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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

 

이슬람은 페르시아 제국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메디아의 한 지방 부족 정권에 불과하던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켜 아시리아,신바빌로니아,메디아,리디아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서아시아를 포함한 이집트,사마르칸트,인도의 인더스 강,북으로는 도나우 강 남으로는 팔레스탄인, 알라비아 반도 남부까지 거대한 아케메네스 제국을 건설했다. 다리우스 왕 시절에는 제국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하여 정치,문화,사회의 체계를 구축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실현한다. 그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반란을 계기로 그리스와 지중해 패권을 놓고 3차례에 걸친 전쟁을 하게되는데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끝까지 굴복시키지는 못하게 된다. 한편 유대 민족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비빌론 유수에서 풀려나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게 된다. 유대 민족은 귀환 후 초토화된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예루살렘 재건에 착수하여 신전을 재건축하고 성벽을 보수했으며 유대교의 체계를 확립한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영광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출현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페르시아 지방의 패권

 

메디아 왕국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이란 남서부 파르사를 중심으로 번성한 나라로, 파르사는 오늘날 시라즈가 주도인 파르스주 일대를 가리킨다. 파르사는 원래 북방지역에서 이주.정착한 고대 이란 부족 파르수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민족이 언제 어디서 이주해 이곳에 정착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학자들은 기원전 1000년 무렵 중앙아시아의 스탭 지대에서 이란 고원지대로 이주해온 인도.아라비아어족의 이란어계 민족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민족의 이동은 오랜 시간을 들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이뤄졌을 것이다.

 

여러 차례의 민족 이동 중에는 메디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기원전 8세기 이후 원주민인 엘람인을 몰아내고 서이란 중부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를 수도로 삼아, 아르메니아에서 이란 서쪽 고원지대에 이르는 왕국을 세웠다.

 

또 다른 대표적인 민족 이동이 바로 페르시아인(파르수아)이었다. 기원전 835년 아시리아 사료에 처음으로 이 민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이란 남부로 이주, 이곳을 근거지로 정착했다. 당시에는 독립국이 아닌 메디아 왕국에 속한 영토에 불과했다. 그러다 기원전 559년 키루스 2세가 메디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수립하자 이란 남부를 가르키던 파르사라는 명칭이 이란 전역을 뜻하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을 페르시스라 했고 라틴어 형태인 페르시아로 불렀다. 따라서 페르시아는 외부에서 지어진 이름이며 이란 사람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이란이라고 불렀다. 이는 '아리아인의 나라'라는 뜻이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 후 파르티아 왕국(기원전 248-226년)을 거쳐, 기원후 226-651년 사이 아랍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이란 전역에 군림했다. 사산 왕조의 목표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페르시아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메디아 제국(기원전 728년 - 기원전 550년)

                    

 

페르시아인은 앞서 언급한 사산 왕조가 7세기 중반 무렵 아랍에 의해 정복되면서 이슬람화하기 시작했다. 예언자 마호메트는 그 후계자들은 신의 말씀인 아리비아어 <코란>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런 종교적 문화는 아리비아 반도 전역은 물론, 시리아.메소포타미아.이란 정역.북아프리카까지 주민들을 무슬림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페르시아인들은 끝까지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를 버리지 않았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부흥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 중반 무렵 아케메네스 가문의 테이스페스(재위 기원전 675-640년)를 따라 지금의 이란 남부 파르사에 이주했다. 테이스페스의 맏아들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가 되는 카루스 1세(재위 기원전 645-602년)다. 하지만 그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 아케메네스 가문은 메디아 왕국에 종속된 한 지방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또 이들 영토의 북방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엘람인 왕국이 흥망을 거듭하고 있었다.

