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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과 로마의 침공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과 로마의 침공

 

 
             ▲ 시저와 안토니오를 양 옆에 끼고 있는 클레오파트라 
             

 

제국의 분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자는 이복형 '아리다이오스', 그리고 '박트리아' 왕의 딸 '록사나'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에 태어난 '알렉산드로스 4세'였다. 그러나 '아리다이오스'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었으며 '알렉산드로스 4세'는 갓난아이였다. 두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군인들 사이에 벌어진 후계자 다툼에서 살해된다. 기원전 309년 알렉산드로스 왕가의 대는 끊어졌다.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이 지배한 고대 페르시아 대제국

                            ( BC 550-330).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사후에

                             마케도니아 왕국, 서아시아 지역의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 3개 지역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본국의 마케도니아는 무장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기원전 279년, '안티고노스 2세 고나스타'가 등장하면서 겨우 안정됐다. 이에 앞서 시리아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임명한 바빌론 총독 '셀레우코스'가 지배체제를 계승, 셀레스코스 왕조(기원전 312-63년)를 일으켰고,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총독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마고우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30년)를 일으켰다.이른바 헬레니즘 3대 왕국의 성립이다.

 

그중 마케도니아 왕국은 기원전 214년-167년 사이 신흥 강국이던 로마로부터 세 차례의 침공을 당하였고, 그 후에 일으킨 저항운동마저 진압되면서 기원전 147년에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했다. 그 당시 신흥 강국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지중해의 최강자로 떠오른다. 로마는 그후 동방의 오리엔트 쪽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처음에는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지배했으나 점차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지방 정권들이 분리되고 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소왕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 왕국은 수많은 도시를 건설해 이른바 그리스 문화의 동방 전파에 이바지했다.

 

이집트 지역의 '프톨레마이오' 왕조는 초기에는 안정적인 통치를 하였으나, 마케도니아식 중앙집권식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지배층인 관료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을 기용했다. 또 제정 일치의 전통을 유지하여 왕권을 신격화했으며 융성하던 시기에는 '키프로스','팔레스타인','시리아' 남부까지 판도를 넓혔으나 국력이 쇠퇴하면서 영토는 점차 줄어들어 이집트 본토만 남게 되었다. 로마가 지중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진출하기 시작할 즈음에는 이집트와 '유다' 왕국만이 독립적인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다' 왕국에 비해 이집트는 지중해에서 으뜸가는 대국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이름을 명명하여 세운 '알렉산드리아' 항구 도시는 지중해 일대에서 최대의 곡물 수출항이며 찬란히 빛나는 문화와 최대의 영화를 구가하는 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는 '나일' 델타 서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도시로, 북쪽과 서쪽은 지중해로, 남쪽은 '마레오티스' 호수로, 동쪽은 '나일' 강 하구로 둘러싸여 있으며 둘레 15킬로미터 길이의 2중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도로는 바둑판 같이 질서 정연하게 구획되어 있었으며 왕궁은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도시 전체의 5분지 1을 차지하고 있었다. 왕궁 안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비롯한 역대 왕들을 모신 왕릉이 있었고 남쪽의 언덕위에는 신전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정치.경제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 중심지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완성된 연구 시설 <무세이온>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철학.의학.지리학.천문학 등 자연과학부터 인문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망라한 연구가 주로 그리스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도서관에는 50-70만 권에 이르는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니 시로 엄청난 규모였다.

 

이러한 영화를 구가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프톨레마이오스 4세(재위 기원전 221-204년)'가 재위하던 무렵부터 점차 쇠퇴하게 된다. 왕가의 내란, '시리아' 왕국과 전쟁,'로마'의 내정 간섭 등이 원인이었다. 그 무렵 기원전 69년 12월,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로 태어난다. 그녀가 태어나기전 이미 6명의 '클레오파트라'가 있었기 때문에 7세로 불린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 6세'와 언니 '베레니케 4세', 여동생 '아르시노에',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14세'와 함께 자랐다.

