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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헤롯 왕과 그리스도교의 태동

 

헤롯왕과 그리스도교의 태동

 

우리는 이슬람교가 태동하기전 그리스도교의 탄생을 살펴봄으로써 그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서 비롯되었듯이 이슬람교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는 왜,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으며 예수란 인물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역사적으로 예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있는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당시 유대 사회는 어떤 사회였는가? 그리고 어쩌면 유대교의 이단으로 출발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과 이후 서구 사회에 확산된 이유는 무었인가? 그렇게 되기까지 그들은 포교활동을 어떻게 전개했는가를 살펴보자.

 

                 


요르단강 서안도시 헤브론 부근에 있는 헤로디움(Herodium)의 산마루 유적지를 찍은 항공사진. 촬영일자 미상의 이 사진은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이 공개한 사진이다. 한 이스라엘 고고학자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한 산마루 유적지에서 고대 예루살렘과 성지(聖地)의 전설적 건설자로 알려진 헤롯왕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헤브루 대학이 발표했다.(AP)

 

 

'헤롯' 왕

동방세계 지배에 나선 로마는 '폼페이우스'가 실권을 잡자 '셀레우코스' 왕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시리아를 침략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안티우코스 13세(재위 기원전 69-64년)'를 무너뜨렸다. 이로써 240년에 걸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는 막을 내렸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유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로마의 시리아 주로 편입되었고, '시리아'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 80년에 걸친 유대의 '하스몬 왕조'의 지배도 막을 내렸다.

 

'헤롯' 왕의 아버지는 부유한 '이두마이아'인이었던 '안티파트로스 2세'였다. '안티파트로스 2세'는 그의 아버지 때부터 유대 왕국의 '하스몬 왕조'로부터 '이두마이아'의 모든 일을 위임받았다. '안티파트로스 2세'는 그의 아버지를 능가하는 지도력을 갖고 있었으며 '이두마이아'뿐만 아니라  전 유대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다양한 책략을 썼다.

 

'안티파트로스'는 유대 왕국의 '하스몬 왕조'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 왕의 장남 '히르카누스'를 매우 친밀하여 그를 조종하고 있었는데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에 의해 제사장 자리를 박탈 당하자 '나바티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로 피신해 '나바티아' 왕인 '아레타스 3세'를 꼬드겨 5만 대군으로 유대 왕국을 공격하게 하여 '아리스토불루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바로 그때, 시리아를 원정 중이던 '폼페이우스'가 이 소식을 듣고 부하 장군을 보내 둘을 화해시켰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포위 함락시켰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이후에도 수차례 반란을 기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그무렵 로마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여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나타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청을 듣고 당시 서로 권력 투쟁 중이던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화해를 주선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대리고온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초기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궁지에 몰리자 '시리아'에 주둔중이던 로마군에게 신속한 지원병을 이집트로 보내도록 명령했다.

 

이때 '안티파트로스'는 이 소식을 듣고 소아시아의 시리아로부터 오는 로마군에 대해 대대적인 지원을 해줬을 뿐 아니라 자신도 정예 3000명의 유대 병사를 이끌고 맨 앞에서 로마군과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진격했다. 또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국경 부근의 '페르시온' 포위전에서도 가장 용맹하게 싸웠으며, 이집트 델타 지역에서도 반란군과 조우했을 때 왼쪽 날개를 지휘하면서 맹활약했던 것도 '안티파트로스'였다. 그의 이러한 활약으로 '카이사르'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기원전 47년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고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안티파트로스'는 '나바테아' 왕국의 귀족 가문 여성인 '큐프로스'를 아내로 맞았다. 아내 '큐프로스'와의 사이에 '파사에로스','헤롯','요셉','훼롤라스' 등 4명의 아들과 '살로메'가 태어낫다. 차남 '헤롯'이 후일 '헤롯 대왕'이라 일컬어진 인물이고, '안티파트로스'는 15세의 '헤롯'을 '갈릴리' 지사, 형인 '파사에로스'를 '예루살렘' 지사로 임명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공화주의자인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되고 역모의 주동자인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시리아 총독이 됐다. 그러자 '하스몬 왕조'의 '안티고노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사에로스'와 '헤롯'은 '카시우스'와 협력해 이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그즈음 로마에서는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돼 '안토니우스'가 동방 지배자로서 '카시우스' 등을 제거했다. 그러자 '파사에로스'와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 둘은 유대의 4분령 태수로 임명됐다.

