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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델로스' 섬의 번영

'살라미스 해전' 승리후에도 페르시아가 다시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아테네'는 기원전 487년,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국가들을 비롯해 '에게' 해의 섬나라들과 <델로스 동맹>을 맺고 그 본거지를 '델로스' 섬에 두었다. 이 동맹을 주도한 '아테네'가 주체가 되어 동맹 도시들이 모은 자금을 관리하면서 금고를 '아폴로' 신전에 두었다. '아테네'의 해군력이 다른 나라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델로스 동맹>을 축으로 '아테네'는 '에게' 해의 '델로스' 섬이 그리스 정치.경제의 중심이 되었고 '델로스' 섬은 '에게' 해의 주요 상업항으로 번영했으며 그리스는 '에게' 해를 지배하게 되었다. '아테네'의 주도적인 역활에 경계심을 느낀 '스파르타'와 5세기 후반 서로 격돌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일어났다. 이 오랜 소모전은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지만 '스파르타'의 패권에 반발하는 '코린토스'가 다시금 '아테네'를 끌여들여 반스파르타 연합을 결성, 두 세력이 또다시 충돌하였는데, 이것이 '코린토스 전쟁(기원전 395-386년)'이다.

 

이러한 가운데 페르시아는 양쪽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면서 어느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였다. '코린토스' 전쟁은 결국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손을 잡고 아테네를 굴복시킴으로써 끝났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이중적 개입을 거쳐 이른바 '안탈키스타 화약'이 성립되면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지배권을 얻게된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마케도니아'

 

 

지금의 북부 그리스와 남부 '불가리아'를 포함한 고대 '마케도니아는 서쪽으로는 '일리리아',동쪽으로는 '투라키아'에 접해 있었고, 산악지대의 '상부 마케도니아'와 저지대의 '본토 마케도니아'로 나누어져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중반, '필리포스 2세(재위 기원전 359-336년)'가 그때까지 분립하고 있던 상부 마케도니아를 편입해 '일리리아','에피루스',남쪽의 '테살리아',동쪽의 '트라키아',북쪽의 '파이오니아'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급속도로 국력이 신장됐다. 마케도니아는 신장된 국력으로 남쪽의 '칼키디키' 반도,'테살리아','포키스','보이오티아' 등 그리스 본토에 대한 남하정책을 펴자 그리스는 주변의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이를 저지하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 공작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아테네'는 '테베'와 동맹을 맺고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와 격돌하게 된다.아테네.테베 동맹군의 중보병 약 3만 5000명과 마케도니아 보병 3만 명이 대결한 '카이로네아 전투'는 마케도니아의 승리도 돌아갔다. 당시 마케도니아군의 왼쪽 부대를 지휘하던 약관 18세의 알렉산드로스는 종횡무진 활약을 보여 그리스 중보병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이미 그리스 중보병은 마케도니아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승리의 원인은 ?째,그리스군은 전쟁시에만 동원되는 농민군인 반면에 마케도니아군은 그리스군과는 달리 프로부대인 상비군이었다. 둘째, 전투 방법과 지휘에도 큰 차이가 있었는데, 중보병끼리 정면에서 격돌하는 정공법을 회피하고 적진 약탈, 음모,매수 및 기동성을 살린 게릴라 전법 등으로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다. 셋째, 마케도니아군의 장비와 전투대형이다. 장비는 비교적 경장비였으며 기동력이 뛰어났다. 우선 보병(페제타이로제)이 만드는 밀집방진은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 보병과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으나 마케도니아군의 창의

 