 

 

                                               

                                                                  클레오파트라 7세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7세의 운명적 만남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피로 얼룩진 내분 속에서 태어났다. 선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왕가의 내란으로 살해되면서 사촌동생인 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의 '키프로스' 약탈을 허용했고 그로인한 지배층과 백성들의 반발로 한때 로마로, 다시 '에페소스'로 도망쳤다. 그사이 '클레오파트라 6세'가, 또 그 사후에는 '베레니케 4세'가 이집트의 실권을 잡았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간절한 청을 받은 로마의 시리아 총독 '가비니우스'가 이집트로 진군해 '베레니케 4세'와 그녀의 남편 '아르케라스'를 처형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복위할 수가 있었다.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18세의 '클레오파트라 7세'는 남동생인 10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왕위에 오른다. 그당시 이집트 왕족은 형제자매끼리 결혼해 공동통치하는 풍습이 전래되고 있었다.

 

                                         세계 제국을 건설한 로마 군단

 

                       

                                                                  영화 '글래디에이터' 한장면

 

 

  전성기 때의 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부터 영국 북부에 이르렀으며

  전 세계 인구의 25%가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받았다. 자마회전 후 380여년이 지난

 서기 180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마니아와 치른 12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로마 제국의 평화는 마지막 고비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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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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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80년, 게르마니아. 전투를 준비하는 로마 군단병들(Leg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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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의 선도사격으로 전투가 시작된다.

 

 


 

카이사르 등장

당시는 로마 공화정이 끝나갈 무렵으로 로마는 '크라수스','카이사르','폼페이우스' 3명의 삼두체제(1차 삼두정치)가 형성되어 권력 다툼의 와중에 있었다.

 

이중 '폼페이우스'는 스페인 반란을 진압하고 지중해의 해적을 대대적으로 소탕하였으며, 기원전 66-61년에는 동방 원정을 떠나 소아시아 일대를 정복했다. 기원전 64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시리아를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에 비해 '카이사르'는 뒤처져 있었지만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에 취임하여 능변과 활기찬 대인관계로 급속히 세를 불리면서 기원전 58-59년에는 '갈리아'로 원정을 떠나 지금의 독일 지역 '라인' 강 일대까지 '겔트족'을 제압하고 속주로 편입시켰다. 갈리아 정복 기간동안 로마군은 가는 곳 마다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도로망을 건설하였다. 오늘날의 유럽 도시와 도로의 대부분은 그당시 로마군이 건설한 요새와 도로가 발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을 개화시키고 로마에 동화시키는 노력을 경주했는데 율리우스란 이름의 갈리아인들이 많아 생겨났다. 이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성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갈리아인들의 자녀들을 로마로 유학을 보내는 등 로마화시켰다. 8년동안 갈리아를 정벌하면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하 장병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흠모의 장군으로 자리메김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재벌인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파르티아' 원정 중에 적에게 포로로 잡혀 돈을 좋아한다는 그를 적이 은을 끓인 물을 먹여 죽인다. 그래서 크라수스도 중도 탈락하게 된다. 결국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세력 다툼으로 두 사람의 경쟁은 내전으로 확산된다.

 

 

 

                              로마제국의 영토확장

       아래의 그림과 같이 로마제국은 북쪽으로는 영국, 남쪽으로는 이스라엘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218 BC (빨강), 133 BC (분홍), 44 BC (황토), AD 14 (노랑),

                                   after AD 14 (녹색) 로마제국의 최대영토 AD 117 (연녹색)

      

 

당시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중에도 자신의 소식통을 통해 폼페이우스와 로마 원로원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로마의 모든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은 변방에서 오랜 세월 로마 군단과 생사를 같이하며 고생을 하고 있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서 무장을 해제하고 단신으로 로마에 복귀토록 전령을 보냈다. 이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는 더 이상 폼페이우스에게 당하면서 기다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군단과 같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방 당시 로마 국경선인 루비콘 강에 도착한다. 당시 로마 법률에는 모든 로마군 장수는 로마 국경선에 도착하면 부대를 해체하고 전 병력은 단신 개인자격으로 로마에 복귀토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만약 병력을 해체하지 않고 국경선을 건너면 반역죄로 처벌받게 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사위는 던져졌다" 말과 함께 전 군단에게 루비콘 강을 건너도록 지시했다.               