 

                   

                                                팔레스타인 지역 위성 지도

 

기원전 40년 페르시아에 본거지를 둔 '파르티아'가 시리아를 침략해 예루살렘까지 약탈했다. 이에 편승해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노스'는 '파르티아'의 도움을 받아 한때 '하스몬'가를 부흥시켰으나 (재위 기원전 40-37년) '파사에로스'와 '헤롯'은 이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이 힘에 밀리자 '헤롯'은 유대를 탈출하여 로마로 달려가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유대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청이 받아들여져 로마는 '헤롯'을 유대 왕으로 삼기로 했다. '헤롯'은 로마의 지원을 등에 업고, 유대로 돌아와 예루살렘에 있는 '안티오고스'를 항복시키고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써 '하스몬 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안티파트로스'와 '헤롯' 부자의 공통점은 교묘한 처세술을 이용해 난세를 헤쳐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티파트로스'의 '폼페이우스'에 대한 헌신, 이어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 '카이사르' 사후 '카시우스'에 대한 '헤롯'의 지원, 그후 '안토니우스'에 대한 변심, 나아가 '안토니우스' 사후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충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시류를 놓치지 않고 당대의 로마 권력자들에게 교묘하게 영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특히 '헤롯'이 '옥타비아누스(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년)'의 신임을 받아 예전의 '다윗' 통일왕국에 필적하는 영토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헤롯' 왕은 공공사업 건설자이기도 했다. 예루살렘 신전의 대확장은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여 '헤롯'이 죽은 뒤 64년에 끝났다. 당시 이 신전의 웅대함은 대단하였다고 하며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탄식의 벽'(일명 '통곡의 벽')은 바로 이 헤롯 제3신전의 서쪽 벽이다. 그 밖에  '세바스텐' 이라는 헬레니즘풍 도시, 지중해 연안의 '카이사렌'이라는 대항만 도시, '마사다'를 요새 기지로 다시 건설하고 나아가 자신의 이름을 딴 '헤로디온'과 '마카에로스'라는 요새도 건설하였다.                    
                                                        

 

그러나 '헤롯'의 약점은 그의 출생에 있었다. '헤롯'은 '이두마이아'인 태생의 반쪽짜리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이에 '헤롯'은 기원전 37년 예루살렘에 포위된 상황에서 '히르카누스 2세'의 손녀딸로 '하스몬'가의 여성인 '마리암네'를 아내로 선택한다. '하스몬'가와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혈통에 대한 불신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헤롯'은 아내의 동생인 '아리스토불루스'를 제사장으로 임명했으나 잘 생긴 청년으로 유대인의 인기가 치솟자 그를 '에리코'에서 수영할때 익사시켜 죽여버린다. 그리고 '하스몬'가의 왕위 계승자인 '히루카루스 2세'를 암살하고, 그의 아내인 '마리암네'와 그 어머니도 처형했다. 기원전 7년에는 아들 '알렉산드로'와 '아리스토불루스'를 모반 혐의로 처형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맏아들 '안티파스'까지 죽이는 등 그는 끝까지 왕위에 대한 집착과 모반에 대한 의혹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 가운데 예수가 태어나게 된다.