길이는 그리스의 2.5미터에 비해 2배 이상의 길이인 5.5미터까지 길어졌고, 창끝도 날카롭게 만들었다. 창의 무게는 6.5킬로그램으로 기존 창의 7배 이상 무거웠기 때문에 양손으로 들어야 했다 그래서 원형 방패는 그 크기가 작아지고 목이나 어께에 걸게 했다. 투구와 흉갑,아대는 가죽이나 합성 소재를 이용했다. 기존의 밀집방진이 전면의 3열까지 창을 수평으로 들고 전진하는 형태였다면 마케도니아군은 전열 5열까지 창을 겨누고 전진했기 때문에 창을 겨눈 길이가 그리스의 중보병보다도 2.5미터-3미터까지 길어졌다. 마케도니아군의 밀집방진 대형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틈이 없었고 공격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처럼 강력한 보병 군단과 함께 기병부대가 연계작전을 펼쳤는데 기병은 '헤타이로이'라 불리는 소귀족으로 이루어진 군단이었다. '헤타이로이'는 왕이 자신의 측근들로 구성한 동료부대였다. 또 보병 '페제타이로이'는 보병 '헤타이로이'가 되는 것이며 '왕의 벗'이라는 칭호를 보병에게도 내림으로써 왕과의 친근감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기병대는 방패와 창.검으로 무장한 중기병으로 구성돼 접근전에서는 I 자형 진형으로 민첩하고도 과감하게 움직였으며, 그리스 동맹군의 기병대보다 기동력이 뛰어났다. 이 중기병 기병대와 밀집보병 부대의 일체화된 공격은 그리스군에게는 처음보는 새로운 전술이었다.

 

또 방패부대(히파스피스타이)라 불리는 보병 별동부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는 방어 장비를 충분히 갖춘 상태로 짧은 창으로 무장하고 기병이 돌격한 후에 뒤따라 ? 번째로 공격하는 보병이었다. 기병의 초기 공격과 그 후의 밀집보병의 틈을 메우고 공격을 이어주는 역활을 하였다. 그밖에도 경장비부대,투석부대,궁수부대를 미롯하여 창을 던지는 투척부대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모든 부대들은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그 후 '필립포스 2세'는 '펠로폰네소스'로 진격했고,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도시국가가 마케도니아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스 본토의 모든 도시와 에게 해 섬의 모든 도시들과 함께 그리스 연맹을 조직해 연맹 가입국 간의 상호평화 준수와 이를 어긴 도시에 대한 제재를 약속하고, 이와 더불어 '필립포스 2세'를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그리스 연맹은 '필립포스 2세'의 주장대로 페르시아 원정을 승인하고 원정군 소집에도 동의했다.

 

기원전 336년 '필립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귀족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해 그의 페르시아 원정은 끝내 이루지지 못하고 4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왕비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가 '필립포스 2세'와 헤어지자 어머니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 아버지 필립포스 왕과 한때 소원해지기도 했으나 부자기간의 갈등은 곧 해소되었고 약관의 나이에 '알렉산드로스 3세(재위 기원전 336-323년)'가 아버지 '필립포스 2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교육열이 높았던 '필립포스 2세'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해 13-16세 때까지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맡겼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 중에도 '호로메스'의 <일리아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하니, 그리스 문화나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즉위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북부와 '테베'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 동맹으로 하여금 자신이 부왕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됐음을 정식으로 승인하도록 했다. '코린투스'는 동맹의 조약을 위반한바, 그 처리를 위임받은 동맹 도시들은 '코린토스'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토지를 동맹 도시에 분배하였으며 '테베'인은 모두 노예로 삼았다. 동맹 이사회의 결정이라는 형태였으나 이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였다.

 

 

기원전 334년 봄, 본국 마케도니아 내정은 부왕 필립포스 2세 시절 측근이던 '안티파트로스' 장군에게 일임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부사령관에는 '필립포스 2세'의 부하였던 명장 '파르메니오'를 지명했다. 해협을 건넌 병력은 보병 3 -4만,기병 4000-5000명 규모였다. 보병과 기병에는 그리스 동맹군이 합류하였고 기타 5000명의 그리스 용병이 참가하여 전체의 30%에 달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대의명분은 페르시아가 '그리스 신전을 불태우고 파괴한 것에 대한 신성 모독에 대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코스','이수스','가우가멜라 '등 3차례의 전투로 페르시아군을 격멸하고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여 궁전과 신전을 불태움으로써 일단 그 목적은 달성되었다.

