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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이슬람 고토,버림받은 땅인가, 축복의 땅인가?

 

 

이슬람의 고토, 버림받은 땅인가,축복의 땅인가?

 

 

 

                                            중동 지역 위성 사진

 

 

이슬람 국가가 밀집하고 있는 중동 지역은 사막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황무지가 대부분인 땅이다. 그러한 황무지 가운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이집트,해안 연안 지역은 더더욱 중요한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 지역들을 차지하기 위해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없이 많은 나라들이 명멸했다. 마호메트가 아랍정권을 세운 이래 후대 칼리프들에 의해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슬람교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지금 이슬람교인들은 대략 세계 인구의 3분지 1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중동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간 그들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영국의 아라비아 로렌스 소령이라는 한 장교와의 약속을 믿고 오스만 제국과 목숨걸고 싸웠다. 결국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베르사이유 조약이 강화되면서 중동 일대를 지배해오던 오스만 제국은 분리되었고, 많은 이슬람 독립국가들이 탄생되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나라가 페르시아 제국의 후신인 이란이다.

 

대전 기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는 독일과 피나는 참호전을 전개하고 있는 사이, 이미 석유의 유용성을 간파한 영국은 중동 지역에 1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군대를 이란과 페르시아 만 일대에 파견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고 있었다. 영국의 주 목표가 된 나라가 바로 이란이었다. 영국에 이어 프랑스 등 강대국들은 석유의 중요성을 뒤늣게 깨닭고 중동으로 진출하면서 기득권을 가진 영국과 충돌하게 된다.그래서 그들은 비밀리에 중동 지역을 분활하여 지배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그 후 중동은 강대국의 주요 침탈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혼돈속으로 빠져들고 강대국의 조종에 이슬람 국가들의 정권은 부침을 반복하면서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된다. 제2차 대전을 겪으면서 석유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는데 독일의 패전 원인에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석유자원의 고갈이었다. 2차대전 후 최고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도 석유자원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발칸 반도를 비롯한 중동 지역 일원에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그들의 에너지 자원 확보에 세계재패 명운을 걸고 침략전쟁을 노골화하고 있다. 보스니아 사태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새천년 석유자원의 에너지 확보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란의 역사를 살펴보고 영국의 중동 침탈, 미국의 에너지 확보 전략을 살펴보자.

 


                       이란 지도. 브리태니카백과사전 지도

 

 

 

 

고대 페르시아 제국

 

 이란 고원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아주 오랜 일이다. 페르시아라는 이름 또한 오래된 이름이다. 아리아인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샤인들) 등이 모두 이 갈래다. 고대 페르시아 왕조의 시조 키루스 2세는 아주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정복민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오히려 피압박 민족들에게 '해방자'로 추앙됐다고 하는데, 바로 성경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이 바로 이 왕이다. 구약 에스라 이사야에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돼 있다. 키루스는 이란인들에게는 아주 위대한 왕, 너그럽고 지략이 뛰어난 왕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키루스 2세는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준 것은 아들 캄비세스 2세였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 파라오가 되었으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이란에서는 쿠데타 기도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비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자살했다.

 

위대한 황제들의 시대

캄비세스 2세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하니,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 제국을 페르시아라고 불렀는데, 파르시어를 쓰는 사람들의 땅이란 얘기다. 이란어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니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시아'가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시아'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네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나 뿌리는 다 똑같다.

