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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유대국가의 종언과 추방

 

유대국가의 종언과 추방

 

예수 사후, 유대민족은 로마 지배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 예수도 인간과 똑같이 십자가형을 받고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하느님의 홀연한 모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들은 실망했다. 그들을 구원해주리라 기대했던 그도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을...

 

계속되는 로마의 폭정과 대흉작으로 인한 기근과 역병이 도는 가운데 로마의 가차없는 과중한 세금은 결국 유대민족을 항거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공방전을 3년동안 치렀으나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군에게 점령되고 신전과 도시는 모두 불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도 그곳을 추방당해 쫒겨나 방랑의 길을 떠난다. 마사다 요새의 항전도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만다.

 

 

 

 

 

  

예루살렘 공방전

옥타비아누스 황제(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칼리쿨라-클라우디우스-네로로 접으던 로마는 네로의 독재와 팔레스타인 지방의 대흉작으로 기근과 역병이 만연했다. 그런대도 로마 총독은 가차없이 세금을 징수하는가 하면 일방적으로 로마 정책을 시행하여 사람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때마침 세례 요한과 예수의 등장으로 종말사상이 고조되면서, 엄격한 규율을 중시하는 과격한 종교단체 열심당이 대두, 반로마 무력투쟁을 시작하게 됐다.카이사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충돌에도 로마는 무관심하였고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금전을 강탈하는 등 분쟁의 불똥은 예루살렘까지 번져 결국 민중과 로마군의 대규모 충돌로 발전하면서 제1차 유대 전쟁이 발발했다.

 

지배자 로마와의 전면 항전의 직접적인 발단은 기원후 66년 5월 어느 날 예루살렘 교외의 로마군 주둔지를 일단의 유태인 열혈 단원이며 행동적인 민족주의 항쟁파인 극렬 게릴라들이 급습, 점령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기지가 유태인 독립 항쟁 게릴라들에게 떨어지자 전체 유태인들이 환호했고 전국에 산재한 게릴라들을 자극하여 무력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유데아,이두메아,사마리아,갈릴리 전지역의 게릴라들이 로마 점령군에 대하여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무력 봉기 첯 해는 게릴라군의 연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의 결사적인 항전은 주둔 로마군의 열세로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군은 식민지 유태민족들이 로마 정규군의 요새를 공격.점령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유태인들의 저항을 만만히 보았을 뿐만아니라 주력 부대를 시리아 지역에 투입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소수 치안 유지 병력만 남아 있었다.

 

로마군이 각지에서 피습을 당하자 이 급보를 보고 받은 시리아에 주둔 중이던 '케스터스 갈루스' 장군 휘하의 군단이 급파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67년 봄, '네로' 황제가 급히 보낸 장군으로 당시 로마의 가장 유능한 '베스파시안' 장군의 로마 최정예 군단이 진군하게 된다. 로마 최정예 군단이 진주하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유태인 게릴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력의 열세로 일소되기에 이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 티투스와 함께 정예 3군단 6만 병력을 이끌고 이듬해 3월까지 갈릴리,페레아,이도마야를 제압했다. 그러다가 네로 황제가 암살되자 잠시 공격이 중단되고 권력 투쟁에서 승이한 베시파시아누스는 69년 12월 황제에 즉위하여(재위 69-79년)하고, 마지막 남은 저항군의 거점인 예루살렘 공격은 아들 티투스에게 맡겼다. 70년 봄, 티투스는 정예 4군단을 이끌고 3년동안 계속된 공방전은 예루살렘을 완전 포위해 5월에는 성벽을 뚫고, 마침내 7월에는 안토니아 성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8월 30일, 헤롯 왕이 지은 신전은 불에 타고 한 줌의 재로 변하고 전도시는 파괴되었으며 남자는 처형되고 부녀자는 노예로 끌려가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추방되었다.

 

종군기록 사학자 '요세프스'

로마의 예루살렘 공방전 와중에 두 사람의 유태인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요차난 벤 차카이'와 '팔에비아스 요세프스'이다. '차카이'는 인멸 위기에 있던 유태인의 민족종교와 문화유산을 지킨 사람이며, '요세프스'는 당시 유태인들의 피어린 저항사를 낱낱이 기록한 역사학자이다.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면서도 한편 유태인들로부터는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기도 하다.

 

요세프스는 부유한 제사장 가정에서 태어나 토라.율법 등을 익혔으며 로마로 유학하여 일류 교육기관에서 수학한 히브리어는 물론 희랍과 로마 고전의 일인자였다. 특히 역사학에 깊은 지식이 잇었으며 로마 시민권자였다. 요세프스는 투항했다는 설과 본래 로마군 중간급 장교로 근무했다는 설이 있으나 베스파시안 사령관이 요세프스를 종군 전쟁 기록자로서 자기 군단에 근무토록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후세에 남긴 주요한 저술로는 <유태인 전쟁사>,<유태인 고대 제도 및 풍습>,< 마사다 항전사>가 있다. 그는 강한 로마를 잘 알고 있었으며 유태인들의 저항이 결국 유태민족의 멸망을 초래하는 무모한 항쟁임을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군 종군 기록자이지만 객관적으로 싸움의 전말을 기록하였으며 오히려 로마군보다 유태인의 항쟁 모습을 잘 그려 놓았다고 한다. 그를 전쟁 수행 기록관으로 채용한 것이나 기록에 대해 일체의 간섭도 하지 않았던 베시파시안 장군의 인품과 지적 수준도 대단하였던 인물이었다.

