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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오니아 반란으로 페르시아는 그리스와 3차례나 운명의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팍스 아케메네스 제국을 구가하고 있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그리스에 대한 보복으로 기원전 492년 부하 장수로 하여금 대군을 그리스 공략에 투입하여 육군은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역을 평정 복속시키고, 해군은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해안도시들을 휩쓸었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해군이 폭풍을 만나 전멸하자 페르시아 육군도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철수하게 된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는 다시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여 직접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다리우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정벌하기 위하여 600척의 겔리선에 20만-50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군을 싣고 그리스 반도의 동쪽 '낙소스'에 상륙하여 6일만에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도시를 파괴했다. 당시 에레트리아는 도시를 비우고 대부분 철수한 상태였다. 페르시아군은 다시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하여 마라톤 평야에 도착하였는데, 아테네는 약 1만 명의 방어군으로 페르시아 수십만 군대와 마주했다. 헤르도토스의 기록대로라면 수십대 :1의 전투다. 그런데 장비와 무기,훈련면에서 그리스군이 우수하다지만 그의 기록은 그리스군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군은 중앙의 보병을 3줄로 횡대로 배치하고 주력군을 양족에 배치했다. 공격이 시작되자 중앙의 그리스군을 향해 페르시아군은 공격을 시작했다.그러나 그리스군은 양쪽 날개의 주력군이 페르시아군의 후위를 포위하면서 공격했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은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스군 200여명 전사, 페르시아군은 6400명의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바다에서도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막아냈다. 이것이 마라톤 전투의 개요이다.

기원전 485년. 다리우스 왕은 그리스와의 2차 전쟁에서 패전에 대한 설욕도 하기전에 사망하고 왕위를 이어받은 크세르크세스가 기원전 480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여 그리스를 재차 침공하게 된다. 페르시아군은 헬리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의 '드리스코'에 집결하였다가 그해 7월 마케도니아의 '테르메'로 이동하였는데 총 병력은 528만 3225명이었다고 한다. 페르시아군은 '세피아스' 곶과 '테르모필리아' 해안에 상륙하여 아테네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의 지휘관인 '테미스토클레스'는 적은 병력으로 '테실리아' 평원에서의 전투는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아테네 서북쪽 13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테르모필리아' 협곡을 선정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스파르타 정예 장병 300명과 기타 부대 4000여 명으로 협곡 방어에 나섰다. '테르모필리아'는 좁은 협곡으로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공격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전투가 개시되자 이틀간이나 격렬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하던 '레오니다스' 왕은 3일째 적이 샛길을 통해 후방으로 우회하게 되자, 기타 부대를 철수 시키고 300명의 정예 병력과 끝까지 분투하다 전원 장렬하게 전사한다는 기록이다. 이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최근 '300'이란 영화로도 절찬리에 상영된 바 있다. 

테르모필리아 협곡을 통과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에 무혈 입성하여 신전을 포함하여 전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이미 아테네 시민과 병력은 전원 살라미스 섬으로 대피한 이후였다. 승리의 최종 관문은 해전이었다. 그리스 함대는 380척, 페르시아 해군은 1400척이나 되었다. 페르시아군은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에 말려 '살라미스' 해협의 좁은 만을 향해 전면 공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도망가던 그리스 함대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페르시아 해군을 향해 공격을 실시하자 좁은 해협에서 숫자가 많은 페르시아 해군은 기동력이 상실되고 서로 충돌하는 등 혼전을 거듭하다가 괴멸되고 만다.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참패를 언덕위에서 목격하고는 더 이상의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반란 진압을 핑계삼아 병력의 일부를 남겨놓고 소아시아로 철수하였다. 이상이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의 개요이다.