                                

로마로 쾌속으로 진군한 카이사르는 그를 막아서는 폼페이우스 군을 제압하고 로마에 입성하자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버리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편에 붙은 스페인에 주둔중이던 로마 군단을 복속시키고 그리스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폼페이우스 군을 격파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해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를 지지하는 파벌과의 싸움에서 패해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시리아 국경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측근들은 폼페이우스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로마를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 폼페이우스 옛 부하 장수였던 사람으로 하여금 교묘히 살해한다.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폼페이우스의 목과 반지였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 흉상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3일 태어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에서 '브루투스'를 포함한 동료 원로원들에 의해 23군데나 칼에 찔려 암살당하게 된다. '가이우스'는 자신의 이름이고 '율리우스'는 씨족의 이름이며 '카이사르'는 성이다. '율리우스'의 가문은 귀족에 속해 있었으나 특별히 유복하지도 않았으며 걸출한 명문가도 아니었다. 변변한 배경이 없던 카이사르가 관료의 길로 들어서자 신관직,재무관,안찰관,법무관 등 집정관을 향해 착실히 경력을 쌓았다. 그의 용모는 절대 미남은 아니었다고 한다. 볼에 깊은 주름이 패이고 40대 후반부터 점점 머리가 빠져 이마가 넓어 정수리의 머리털로 가리곤 하였다. 그는 큰 키에 균형잡힌 몸매와 흰 피부, 입이 크고 눈은 빛나며 건강했다. 유머와 입담이 좋았고 체면을 중시하고 세간의 이목에 민감해 정성스레 머리와 수염을 다듬었다. 그는 대머리를 고민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호색을 탐하고 방탕했다. 그래서 돈이 궁하여 당시 막대한 부호였던 '크라수스'에게 많은 돈을 빌리곤 하였다.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은 당시 원로원의원 3분지 1은 아내를 카이사르에게 빼았겼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을 정도다. 돈을 빌리던 삼두정치의 '크라수스'의 아내 '테르투라', '폼페이우스'의 아내 '무카이', '폼페이우스' 부관 '가비니우스'의 아내 '로라'등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항상 돈이 궁하였는데, 여성들에게 고가의 선물을 자주했으며 관직을 올라가는대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그는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기원전 61년 속주인 스페인 총독으로 부임할시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을 쳤는데 '크라수스'에게 빚보증을 서게 하여 겨우 사태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그는 스페인 총독을 마치고 나서야 겨우 빚을 청산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와 만남

다시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로 돌아가자.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알렉산드리아'로 쳐들어온 카이사르를 만나려 했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어둠을 타고 조각배를 타고 왕궁에 잠입한 뒤 하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담요로 싸서 밧줄로 묶어 짐짝처럼 들고 들어가게 하였다.

 


▲장 레옹 작 . 양탄자를 벗기자 반라의 클레오파트라가 나타났다.

 

 

담요를 풀어헤치며 카이사르 앞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21세, 카이사르는 53세였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카이사르가 고혹적인 자태로 나타난 '클레오파트라'의 매혹적인 모습에 감탄한 그는 금방 그녀의 미모와 지성에 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간청을 받아들여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화해시키고 앙위를 공유토록 권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추종자들이 카이사르의 개입에 반발해 결국 싸움이 벌어지는데 처음에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적은 규모였으므로 고전하다가 소아시아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자 싸움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 싸움 와중에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에 타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또다른 동생인 11세의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공동 통치를 선언하고 실제는 그녀의 독주 시대가 전개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절세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교양과 메너가 뛰어나고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넘치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사로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녀가 원하는대로 남자들을 조종하는 언변과 모든 행동이 남자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녀는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았으나 카이사르는 그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던 카이사르가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카이사르는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인지 정확하게 알지를 못하였으며 자신의 아들이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 역사를 바꾼 여자이며 로마 역사가 바뀌면서 세계의 역사까지도 바꿔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모든 여성의 대명사로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아마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인정받는 것은 여자로써 남자에게 몸을 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전형적인 요부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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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를 앞세우고 진격해 들어가는 로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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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군단이  게르만족들과 전투 장면

 

 