 

제1차전 '그라니코아' 전투

? 번째 '그라니코아' 전투는 소아시아 북서부에 있는 '그라니코스'(지금의 '코카바스' 강)강가에서 벌어졌다. '그라니코스' 강은 이른바 아시아로 통하는 문이라 불리는 '프리기아'의 중요한 관문이다. 이 강을 건너면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은 지척이고 그 길은 페르시아 제국의 소아시아 중추인 '사르디스'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재위 기원전 336-330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가슴에 창을 맞았지만 '클레이토스' 등 측근들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

 

전투가 끝나고 '고르디움'의 신전에 들린 알렉산드로스는 '고르디움 매듭'으로 불려진 복잡한 매듭이 있었는데 '이 매듭을 푸는 자는 아시아를 지배자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매듭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매듭을 보자 한 칼에 베어 매듭을 풀었다고 전한다.

 

 

 

제 2차전 '이수스' 전투

기원전 333년 가을, 제 2차전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대륙 경계에 있는, 오늘날 터키공화국 남동부 지중해 연안의 '실리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이수스 전투'다. '실리시아'는 동쪽으로 '아마나스' 산맥,북서쪽으로 '타우루스' 산맥이 솟아 있으며 '시리아'로 빠지는 좁은 관문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수스'는 '실리시아' 남쪽에 펼쳐진 작은 평원 너머 동쪽 끝에 있는 산악지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에서 처음 다리우스와 직접 대치했다.

 

애초 수십만의 대군을 거느린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를 배신하고 페르시아로 망명한 '아뮨타스'의 조언으로 '아마나스' 산지의 남쪽, 시리아로 펼쳐진 '소코이' 평원에서 알렉산드로스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자 참을 성없는 다리우스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아뮨다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간신배들이 알렉산드로스가 두려움에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믿고 자만심에 빠져 페르시아 대군을 '아마나스' 산중의 좁은 전장에 배치했다. 이를 간파한 알렉산드로스는 지형을 이용한 좁은 지역에서 적을 포위하여 격멸시켰다. 다리우스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함께 그의 어머니와 왕비,왕녀 등 왕실의 부녀자들을 남겨둔체 황급히 도망쳤다.

 

다리우스는 바빌론으로 도망와서 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세 번째 결전을 준비했다.  그동안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를 뿌리뽑기 위해 시리아,페니키아,이집트로 원정을 떠나 이들을 굴복시켰다.

 

기원전 332년 1월, 이집트는 무저항 백기투항을 했고,알렉산드로스는 '멤피스'에서 '파라오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나일 델타 서쪽에 처음으로 식민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오늘날까지 지중해 무역,문화의 도시로 찬란한 영화를 간직한체 남아있다.

 

제 3차전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331년 10월1일, 마케도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은 세 번째이자 최후의 결전에 나서게 된다. 장소는 오늘날 '북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 하구에 있는 '가우가멜라'(지금의 '텔 고멜') 평원이었다. 이때 페르시아군은 수십만에 이르는 보병과 기병, 양쪽 바퀴에 칼날을 단 전차 200대, 그리고 코끼리 15마리까지 가세한 대군이었다. 양측이 마주 대치하자 병력이 적은 알렉산드로스군은 횡으로 페르시아군과 대치하여 전개하였으나 중앙은 페르시아군에 비해 병력이 적은 관계로 3열 횡대 대형으로만 전개하고 좌.우측에 기병대를 포함한 중보병 주력을 배치했다.

 