기원전 479년. 스파르타 '파우사니아' 왕은 5만 명의 병력으로 그리스에 남아있던 페르시아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테베 '근처의 '플라타이아' 평원에 페르시아군과 마주하고 진을 쳤다. 전투가 개시되자 그리스군의 양익 포위 전술이 전개되자 오합지졸의 페르시아군은 조직적인 전투능력이 상실된 상태였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마드로니우' 장군이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일시에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퇴각하기 시작했다. 소아시아로 돌아가던 나머지 병력도 마케도니아 알렉산드 1세의 매복에 걸려 대부분 전멸하고 만다. 이상이 3차에 걸친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대략이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전쟁 상황도
날짜 : 기원전 500년경 - 기원전 448년
장소 :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키프로스,이집트
결과 : 페르시아의 패퇴
교전국
아테네, 스파르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
페르시아 제국과 연합군
지휘관
밀티아데스
테미스토클레스
레오니다스
페리클레스
다리우스 1세
마르도니우스
다티스
크세르크세스 1세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과 페르시아 제국이 격돌한 일련의 전쟁을 말한다.

 

흔히 페르시아 전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기원전 480년부터 479년의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한, 두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본토침공을 말한다. 이 두번의 전쟁에서 모두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이 승리하여 페르시아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다.

 

오늘날 이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사료의 대부부은 그리스 역사가들(특히 헤로도토스)과 일부 로마 역사가들의 사료이다.

 

 전쟁의 배경

그리스는 암흑기를 지나 각지에 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의 도시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당시 그리스는 지중해 연안 일대에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여 수많은 해양도시국가를 건설하였는데 '아나톨리아' 서부의 '아이올리스' 지방과 '이오니아 '지방에 그리스인들이 많은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특히 '에게' 해와 접하는 '이오니아' 서족 지방은 그리스에서도 교역과 문화가 가장 번성하던 지역이었다. 기원전 7세기 중반 이후 이들 도시들은 '리디아' 왕국에 종속됐다. '리디아' 왕국의 지배는 비교적 온건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가문 출신의 '키루스' 대왕이 '리디아'의 '크로리소스' 왕과 대립하게 되자 소아시아 서남부 지역에 있던 '밀레투스'를 제외한 도시들은 '이오니아 연합'을 형성, '리디아' 쪽에 붙었다. 그러나 승리할 것으로 믿었던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이 맥없이 무너져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에 굴복하게 된다. '키루스' 대왕은 그리스 각지의 자치를 인정하는 동시에 페르시아에 충성하는 참주를 내세워 이들 도시를 지배했다. 

 

 페르시아의 총독은 이들 그리스계 도시들에 전제군주를 심어놓고 '왕중의 왕'인 페르시아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게 했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황제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원정에 성공하자 소아시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의 페르시아에 대해 불만이 더 커졌는데 많은 상업과 무역을 일찍부터 페르사아에 편입된 '페니키아'인들이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캄비세스 2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는 '리비아'를 정복하고 인도에 이르기 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판도를 넓혔다.

 
이오니아 반란 

기원전 513년 '다리우스 1세'는 발칸반도 원정을 단행한다. 그는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을 정복했고 마케도니아의 '아민타스 1세'는 페르시아의 신하가 되었다. 이 원정에서 '밀티아데스'는 다리우스의 부하로 참전했는데 다리우스가 '다뉴브 '강을 건너 '스키타이'인들의 지역으로 넘어갔을 때 다리를 끊어 함정에 빠트리고 페르시아를 공격하자는 그리스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499년 '밀레투스'의 '아리스타고라스'가 주도하여 '이오니아'의 반란을 일으켰다. 소아이사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가 임명한 폭군을 축출하고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의 지원을 받았는데 '아테네'는 배 20척을, '에레트리아'는 5척을 지원했다. 이 반란은 소아시아의 해변과 키프로스에 까지 번졌지만 그리스인들은 통일된 지도력이 없었었고 비그리스인들은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았다. 페르시아는 3개의 부대를 보내어 이 반란을 진압했다. 해군은 '이오니아'의 그리스 해군에 의해 패배했지만 육군은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카리아'와 다른 여러 도시들의 항복을 받았다. 결국 '이오니아'는 고립되었고 페르시아의 대군에 밀려서 기원전 494년 함락되었다.