 

페르시아에 정복된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아테네가 이 반란에 지원한 것을 빌미로 전쟁이 일어나는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쳐들어와 3차에 걸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우스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페르시아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되어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전임자 만큼이나 명성을 떨쳤던 크세르크세스 1세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대도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한다. 전쟁의 패배, 결말은 '국력 쇠퇴'다. 피정복민들이 크세르크세스 사후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 메디아 왕조와 달리 중앙 집권 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 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왕의 길'이라 불리는 역마 제도이다.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 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 시스템이기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코스(Seleucus) 장군이었다. 셀레우쿠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7년)라고 부른다. 그러나 셀레우쿠스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파르스(Fars) 지방(Farsi, 즉 페르시아어의 어원이 됐던)에서는 반(半) 유목민 파르티아족(이란족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년 -기원후 224년) 를 세웠다. 반란 지도자 아르사케스(Arsaces)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크 왕조"(Arsacid)라고도 한다.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파르티아 왕조 미트라다테스 2세(Mithradates II, 기원전 123년-기원전 87년) 치세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 공화정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시아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어(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 왕조(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왕조(Sassan, 224-652)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시르 1세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르다쉬르는 집권 뒤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들을 통제, 전국을 12개 주로 나눈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든다. 조로아스터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지정했고 정교 일치의 강력한 집권 체제를 추구했다. 그러나 아들 샤푸르 1세(Shapur I)는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 승려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우를 범한다.

 

폭군 나르세의 시대를 지나 사산조의 10대 왕인 샤푸르 2세가 즉위한다. '샤푸르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왕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즉위, 상당기간 섭정을 거쳤다. 70년 동안 재위하면서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없애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에서부터 바람 5세, 카바드 1세 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사산조의 전성기였다. 페르시아는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해, 뒷날 아랍인들에게 멸망하기까지 '르네상스'를 맞는다.

 

사산조의 역사는 로마 제국과 그의 뒤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와 갈등했던 이유는 아르메니아 지배권 문제였다고 하는데, 아르메니아는 지금도 이슬람권에 둘러싸인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다. 옛 소비에트 연방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법 자본주의적인 변신을 했는가 하면, 유대인에 버금가는 '로비 능력'으로 미국 내에서도 강력한 이민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로버트 카플란은 그의 저작 '타타르로 가는 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란 공포증'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양국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적대심도 깊다. 아르메니아 근대에 들어와 터키(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숱하게 학살됐으니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하지만 사산조 파르티아에 대면 신분 이동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기독교도가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사산조와 로마 제국의 싸움은 역시나 '양대 제국의 패권 싸움'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 자재로 이용됐다고 한다.

 

아랍족의 융성과 중세 이란

아랍족은 이란인들보다 문화적으로 뒤쳐져 있던 사막의 유목민족이었다. 그런 아랍족이 '大페르샤'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의 등장 이후였다. 보통 이란을 아랍국으로들 알고 있지만 아랍과 이란은 뿌리도 언어도 다르다. 비슷한 점이라면 같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정도다. 이란은 이란이고 아랍은 아랍이다. 실제 아랍국들은 이란을 경외시 혹은 백안시한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아랍국들도 모두 아랍 형제인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를 장악한 뒤 이슬람군대가 가장 먼저 전쟁을 건 대상도 바로 이란(페르샤)이었다.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로 취임한 아부 바크르( Abu Bakr)는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 동쪽으로는 사산 제국를 향해 정벌의 칼날을 돌린다. 650년 아랍군은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사산군을 대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정통 칼리프(650-661)가 멸망한 뒤 이란에는 우마이야드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821)가 대를 이어받았다.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Dabooyeh)가 망국의 유민들을 모아서 작은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페르시아의 후계자로 보기엔 미약하다(다만 이들은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 950년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 말기, 이란 땅에서는 반란이 줄을 잇는다. 사파르(Saffarids), 사만(Samanids), 가즈나(Ghaznavids), 부이(Buyids) 등 소규모 왕조들이 명멸했던 시기(821-1055)를 이란의 막간(Iranian Intermezzo)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교 포교 과정에서 무슬림이 보여준 관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 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이란인의 개종이 빨랐던 것은,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 속성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유사했다기보다는 이슬람이 조로아스터의 여러 요인들을 흡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겠다). 몽골인이 한족의 문화를 배운 것처럼,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샤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버나드 루이스같은 서방 이슬람학자는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라고 말하곤 한다. 고대 페르샤 시절부터 이란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에 익숙해 있다는 이야기다. 루이스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을 헐뜯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이란의 군주인 샤 (Shah)는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일례로 페르도우시(Ferdowsi, 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왕들의 책’이라는 뜻) 영역본은 샤(Shah)와 왕(King)을 구분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황제’와 ‘군왕’쯤 될 터인데,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의 자부심이 중화사상 못지않았음을 볼 수 있다.