전투가 개시되자 알렉산드로스는 우측 주력을 이끌고 우측으로 이동했다. 페르시아군의 지휘관들은 보병 병력과 같이 전투 대형에 합류하여 지휘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군의 지휘관들이 말을 타고 나팔,수기,북,피리,등 각종 신호와 전령을 이용하여 효율적인 지휘를 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주력군을 이끌고 우측으로 이동하자 페르시아군 좌측 진영이 알렉산드로스군을 따라 좌측으로 이동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 기병대에는 경보병이 투석기,창,활 방패로 무장하고 뒤따랐다. 시간이 지나자 페르시아군 중간에 간격이 발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병대와 중보병 주력의 방향을 좌측으로 돌려 I 자 대형으로 간극 틈사이로 과감하게 돌진해 들어갔다. 갑작스런 알렉산드로스의 중앙 공격에 페르시아군 좌익이 혼란에 빠졌다. 뒤따르던 경보병이 간극의 틈을 확장하면서 밀집보병과 공격을 연결했다. 좌측 중앙이 돌파된 페르시아군은 좌측 전투 대형이 무너지면서 흩어지자 알렉산드로스가 후방 본진 근방에 나타났다. 후방 본진의 안전지대에 갑자기 적이 나타나자 이에 놀란 다리우스는 전세가 아직 기울어지기도 전에 부대를 버리고 호위대와 같이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추격하지 않고 궁지에 몰린 좌측 주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돌렸다. 페르시아군은 다리우스가 도망치자 일시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완벽한 승리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도 '바빌론'에 무혈 입성해 엄청난 양의 재물을 손에 넣었다. 그는 나아가 페르시아 본토로 진격해 수도인 '수사'를 거쳐 '페르세폴리스','파사르가다에'에 입성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도시를 수도로 삼았는데, 그중에서도 이 두 도시는 수사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특히 '페르폴리스'는 '페르시아인의 도시'라는 의미로 파르사의 중심지였다. 파르사는 키루스 2세의 고향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에서 4개월간 머물면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했던 이 도시의 궁전을 불태우게 된다. 그 후 메디나의 수도 '엑바타나'에 진군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그곳에서 또다시 '박트리아'로 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테살리아'군과 그리스 동맹군을 해산, 귀국시켰다.

 

그 후 다리우스는 측근이던 박트리아인 '베수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살해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지내고 그때부터 자신을 스스로 "페르시아 왕의 후계자'라 칭했다. '옥수스' 강(지금의 '아무다리' 강)을 건너 도망친 베수스는 결국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잡혀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후 이란 동부-아프가니스탄-박트리아 등 과거 페르시아 변경이었던 땅들을 정복한 후에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따라 남하했다. 그래서 이윽고 '인더스' 강에 도달했고, 그기서 더욱 남하해 현재의 '펀자브'주 '히파시스' 강(지금의 '베아스' 강)에 이르렀다.

 

동방 원정은 이곳에서 끝났다. 장기간의 정복 전쟁으로 병사들의 반발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병사들을 설득하여 복귀의 길에 올랐는데, 또다시 7개월 동안 남쪽으로 행군하여 인도양으로 나와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혹한 사막을 횡단해 기원전 324년 2월,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수사'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로스는 불과 12년 만에 이렇게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땅을 수중에 넣었고, 인도의 일부 지역에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빛과 그림자

 

알렉산드로스는 군사적인 면에서 천재였다고 한다.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도 압도적인 대군을 상대로 모두 완승을 거두었다. 정세를 파악하고 불리한 지형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랐고 용병술,기병을 활용하는 능력이 돋보였으며,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의 본진을 향해 돌격하는 등 전략과 전술이 매우 뛰어났다. 페르시아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실전 경험이 없었던 다리우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용맹함이 신화적으로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다고 본다. 모든 자료는 그리스인의 입장에서 기술된 것 뿐이다. 과장된 기술이라고 반박하기에는 사료가 ?아보기 힘든 것은 페르시아측의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투 기계로 단련된 마케도니아군과 오합지졸의 페르시아군과의 전투는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문제라 본다.

 

후대에 '포에니 전쟁'에서 전개된 알렉산드로스에 버금가는 수재자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있다. 한니발 전쟁을 살펴보면 한니발이 지금의 스페인 반도인 '에스파냐'에서 출발시에는 약 9만 명의 병력이었으나 '론' 강 등 수많은 강과 밀림을 헤치고 지나면서 그 지역 '갈리아'인들의 저항을 물리치는 등 알프스를 넘어 아탈리아 반도에 도착하였을 때는 4만 명의 병력만 남았다. 이에 한니발은 갈리아인들을 설득하여 병력을 보충하여 약 5만 명수준을 유지했다. 한니발은 약 5만의 병력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 석권하면서 로마군을 가는 곳마다 격멸시킨 것은 병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휘관의 전략.전술과 병사들의 전투기술이었다. 이정도의 병력 규모가 기동력,군량 보급,병력 운용,전술 지휘면에서 가장 적당한 병력 규모로 볼 수 있다. '칸나전투'에서 한니발은 5만의 병력으로 8만 명의 로마군을 섬멸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양익포위 전술의 전형적인 복사판이었다.