 전쟁의 경과

     다리우스 침공

기원전 493년까지 마지막까지 남은 반란군도 페르시아의 함대에 의해 괴멸되었고 페르시아는 이 기회에 '에게' 해 동쪽의 섬들까지 판도를 넓혀갔다. 다리우스는 반란이 진압된 후 '밀레투스'에서는 신전을 약탈하고 주민은 모두 노예로 만들거나 강제로 이주시켰지만 나머지 반란 도시들은 놀랍게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사위인 '마르도니우스'를 이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해 뒷처리를 맡겼는데 지역별로 공평한 세금을 부과하고 민주주의 방식도 일부 부활시켰으며 죄인들을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다리우스 1세의 이러한 유화책은 그리스 본토에 대한 일종의 선전으로 보여진다.

 

기원전 492년 봄 엄청난 대군이 '마르도니우스'의 지휘 아래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해군은 '에게' 해 해안의 해안국가들들 휩쓸었고 육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진군해 들어가서 복속시켰다. 그러나 아토스 산에서 페르시아 해군 선단은 폭풍을 만나 몰살했는데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300척의 배가 침몰하고 20,0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마르도니우스'는 남은 군대를 소아시아로 퇴각시켰다. '트라키아'의 부족인 '브리간스'는 퇴각하는 페르시아 군을 맞아 격렬하게 저항하여 '마드로니우스'에게 부상까지 입혔는데 결국 항복했다. '마르도니우스'에 의한 이 원정이 과연 그리스 침공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헤로도투스는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단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다시 정복하여 '이오니아 '반란의 싹을 잘랐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진군이 필요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마라톤' 전투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다시 한번 원정군을 조직하여 이오니아의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정벌하기 위해 떠났다. 정확한 원정군의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600척의 겔리선이라고만 밝혔을 뿐이고 후대의 사가들의 기록은 200,000에서 500,000만까지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페르시아 원정군은 '낙소스'로 상륙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에레트리아'까지 진군하여 6일만에 '에레트리아'를 함락시켰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신전들은 파괴당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에레트리아' 주민이 소개되어 끌려갔다고 하는데 10년후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 '에레트리아'에서 7척의 전함은 지원한 것을 보면 상당수 주민이 살아남아 도시를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공략에 나섰다. '아티카' 지방 동쪽의 '마라톤' 평야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향해 진군했다. 페르시아군의 침략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전령을 보내어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고 했으나 스파르타는 종교적인 이유로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테네는 자력으로 방위에 나섰다. 숫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아테네를 공략했는데 당시 아테네의 병력은 약 10,000명정도로 추산된다. 육지에서 두 세력은 '마라톤' 평야에서 싸웠는데 아테네군은 길게 보병을 배치하고 좌우 양날개에 최정예군을 배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아테네군의 중앙이 밀렸으나 좌우의 부대가 페르시아군을 협공하는데 성공했다. 아테네군의 전사자는 200명 남짓, 페르시아군은 6,400이 전사했다고 한다. 아테네군은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바다쪽에서 아테네 해군도 페르시아의 함대를 막는데 성공하여 페르시아는 후퇴했다. 이 전투의 승전보를 가지고 아테네로 달려온 한 병사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이것이 현대 올림픽 마라톤이 유래가 된다.

 

<마라톤 전투 전개도>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페르시아군이 더이상 무적이 아니고 그리스 국가들도 연합하여 싸우면 승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르시아에 굴복했던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편으로 돌아섰다. '키루스 2세 '이래로 정규군의 육전에서 한번도 패한적 없는 페르시아 육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유일하게 패배함으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고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의 약화를 우려할 처지가 되었다.