 

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을 비롯한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 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이방에서 온 점령 왕조들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즉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헤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즉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한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에게 무너진다. 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가잔(Ghazan) 칸 치세(1295-1304)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Abu Said) 칸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와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 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Tabriz)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Safavid, 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권력에 굴종하는 공포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이슬람 쉬아파와 사파비 왕조

이스마일은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순니파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쉬아 이슬람이 국교가 된 것은 이민족의 천년 지배를 끝낸 것보다도 현대 이란의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됐다. 사파비 왕조는 초기 신정체제를 구축했다. 이스마일이 모든 권력을 갖고, 성직자와 관료, 군이 3대 권력집단으로 샤를 에워싸는 체제였다. 어쨌건 쉬아는 비주류(이슬람에는 기독교의 '이단'에 해당하는 개념은 없다)였다. 오스만 투르크(영어로는 오토만 제국, 오늘날의 터키)가 이단을 처벌한다며 1524년 이란을 침공해 타브리즈를 함락시킨다. 이란군이 반격에 나서긴 했지만 사파비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오스만은 1533년 이라크를 점령해버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지배권을 놓고 사파비 왕조를 두고두고 위협한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는 샤 압바스 (Shah Abbas)의 치세(1587-1629) 때였다. 이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압바스는 이스마일의 증손자다. 선대 왕인 이스마일 2세는 자기 아버지한테 10년간 유배됐다가 탈출해서 정권을 장악했는데, 왕이 된 뒤에 형인 무하마드 호다반데 (Mohammad Khodabande)만 남기고 친족은 물론 전조의 신하들까지 모두 도륙해버린다. 공포정치에 질린 근위대가 호다반데를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됐고, 압바스의 형 헤이다르마저 반란군을 이끌다 전사한다. 압바스는 10살 어린 나이에 반란군 지도자로 추대된다. 작은아버지에 맞서 왕위를 차지하기까지 압바스의 드라마는 '용의 눈물' 같은 영웅신화 겸 전쟁이야기다.

 

'타고난 군사전략가'인 압바스는 일단 '적의 적'인 오스만과 강화를 맺어 국경분쟁을 일단락 지은뒤 동쪽 우즈벡을 격퇴시킨다. 그리고는- 오스만과의 전쟁이다. 이라크, 그루지야, 코카서스를 탈환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그는 개혁가였다. 사제들과 귀족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관료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하고 왕조의 창시자처럼 개혁을 강행한다. 그 덕에 정교 분리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종교에 독립적인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란은 다시 동서양 교역중심지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도시를 잇는 도로망과 숙박시설을 만들어 안전을 보장하고 비단 무역을 독점, 국가재정을 확충한다. 압바스는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 섬들을 점령하고 인도양의 포르투갈 세력을 격퇴한다.

 

'전성기'를 얘기하려면 문화가 빠질 수는 없는데, 압바스는 심지어 '계몽군주'였다고 한다. 예술을 장려해 건축과 회화 등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켰다. 이스파한을 새 수도로 정하고 사원과 궁전, 학교, 다리 등을 지어 세상의 절반(Nesf-e Jahan)이라 불릴 정도였다. 이란인들은 이스파한을 '이란의 심장'이라 하고, 수도인 테헤란은 '이란의 영혼' 즉 머리라고 한다.