 

메디아인도 같은 인도.유럽계 민족이지만 이들은 기원전 7세기 중반 무렵 통일왕국을 형성, 그동안 자신들을 지배해온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했다. 더 나아가 신바빌로니아의 나보폴라사르와 손잡고 기원전 612년 강대국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했다. 이후 메디아는 소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해 리디아를 공격했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하리스 강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카루스 2세다. 그는 앞서 종가인 메디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신바빌로니아의 너보니두스(재위 기원전 556-539년)와 연대하여 메디아를 무너뜨렸다. 키루스는 또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을 무너뜨리고 소아시아까지 수중에 넣었다.신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는 키루스의 공격을 우려한 나머지 이집트 등과 손을 잡고 리디아를 지원했으나 기원전 539년 거꾸로 키루스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수메르를 시작으로 아카드 제국.제3우르 왕조.바빌로니아.신바빌로니아(칼데아 왕국) 등 셈계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는 고대 오리엔트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키루스 대왕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창시한다.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바빌로니아 제국를 물리침으로써 최고로 강한 나라에 이르게 된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키루스 원통이라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1879년에 발견되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수 있으며 노예제를 금지하며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은 급여를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한다. 제국의 영토는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 최고의 영토가 된다. 아케메네스의 영토는 인더스강에서 부터 유럽에 이르렀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통일하였다.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때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가 격돌하는데 이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으로 부른다. 잘 알려진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와 스파르타 300명이 나라를 지켜냈던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은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전쟁이야기이다.

                             

 

키루스가 지배한 영토는 서쪽으로는 그리스의 여러도시를 포함한 소아시아에서 남쪽으로는 바빌론을 넘어 시리아.팔레스타인.페니키아까지,동쪽으로는시르다리야 강에 이르는 박트리아까지 광대한 지역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키루스는 박트리아 유목민 마사게이타이와 전투에서 전사한다. 키루스의 사체는 수도 파사르가다로 옮겨져 매장됐다. 키루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했고, 이집트는 그후 20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키루스는 불과 25년 사이에 아시아를 통일하고 역사상 존재하지 않은 대제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키루스는 단지 무력만으로 이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그의 통치의 큰 특징은 식민지 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그대로 존중하는 관대한 정책이었다. 키루스 왕은 타 민족과 융화하는 방법은 그들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해주면서 그의 통치에 순종시키는 방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는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처럼 강압적인 통치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것을 그는 보았기 때문이었다.

 

키루스는 메디아 왕국의 조직이나 지배체제를 그대로 계승했다. 몰론 페르시아인의 특권적 지위도 유지했다. 그러면서 메디아인을 대거 관직에 등용하는 등 포용 정책을 실시했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귀로에 불의의 사고로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다리우스 1세다. 다리우스가 즉위하자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엘람,바빌론.메디아.아르메니아.파르사에서까지 반란이 일어났다. 제국은 사분오열되었지만 다리우스는 1년간 모두 9명의 반란 지역 왕을 진압하면서 제국을 안정시켰다. 지금의 이란 서부 '바흐타란'에 있는 고대 페르시아어.바빌로니아어.엘람어로 새겨진 '비시툰 비문'이 다리우스 왕의 전승  기념비가 생생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다리우스에 의해 더욱 확대되었는데,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에서 트리키아의 도나우 강까지, 동쪽은 인더스 강,북쪽은 카프카스 산맥에서 중앙아시아 옥수스 강을 건너 사르다리아 강까지,남쪽은 이집트에서 아라비아 반도까지 이어지는 유래없는 대제국을 확립한 것이다.

 

팍스 아케메니아

다리우스는 이 광활한 지국을 20개 주로 분할, 각 지방에 총독을 두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각 주는 경제력에 따라 세금을 은화로 징수했으며 화폐와 도량형도 통일했다. 또 각 주는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자주적인 통치 방식을 인정하면서 정보.치안조직망을 가동하여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지를 감시했다. 또 각 주와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왕의 길'을 정비하여 중간 중간에 역참제를 운영했는데 각 지역은 일주일이면 중앙에 문서가 전달되도록 시스템을 가동했다. 또 다리우스는 군사력도 강화했는데 군대는 백.천.만의 단위로 구성되며, 기병과 궁병.보병으로 나누고 1만 명으로 구성된 친위부대는 '불멸의 부대'로 불렸으며 그중에서 1000명의 최정예 대원을 뽑아 왕실 호위병으로 운영했다.

 

다리우스 왕은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했는데, 그는 수도 파사르가다에 대궁전을 건설하려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그의 묘지가 거대한 석단위에 직사각형 모양의 돌을 피라미트 형태로 쌓아올려 그 위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석실을 마련하여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오고 있다. 다리우스는  훗날 수도로 삼은 수사의 궁전 건설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놀랍게도 다리우스는 파르사에도 대궁전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