      이후 10년간의 정세

'마라톤' 전투이후 10년간 그리스의 정세는 크게 변한 것은 없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이 때 페르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리스의 고대 올림픽 경기에 참가했는데 올림픽 경기에는 순수 그리스인들만 참가 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에서는 '레오니다스'가 권좌에 올랐다. 아테네는 다가오는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에 나섰다. 기원전 488년 '도편추방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어 페르시아에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추방시켰고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강경민중파와 '아리스티데스'의 온건귀족파로 나뉘었다.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군비증강에 따른 자력방위론을 주장하는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활용하여 정적인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하고 정권을 잡은 후 광산수익을 국고에 귀속시키고 군비증강에 힘썼다. 페르시아의 재침공이 점차 현실화 되자 북부의 일부 그리스 국가는 페르시아에 항복하고 페르시아의 편으로 붙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몇몇 그리스 동맹국은 서로 반목을 그치고 페르시아의 위협 앞에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한편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재침공을 위해 준비에 나섰으나 때마침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때문에 준비가 늦어졌고 기원전 485년 '다리우스 1세'는 제1차 그리스 원정의 실패를 설욕하기도 전에 숨졌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제위에 올랐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고 대략 4년에 걸친 전쟁준비 이후 제2차 그리스 공략에 나섰다.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기원전 480년 봄. '크세르크세스'가 친히 이끄는 페르시아의 대군은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군은 '헬레스폰투스'를 건너 '트라키아'의 '도리스코스'에 집결해 그해 7월 마케도니아의 '테르메(지금의 테살로니키)'에 병력을 집결했다. 원정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은 보병만 170만명, 기병 8만명, 그리스의 페르시아 동맹군 32만명등 총 260만명이상의 규모라고 적고 있으나 후대의 사가들은 800,000명이라고 적었고 현대의 연구자들은 90,000~300,000으로 본다. 그기에 그들의 시종과 군량 보급에 종사하는 비전투원 수백만을 더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지휘하에 '세피아스 '곶과 '테르모필리아'에 도착한 총병력은 528만 3225명에 달한다고 하니 실로 가공할 숫자다.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군함을 연결하여 두개의 다리를 만들라고 명령하는데 폭풍으로 유실되었으나 다시 지어졌고 페르시아의 대군이 모두 건너는데 7일이 걸렸다고 한다. 페르시아 군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지나 남하했고 해군도 해안선을 따라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남하했다. 그리스 측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편성했고 각각 해군과 육군을 지휘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관인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넓은 '테살리아'의 평원에서의 전투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최적의 방어선을 중부지방의 좁고 험한 산악지역인 아테네 서북쪽 135킬로미터 지점의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방어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와 그리스 각지에서 모인 4,000명의 병사가 투입되었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해군은 '에우보이아' 곶에서 페르시아군을 맞서기로 결정했다.

 

 

페르시아의 해군은 폭풍을 만나 손실을 입었고 '아트레미시움'에서 그리스 해군에게 저지 당했고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라이'에서 스파르타 300명의 병사과 그리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페르시아 대군은 협곡에서 2일동안 저지당하면서 많은 손실을 보았는데 3일째 되는 날, 그리스의 한 배신자가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페르시아군에게 알려주어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라이 '정면돌파를 피하고 우회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의 300명을 제외한 다른 그리스인들을 철수시키고 그 곳에서 300명의 전사들과 함께 전원이 전사하였다.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제3차 페르시아 전쟁중인 기원전 480년 9월 23일. 테르모필레 ·아르테미시온의 방위선을 돌파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BC 485∼BC 465) 대군은 파죽지세로 아티카를 점령하였으나 살라미스의 그리스군 공격이 여의치 않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때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노약자와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거짓 정보를 보내어 페르시아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하여 11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테르모필라이'에서 승리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본토를 유린하며 기원전 480년 9월경 아테네에 입성하는데 아테네는 이미 소개되어 비어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아무런 저항없이 아테네에 입성하여 도시를 불태웠다.'아크로폴리스'의 모든 신전도 불태워졌다. 전쟁의 승패는 '살라미스' 해전으로 넘어갔다. 이것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으로 수도를 방어하기 보다는 비워두고 시민과 병력을 '살라미스' 섬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리스 함대가 380척인데 비해 페르시아 함대는 1400척 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에 속아 페르시아 함대는 전면 공격을 펼치며 해협 북쪽으로 사라진 그리스군을 추격하기 위하여 해협의 가장 좁은 구역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그리스 해군이 돌연 방향을 바꾸어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 페르시아의 해군의 큰 군선은 좁은 '살라미스'의 바다에서 기동력을 잃었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그리스 갤리선에의해 괴멸당하여 퇴각해야했다. '크세르크세스'는 마침 '칼키디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그리스에서 고립되는 것을 우려하여 대부분의 병사를 소아시아로 퇴각시키고 그의 휘하 장수 '마드로니우스'를 그리스 본토에 남겨주었다.