 

압바스 2세(1642-1666) 통치기 뒤로 사파비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압바스 2세는 아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해서 처형해버린다. 손자 사피 1세가 뒤를 잇지만, 아비의 죽음으로 비뚤어진 이 왕은 공포정치로 살육전을 일삼는다. 나라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아프간이 쳐들어와 1722년 아프간의 부족장 마흐무드 (Mahmud)가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마흐무드 1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술탄 후세인 왕의 아들이 신흥군벌 나데르의 힘을 빌어 왕위를 되찾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데르가 반역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면서 사파비 왕조의 종말을 맞이한다. 그후 나데르는 암살되고 이어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등 여러 왕조가 부침하는 혼란기가 이어진다.

 

카자르 왕조와 근대 이란

근대 이란은 카자르( Qajars) 왕조 (1795-1925)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아그하 모하마드 칸 (Agha Mohammad Khan)은 케르만 지방에서 잔드( Zand) 왕조를 멸망시키고 카자르 왕조를 연 뒤 테헤란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성격이 극악무도해서 시종에게 살해되고 뒤를 이은 아들도 사치에 탐닉해 국고를 탕진하고 아제르바이잔을 러시아에게 빼앗기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문화권인데 옛 소련 시절을 거치면서 독립한 뒤에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와 영국이 이란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는데, 러시아와 두 번 싸워서 지고 끝내 코카서스를 빼앗기게 된다. 또 그 아들은 1857년 파리조약으로 헤라트와 아프간땅을 영국에 내줬다. 헤라트는 아프간 서쪽, 즉 현재의 이란에 가까운 쪽인데 '페르샤 양탄자'의 본고장이다. 뒤에 영국은 아프간을 장악하려다 포기한 이후, 소련이 지배하다 80년대  탈레반에 의한 아프칸 내전에 휘말리어 고생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철수하자, 미국이 9.11 이후 대테러 전략의 일환으로 아프칸 탈레반 정권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게 된다.

 

낫세르 앗딘 샤( Naser ad Din Shah,1848-1896) 시절에 미르자 타키 칸 아미르 (Mirza Taqi Khan Amir) 라는 재상이 쓰러져 가는 국가를 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으나 관료들의 저항과 국왕의 견제로 결국 죽임을 당한다.  보통 아미르 카비르 (Amir Kabir) 라고 불리는 이 재상은 이란에서 크게 존경받는 인물인데, 지금도 많은 이란인들이 그의 개혁이 중단됐던 것을 아쉬워한다고 한다. 1871년 또다른 재상이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가 역시 실패. 이란의 근대화는 결국 자발적인 근대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즈음 영국이 석유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란에 대한 경제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민중의 반외세 운동도 거세졌다. 1890년에는 영국이 담배독점권을 가져가자 이슬람 지도자가 금연령을 포고, 결국 독점권을 되찾은 일도 있었다.


 

팔레비 왕조와 레자 샤의 개혁

이란 왕실은 썩어서 국가재산을 서구에 팔아치웠다. 상인과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 제한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 1906년 8월 무자파르 알딘 샤( Muzaffar al Din Shah)는 제헌을 약속하고 ,12월에 근대적 헌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그는 닷새만에 죽었다.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 Mohammad Ali Shah)는 제정된 헌법을 파기하고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코사크 부대)를 시켜 의회를 폭파해버린다. 그러자 이에 국민들이 분노하여 봉기가 일어나면서 전국으로 확산됐다. '제헌 혁명'이라 부르는 이 봉기를 이끈 제헌파들은 1909년 7월에 테헤란에 입성해 샤를 몰아내고 헌정을 세운다. 1907년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양분해 수탈을 하고 있었다. 1차대전 중 이란은 영국, 러시아, 터키군의 전쟁터가 되어 짓밟혔다. 러시아가 1917 볼셰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내정에 정신 팔린 사이, 영국은 1919년 사실상 이란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을 강요해 식민화한다. 이란인의 반영(反英)감정은 극도로 고조됐다. 이를 기반으로 떠오른 인물이 코사크 부대 사령관인 레자 칸 (Reza Khan) 이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