 

베시파시안 장군의 로마군은 저항하는 유태인은 물론 눈에 띠는 건물은 거의 모두 파괴하면서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압박해 갔는데 68년 중반 경에는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지역이 평정되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도 일거에 점령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성 밖을 포위하고 성 내의 유태인들의 항복을 종용하면서 지구전을 펴기로 하였다.

 

'베시파시안' 장군과 '벤 차카이'

벤 차카이는 화전을 주장한 바리사이파계의 랍비였다. 그는 일반 서민 대중들로 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로 명성있는 학자겸 랍비였는데 주전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그의 말을 들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로마와의 이번 전쟁으로 자칫하면 2천 년 유태민족과 유태민족 유산의 종말로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로마군의 결의로 보아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전체 주민의 죽음이나 노예화는 뻔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태문화의 인멸이었다. 그는 자신의 속 뜻을 제자들에게 털어놓고 방법을 함께 강구한 결과 죽은 시체로 위장해 성 밖으로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우선 전염병 같은 돌림병이 걸린 자신을 주변에 알리고 자기가 죽었음을 위장하여 관속에 들어갔다. 제자들이 관을 호송하여 성문에 도착하였다. 제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설치는 주전파에게 들키는 날이면 피살될 것은 뻔한 일인지라  싸움에 정신이 없던 주전파들을 겨우 속이고 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거짓말 같은 실화이야기다. 그는 성 밖으로 나오자 즉시 베시파우스 사령관을 찿아갔다.

 

그는 베시파우스 사령관을 만나자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그의 관상을 보았는데, 머지 않아 로마 황제가 될 상이라했다. 사령관은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청이 무었이나고 물었다. 차카이는 팔레스타인 어느 한적한 곳에 유태민족 문화유산 연구소 같은 곳을 제자들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했다. 베스파시안 사령관은 쾌히 승락했다.

 

차카이는 어떻게 그와 같은 예언을 할 수 있었을까? 네로 황제가 죽고 후계자가 없어 세 명의 인물이 황제에 올랐으나 번갈아 암살되는 등 정국이 불안정 하였으며 그런 상황이라면 군대의 강자가 반드시 혼란한 정국을 바로 잡을 수 있으니 베스파시안 장군이 거의 확실한 황제 자리를 차지하게될 가능성을 점쳤던 것이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이듬해인 69년 로마 원로원은 군통수권자인 베스파시안에게 황제 등극을 권유해왔고 그는 마침내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 공격은 아들 '티투스' 장군에게 일임하고 로마로 떠났다.

 

베스파시안 황제는 차카이와의 약속을 지켰다. 차카이는 예루살렘 에 가까운 곳에 '야브네'란 연구소를 차리고 유태민족의 종교.문화.역사의 중심 연구소가 될 '예시바'의 첯 스타트로 보고 있다. 이로써 유태 문화유산이 인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사라진 유데아 왕국

로마군은 후임 티투스 사령관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더욱 가열화시켰다. 로마군이 성을 헐어내고 성내로 진입하여 2주간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로마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기도 하였다. 티투스 사령관은 성 외곽 지역에서 유태인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도 하며 성안의 유태인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또 한 해가 흘러 3년째가 되는 70년. 마침내 로마군이 성을 함락시킨다. 성에 난입한 로마군은 유태인 남자는 모두 도륙하고 여자와 어린이는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모든 건물과 성전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되었다. 배신에 대한 보복은 철저하게 하는 것이 로마군의 전통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투입된 로마군은 8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유태인 공성군은 2만3천4백여 명에 불과하였는데 3년간이나 치열한 공성전을 전개하였다는 것은 유태인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력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티투스 사령관의 로마 개선문은 현재도 남아있다. 옛 로마 원로원 건물 옆에 서 있는 이 개선문이 바로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해 세운 개선문이다. 이어 다시 2년을 넘게 계속된 '마사다 요새 항전'은 예루살렘 함락 직후 벌어진 유태민중들의 처절한 마지막 절규였다. 그후 2세기 전후까지 유태인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상당한 전투력으로 로마군을 괴롭힌 '시몬 바 코츠바'가 가장 강력했다. 이에 로마는 '세르베스' 장군의 군단을 파견하여 산발적인 전투를 3년간이나 벌여 135년 결국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으로 유태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은 물론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대해 유태인들은 모조리 도륙하였으며 건물은 모조리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이때부터 유태인은 2천 년에 걸친 본격적인 유랑의 시대가 시작된다. 몰론 타지역에 정착하거나 바빌론 유폐시절에 이미 그 지역에 정착한 유태인들도 있었으나 예루살렘 함락 이후 명목상이나마 존재했던 유데아 왕국의 종언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유랑시대의 시작된 것이다.