'카이사르'의 죽음

카이사르는 반년간 이집트에 머물면서 클레오파트라와 나일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며 사랑놀음에 빠져 있었다. 속주 시찰 및 대국인 이집트의 민정을 두루 살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의문이다. 그는 기원전 46년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불러들여 그의 별장에서 지내도록 했는데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한 해 전 1월에 카이사르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일명 카이사리온)'를 함께 대리고 갔다. 이에 로마인들은 심하게 반발했는데 자신들의 아내를 건드린 카이사르가 이제는 속주의 여자 왕과 태어난 자식까지 대리고 나타난 클레오파트라를 경멸하면서 카이사르로부터 은혜를 받았던 옛 동료 정객들까지도 등을 돌리는 등 암살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한편 실권을 잡은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제거함으로써 독재관이 된다. 기원전 46년에는 원로원에 의해 독재관 임기가 10년으로 연장되고, 기원전 44년 2월에는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제 카이사르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전 로마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공화정의 존속에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생겨났고 카이사르의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가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게 된다. 이들은 거의 60여 명에 이르렀는데 각자의 의도하는 목적은 달랐기에 연대감은 부족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것이 공화정을 되살리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카이사르 암살을 시도하게 된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카이사르에게 불길한 징조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점술가가 카이사르에게 15일을 조심하라고 진언했다. 카이사르 꾼 꿈에는 월계수를 물고 날아온 굴뚝새가 다른 새에게 잡아 먹히는 꿈을 꾸고 그의 아내 칼푸프니아가 지붕의 대들보가 무너져 카이사르가 죽는 꿈도 꾸었다고 한다.

 

운명의 날 아침,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들어서 자리에 앉자 공모자들은 카이사르를 둘러쌌다.그중 한 사람이 카이사르에게 무언가 진언할 것 같이 다가가 그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이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카이사르를 향해 칼끝이 겨누어졌다. 카이사르는 23군데나 칼에 찔리면서 그 무리에 낀 사람 중 그의 애인이며 그녀의 아들인 '브루투스'를 보이자 그를 바라보며 "브루투스 너마저도!" 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브루투스'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였으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도 폼페이우스 편에 가담했었다. 생전에 카이사르는 이런 '브루투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면서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었던 것이다.

 

                            

                                                              카이사르 암살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는 대혼란에 빠졌다. 공모자들이 예상했던 공화정 지지자들의 찬성과 환호성은 고사하고 이미 카이사르 신화에 빠져있던 로마 시민들은 그들을 반역자로 몰았다. 그리하여 이후 14년간 로마는 내란을 겪으면서 혼란을 거듭했다.

 

카이사르가 죽자 유언장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유언장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서로 매년 새로 쓰여졌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그가 암살되기 1년 전(기원전 45년) 9월 15일에 작성된 것으로 유언장 내용에는 그의 여동생의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재산의 4분지 3을 상속하고, 카이사르 누나의 자녀인 조카 2명에게 나머지 4분지 1을 절반씩 나누도록 명시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카이사르의 대를 잇게 된다. 또 '티베리스' 강가의 저택을 공원으로 꾸미고, 시민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유언을 전해 들은 로마 시민들은 경악했다. 당시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청년으로 시민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면 그에게 돌아갈 재산이 남지 않게 되는 셈이었다. 다시말해 이 유언은 유산 상속이 아닌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대를 잇는다는 이른바 정치적인 유언이었다. 이에 가장 배신감을 느낀 사람은 바로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아 대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였다. 또 한사람은 카이사르의 오랜 부하 장군인 '안토니우스'였다. '안토니우스'는 당연히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유언장은 그것이 아니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음모자들을 잡아들이도록 했다. 그러자 사태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자 음모자들은 국외로 도망쳤다.

 

카이사르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유일한 딸이었던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에게 시집을 보냈으며 이 딸의 죽음으로 폼페이우스와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왜 후계자로 유언장에 남기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추정해보건데 카이사르에게는 클레오파트라가 사적인 감정에 불과했으며 정사로 인한 불장난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항상 속주를 포함한 로마 제국의 장래가 있었고, 거기에는 사적인 감정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런점이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차이점이 아니었을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던 역전의 용사 '안토니우스'는 곧바로 애송이 '옥타비아누스'와 충돌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의해 후계자로 부각된 '옥타비아누스'가 두각을 나타내자 두 사람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총독 '레피두스'를 자기편으로 끌여들이고 '옥타비아누스'와 타협하면서 5년간 2차 삼두정치가 성립된다. 이 삼두정치는 기원전 37년에 다시 5년간 연장됐다.