 

예수 탄생과 그리스도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일까?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이런 물음에 우리는 명쾌한 대답을 내리지 못한다. 정확하게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명확하지 않다. 예수의 생애를 기록했다는 신약의 4대 복음서(마르코,마태오,루가,요한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이름이 등장하는 역사적 기록이나 사료는 �아볼 수가 없다. 복음서에 따르면 유월절 행사를 위해 수많은 군중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가 수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런 내용을 기록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과 모세가 실존 인물인지 여부가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것처럼 예수의 존재도 실증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나 이들이 생존한 역사적 배경은 충분히 입증할  수 있었다. 다시말해 이들이 존재했다는 객관적 정황들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예수의 경우 역사적 연대가 구체적이다. 비록 구전에 근거하지만 예수가 죽은 뒤 불과 50-70년 후로 생각되는 시기에 쓰인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존재는 더욱 현실적인 모습이 되어 우리 앞에 제시됐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복음서는 신약성서의 순서에 따라 80년대 작성된 마태오의 복음서(이하 마태복음),70년대 작성된 마르코의 복음서(이하 마르코복음),80-90년대 작성된 루가의 복음서(이하 루가복음), 90년대 작성된 요한의 복음서(이하 요한복음)이다.

 

이들 복음서가 쓰인 목적은 무엇일까? 도쿄대학 총장을 역임한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예수전-마르코복음서에서>를 인용하면,

 

"마르코는 통칭.본명은 요한.그는 예수의 직계 제자인 베드로의 형제이며 바올 밑에서도 일했다. 그는 이 두사람을 만나기 이전까지통역 겸 서기와 같은 일을 했다. 마르코복음은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에 대해 보고들은 것을 말하고,이를 마르코가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후 64년베드로와 바올이 로마에서 순교했다. 66년 로마는 예루살렘을 침략했고,결국 에루살렘은 70년 함락됐다. 베드로와 바올이라는 두 지도자를 잃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강한 불안속에 살았다. 이때 마르코는 한시라도 빨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네 불탔고,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를 바탕으로 쓰였다.마태오와 루가 두 복음서는 예수의 어록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자료,이른바 Q문서 등을 인용해 마르코의 기록 중 미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보충했다. 이 때문에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복음의 2분지 1분량박에 되지 않고, 네 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짧다. 루가복음도 마태오복음과 길이가 같다. 요한복음은 앞서 말한 세가지 복음서(공관 복음서라고한다)와는 달리 보다 독자적인 시점에서 예수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가 아닌 초역사적.우주적 존재인 신의 아들 예수로서의 존재가 강조되고 있다.

 

마르코복음은 가장 충실하고 소박하게 예수의 생애를 전하고 있으나 그의 출생이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예수의 탄생을 기록한 복음서는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 뿐이다. 마태오복음은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고, 이를 안 요셉은 몰래 마리아와 연을 끓으려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된 아기가 성령의 힘이었음을 알렸고,요셉은 마리아를 받아들였다. "예수께서 헤로데 왕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동쪽에서 별을 본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와 유태인의 왕으로 태어난 분을 뵈러왔다"고 했다. 이말을 들은 헤롯 왕은 몰래 박사들을 불러 베들레헴에서 그 아이를 �으면 바로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박사들은 갖 태어난 예수를 뵙고 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뒤늦게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안 헤롯은 분노해 베들레헴 주변의 2세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그러나 요셉은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그기 있으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이른바 성가정의 이집트로 떠난다.

                       

 
                           

한편 루가복음에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이야기가 똑같이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6개월 후 예수 탄생을 예고한다.이어 로마의 호구조사 실시에 따라 요셉은 다윗가의 혈통이므로 갈릴리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의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런데 마리아는 달이 차서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 머무를  방이 없으므로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그후 루가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대신해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오늘 다윗의 동네에 당신들의 메시아가 나셨다. 이분이야말로 메시아시다"라고 크게 기뻐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아가 구유에 누인 아기를 �아 찬송했다고 적혀 있다.                     

                             
               

 

복음서 작성도 기록자의 마음

예수 탄생을 어디까지 믿어야할까?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이야기는 설화나 전설에 불과하며 역사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어려운 점들이 많다. 산달을 앞둔 마리아가 남편 요셉과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170-180킬로미터나 되는 일주일 이상 걸리는 거리를 여행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그리고 간난 아기를 안고 이집트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네게브 사막과 이집트 사막지대를 통과하여 여행하였다는 것은 갓난아기가 견딜수가 없는 여행길이다.