 

 

 

 



☞ 이스라엘이 망국의 길로 접어든 최후의 항전지인 마사다 유적지  

 

 

마사다 최후의 항전

 

"마사다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기원후 70년. 로마는 유태민족의 국가인 유대아를 아주 철저하게 파괴했다. 당시 로마는 동맹 도시나 속주,식민지가 로마에 반기를 들거나 배신을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하였는데, 로마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아는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경우였다. 로마는 반기를 들었던 그리스 도시국가 '코린트'와 한니발의 조국 '카르타고'를 철저하게 응징하였는데, 몇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 도시를 점령하여 모두 불태우고 건물을 완전히 파괴한 다음 땅에는 소금을 뿌려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에 반기를 든 유대아의 섬멸하기 위하여 로마군은 엘루살렘을 포위한 후 3년간이나 공격하였는데, 유태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결국 로마군에 점령된 에루살렘은 성인 남자는 모두 처형되고 어린이와 여자들은 노예로 끌로 갔으며 성전은 파괴되는 등 전도시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때 예루살렘 근방에 살던 유태인 960명은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로마군을 피해 사해 근방에 위치한 마사다 요새로 피신했다. 로마 10군단은 이들을 추격하여 마사다를 포위하였다. 마사다는 천연적인 요새로 주변 지형보다 해발고도가 높은 고지대 지형으로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로마군은 2년 간이나 마사다를 포위 공격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공성이 어려운 지역임을 알고 지구전법으로 고사작전과 공성작전을 병행하였다. 로마군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사방에 숙영지를 편성한 후에 마사다 요새와 외부와의 일체의 접촉을 차단한 후에 공격 방안을 검토하였다. 공격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한쪽 면뿐이라 고민끝에 그리스 수학자들을 불러와서 공성 방안을 연구하였다.그 결과 노예 및 병사들을 동원하여 경사면으로 토성을 쌓아 올라가서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불에타지 않는 가죽을 둘러친 공격 전차와 투척기(카타필라),램(공성용 대망치)를 만들어 경사면으로 밀어올려 정상부근에서 성채 내부를 공격하였다.

 

마사다 요새 유태인들은 후일에 발견된 유물로 판정한 결과 '에쎄네' 종파로 알려졌으며 종교적인 열정이 남다른 유태인들이었다. 로마군도 마사다 요새의 유태인들이 골수분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후환을 염려해서라도 마사다는 반드시 공격하여 섬멸해야할 임무가 주어졌다. 마사다 요새내 유태인 지도자는 '엘라자르 벤 야르'로 이들은 저항 2년 째에는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떨어졌다. 로마군이 수원을 파버렸기 때문에 우물도 말라버린 것이었다. 이제 투항하느냐 전원 자살하느냐의 마지막 선택만 남았다. 유태교 신앙에서는 자살이 금지되어 있으나 그들은 자살을 선택하였다.

 

뒷날 이들의 최후가 밝혀지는데, 로마군에 종군했던 '팔에비아스 요세프'라는 유태인 사학자에 의해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마사다 공방전의 자초지종과 마지막 광경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 살아 남은 전투원 남자들이 가족들을 먼저 죽이고 저희들끼리 서로 찔러 죽였는데 용케도 두 명의 여자와 다섯 명의 어린이들만 집단 자살에서 살아 남았다고 한다. 

 

이 마사다 비극에 대한 후세 유태인들의 견해는 상당 기간 동안 부정적이었다. 웬만한 내용은 탈무드에 남겨 놓아 후세의 교훈으로 삼는데 마사다의 기록은 찿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많은 유태인 상류층 내지 지식인들은 마사다 같은 무력에 의한 로마와의 싸움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무모한 저항이 낳은 집단 자살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태인 지식인들의 이런 견해는 로마군에 대항한 엘루살렘 공성전에서도 드러나는데, 로마는 정치적인 지배에만 저항하지 않으면 그대로 두는 근본적으로 포용하는 식민지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세금만 잘 내고 군사적인 도발만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총독을 두면서도 형식적인 그 민족을 통치하는 왕정을 인정하여 통치하였다. 온건노선의 유태인들은 극렬 분자들의 쓸데없는 모험적인 저항 때문에 오히려 엘루살렘 성전 파괴나 마사다 비극같은 상황을 처래하였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시민권도 얻도록 노력하고 로마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얼마던지 자기들의 정치와 종교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는데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사다는 근년에까지 잊혀져 왔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1902년대 히브리 작가 '아이작 림단'이 시로써 당시의 이 비극적인 마사다 항전사를 노래하여 이 장편의 시가 유태인 사회에 회자되면서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수많은 유랑 유태인들이 새삼 당시의 비극을 되씹고 울었다고 한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