치가들 중 몇 명은 1914년경 이미 아랍 민족주의로 기울어져 있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