 
'플라타이아' 전투

이듬해인 기원전 479년 봄, '마드로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레산드로스 1세를 보내어 그리스와 협정을 맺으려 하였으나 그리스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아테네는 이번에도 시가지를 비우고 해상에서 승부를 거는 작전을 세웠고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왕이 지휘하는 5만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테베' 근처의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혼전이었지만 스파르타와 '테게아'군의 용맹으로 대세는 그리스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마드로니우스'는 전사하고 페르시아군은 퇴각했다. 페르시아군은 퇴각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의 매복에 걸려 대부분이 소아시아로 건너가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바다쪽에서 해군도 '플라타이아' 전투가 벌어진 날 페르시아의 해군을 섬멸했다.

 

같은해 그리스는 반격에 나섰는데 아테네의 해군을 주축으로한 그리스 연합함대는 에게해를 지나 소아시아로 침공했고 그리스계 도시국가를 해방시켰다. 이후 30년간 크고 작은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에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테네의 주도로 새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은 '아나톨리아' 해안에 있는 '이오니아'계 도시국가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계속 공세를 펼쳤는데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 기원전 448년경에는 마침내 아테네와 그 동맹국 및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압도적인 대군을 거느린 페르시아가 왜 참패했을 까?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째, 전의 즉 싸우고자 하는 의지인 사기의 차이다. 그리스 측에서는 조국을 방위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반면 페르시아 측에서는 그 같은 정당성이 없었다.

 

둘째, 군대의 장비와 전술의 차이다. 그리스의 중보병과 페르시아 보병 장비의 차이는 전쟁의 승패를 가름했다. 페르시아군은 펠트 재질로 만든 모자,소매가 있는 셔츠와 철사줄로 엮은 갑옷 ,바지차림에 버들가지로 짠 방패와 짧은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대신 궁수와 기마병은 우수한 편이었다. 그에 비하여 그리스군 중보병은 청동 투구와 청동흉갑,아대 등의 갑주를 두르고 왼손에는 커다란 원형 방패, 오른손에는 2.5미터 길이의 창을들고 잇었다. 방패는 떡갈나무로 만들어 외피에 청동판을 덧댓기 때문에 무게는 10킬로그램까지나 되어 어깨에 매는 끈으로 고정했다. 갑주는 무게가 20킬로그램 정도였으며 투구는 시야기 좁은 데다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중보병은 먼 거리를 이동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으며 기동력도 떨어졌다. 그러나 8열 종대로 대형을 짠 후 앞줄 3열이 창을 앞으로 겨누고 대형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정면으로 돌진하는 전투대형은 실로 엄청난 공격력을 발휘했다.

 

다음은 해군이다. 그리스 해군은 노를 젓는 사람이 170명으로 이루어진 3단 도선으로 모두 통일되었고, 뱃머리에 달린 충각으로 적의 배를 들이받느는 전법을 쓰고 있었다.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인 페니키아 배는 배가 크고 이동속도도 빨랐으나 견고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리스는 지형적인 잇점을 십분 발휘했다. 지형을 숙지하고 있었으며 유리하게 이용했다. 그 최대 성과가 '살라미스' 해전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측에는 '밀티아데스'나 '테미그토클레스' 같은 영웅이 있었고, 그들의 과감한 결단이 전투를 승리하는데 결정적이 기여를 했다.

 

셋째, 과연 페르시아의 패전이 역사적으로 진실인가 하는 점이다. 거의 모든 자료가 역사가 '헤르도토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는 그리스의 승리를 전하기 위해서 역사를 �다고 할 수 있다. 기록의 공정성이 결여되었고 페르시아 측의 전력을 과장하여 전하고 있으며 그리스 측의 전과는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페르시아군의 숫자가 528만이라고 주장하는 '헤르도토스'의 기록은 현재로 치자면 그 병력수는 5만 미만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물론 페르시아는 병력 동원 능력이 역사적으로 그후 로마와의 전쟁에서도 항상 대군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은 것은 사실이나 한 사람의 역사가의 편중된 기록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치부하기에는 재해석해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해전을 끝으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해 페르시아로 망명했다. 그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궁전에서 여생을 마쳤다. 페르시아 측의 관대함과 여유를 느끼게 하는 일화다. 그러나 그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이라는 최대의 비극이 페르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