 

게다가 2명의 복음서 작성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동방박사들이 빛나는 별을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했다는 것, 요셉이 베들레헴 출신이고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으로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왔다는 점, 또 목자들이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발견한 점 등 한결같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베들레헴의 조그만 나라 유대 왕이 될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기에 멀리서 그들이 왔을까? 그리고 같은 동방박사가 아닌 목자는 무엇인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면 요셉의 아들도 아니오 다윗의 후손도 아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목자,메시아가 나타나기를 너무나 오랜 세월을 기다린 유대민족의 간절한 희망사항이 복음서를 과장되게 만들었다는 결론이다. 모세가 죽은 후 모세의 신격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유대민족은 그의 무덤조차 비밀로하여 아무도 그 위치를 모른다. 그런데 예수는 왜 성령,천사,동방박사,부활,메시아,다윗 후손으로 만들면서 신격화를 만들기에 애를 쓰면서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신화같은 이야기를 복음서에는 기록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이라는유일신이 아닌 예수라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태교는 그리스도교를 이단이라고 비하하면서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목수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아들로 헤롯 왕(기원전37-기원후4년) 시절 나자렛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로마의 호구 조사가 시행되었던 해이기도 하다. 기원전 7년 동쪽 하늘에 헬리해성이 출현한 해이거나 기원후 4년 물고기좌에 목성과 토성이 겹쳐진 해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호구 조사가 시행된 해는 헤롯 왕의 아들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을 지배하던 아르켈라우스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폐위되고, 유대는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로 전락한 기원후 6년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아르켈리우스의 영지는 시리아에 편입되어 집정관 대행인 구레뇨가 사리아인들의 재산을 조사하고 아르켈리우스의 저택 매각을 위해 파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헤롯 왕 시절인 기원전 12-7년 사이에 태어낫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예수의 탄생을 두고 기원을 나누는 서구력은 명백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

마르코에 따르면 예수가 홀연히 모습을 나타낸 시점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이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를 떠돌아 다니는 예언자로 회개의 세례를 했다고 기록했다. "예수는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아와 세례를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루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다스린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었다. 갈릴리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이었고 이두레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의 동생 필립보, 아빌레네 지방의 영주는 라사니아였는데 이들은 모두 헤롯 왕의 아들이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위정자들은 로마 황제와 권력자들에게 아첨하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급급하였으며 힘에 의한 폭정으로 법에 명시되지 않은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등으로 이에 대한 원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유대 민족은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먼저, 사두가이파다. 이들은 제사장을 포함하여 귀족,대토지 소유자 등이 이에 속하며 로마 제국의 지배체제에 순응하며 특권층으로 사회 지도층을 형성했다. 둘째, 바리사이파다. 이들은 중간 그룹으로 사두가이파를 비난하면서 정치에 무관심하고 생업에만 열중하며 오로지 시나그고에서 랍비의 종교 자도자를 배출하면서 율법 준수만을 고집했다. 셋째, 에세네파다. 이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와 공동생활을 통해서 금욕적인 수도원 생활을 했다. 대표적으로 쿰란교단으로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로마에 항전하다가 전원 옥쇄한 교파이다.

 

세례 요한은 이 에세네파의 흐름을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광야에서 생활했다. 그는 당시의 황폐하고 불안한 시대를 배경으로 이 세상에 종말이 도래함을 강조하고 곧 나타날 심판자를 전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통한 회개를 선언했다. 세례 요한의 열화와 같은 설교에 사람들은 경외심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명성도 높아가자 그 소문을 듣고 유대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 강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 또는 예언자라고 불렀다.

 

요한에 따르면 우선 회개가 선행된다면 세례로 인간을 정결하게 할 수 있다. 즉 세례를 통해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가 곧 회개의 상징이었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서는 변신하게 된다.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려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탄생했다고 하였다. 예수의 변신은 실제로 순식간에 일어났는데 일종의 신내림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변신하듯이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후대의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도 동일한 현상을 겪게되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도 같은 경우로 볼 수 있다.