 

그동안 공화주의자에 대한 탄압과국외로 도망친 카이사르 공모자들에 대한 척결이 이루어졌다. 주모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군에게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본토를 포함한 서방,'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각각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한편 소아시아로 원정을 떠난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1년 '타르수스'로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냈다.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유혹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집트의 운명을 '안토니우스'에게 걸었던 것이다.

 

황금으로 치장한 배를타고 비색의 돛과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배위에는 하프와 피리소리가 흘러나오고 황금으로 장식한 천막과 그 아래 마치 신화속의 여신처럼 꾸미고 앉아 있는 클레오파트라를 보는 순간 '안토니우스'는 단숨에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부름을 거절하고 자신의 배로 오기를 청했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곧바로 클레오파트라를 �아갔다. 그곳은 수많은 등불과 호화로운 장식과 치장으로 '안토니우스'를 놀라게 하였는데 그는 바로 황홀경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이당시 '안토니우스'는 42세, 클레오파트라는 28세였다. 쾌활하고 소탈한 성격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었다.그 후 수개월간 두 사람은 정치를 떠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랑에 빠져 지냈다. 안토니우스가 떠난 후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쌍둥이를 낳았다.

 

기원전 40년 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그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하게 된다. 기원전 37년 가을, 클레오파트라를 잊지못한 '안토니우스'는 '안티오카'로 떠나 그곳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들여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키레네'와 '키프로스'를 이집트에 반환하고 '페니키아','시리아','실리시아','크레타' 등 로마의 영토를 원로원의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클레오파트라에게 넘겨주었다. '안토니우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원전 34년 동방 제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클레오파트라를 "모든 왕의 여왕,왕 중의 여왕"으로 불렀다.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몰고 타르수스 강에서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클레오파트라. (엘마 테디마 작 )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분노하며 경악했다. 모두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창녀에게 빠져 정신이 돌았다고 수군거렸다.'옥타비아누스'는 시민들과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의 막이 올랐다. '악티움'은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반도 북단의 '파트라스' 북쪽 '암브라키아' 만의 출구에 해당한다. '안토니우스'군은 보병 10만,기병 1만 2000,군선 500척이었으며 '옥타비아누스'군은 보병 8만,기병 1만 2000,군선 250척이었다고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이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직접 참전하여 지휘하였는데 전투간 병사들의 참상을 눈으로는 직접 처음보는지라 그만 싸움을 중지하고 자신이 지휘하던 이집트 선단을 대리고 전장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안토니우스'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이집트로 도망치게 된다. 육지의 부대는 해전 참패소식을 듣고는 모두 옥타비아누스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안토니우스의 패전원인은, �째, 클레오파트라 요청으로 육상전을 포기하고 해상전을 선택한 것과, 둘째, 안토니우스가 배의 숫자는 많았으나 승무원의 조련이 제대로 되지 않아 기동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으며 셋째, 전투 경험이 없는 여자가 직접 해상전투를 지휘하다가 차마 눈으로 보기 힘든 참상을 목격하자 임의대로 60척의 이집트 함대를 끌고 전장을 이탈해 버렸다는 점이다.

 

'악티움 해전'의 승리로 대세는 '옥타비아누스'쪽으로 돌아섰다. 이듬해 8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추격하여 '안토니우스'군을 격파하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자 스스로 자결을 하려했으나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에 피를 흘리면서 궁중으로 �아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옆에서 과다출혈로 숨을 거둔다. 클레오파트라도 뒤이어 도착한 '옥타비아누스'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안토니우스 무덤 곁에서 죽기로 결심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간청하여 신전속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숨어서 스스로 독사에 물려 목숨을 끓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39세의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역사를 뒤흔든 뒤에 생을 마감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250년간이나 이어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서초동-