 

한니발은 부대 이동중에도 사방에 정찰대를 항시 내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고 포로를 심문하여 적에대한 모든 사항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적은 아군의 위치를 몰라도 아군은 적의 위치,병력 규모, 이동로,지휘관 성격,훈련 정도,적의 습성,부대 구성,전술.전략까지 모든 것을 파악하고 대비하는 철저함이 있었다. 또한 기병 운용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점도 같다. 한니발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기병과 갈리아 기병을 특히 중용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말을타고 자란 사람들이라 말위에서는 자유자재로 행동할 수 있는 우수한 기병들이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의명분은 '필립포스 2세'의 유지를 받들어 '페르시아가 저질렀던 신성 모독에 대한 복수'였으나 그의 진정한 목표는 페르시아를 멸망시킨후 '아시아의 왕'이 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래서 페르시아를 대한 그의 태도는 다리우스의 죽음을 확인한 이후 그는 스스로 '페르시아 왕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지방 총독을 임명함에 페르시아인들을 중용했다. 또한 군대에도 페르시아인을 그리스인과 동등하게 채용했으며 마케도니아인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기병을 중용해 차례로 기병군단에 편입시킴으로써 마케도니아 기병을 더욱 강화했다. 또 그는 페르시아 왕의 의복을 입었으며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인들에게도 절을 하는 페르시아 궁중 의식을 강요했으나 측근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취소했다. 그는 피를 섞는 작업을 강조하였는데 그 자신 스스로 박트리아 왕의 딸 '록사네'와 결혼하였으며 다리우스의 딸과도 결혼했다.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을 장려하기 위하여 수사에서 개선을 축하하는 대연회를 열고 80명의 무장을 페르시아인 여성과 결혼시켰다. 또 1만 명의 병사들에게 페르시아 여성들과 결혼을 장려하고 거액의 결혼 자금을 하사했다.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에 비해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수준이 낮았다. 당시의 마케도니아는 결코 선진국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문명에 감화되고 영향을 받은 것은 알렉산드로스 자신이었으며 그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동방 세계의 그리스화를 의미하는 문화 전파, 이른바 헬레니즘 문화는 오히려 그리스.마케도니아 문화가 동방화 된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포악한 일면도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고결한 인품에 부하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으나 술을 마시면 성격이 돌변했다. 그는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죽마고우이자 기병친위대대장이었던 '클레이토스'를 술자리에서 사소한 다툼 끝에 창으로 질러 죽였다. 마케도니아의 기병을 지휘하며 중요한 모든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싸웠던 '필로타스'도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 고문 끝에 투석형에 처해졌다. '필로타스'는 부관 '파르메니오'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아들은 모두 동방 원정 중에 죽었다. '파르메니오'도 나이 70세로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를 도와 마케도니아를 일으킨 장수였으나 그도 처형당하고 만다.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이자 철학자인 '칼리스테네스'도 대왕의 정사를 기록하기 위해 원정에 참가했으나 페르시아 의식을 거부했다고 처형됐다. 알렉산드로스가 술자리에서 처형한 측근과 부하 장수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 였다고 한다.

 

이처럼 광기로 가득찬 잔혹함 때문에 역사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이중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불태운 것도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한 결과였다고 한다. 그는 장대하고 화려한 '페르스폴리스' 궁전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을 것이며 그 놀라움이 점차 질투로 변했을 것이다. 그 궁전을 불태움으로써 페르시아를 굴복시키고 페르시아 왕임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그는 바로 후회를 하고 불을 끄려 했으나 이미 불길은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스인의 복수를 위해 그와 같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불태운 점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었으며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죽었다. 이틀동안 이어진 연회가 끝난 후 열이 나기 시작하였고, 6월 18일부터 27일까지 고열에 시달리다가 28일 초저녁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짧고도 굵은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