 

예수에게는 어머니 마리아와 야곱,요셉,유다,시몬이라는 네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아버지 요셉은 이미 죽었다고 추정되며 예수는 목수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한 집안의 기둥 역활을 했다. 그런 예수가 돌연 집을 떠나버렸다. 가족들은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후 갈릴리에 다시 나타난 예수는 "회개하라. 곧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이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예수의 가족들과 이웃사람들은 "그가 미쳤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요한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위정자 헤롯 안디비는 불안과 위협을 느끼고 그를 붙잡아 사해가 내려다 보이는 원추형 요새 마카에로스에 가두었다.

 

살로메와 세례 요한의 목

이두마이아 출신인 헤롯 왕은 10명의 여성으로부터 수 십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는 3명의 자식과 아내인 마리암네 1세 등을 의심해 차례로 죽이고 유언장을 몇 번이나 고쳐쓰고서는 결국 남은 아들 중 세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해 주었다.

 

우선 아들 아르켈라우스는 헤롯 왕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유대.사마리아 지역 통치를 위임했다. 그는 반란에 대량학살로 진압하자 로마 황제는 그의 영토를 압수해 시리아 속주로 편입시키고 그는 갈리아 지방의 나르보넨시스(지금의 오스트리아 빈)으로 추방했다.

 

둘째, 헤롯 안티파스는 아르켈라우스의 친동생으로 헤롯 왕의 유언대로 갈릴리와 페레아(요르단 동안 지역)의 영주가 되었다.

 

셋째, 빌립. 그는 예루살렘 출신인 클레오파트라와 사이에 난 아들로 북트랜스와 요단(바타네아,드라코니디스,아우라니티스)의 영주가 되었다.

 

문제는 둘째 아들 헤롯 안티파스다. 그는 기원전 8년경부터 수십년간 로마에 유학하며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그는 아버지 헤롯 왕처럼 대규모 건설 토목 공사를 벌였는데, 기원후 18년경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명을 받아 갈릴리 호수 서안에 수도 티베랴(지금의 티베리아스)를 건설했다. 또한 그는 그의 이복 동생인 헤롯 보에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연모해 동생으로부터 빼았았다. 헤로디아에게는 이미 본 남편인 헤롯 보에투스와 사이에 살로메라는 딸이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에게도 이미 아내가 있었는데 이웃 나라인 나바테아 왕 아레스타 4세의 딸이었다. 안티파스의 소행을 알게된  아레스타의 딸은 나바테아의 수도 페트라로 돌아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자 분노한 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유대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페트라(요르단): 요르단 남부에 있던 고대 도시.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다 106년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됐다.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아버지 헤롯 왕과 마리암네 사이에 태어난 이복형 아리스토불루스의 딸로 조카뻘이며 형제의 아내 였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근친간의 결혼과 탐욕을 율법에 어긋난다면서 맹렬히 비난하였는데 헤롯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 보다 헤로디아가 결혼을 반대하는 세례 요한을 더 미워했다고 한다. 아래는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내용이다.

 

"어느날 잔치가 벌어져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게 되었는데 초대된 손님들이 매우기뻐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의붓딸인 살로메에게 "자신의 왕국의 반이라도 줄 것이니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던지 말해보라"고 했다. 살로메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라고 물엇다,. 그러자 헤로디아 왕비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고 했다. 그러자 살로메가 헤롯 안티파스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다. 이에 헤롯 안티파스는 이미 약속한 것이며 손님들이 보는 자리인지라 경비병을 감옥으로 보내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오도록 지시 했다. 얼마후 경비병이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와서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녀의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실화가 아니며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소설과 영화 ,그림 등으로 많이 묘사된 이장면은 살로메의 매혹적인 춤과 헤로디아와 헤롯의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요한이 갇힌 페레아의 마카에로스 요새는 변경지역이며,헤롯 왕이 생일 잔치를 티베리아 궁전이 아닌 변경에서 할 리가 없었고, 당시 근친간의 결혼은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였으며 왕의 딸이 잔치에서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관습은 없었으며 생일 축하연을 여는 관습도 없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헤롯 안티파스는 비교적 오랫 동안 권좌를 유지했으나 헤로디아가 헤롯 안티파스 몰락의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헤로디아의 친형제인 아그립바 계략에 몰려  로마 황제 칼라쿨라의 불신을 사게 되어 영토를 압수 당하고 부부가 같이 갈리아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